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빵집 사장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칭호에 래희는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내가 헛것을 본 게 분명해. 하지만 눈을 뜨고 허공에 나타난 메시지 창을 다시 확인했을 땐 변한 건 없었다.
[축하합니다! 클래스 ‘빵집 사장 S’으로 각성하였습니다!]
여전히 눈앞에선 화려한 색감의 메시지 창이 빛나고 있었다.
‘…빵집 사장? 그따위가 클래스라고?’
빵집 사장 따위로 뭘 할 수 있는 거지? 차라리 마법 소녀가 백배는 나아 보였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님이 당신에게 딱 맞는 클래스가 주어졌다며 박수를 칩니다.]
[당신의 적성을 완벽하게 파악한 자신을 향해 자축합니다.]
“별 씨, 님이 보기에는 저따위 클래스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S급으로 재각성해서 던전에서 살아날 구멍이 생겼나 싶었더니 오히려 쓸모없어 보이는 클래스와 성좌가 딸려 온 듯했다.
‘아니야, 큰 뜻이 있겠지. 이게 결코 끝이 아닐 거야.’
래희는 곧바로 상태 창을 열어서 클래스 관련 부가 스킬을 확인했다.
[클래스 ‘빵집 사장 S’ 부가 스킬]
- 나만의 작은 마을 C(S)(잠금)
- 자급자족 S
- 제빵왕의 비법 S
- 맛집이 되는 법 S (잠금)
‘클래스도 이상한데 부가 스킬도 이게 단가?’
하나같이 어떤 스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대충 얼핏 봐도 전부 비전투계 스킬뿐. 닥치고 빵집이나 차려서 S급 제빵왕으로 살라는 건가?
[상태 창]
이름: 권래희
나이: 24세
칭호: 인생 2회차(히든)
클래스: 마법사 / (NEW) 빵집 사장 S
등급: C(S)
성좌: 운명의 길잡이
스킬
- (NEW) 빵집 사장 부가 스킬(일부 잠금)
- 쓱싹쓱싹 C(S)(숙련도 증가 시 등급 향상)
- 반짝반짝 C(S)(숙련도 증가 시 등급 향상)
- (NEW) 마법 소녀 S(패시브 스킬)
스탯
- 체력 15
- 근력 12
- 민첩 13
- 마력 40
- 행운 45
원래 가지고 있던 스킬은 E급에서 C급으로 올랐지만 스탯은 재각성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리고 마법 소녀……?
‘설마 마법봉이 자기 취향이라고 이딴 스킬을 준 건 아니겠지?’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스킬명이었다. 일단 어쨌든, S급이라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아니, 저기요. 어쩌라는 거죠?”
성좌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E급 물몸이라니. 무슨 의도가 있든 자기 계약자가 여기 던전에서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지 않나?
“심지어 죄다 스킬이 잠겨 있잖아요! 이러다가 뭘 하기도 전에 죽게 생겼어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걱정 말라며 당신을 위로합니다]
디링―!
[튜토리얼 퀘스트]
‘…….’
래희는 눈앞에 던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퀘스트 창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어져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숨어 있기도 바쁜데 그 와중에 퀘스트도 하라고?
빨리 내용을 확인하라는 듯이 퀘스트를 알리는 메시지 창이 래희의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이제 제빵을 처음 시작한 당신! 맛있는 빵을 만들고 싶다고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당신을 위한 튜토리얼 퀘스트! 좋은 품질의 맛있는 빵을 만들어 호감을 얻어 보자!
- 밀 수확 (0/30)
- 곰순이 식빵 (0/3)
- 호감을 얻은 횟수 (0/3)
- 제한 시간 D-1
- 실패 페널티: 전 스탯 10씩 하락
잠시만, 스탯 10 하락? 그럼 스탯이 거의 한 자릿수인데? 퀘스트 한번 잘못했다고 일반인이 된다는 건가?
“미쳤어요? 던전에서 태연하게 빵이나 구우라니! 심지어 여기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 퀘스트가 B급 던전에서의 생존과 무슨 상관인 거죠?
래희가 미친 성좌라도 본다는 듯이 허공을 향해 소리 질렀다. 계약할 땐 약관을 꼼꼼하게 잘 읽어 보고 사인해야 한다더니, 계약 순간으로 돌아가 S급이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다고 말했던 과거 자신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었다.
퐁.
그때 허공에서 분홍색 티켓 하나가 등장했다.
[임시 이동 주방 티켓(S)]
- 주방이 급하게 필요하시다고요? 오븐, 화덕 등 기본 장비가 갖춰진 푸드 트럭을 제공합니다.
(요리가 끝난 후 완료 버튼을 누르면 주방이 사라집니다. 1회 사용 가능 / 최대 사용 시간 3시간)
뾰롱―!
얼떨결에 티켓을 집어 들자 이상한 소리와 함께 래희가 쥐고 있던 ‘마법 소녀 뾰롱뾰롱 마법봉(S)’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뭐지?’
한참을 반짝거리다 눈부시게 환한 빛을 비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래희의 손안의 마법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웬 거품기?
카X 캡X 체리 같은 마법봉은 사라지고 손에는 ‘핑크색’ 거품기가 들려 있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뿌듯해합니다.]
래희는 성좌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손에 들린 휘핑기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거품기(S) (마법 소녀 뾰롱뾰롱 마법봉(S))]
- 마법 소녀 뾰롱뾰롱 마법봉이 일시적으로 변한 상태.
- 손에 들고 허공을 향해 세 번 휘저으며 ‘뾰로롱~!’을 외치면 마법봉으로 돌아간다.
- 레시피를 선택한 뒤 믹싱볼에 재료를 넣어 휘저으면 반죽이 완성된다.
‘…X발.’
상태 창을 열어 천천히 아이템 설명을 읽은 래희는 울고 싶어졌다.
* * *
권래희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두 가지가 있다면, 첫 번째는 바로 감당 못 할 흑역사가 쌓이는 것도 모른 채 류정우란 인간을 미치도록 덕질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조금 전 성좌와 계약했던 순간이었다.
까아악!
래희의 머리 위로 미친 듯이 쫓아오는 까마귀 한 마리.
사람 몸뚱이보다 큰 까마귀는 붉은 눈으로 하늘 위에서 그녀를 응시한 채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래희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래희는 억울했다.
전생, 현생 통틀어 단 한 번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비록 둘 다 특별할 것 없는 엑스트라의 삶이었지만 큰 불만 없이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 끝이 성좌와의 사기 계약과 까마귀에게 먹혀 죽는 엔딩이라니.
평범하고 단조로운 삶에 조금이라도 특별한 이벤트가 생기는가 싶었지만, 그 끝은 비참하게도 초라했다.
“허억…….”
래희는 숨이 차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E급의 허약한 스탯으로는 저 까마귀가 쫓아오는 걸 피할 체력이 부족했다.
조금만 더 뛰면 몸을 숨길만 한 장소가 있어 보이는 숲이 눈앞에 보였지만 래희는 도저히 저기까지 도달할 자신이 없었다.
풀썩.
등 뒤로 까마귀가 밀밭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가 서서히 뒤로 돌자 까마귀가 침을 질질 흘린 채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맛없어… 정말이야…….”
C급 몬스터 빅레이븐은 래희의 스킬을 이용해 공격한다 해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래희는 전의를 잃은 채 까마귀를 향해 의미 없는 애원을 했다.
끼엑?
눈앞의 까마귀가 래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짝씩 가까이 다가왔다. 까마귀가 부리 끝을 그녀의 얼굴로 향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끝을 향했다.
‘……?’
까마귀가 래희의 손을 향해 킁킁거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식빵을 덥석 물었다. 놀란 래희가 순간적으로 빵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자 까마귀는 게눈감추듯 빵을 순식간에 꿀떡 해치웠다.
‘날 쫓아온 게 아니라 식빵을 쫓아온 거였어?’
어쩐지 이상하게도 기본으로 주어진 레시피를 이용해 빵을 만들 동안 까마귀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다가, 빵을 완성하고 임시 주방이 사라진 순간 어디선가 나타나 그녀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한 조각으로는 모자랐는지 까마귀는 위협적으로 래희를 향해 입을 크게 열어 보였다.
“알았어! 더 줄게.”
래희는 급하게 인벤토리 창을 열어 아까 전 만들었던 빵의 일부를 더 꺼내 들어 까마귀에게 던졌다.
까마귀가 만족스럽게 빵 조각을 꿀떡꿀떡 삼키는 도중 래희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디링―!
[축하합니다! ‘빅레이븐(C)’의 호감도 +50을 얻게 되었습니다!]
호감도?
‘몬스터한테도 호감을 얻을 수 있는 거였어?’
래희는 다시 한번 퀘스트 창을 열어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튜토리얼 퀘스트: 제빵왕이 되는 길(1)]
- 밀 수확 (50/30) (완료)
- 곰순이 식빵 (5/3) (완료)
- 호감을 얻은 횟수 (1/3)
- 제한 시간 20:35:27
퀘스트 창의 호감도 횟수에 1이 생겨났다. 즉 대상이 인간이든 몬스터든 상관없이 호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잘하면 구조될 때까지 게이트 안에서 버틸 수 있겠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래희는 빵으로 몬스터들의 호감을 얻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리며 자신에게 부리를 비벼 오는 까마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밖에 나가서 빵집 사장이 아니라 테이머라고 하고 다녀도 먹힐 것 같잖아?”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당신의 말에 혀를 찹니다.]
[당신의 스탯으론 테이머는커녕 방심하는 사이 한 입 거리 간식이 될 게 분명하다고 조언합니다.]
래희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S급 빵집 사장보단 S급 테이머가 더 멋진데…….”
S급 테이머라면 위험한 일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덤으로 명성도 가질 수 있는 괜찮은 클래스였다.
어디 가서 ‘재각성자 S급 빵집 사장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대부분 비웃을 게 뻔하지 않을까? 할 줄 아는 건 빵 만드는 것밖에 없지 않으냐며 조롱하면서.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자신은 당신을 그렇게 속물로 키운 적 없다며 한숨을 쉽니다.]
[당신이 읽던 소설의 ‘힘숨찐’ 컨셉이 당신이 원하던 것 아니었냐며 묻습니다.]
그건 주인공이고요. 이번 생엔 인싸로 살아 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그쪽이 언제 절 키웠어요? 우리 만난 지 겨우 2시간 지났거든요?”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 창을 닫으며 한숨 쉬었다. 이왕 여러 번 사는 인생 한 번쯤은 슈퍼스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래희는 지나간 기회에 대한 아쉬움에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일단 남은 빵으로 몬스터 두 마리만 더 꼬셔서 빨리 퀘스트나 해치우든가 해야지.’
래희는 자신을 졸졸 뒤따라 오는 까마귀를 뒤로한 채 숲 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숲 쪽 입구에 서 있는 누군가와 래희의 눈이 마주쳤다.
큰 키의 연하늘색 머리 그리고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눈.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그리고 래희에게는 아주 익숙한 얼굴.
‘…그쪽이 왜 거기서 나와?’
그 남자는 바로 류정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