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저 사람이 이 시간에 여긴 왜 온 거지?’
래희는 가게 밖에 앉아 있는 류정우를 의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게이트 사고 이후,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이후, 그들을 취재하는 많은 사람의 모습에 곤란해하는 래희 대신, 류정우는 자신이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먼저 증언했다.
최소 A급 전투계 헌터 정도는 되어 줘야 B급 몬스터를 혼자서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각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스탯은 E급이었기 때문에 운으로 몬스터를 잡았다 하더라도 래희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곤란했다.
어릴 적, 최연소 귀환자로 알려졌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감 가득한 눈빛. 그리고 그 이후 E급인 것이 밝혀졌을 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실망이 담긴 눈빛들. 래희는 또다시 그것을 겪는 게 두려웠다.
“제가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게이트에서 제가 각성을 한 것 같네요.”
누가 게이트를 클리어했냐는 질문에 불안해 보이는 래희를 대신해서 류정우가 대답했다. 그 이후 류정우가 S급으로 각성했다는 사실이 전국에 대대적으로 발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더 이상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없어졌다.
류정우는 각성자 등록 이후 더는 아이돌로서 그룹 활동을 이어 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건지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에서 탈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두가 그가 S급인 만큼 당분간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프리랜서로 활동할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류정우는 곧바로 빅3 길드 중 청해 길드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고 알려졌다.
그렇게 지금쯤이면 대던전 정기 토벌 훈련 때문에 바빠야 할 사람이 왜 래희네 베이커리 가게 앞에 앉아 있는 것일까?
래희는 의문이 생겼지만 류정우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가게 문을 열 수 없었다.
진짜, 류정우 앞에만 서면 왜 자꾸 흑역사만 쌓이는 기분이 드는 거지?
‘뾰로롱~!’
아직도 래희의 귓가에 환청이 맴도는 듯했다.
‘오늘은 개인 사정 휴업일이라고 공지하고 도망갈까?’
하지만 S급인 류정우가 자신이 문 뒤에 서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길게 말 안 섞고 용건을 해결해 준 뒤에 빨리 보내 버려야겠다.’
래희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가게 문을 열었다.
“저기요, 손님? 죄송하지만, 아직 빵집 오픈하려면 1시간 정도 더 남았어요.”
오픈 시간은 오전 8시. 7시인 지금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래희의 말에 주저앉아 있던 류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쓴 마스크 위로 푸른 눈이 마주쳤다.
“…류정우 씨?”
이제야 알아본 척, 래희는 놀란 연기를 했다.
류정우는 예상했다는 듯이 눈웃음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아이돌넷 익명 게시판
[인기] 류정우, 결국 또 탈퇴함? (415)
18살, 서바이벌 2등 데뷔. 프로그램 주작 논란 망돌 1년 탈퇴.
죄는 없지만 본인 빼고 6명 모두 조작멤이어서 탈퇴하는 게 당연했음. 그래도 1년씩이나 참고하셨다.
20살, 대기업 입사 피에타 데뷔 4년 만에 1군 남돌 달성, 7년 차에 빌보드 차트 1위.
간만에 대중성, 팬덤 두 마리 토끼 다잡은 그룹이었는데 S급 각성해서 어쩔 수 없이 탈퇴.
낮은 등급이었으면. 아니, 하다못해 C급이었으면 힘들긴 해도 그룹 활동이 가능하긴 했을 텐데, S급이면 여기저기 차출 많이 되니까 절대로 불가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던 애가 하루아침에 은퇴하게 되었음. 불쌍해서 어쩌냐…….
- 하나도 안 불쌍한데. 이러나저러나 S급이면 잘된 거 아님? 어차피 재계약 시즌이라 계속 그룹 유지할지도 불투명했고 곧 군대도 가야 하는데 차라리 잘된 거지. 헌터가 아이돌보다 인기도 돈도 훨씬 많지 않나?
└공감 능력 문제 있음?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아이돌이었다잖아.
└2222.
└3333 그니까.
└탈퇴한 거 원망 안 함.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마지막까지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 보고 진짜 많이 울었음.
└(규칙 위반으로 삭제된 댓글입니다.)
└이번에 류정우 등에 업혀 나온 사람 봤음? 여자인 것 같던데?
└다친 사람이 있으니까 업고 나왔겠지 그럼 버리고 나옴?
* * *
이번 회차는 뭐가 다른 거지? 매번 B급 게이트에 휘말리는 건 같았지만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때부터 달라진 걸까?
지난 회차들에서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미래를 크게 비틀 때마다 일어나는 문제들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원래라면 사망자가 없었을 게이트에서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든지,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지지 않아야 할 장소에서 터진다든지.
그래서 류정우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가만히…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버티면서.
하지만 레드리자드를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단신으로 처리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리고 여자가 자신에게 웃어 보였을 때. 류정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르구나.’
자신이 사건을 비틀기 전부터… 회귀하는 시점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다 비틀려져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정우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이전 회차들과는 그 반응이 다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가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을 때, 류정우는 자신이 나서서 게이트를 처리했다고 발표했다.
‘아이돌엔 더는 미련 없어.’
한때는 ‘데뷔’ 이것 하나만 보며 달려왔던 적이 있었다. 수만을 좌절을 견뎌 내고서라도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하지만 그것도 그에게 있어서 아주 오래전 과거일 뿐. 이미 수많은 회귀를 통해 자신이 ‘무언가가 된다’라는 목표 의식 같은 건 모두 의미 없어졌다.
그저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지치도록 반복되는 이 회귀를 막을 수 있다. 이 생각 하나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막상. 각성자임을 밝힌 이후 류정우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새로운, 예측 불가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 것이 몇 년 만인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아온 정우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회귀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얻게 된 자유에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흘러가는 대로 생각 없이 지내던 와중에. 문득, 게이트에서 마주쳤던 여자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거의 5시간을 함께 있었으면서도 서로 대화조차 잘 하지 않아 자신이 아는 건 여자의 이름과 능력뿐. 그리고 그 여자가 만든 빵.
‘이름이 권래희라고 했던가?’
그때가 바로 류정우가 래희의 이름을 제대로 인지한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정우는 자신을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래희를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분명 가게 안에서 자신을 훔쳐보고 있던 걸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모른척하다니.
장단을 맞춰 줘야 할까?
“아, 안녕하세요……?”
래희는 얼떨결에 류정우의 인사에 답했다. 래희는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선 류정우를 올려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러니까 왜 지금’
“그런데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류정우는 래희에게 싱긋 웃었다. 그리고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탈색 후 하늘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는 검은색으로 덮었는지 검푸른 빛의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류정우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 XX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라며 어서 빨리 쫓아내라고 주장합니다.]
[system: 쾌적한 채팅 환경을 위해 부적절한 말은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와… X발.’
이게 사람 얼굴인가? 아니 활자 속 주인공이었지. 주인공 정도 되니까 저 정도 외모지.
서늘한 눈매에 날카로운 콧대. 크림 파스타를 먹은 듯한 다른 사람들의 허연 입술과 다르게 틴트라도 발랐는지 자연스러운 붉은빛이 맴도는 붉은 입술.
부드럽게 올라가는 이쁜 입꼬리와 래희를 바라보고 있는 류정우의 눈에는 어딘가 웃음을 머금고 있는 듯해 보였다.
래희는 전현생 통틀어 그녀의 앞에 서 있는 피조물만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차가운 흑발 남이 디스토피아 주인공으로 찰떡이야.’
래희는 유혹하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류정우의 눈빛에 오히려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빵집이 있길래 오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가 빵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기다릴 만하니까요? 정우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행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데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인이 자신의 얼굴에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많이 좋아한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래희도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나 평소 다른 사람들이라면 정우의 눈웃음에 다른 생각도 할 틈 없이 곧바로 넘어갔겠지만, 질리도록 류정우의 얼굴을 봐 왔던 자칭 ‘미남 면역’ 래희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빵이요? 그쪽이 언제부터 빵을 좋아하셨다구요?’
당신은 뼛속까지 소식좌가 아니었던가요?
팬카페 닉네임 ‘류정우영혼의반려’였던 래희는 정우의 약지 사이즈까지 알 정도로 그에 대해 속속히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류정우가 좋아하는 음식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는가.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니라 그냥 류정우라는 사람은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다는 이유로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팬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던 래희는 류정우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래희는 어서 빨리 용건만 끝낸 뒤 바로 보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래희가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동안, 류정우는 가게 안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류정우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다시 굳게 닫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래희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이 인간이.’
분명 래희의 마법봉을 떠올렸던 거겠지.
래희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주방에서 만들어 둔 빵을 꺼내 진열대로 옮겼다.
류정우는 래희가 들고 오는 빵들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눈으로 좇았다.
“이렇게 외곽 지역에 빵집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 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제가 여기서 빵집을 차리게 될 줄은 몰랐어요.
류정우는 래희의 답변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여전히 시선을 빵 쪽으로 둔 채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만들어 주셨던 빵은 없는 건가요?”
…저번에 만들어 줬던 거?
“아, 곰순이빵이요? 그건 지금 15분 정도 더 기다리셔야 해요. 방금 오븐에 들어갔거든요.”
“그럼 기다릴게요.”
네?
“15분 정도야 뭐… 기다리면 되죠.”
아뇨. 기다리지 마시고 제발 빨리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당신이 너무 불편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