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 *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류정우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퇴근하던 길에 게이트에 휘말린 건지 여느 직장인과 같이 검은색 정장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들린 의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핑크색 장난감 마법봉이 깜찍한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아 보여 류정우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웃겼다.
‘…귀엽네.’
그 순간, 류정우는 자신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곧이어 여자가 스킬을 사용했는지 그들 주변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단정하게 하나로 묶여 있던 여자의 긴 머리가 풀린 채로 ‘빵’과 함께 공중에 흩날렸다.
‘빵……?’
공중에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건 바로 빵이었다. 바로 곰 얼굴 모양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류정우는 회귀 9회차 중 처음 보는 황당한 광경에 표정 관리도 잊은 채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 * *
[축하합니다! ‘블러디베어(C)’의 호감도 +40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파리에서 재주 부리는 곰에게 건빵을 던져 주는 것처럼 래희는 곰의 머리 위로 고양이 낚시하듯 빵으로 곰을 요리조리 유혹했다.
다행히 빵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지, 곰은 나무 기둥 뒤에 숨어 있는 래희와 정우 두 사람을 잊은 채 공중에 둥둥 떠올라 있는 빵을 잡기 위해 손짓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래희는 이때다 싶어 남은 빵을 이용해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곰을 먼 곳으로 유인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휴… 사람이 더 맛있어 보일까 봐 얼마나 쫄았는지…….”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래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곧바로 주저앉았다. 그때 그녀의 앞에 있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구경하고 있던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아…….
‘X발.’
래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등 뒤로 마법봉을 숨겼다.
20대 중반의 다 큰 여자가 뾰로롱 외치며 장난감 마법봉을 휘두르다니. 분명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당당하지 못한 당신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쪽이 내 입장 한번 되어 봐요!’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게 분명한 성좌 취향이 마법 소녀라니. 래희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변태 같은 성좌와 계약을 하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래희는 손을 빠르게 휘저어 성좌의 메시지 창을 치운 후 자신을 신기한 동물 보듯 관찰하고 있는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 류정우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꼬르륵.
래희의 배 속에서 민망하게도 배고픔을 알리는 소리가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숲속에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저녁으로 샌드위치에 캔 커피 하나를 먹었지만 몬스터들에게 쫓기느라 그 에너지를 다 소비한 듯했다.
“저기… 혹시, 배 안 고프세요?”
한국인은 밥심이지.
물론 몬스터들에게 뿌리느라 아까 만든 빵을 다 소진해 버렸지만, 인벤토리에 수확한 밀 20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주방 티켓은 다 사용했는데…….’
래희는 언제 구해질지 모르는 B급 던전에서 혹시 모를 나중 상황을 대비해 미리 빵을 더 만들어 두고 싶었다. 생존과 퀘스트가 전혀 상관없어 보였는데, 다행히 싸울 필요 없이 빵 하나로 몬스터로부터 살아남는 걸 보면 괜히 재각성이 아닌 듯했다.
그때 래희의 머리 위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 인간이…….
누구는 망신당하는 것도 감수하고 그쪽 힘숨찐 놀이에 최대한 맞춰 주고 있는데 이렇게 비웃으면 안 되지…….
래희는 짜증이 나서 눈을 희번덕 뜨며 정우를 노려봤다. 그제야 자신이 무례했음을 깨달았는지 정우는 표정 관리를 하며 사과해 왔다.
“아, 죄송합니다. 구해 주셨는데 제가 많이 무례했네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저 가식적인 모습을 보라며 사람이 얼굴이 전부가 아니라며 다시 한번 조언합니다.]
[이런 걸 좋다고 쫓아다녔다니, 아무래도 눈이 발바닥에 달려 있는 것 같다며 당신의 안목을 걱정합니다.]
래희는 이제 익숙한 성좌의 헛소리에 반응도 하지 않고 정우에게 대답했다.
“됐어요. 나 같아도 못 참고 웃었을 테니까…….”
순간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 래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일어났다.
아, 진짜. 그래, 좀 폼이 안 나면 어때. 어쨌든 칭호가 빵집 사장이라도 S급 각성자인 건 다름없잖아.
더는 이보다 더한 망신살이 생기게 할 순 없었다.
래희는 당당하게 허공을 올려다보고선 자신의 성좌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리하자면 그래, 닥치고 주방 티켓이나 내놓아라, 였다.
* * *
“해가 지고 있네요.”
30분도 지나지 않아 어둠이 찾아올 것 같아요.
래희가 성좌에게 떼를 써서 얻은 주방 티켓으로 빵을 만드는 사이에 불을 피우고 있던 류정우가 말했다.
완성된 식빵을 가지고 옆에 앉은 래희에게 정우가 물었다.
“밤이 되면 저희가 버틸 수 있을까요? 이 근처를 다 찾아봤지만, 동굴같이 몸을 숨길만 한 장소는 나오지 않았잖아요.”
래희는 S급 각성자의 엄살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아까 보셨다시피 저도 전투계 헌터는 아니어서 걱정되네요.”
물론, 옆에 계시는 S급 각성자라면 이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하는 게 충분한 일일 테다.
하지만 자신이 옆에 있는 한 절대 나서지 않을 것을 알고 있던 래희는 정우가 나서길 기다리는 것보다 구조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게 더 빠를 거란 결론을 내렸다.
래희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구워 온 식빵을 정우에게 건넸다.
“드셔 보실래요?”
정우는 자연스럽게 식빵을 건네받으며 확인했다.
[곰순이 식빵(C)]
- 맛 ★★★★
- 향 ★★★
- 누구나 호감을 느낄만한 식감과 향을 가진 빵이다.
정우는 음식에 아이템 부가 설명이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정확하게 클래스가 어떻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요리하는 스킬을 가졌다는 건 알겠네.’
그럼, 테이머라는 건 거짓말이었네. 이제야 그가 이전 회차들에서 래희를 들어보지 못했던 걸 납득할 수 있었다.
세상엔 다양한 특수 직업군이 있다. 테이머, 감정사, 조각가, 건축가 등. 하지만 요리 관련 스킬을 가진 헌터는 처음 보았기 때문에 정우는 래희가 흥미로웠다.
이런 스킬 때문에 이전 생에선 알려지지 않고 살아간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몬스터를 길들인 걸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기에는 찝찝했다.
그는 옆에서 자신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래희를 한번 보고선 손에 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
‘뭐지?’
20년, 아니 30년 만에 느껴보는 맛이었다. 텁텁하지 않고 인공적이지 않은 향을 가진 음식.
지구가 오염된 이후로 척박한 대지에 맞춰서 먹거리들의 종류는 줄어들고 맛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기술의 발전으로 인공 화합물을 이용해 본연의 맛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었지만, 그건 사람들이 이전의 맛을 잊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입 안에 한입 가득 베어 문 빵 조각 때문인지, 코끝에 고소향 향이 맴돌았다. 류정우의 눈앞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반복되는 삶을 통해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 갔던 류정우에게 있어서 이렇게 자극적인 맛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했다.
[축하합니다! ‘류정우(S)’의 호감도 +50을 얻게 되었습니다!]
호감도… 50?
래희는 놀란 표정으로 류정우를 바라봤다.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빵을 관찰하고 있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입 베어 물고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앞의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원래 많은 회귀를 통해 감정이 무뎌진 것 아니었나?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정우의 눈빛은 많은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당신에게 재능을 찾아 준 자신을 존중하고 감사해야 한다며 어깨를 으쓱입니다.]
아, 정말. 자꾸 그러면 더 없어 보여요.
래희가 성좌를 향해 잔소리하던 그때, 잊고 있던 퀘스트 달성 메시지 창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빠밤빠바밤―!
[경―축! 튜토리얼 퀘스트 수행을 완료했습니다!]
그때였다.
“피해요!”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류정우가 그녀를 들어 올리고선 보이지 않는 속도로 수풀 쪽으로 이동했다.
‘뭐지?’
래희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자신이 류정우에게 공주님 안기로 안겨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E급 스탯을 가진 래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콰광―!
그들이 앉아 있던 장소가 커다란 그림자에 완전히 짓밟혀 사라졌다.
‘내가 류정우 아니었으면 저기에 깔릴 뻔한 거야?!’
그러나 래희는 자신들을 덮친 게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곧바로 류정우가 그녀를 들고 뒤돌아 숲 안쪽으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더는 능력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류정우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 래희를 욱여넣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제가 해결하고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저기요. 일반인인 척하고 계시던 거 아니었어요?
뒤돌아 자리를 뜨려는 정우의 옷깃을 저도 모르게 붙잡았던 래희는 그가 그녀를 향해 돌아보자 깜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류정우 씨는 비각성자잖아요. 어쩌시려고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정우는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선 망설임 없이 뒤돌아 뛰어갔다.
쾅!
끼에엑!!
큰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쿵―!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방이 온통 조용해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래희는 숨어 있던 바위 아래에서 기어 나와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이미 어둠에 잠긴 숲은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해치웠나?’
아차. 퉤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괜한 플래그를 꼽지 말라며 한숨 쉽니다.]
킁―
그때 어디선가 콧바람을 뀌는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는 놀라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얼마 못 가 무언가에 등이 부딪혔다.
‘아…….’
천천히 뒤로 돌자 커다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도마뱀 B급 몬스터, 레드리자드였다.
‘어쩌지?’
앞선 두 몬스터와는 다르게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레드리자드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게다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래희 자신을 한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 진짜. 이러니까 전투계로 각성하고 싶었다니까.’
래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사이에 류정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쿠룽―!
레드리자드가 흥분한 듯 보이자 래희는 인벤토리에서 마법봉을 꺼내어 들었다.
“그래, 뭐라도 해 보자.”
순간 래희의 시야에 자신이 숨어 있던 바윗덩이가 눈에 보였다. 레드리자드 몸체만 한 날카로운 모양의 바위였다.
아무리 B급 몬스터라도 머리가 깨지면 죽겠지.
“좋아.”
래희의 머리 위로 레드리자드가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래희는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다.
크르릉!
레드리자드가 입을 연 채로 그녀가 서 있는 바닥을 향해 머리를 내리자마자 래희는 옆으로 구르며 바위를 들어 올렸다.
다행히 마력이 넘쳐났기 때문에 바윗덩이를 들어 올리는 데 큰 체력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킬 ‘쓱싹쓱싹 청소 요정(C)’이 발동됩니다.]
도마뱀의 입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닿는 순간 바윗덩이를 머리 위로 강하게 찍어 내렸다.
쾅―!
큰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흩날렸다.
[필드 보스 ‘레드리자드(B)’를 처치했습니다.]
[업적 달성! 칭호 ‘파충류 사냥꾼’을 획득하였습니다.]
“으…….”
평생 제대로 움직여 볼 기회가 없던 몸을 땅바닥에서 열심히 굴렸더니 발목이 접질린 듯했다.
래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주저앉은 자세로 발목을 부여잡았다.
멀리서 급하게 달려왔는지 헝클어진 머리로 래희를 바라보고 있던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정우는 쓰러져 있는 레드리자드와 래희를 번갈아 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류정우의 헛웃음을 마주한 래희는 민망한 듯이 그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