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점점 주변이 밝아 왔다.
‘오, 벌써 아침이네.’
물론 게이트 속 시간이 빨리 가는 것도 있겠지만 류정우와 의외로 죽이 잘 맞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찾아온 어색한 정적에도 류정우가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자, 래희는 금세 류정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는 사실을 잊고 소소한 대화를 이어 갔다.
“해가 금방 뜨네요.”
류정우는 래희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는 이동해 볼까요? 뭐가 있는지 상황을 파악해봐야 게이트를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겠죠.”
래희는 류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때, 래희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뻗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뻗어진 손을 따라 어깨까지 올라가 류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자, 류정우는 안 잡고 뭐 하냐는 듯이 턱짓을 했다. 예상치 못한 류정우의 배려에 래희는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와, 훅 들어오네.’
남주 버프인가?
래희는 류정우의 손을 잡고서 그가 일으켜 주는 대로 자리에서 쉽게 일어났다.
띠링―!
[필드 ‘잊혀진 사막(C)’이 깨어납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알림 메시지가 동시에 등장했다. 래희와 류정우는 말없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던전이 활성화된 이상 클리어해야만 게이트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알았다.
“…어떡하죠?”
게이트에 떨어진 게 도대체 몇 번째인 건가! 비전투계인 자신이 계속해서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게 너무나도 억울했다.
“꺅!”
그때, 갑자기 래희의 발밑으로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개미지옥 같은 사막의 모래는 순식간에 래희를 허리춤까지 집어삼켰다.
놀란 래희가 류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류정우도 래희와 사정이 마찬가지였다.
래희와 마찬가지로 류정우는 허리춤까지 차오른 모래 위로 올라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S급인 류정우의 힘으로도 사막의 개미지옥 같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건 역부족인 듯했다.
주변에 그의 몸을 지지할 만한 마땅한 지지대가 없어 무력하게도 류정우는 모래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래희 씨!”
상황을 파악한 류정우가 어느샌가 사라져 버린 래희를 찾으며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류정우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사막은 두 사람이 언제 존재했냐는 듯 고운 모래 입자로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뒤덮여 있었다.
* * *
내가 또 죽은 건가?
질식당하는 것처럼 강한 압박감이 가슴을 조여 왔다. 뜨거운 온도에 온몸이 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타오를 듯한 뜨거움이 끝나고 찾아온 추위에 래희는 온몸을 떨며 몸을 웅크렸다.
아무것도 없는 뜨거운 사막에서 추위라니. 래희 그녀가 죽은 게 아니고서야 느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으…….”
여기는 어디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오는 몸을 겨우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래희는 안도감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픈 걸 보니 죽은 건 아니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죽는다는 말은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며 당신을 나무랍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제법 어둠에 적응된 시야는 형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두운 통로가 보였다. 마치 동굴 같은 공간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사막 아래로 끌려 들어왔다. 하지만 사막 아래에 있을 법한 건 개미굴 정도… 개미굴?
[필드 ‘은개미 개미굴(A)’에 입장하셨습니다.]
……?
“다른 던전으로 이동이 됐다고?”
던전 안의 던전이라니. 래희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상황에 놀라 자리에 멈춘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A급.
“…망했네.”
진짜 X된 거야.
래희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되뇌며 급하게 인벤토리에서 마법봉을 꺼내 들었다.
‘반짝반짝’
스킬을 사용해 밝은 빛을 비추자 그제야 래희는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눈으로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10평 정도 되어 보이는 방 주변으로 통로로 보이는 어두운 굴이 보였다. 그녀의 주변을 비추자 바닥에는 죽어 있는 다른 몬스터들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욱.”
역겨운 광경에 비위가 상한 래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통로 쪽으로 달려갔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아무리 봐도 이곳은 개미들의 음식 저장고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저도 눈이 있으니까 알거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개미 밥이 될 게 뻔하니 어서 빨리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래희가 서 있는 통로를 포함해 이방에 연결된 통로는 총 세 개.
음식을 두는 저장고는 보통 중간층에 위치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잘못 선택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를 고르게 되면 그야말로 죽을지도 몰라.’
개미굴의 맨 아래층은 여왕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주변에는 강한 무력을 지닌 경호 역할을 맡은 개미들도 존재하겠지.
하지만 육안으로 봐서는 어디가 내려가는 길이고 올라가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방 크기라면 굴의 길이가 아주 길 것이 분명했기에 구슬을 던져 각도를 추정하거나 직접 걸으며 판단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당신의 높은 운 스탯을 믿어 보라 조언합니다.]
“제가 운이 좋았으면 이렇게 반년 만에 두 번씩이나 게이트에 휘말렸겠어요?”
그리고 진작에 잘난 S급으로 각성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었겠죠.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에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확률은 모두 33%’
물론 통로 세 개 전부 아래로 향하는 길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차라리 아래로 내려가게 되더라도 도중에 류정우라도 마주치면 괜찮을 텐데.’
물론 류정우가 래희와 같은 게이트로 휘말렸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성좌 말대로 운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
래희는 이 이상의 고민은 의미 없다는 판단하에 가장 오른쪽의 통로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얼마간 걸었을까, 그녀는 창고 공간으로 보이는 수많은 방을 지나쳤다. 평지를 걷는 것처럼 통로의 각도가 너무나도 낮았기 때문에 아래로 향하는 길인지 위로 향하는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거의 한 시간을 끝없는 굴속을 걸었는데도 개미 한 마리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조용하니까 뭔가 불안한데.’
이렇게까지 큰 개미굴이 조용할 수 있는 건가?
그때였다.
‘혹시나 하면 역시나 라더니.’
래희의 귓가로 키익,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개미가 있어.’
키익키익.
탁탁탁탁.
개미의 울음소리와 함께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커지는 소리와 함께 래희의 발밑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래희는 개미로부터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선 무작정 반대편 통로 끝으로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빠르게 이동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래희는 통로 끝에서 두 갈래의 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녀의 뒤쪽으로는 여전히 다가오는 개미의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는 망설임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통로를 선택했다.
‘바깥으로 연결이 되니까 바람이 불어오는 거겠지.’
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약하게 부는 어두운 통로 끝에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거대한 방이 존재했다.
스킬로 만든 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하얗고 동그란 물체가 그녀의 주변에 차곡차곡 하나씩 배열되어 있었다.
“이거, 혹시…….”
그래. 여기는 바로 개미의 번데기를 두는 방이었다. 그녀가 통과해 온 통로 쪽에서 개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자 래희는 역겨움을 참으며 사람만 한 크기의 번데기 사이사이를 이동해 가며 몸을 숨겼다.
혹시나 들킬까 싶어 스킬로 밝혀 둔 빛을 끄고 소리에 집중했다. 개미 몇 마리가 정찰하는 것처럼 통로 쪽에서 어슬렁거리는 소리가 얼마간 들렸다가 사라졌다.
“휴…….”
완전히 소리가 들리지 않을 시점에 래희는 꺼 두었던 불을 다시 환하게 밝혔다.
그러자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래희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눈앞의 반투명한 개미의 하얀 번데기 안으로 꿈틀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욱.”
비위가 약한 래희는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참으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방이 얼마나 큰지 번데기 더미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뒤를 보라고 합니다.]
쩌억.
성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서 있던 자리의 뒤쪽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뒤돌아섰다.
번데기 윗부분 사이로 딱딱거리는 개미의 입이 보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래희가 서 있는 주변으로 개미들이 번데기를 찢고 나오기 위해, 하나둘 윗부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X발.”
빨리 나가야 했다.
A급 게이트의 몬스터이니 래희가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운 스탯은 더럽게 높으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운이 작용하지 않았다.
‘류정우랑 왜 떨어져서는!’
항상 류정우와 함께 게이트에 떨어져도 결국은 혼자가 되는 걸 보면 아무리 운 스탯이 남들보다 높아도 결국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라는 건가?
래희는 속으로 욕설을 짓씹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존재하는 건 막다른 벽뿐. 뒤를 돌아보니 개미 한두 마리는 벌써 배 부분까지 번데기 밖으로 거의 다 나와 있었다.
‘한시가 급한데!’
래희는 다른 개미를 깨우게 되더라도 일단 나가는 길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불빛을 높은 위치까지 던져 올렸다.
그게 시발점이 되었는지 사방에서 번데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까운 벽 쪽에서 통로로 보이는 새까만 입구가 보였다.
‘빨리!’
방금 막 번데기를 다 찢고 나온 개미에게서 시선을 돌린 래희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통로 쪽을 향해 뛰어갔다. 다른 개미들이 마저 다 부화하기 전에 도망쳐야만 했다.
옆쪽에서 반쯤 나온 개미들이 그녀를 향해서 입을 딱딱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키익키익.
[‘어린 은개미 C’가 부화하였습니다!]
[‘어린 은개미 C’가 부화하였습니다!]
[‘어린 은개미 C’가 부화하였습니다!]
연달아 절망스러운 소식의 시스템 알림이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