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향긋한 멜론빵 】
부랑자들이 섞여 있는 더럽고 어두운 뒷골목.
낡고 해진 무명옷을 입고 있는 맨발의 어린 여자아이가 어두운 골목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눈이 쌓인 골목길에 조그마한 발자국을 남기며, 아이는 목적지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데로 신전의 고아원에서 벗어나기만을 목표로 도망가고 있었다.
‘빨리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잡히면,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몰라.’
하루아침에 게이트에 휘말려 지구와 달리 낙후된 문명을 가진 과거의 중세 유럽과 같은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
아이가 정처 없이 도시를 활보하다, 문득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받아보는 주목에 놀란 아이가 주변을 둘러보자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의 사람 중에는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곧바로 누군가에 의해 주워져 신전 소속의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이세계인 같습니다. 이번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흘러들어 왔군요.”
“어린아이라…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잡혀간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채 알 수 없는 언어로 심각한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의문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무언가 결론이 났는지 그들은 아이를 어둡고 차가운 곳으로 데려갔다. 왜소한 어른들 사이로 덩치가 산만 한 눈에 띄는 몸집의 남자에게 달랑 들려 이동하던 중, 아이는 감옥 같은 공간에 갇힌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어른’들은 의식 없이 쓰러져 있거나 눈빛에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인형처럼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던 여덟 살밖에 되지 않던 어린아이는, 차가운 탁자 같은 공간 위에 눕혀졌을 때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성가시군. 빨리 재워 버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성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옆에 서 있던 다른 이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의식을 잃었다.
아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X발.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이상한 세상에 홀로 떨어져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한꺼번에 겪은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아이가 다시 의식을 차리자 잊어버렸던 전생의 기억이 휘몰아치며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낡고 먼지가 쌓여 있는 나무판자로 된 천장을 확인한 아이는 솜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침대를 우선 벗어나 보기로 결정했다.
“악!”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려 손을 짚자, 왼팔에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통증이 있는 팔 부근을 만지자 왼팔 뒤쪽, 시선이 닿기 힘든 부위에 미끈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뭐지?’
통증 탓에 아픈 부위를 잡아당겨 차마 확인하지 못한 아이는, 몇 번을 더 확인하려 시도하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일단은 당장 몸에 붙은 알 수 없는 이상한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때였다.
쾅―!
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방의 문이 열린 채 아이의 또래로 보이는 다른 어린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금발에 낡은 검은색 원피스. 빨갛게 홍조가 띤 양 볼…….
“원장님! 새로 온 애가 눈을 떴어요!”
그녀 또래의 어린아이가 소리쳤다.
* * *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탈출해야 해…….’
언제 또 이상한 실험 같은 걸 당할지 몰라.
몇 달간 고아원에 적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아이는 신전 행사로 인해 고아원 감시가 소홀해진 때를 틈타 곧바로 고아원을 탈출했다.
어린애 몸으로 이세계로 떨어져서 딱히 도망갈 곳이 없음에도 굳이 왜 탈출을 감행했냐고?
일부 감시하는 인원들이 유독 자신만을 눈여겨보는 느낌에 불안한 예감이 들어 탈출하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고아원에 가만히 있다가는 지하실에 있던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의 어른들과 같은 꼴이 날지도 몰랐다.
마냥 어린아이였다면 탈출 계획을 짜는 것부터가 불가능했겠지만 아이의 몸속에는 20대 중반의 성인 여성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 지금이라도 돌아온 게 다행이야.’
하지만 정신이 성인이면 뭐하나. 아직 무력에는 약한 어린아이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데.
“악!”
갑자기 뒷골목에 등장한 검은 로브를 쓴 성인 남성이 그녀를 고양이 줍듯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세계인?”
남자는 신전 소속임을 알리는 무명옷에 그려진 문양을 한번 훑어보고는 손에 들린 아이를 다시 한번 관찰했다.
“이세계인 중 어린애는 처음 보는데…….”
음침하기 짝이 없는 신전이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지?
아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것 좀 놔!)”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치는 아이를 가만히 관찰하던 남자는 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 내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찬란한 금발. 로브를 뒤집어써서 그런지 선명한 황금색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아이는 반항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자신의 코앞에 있는 시릴듯한 푸른 눈을 쳐다봤다. 깊은 심해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푸른 눈은 아이를 그대로 굳어 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남자의 부드러운 눈매 사이로 오뚝한 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높은 콧대가 남자의 성격을 보여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살면서 이렇게 귀티나게 잘생긴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연구감이네… 일단 나랑 가자.”
반항할 틈도 없이 남자의 옆구리에 끼워진 아이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어?!”
아이의 놀란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모습은 골목 사이를 빠져나가는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 * *
유럽풍의 중후한 분위기를 가진 집무실.
자칭 이 세계 최고 미남 대마법사 체자레는 자신의 소파에 앉아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를 보며 픽, 웃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코코아에도 관심을 전혀 두지 않은 채 자신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어지간히도 꼬마의 눈에 잘생겨 보이는 듯했다.
“잘생긴 거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만 보지 꼬맹이. 내 얼굴 닳겠다.”
체자레가 웃으면서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듯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신전 고아원에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머리를 싹둑 자른 짧은 단발머리가 그녀의 목덜미 위로 삐죽하게 뻗쳐져 있었다.
목까지 빨갛게 물들인 걸 보니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이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척하며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마시멜로가 둥둥 떠 있는 코코아가 든 머그잔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한겨울, 맨발에 얇은 원피스 하나만 입은 채 체자레의 품에 안겨 온 아이를 본 저택의 집사가 아이에게 건네준 따뜻하고 달콤한 음료였다.
롬바르나의 고아 출신이라면 아니, 못해도 평민 출신이라면 처음 먹어 보는 달콤함에 놀랄 법도 허건만, 자연스럽게 코코아를 마시는 아이의 모습은 위화감 없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이세계에는 코코아가 흔하거나 아니면 귀하게 자랐나 보지?’
아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던 그때, 체자레의 시야에 아이의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푸른빛의 반짝이는 그것은 아이의 왼쪽 팔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석?’
마석이 왜 사람 몸에 박혀 있는 거지? 내가 신전에서 만든 키메라를 주운 건가?
체자레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는 아이의 턱을 살짝 붙잡아 그와 시선을 맞췄다.
“꼬마, 너 뭐야?”
하지만 아이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문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안……?’
그럼 마력이 섞여 있다는 건데…….
처음 발견했을 때의 초콜릿색의 갈색 눈동자와는 달리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눈동자는 금색 물감을 퍼트린 듯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목소리를 낸 적 없던 아이가 입을 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권래희.”
“컨…레이?”
처음 들어보는 방식의 이름에 체자레가 겨우 발음하며 아이의 이름을 따라 말하자, 아이는 틀렸다는 듯이 고개을 세차게 저었다.
“권, 래, 희.”
“흠.”
몇 번을 들어도 어려운 이름에 그가 말하기를 주저하자, 어린 래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하.”
체자레는 래희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먹었던 기색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이는 이곳이 벌써 익숙해진 듯 앉은 자세가 아주 편안해 보였다.
‘배짱 좋은 게 마법사 자질은 있어 보이네. 뭐, 그러니까 주워 왔지만…….’
체자레는 태평하게 기댄 채로 그를 관찰하고 있는 건방진 꼬마를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너, 롬바르나어 할 줄 알아?”
“…조금.”
래희는 조그마한 손을 들어 올리며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모아 조금만 할 줄 안다는 듯 그에게 표현해 보였다.
손가락 모양처럼 동그란 눈을 접어 실눈을 뜨는 모습은 어린아이가 익숙하지 않은 체자레에게도 꽤 귀여웠다.
“그렇단 말이지…….”
이세계인. 꼬마. 마력. 마석. 신전.
아이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체자레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집무실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이름은 어려우니까. 일단 당분간 여기서는 ‘레이’라고 부르자.”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 아이가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
“레이?”
체자레가 래희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름을 말하자, 곧바로 이름을 따라 말한 래희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부터 가르쳐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눈치는 있는 편이네.’
체자레는 자신이 주워 온 꼬마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리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래, 레이. 일단, 팔에 박힌 이상한 것부터 제거하고. 당분간 이곳을 떠나 있어야겠어.”
아직은 롬바르나어에 서툰 래희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으나, 체자레가 집사가 따로 챙겨 준 사탕을 작은 손에 쥐여 주곤 그의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꼬맹이. 모르는 사람이 간식 준다고 그럴 때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고.”
앞으로는 나 말고는 따라가면 안 돼. 알았지?
체자레의 당부와 함께, 이내 두 사람은 황금빛 빛무리에 감싸인 채 수도의 몬페라토 대공저의 집무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공이자 대마법사 체자레가 수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시점은 5년도 더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