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15화 (15/120)

15화

* * *

“으…….”

눈을 떠보니 주변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떨어진 곳이 낭떠러지가 아니라 가파른 비탈길이었다. 물론 거의 70도에 육박했지만.

래희는 비탈길로 굴러떨어져 꺾여 넘어가 있는 썩은 나무 기둥에 부딪힌 후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시도하던 래희는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악!”

튼튼하지도 않은 몸으로 구른 탓에 발목이 다쳤는지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이런 몸 상태로는 얼마 걷지도 못할 것 같았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별 도움 안 되는 놈과 이제는 그만 엮이는 걸 추천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길잡이님이 더 도움이 안 되는 중인데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방금 발언한 ‘길잡이’가 자신을 말한 것이 맞느냐고 묻습니다.]

[차라리 줄임말인 ‘운길’이 더 낫지 않느냐며 조심스럽게 제안합니다.]

‘길잡이나 운길이나… 어차피 둘 다 별론데.’

별님. 애초에 성좌명부터가 별로였어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며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명칭으로 갈아엎고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system: 닉네임 등록은 최초 1회만 가능합니다.]

[system: 부적절한 단어 사용이 감지되었습니다.]

[system: 채팅 규칙 위반으로 성좌 ‘운명의 길잡이’의 접속을 제한합니다.]

[제한 시간: 00:29:59]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 창이 사라져 새삼스럽게 깨끗해진 시야를 살폈다.

‘S급 없이 여기서 어떻게 버티냐…….’

래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마법봉을 찾았다. 굴러떨어질 때 놓치지는 않았는지 래희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마법봉을 들어 올렸다.

“반짝반짝…….”

힘없는 목소리로 스킬을 시전하자 래희의 눈앞에 환한 빛이 덩어리로 뭉쳐져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순간 밝은 빛이 비치자 눈이 부신 나머지 래희는 얼마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래희가 슬며시 눈을 뜨자 둥둥 구름같이 떠오른 불빛이 그녀의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일단 앞이라도 보여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하지.’

던전이라 그런지 바깥과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새벽에 게이트에 휩쓸려 5시간 정도 흘렀는데 던전에는 벌써 밤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던전의 시간은 빨리 흐르는 듯해 보였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바깥은 이제 겨우 오후가 되었을 거였다.

환한 불빛으로 주변을 밝게 비추자 래희의 눈앞에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 올랐던 산에서 굴러떨어져서 처음 던전에 떨어졌던 장소로 돌아왔나 보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며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있을까 주변을 살폈다.

꼬르륵…….

그때, 밥때를 놓쳤다는 것을 알리는 듯 래희의 배 속에서 공복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래희는 게이트에 휩쓸리기 직전 인벤토리에 넣어 둔 빵을 기억해 냈다.

‘그나마 부드러운 걸 먹어야겠어…….’

숨을 곳이 없다고 판단한 래희는 이동을 포기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인벤토리에서 폭신한 식감의 곰순이빵을 꺼내 들었다.

“어휴…….”

이게 뭔 꼴이람.

‘류정우는 새벽에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휩쓸린 거라 아직 제대로 먹은 게 없을 텐데…….’

사람이 뭐 좀 먹어야 움직이든가 하지. 아마 류정우는 오늘 새벽에 나온 게이트에서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다. 기껏 먹어 봐야 오랜 보관이 가능한 육포 정도가 아닐까.

‘아니다, 요즘은 전투 식량도 잘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래희가 빵을 한입 베어 물며 류정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아무것도 느껴진 것이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아무래도 X된 것 같은 이 싸한 느낌은 뭐지?

손에 쥔 한입 베어 문 빵을 내려다보던 래희가 그대로 굳은 채 눈동자만 또르르 굴려서 앞을 올려다보았다.

쿠룽.

“흡.”

붉은 눈의 새카맣고 커다란 소가 침의 질질 흘리며 래희의 앞에 서 있었다.

그건 블랙카우였다.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C급 몬스터를 상대로는 무력이 불가능했다. 래희의 뒤쪽으로는 그녀가 굴러떨어진 가파른 경사의 비탈길이 있었고 앞쪽은 넓디넓은 초원뿐. 그래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아.’

그때, 래희는 자신의 손에 쥔 빵 조각을 내려다봤다.

‘이게 효과가 있을까?’

분명히 저번 게이트에서는 몬스터한테 통했으니 ‘운이 좋다면’ 이번에도 그럴지도 몰랐다.

그동안 명성 획득으로 스탯이 오른 덕분에 래희의 행운 스탯은 이제 60이 아닌가. 체근민을 제외한 마력과 행운은 각성자들마다 그 수치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래희의 행운 스탯이면 아주 높은 쪽에 속했다.

‘이 정도 행운 스탯이면 시도해 볼 만할지도 몰라.’

이러나저러나 잘못되면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봐야겠지.

래희는 조심스럽게 빵 조각을 들고 블랙카우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몇 초가 몇십 년처럼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쿠루룽.

블랙카우는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붉은 눈으로 래희의 손끝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블랙카우의 날카로운 이빨이 달빛에 반사되어 래희의 등골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다.

‘잠깐, 이빨이 저 모양이면 육식 동물 아니야?’

팔이라도 잘리면 어떡하지? 래희는 눈을 꼭 감은 채로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상을 애써 억눌렀다.

* * *

“하…….”

류정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응시했다.

래희가 비탈길로 떨어진 이후 곧바로 그녀를 찾아 나섰다. 어둠 속에서 겨우 래희가 구른 듯한 흔적을 찾아 아래로 내려왔지만 예상한 위치에 래희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분명 여기에 쓰러져 있던 흔적이 마지막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둘러보던 류정우는 멀리서 빛 한 점이 움직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빛을 쫓아 가까이 다가가다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래희 씨?”

류정우의 힘이 빠진 의문 섞인 부름에 래희는 즐거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류정우 씨!”

래희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뒤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그녀가 하고 있던 일은 바로 블랙카우에게서 착유를 하는 것이었다.

래희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어린 블랙카우를 본 정우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까 굴러떨어진 건 괜찮아요?”

“아…….”

정우의 물음에 래희는 그제야 자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래희의 퉁퉁 부은 발목을 확인한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래희는 정우의 눈길을 따라 자신의 발목을 확인했다. 다시 보니 아픈 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게요. 제가 어쩌다가 다친 걸 잊고 있었을까요.

그때, 래희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블랙카우의 우유 3L 수확 완료!]

“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양동이에 우유를 짜다 말고 래희가 허공을 보며 소리 지르자 놀란 정우가 그녀에게 뛰어왔다.

류정우가 무슨 문제가 생긴 거냐며 래희에게 물으려던 순간, 래희는 부어오른 발목을 잊었는지 벌떡 일어나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서 있던 류정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류정우 씨! 퀘스트! 이제 스콘만 만들면 퀘스트 완료예요!”

“래, 래희 씨? 잠깐……!”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당장 둘이 떨어지라고 경고합니다.]

[당신이 지금 너무 기뻐 끌어안고 있는 게 누군지 잊었나 본데 빨리 정신 차리라고 조언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퀘스트 때문에 남몰래 속앓이했던 래희는 이제야 퀘스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구오빠’인 류정우를 끌어안으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얼마간 류정우를 끌어안고 있었을까, 갑자기 래희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악!”

래희는 정체 모를 무언가에 맞은 정수리가 너무나도 아파 와 류정우를 품에서 놓은 채 머리를 매만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래희가 자신이 기쁨에 젖은 나머지 류정우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래희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정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채 잠시 굳어 있었지만 래희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이 상황이 웃겼다.

류정우는 허리를 숙여 래희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물건을 주웠다. 그건 바로.

“만년필이네요.”

검은색의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고급스러운 만년필. 아마 래희의 성좌는 아주 부자인 듯했다. 그는 만년필을 주워 들어 래희에게 건넸다.

래희는 괜히 부끄러워져 류정우가 건네는 만년필을 받아들며 허공에 소리쳤다.

“이렇게 날카로운 걸 저한테 던지시면 어떡해요!”

그리고 님, 명색이 성좌인데 아직도 이런 구시대적인 물건을 쓰고 계시는 거예요?!

래희가 허공에 대고 성좌에게 씩씩거리고 있자 류정우는 괜히 웃음만 나왔다.

비탈길에서 제대로 굴렀는지 빛 아래의 래희의 얼굴은 꼬질꼬질했다.

‘귀엽네.’

류정우는 귀엽다는 담백한 자신의 평가에 대한 자각 없이 래희가 성좌를 향해 구시렁대는 광경을 웃으면서 바라봤다.

* * *

퀘스트를 완료한 건 아니었지만 스콘을 만드는 재료를 모두 구하자 던전을 나가는 게이트가 두 사람 앞에 생성되었다.

아쉬움을 표현하는 블랙카우에게 작별 인사를 전한 래희는 류정우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그가 업어 주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거절한 그녀는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심할 수 있었다.

“와……. 다행이다.”

게이트는 바로 래희의 주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시스템으로써는 빨리 스콘이나 만들어서 퀘스트를 끝내라는 의도였겠지만, 목격자 없이 게이트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래희는 안도했다.

게이트가 처음 휩쓸렸던 장소에서 다시 열렸으면 그날로 래희의 평화로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저번 게이트에서 류정우 등에 업혀 나온 사람이 이번에도 동일인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면?’

순간 소름이 돋아 몸서리쳤다.

‘절대, 절대 안 되지.’

애초에 왜 같이 휩쓸렸느냐부터 시작해서 말이 많아졌을 게 분명했다.

래희는 비틀거리며 주방 구석에 박혀 있던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잠시 앉은 채로 한숨 돌리자 멀뚱히 창밖의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류정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사과도 해야 하고 감사 인사도 전해야 하고…….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꼬르륵.

배가 너무도 고팠다.

래희의 배 속에서 들린 소리에 류정우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래희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온종일 한 끼도 못 먹었는데, 저녁 드시고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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