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다행히 퀘스트를 마치자마자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돌아가는 문을 연결할까 의사를 묻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페널티 때문에라도 24시간 이상 집을 비워 둘 수 없어서 빠르게 게이트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품에는 작고 귀여운 나뭇잎이 한 장 자라나 팔랑거리고 있는 세계수 나뭇가지가 안겨 있었다.
래희는 들고 있던 화분을 물을 쉽게 주기 위해 거실 창가에 올려 뒀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세계수의 가지를 노려봅니다.]
괜히 쓸데없이 시야를 가리는 성좌의 메시지를 손으로 치우며 래희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재료도 다 구했겠다. 밖으로 한번 나가 보자.”
그리고 그런 래희의 곁으로 류정우가 말없이 쫓아왔다. 처음 래희의 집에 동거인으로 설정되었을 때 신기하다는 듯이 그녀의 농장과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더니, 이번에는 아무래도 온실 만드는 게 궁금한 듯했다.
[‘온실’ 건축이 가능해졌습니다.]
[부지를 골라 주세요.]
시스템은 귀신같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온실을 짓는 것을 권유해 왔다.
래희는 집 바로 옆에 마침 남아 있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를 가리켰다.
“오, 여기다 지으면 되겠네.”
집이랑 가까우니 일하기도 편할 테고.
래희가 원하는 장소를 지정하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등장했다.
[‘온실’의 재료가 필요합니다.
- 세계수의 나뭇가지 ×1
- 드워프의 유리 ×5
재료를 등록하시겠습니까? Y / N]
래희가 망설임 없이 눈앞에 나타난 Y 버튼을 누르자마자 비어 있던 공터 위로 순식간에 건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얀 프레임에 반투명한 유리창.
불과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완성된 온실은 겉보기에는 생각보다 매우 작았다.
‘너무 작은데……?’
온실 안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식물을 대량 생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래희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크기의 온실이었다.
“뀨!”
그때, 그녀의 옆에서 몸집을 부풀린 채로 서 있던 곰순이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빨리 한번 들어가 보자고 의사를 표현했다.
래희와 류정우가 온실 안으로 들어오자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밖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크지 않아 소꿉놀이 정도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온실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꽤 넓은 온실이 펼쳐져 있었다.
“오… 마법 같네…….”
마치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공간 확장 마법에라도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래희는 마침 상점도 업데이트되었겠다, 새로 들어온 물품이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점 버튼을 눌렀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댕― 댕― 댕―
종소리와 함께 계절 변화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잊혀진 마을’이 9월을 맞이했습니다. 계절 설정 ‘가을’이 시작됩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작물은 키울 수 없습니다.]
【 위화감 】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는 단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나 있었다.
새벽부터 시끄럽게 울어 대는 휴대 전화를 부여잡고 집을 나선 류정우와 그가 길드로 떠난 지 두 시간 뒤 가게로 출근한 래희는, 평소와 다른 풍경을 가게 앞에서 맞이했다.
항상 백 명가량 줄이 서 있던 가게에는 기껏해야 가게 오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겨우 네다섯 명 정도. 그 이후 하루 종일 손에 꼽을 정도의 손님만 베이커리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래희가 그나마 찾아와 준 손님 중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빠져나가자마자 휴대 전화를 들어 확인했다.
휴대 전화 속 인터넷 접속 앱을 누르자마자 인터넷 기사의 메인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
[[속보] 안전지대 13번가에서 발생한 A급 게이트, S급으로 등급 상승]
[[속보] 투입된 헌터들 전원 실종, 윤재언(S, 청해 길드) 행방불명.]
“…뭐?”
[[속보] 류정우(S, 청해 길드), 윤해주(S, 산영 길드) 투입 예정]
* * *
가게문을 닫자마자 래희는 게이트가 발생한 안전지대 13번가 도착했다.
‘S급 게이트라니.’
그 위명답게 게이트 근처에는 헌터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뿐, 민간인은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눈에는 얼마 전까지 멀쩡했던 서울역이 박살이 난 모습만 보였다. 마치 디스토피아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린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누가 봐도 충격을 크게 받아 툭 건들면 무너질 것 같은 옛날 서울역 건물과 그 주변의 지저분한 상태로 방치된 빌딩들이 눈에 담겼다.
“왜 벌써 S급이?”
그녀의 말은 마치 지금 S급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어 있었다.
래희 스스로도 자신이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몰랐다. 벌써 25년 전 전생에 읽었던 소설 내용 따위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S급’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에는 머릿속에 곧바로 ‘지금이 아니야’라는 문장만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왜죠? 성좌님, 분명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말해 줄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쉽니다.]
‘…….’
뭔가 이상했다. 말 많은 성좌가 숨기는 게 있는 걸 보니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S급. 대던전 등급과 같은 등급. 그 말인즉슨 아무리 S급이어도 멀쩡하게 살아 나오는 건 무척이나 힘들다는 소리였다.
윤재언이 실종되고 류정우가 게이트에 투입된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막상 게이트를 보니 A급 보스 몬스터를 해치웠을 때 이후부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 위에는 존재감조차 없는 엑스트라가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지?’
고작 B급. 그것도 제대로 된 스킬 하나 없는 비전투계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쿵―!
게이트 안에서부터 무언가 커다란 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먼지가 뿜어져 나온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하지만 래희를 제외한 그 누구의 눈에도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 게이트 앞 헌터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위화감에 래희가 게이트를 조용히 응시하자 흙먼지 사이로 걸어 나온 사람의 윤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 얼굴…….’
래희에게는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 * *
게이트 안에 발은 디딘 류정우는 여태 겪었던 그 어떤 던전 보다도 끔찍한 광경을 발견했다.
앞서 들어갔던 헌터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꽝꽝 얼어 붙은 채로 얼음 안에 갇혀 있었다.
S급인데도 불구하고 뺨이 아려 오기 시작했다. 눈썹이 하얗게 서리가 끼기 시작한 걸 보니 S급이 아니고서야 버티기 어려운 추위 같아 보였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어붙은 헌터들의 표정은 절망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거, 다른 헌터들은 돌려보내야겠습니다.”
류정우와 함께 게이트로 들어온 산영 길드의 S급 헌터, 윤해주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류정우는 뒤쪽에서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헌터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식하게 강하다고 소문난 안철용조차 게이트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해주는 류정우의 긍정적인 대답에 뒤처진 헌터들에게 다가가 당장 게이트 밖을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이번 2차 공략팀의 팀장이 윤해주였기 때문에 다들 군소리 없이 윤해주의 지시를 따라 게이트 입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뒤돌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해주가 류정우에게 말을 던졌다.
“이거, 아무래도 심각한 것 같은데. 대던전 보다 환경이 더 안 좋아 보이는군요.”
류정우는 대던전 대비 훈련만 했지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윤해주에게 물었다.
“대던전은 이곳과 다릅니까?”
“네, 그곳은 환경이 문제라기보다는 나타나는 몬스터라든가 지형이 문제인 곳입니다. 이렇게 처음 입장할 때부터 추위 때문에 못 버틸 정도는 아니죠.”
“아무래도 A급에서 S급으로 등급이 상승하면서 뭔가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고작 S급 두 명으로 S급 게이트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당장에 투입 가능한 인원이 두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밖으로 나간 나머지 공략 대원들의 설명을 들은 이들이 조금 더 인원을 추가해서 3차 공략팀에 S급 헌터들을 추가해 주는 걸 기대하는 수밖에.
우선 두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는 실종자 탐색이었다. 물론 무조건 찾아야 하는 인물은 S급 헌터 윤재언.
고등급 헌터들도 버티지 못하는 마당에 이미 실종된 민간인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잃으면 골치 아픈 가장 중요한 전력부터 되찾는 게 핵심이었다.
“보아하니, 필드 자체가 아주 넓어 보이는데 윤재언 헌터를 찾을 만한 방법이 있습니까?”
류정우는 자신보다 게이트에 대한 경험이 훨씬 많은 윤해주를 보며 물었다. 그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외모를 한 윤해주는 올해로 40세. 고등학생 시절 1세대 헌터로 각성했다.
아무런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던 시절부터 몸으로 직접 배워 가며 게이트에 대해 익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게이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래서 류정우는 회귀만 여러 번일 뿐 경험 같은 건 없는 자신보다 윤해주의 판단을 더 믿었다.
윤해주는 바람을 사용하는 헌터였다. 바람을 응용한 스킬들의 자유도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에 한계가 없어 누구보다도 S급다운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었는데, 따라서 윤재언을 찾기 위해서 바람을 이용해 그가 남겨 둔 마력의 흔적을 찾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매섭게 휘날리고 있는 이 던전 환경에서는 스킬을 사용하기가 적합하지 않았다.
만약 앞서 들어간 헌터 중 무사히 나온 헌터가 단 한 명이라도 있어서, 던전 안이 이렇게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적합한 계열의 헌터가 투입되었을 것이다.
“화염계 헌터가 와야 해결이 될 것 같은데…….”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윤해주와 달리 류정우는 앞서 들어간 화염계 헌터인 윤재언이 실종된 걸 보면 화염계 헌터가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두 사람은 누가 말하기도 전에 동시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저기 온다.”
눈보라 사이로 어두운 덩치가 쿵쿵거리며 그들에게 걸어왔다.
‘……!’
처음 겪어 보는 강한 기운에 류정우는 몸을 움찔거렸다. 이전 AA급과 마주쳤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쉽지 않을 듯했다.
“준비해요.”
그런 류정우의 상태를 본 건지, 윤해주의 경고하는 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