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노란빛 눈동자와 래희의 눈이 마주쳤다.
“아…….”
래희가 굳어 있자 그것을 느낀 류정우가 뒤돌아섰다.
류정우가 뒤돌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봄의 정원의 경비 ‘플라워슬라임(D)’이 나타났습니다.]
래희가 미처 도망치기 전 류정우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는 번쩍 들어 올려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래희는 놀라 상황 파악하기 바빴다.
“…슬라임?”
어둠 속에 드러난 공포스러웠던 노란색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동글동글한 모양의 투명한 몸체가 말랑거리며 그들 앞에 나타나 있었다.
플라워슬라임이라는 생소한 이름처럼 반투명한 몸 안에는 이쁜 꽃들이 담겨 있었다.
“플라워슬라임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몬스터군요.”
귀여운 슬라임의 모습을 보고서도 류정우는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퓨우퓨우.”
그때, 슬라임이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뱉어 내는 시늉을 했다. 몇 번이나 몸을 길쭉하게 뻗는 모양새를 하더니 뽁 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퓨!”
마치 래희에게 주겠다는 것처럼 분홍색 꽃을 입에 문 채로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래희가 홀린 듯이 한 걸음 다가가자 류정우가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지 않은 채로 오히려 힘을 주었다.
“위험해요.”
“아…….”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한테 무방비하게 다가가다니. 그제야 래희는 냉정한 눈으로 앞에서 말랑거리는 플라워슬라임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퓨우…….”
그런 래희의 시선에 슬라임이 상처를 받았다는 듯이 탄력을 잃고 흐물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녹기 시작했다.
입에 물고 있던 분홍색 꽃이 바닥에 닿았을 때쯤,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어?’
꽃향기를 인지하기 시작하고 래희의 의식이 몽롱해졌을 때, 어디선가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 씨, 정신 차려요.”
“네……?”
뭐지? 아까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그때, 래희의 눈앞에 뜨는 시스템 알림 창이 방금 래희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띠링!
[사용자 ‘류정우’가 ‘플라워슬라임(D)’을 처치하였습니다.]
[봄의 정원에 잠들어 있던 나머지 경비원들이 깨어납니다.]
“이제 괜찮은가요?”
“네……. 감사합니다.”
얼마 전 스콘이 잘 팔리던 기간 동안 명성 획득으로 얻은 스탯이 얼추 D급 안으로 성장했다지만 여전히 D급 몬스터를 홀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인 듯해 보였다.
래희는 찰팍한 풀 바닥을 바라보며 슬라임이었던 것의 흔적을 살펴봤다. 바닥에 남은 흔적이라곤 흡수되어 가고 있는 투명한 물웅덩이뿐이었지만 그 가운데에 슬라임이 물고 있던 꽃이 둥둥 떠 있었다.
래희의 시선이 꽃을 향해 있자 류정우가 물웅덩이 위에 더 있던 꽃을 주워 들었다.
“복숭아 꽃이군요.”
“네?”
이 남자가 그렇게 감성적인 남자였나? 단번에 꽃 이름을 알아맞히다니. 하지만 엉뚱한 생각도 잠시 류정우에게서 꽃을 건네받자마자 래희는 그가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던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복숭아 꽃]
: 성장을 완료한 복숭아나무에서 2일 뒤에 핀다. 꽃이 핀 하루 뒤, 복숭아 열매가 열린다.
물론 쓸모 있는 설명이 적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이템처럼 꽃 옆에 설명 창이 나타났다.
“아이템도 아닌데 설명이 떠오르는 게 신기하네요. 겉보기에는 지구의 꽃과 달라 보이지는 않은데.”
“그러게요. 애초에 게이트 입장을 알리는 메시지 창도 처음 보지 않나요?”
보통 게이트 등급과 관련된 정보는 기술의 발달로 만들어진 기계로 알아내는 거였으니까. 애초에 이름 모를 몬스터가 등장할 때 시스템이 이렇게 친절하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성좌님이 잘 안 보이네.’
래희는 시스템 창 한구석에 있는 조용한 성좌의 메시지 창을 흘끗거리며 생각했다.
“일단, 여기에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하죠.”
그렇게 말한 류정우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에 입을 열었다.
“미로형이니, 출구도 있지 않겠어요?”
* * *
미로를 통과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처음 보는 몬스터들을 마주했다. 대부분이 D급이라 래희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류정우 손에서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다만, 분명 처음 입장 당시 나온 B급 던전이라는 수준에 맞지 않게 계속해서 D급 몬스터만 나오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저기, 류정우 씨.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류정우가 발걸음을 멈춘 사이 래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아까 지나갔던 길 같은데요.”
물론 높디높은 수풀 벽이 언뜻 보기에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지만 래희의 눈앞에 있는 벽에 피어난 꽃은 조금 전에 지나온 벽과 같은 위치에 자라나 있었다.
“음……. 그래 보이네요.”
래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류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체력을 소모할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빨리 나가 봐야 하는걸요. 가게 문이 그대로 열린 채로 여기로 끌려왔잖아요.’
래희는 너무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때 류정우가 그녀의 향해 손을 뻗었다.
“앗.”
놀라 비틀거리자 래희의 팔을 붙잡고는 그녀의 뒤로 손을 마저 뻗었다.
푹.
푹푹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로 만들어진 벽이 뒤로 밀려났다.
“아무래도, 벽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나 보네요.”
살짝 밀려난 벽 사이로 새로운 통로가 보였다. 래희는 류정우를 따라서 반대편 통로로 넘어갔다.
반대편 통로는 이전 통로와 다르게 밝고 화사했다.
이전의 통로는 노란 꽃이 벽에 조금씩 피어 있는 정도였다면 이곳은 파스텔 톤의 밝은 꽃들로 벽과 바닥 할 것 없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와…….”
래희는 이곳이 던전이라는 것도 잊은 채 입을 열고 주변을 구경했다.
“여기서부터는 중심인 것 같네요.”
류정우의 말에 래희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어딘가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류정우의 시선을 따라가자 환한 햇빛으로 밝혀진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온통 동그랗게 막혀 있어 누가 봐도 이곳이 중심부였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 그들은 천천히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확인한 나무에는 조금 전 슬라임이 입에 물고 있던 복숭아 꽃들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복숭아나무?”
[정원의 중심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스템 창과 함께 복숭아나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복숭아나무가 자신의 가지들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오…….’
벚꽃잎처럼 잎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류정우의 모습을 보자 래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이렇게 보니까 유난히 더…….’
새삼스러운 기분에 잠겨 있는 동안 류정우가 평소와 달리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악!”
그때, 래희의 머리 위로 딱딱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후드득.
“윽!”
래희는 머리를 감싸며 나무 아래에서 벗어났다.
몸을 피신한 뒤에 정신을 차리고 나무 쪽을 바라보자 나무 아래에 복숭아 열매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래희는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복숭아를 주워 들었다.
[복숭아]
- 봄/여름 작물 (3월~8월)
- 씨앗 5일 / 열매 3일
- 나무 / 한 번 심은 후 지속적인 수확 가능
‘혹시 이것도 딸기처럼 키울 수 있는 작물인 건가?’
띠링―!
[퀘스트 일부를 진행하였습니다!]
- 봄 작물 3종 구하기(2/3): 딸기, 복숭아, (미확인)
(봄을 대표하는 작물을 구해 밭에 심어 봅시다. 던전에서 구한 작물만이… 더 보기)
래희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허공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자 류정우가 래희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저번처럼 퀘스트인가요?”
“네…….”
래희는 두 번이나 자신과 함께 던전에 휘말린 류정우의 얼굴을 보자 새삼스럽게 민망해졌다.
두 번 다 래희의 열쇠 때문에 일어나게 된 일이니 어떻게 보면 죄 없는 류정우가 그녀의 퀘스트에 휘말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서 있던 던전의 바닥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봄의 정원의 관리자 ‘가드너래빗(C)’이 등장합니다.]
‘X된 건가?’
한 마리였다면 S급 헌터가 곁에 있을 테니 문제없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보이는 토끼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토끼가 사람만 하네요…….”
정원사 복장을 한 토끼들이 복숭아나무 아래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나무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급격하게 분위기가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래희는 손에 든 복숭아를 바라봤다.
‘혹시 이것 때문인 건가?’
내가 복숭아를 주워서?
“래희 씨.”
그때, 옆에서 그녀를 부르는 류정우의 목소리에 래희가 고개를 들었다.
토끼들이 단체로 뒤돌아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복숭아를 든 래희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하지만 래희는 손에 쥔 복숭아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퀘스트 때문이라도 포기할 수는 없어.’
래희와 눈이 마주친 토끼 한 마리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귀여운 초식 동물의 외관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동시에 그들에게로 뛰어오르려는 건지 긴 뒷다리와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때, 류정우가 래희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그들 뒤로 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S급 헌터 기준, 스탯이 약하디약한 래희와 함께 도망치는 것보다는 자신이 안고 뛰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방금 그들이 넘어온 벽을 밀어 래희를 밀어 넣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주 잠시지만 별일 없을 거라 판단했다. 단지 자신의 바로 뒤에 래희가 서 있다면 날뛰는 토끼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띠링―!
[사용자 ‘류정우’가 ‘가드너래빗(C)’을 처치하였습니다.]
[사용자 ‘류정우’가 ‘가드너래빗(C)’을 처치하였습니다.]
[사용자 ‘류정우’가 ‘가드너래빗(C)’을 처치하였습니다.]
…….
얼마간의 시끄러운 시스템 알림 창을 끝으로 정적이 맴돌았다.
‘다 끝난 건가?’
벽 너머가 조용해지기 시작하자 래희는 조심스럽게 넘어온 벽을 살짝 밀었다.
“…류정우 씨?”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놀란 래희가 벽을 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투 흔적뿐 아니라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 또한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당혹스러운 래희의 기분과 달리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처음 봤던 꽃들이 활짝 피어난 아름다운 광경뿐.
그때, 래희의 시야에 복숭아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복숭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분홍빛의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