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래희는 너무 놀라 인벤토리 창을 열어 얼마 전 넣어 둔 복숭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까 겪은 일이 환각은 아니었는지 인벤토리 안에는 복숭아가 들어 있었다.
‘그러면 류정우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래희는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으며 생각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또 혼자서…….”
래희는 복숭아나무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봤다.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류정우는 S급이니까 괜찮겠지.’
내가 문제야 내가.
벌써 게이트를 헤매고 다닌 지도 4시간이 조금 넘었다. 래희는 신호 연결이 안 된다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며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던전 안의 하늘은 아침처럼 밝았다.
‘밖에는 벌써 해가 진 지도 오래일 텐데…….’
누가 곁에 없으니 허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래희는 얼마 전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처분 불가의 문제의 S급 스콘을 꺼내어 한입 베어 물었다.
[플레인 스콘 S]
- 맛 ★★★★★+★
- 향 ★★★★★+★
- 힘 스탯을 10분 동안 +30씩 증가시킨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S급 헌터 없이 B급 게이트에 조난당했는데 힘이라도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힘 스탯이 30이나 증가하게 되면 래희의 스탯 등급보다 두 단계나 높은 B급 스탯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랐다.
래희는 마법봉을 꺼내 들며 얼마 전 때려 부순 거북이의 등껍질을 생각했다.
허기가 가실 때까지 스콘을 집어 먹던 래희가 손에 남은 스콘을 마저 입 안에 털어 넣고 일어서려던 순간, 그녀의 등 뒤로 통통거리며 무언가 뛰어오는 게 느껴졌다.
래희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게이트에 막 들어왔을 때 만났던 플라워슬라임과 비슷하게 생긴 슬라임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봄의 정원의 경비 ‘후르츠슬라임(D)’이 나타났습니다. ]
플라워슬라임과 달리 젤리처럼 투명한 몸 안에 포도와 복숭아 같은 과일이 하나씩 둥둥 떠다녔다. 후르츠슬라임은 래희의 손 위를 가만히 응시했다.
“…너도 달라고?”
그녀의 말에 긍정하는 듯이 기분 좋게 통통거리는 슬라임의 모습에 래희는 손에 쥔 스콘 조각을 슬라임에 내밀었다.
‘이거 먹고 얘도 스탯이 증가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내밀어진 스콘에 누가 뺏어 갈까, 슬라임은 입을 크게 벌려 래희의 손까지 냅다 입에 물었다.
다행히도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던 피치래빗과 달리 후르츠슬라임의 입에는 이빨이 보이지 않았다.
슬라임은 눈을 감고 잠시 동안 입 안의 스콘을 음미하는가 싶더니 얼마 후 눈을 번쩍 떴다.
기분이 좋은지 래희의 주변을 빙빙 돌며 튀어 올랐다.
“기분이 좋아?”
긍정하는 듯해 보이는 슬라임에 래희는 슬라임의 눈높이에 맞게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면…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 본 적 없어? 키는 나보다 훨씬 크고 잘생긴 남자 말이야.”
아, 몬스터의 기준에서 잘생긴 게 의미가 있을까?
역시나 래희의 기대와 달리 슬라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무룩해졌다. 시무룩해진 슬라임의 모습에 혹시라도 아까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까 기겁한 래희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냐 아냐. 그러면 여기를 나가는 길을 아니? 보다시피 내가 길을 잃었거든.”
그제야 슬라임은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운을 차리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쀼우쀼!”
귀여운 울음소리와 함께 슬라임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몸을 움직이며 말랑거렸다.
* * *
토끼들을 모두 처리한 류정우는 더는 달려드는 토끼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다른 위험한 것들은 보이지 않아 보였다.
‘5분 정도 지났겠어.’
그 잠깐 5분 사이에 벽 너머로 문제가 생기진 않았겠지. 다행히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문제가 없… 기척?
그제야 류정우는 벽 너머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벽을 밀어 보려 시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관목으로 이루어진 벽을 밀어 봐도 벽이 넘어가지 않았다.
“래희 씨?!”
아무리 외쳐 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류정우는 당황하여 벽을 부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벽을 계속해서 베어 내도 끊임없이 자라나 반대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사이에 미로 구조가 바뀐 건가? 그때, 류정우의 시야 안에 이질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화사한 봄처럼 꽃이 피어나 있던 미로의 통로는 모두 사라진 채 앙상한 나뭇가지와 마른 풀숲만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더는 봄이 온 듯한 화사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래희 씨부터 찾자.’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이전에 래희부터 찾아야 했다. 던전이 이보다 더 위험해지더라도 S급인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비전투계인 래희는 달랐다.
류정우는 빠른 걸음으로 미로 안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래희의 작은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며 기척을 느끼려 시도해 봤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근이 보이던 D급 몬스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회차를 통틀어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머릿속에 온통 래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한 류정우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얼마나 헤매었을까, 저 멀리서 거대한 무언가와 작은 움직임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봄의 정원의 수호령 ‘스톤골렘(B)’이 나타났습니다.]
소리가 울리는 곳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시 초록빛으로 우거진 미로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콰광―!
돌덩어리로 된 거대한 골렘이 자신에 앞에 서 있는 작은 무언가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고 있었다.
“래희 씨!”
그녀는 류정우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멍하니 골렘이 내리꽂고 있는 주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겁한 류정우가 빠르게 달려나가려던 순간, 래희가 비명을 지르며 마법봉을 든 지팡이로 제 머리를 막았다.
쾅―!
사방에 먼지가 흩날렸다. 류정우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물들었다. 뿌옇게 변한 시야 사이로 래희의 모습이 보이기 전까지 류정우는 래희가 서 있을 방향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은 채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권래희……?”
그때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뒤, 움직이기 시작하는 작은 무언가가 류정우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통통 튀는 그것은 래희의 발치에서 빙글빙글 돌며 바닥을 튕기고 있었다.
시야가 깨끗하게 변하자 류정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제야 제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용자 ‘권래희’가 ‘스톤골렘(B)’을 처치하였습니다.]
시스템의 알림 창 너머로 손을 교차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래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스톤골렘의 팔 부분이 산산조각이 난 채 부서져 있었다. 아직 웅크리고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이 방금 무얼 한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
“쀼우쀼쀼쀼!”
충격이 컸는지 몸체에도 금이 가 갈라져 있는 골렘 위로 약을 올리듯 투명한 슬라임 한 마리가 통통 튀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
그제야 래희가 잘못되었을까 봐 걱정되었던 류정우가 마음 놓고 헛웃음을 흘렸다.
* * *
슬라임이 안내한 대로 미로의 출구로 향하던 중 우연히 이 미로 필드의 보스 몬스터인 골렘을 마주해 버렸다. 류정우를 찾을 기회도 없이 곧바로 달려드는 골렘에 래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자신을 향해 내리꽂는 골렘의 주먹을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무언가 팔 위로 강하게 부딪히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어……?’
사방이 고요해지자 교차한 팔 사이로 슬쩍 고개를 든 래희는 눈앞에 쓰러져 있는 골렘을 확인하고는 이어서 충격을 받은 듯한 류정우의 얼굴을 발견했다.
이거… 내가 한 거 맞겠지?
류정우가 서 있는 위치와 골렘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골렘을 해치운 게 자신일 게 분명했다.
‘내가 딸기 스콘을 너무 많이 먹었던가?’
힘 스탯이 올랐을 뿐인데 몸뚱이가 골렘보다 단단해지다니. 다른 아이템과 달리 중첩 효과가 있어 보이는 스콘의 능력에 래희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때, 래희의 곁으로 다가온 류정우가 교차된 래희의 팔을 풀며 물었다.
“래희 씨. 분명 비전투계라고 들었었는데요.”
저번에도 분명 그래 보였구요.
류정우의 말에 래희는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눈을 굴렸다. 그때, 류정우의 등 뒤로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문이 생겨났다.
“저기, 류정우 씨 뒤에 출구가 생긴 것 같은데요?”
뒤를 돌려 문을 확인한 류정우는 작게 한숨 쉬며 애써 시선을 피하는 래희를 내려다봤다.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 줄까…….’
그때, 래희의 발치 뒤에 숨어 있던 슬라임과 눈이 마주쳤다.
“쀼우!”
슬라임은 놀란 듯 잽싸게 래희의 종아리 뒤에 얼굴을 묻었다.
“저기 슬라임아?”
래희는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는 슬라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래희의 말에 슬라임이 고개를 들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처음 봤던 플라워슬라임처럼 공격할까 싶었던 류정우는 반사적으로 슬라임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래희가 막긴했지만, 류정우의 기세에 놀란 슬라임은 래희와 류정우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잠시 딸꾹질을 하는가 싶더니 입속에서 무언가를 뱉어 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쀼욱!”
그러고는 이내 뱉어 낸 것을 입에 물고는 래희에게 가져가라는 듯이 내밀었다.
처음과 달리 래희는 상냥하게 웃으며 슬라임의 입에 물린 것을 받아들었다.
“…멜론?”
[멜론]
- 봄/여름 작물 (3월~8월)
- 씨앗 7일
작은 크기의 사과만 한 멜론이었다.
“쀼우쀼쀼우!”
래희가 멜론을 받아들자 슬라임은 인사하듯 작게 울음소리를 내고는 아쉬운 듯이 몇 번이나 뒤돌아보더니 풀숲으로 사라졌다.
‘조금 아쉽네…….’
키울 수 있으면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래희는 뒤돌아서서 문 앞에 서 있는 류정우의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
“이제 돌아갈까요?”
이 문을 열면 바로 가게겠지. 래희는 인벤토리 안에 멜론을 넣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류정우를 따라 나갔다.
류정우가 잠시 손을 움찔댄 것 같았지만 그가 손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래희는 빠르게 문밖으로 발을 뻗었다.
“…어?”
하지만 기대와 달리 래희가 도착한 곳은 가게가 아니었다.
벌써 해가 지고 어두운 저녁이었지만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덕에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는 밭과 아기자기한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래희의 집이었다.
래희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을 향해 삐딱하게 서 있는 류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류정우는 저것 좀 보라는 듯이 래희를 향해 눈짓하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래희 씨?”
그제야 래희는 류정우의 시선을 따라서 집 앞에 적혀 있는 명패를 확인했다.
‘래희네 집’
이런, 다 들켜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