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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59화 (59/120)

59화

그도 그럴 것이 ‘어린이 세계수’의 비위를 겨우겨우 맞춰서 드디어 평화를 얻어 냈기에 이 평화를 허무하게 깨트릴 수는 없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원래 세계수는 다 저렇게 지랄 맞은 생명체라고 중얼거립니다.]

한 단계 성장할 때마다 능력을 각성한다던 세계수는 정말 말 그대로 ‘어린이 세계수’가 되자마자 새로운 능력을 개화했다.

그건 바로 ‘의사소통’.

어떤 SF 영화 속에 나오는 나무 인간처럼 팔다리가 생긴 작은 인형 크기의 세계수는 ‘어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답게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고를 쳐대니 쉴 틈이 없었다.

궁금한 건 어찌나 많은지 이리저리 쏘다니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다쳐서 퀘스트에 실패할까 두려웠던 래희와 류정우는 어쩔 줄 모르고 어린 세계수를 쫓아다녔다.

놀 만큼 뛰어놀고 겨우 잠이 든 세계수를 자신의 화분 위에 올려 둔 두 사람은 몸과 마음 모두 지친 상태 그대로 소파에 함께 널브러지고야 말았다.

래희는 허탈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 드러누워 있다가 문득 그녀가 다리를 베고 누운 류정우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타이밍이 정확하게도 류정우도 동시에 그녀의 얼굴을 내려봤다.

“하…….”

말도 안 되게 웃긴 이 상황에 두 사람은 허탈한 표정과 함께 마주 보고 웃었다.

얼마간 서로를 응시하다 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쟤는… 다음 성장이 언제죠?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어요…….”

안 그래도 헌터 마켓에 등록된 빵 때문에 바깥세상은 난리가 나 있었는데 이렇게 집에서 세계수 하나 키우느라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깨어나는 것도 금방일 거예요.”

조용히 래희의 불만을 듣고 있던 류정우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제가… 사무실에 데리고 가 보죠.”

“괜찮겠어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그건…….”

그때, 곰순이가 작은 몸을 이끌고 소파 위로 꼬물꼬물 기어올라 왔다. 곰순이도 같이 놀자며 저를 계속해서 쫓아다녔던 ‘어린이 세계수’에 지쳤는지 한숨을 크게 쉬며 래희의 어깨 위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순간 작은 곰 인형의 모습을 한 곰순이의 얼굴 위로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한 희우의 얼굴이 겹쳐 보인 류정우는, 저도 모르게 곰순이를 들어 올리고선 반대편 소파 위로 옮겨 버렸다.

“래희 씨, 가게 일이 더 시급한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류정우가 반항하는 듯한 곰순이의 표정을 무시하며 아까 하려던 말을 래희에게 마저했다.

“아……!”

순간 류정우의 말에 잊고 있던 가게 일이 떠올라 래희는 짜증이 솟구쳤다.

‘아니, 앤드류라는 헌터는 빵을 샀으면 얌전히 먹기나 할 것이지 왜 인증샷을 올려서는!’

물론 의미 없는 분풀이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고서 허공을 향해 소리 없이 아우성치자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 류정우가 중요한 사실을 깜빡 잊었던 사람처럼 조금은 놀란 목소리로 래희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세계수 이름 지어 줘야 하지 않았나요?”

“아…….”

잠시 잊고 있었다. 분명 세계수가 어린이로 성장했다는 시스템 알림 창이 나타났을 때, 이름을 정해 달라는 메시지를 본 것도 같았지만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세계수에 놀라 깜빡 잊고 말았다.

“음…….”

래희는 그제야 깊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머리 부분에 잎사귀 하나가 조그맣게 나 있으니까… 떡잎이? 아니면 초록이?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자신이 지어도 그것보다는 나은 이름을 지을 거라며 비웃습니다.]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를 본 척도 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며 입을 열었다.

“정우 씨는 어떤가요?”

“음… 글쎄요, 지금은 저렇게 귀여워 보이긴 해도 자랐을 때를 생각하면… 우드는 어떤가요?”

류정우는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한지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래희의 눈빛을 슬며시 피했다.

[상좌 ‘운명의 길잡이’가 쌍으로 작명 센스가 덜떨어진다며 한숨을 쉽니다.]

“아…….”

생각보다 더 별로인 류정우의 작명 솜씨에 놀란 래희가 떨떠름한 표정을 가리며 누워 있던 자리에서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좀 무난한 이름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나마 기대했던 류정우의 제안이 자신이 지은 이름보다 더 별로니 참고조차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냥 제가 지을게요. 그루…가 아니라 리프…는 어때요?”

래희의 말이 끝나자 그것보다 더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류정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곰순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세계수’의 이름이 ‘리프’로 지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또 무슨 조건인데?’

세계수의 이름을 입력한 뒤 떠오른 시스템 알림에 래희는 갑작스럽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조건이라니. 왠지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은 기분에 래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공동 서브 퀘스트 ‘세계수의 성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XX…….’

래희가 허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는 사이, 공동 퀘스트의 또 다른 주인공 류정우 또한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드디어 그동안 래희가 고통스러워하며 성좌와 시스템 욕을 하는 이유를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 * *

세계수 ‘리프’가 어린이로 성장한 지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오전, 류정우가 리프와 함께 사무실로 가는 것을 배웅한 래희는 우선 가게 앞을 확인하러 출근했다.

다행히 그동안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다던 외국의 기자들이나 바이어들이 보이지 않았다.

‘휴… 사람이 모여 있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당분간 오프라인 영업을 중단한다 해도 퀘스트 때문에 가게에 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가게 주방에 걸린 버프만이 빵을 대량 생산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당장 뭐부터 해야 하는 거지?”

래희는 주방 한편에 배치된 ‘류정우 전용’ 의자에 앉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 [퀘스트] 헌터 마켓에서 빵 판매하기.

2. [서브 퀘스트] 세계수 성장.

3. 야미베어 베이커리 관련 이슈 대처하기.

“아! 짜증 나!”

아니, 사람이 쉴 틈을 줘야 할 것 아닌가. 적당히 일하고 많이 벌고자 했던 자신의 꿈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짜증 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래희는 다시 화를 가라앉히고 우선순위부터 차근차근해 나가기로 했다.

세계수 성장 퀘스트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지만 헌터 마켓과 그것 때문에 처한 지금 상황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여태껏 해 왔던 대로 하면 되겠지.’

가게 운영은 평소 해 왔던 것처럼 온라인 예약제로 해나가면 손님이 많아진다 한들 별 문제가 없을 거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기자들은 자신의 소속이 된 청해 길드에 맡기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고 온·오프라인 제품 차별화를 위해 헌터 마켓에 내놓을 제품은 자신의 가게에서 판매하지 않는 빵을 위주로 판매를 할 계획이었다.

“…뭐, 어떻게든 굴러가게 될 테니까.”

사람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래희는 복잡한 생각을 그만두고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했다.

차분하게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자 상황이 해결되는 것 같은 래희가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오지 않아 먼지가 쌓인 가게 안을 청소하기 위해 청소 도구를 들고 스킬 ‘쓱싹쓱싹’으로 먼지들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숙련도가 차올라 벌써 A급이 된 스킬은 이전보다도 더 섬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은 가게 영업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가게의 불을 끄고 류정우의 사무실이 있는 청해 길드로 출발하려던 때였다. 가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하려 했으나 결국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마주칠 게 뻔했으므로 래희는 가게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가게 영업을 하지 않아요.”

“아, 여기 사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영어?

예상치 못한 외국어에 래희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찰랑거리는 금발에 벽안의 외국인 미남이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앤드류 발렌타인?”

래희는 단번에 가게를 방문한 남자를 알아봤다. 절대 못 알아볼 수 없는 외모의 남자는 바로 미국의 인기 스타 S급 전투계 헌터 ‘앤드류 발렌타인’이었다.

아, 내가 저 XX가 올린 게시물 때문에…….

잘생기긴 했지만,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화려한 얼굴 공격에 굴하지 않은 래희는 속으로 그의 욕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앤드류는 당연히 잘생긴 자신의 미모가 먹힐 거라는 자신감에 래희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Apple… 콤수니팡?”

래희가 헌터 마켓에 팔았던 빵 이름을 어눌한 한국어로 발음하며 말했다.

“그거 지금 안 팔아요.”

하지만 그런 앤드류의 눈웃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래희는 단호하게 한국어로 답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역시나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래희는 그가 알아듣든 말든 개의치 않고 등을 돌려 가게 문을 잠그기 위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야미베어 베이커리 사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래희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한 무리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을 보아하니 저들이 바로 류정우가 자신에게 말해 주었던 해외 바이어들인 듯했다.

“사장님!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아뇨! 거절할게요!”

급하게 열쇠를 돌려 문을 잠근 래희는 제안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거절하며 반대편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가게 안으로 피해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저들은 계속해서 가게 앞을 지키고 있을 것 같아 곤란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뒷문도 없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에서 발견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여태껏 모은 명성으로 어느새 스탯이 A급에 가까워진 래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열심히 반대편으로 뛰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도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몇몇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고작 특수 효과가 부여된 빵 하나 만드는 것 가지고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래희가 어정쩡한 자세로 어쩔 줄 몰라 제자리에 멈춰 서 있자 누군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앗!”

손을 잡은 남자는 바로 앤드류 발렌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래희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를 잡아당긴 앤드류는 곧바로 옆에 있는 건물 사이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래희를 쫓던 사람들이 두 사람이 들어간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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