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런데 사장님.”
래희가 빵을 포장하고 있던 와중에 세연과 함께 온 일행인 천영은이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김주현 헌터와 따로 아는 사이이신가요?”
“네?”
갑작스럽게 들려온 이름에 래희는 당황했다.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래희의 반응에 천영은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역시 아시는 사이셨군요!”
음… 역시라니?
당황스러움 갈무리한 후 래희는 조금 불편하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천영은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요즘 잘나간다는 ‘야미베어 베이커리’ 빵집에 방문하려고 오전 반차를 쓰겠다고 하니까 떨떠름해 하시더라구요. 원체 표정 변화가 없는 상사라서 신기했거든요.”
당연한 거 아닌가?
래희 자신이었어도 다른 사람에게서 김주현의 이름을 들었다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떨떠름한 반응을 숨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래희는 사적인 이야기를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천영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직장 상사의 사적인 부분을 궁금해하다니 성격이 어지간히도 이상하다 싶었다.
“대학 동기라 이름만 아는 사이예요.”
라고 래희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나 천영은의 집요함은 끝날 줄을 몰랐다.
“단순히 대학 동기인데 떨떠름해 한다구요? 그 김주현이?”
점점 선을 넘는 질문에 래희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세연이 그만하라며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는 천영은의 무례에 결국 세연은 래희에게 미안하다는 눈인사와 함께 그녀를 가게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래희는 폭풍이 지나간 것만 같은 기분에 어지러움이 찾아와 이마를 짚으며 계산대 뒤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면에 제정신 아닌 사적인 질문을 늘어놓다니.
“…미친 사람인가?”
고등급 각성자일 수록 정상인이 없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이런 미친 사람이 부하 직원이라니. 어지간히도 힘들겠다.
래희는 처음으로 김주현에 대한 연민이 차올랐다.
* * *
여느 때와 같이 가게를 운영하며 바쁜 일주일을 보낸 후 맞이하는 휴일 아침.
가게가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져 주말 내내 가게를 쉬던 걸 줄이고 일요일 하루만 휴일을 가졌다.
일주일에 단 하루만 있는 달콤한 휴일은 언제나 늘 늦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갑자기 떠진 눈에 래희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다.
‘왜지……? 왜 이렇게 이유 없이 불안한 거지?’
래희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자신의 곁에서 함께 자고 있어야 할 곰순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곰순아?”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창밖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성좌의 메시지를 따라 커튼을 살짝 젖히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곰순이는 수확이 끝나 비어 있는 넓은 밭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었다.
래희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질끈 하나로 올려 묶고 급하게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곰순아 뭐해?”
집에서는 항상 커진 몸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래희가 곰순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기보다 키가 큰 곰순이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곰순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봤다. 표정을 알 수 없는 평범한 곰 인형 얼굴이 어쩐지 우울해 보였다.
“너, 울어?”
“끄잉…….”
래희의 말에 곰순이의 덩치가 작아지더니 그녀에게 폴짝 뛰어올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눈가를 비비며 그녀에게 칭얼거렸다.
“왜 그래?”
“뀨, 뀨우 뀨뀨!”
곰순이는 열심히 손짓하며, 창고의 밀이 이제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밀 씨앗을 뿌려도 자라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내일 모래면 9월이잖아. 모자라지는 않을 텐데?”
“뀨우 뀨 크앙!”
래희의 말에 그럼 9월에는 저 맛있는 과일들을 키우지 못하는 거냐고 반박하다가 신경질을 냈다.
“어… 그건 그렇네?”
어떡하지? 그때, 래희는 문득 자신이 수행 중이던 퀘스트의 보상을 떠올렸다.
“퀘스트만 끝내면 보상으로 과일 작물 3종 세트를 준다고 했어. 그러면 그냥 계절에 맞게 메뉴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래희의 말에 곰순이는 더 화가 난 듯했다.
“뀨! 크앙! 컁!”
곰순이의 목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곰순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복숭아를 이대로 잃을 수 없다며 소리쳤다. 현실을 부정하는 듯이 당장 방법을 생각해 내라며 우울한 기색은 던져 버리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래희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잊혀진 마을이라는 이 공간은 계절이 계속해서 변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시스템이 정한 규칙을 그녀로서도 바꿀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뀨… 뀨우웅…….”
곰순이의 투정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을 때였다.
래희의 눈앞에 갑작스러운 시스템 알림 창이 나타났다.
[서브 퀘스트 : 계절 메뉴는 저리 가라.]
계절에 상관없이 맛있는 과일을 드시고 싶으시다고요? 그렇다면 온실을 지어 보는 건 어떨까요?
마을 회관에 존재하는 문을 통과하여 재료를 구해 봅시다.
- 드워프의 유리 (0/5)
- 세계수의 목재 (0/1)
- 완료 보상: 가게 경험치 +3,000, 상점 업데이트
‘서브 퀘스트……?’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퀘스트…….
래희는 시스템에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진작에 이런 일이 가능했으면 미리 알려 주던가… 왜 이제야 필요하다고 하니까 온실을 지어 주겠다고 퀘스트를 주는 거지?
그러나 래희는 시스템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의문을 금방 털어 버렸다.
래희는 밝아진 표정으로 품에 안긴 곰순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곰순, 방법이 생겼어.”
* * *
[축하합니다! ‘퀘스트: 빵에는 커피가 있어야지’를 완료하였습니다.]
[완료 보상으로 ‘가을 작물 3종 씨앗’이 주어집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완료 보상으로 ‘야미베어 베이커리’의 경험치가 증가합니다.]
[경험치 +700 획득으로 ‘야미베어 베이커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Lv.25→Lv.26)]
류정우가 퀘스트를 위한 마지막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 마시자마자 퀘스트 완료 알림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을 작물 3종 씨앗’
래희는 당장 인벤토리를 열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얼마간 꼼지락거리다가, 망설임 끝에 류정우를 향해 입을 열려던 찰나.
“래희 씨, 무슨 일이 있으세요?”
래희가 자신의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류정우가 먼저 물었다.
“아, 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녀는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래희의 스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를 제외하고서 총 세 명. 하지만 그중 누구보다도 래희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류정우뿐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류정우는 래희가 긴장한 듯하자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가볍게 말했다.
“래희 씨랑 알게 된 지 벌써 8개월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처음으로 부탁을 들어 보네요.”
그제야 래희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마을 회관’이라는 공간에서 다른 게이트로 이동한 적이 있잖아요…….”
“아, 혹시 이번에 새로 받은 퀘스트가 그것과 관련이 있나요?”
가게 매출 1등 공신. VVVIP 손님. 전직 아이돌 S급 헌터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네… 혼자 수행하기에는 어려워 보여서요. 바쁘지만 않으시다면…….”
“아, 전혀 안 바빠요.”
래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류정우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마치 그녀가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때였다.
[동료 ‘류정우(S)’를 구했습니다!]
[조건 달성!
‘류정우(S)(동료)’에게 ‘잊혀진 마을’ 출입 권한이 부여됩니다!
앞으로 잊혀진 마을의 유일한 주민 ‘권래희(B)’의 허가 없이도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
‘출입 권한이라니?’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갑자기 래희가 놀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무언가 잘못되었나 걱정된 류정우가 래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아… 그게…….”
디링―!
래희가 마저 대답하기도 전에 경쾌한 알람 소리와 함께 류정우 앞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하나 나타났다.
[사용자 ‘류정우’가 ‘권래희(B)’의 ‘동료’로 등록됩니다.]
[퀘스트 보기가 공유됩니다.]
[서브 퀘스트 ‘계절 메뉴는 저리 가라’를 확인하시겠습니까? Y / N]
[사용자 ‘류정우’에게 ‘잊혀진 마을’의 출입 권한이 부여됩니다. 출입을 위한 문을 등록해 주세요. (1회)]
“아…….”
메시지를 확인한 류정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래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류정우는 방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려 했던 건지 알아차렸다.
그렇게 래희의 집 앞으로 연결이 되는 문을 자신의 집에 있는 방문에 등록한 후, 래희와 함께 다시 마을 회관을 찾았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것도 없는 폐가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사무실 책상, 휴게 의자, 접수대 등 마을 회관이라면 있어야 할 법한 인테리어로 깔끔하게 탈바꿈되어 있었다.
류정우는 신기하다는 듯이 마을 회관 내부를 둘러보다 뒤쪽에 나 있는 다른 게이트로 이동하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드워프의 유리라…….”
그는 자신에게 공유된 래희의 퀘스트를 보며 턱을 쓸었다.
애초에 자신은 단 한 번도 퀘스트를 받아 본 적 없어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성좌와 계약에 성공해 재각성한 사람 중 일부는 성장을 위한 퀘스트를 부여받기도 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신기했다.
“드워프의 유리를 구하기 위해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 건진 아나요?”
하지만 래희는 류정우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애초에 퀘스트에는 마을 회관의 문을 이용하라고만 적혀 있지 더 자세한 설명은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래희의 설명에 류정우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열쇠를 한번 꽂아 볼까요?”
류정우의 제안에 래희는 어느새 열쇠로 변한 반지를 손에 쥐고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잠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에 정확하게 꽂힌 열쇠가 옆으로 손쉽게 돌아갔다.
래희가 문을 열려던 그때, 두 사람 앞에 동시에 알림 창이 떠올랐다.
[이세계 출입구]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 개미굴(A)
- 봄의 정원(B)
- 저주받은 숲(B)
- 이벨 사막(C)
- 제노 산맥(C)
…
- ???(?)
- ???(?)
생각지도 못한 시스템 창에 놀란 래희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선택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