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 *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것만 같다.
“으…….”
래희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어딘가에 부딪힌 건 아니었지만 두통이 느껴졌다.
‘아니, 왜 자꾸만 게이트에 들어오기만 하면 머리가 아픈 거지?’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당장 일어나라며 소리칩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알고는 있냐고 묻습니다.]
“아… 시끄러워.”
래희는 눈앞에 정신없이 떠오르는 메시지 창이 귓가에 음성 지원되는 것처럼 정신없었다.
‘다행히 바닥은 딱딱하지 않네…….’
그때,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문득 푹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났어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류정우가 바닥에 누운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라?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한숨 쉽니다.]
“앗!”
바닥이 푹신한 게 아니라 자신이 류정우를 깔고 앉아 있던 거였다.
래희가 너무 놀라 버둥거리며 뒤로 넘어가자 류정우가 그녀를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래희는 류정우에게 사과했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래희는 류정우가 괜찮은지 눈으로 훑었다.
다행히 S급 몸뚱이라 그런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듯했다.
상황을 살피고 어느 정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기 시작하자, 래희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듯한 열쇠가 떠올랐다. 하지만 옷 주머니나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봐도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그새 잃어버린 건가?’
래희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기 죄송한데, 열쇠가 사라진 것 같아요. 아까까지는 분명히 손에 쥐고 있었거든요?”
허둥지둥 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류정우가 래희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쥐고 들어 올렸다.
“여기 있네요.”
류정우가 래희의 손가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
분명히 반지를 손에 낀 적이 없는데 왜 여기에 있지?
래희는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손가락 위에서 열쇠에 달려 있던 핑크색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열쇠가 아니었나?
“아까처럼 또 다른 설명이 보이나요?”
류정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래희에게 물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류정우의 모습에 래희 역시 차분해질 수 있었다.
[??? 열쇠(S)]
- 주인 ‘권래희’를 찾은 열쇠이다. ???을 열 수 있다.
“네, 그런데… 잠시만요.”
래희는 반지의 설명 창을 살피다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 내 열쇠가 맞았네!
그러나 래희는 모르는 척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반지의 주인이… 전데요?”
“그렇군요.”
이번에도 류정우는 딱히 크게 놀란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것이 래희의 손에 끼워져 있을 때부터 예상했다는 듯 아주 쉽고 빠르게 납득한 듯했다.
래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생각했다.
‘아니, 원래 이게 내 거긴 한데 그걸 설명한다고 해서 납득할 리가 없으니까… 어쩌지?’
심지어 류정우가 게이트에서 취득한 던전 부산물이 아닌가? 반지의 가치만큼 지불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꼼짝없이 들어줘야 하는데…….
래희는 일단 류정우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반지는 검지 손가락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반지를 빼 보려 시도하는 래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류정우는 벌게진 래희의 손을 그만하라는 듯이 붙잡았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냥 가지세요. 그리고 손가락에서 빠지지도 않는 걸 돌려주고 싶다 해서 돌려주실 수도 없지 않나요.”
“넵.”
래희는 류정우의 말에 잽싸게 대답하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도 류정우는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일단은 해결된 건가?’
적막이 얼마나 흘렀을까. 류정우에게서 더는 반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래희도 그만 소유권 문제에 대해서 잊기로 했다.
류정우 말마따나 손에서 빠지지도 않는 반지를 돌려주겠다고 손가락을 자를 수 없지 않겠어?
당장 급한 문제가 해결되자 그제야 주변 환경이 래희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스위스의 자연환경같이 푸르디푸른 초원과 호수, 그리고 산이 펼쳐져 있었다.
‘와…….’
하지만 지구에 이렇게 깨끗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데…….
“혹시… 여기, 던전인 건가?”
오염된 지구와 달리 오히려 던전 속 환경이 더 깨끗해 보였다.
‘던전 관광 사업 같은 거 만들면 대박 나겠는데…….’
물론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데… 이런 식으로 던전에 들어오는 건 처음인데요?”
“일단, 여기가 던전이 맞다면 클리어해야만 게이트가 열리겠죠.”
래희는 류정우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곧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 *
래희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벌써 세 시간이나 돌아다녔는데 벌레 한 마리 본 적이 없어요. 여기는 몬스터가 없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던전의 크기가 비교적 작았다. 두 시간 만에 던전을 한 바퀴 돌아본 것 같았다.
‘여기에 갇힌 건 아니겠지?’
래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들어온 숲속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때 류정우가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봤다.
“래희 씨.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때 풀숲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파삭.
꼬―?
닭의 머리였다.
“닭?”
하지만 래희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닭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닭이 무슨 사람만 해…….’
그때 래희의 옆에 서 있던 류정우가 입을 열었다.
“C급 몬스터 킹킨이네요.”
킹킨? 래희는 들려오는 아주 중요한 단어에 순간적으로 집중했다.
‘킹킨이라니.’
지금 그녀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킹킨의 알이 필요한 게 아니었나?
“상대적으로 온화한 킹킨이 저렇게 경계 태세를 보이는 걸 보면 킹킨은 보통 풀숲에서 알을 낳아 근처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 근처에 둥지가 있나 보네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타이밍이 완벽한 것 같다고 박수 칩니다.]
푸드덕―!
한껏 경계 태세를 갖추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킹킨이 갑작스럽게 그들을 행해 달려들었다.
“꺄악―!”
순간적으로 놀란 래희가 얼굴을 가렸다. 저번 게이트를 제외하고는 평생 단 한 번도 몬스터를 제대로 상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몬스터 앞에서 그녀는 민간인이나 다름없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저번에 B급 레드리자드를 잡은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냐고 묻습니다.]
‘그때는 제가 미쳤었나 보죠.’
도대체 그때는 무슨 배짱으로 돌로 몬스터 머리를 찍어 죽일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쿵―
그때, 래희의 귓가에 큰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래희가 슬쩍 얼굴을 가리고 있단 손을 치우자 눈앞에는 쓰러져 있는 킹킨과 먼지 한 톨 없이 멀쩡히 서 있는 류정우가 보였다.
류정우는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 있는 래희를 보며 웃음을 참는 듯했다.
“저번에 제가 봤던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요?”
래희의 성좌와 비슷한 말을 내뱉은 류정우는 일부러 더 놀리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래희는 민망해져서 류정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인벤토리 창을 연 채로 고민했다.
‘…저걸 꺼내고 싶지는 않은데.’
눈앞에는 분홍색 마법봉이 마치 저를 들어 달라는 듯이 오늘따라 유난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래희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한 류정우는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숨기지 말죠.”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며 분노합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류정우를 싫어합니다.]
어휴…….
게이트에 들어오게 된 원인까지 제공했는데 S급 헌터가 앞에 있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었다.
래희는 결국 인벤토리에서 마법봉을 꺼내 들었다.
“몬스터가 있기는 있나 보네요. C급 킹킨이 서식하는 걸 보면 최소 C급 게이트라는 건데…….”
류정우가 설명하는 동안 래희는 슬쩍 풀숲을 뒤지고 있었다.
‘근처에 둥지가 있다며? 안 보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네?”
래희는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
아니, 퀘스트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지? 그러면 클래스가 빵집 사장인 것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나 류정우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되는 류정우의 집요한 추궁에 래희는 두손 두발 들고 모두 설명했다.
래희의 걱정과 달리 류정우는 래희의 능력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크게 놀라지 않은 태도로 담담하게 그녀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대충 설명이 되네요. 우연히 휘말린 게이트에서 퀘스트와 관련된 몬스터가 등장하다니.”
어쩌면 퀘스트를 완료한 순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같이 찾아보죠.”
류정우는 래희를 도와 풀숲을 살폈다. 둥지에는 킹킨의 알이 딱 ‘하나’ 존재했다.
“아…….”
이런, 이 짓을 두 번이나 더 해야 하네.
아직 병아리로 부화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한 래희는 알을 들어 올렸다.
“분명 닭인데 알이 무슨 타조알처럼…….”
정말 스콘의 개수가 열 다섯 개가 맞나? 타조알 세 개면 100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스콘을 아주 크게 만들라는 건 아니겠지?’
그들은 근처에서 곧바로 연달아 두 번이나 킹킨을 잡을 수 있었고 금방 킹킨의 알 세 개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블랙카우만 찾으면 되겠네요.”
래희는 S급 헌터 버프 덕분에 생각보다 손쉽게 퀘스트를 진행한 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 블랙카우가 서식한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미 풀숲은 다 찾아본 것 같은데요…….”
벌써 밤이 되었는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래희가 말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방금 그 발언은 ‘해치웠나?’와 동급이라고 말합니다.]
[방금 발언은 너무 클리셰적인 대사였다고 평가합니다.]
역시 사람은 말조심해야 한다.
래희가 블랙카우가 없는 것 같다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류정우의 등 뒤로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
“류정우 씨! 뒤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블랙카우가 나타났다. S급 헌터인 류정우가 C급 몬스터의 기척을 못 느꼈다는 건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여기, 시간형 던전이었어!’
시간대별로 나오는 몬스터의 종류가 다른 던전. 래희는 순간 너무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래희가 한 걸음 뒤로 발을 내디딘 순간 몸이 아래로 낙하하는 게 느껴졌다.
“악!”
블랙카우를 상대하던 류정우가 재빠르게 비명이 들리는 래희 쪽으로 뒤돌아봤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