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래희는 곧바로 집으로 이동했다.
집에서 밭을 가로질러 맞은편보다 약간 기울어진 옆쪽에 닭장과 축사가 만들어져 있었다. 래희의 집 앞 땅의 넓이는 이전보다 조금 더 넓어진 듯해 보였다.
‘소음 때문에 못 잘 일은 없겠네.’
그동안 우유와 달걀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혹시라도 가까이에 축사가 만들어진다면 가축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잘 일이 생길까 싶어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건물이 지어진 건 다행인 일이었다.
래희는 트랙터에 올라가 밀과 사탕수수를 열심히 수확하고 있는 곰순이를 지나쳐 먼저 닭장을 방문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릴 적에 래희가 꾸며 뒀던 닭장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꽤 괜찮은데?”
5평 정도 되는 나름 넓은 공간에 지푸라기가 폭신하게 깔려 있었다. 닭장 한구석에는 2층으로 구성된 산란실이 여섯 칸 정도 준비되어 있었으며 산린실 바로 옆에는 물그릇과 사료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여기서 따로 더 할 일은 없어 보이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래희는 닭장 바로 옆 축사로 향했다.
‘음… 생각보다 작은데.’
소가 두 마리 정도 들어가면 괜찮을 크기였다.
‘어차피 소 한 마리에 1,000만 원인데… 지금 당장 많이 구매하지는 못할 게 분명하니까.’
래희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축사 안으로 들어가 조금 더 살펴봤다. 축사 한구석에는 겨울을 대비한 듯 닭장에서처럼 라디에이터가 미리 설치되어 있었다.
축사 안을 한번 훑어본 뒤, 마지막으로 소의 먹이를 담을 수 있는 여물통의 상태까지 확인한 래희는 축사 밖으로 나오며 상점을 열었다.
[상점] -〈목장〉
[암탉] 200G
: 하루 10개 이상의 알을 낳는다. (닭장 건설 필요)
[젖소] 1,000G
: 하루 우유 100L 생산한다. (축사 건축 필요)
퀘스트 보상으로 2,000G를 벌었으니까…….
‘암탉 다섯 마리랑 젖소 한 마리를 구매하면 되겠다.’
돈을 더 벌면 젖소 한 마리를 더 구매하는 걸로 하고.
래희가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를 완료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축의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
‘근데, 닭은 이름을 지어 줘도 내가 구분을 못 할 것 같은데?’
펑―!
그때,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제일 먼저 젖소가 래희 앞에 나타났다.
젖소의 머리 위로 이름을 입력하는 칸이 비어 있는 채로 둥둥 떠 있었다.
‘아……. 이런 식이라면 닭도 구분 가능하지.’
래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소의 순수한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 뭐, 몸값이 무려 천만 원이신 귀한 소 님인데 이름을 함부로 지어 줄 수는 없지.
그녀는 한참 고민 끝에서야 적당한 이름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젖소]: 딸기
절대로 딸기 우유가 먹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감탄합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혹시 다음 젖소의 이름은 ‘초코’로 지을 거냐고 묻습니다.]
‘…아뇨.’
래희는 반 박자 늦게 성좌의 질문에 대답했다.
음머―
이름이 붙여진 젖소는 울음소리를 한 번 내더니 축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안으로 들어간 ‘딸기’가 큰 소리로 한 번 더 울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래희가 축사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딸기’가 여물통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툭툭.
‘딸기’는 지금까지 여물통도 안 채워 넣고 그동안 뭐 했냐는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여물통을 앞발로 툭툭 찼다.
“아……?”
사료도 사야 하는 거였어?
래희는 곧바로 상점 창을 다시 한번 더 열어서 사료를 구매했다.
[가축의 사료] 1G
: 10마리 분량의 사료. 하루치 양이다.
다행히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다. 하지만 하루치 양이라니…….
새벽같이 빵집으로 출근하는 마당에 농사뿐 아니라 이제는 가축까지 관리해야만 했다.
래희는 점점 일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빵집 사장이 맞는 걸까?’
아무래도 이 정도면 빵집 사장이 아니라 농부로 전직해야 할 듯싶었다.
【 달콤한 과일 타르트 】
올해로 고3이 된 래희는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대학입시 따위는 잊어버린 채 피에타의 정규 1집 앨범 팬 사인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팬 사인회 컷이 높아져서 모아 둔 돈을 다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까딱 잘못했으면 이번 팬싸는 못 올 뻔.’
공부나 하라고 저를 잡아 두는 재언이 게이트 모의 훈련을 떠난 사이 몰래 집을 빠져나와 겨우 팬 사인회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재언은 오늘 저녁에 돌아올 테니 시간은 아직 넉넉해.’
래희는 오후 3시를 나타내고 있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했다.
래희가 ‘류정우’의 팬이 된 지도 벌써 4년째. 래희는 격세지감을 느끼며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와……. 진짜 다 무너져 가는 오래된 지하 쇼핑몰 구석에서 30명 정도 모여서 팬 미팅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 피에타 정규 1집 응모 팬 사인회는 번듯한 무대와 조명, 그리고 편안한 좌석들이 즐비해 있었다.
물론 피에타가 대기업 버프를 받고 데뷔를 해서 그런지 데뷔 쇼케이스도 기성 아이돌보다 화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오는 멤버들의 모습에 래희는 옆에 준비해 뒀던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래희는 자신의 순서가 다가올 때까지 카메라 뷰파인더에 최애의 모습을 담았다.
언제봐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얼굴. 래희는 활자로 읽으며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의 외모에 놀랐던 첫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 이동하실 게요!”
매니저의 안내를 따라 래희는 들고 왔던 종이 가방을 들고 팬 사인회 줄에 서며 제 차례를 기다렸다.
다른 멤버들의 사인이 끝나자 래희가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순간이 찾아왔다. 순서가 맨 마지막 번호였던 래희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래희는 오로지 류정우만을 향해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류정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와…….’
몇 년을 본 얼굴인데도 실물로 마주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굳어 있는 래희와 류정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 래희의 모습에 류정우는 웃었다.
“오늘은 동생이 집에 없었어?”
“네! 다행히도 오늘은 저녁에 들어올 예정이라 이렇게 오빠 보러 왔죠.”
래희는 바로 어제 참석한 팬 사인회에서, 행사에 불참할 뻔했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재언을 남동생이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재언이 들었다면 기함했겠지만, 류정우와의 대화를 재언이 알 길이 없으니 어떻게 소개해도 상관이 없었다.
류정우가 망돌인 시절부터 그의 팬이었던 래희는 거의 매일같이 모든 행사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그는 아이돌로서 성공한 지금까지 래희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고3 아니었어요? 공부 안 해도 되는 거야?”
“아, 오빠한테까지 그런 소리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시답지 않은 안부 인사를 몇 번 주고받은 이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매니저의 눈치를 통해 느낀 래희는 들고 온 종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래희가 꺼내 든 건 팬 사인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화관이었다.
류정우는 전체적으로 하얀 꽃들로 꾸며진 화관을 능숙하게 받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화관을 쓰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래희는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화관을 쓴 그의 모습을 눈에 한 번 담고는 가방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하얀 이면지였다.
구겨지지 말라고 파일에 꽂아 온 걸 보니 류정우는 오히려 더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뭐죠?”
“아, 오빠 말대로 이제 고3이잖아요. 앞으로는 대학 갈 때까지 최소 1년 동안 오빠를 못 만날 것 같아서요.”
소설 속에 빙의한 이후 남자 주인공의 실물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상상만 하던 활자 속의 인물이 내 앞에서 움직이면서 살아 있다니.
하지만 빙의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소설 속에 묘사된 빙의자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각성하니만 못한 쓸모없는 능력을 가진 E급 비전투계 각성자. 그게 이번 생에 굳혀진 래희의 사회적 지위였다.
만 14세, 그리고 만 18세를 대상으로 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각성 검사 이후, 래희에게 있어서 이곳은 더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간혹, 각성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각성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좌와 계약한 재각성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간혹’, ‘만약에’라는 그 단어가 헛된 희망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자 더는 이렇게 즐기기만 하면서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래희는 우선 대학부터 가기로 했다. 이제 미성년자의 삶보다는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을 생각해야 할 시기였다.
래희는 당분간은 찾아오지 못할 거란 말을 마치자마자 종이를 파일에서 꺼내 사랑하는 류정우에게 내밀었다.
“자, 사인하세요. 혼인 신고서예요. 여기다 사인해 주시면 1년 뒤에 바람 안 피고 돌아올게요.”
저 이제 만 18세라서 부모님 동의만 받으면 돼요.
물론 진심이 99% 정도 담긴 장난이었다. 아이돌 팬 사인회라면 혼인 신고서가 자주 등장하니까 이 정도 해프닝은 흔하디흔했다. 하지만…….
“여기다 사인하면 돼요?”
“네?”
오히려 예상치 못한 류정우의 태도에 래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류정우는 단 한 번도 팬이 내민 혼인 신고서에 사인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래희도 사인을 바라고 혼인 신고서를 내민 건 아니었다.
“대학 합격하면 돌아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래희에게 혼인 신고서를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챙겼다.
하지만 그 팬 사인회를 마지막으로 래희는 다시 류정우의 팬으로서 돌아가지 않았다.
1년 뒤 래희가 마주한 남자는 그녀가 알고 있던 ‘류정우’가 아니었다.
* * *
[우유 B]
- 맛 ★★★★
- 신선도 ★★★★
(젖소의 행복도가 80% 이상일 때 얻을 수 있다.)
[달걀 C]
- 맛 ★★★
- 신선도 ★★★
(닭의 행복도가 60% 이상일 때 얻을 수 있다.)
래희는 방금 수확한 우유와 달걀의 설명 창을 확인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재료의 등급이 낮아서 기분이 묘했다.
래희는 달걀을 손에 쥔 채로 자신의 앞에서 쫑쫑 거리며 돌아다니는 1호 닭 ‘류’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암탉]: 류
- 행복도 65%
래희는 상태 창을 끄고 달걀을 바구니에 넣으며 닭장을 나섰다.
어쨌든 오늘이야말로 처음으로 직접 수확한 우유와 달걀을 이용해 빵을 만들어 보는 날이었다.
“분명 맛있겠지.”
A급 빵의 맛이 어떤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가게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분명 그럴 거였다.
래희는 기대감에 들뜬 마음으로, 오늘도 아무도 없을 빵집으로 출근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