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뇨.”
윤재언은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필드 보스 ‘단탈리온(S)’가 처치되었습니다.]
[던전 ‘그랑드 산맥(S)’이 클리어됩니다.]
도저히 나오지 않는 나머지 두 S급 헌터를 구하기 위해, 탈출한 헌터들의 증언을 통해 필요한 인원을 구성한 3차 공략대가 출발하기 직전, 메시지가 모두의 눈앞에 떠올랐다.
답도 없는 상황이 순식간에 해결되자 다소 소란스럽던 게이트 앞은 한순간에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 * *
S급 던전.
대던전과 같은 수준의 게이트는 고작 S급 두 명으로 공략하는 건 불가능했다.
보통 대던전 공략도 여러 공략팀이 한꺼번에 투입되는데, 고작 S급 두 명이 S급 보스 몬스터를 마주하고 있다니.
아무런 정보 없이 투입된 것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두 사람의 상성은 이곳 던전의 환경과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살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 했다.
“캬아아아악!”
머리 하나를 잃은 단탈리온이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날카로운 얼음 산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자리를 옮겼다.
빠른 속도로 그들의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빙산 조각에 류정우의 뺨이 살짝 긁혔다. 두 사람이 S급 헌터가 아니었다면 이미 저 얼음에 꿰뚫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류정우는 N회차의 기나긴 생 중 처음으로 죽을힘을 다해 쉴새 없이 자리를 이동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비명을 지릅니다.]
그에 놀란 류정우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멈춰 서자마자 그의 바로 앞에 빙산 조각이 솟아올랐다.
한 걸음만 더 앞섰다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도할 틈조차 없어, 류정우는 망설임 없이 앞에 솟구친 얼음 조각을 밟고 뛰어올랐다. 단탈리온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타격을 입혀야 했다.
[단탈리온이 분노에 휩싸입니다.]
[걸리적거리는 나머지 머리 하나를 잘라 냅니다.]
류정우는 뛰어오르자마자 뒤로 돌아 공중에서 단탈리온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성좌가 준 S급 리볼버는 몸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정확도를 보정하는 기능이 있었다.
단탈리온이 머리 하나를 잃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안전한 곳까지 몸을 피한 윤해주가 류정우의 움직임을 바람을 이용해 도왔다. 적어도 바닥에 착지할 때 얼음에 꿰뚫리지 않도록 도와야 했다.
탕―!
한 번의 사격 소리와 동시에 단탈리온의 몸이 흔들렸다. 용은 중심을 잃으며 꼬리로 주변을 쓸었다. 용의 꼬리에 부서진 얼음 조각이 류정우를 향해 날아왔다.
다행히 윤해주의 도움으로 얼음을 무사히 피한 류정우가 안전한 곳에 착지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끝까지 단탈리온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역시 템빨이 중요하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멋쟁이’ 리볼버의 버프 덕분인지 꽤 괜찮아 보인다며 처음으로 당신의 외모를 인정합니다.]
류정우는 래희가 그동안 왜 성좌를 향해 짜증을 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메시지 창을 한구석으로 치웠다.
중앙에 달린 머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머리 하나마저 잃은 단탈리온이 잔뜩 흥분한 기세로 콧김을 내뿜으며 류정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류정우는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얼음산 사이에 몸을 숨겼다. 이참에 나머지 머리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시야각이 안 나오는데…….’
일단 정확하게 맞히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시야를 확인했다.
지금 이 시점에 저 나머지 머리를 처리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류정우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야각을 찾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게 결론이라면 단 1%의 확률에라도 희망을 걸어야만 했다.
빙산 사이에 몸을 숨기고 리볼버를 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몸을 빙산 위로 일으켰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래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 죽으면 그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다.
‘왜?’
왜, 권래희를 다시 보지 못하면 안 되는 거지?
처음에는 ‘권래희=회귀를 막을 열쇠’. 이런 생각뿐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언제부턴가 회귀를 막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있었고 언제 다시 래희와 마주할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류정우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했다.
권래희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회귀를 막을 열쇠라고 생각했다면 그녀의 얼굴이 수시로 생각나거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거나 걱정하지는 않을 거였다.
그때, 단탈리온의 눈과 류정우의 눈이 마주쳤다.
광기에 사로잡힌 용의 눈이 류정우를 찢어 죽이겠다는 듯 번뜩거리고 있었다.
철컥.
류정우는 래희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숨을 참았다. 기회는 단 한 번. 이번을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게 분명했다.
탕―!
그가 총을 쏜 동시에 단탈리온이 뿜은 차가운 입김이 그의 팔을 스쳤다. 팔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윽.”
팔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류정우가 비틀거렸다. 죽을 때는 순식간이라 아픈 것도 못 느꼈는데, 처음으로 겪는 고통에 비명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도 잠시, 어디선가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조심!”
윤해주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가 변했다. 그녀가 자신을 붙잡고 몸을 피한 거였다.
급하게 스킬을 사용했는지 윤해주가 정확하게 이동하지 못해 두 사람은 허공에 멈추고 말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면으로 곤두박질치다 바닥을 고작 1cm만을 남겨두고 몸이 허공에 잠시 멈췄다.
쿵.
두 사람은 극적으로 안전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비웃습니다.]
류정우는 순간 처음으로 진심으로 속에서부터 짜증이 솟았다.
[접속 시간 완료로 성좌 ‘운명의 길잡이’의 접속이 끊깁니다.]
그러나 타이밍 적절하게 사라진 성좌에 욕설을 속으로 뱉으며 홀로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키에에에에에!!”
뒤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단탈리온의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필드 보스 ‘단탈리온 (S)’가 처리되었습니다.]
거짓말처럼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그리고 엎어진 두 사람 앞에 던전 밖으로 향하는 게이트 입구가 열렸다.
[던전 ‘그랑드 산맥(S)’이 클리어됩니다.]
“하…….”
류정우는 처음으로 안도감이라는 단어의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 * *
“너, 도대체 뭐야?”
류정우가 게이트에서 고군분투하던 때, 래희는 게이트 앞에서 수상한 모습으로 걸어 나온 김주현과 마주하고 있었다.
“뭐가?”
그에 김주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게이트에서 나올 때, 앞에 있던 헌터들이 왜 아무도 너를 발견하지 못한 거지?”
게이트 근처를 벗어나자마자 그를 붙잡은 래희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김주현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무슨 소리야?”
“김주현.”
그러나 계속해서 모르는 척하는 김주현의 모습에 래희가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딱딱하게 불렀다.
마치, 내가 너를 모르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래희의 눈빛에 김주현이 이마에서부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래희의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래희은 입술을 짓씹으려 그를 노려봤다.
‘이 새X가…….’
그때였다. 두 사람은 지금 도심 한복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 주변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각자의 일로 빠른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래희가 이상함을 느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들이 서 있는 횡단보도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는 전광판이었다.
- 속보입니다. 지난밤, 안전지대 13번가에서 발생한 S급 게이트가 방금 전, 클리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현장 연결합니다. 주작임 기자.
S급 게이크가 클리어되었다고? 벌써?
래희의 신경은 곧장 김주현에서 뉴스 속보로 이동했다. S급 게이트를 S급 헌터 둘이서 클리어했다고?
그때 래희는 얼핏 들리는 욕설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까 태연한 표정과는 달리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주현이 있었다.
‘도대체 뭐야?’
래희는 떠오르는 의문을 무시하며 일단은 뉴스 속보에 다시 집중하려 고개를 돌렸다.
“헙.”
저거 괜찮은 건가?
어느새 화면이 바뀌었는지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는 류정우와 윤해주의 모습이 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무사히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류정우가 다친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힐러한테 치료받으면 되겠지만 어쨌든 부상은 부상이니까.
게이트에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지 꼴이 영 좋지 못했다. 단정했던 머리는 삐죽삐죽하게 잘려 있었고 얼굴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 네, 주작임 기자입니다. 지난 9월 4일 오후 7시경 서울 안전지대 13번가에서 발생한 A급 게이트가 S급으로 단계가 상승했습니다. 1차로 투입되었던 공략대 전원 실종 상태였으나 2차 공략대가 투입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S급 헌터들을 제외한 나머지 헌터들이 전원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 게이트 클리어는 어떻게 된 거죠?
- 우선 실종 상태였던 윤재언 헌터가 무사 귀한한 이후 2차로 투입된 S급 헌터 류정우 헌터와 윤해주 헌터가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합니다.
래희는 정말 두 사람만으로 S급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소식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 두 사람의 목표는 실종자였던 1차 공략팀 구출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S급 게이트는 최소 5명 이상의 S급 헌터들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공략팀을 서둘러 구성하기 전에 던전 상태 파악과 실종자 구출… (중략)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갑작스럽게 S급 헌터 두 명만으로 S급 게이트를 클리어했으며…….
류정우를 비추고 있던 화면이 다른 헌터들을 비추며 뉴스 화면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앞 상황을 보여 주기 위한 연출인 듯했다. 그때, 래희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빠르게 화면을 지나쳤다.
‘저거…….’
푸른빛.
헌터 중 한 명의 내려간 옷 사이로 보이는 어깨 부근에서 찰나의 순간 무언가 푸르게 반짝이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모두가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장면이지만 래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한때, 그녀의 왼쪽 팔뚝에도 박혀 있던 것을 그녀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