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래희가 전생에 읽었던 헌터물 웹소설 제목에 SS급을 넘어서는 등급이 많이 나왔던 걸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이론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도 그런 소설은 있을 텐데?’
물론 실제 세상에 적용된 개념은 아니었다. S급으로 정해진 범위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의 아이템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암묵적으로 S+라고 불리기만 할 뿐이었다.
- 이 글이 유명해지기 시작하는데도 20분 동안 미니만티코어 상대한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글이 며칠 동안이나 올라오지 않은 것 보니까 진짜로 체력 스탯 30 이상 올려 주는 아이템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아이템을 가진 게 문제 될 일도 아니고 숨길 이유가 있나? 공개되지 않은 S급 아이템들도 많으니까.
└D급 비전투계가 그 정도 아이템 들고 있으면 게이트 밖이 더 위험한 거 아니냐. 쥐도 새도 모르게 아이템 노리는 인간들한테 죽을 수도.
└해명글 올라옴. https://www.hunternet.net
└삭제된 글이라고 뜨는데?
└글 쓴 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삭제되었다고?
└진짜 뭔가 있기는 있는 건가 봄.
아직 그녀와 관련된 글을 발견한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삭제된 게시글?”
헌터넷 익명 게시판
[잡담] 요즘 제 이야기가 2차 생산이 되어 오해가 생겨 해명 드립니다. (24)
며칠 전 올린 글에서 본의 아니게 오해의 여지를 남겨 제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해명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인터넷상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SS급 아이템의 존재는 사실이 아닙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끼니를 때우기 위해 같이 조난되었던 분이 나눠 주신 음식을 먹었던 것이 전부입니다. 이후에 곧바로 미니만티코어와 마주쳤기 때문에 제 스탯을 확인해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류정우 헌터가 저를 구하러 오기 전까지 제가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났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만티코어를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20분 동안 C급 몬스터를 상대로 버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 달랐던 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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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션이라도 따로 챙겨 먹은 거 아님?
└(작성자) D급 비전투계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 비싼 걸 마시겠어요. 게다가 게이트에서 싸울 일도 없어서 필요도 없는데.
- 평소랑 같았으면 이상한데. 뭐가 다르긴 달랐겠지. 재각성?
└(작성자) 재각성은 절대 아닙니다. 차라리 재각성이면 얼마나 좋아요.
└재각성이면 벌써 여기저기서 인터뷰하고 난리 났겠지.
- 뭐 잘못 주워 먹기라도 했음?
└스탯이 오른 거면 잘못이 아니라 잘 주워 먹은 거지.
└주단우가 준 빵 먹었다며? 혹시 그게 포션처럼 부가 효과가 있는 거 아님?
└ㅈㄹ한다. 빵집 바이럴이냐?
* * *
얼마 전 래희가 류정우에게 모든 능력을 들키게 된 그날 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도 되는 겁니까?”
윤청현 길드장의 연락을 받고 청해 길드로 밤늦게 찾아온 류정우가 말했다.
“어차피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 손에 꼽으니 상관없을 거네.”
윤청현의 대답에 지하실 구석에서 등을 기댄 채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재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래도 상대는 일반인입니다. 아무리 배후에 알 수 없는 각성자 집단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금으로써는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으니, 이 일이 세어 나가면 각성자 관리법에 대한 빌미를 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재언은 싸늘한 눈으로 지하실 한가운데 묶인 채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훑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지만, 겁을 잔뜩 먹었는지 혈색이라곤 전혀 비치지 않는 하얗게 질린 얼굴에 오줌을 지린 바지가 축축했다.
예민한 각성자의 후각을 찌를 듯한 지린내에 재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보아하니 아는 건 없어 보이는데, 이제 어쩔 겁니까?”
정신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는 일반인을 그대로 풀어 주는 것도 문제였다.
20여 년 전 대재앙으로 전 세계의 인구가 거의 절반가량 줄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헌터 인구는 대한민국의 5%밖에 되지 않았다.
헌터들의 희생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안정된 삶을 찾아온 덕분에 비각성자들의 불안함도 거의 해소된 지금은 나름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평화가 깃들기 시작하자 인류의 95%를 차지하는 비각성자들의 불만이 하나둘 커지기 시작했다.
‘왜, 모든 혜택을 각성자들이 가져가는 것인가?’
‘혜택의 수준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높다.’
‘각성자들이 누리는 이권에 비해 그들이 짊어지는 의무가 적다.’
최근 들어 비각성자에 대한 역차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일본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적인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재언은 대재앙을 기억하는 세대들은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20년 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최근 들어 비각성자와 각성자를 대립시키려는 여론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죄명이 확실하지 않은 무력한 비각성자를 각성자들이 납치하고 심문했다? 그것도 전 국민이 신뢰하는 1세대 대표 헌터 윤청현이?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겪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거래를 한 건 분명한데, 일반인이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듣고 게이트를 임의로 발생시켰는지 그 정도는 알아야지.”
하지만 윤청현은 자신의 아들 재언의 말에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단호하게 말하며 의식을 잃은 남자를 내려다봤다.
기절하기 전까지 울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 남자는 작년까지 래희가 몸담았던 회사 ‘퍼펙트힐 제약’의 사장이었다.
‘정말, 모릅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공항이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휴대 전화를 켜자 여기저기서 무섭도록 연락이 오기 시작했죠.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제가 왜 나름 잘 되어 가는 회사를 버리고 가진 것 없이 연고도 없는 타지, 그것도 위험한 남미로 떠나겠습니까.
간파 스킬을 가진 윤청현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비각성자니 쉽게 당한 거겠지. 며칠 더 붙들어 놓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난 건지 그 정도는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윤청현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재언은 그의 옆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류정우를 흘끗 바라봤다.
“아버지, 류정우 헌터가 ‘그것’에 대해 알아도 괜찮은 겁니까?”
정신계 스킬. 위험성이 널리 알려져 있어 헌터들 사이에서도 배척받는 스킬이다. 따라서 아들 재언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윤청현의 숨겨진 능력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래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그저 그가 원거리 전투계 헌터라는 것 정도랄까.
“그래.”
다른 이가 들었다면 경악할 만한 윤청현의 위험함 정신계 스킬에 대한 발언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류정우가 지난 27년간 마냥 일반인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달 전까지 일반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도, 지하실에서 일어나는 일반인 심문에 대해서 무척 태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고작 각성자가 된 지 세 달이 겨우 지난 신인 헌터가 할 법한 반응은 아니었다.
‘이전에 본 류정우에 대한 보고서 내용 중 특이 사항이 이상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긴 했지.’
얼마간의 관찰 뒤 그는 작년에 래희가 휘말린 게이트에서 류정우가 S급으로 각성해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말한 주장이 거짓임을 알아차리고는, 류정우가 숨기는 사실이 많다는 것을 눈치챘다. 더군다나 래희가 보호자였던 윤청현 자신에게 숨기는 사실이 있다는 것까지.
같은 S급이라 류정우에 관해 완벽하게 간파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그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남들이 들었다면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겠지만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그의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혼자서 많은 일을 해결하는 건 어렵다. 재언으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윤청현은 믿을만하다고 판단한 자신의 직감대로 류정우를 자신의 일에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다 .
그때, 여태껏 가만히 있던 류정우가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이미 도착했을 땐 상황이 다 끝나 있었지 않습니까.”
류정우가 무감정한 눈으로 윤청현을 응시했다.
“자네한테 확인할 게 있어서.”
보다시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어 항상 인력난이거든.
류정우는 겨우 몇 달 알게 된 자신이 어딜 봐서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발을 들인 마당에 발 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윤청현의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경고인 건가? 나중에 딴말하지 못하게 여기로 부른 것일 수도 있겠네.’
아니면, 공범으로 만든 것이거나.
그때, 조용한 지하실의 정적 사이로 윤청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권래희.”
갑자기 들려오는 의외의 이름에 류정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며 윤청현의 초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앞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뜬금없는 문장이 지하실 복도에 울렸다.
세 사람을 제외한 아무도 없는 지하실 복도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류정우의 얼굴을 한번 응시한 윤청현은 자신의 아들 윤재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재언. 너라면 특히 래희가 숨기는 능력에 대해서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텐데?”
래희에게 물으면 쉽게 끝날 일이었지만 래희가 자신에게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독립심이 강한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보호받는 걸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때문에 윤청현은 두 사람을 향해 래희에 관해 숨기고 있는 사실을 말하기를 종용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윤청현에게 순순히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설명하기도 전에 윤청현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 생각했나? 특히 윤재언?”
재언은 자신의 아버지의 싸늘한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알 테고. 아, 둘 다 S급이라 당연히 지켜 줄 수 있을 거로 판단했던 건가?”
그렇다면 너무 자만인 것 같군.
윤청현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류정우와 윤재언을 한번 훑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겨 길드장실로 향했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당연하다는 듯 뒤에 서 있던 두 사람도 윤청현을 따랐다.
래희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윤청현이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