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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60화 (60/120)

60화

눈 깜빡할 사이에 시야가 변했다.

앤드류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 들어간 래희가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을 때, 두 사람은 인구 밀도가 높은 안전지대 12번가의 한 건물 사이에 도착해 있었다.

어두운 골목 틈으로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맞은편에 청해 길드 건물이 보였다.

“후…….”

길드 건물을 보자 안심이 된 래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가만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앤드류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그제야 래희가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촉감에 놀라 반사적으로 앤드류의 손을 뿌리쳤다.

조금 거칠게 손이 내쳐진 앤드류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런 기색 없이 그는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 자신을 노려보는 래희를 빤히 응시하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줬잖아요. 그러니까 제 부탁 하나쯤 들어줄 수는 없어요?”

물론 먼저 도와 달라고 청한 적은 없지만, 덕분에 무사히 다른 사람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래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용건이 뭔데요?”

알아들을 수 있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로 래희가 간단히 답하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앤드류가 말했다.

“당신이 S급 빵순이 맞죠?”

순간 처음 들어보는 호칭에 멈칫했던 래희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앤드류가 말하는 ‘S급 빵순이’가 자신의 헌터 마켓 닉네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빵, 더 없어요?”

…지금 이 상황에?

래희가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자 앤드류도 민망하기는 했는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한국에 왔는데?”

“…설마.”

그러나 진짜라는 듯이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앤드류에 래희는 황당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정말로?”

“Yes!”

래희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 앤드류는 진짜라는 듯이 빠른 속도로 말하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일주일 동안 기다렸는데 헌터 마켓이 너무 잠잠해서 불안한 나머지 S급 빵순이 당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한국에 왔다니까?”

“왜?”

“왜냐니!”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래희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앤드류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치며 말했다.

“당연히 포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빵 때문이지!”

“…S급 헌터라면 그 정도 효과가 있는 포션이나 아이템은 구하기 쉬울 텐데?”

그러나 래희의 대답을 듣자마자 앤드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포션은 더럽게 맛없으니까!”

앤드류의 목소리가 조용한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막다른 골목 안에서 큰소리가 나자 놀랐는지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대며 그들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래희는 슬쩍 눈을 굴려 밖의 상황을 확인한 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미국에서 여기까지?”

“Yes!”

어린이 입맛. 단것만 먹는 편식쟁이 앤드류 발렌타인이 그 말이 정답이라는 듯이 펄쩍 뛰며 동의했다.

게이트에서 부상을 당하더라도 회복 포션은 맛없다며 웬만한 부상 정도라면 꿋꿋하게 고통을 참는 걸 선택하는 앤드류에게 있어서 래희의 빵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물론 이번에 올라온 빵은 근력 스탯 증가 효과가 전부였지만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녀의 가게에 판매되는 빵 중에는 체력 회복 효과가 있는 빵도 있다고 들었다.

희망 가득한 앤드류의 표정에도 떨떠름한 반응인 래희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건데?”

“헌터 마켓에 올리면 못 구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나한테 따로 팔아 줘요. 돈은 두 배로 지불할게.”

‘음…….’

이제 래희에게 있어서 돈은 그렇게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헌터 마켓에서 순식간에 벌어들인 수억 원 대의 현금에다가 그동안 베이커리를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돈까지.

일개미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소시민 생활은 이별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저렇게 간절하게 저를 바라보는 남자가 방금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줬던 걸 생각하면, 그냥 무시하기에는 래희의 ‘상냥한’ 양심이 그녀의 가슴 한편을 쿡쿡 찔러 오고 있었다.

“알았어.”

빵 몇 개 정도야, 따로 쥐여 주는 건 문제가 없으니까.

하지만 당장 그녀의 인벤토리에는 남아 있는 여분의 빵 같은 건 전혀 없었으므로 그가 원하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가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선, 길드로 가자.’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길드에 가입했던 게 아니었나. 래희는 가게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찾아오는 바이어들을 길드 측에 모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래희가 두 손을 맞잡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앤드류를 한번 올려다본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따라와.”

그에 앤드류는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딱히 취향이 아니라 끌리지 않았던 잘생긴 금발 머리 외국인의 얼굴 위로, 여태껏 보여 준 가식이 아닌 진짜 미소가 떠오르자 어두운 골목길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그를 따라 저도 모르게 웃었던 래희가 고개를 돌리며 골목 밖을 나가던 그때, 갑작스럽게 뒤에서 앤드류가 그녀의 외투를 살짝 붙잡았다.

“저기…….”

래희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앤드류를 돌아보자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이 그가 그녀의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혹시, 초콜릿 맛은 없어? 초콜릿 맛이면 더 좋을 것 같아.”

가게 근처에서 보여 줬던 능글맞음은 어디로 가고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래희는 황당해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래희는 가게에 출근하기 전 아침을 챙겨 먹기 위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의 아침 당번은 류정우였는데 의외로 그가 요리에 소질이 있어 그동안 그가 차려 준 아침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탁 위로 가지런히 놓인 식기를 래희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이돌 시절 숙소에서 요리 담당이었다더니…….

괜히 아련해지는 덕질의 추억에 래희는 멍하니 식탁 위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류정우가 장갑을 낀 채, 양손으로 냄비를 들고 와서는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까 전부터 코를 찌르는 냄새를 보아하니 오늘의 아침 메뉴는 된장찌개인 것 같았다.

흑백으로 꾸며진 온기 없는 오피스텔에서 스테이크나 썰고 살 것만 같은 냉미남이 귀여운 앞치마를 입고 된장찌개를 끓이다니…….

어쩐지 그동안 래희의 마음 한구석에 마저 남아 있던 류정우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런 그녀의 혼란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류정우는 분홍색 앞치마를 벗고, 손에 꼈던 분홍색 장갑을 벗어 주방에 가져다 뒀다. 그리고 그는 앞접시와 국자를 가져와서 냄비 안에 든 된장찌개를 따로 국그릇에 덜어 주며 테이블을 세팅했다.

래희는 저도 모르게 국자를 쥔 류정우의 섬섬옥수 같은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고 정신 차리라고 조언합니다.]

류정우의 손을 보며 넋 놓고 있던 래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테이블 세팅이 끝났는지 류정우는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조용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 잘 먹겠습니다.”

괜히 그의 손을 멍하니 바라본 사실을 들킨 것은 아닌지 민망해진 래희가 별다른 대꾸 없이 숟가락을 들어 윤기 나는 쌀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래, 이 맛이지.’

한국인은 밥심이다.

그동안 빵집을 운영한다고 매일 샌드위치 같은 것만 먹었는데 이렇게 남이 차려 준 한식을 먹으니 힘이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래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 밥을 먹자 류정우는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저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래희가 무의식적으로 한식을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기에, 자신이 아침을 차리는 날이면 꼭 한식으로 메뉴를 정해서 요리를 했다.

양식은 잘 만들면서 의외로 한식에는 꽝손인 래희는 그가 차려 준 밥에 매번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며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런 래희의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식탁 뒤로 켜져 있는 TV 속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얼마 전 한국에 비공식적으로 방문했던 미국의 간판스타 S급 헌터 앤드류 발렌타인이 인천 공항에서 출국하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입국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기자들 앞에…….

앤드류 발렌타인?

래희는 뉴스 화면 속 공항 출국장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잘생긴 금발의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쇼맨십을 보아하니 한두 번 카메라 세례를 받아 보는 게 아닌 듯했다.

TV 화면 속 앤드류 발렌타인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래희의 눈에 포착되었다.

‘아니, 저걸 저렇게 대놓고…….’

그건 바로 래희가 만들어 준 빵을 담은 베이커리 종이 가방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인벤토리에 넣어 가라고 말하려던 걸 깜빡했더니 저런 불상사가 일어나 버렸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래희의 빵집은 영업을 중단한 상태인데, 앤드류 발렌타인이 저렇게 상표가 보이는 가방을 기자들 앞에서 내보이면 곤란하지 않은가.

‘아냐, 사람들은 바이럴이나 협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래희가 밥을 다 먹었음에도 멍하니 TV만 보고 앉아 있자 류정우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말했다.

“래희 씨, 출근해야 할 시간이에요.”

아, 7시 30분. 고개를 돌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보자, 가게 오픈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래희보다 비교적 아침 시간대가 여유로운 류정우가 설거지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제가 치울 테니 이만 가 보세요.”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를 하는 류정우의 어깨 위로 리프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래희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에 류정우도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꼭 애 키우는 부부 같네.

‘헐.’

갑작스럽게 든 생각에 놀라 래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부부라니 미친 건가.

[성좌 ‘운명의 길잡이’ 가 동의합니다.]

류정우는 어서 안 가고 뭐 하냐는 듯이 그녀를 보며 손짓했다.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저녁에 봐요.”

결국, 래희는 벌써 50분을 가리키는 시계에 생각을 더 이어 가지 않고 가게로 나섰다. 다녀오겠다는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그의 인사를 받을 새도 없이 급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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