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무언가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 게 분명하니 문을 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합니다.]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를 무시하며 문손잡이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게 문에 처져 있는 블라인드를 살짝 올려 밖을 확인했다.
문 앞에는 오른쪽 뺨에 큰 흉터를 가진 남자가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서 있었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존재하는 시대에 흉터 같은 건 흔한 거였지만, 래희는 남자의 위협적인 분위기에 놀라 급하게 블라인드를 내렸다.
위협적이고 거친 인상의 남자는 아무도 없을 외곽 지역의 골목을 살펴보느라 래희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뭐지……?’
래희는 숨을 들이켜고는 뒷걸음질 쳤다. 이상하게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집으로 이동하자.’
밖에서 래희의 기척을 알아차릴까, 래희는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전에 누구냐고 물어봐서 사람 있는 거 알 텐데…….”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가게 털리는 건 걱정하지 말고 상황이 꺼림칙하니 일단 몸부터 숨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당신을 걱정합니다.]
래희는 주방 쪽 불을 끄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조리대 위에 남은 빵들을 챙기고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해 집으로 이동했다.
스킬로 만든 문의 황금빛 빛무리가 거의 사라졌을 때쯤, 아무도 없는 가게 문이 철컥 소리가 나며 열렸다.
분명 굳게 잠겨 있었던 문이 언제 닫혀 있었냐는 듯 강제로 침입한 흔적도 없이 손쉽게 열렸다.
큰 소리로 저벅거리는 부츠 소리가 인적 없이 조용한 가게 안을 울렸다. 주방 쪽 커튼을 치우며 들어온 남자의 손끝이 방금까지 래희가 사용하던 조리대를 쓸었다.
* * *
다음날 새벽.
래희가 가게로 돌아왔을 때 전날 밤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게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기분 탓인가?”
깨끗한 진열대와 카운터, 사용 흔적이 없는 조리대까지. 어제저녁, 퇴근하기 전까지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게도 평소와 다른 위화감이 들었다.
‘…과민 반응이겠지.’
래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젯밤 만들었던 신메뉴의 사진을 문스타에 업로드 했다.
[yammybear_bakery]
(사진)
야미베어 베이커리의 신메뉴를 공개합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메뉴 곰순이 멜론빵을 만나볼 수 있어요!
#베이커리 #야미베어 #하양곰순이던전앞 #멜론빵
래희가 문스타를 올리기 무섭게 시끄러운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문스타 팔로우 30명이 증가하였습니다.]
[명성 획득으로 스탯이 3 증가합니다.]
[문스타 좋아요 수 10개를 달성하였습니다.]
[명성 획득으로 스탯이 1 증가합니다.]
“뭐지?”
이렇게 빨리 문스타 반응이 오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새로운 게시글을 올린 것도 거의 한 달 만이었지만, 이전과 비교해 봐도 한 달 만에 팔로우가 30명에서 400명으로 증가하다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최근에 류정우랑 최재휘 때문에 빵집에 대한 언급량이 많아진 탓일까? 래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뭐, 그래도 장사가 잘되니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으나 벌어들이는 돈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아지기 시작하자, 자본의 맛을 알게 된 래희는 지금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금융 치료라는 게 이런 걸까?”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한숨을 쉽니다.]
[왠지 자신 때문에 당신이 타락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고 중얼거립니다.]
“돈 좋아하는 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예요?”
래희는 어이가 없어졌다.
‘하긴, 저 성좌의 속마음은 이전에도 알 수 없었지.’
그렇게 생각한 래희는 눈앞에 떠 있는 성좌의 메시지를 치우며 가게를 오픈할 준비를 했다.
[곰순이 멜론빵 S]
- 맛 ★★★★★+★
- 향 ★★★★★+★
- 섭취 시 1분 동안 상태 이상을 해제시켜 준다.
래희는 어젯밤 새로 개발한 곰순이 멜론빵을 차곡차곡 진열대 위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일반인이건 헌터건 일상생활하면서 상태 이상에 놓일 일은 거의 없으니까.”
몬스터를 만났을 때나 드물게 겪게 되는 상태 이상을 해제하는 부가 효과라면 남들에게 들킬 위험도 현저히 적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만들게 된 S급 메뉴를 보며 미소 지은 래희는 뿌듯한 표정으로 멜론빵을 내려다봤다.
“명성만 획득하면 이번 퀘스트는 끝이네.”
래희는 드물게 쉬운 퀘스트를 받았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의 메뉴 개발을 위한 개고생들은 깨끗하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게이트에 끌려 들어가던 것보다는 낫지.’
오전 8시. 가게를 오픈할 시간이 되자 래희는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 잠금 장치를 풀었다. ‘OPEN’이라고 적힌 쪽으로 팻말을 돌리고 커튼을 걷자 밖으로 사람들이 오픈 런을 위해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오픈하겠습니다! 5명씩 입장해 주세요!”
다행히 새로 나온 메뉴인 곰순이 멜론빵은 잘 팔리고 있었다. 안 팔릴까 내심 긴장했던 래희는 다른 빵들과 마찬가지로 줄어들고 있는 멜론빵의 진열대를 보며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진열대에 있는 빵이 거의 줄어들고 가게 밖의 손님들의 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을 때쯤, 어딘가 익숙한 남성이 걸어 들어왔다.
‘어디서 봤지?’
정확하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래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손님들의 결제 뒤, 남자의 차례가 되어 그가 카운터에 다다랐다.
“3만 원입니다.”
곰순이 멜론빵 두 개. 래희가 빵을 포장하며 남자가 건네는 카드를 받아 들었다. 카드를 포스기에 꽂고 결제를 기다리던 그때, 그제야 래희는 남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 오른쪽 뺨의 흉터.
“아…….”
래희는 결제가 완료된 것도 잊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라고 조언합니다.]
[왜 소설 속 클리셰처럼 멍하니 굳어 있는 거냐고 정신 차리라 소리칩니다.]
분명, 어젯밤에 가게로 찾아온 남자였다.
‘뭐지?’
성좌의 말에도 멍하니 굳어 있다, 남자의 눈과 마주치기 직전, 그들 사이로 손 하나가 뻗어 들어왔다.
“사장님? 계산 다 된 것 같은데요?”
래희의 시야가 흔들리고 손이 갑작스럽게 등장하자 그제야 래희는 정신을 차리며 남자에게 카드를 건넸다.
남자가 래희를 조용히 내려다본 것도 같지만 누군가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며 시선을 차단했다.
래희는 자신의 앞에 꽉 차는 누군가의 넓은 가슴팍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탁한 빛의 회색안을 가진 김주현이 무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얘가 여길 왜 와?’
* * *
4년 전 겨울.
김주현의 삶은 하루아침에 180도 바뀌어 버렸다.
아버지 백화 길드 김유한 길드장을 따라 참여했던 대던전 토벌 중 한 달간의 실종. 게이트에서 돌아온 귀환자라 부르기에는 애매한 한 달의 기간 동안 그는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버렸다.
“새로운 실험체가 들어왔습니다.”
“재료가 부족했는데 마침 잘되었어.”
실종되었던 게이트 안에서 마주하게 된 이세계의 사람들. 그리고 A급 헌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손쉽게 잡히고 말았다.
그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김주현의 의식이 굳어 버린 몸 안에 갇힌 채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몸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무력하게도 함께 실종된 동료들의 죽음을 가만히 누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이 거의 다 되었을 때쯤, 그는 드디어 자신의 손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같이 끌려온 동료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무언가 아주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들이 멀쩡하게 일어서기 시작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며 그려 낸 듯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말을 섞지 않았으며,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그들이 실종되었던 던전을 벗어나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한 달여 동안 게이트 밖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을 발견한 김주현은 그제야 그 이상한 위화감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은 태도. 말투. 행동. 모든 게 바뀐 건 없었지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
그가 느끼기로는 분명, 죽었다 깨어난 동료들은 더는 예전의 동료들이 아니었으며 동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동료들의 기억을 이용해 그들인 척 연기하는 이들은 지구인이 아닌 다른 ‘무언가’들이었다.
그들은 멀리서도 서로의 존재와 감정 일부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건 주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다른 동료들처럼 주현은 누군가에게 몸을 빼앗기거나 몸속의 다른 영혼으로 인해 주도권을 빼앗긴 건 아니었으나, 더는 예전의 평범한 20살 대학생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주현은 게이트 밖으로 벗어나 자신의 팔 안쪽에 이식된 아주 작은 마석을 발견한 뒤,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 연인,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그동안의 ‘김주현’의 삶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감정의 일부가 ‘그들’과 공유되는 것이라면,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가능한 선에서 주변을 정리하는 게 그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재언은 주변을 정리한 뒤, ‘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전, ‘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래희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오자 김주현은 동요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피하고 또 피해 오던 권래희 앞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사장님? 계산 다 된 것 같은데요?”
김주현은 ‘그들’과 같은 회색안을 가진 남자의 시야를 일부러 가리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앞으로 권래희와 엮일 일이 없을 거라 다짐했지만 이번만은 그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손님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린 김주현이 가게를 정리하는 래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래희가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 가게 그만두든지. 아니면 윤청현 길드장한테 도움을 구하든지. 당분간은 몸 좀 사려.”
갑작스럽게 등장해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 김주현에 어이가 없어진 래희는 눈썹을 들썩이며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어조로 되받아쳤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가게를 그만두라니?”
“자세하게는 나도 말 못 해.”
“김주현!”
래희의 외침에도 김주현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로 열릴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