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지난 7일 새벽, 자택을 들어가는 모습이 촬영된 CCTV의 영상을 마지막으로 ‘공평한 비각성자 연대’의 지지자였던 ‘전종원 의원’이 자택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일각에서는 점점 영향력을 얻어 가는 ‘공비연’을 막기 위해…….
김주현은 조용히 방안에 울려 퍼지는 뉴스를 껐다. 그러고는 집에 들어오기 전 누군가 부딪히며 그의 손에 쥐여 준 쪽지를 펼쳤다.
[계획 폐기. 다음 계획 진행.]
그는 쪽지를 확인한 뒤 입술을 짓씹었다. 꽉 쥐어진 주먹 안 쪽지는 그가 만든 불꽃으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 * *
류정우는 눈을 떴다.
‘뭐지?’
생전 꾸지 않던 꿈을 오랜만에 다시 꿨다. 그것도 이전 생들에 관한.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이전 회차에서 겪었던 수많은 죽음 중 하나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갑자기 터진 게이트, 이전과 달랐던 발생 시간, 그리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지 누군가의 일그러진 표정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일그러진 표정의 남자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류정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는 페트병째로 물을 벌컥 들이켰다.
잠에서 깨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바로 권래희였다.
하지만 이번에 꾼 꿈은, 그의 기억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는 이전 회차들에서 권래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단순한 꿈인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S급 헌터면서 몬스터 앞에서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 이전 회차에서는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아서 몰랐지만, 분명 이번에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S급 몬스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이었다.
냉수를 들이켠 뒤 세차게 두근대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된 듯하자, 그가 지난밤 꾸었던 꿈을 다시 되짚어 보려 했다. 그러나 그때, 래희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새벽부터 창백한 얼굴로 주방 쪽에 서 있는 류정우의 모습을 보자 래희는 당황스러웠다.
“괜찮으세요?”
“크흠.”
류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하려 했으나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남자주인공이 생각보다 쫄보였다고 실망합니다.]
[소설 속에 그려진 모습과 많이 다르다고 비웃습니다.]
래희는 눈앞에서 헛소리를 내뱉는 성좌의 메시지를 치우며 류정우를 바라봤다. 그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달리 불안정해 보였다.
‘게이트가 많이 무리였던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성좌가 자기 아니었으면 도마뱀 밥이 되었을 거란 말을 지나친 허풍이라 생각해 무시했지만, 류정우의 지금 모습을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래희는 S급 헌터 남자주인공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애써 그의 상태를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관심 없는 척, 평소처럼 거실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작했다.
류정우는 짙어진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들렸던 래희의 목소리와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겹쳐졌다.
[지금 누굴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지?]
그의 시야 안에 성좌의 경고 섞인 메시지가 나타났다.
류정우가 래희와 함께 동거를 시작한 시점부터 성좌는 던전 안을 제외하고는 이따금씩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추측하기로는 래희의 집을 포함한 마을 공간에서는 성좌와의 대화가 자유로운 듯했다.
다만, 이전에 던전에서 유료 채널로 접속했다는 메시지가 잠시 눈앞에 스쳐 지나갔던 걸 보면 이게 일반적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성좌가 자신의 계약자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뭐 어쨌든 때마침 등장한 서슬 퍼런 성좌의 메시지의 등장에 류정우는 그제야 래희가 잠옷만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수면 잠옷이었지만 잘 보지 못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편한 차림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눈을 돌려 빠르게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아무래도 평소보다 빨리 길드로 출근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직 류정우는 간밤에 꾼 꿈의 여파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S급 각성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허리까지 오는 낮은 책장 모서리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물론 무식하게 튼튼한 몸뚱이 덕에 덜컹거리며 밀려난 건 책장이었다.
책장이 크게 흔들리며 아래쪽에 꽂혀 있던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버렸다. 그에 당황한 류정우가 책을 제자리에 꽂기 위해 자리에 주저앉아 책을 들어 올린 순간, 책 사이에서 무언가 팔랑거리며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바로 인화된 사진이었다.
‘후…….’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다고 여긴 류정우는 속으로 소리 없이 한숨 쉬며 사진을 주워 들었다. 딱히 사진이 궁금해 확인해 보려는 생각은 없었고 다시 책 사이에 꽂아 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워 든 순간 우연히 발견한 사진 속의 인물에, 류정우는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그 자세 그대로 얼마간 굳고야 말았다.
사진 속에는 갓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래희와 그리고 이름 모를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껴안고 있었다. 남자의 외모는 래희의 또래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백화 길드 길드장 김유한과 닮아 있었다.
‘이 사람……’
래희를 뒤에서 끌어안고 웃고 있는 남자는 놀랍게도 꿈속에서 마지막에 본 얼굴의 주인공이었다.
* * *
“다행히 얼마 전 발생한 S급 게이트 때문에 위기의식이 든 탓인지 시위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에서 사라진 듯합니다. 여전히 일부의 시위자들이 계속 시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언급하는 언론은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은 그걸 크게 부풀려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천해훈 실장의 브리핑을 듣고 있던 윤청현 대신,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백화 길드의 길드장 김유한이 대답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는 윤청현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왜 온 거지?”
“왜냐니,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퉁명스러운 윤청현의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김유한이 대답했다.
천해훈 팀장이 브리핑을 끝내고 길드장실을 빠져나가자 얼마간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불편한 침묵이었지만 김유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한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헌터들 신체검사를 하고 있다지? 명목은 정기적인 건강 검진이었나?”
헌터가 건강 검진이라니. 웃기는 소리 아닌가.
김유한의 빈정거림에 윤청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윤청현은 눈앞에 저를 놀리려 드는 이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렇지?”
그때, 김유한이 거슬리는 문장 하나를 내뱉었다.
“그것들은 이제 그걸 숨길 줄 알거든.”
그 말에 김유한을 무시하고 있던 윤청현이 상대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김유한은 그의 반응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오랜 친구를 위해 이 세상에서 나만 알아챈 것 같은 힌트를 주자면 말이지… 음……. 이전보다 힘을 좀 못 쓰는 것 같달까?”
“그게 무슨 소리야.”
김유한이 혼자서 떠들 동안 그를 무시하며 내내 입을 닫고 있던 윤청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자신도 몰랐던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김유한은 입가에 미소를 짓기만 할 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에 쥐어진 잔을 보란 듯이 들어 올리며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빈 잔을 다시 내려놓았을 때, 그의 얼굴에 시종일관 걸려 있던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생글거리는 모습과 달리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이었다.
“마치 순정 제품이 아니라 좀 버벅거리는 리퍼 제품을 보는 것 같단 말이지. 예를 들면, 분명 100 만큼 힘을 쓸 줄 알던 내 새끼가 이전의 70밖에 못 쓰는 것처럼 말이야.”
내 새끼?
윤청현은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반문하지 않았다.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았던 건지 입술을 다시 달싹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말하기를 포기한 건지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는 잘 마셨다.”
단지 무난한 작별 인사만 윤청현에게 돌아왔다. 윤청현은 평소처럼 그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유한도 답은 기대하지 않은 듯 자신의 말만 끝내고 곧바로 뒤돌아 방을 떠났다.
그리고 윤청현은 그의 말을 다시 되새기는 듯 그가 사라진 텅 빈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힘이 줄었다고…….’
딱히 들려온 보고는 없었다.
이번 게이트 공략을 위해 청해 길드에서 차출된 인원은 S급 두 명을 포함해 총 열 명. 게이트를 나온 지 고작해야 일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다른 게이트 토벌에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파견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헌터들은 길드로 출근하고 꾸준히 훈련한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힘이 약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물론 찔리는 구석이 있다면 무조건 숨길 테니 다시 전투하는 게 아닌 이상 알 방법은 없지.’
각성 검사 제도는 말 그대로 각성자의 총 능력치와 등급 정도만 구분하는 게 끝이다. 그러니 각성자 한 명 한 명의 능력에 대한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 알아낼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면, 능력치를 보정하는 아이템으로 속이는 것도 있겠지… 보정?’
하지만 남들의 눈을 속일 정도로 효과 좋은 아이템을 단기간에 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윤청현의 눈앞에 래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 * *
물론 그의 예상대로 래희네 가게 앞은 이번 게이트 사태 진행 당시, 파리 날리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헌터들로 문전성시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인원은 마감되었습니다!”
래희는 손님들의 아우성이 그녀에게 돌아오기 전에 잽싸게 가게 안으로 도망쳤다.
지난 이틀간의 짧은 휴가를 끝으로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베이커리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손님이 찾아오고 있었다.
“뀨우! 뀨뀨!”
그 와중에 일부 손님들은 팬이라며 계산대 옆에서 빵 포장을 돕고 있는 곰순이와 사진을 찍거나 곰순이의 발 도장을 사인 대신 받아 가고 있었다.
“네? 아, 그 빵은 단종되었습니다.”
“스킬 효율을 열 배 올려 주는 빵이요? 그런 건 없어요, 손님.”
바쁘게 손님들을 상대하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와중, 래희는 문득 특이점을 하나 발견했다.
분명 이전에는 빵에 효과가 부여되는 그녀의 능력이 알려졌어도 손님 대부분이 빵의 맛에 감탄하며 구매해 갔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다들 자신이 원하는 효과가 부여된 빵을 찾고 있는 거였다.
래희는 자신이 빵집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아이템 상점을 운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잘못된 것 아닌가?’
그러나 래희는 곧바로 계산대 앞에 줄을 선 손님 때문에 생각을 더 길게 이어 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