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오랜만에 제대로 얼굴을 보네요, 래희 씨.”
“아… 네.”
래희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류정우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어색해 죽겠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류정우를 피해 왔기에, 다시 마주쳤을 때 이렇게까지 어색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물론 그건 래희만 그렇게 느끼는 듯했다.
“유리를 얻는 퀘스트는 완료했으니 이제는 세계수의 목재라는 것만 얻으면 되겠네요. 혹시 예상 가는 부분이 있나요?”
“아뇨. 딱히…….”
아주 오래전 얼핏 세계수라는 걸 들어본 기억은 나지만 정확하게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래희는 뺌을 긁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정우… 씨는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저한테 시간 내도 괜찮으신 건가요?”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부르던 이름이 오늘따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흑역사를 들켰다고 새삼스럽게 정우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니. 이래서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고들 하는 건가?
하지만 래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망설였다는 걸 눈치챈 류정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 이제는 정우 오빠라고… 안 불러요?”
[이게 미쳤나.]
평소와 다른 날 선 성좌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류정우와 래희의 얼굴 사이로 나타났다.
류정우의 호수 같은 눈빛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뻔했던 래희는 서슬 퍼런 메시지 내용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대답했다.
“…이게 더 편해요.”
어릴 적에 류정우를 덕질했다는 걸 윤재언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자신이 류정우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면 그거야말로 진짜 문제였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코에 집착하는 래희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때 돌덕이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공식적으로 동료로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이제 와서 류정우에게 오빠라고 불렀다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류정우 팬들에게 오해라니, 스캔들 상대까진 아니더라도 집적대는 여자1 취급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래희의 아연실색한 표정을 본 류정우는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와… 그렇게 오빠라고 부르는 게 싫었다니…….”
“…제가 언제 그렇게 말을?”
“이번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섭섭한데?”
삐죽 튀어나온 입술과는 다르게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미친. 원래 이렇게 귀여웠나? 예전에는 잘난 얼굴 제대로 쓸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여우가 따로 없었다.
래희는 이제 와서 다시 반할 것만 같은 제 정신 줄을 겨우 붙잡으며 눈에 힘을 줬다. 언젠가 성좌가 한 말대로 정신 제대로 안 차리면 잡아먹힐지도 몰랐다.
그런 래희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지 류정우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섭섭한 건 장난이구요. 편할 대로 불러요, 래희 씨.”
“…넵.”
군기 잡힌 래희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앞서 걷던 래희가, 이만 빨리 퀘스트나 해결하러 떠나자는 듯이 뒤돌아 손짓했다. 그러고선 마을 회관 뒤쪽에 설치된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이세계 출입구]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 개미굴(A)
- 봄의 정원(B)
- 저주받은 숲(B)
- 파르마 협곡(B)
- 이벨 사막(C)
- 제노 산맥(C)
- ??? (?)
[‘??? (?)’로 이동합니다.]
[‘신비의 숲(A)’에 2명이 입장하였습니다.]
* * *
“던전 관리청은 해명하라!”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과도한 혈세를 뽑아 먹는 헌터들을 처벌하라!”
오늘도 주요 기관들과 길드들이 모여 있는 안전지대 12번가는 시위대의 시위로 시끄러웠다.
지나가는 시민들과 이 지역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일주일 넘게 지속되는 시위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초반에 단발적으로 나타나던 시위대는 이제 아예 자리 잡고 앉아 피켓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왜 저래 진짜.”
“헌터들을 처벌하라니. 미친 건가?”
조용해야 할 사무실이 하루 종일 시위대 소리로 시끄러우니 각성자, 비각성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불만이었다. 심지어 일부 몇몇 사람들은 시위대에 직접 항의하기도 했다.
“헌터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지랄이야! 너네도 헌터들이 목숨 걸고 안 지켰으면 진작에 죽은 목숨들이었어!”
“게이트가 안전지대 안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해서, 그렇게 시위한다고 달라질 게 있어? 게이트는 천재지변이야!”
갈등이 점점 격화되어 가는 도중에도 여전히 각성자를 옹호하는 여론이 훨씬 강했다. 각성자가 목숨값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역차별이 따로 없었다.
오히려 아무런 비판적인 시각 없이 각성자에 대한 편견으로 비각성자 입장에서만 여론을 만드는 언론이 더 문제였다.
분명 처음에는 몇 명밖에 참여하지 않은 작았던 시위임에도 언론에서 크게 포장하며 언급한 덕분에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불어나 버렸다.
“어차피 저들 중 대부분은 정의 구현 그딴 건 안중에도 없고 그저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저런 거겠지.”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몇몇 시민들은 혀를 차며 제 갈 길을 향해 그들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바로 옆 동네에서 게이트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윤재언이 시끄러운 길드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시위대 쪽에서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시끄러워, 지들이 S급한테 어쩔 거야…….”
길드 건물 앞에서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방송국 기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윤재언이 기자들이 있는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마,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 중인 공략팀 팀장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어? 이쪽으로 온다. 빨리 찍어, 윤재언 씨!”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존재감이 큰 헌터가 기자들 앞을 지나가자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기자들이 윤재언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익숙한 듯 윤재언은 그들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공략 A팀의 팀장, 임현자에게 다가왔다.
“팀장님, 잠시 할 말이.”
기자들이 절대 엿듣지 못할 만한 길드 건물 안으로 공략팀 팀장을 이끌고 온 윤재언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류정우 헌터 대신 제가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아직 기자들에게 이번 던전 참가자 명단 밝히지는 않으셨죠?”
“그렇긴 한데…….”
임현자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제가 대신하기로 미리 말해 뒀습니다. 오늘 게이트가 발생할 줄은 몰라서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간다고 하면 상관은 없는데. 길드장님은 아시는가?”
“네.”
그에 임현자는 더 자세히 묻지 않고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장이 허락한 사안이라면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류정우 헌터는 무소속이 아닌가. 그가 제 부하 직원은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A급 헌터로서 공략팀을 책임지고 이끌고 있다는 삶의 무게가 무거운데, 저 높은 사람들의 사정에 깊이 관여해서 제 등에 업은 업보의 무게를 더 높이고 싶지 않았다.
윤재언은 상황이 얼추 정리가 되는 듯하자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는 듯이 로비에 배치된 의자에 늘어졌다.
주말부터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피곤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건물 밖의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시위대를 멍하니 응시했다.
‘류정우가 래희 퀘스트 도와주기로 했다고 했지…….’
윤재언은 괜한 질투심에 짜증이 치솟아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래희가 진작에 류정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팬으로서든 이성적인 감정으로서든, 윤재언 입장에서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돌이었던 이전에는 몰라도 지금 류정우라는 사람은 권래희 앞에 실물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닌가.
며칠 전 찾아갔던 빵집에서도 늦은 오후까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지 빵집 문도 닫지 않고 있는걸 봤을 때, 알려 주지 않았어도 그는 단번에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권래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주변에 류정우 말고서 누가 있겠는가.
친구로서 그녀의 곁에 12년을 머무르던 윤재언은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래희에게 들었던 섭섭한 감정이 류정우에게 돌아가 그를 더욱더 꺼리게 했다.
‘전부 내가 문제지 X발.’
어릴 때는 한집에 사는 사이에 어색하게 만들까 봐.
성인이 되어서는 곧바로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생겨 기회가 없었고, 래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게 된 이후에는 그저 곁에 남아 있고 싶어 친구라는 이름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고 오롯이 자신이 홀로 감당해야 할 감정이었다.
늦은 저녁, 창밖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래희의 호박색 눈동자가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윤재언 헌터!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재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았다.
헌터넷 익명 게시판
[잡담] 오늘 자 게이트 공략 간 윤재언 사진 (스압 주의) (238)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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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예민미 넘치는데 오히려 좋아…….
좋아요 112 댓글 238
- 이것 참… 귀하네요.
└이런 표정도 잘 어울리는 남자였네… 항상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어서 몰랐다.
└같이 던전 가 본 사람 입장에선 많이 본 얼굴.
└ㄴㄴ 던전 안에서는 무표정인 거지 저렇게 예민한 느낌은 아님.
- 퍼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혹시 연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왜 예민한 거임? 여친이랑 헤어졌나?
└윤재언 여친 있음?
└몰랐음? 나임.
└ㅈㄹ ㅋㅋㅋㅋㅋㅋㅋㅋ
- ㅅㅂ 예민한 것도 존잘이네. 갑자기 살기 싫어진다.
-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지 않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시위 때문 아님? 요즘 분위기 이상하던데.
└(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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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이 필요합니다.]
뜬금없는 문장이 두 사람 앞에 떠올랐다. 래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류정우를 바라보자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 여러분!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세계수를 성장시킬 수 있겠군요!”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누군가가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이러다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다고 뒷목을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