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래희의 말에 기사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청해 길드요?”
래희는 택시 기사의 어색한 반응에 의아해했지만 이내 청해 길드가 위치한 서울 안전지대 12번가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광경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도로는 통제가 되어 있었고 길드 건물 앞 분위기는 정신없이 어수선했다. 통제된 헌터 길드 건물 입구에서 전투계 헌터 팀이 심각한 분위기로 뛰어나와 이동하고 있었다.
“래희야!”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뒤돌자 아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 언니!”
A급 보조계 헌터, 한이현. 미국으로 파견 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친구이자 대학 선배였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인파를 헤치고 다가온 이현에게 래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에 래희가 휩쓸렸던 B급 게이트 사건 때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만.”
비록 보조계이긴 하지만 B급 헌터만 되어도 셀럽이 되는 세상에 A급 헌터인 이현은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현은 그녀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래희를 통제된 길드 건물 안으로 데려왔다.
“방금 C급 게이트가 안전지대 한가운데에 발생해서 분위기가 안 좋아.”
“C급이요?”
래희가 휩쓸렸던 B급 게이트도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안전지대에서 게이트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한 자릿수. 하지만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발생한 게이트 이후, 반년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C급 게이트에 많은 사람이 당황한 상황이었다.
“4, 5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 6개월도 안 지나서 다시 생겼잖아. 당연히 위에서는 다들 난리가 났지. 던전 관리청은 그동안 뭐 했냐고 말이야.”
“아…….”
“이번에는 휘말린 사람이 많아서 국가 소속 헌터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그냥 길드마다 갈 수 있는 인원이 다 파견되었어. 비각성자만해도 거의 100여 명이 휩쓸렸으니 말 다 했지.”
“100명이나 넘게요?”
100명이라니.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스탯이 올랐어도 여전히 래희조차도 C급 게이트는 버거운데 일반인들이 C급에 갇히면 정말 답이 없었다. 과연 다들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을까?
“문제는, 이번에 게이트가 발생한 자리가 무슨 콘서트홀이라고 했는데… 아무튼, 유명인이 거기서 휩쓸렸나 보더라.”
아, 그러면 더 난리겠네. 래희는 이현의 설명을 들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면, 오늘 류정우 씨한테 배달 온 건 언제 전해 주지? 요즘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현이 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잠시 옆을 비운 사이, 래희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렸다.
‘문자라도 남겨 놔야겠다.’
그때, 한 시간 전, 통신 문제로 오지 못했던 메시지 하나가 래희의 휴대 전화 위로 나타났다.
디링―!
[류정우: 래희 씨, 오늘은 제가 급하게 일이 생겨서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문자를 보냈었구나.”
그때, 래희의 곁으로 다가온 이현이 누가 들을세라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아니? 이번에 휩쓸린 사람 중에 류정우 헌터가 속했던 아이돌 그룹 멤버 하나가 있었대. 그것 때문에 더 난리잖아.”
헌터보다 아이돌이 인기가 없다 해도 류정우 헌터가 속했던 아이돌은 나름 유명했었으니까.
“네?!”
래희는 이현의 말에 기겁하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174cm의 장신, 날렵하게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탄탄한 몸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검은 머리.
한이현의 푸른빛의 눈동자에 래희의 놀란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 * *
- 지난 5월 1일 오전 11시경 안전지대 9번가에서 발생한 게이트가 게이트 발생 3시간 만에 역사상 최단 시간 게이트 클리어 기록을 세우며 완전히 정리되었습니다. 사상자는 총 32명으로…….
래희는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식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버스의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돈 많이 벌면 택시 타고 다니겠다고 다짐해 왔었지만, 항상 외곽 지역에 박혀만 있으니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래희는 세상 돌아가는 걸 구경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야, 그거 들었어?”
“아니, 못 들었는데.”
“좀!”
뒷자리에서 투닥거리는 고딩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어제 게이트에서 주단오랑 단둘이 낙오됐던 썰 말이야.”
주단오?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자 래희는 저도 모르게 고딩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제 주단오 솔로 앨범 팬싸 날이었다잖아. 자기 차례에 게이트에 휩쓸려서 같이 낙오되었었데.”
“부러운데 한편으로는 C급 게이트라고 생각하면 끔찍한데?”
어제 휩쓸렸다던 류정우의 전 동료. 주단오와 함께 휩쓸렸다는 팬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온 듯했다.
“같이 휩쓸렸던 팬이 다행히 D급 헌터라 살았다는데?”
“야, C급이 아니라 D급? 그 등급으로 누군가를 구하는 게 가능한 거였어?”
“물론 진짜로 구해 준 건 류정우였다고는 하는데, 들어 봐봐. 아니, 그 D급 말로는…….”
한창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때에 래희의 시야에 갑작스러운 성좌의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그러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지도 모른다며 정신 차리라 합니다.]
“아…….”
밖을 보니, 청해 길드 건물이 보였다. 청해 길드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는 버스의 안내 소리도 못 듣고 고딩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었다.
‘아쉽네.’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해야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의 눈앞에 안전지대 12번가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며칠 전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전부 사라져 있었고 건물 입구는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리는 듯했다.
래희는 늘 그렇지만 오늘따라 더 유난히 어색한 기분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방문 목적.
원래라면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직원이 래희의 얼굴을 알아봐서 한 번에 통과했겠지만, 이번에 바뀐 직원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하긴, 내가 청해 길드 직원도 아니고 이제 길드장 피후원자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길드 간판 헌터인 ‘류정우’가 주문한 물건 배달 왔다고 말하면 잡상인 사절이라 할 텐데?
래희는 류정우에게 따로 들은 바가 없어 인벤토리를 열었다. 언젠가 윤청현에게 받았던 검은색 출입 카드를 꺼내 들자 직원이 곧바로 출입구를 열어 주었다.
‘아직도 사용 가능하네.’
래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9층을 눌렀다.
30층짜리 건물. 20년 전 게이트가 등장하자 안전을 이유로 30층 이상의 건물을 지어 올리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생겨났다.
10층이면 몰라도 30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어릴 때 생긴 법이니 그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29층에서 내린 래희가 곧바로 류정우의 방으로 향하려는데, 그때 그의 사무실 맞은편, 윤재언이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다 래희와 눈이 마주쳤다.
‘권래희?’
그동안 일이 바빠 래희를 만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다니.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그는 래희의 손에 들린 빵집 종이 가방을 본 뒤 무슨 상황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아… 류정우.’
래희는 반갑다는 듯 그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윤재언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변하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도착을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순간 기척을 통해 진작에 알아차린 류정우가 방문을 열고 그녀를 부르자, 래희는 곧 윤재언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간단하게 인사하고는 류정우의 사무실 안으로 쪼르르 걸어 들어갔다.
래희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문을 붙잡고 있던 류정우가 윤재언의 얼굴을 흘끗 한번 바라보고는 단호하게 문을 닫았다.
분명 무표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윤재언은 류정우가 자신을 향해 비웃는 것만 같았다.
* * *
청해 길드를 다녀온 그날 저녁.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기 위해 침대 위에 누운 래희는 인터넷에서 한 게시글을 발견했다.
헌터넷 익명 게시판
[잡담](NEW)(HOT) D급 따리가 C급 게이트에서 죽을 뻔하다 살아난 썰 푼다. (236)
일단 인증샷
(사진)
내 최애, 팀 해체하고 처음으로 데뷔한 솔로곡 팬싸였는데 거기서 게이트라니.
며칠 전 안전지대에서 발생한 돌발성 게이트에 휘말려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음. C급 전투계여도 단신으로 C급 게이트에서 살아남기 힘든데, 심지어 나는 주된 스킬이 비전투계고 전투계 스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하나뿐이거든?
게다가 최애 팬싸 도중에 휩쓸린 거라 최애랑 같이 게이트에 떨어진 상황이었음. 자, D급 비전투계와 비각성자의 게이트 낙오. 희망이 없는 상황 아니겠음?
나도 ㅈㄴ 무서웠는데 내 최애는 일반인이니까 안 무서운 척 호들갑 떨다가 몬스터 눈에 띄어 버림.
(사진)
내가 만난 건 C급 미니 만티코어인데, A급의 반도 안 되는 사이즈라 ‘미니’인 거지 결코 힘이 미니미 버전인 건 아님.
비행 스킬이 있어서 최애 안고 겨우 따돌려서 (싸우는 건 절대로 말이 안 됨) 숨어 있는데 이 새X가 얼마나 집요한지 우리가 숨은 곳까지 찾아온 거임.
진짜 더 도망갈 곳도 없어서 체력 바닥나도록 20분 동안 겨우겨우 버티다가 이대로는 죽겠다 싶은 시점에 구하러 온 류정우 헌터 때문에 살았다.
+추가) 숨어 있을 때 최애님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복숭아 타르트 진짜 맛있었다. 이거 먹고 힘이 나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황홀한 맛이었음. 우리 꽃사슴 천사 재휘 오빠가 생일 선물로 구해 준 거래.
++추가) 류정우 개잘생김. 최애는 최애고 류정우는 류정우다.
추천 143 댓글 236
여기까지는 분명 평범한 글이었다.
안전지대 중심에서 반년도 지나지 않아 두 번 연달아 게이트가 발생했고, 특히 이번 게이트 사건은 작년 래희와 류정우가 실종되었던 돌발성 게이트에 비해서 등급은 한 단계 낮았지만 피해 규모는 훨씬 컸다.
그래서인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던전 실종 관리팀을 재편성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고급 인력으로 치부되었던 S급, A급 헌터들이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명인이 실종되었었다는 사실과 큰 피해 규모 때문에 이번 게이트 사고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으며, 제일 처음으로 올라온 자극적인 내용의 생존자 게시글은 평소보다 유난히 더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각성자, 비각성자 할 것 없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 게이트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지금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게다가 그동안 베일에 싸인 채 활동하던 그 유명한 ‘류정우’의 목격담이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헌터넷 익명 게시판
[잡담] D급 비전투계가 어떻게 C급 미니 만티코어를 상대로 20분 동안 버틸 수 있었는가에 관한 분석글.
보통 B급 몬스터를 단신으로 상대하려면 적어도 등급이 한 단계는 더 높은 A급 헌터 정도는 되어 줘야 함. 이건 D급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번 생존자는 D급. 그것도 비전투계.
일단, 인증 사진이랑 사지 멀쩡하게 생존했다는 기사가 있으니 자작글은 아님.
그렇다면 어떻게 생존한 걸까?
D급의 전투계 스킬을 하나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20분 동안 달린다고 가정하면 체력 스탯이 최소 100은 필요함.
그런데 D급 전투계 평균 스탯은 75. 생존자는 D급 비전투계.
재각성이면 벌써 기사가 한 줄이라도 났을 테니 그건 아닐 거고, 그러면 포션이나 버프 아이템이라도 사용했다는 건데, 시중에 나온 아이템 중에 체력 스탯을 30 이상 올려 주는 건 S급 ‘헤라클레스의 반지’뿐임.
여기서부터 말이 안 되는 거지.
글쓴이 말마따나 D급 따리가 알려진 S급 아이템이나 아니면 이보다 훨씬 더 효과 좋은 SS급 아이템을 가졌다는 건데, 이게 의문점.
누군가가 생존자의 글과 생존 방식에 대한 분석글을 인터넷에 써서 올렸다.
원래 이런 분석글을 올리는 사람은 넘쳐났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크게 힘입거나 주목받지 못한 채 글이 삭제되기 일수였다.
하지만, 이번에 사람들이 주목한 부분은 평소와 달랐다.
- SS급? 뇌절도 정도껏이지. 이러다 SSS급을 넘어 EX급도 나오는 거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