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겉바속촉 스콘 】
저녁을 포기한 채 래희는 집 밖으로 나섰다. 더 어둑해지기 전에 먼저 마을 상점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래희는 새로 생긴 오솔길로 향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 공간은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다.
오솔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아직 겨울이라 그런지 오솔길이 지나는 숲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팟.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 오솔길 사이에 설치된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왔다.
상점이 있을 마을 광장과 연결된 오솔길을 거의 다 지났을 때쯤 마을 안내판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마을 안내판은 래희가 기억했던 모습보다 많이 낡아 있었다.
[잊혀진 마을 안내]
- 상점
- 마을 회관 (잠금)
마을 주민들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들은 그대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아직 ‘나만의 작은 마을’ 스킬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이 되는 것이 없어서 래희는 대충 지레짐작밖에 하는 수 없었다.
‘여기는 그러면 그럴듯하게 복제된 공간인 건가?’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가운데에 마을 회관이 위치했던 빈 공터와 바로 왼쪽에 상점이 있었다. 아직은 따로 다른 건물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래희는 상점을 바라봤다. 상점 건물은 래희의 기억 그대로였다.
약간 낡은, 아담한 2층 주택. 빨간 지붕에 붉은색 벽돌, 그리고 그 위를 지나가는 풍성한 넝쿨들.
래희는 상점 문 앞에 서서 초대장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냥 열면 되는 건가?”
문고리에 손을 올린 래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끼익―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는지 문은 쉽게 열렸다.
해가 거의 다 질 무렵이라 그런지 가게 내부는 어두웠다. 래희는 창가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빛에 의지한 채 상점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디링―!
[상점 고객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운터 앞에 서자 상점 주인이었던 피터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시스템 창이 갑작스럽게 래희의 시야 앞에 나타났다.
[고객님의 이름을 등록해 주세요! _______]
래희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눈앞에 시스템 창을 노려봤다.
‘이름 등록? 헌터 마켓이랑 똑같은데?’
각성자들이 아이템을 사고팔 때 주로 이용하는 헌터 마켓에 처음 고객 등록할 때와 같은 절차였다.
물론 헌터 마켓은 실물로 존재하는 마켓이라 시스템과는 조금 달랐지만 래희는 손을 들어 올려 익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입력했다.
[‘권래희’ 고객님 등록 완료되었습니다!]
[원하시는 상품이 있으신가요?
씨앗/장비/잡화/목장]
마치 RPG 게임에서 따온 듯이 상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는 농장 운영 게임을 구현한 건가?
래희는 게임처럼 상점이 시스템 창에 표기가 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럴 거면 굳이 귀찮게 마을 광장으로 내려올 필요가 없지 않나?”
래희는 아주 중요한 밥까지 굶어 가며 마을 광장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을 상점은 방문 시에만 이용 가능합니다. 단, 온라인 이용권 추가 구매 시 방문이 필요 없습니다.]
…온라인 이용권?
“시스템이 왜 돈이 필요한 건데요?”
[온라인 이용권 금액 안내. 매월 D급 마석 0.5kg, 연간 D급 마석 5kg입니다.]
[단, 상점에 물건을 판매할 경우에는 직접 방문을 통한 감정이 필요합니다.]
래희의 말을 무시하듯 시스템은 계속해서 상점 이용에 관한 설명을 메시지로 전송했다.
D급 마석 1kg에 100만 원… 시세를 감안하면 이건 시스템의 폭리나 다름없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마석이 필요한 건가? 운 좋게도 래희는 B급 게이트에서 레드리자드를 해치운 뒤 얻은 D급 마석 5kg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류정우가 게이트를 처리한 것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마석의 출처를 설명하지 못해 처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언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러려면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처음부터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래희는 이제 와서 부탁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요즘 얼굴을 보기만 하면 자신과 따로 전속계약을 맺자고 난리인데, B급 레드리자드를 해치운 게 자신이라고 말한다면 당장 함께 팀을 꾸려서 게이트 토벌에 참가하자고 쫓아다닐 게 분명했다.
고작 청소 스킬로 몬스터를 운 좋게 한 번 잡은 것 가지고 래희는 목숨 걸고 싶지 않았다.
‘그래, 골칫덩어리였던 마석을 여기에 사용하면 되겠네.’
래희는 인벤토리에서 붉은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D급 마석을 꺼내어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선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그래서, 결제는 어떻게 하는 건데요?”
[온라인 이용권 1년(365일)을 구매하시겠습니까? Y / N]
래희가 Y를 누르자마자 양손으로 들고 있던 마석이 사라졌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상점 카탈로그 창이 시스템에 추가됩니다!]
[축하합니다! 스킬 ‘나만의 작은 마을’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C → C+]
래희의 시스템 창에 인벤토리 옆, 상점이라고 적혀 있는 버튼이 추가되어 있었다.
“와… 하다못해 시스템마저 돈미새였어…….”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조언합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나만의 작은 마을’ 스킬이 유료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잖아요! 이게 무슨 스킬이에요!”
스킬이란 자고로 훈련을 통해 성장시키는 거였다. 하지만 래희가 가진 스킬은 성장이 필요할 때 마석이 필요하니 이게 바로 유료 스킬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다못해 이런 류의 농장 운영 게임에서도 현질은 안 하는데…….’
마치 시스템이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회원비 아깝지 않게 이용해야지.”
래희는 곧바로 상점 카탈로그 창을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
[씨앗]
- 봄/여름 작물 씨앗 (0/9)
- 여름/가을 작물 씨앗 (2/9)
▼
밀, 옥수수, (미발견), (미발견)…….
씨앗에 미발견이라고 뜨는 걸 보니 상점에는 발견한 씨앗만 등록이 되는 듯했다.
‘아직 과일나무는 구할 수 없나 보네…….’
래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른 상품들을 찾아봤다.
[상급 비료] 1kg 10G
: 성장 속도를 2배 단축한다.
비료가 1kg에 10골드……?
“10골드가 얼마지?”
[골드는 원화로 환전 가능합니다.]
[1G = 10,000원입니다.]
래희는 시스템의 안내 메시지를 읽으며 고개를 저었다.
10만 원짜리 비료라…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이걸 쓰면 빵집 운영은 적자가 아닌가?
[트랙터] 1,000G
: 정해진 구역의 작물을 자동으로 수확한다. (단, 밀, 사탕수수, 옥수수에만 적용 가능)
오! 이건 무조건 필요한 거였다.
당장 빵의 주재료만 해결해도 노동 환경이 나아질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요즘에는 내가 농사꾼인지 빵집 사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농사일이 너무 많았다.
래희는 주섬주섬 장바구니에 아이템을 하나둘씩 담아 넣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지 않냐며 의문을 가집니다.]
“원래 사업은 투자가 필수라구요. 뭘, 좀 모르시네.”
래희는 성좌에게 이건 모두 투자라고 말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며 쇼핑을 계속했다.
[암탉] 100G
: 하루 10개 이상의 알을 낳는다. (닭장 건설 필요)
[젖소] 1,000G
: 하루 우유 100L 생산합니다. (축사 건축 필요)
래희가 그동안 제일 필요했던 달걀과 우유.
작물이 부족한 오염된 지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육류나 유제품은 구하기 쉬운 음식이었다.
10여 년 전 식량난의 해결책으로 몬스터 고기를 섭취해도 건강에 문제가 없는 연구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가 된 이후에는 지구에는 육류가 풍부해졌다. 일단 동물형 몬스터가 흔했으므로 가능한 결과였다.
소나 닭같이 일반형 몬스터가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게이트는 래희의 가게 근처 하양 곰순이 던전 게이트처럼 클리어하지 않고 유지한 채 방목지 마냥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밀을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은 시중에 판매되는 걸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 재료를 이용해 새로운 빵의 레시피를 얻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를 해 보았다. 하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C급 이상의 빵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직접 기르고 수확한 재료만으로 고등급의 레시피를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닭이나 소를 직접 키워 달걀과 우유를 얻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상상도 해 봤지만 그건 여기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C급 레시피의 빵이라 하더라도 이 세계 기준에서도 래희의 빵은 제법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래희의 기준에서는 한참 못 미치는 맛이었다. 때문에 래희는 달걀과 우유를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다.
“그럼 닭장이랑 축사부터 만들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래희의 땅은 100평. 농사짓는 것도 모자랄 판에 축사 같은 큰 건축물이 들어설 공간 같은 건 없었다.
그때, 래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퀘스트: 맛있는 빵이란]
더 맛있는 빵을 만들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특별한 재료로 풍미 가득한 빵을 만들어 봅시다.
- ‘직접 수확한’ 킹킨의 알 (0/3)
- ‘직접 수확한’ 블랙카우의 우유 300ml
- 스콘 만들기 (0/15)
- 완료 보상: 닭장과 축사 건축, 경영 지원금 2,000G
…저기요?
“아니, 고작 스콘을 만드는데 킹킨의 알과 블랙카우의 우유를 사용하라구요?”
보통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들은 F급 몬스터들에게서 얻은 것들인데 C급 몬스터라니.
저 아직 스탯 E급 쩌리라서 퀘스트 수행 시도도 못 하고 죽겠는데요?
래희는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하…….”
퀘스트 창 완료 보상에 적힌 경영 지원금 2,000G.
2,000만 원…….
래희에게 있어서 꽤나 유혹적인 금액이었다. 조금 전 쇼핑하느라 쓴 돈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었는데 저 2,000만 원이라면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무슨 수로 C급 블랙카우와 킹킨에게서 재료를 구하냐는 말이지.”
비록 재각성으로 C급이 되었지만 E급 스탯으로는 무력 사용은 불가능했다.
‘재언이에게 부탁해서 같이 게이트에 들어가 달라고 말할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지금 3대 길드에서 대던전 정규 토벌 합동 훈련을 한다고 들었는데……?
“대던전……?”
래희는 생각하다 말고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겠지.
* * *
‘이 시간에 손님?’
월요일 아침 7시. 빵집을 오픈하기 아직 1시간 전.
래희는 아직은 약간 어두운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다 가게 문 앞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 시간에 이곳에 방문할 사람은 없는데?
세연은 당분간 오지 못할 거라 미리 그녀에게 말했기 때문에 가게 앞의 사람이 그녀일 리는 없었다.
래희는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확인했다.
‘류정우?’
마스크를 쓰고 어두운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그녀가 류정우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래희는 류정우의 숨소리만 들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류정우는 탈색한 염색모를 다시 어둡게 덮었는지 어두운 검은 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정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래희는 너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류정우와 눈이 마주치기 전 커튼을 치고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