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러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황당한 문구를 보게 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신비의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비롭게 빛나는 귀엽게 생긴 몬스터들이 하나둘 그들 앞에 나타났다.
[요정 문어(B)]
‘오! 귀여워!’
슬라임과는 조금 다른 짧은 다리를 가진 귀여운 문어 캐릭터처럼 생긴 몬스터의 모양새에 래희의 경계심이 살살 눈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로라처럼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며 말랑거리는 그것은 한 마리 납치해서 키우고 싶을 정도로 꽤 귀여웠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이곳이 A급 게이트라는 것.
래희가 가까이 다가가자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작은 문어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상함을 감지할 새도 없이 밝은 빛으로 빛나던 문어의 색상이 눈처럼 빨갛게 물들자마자, 문어가 그녀를 향해 자신의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니까 얼마나 크게 변했냐 하면, 고무줄 늘어나듯 입을 크게 벌린 문어는 래희 한 명을 손쉽게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큰 크기로 입을 벌렸다.
반사적으로 래희을 잡아당긴 류정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문어의 이마 정중앙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문어가 사라진 자리에는 문어가 뿜다 만 것으로 보이는 먹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여느 먹물과 달리 그 색상이 하얀색으로 펄 가루가 섞인 것처럼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죄송해요. 잠시 홀렸던 것 같아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아무래도 이 숲 자체에 홀리는 힘이 있는 것 같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조언합니다.]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에 인벤토리를 열었다. 정신계 저항 스킬을 가진 류정우와 달리 그녀에게는 그런 거창한 스킬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특수 효과가 부여된 빵을 골라 꺼내 들었다.
[멜론 케이크(조각) S]
- 맛 ★★★★★+★
- 향 ★★★★★+★
- 상태 이상 무효 (5분)
‘이게 그나마 제일 낫네.’
래희는 빵을 베어 물며 앞서 나가는 류정우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류정우는 래희의 앞에서 빛나는 수풀 사이로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요정 문어들을 과녁 삼아 하나씩 명중시키며 나아갔다.
덕분에 래희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왜 과제 할 때 무임승차하려는지 알겠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학 생활의 조별 과제에 비유하자면 류정우는 조장, 래희는 버스 타는 조원이었다.
‘조장이 착하니까 무임승차 시켜 주는 거지.’
래희는 속으로 류정우에 대한 칭찬을 하며 과거의 악몽 같았던 조별 과제를 떠올렸다.
‘으…….’
생각도 하지 말자. 래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도 보지 않은 채 걸어 나가다 그녀의 앞에서 멈춰 서 있던 류정우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윽.”
래희가 눌린 코를 문지르며 자신이 부딪힌 류정우의 단단하고 넓은 등을 보았다.
휴.
한숨을 내쉰 래희가 류정우를 올려다보며 그의 옆으로 옮겨 갔다.
“무슨 일이예요?”
류정우가 대답도 하기 전 그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자 여러 쌍의 노란 눈동자와 래희의 눈이 마주쳤다.
노란 눈의 주인들은 래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떨며 몸을 숨겼다.
“어린애?”
류정우의 말대로 열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다만 요정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보다는 조금 더 뾰족한 귀를 가졌다는 게 다르달까…….
“엘프?”
래희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어린아이 중 하나가 귀를 움직이며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눈만 빼꼼 내밀어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와…….”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과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어린 엘프들…….
알록달록 피어 있는 꽃들과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집들.
래희는 넋을 놓으며 주변을 관찰했다.
“인간?”
그때, 어린아이들이 노는 소리로 시끄러웠던 밖이 갑자기 조용해져 이상함을 느꼈는지, 집 안에서 성인으로 보이는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래희와 류정우가 놀란 것과 마찬가지로 엘프들도 두 사람을 보고서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곳에?”
그 물음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래희와 류정우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 * *
저번에 드워프에게 써먹었던 변명과 마찬가지로 엘프들에게도 마법사인데 이동 중 위치를 모르는 곳에 불시착했다는 변명이 아주 잘 통했다.
덕분에 래희는 쓸 줄 아는 마법(스킬)이 몇 개 없으면서도 마법사 대접을 받으며 그들의 환영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 손님이 몇 년 만인 줄 모르겠군.”
외모가 분명 두 사람의 또래 같아 보였음에도 나이가 1,000살이라는 장로는 래희와 류정우에게 꽃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신기한 건 드워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롬바르나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힘 좀 써 봤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모든 대화는 번역 프로그램이 실행될 것이라고 으스댑니다.]
‘아, 그럼 영어도……?’
영포자의 간절한 바람으로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타 차원 간의 대화 한정이라는 성좌의 대답에 래희는 시무룩함을 숨기지 못했다.
장로는 그런 래희의 모습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곳에서 며칠 쉬다 보면 마력이 다시 차오르니 걱정 말게. ‘신비의 숲’의 마력은 순도가 높아 몸에 흡수가 잘 될 테니 말이야.”
목이 말랐는지 자신의 몫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더니 이어 말했다.
“마력이 불안정한 상태로 이동 마법을 썼으니 불시착한 거겠지. 순도 높은 마력을 흡수하면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래희는 장로에게 영어를 못해서 그렇다는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엘프는 마법을 쓸 일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 건가요?”
장로가 마법에 대해 래희보다도 잘 아는 것 같아 보이자 의문이 들어 그녀가 먼저 물었다.
그 질문에 장로가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는가 싶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자주 들렀던 마법사가 있었네. 아직 젊은 나이의 청년이 마력이 모자란 것 같다고, 하도 몇백 년을 뻔질나게 찾아오니 모를 수가 있나.”
“…….”
몇백 년인데 젊은 나이요……?
래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눈썹을 위로 올리며 류정우를 바라봤다. 류정우의 얼굴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장로는 오랜만에 외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운지 묻지도 않은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숲 밖으로 연결된 길이 끊겨 버렸지 뭔가. 그래서 이제 인간들이 이곳에 오는 일이 아예 없게 되었지. 물론 자네처럼 마법으로 오는 게 아니라 걸어오는 경우에 말이야.”
“몇 년 전부터요?”
“그렇다네. 한 12년 전부터였나……. 신비의 숲 주변으로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우리를 이 숲 한가운데 고립시키고 말았네. 물론 엘프는 이 숲 밖을 나갈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말이야.”
“아, 그렇군요.”
12년. 익숙한 숫자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게 과연 우연인 걸까?
“손님들이 머물 만한 집이 한 채 있으니 두 사람은 마력이 차오를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될 거야. 숲에는 마수가 있으니 웬만하면 가지 말고.”
물론 엘프들에게는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개체들이지만 말이야.
장로는 두 사람을 보며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엘프들의 역사부터 우수한 문화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더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 안내를 해야겠다고 말하며 몇 시간 동안의 긴 일장 연설 이후에야 겨우 두 사람을 풀어 줬다.
혹시라도 다시 붙들릴까, 겁이 난 두 사람은 장로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벗어났다. 래희는 혹시 12년 동안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외지인이 찾아오지 않아서 두 사람을 붙잡아 놓고 이야기를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야기의 90% 이상이 쓸모없는 자기 자랑뿐이었고,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 이야기를 수천 번 들었을 이 엘프 마을의 주민들은 들어 주지 않을 것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 여기가 당분간 마법사님과 그 일행분이 머무르실 만한 집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따로 불러 주세요!”
장로가 붙여 준 ‘이엘’이라는 엘프는 신나게 마을을 소개해 주고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지낼 집을 안내해 준 뒤 역시나 신나게 사라졌다.
빈집이 하나밖에 없다니. 물론 배타적인 엘프가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환영해 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었다.
래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집의 문을 열었다.
‘어두워.’
벌써 해가 떨어진 밤이라 그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래희가 스킬로 방 안을 환하게 밝히자 그녀는 아니, 두 사람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용으로 임시로 지어진 듯한 5평 남짓한 작은 집 안에는 퀸사이즈의 침대가 달랑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고 부들댑니다.]
[엘프라는 족속들은 역시 믿는 게 아니라며 울분을 토해 냅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다른 채널에 일시적으로 접속합니다.]
그리고 성좌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래희에게만 보이던 메시지가 류정우 앞에도 나타났다.
[너는 바닥에서 자라.]
그러나 류정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매우 괘씸해합니다.]
래희는 도대체 성좌가 류정우에게 무슨 소리를 하고서 저렇게 부들거리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류정우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밤도 늦었겠다 일단 잠은 자야 하니까.
“침대와 책상, 옷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래희가 중얼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류정우도 주변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소파도 보이지 않으니…….”
문장을 끝마치지 않고 래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아뇨!”
그건 아니지. 여자라는 이유로 S급 헌터를 바닥에 재우고 혼자서 침대에 자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지 않은가.
래희는 급한 대로 이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침대에서 같이 자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그 문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입술을 짓씹습니다.]
[S급 몸뚱이는 딱딱한 바닥에서 자도 문제없을 거라고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