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래희는 어이가 없었다.
이름이 거의 가려진 채로 이동할 곳을 고르라니. 심지어 윗부분에 나열된 장소의 이름은 추측하기로는 래희가 이제껏 휩쓸렸던 게이트의 이름 같았다.
그녀와 같은 추측을 한 류정우가 무언가를 고민하는지 얼마간의 침묵 후에야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요. 클리어한 게이트를 다시 방문할 수 있다니.”
류정우는 흥미롭다는 말투로 말했다.
“정말 모두 가 봤던 곳이 맞는 건지 다른 곳도 다시 한번 방문해 보고 싶긴 하지만, 일단은 래희 씨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게 먼저니 지금은 못 가겠네요.”
래희는 류정우의 말에 기겁했다.
‘게이트에 다시 가 보고 싶다니? 고등급 헌터라서 겁이 없는 건가?’
그녀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걸 알아차린 류정우가 웃음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라도 그럴 일이 있다면 래희 씨까지 휘말리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도 래희의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자 류정우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일단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래희는 류정우의 말에 이름이 가려진 두 가지 선택지를 보며 고민했다.
마침 두 가지 재료를 요구하는 퀘스트와 같이 선택지도 두 개였다.
“어디를 선택하든 상관없어 보이는데요?”
그녀의 대답에 류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래희는 아무 선택지나 눌렀다.
[‘???(?)’로 이동합니다.]
알림 메시지와 함께 래희가 문을 열자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류정우가 먼저 앞서 문을 통과한 이후, 래희가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한 걸음 발을 떼며 긴장한 채로 문을 통과했다.
쾅!
두 사람이 모두 문을 통과하자마자 큰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이 황금빛 빛무리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파르마 협곡(B)’에 2명이 입장하였습니다.]
“어……? 여기는?”
입장을 알리는 메시지 창이 잠시 허공에 떠올랐다 사라진 이후 그들이 서 있던 숲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계절이 빠르게 흐르는가 싶더니 푸르른 여름에서 눈이 쌓인 겨울 숲의 밤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
지구의 계절은 여름이었기 때문에 옷차림이 가벼웠던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반팔 차림으로 한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심각하게 추운데?’
몬스터한테 죽기도 전에 먼저 얼어 죽는 거 아니야?
래희가 오들오들 떨자 S급 신체라 추위를 타지 않는 류정우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로서도 따로 입은 외투가 없었기 때문에 당장 벗어줄 옷이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반팔 상의를 벗어 주더라도 얇은 천이었기 때문에 의미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래희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체온 유지를 위해 그녀를 끌어안으려던 찰나였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비명을 지릅니다.]
[급하게 자신의 옷장을 뒤집니다.]
그때, 래희의 머리 위로 두꺼운 천이 펄럭거리며 그녀를 덮었다.
“윽!”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두워지자 래희는 버둥거리며 자신을 덮은 무거운 천을 머리에서 끌어내렸다.
아주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듯한 부드럽고 두꺼운 천은 과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엘레강스 윈터 로브(S)]
: 추위로부터 사용자를 지켜 준다. 사용자의 외적 호감도를 50% 높여 준다.
겨울용 로브였다.
래희는 손에 쥔 로브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하지만 극심한 추위로 그녀의 살갗이 아프게 아려 오기 시작하자 관찰을 멈추고 로브를 둘렀다.
‘뭐, 로브가 거기서 거기지.’
기시감을 뒤로하고 로브를 입자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반팔, 반바지 위로 고작 로브 하나를 둘렀을 뿐이었지만 따뜻한 방 안에 있는 것처럼 얼어붙은 몸이 녹는 듯했다.
‘오, 역시 S급.’
래희는 오랜만에 성좌가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위험이 닥쳐도 딱히 도와주지 않더니,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빠르게 도움을 주다니. 원래 성좌들은 이렇게 변덕이 심한가?
어느 정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그녀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류정우를 다시 올려다봤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리던 류정우는 래희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재료를 구해 볼까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저… 가식적인 aj&%$#28이라고 중얼거립니다.]
[부적절한 언어 사용이 감지되어 필터링 됩니다.]
래희는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류정우의 손위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 * *
얼마나 눈 쌓인 숲속을 걷고 또 걸었을까. 이제는 B급 평균을 조금 웃도는 체력 스탯 덕분에 아직도 지친 기색 없이 쌩쌩하게 버틸 수 있었다.
래희는 이제야 자신의 오른 스탯을 체감할 수 있어서, 비록 숲속을 헤매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류정우는 그런 래희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저기 불빛이 보여요!”
그때, 래희가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래희의 말에 그제야 류정우는 시선을 돌려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숲속, 래희가 만든 불빛으로 주변을 비추고 있던 그들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불빛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할 때쯤, 그들은 생각지 못한 위기를 맞닥뜨렸다.
늑대형 몬스터 무리가 등장한 것이다. 몬스터답게 기괴할 정도로 큰 덩치의 늑대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두 사람을 향해 공격하려는 듯 주변을 뺑 둘러싸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류정우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형의 몬스터 머리 정중앙을 리볼버로 겨누었다.
쾅!
끼엥!
분명 한 마리를 향해서 쐈을 뿐이었는데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뒤에 있던 몬스터들도 연달아 통과했다. 총알이 관통하자 몬스터의 몸은 가루가 되어 형체 없이 사라졌다.
류정우는 무력이 없는 래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몬스터를 해치워 나갔다.
“욱.”
“조금만 참아요.”
래희는 빙글빙글 도는 류정우의 어깨 위에서 멀미가 나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좀.”
“몇 마리 안 남았어요.”
좀, 내려 달라구요! 끝마치지 못한 말이 래희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물론 래희가 비전투계 헌터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나름 어엿한 B급 각성자였기 때문에 D급 몬스터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류정우는 그녀가 반응할 새도 없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의 급소만 정확하게 명중시키며 빠르게 해치우고 있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류정우는 주변을 살피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래희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다 끝났어요.”
“우욱…….”
래희는 류정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나무를 짚고 속을 게워 냈다.
‘저 인간이 왜 이렇게 오늘따라 과보호가 심한 거지?’
물론 류정우로서는 매번 래희와 함께 게이트에 휘말릴 때마다 그녀와 헤어지는 일이 발생하니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아무 설명을 듣지 못한 래희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속으로 그를 향해 불만을 토하기 바빴다.
바보부터 시작해 온갖 해양 생물 이름이 다 나열된 이후에야 겨우 속이 진정된 래희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숲속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흑…….”
귀신인가?
평소 귀신이라면 아주 질색하기 때문에 놀란 래희가 류정우의 팔을 꽉 붙잡은 채 그의 뒤로 몸을 숨겼다.
밤중에 어두운 숲속에서 여자 울음소리라니. 부산 해운대에서 출몰된다는 장산범 괴담이 래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구슬픈 울음소리는 불빛이 비치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류정우는 래희를 등 뒤에 달고선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물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울음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래희가 그에게 더욱더 밀착하며 달라붙었기 때문에 류정우는 일부러 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우 씨……. 꼭 우리가 저곳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여태껏 퀘스트 때문에 던전에 들어왔을 때 발생했던 일들은 다 이유가 있었잖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퀘스트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죠.”
류정우의 말에 납득한 래희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류정우가 한 걸음씩 발을 옮길 때마다 잔뜩 긴장한 채, 그의 뒤에 숨어서 등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소리의 정체가 뭐든 눈으로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래희 씨. 앞을 좀 볼래요?”
그의 말에 래희가 등 뒤에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어?”
그곳에는 아담한 집 한 채가 존재해 있었다. 그들의 허리춤에 오는 정도의 사람이 살 만한 높이의 작은 집.
환하게 밝혀진 집 안에서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집 안에서 밖의 자신들의 기척을 느꼈는지 갑작스럽게 울음이 멈췄다.
그리고 문 옆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의 커튼이 살짝 젖혀지는 게 눈에 보였다.
“…뭐죠?”
“드워프… 같은데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래희는 커튼을 젖힌 생명체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류정우는 단번에 정체를 맞춘 래희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그녀가 귀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실종되었을 때 본 적이 있겠지.’
처음 퀘스트를 보았을 때 드워프의 정체에 대해서 무엇인지 추리할 수 없었다. 지구에는 그런 몬스터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생김새에 대해 전혀 짐작도 못 했지만, 마주하게 된 드워프의 모습은 몬스터가 아니라 오히려 키가 작은 사람에 가까웠다.
혹시라도 집 안의 누군가가 들을까 그들은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퀘스트에 드워프의 유리가 있었죠.”
“네. 어쩌면 거기에 적힌 드워프가 저 집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래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렸을 때, 드워프에 대해 배우기로는 드워프는 마을을 이루며 무리 짓고 산다고 들었는데 왜 이 드워프는 외딴 숲에 혼자서 살고 있는 거지?
하지만 래희의 의문은 더 꼬리를 물고 이어 갈 수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드워프의 집 문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 마법사. 날 왜 찾아온 거지?”
류정우는 드워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래희는 알아들었는지 드워프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전에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언어였다.
“나?”
래희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드워프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너.”
“내가 왜 마법사인데?”
그녀의 말에 드워프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래희가 입은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는데 그러면 마법사가 아니면 뭐냐? 지망생?”
하지만 마법사 지망생은 마법사 로브를 입지 못할 텐데?
드워프의 말에 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사 맞아.”
할 줄 아는 마법은 몇 개 없지만……
래희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드워프가 히죽거리며 비웃었다.
“돈만 많은 쭉정이였나 보군.”
순간 어이가 없어진 래희는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벙찐 채로 서 있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틀린 말이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새X가…….
아, 물론 드워프에게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