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인간일 때만 희우.”
곰 인형일 때는 여전히 곰순이로 불리고 싶다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에 류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희우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
류정우가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자, 희우는 곧바로 내밀어진 손을 자신의 두꺼운 손으로 마주 잡았다.
그러고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두 사람에게 웃어 보였다.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었던 인형일 때와는 달리 건강미 넘치는 미남이 목에 깜찍한 리본을 매단 채로 그들을 향해 웃으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그래서 과연 래희가 아르바이트생을 뽑은 게 잘한 일이었을까?
곰순이, 아니 희우가 사람으로 변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날. 래희는 슬슬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희우라는 이름을 스스로 짓자마자 S급 아르바이트생의 효과가 곰순이에게 부여되었다. 그건 바로 래희가 만들어 둔 반죽으로 레시피를 이용해 래희처럼 특수 효과가 부여된 빵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거였다.
가게의 제품 생산성도 높아지고 빵을 만드는 속도도 이전보다 훨씬 빨라지면서 가게 일이 훨씬 수월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희우가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지 이틀째, 야미베어 베이커리 앞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야, 개 잘생겼다.”
“헌터인가? 아니지 헌터가 왜 빵집 알바를 하겠어.”
“저 몸에 헌터가 아니면 어떻게 일반인이야? 그럼, 사람이 아닌데?”
그래. 원인은 바로 희우였다.
보기 드문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의 등장에 그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한 거였다.
물론 어릴 적 자신의 보호자였던 체자레와 구오빠인 류정우의 얼굴을 보고 자란 래희의 눈에 차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잘생긴 외모에다가 큰 키에 몸까지 좋았다.
모델 같은 피지컬과 외모를 가진 아르바이트생이 ‘분홍색’ 앞치마를 매고 ‘공주님’ 풍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니.
심지어 앞치마 아래에 심플하게 코디한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채 근육질 팔뚝을 보이고, 그 아래로 무난하게 매치한 검은색 슬랙스 조합은 누가 봐도 꽤나 괜찮은 모습이었다.
아르바이트 첫날, 우연히 커뮤니티에 희우의 목격담과 사진이 올라오게 되면서 래희는 전보다도 훨씬 정신없는 빵집 경영 타이쿤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빵을 구매하러 온 척, 슬쩍 희우에게 명함을 내미는 연예 기획사 직원들이 몇인가.
래희는 한숨을 쉬며 남몰래 희우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편하게 좀 살아 보려고 알바를 구한 건데 오히려 더 힘들어지다니…….’
도저히 희우 혼자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래희는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가게에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희우의 S급 아르바이트생 버프 덕분에 가게 경험치는 순식간에 쌓이기 시작해 이틀 만에 무려 가게 레벨이 34까지 4계단이나 단번에 상승했다.
‘흠… 그래도 이 정도 버프면 손님이 더 찾아오는 걸 감수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리고 래희는 자신이 특별히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오르는 경험치에 결국 모든 걸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가게 레벨이 오를수록 그에 비례해서 가게의 매출도 점점 올랐다. 고생은 더 하게 되지만 결국 모두 돈으로 돌아온다는 소리. 래희는 전생에서부터 뼛속 깊이 세뇌된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 * *
이제는 제법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는 계절이 다가왔다.
노랗게 물든 가로수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남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와 훤칠한 키. 검정의 가죽 재킷을 걸친 남자가 단정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입에 물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후…….”
큰 한숨과 함께 하얀 연기를 뱉어 낸 남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의 얼굴일 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글쎄요, 팀장님. 아니, 김주현 씨.”
천영은이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그에 짜증이 난 듯,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발로 짓이기며 끈 김주현이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은 천영은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뭐, 어쩌겠어요? 헌터들한테 실리는 힘 좀 뺏어 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비각성자 물주는 죽었고, 그 결과 우리도 제일 쉽게 갈 수 있던 길을 실패했으니까. 이제는 어렵게 가는 수밖에.”
열심히 저에게 설명하는 천영은을 무시하며 김주현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숨어서 만나는 것보다 대놓고 만나는 게 의심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해 대로변에서 만난 것일 뿐, 이런 대화는 그들을 관찰하는 눈이 없을 때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동하는 김주현을 졸졸 따라오며 제 할 말만 하는 천영은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지만.
“‘우리’는 원래 각성자가 아니라서 각성자의 힘을 쓸수록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이따위 아이템에 의지할 수는 없잖아?”
언제 빼 들고 간 것인지 천영은의 손에는 방금까지 김주현이 피우던 담배의 담뱃갑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담뱃갑을 보란 듯 흔들던 그녀가 다시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힘을 다 잃기 전에, 판세를 이쪽으로 끌어와야지. 이쪽 인간들 몸은 우리랑 상성이 맞지 않아서…….”
뭐, 신관이 쓰는 신성력이랑 마법사처럼 마력을 쓰는 각성자의 몸은 상성이 맞지 않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아, 그리고 우리가 쓰는 게 신성력이 맞기는 한 건가?
어느샌가 반말로 그에게 말을 하던 천영은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생글거리는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아 참. 우리 ‘김주현’ 씨의 전 여자친구가 ‘우리’ 김주현을 의심하는 것 같던데, 일은 어째 잘 해결됐어요?”
요즘, 그 여자친구가 소속되어 있다는 청해 길드에서 우리를 조사하는 느낌이라 이대로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단 말이지.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도발하는 듯한 천영은의 질문에도 김주현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라곤 전혀 없었다. 단지,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
그리고 한숨과 함께 천영은을 한번 내려다본 김주현은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위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괜히 의심해서 짜증 나게 하려던 건 아니고. 원체 성격이 안 좋은 우리 ‘미카엘’ 사제께서 차지하신 몸의 주인과 동화가 많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잊지 마세요. 기억은 기억일 뿐. 사제님은 결코 ‘김주현’이 될 수 없답니다.
“부작용으로 사제일 적 기억이 조금 날아갈 수는 있지만, 본인을 잃어서는 안 되죠.”
실패한 실험체는 폐기해야 하니까.
그건 경고였다.
김주현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천영은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간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을까, 천영은이 먼저 졌다는 듯 눈을 반으로 접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녀께서 머지않아 각 구역 책임자 모두를 불러 모으신다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우리도 지금보다 바빠지겠죠.
제 할 말만 하고서 천영은은 모습을 감췄다. 김주현은 조금 전부터 지끈거리며 아파 오던 머리를 이제야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었다.
얼마나 오래 참았던 건지 그의 옷 안으로는 쌀쌀한 가을인데도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골목길 벽에 기대어 몇 분 정도 서 있었을까 다행히 깨질 듯이 아파 오던 두통은 금방 사라졌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미카엘.’
가끔 그들이 저를 두고 ‘미카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에 대한 기억하나 없이 ‘김주현’으로서 살아온 자아만 가진 그로서는 그 이름이 들려올 때마다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끔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올 때는 ‘미카엘’의 것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문득 눈앞에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내가 진짜 김주현이 맞기는 한 건가?’
6년 전 이맘때, 게이트에서 귀환한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이 ‘김주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확신에 찬 그들을 볼 때면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바람에 바위가 깎이는 것처럼.
김주현은 자기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다짐하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러고는 벽에서 기대어 있던 등을 떼어 내고 곧게 일어섰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할까.’
자신이 미카엘이든 김주현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어쨌든 각성자로서의 힘을 점차 잃어 가는 걸 보아하니 그는 넘을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했고, 그렇다면 자의든 타의든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지켜 내고 싶을 뿐이었다.
‘일단, 주어진 일은 해야겠지.’
자신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변절자가 된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천영은이 경고하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 여자의 시야에 권래희가 잡힌 이상, 더는 자신의 행동에 한 치의 망설임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일전에 마력의 파장을 쫓아 래희의 가게에 들렸던 것처럼, 이번에 새롭게 발생한 파장을 확인하러 가야 했다.
다른 이들이 찾기 전에 자신이 먼저 찾아야 일을 벌이든 숨기든 할 수 있었다. 이 무의미한 인위적인 게이트 생성을 최대한 큰 피해 없이 발생시키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다.
* * *
곰순이, 아니 희우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 베이커리 영업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성황이었고, 가게의 체계도 그에 맞춰 좀 더 발전했다.
생산량이 늘어나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새벽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 400번대까지 손님의 수가 늘어나자 래희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거, 참. 제주도에서부터 이거 하나 먹어 보려고 왔단 말이오! 내가 누군지 모르나?”
“한 명만 더 받아 줄 수는 없나요? 제가 정말로 겨우 시간 내서 온 거라…….”
“아니, 이렇게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걸 알면 알바를 더 구해서 빵을 더 많이 만들던가! 장사할 줄 모르나?!”
선착순에 들지 못해 래희에게 진상 부리는 손님들과 심지어 온라인에서도 래희네 가게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슬그머니 올라오기 시작했다.
[특수 효과 빵집으로 유명한 ‘야미베어 베이커리’. 번호표를 구하기 위해 가게 주변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인근 주민들 불편 호소해…….]
[아이템과 같은 특수 효과가 부여된 빵을 판매하는 ‘야미베어 베이커리’는 높은 세율이 부과되는 헌터 마켓과 달리 세금을…….]
결국 구청에서 민원 접수로 인한 조사 인력이 계속해서 찾아오자 래희는 가게 운영 방식을 전면으로 바꿔 보기로 결정했고 온라인 예약 서비스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빵 하나 팔아 보자고 시작한 게 이렇게 난리가 날 정도라니.”
그나마 이전보다 비교적 한산해진 가게 앞을 창밖을 통해 흘끗 바라본 래희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