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 *
1999년 지구가 멸망할 거라던 예언.
많은 사람이 늘상 존재하던 음모론이라며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그다음 해인 2000년, 전 세계 각 나라의 수도에 다양한 규모의 ‘대던전’이 나타났다.
기존의 예언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멸망이었지만, 어쨌든 예언이 말한 결과와 같은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던전의 등장과 함께 사람들의 눈앞에는 마치 컴퓨터 오류를 알리는 팝업 창처럼 이상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77에 시스템 네트워크가 연결되었습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받은 직후, 상황 파악을 할 틈도 없이 지구는 재앙을 맞이했다.
소규모의 던전들이 세계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게이트라고 불리는 던전에서 괴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예언처럼 인류가 멸망하나 싶었을 때, 괴수들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각성자’들이 등장했다.
[익명의 누군가가 당신에게 흥미를 가집니다.]
[성좌와의 계약에 성공합니다!]
일부 각성자들은 ‘성좌’라는 초월적인 존재들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기 시작했고 성좌와의 계약을 재각성이라 불렀다.
운 좋게 재각성에 성공한 각성자들은 특이한 능력을 갖게 되거나 일반 각성자들 보다 훨씬 월등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힘을 얻은 각성자들은 영화나 게임에서나 볼법한 힘을 이용해 몬스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고, 세계는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 * *
쏴아아―
바람 소리에 래희는 눈을 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던전?’
래희는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허리를 펴자 등이 너무나도 아팠다. 아무래도 게이트에 휘말릴 때 던전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했다.
‘망할 디스토피아 세상.’
전생에 유행했던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디스토피아 세상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는데 그게 내가 될 줄이야. 아마 그들도 나처럼 파리 목숨이었겠지.
하지만 그곳엔 피해 보상이라도 후하게 주는 박애주의자 재벌이라도 있지,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었다.
래희는 불쌍한 엑스트라의 삶을 한탄하며 흙 묻은 자신의 옷을 털고 일어나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황금빛. 래희의 주변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광활한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밀밭?”
던전 한가운데 밀밭이라니. 어릴 적 게이트에서 실종되었던 시절, 농사지으며 살았던 시골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염된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넓고 광활한 밀밭.
‘오히려 오염이 안 된 환경을 보니까 더 던전 같네.’
그림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경에 오히려 더 이질감이 들었다. 게이트로 토양이 오염되어 더는 아름답지 않은 지구와 비교가 되는 이 풍경을 지켜볼수록, 래희 자신이 게이트에 휩쓸렸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X발.’
어쩌지? 혼자서 던전에 떨어지다니. 주변에 같이 휩쓸렸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던전 크기가 매우 큰 듯했다.
‘아무래도 진짜 X된 것 같아.’
래희는 생명줄처럼 손에 꽉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당연히 서비스 불가 지역이라 설명하는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재언이한테 온 답장은 없는 건가?’
그때 휴대폰 화면 위로 확인하지 못했던 재난 안전 문자가 떠올랐다.
[긴급 재난 문자
[던전관리청] 오늘 20시 45분 서울 안전 구역 30-7번가 B급 게이트 발생. 게이트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B급이라니.
안전지대 한가운데서 게이트가 열리는 것도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데 심지어 B급. 이런 운이면 로또도 열 번은 더 당첨되었을 확률이었다. 비전투계 E급 물몸으로는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디 가서 굿이라도 해야 하나? 무속 신앙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하루 종일 재수 없음이 끝이 없었다.
‘일단 숨을 곳이나 찾자.’
일반인과 다름없으니 몬스터들을 피해 먼저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시야 끝까지 밀밭이라 숨을 곳이 없어 보였다.
우선 래희는 혹시 몰라 인벤토리 창을 열어 유일하게 가진 고등급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하트 모양의 보석이 박혀 있는 분홍색 막대기. 마치 카드XX 체리에 나올 법한 귀엽고 앙증맞은 모양새.
[마법 소녀 뾰롱뾰롱 마법봉(S)]
: 소유주의 스킬 효과를 10배 증폭시켜 준다. (소유주: 권래희)
부가 효과: 스킬 사용 시 분홍빛 하트 이펙트 효과 발생.
래희는 손에 쥔 아이템을 본 뒤,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진짜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니면 쪽팔려서 안 쓰는데…….’
어릴 적 ‘전’ 보호자에게 선물 받은 S급 아이템.
그러나 E급 비전투계 각성자로서 가진 스킬 능력이 애초에 초라할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스킬 효과를 10배 증폭시켜 준다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래희는 이 아이템이라도 손에 들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띠링―!
[익명의 누군가가 당신의 아이템을 보며 감탄합니다.]
[자신의 취향을 저격하는 디자인이라며 당신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아, 예.
‘참 누구처럼 특이한 취향이네.’
래희는 멍하니 서서 속으로 대충 말대답을 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메시지 창……?
성좌. 성좌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 창이 래희의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이거 혹시… 재각성 그린라이트?
“성좌님?”
래희는 희망찬 목소리로 신이 난 듯 허공을 향해 소리치며 물었다. 성좌라니.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일을 내가 해내다니. 아마 그동안 운이 안 좋았던 건 이 순간을 위한 빌드 업일지도 몰랐다.
15년 E급 엑스트라의 삶에서 벗어나 드디어 빙의자 버프를 얻게 되는 건가?
래희는 역시 빙의자에겐 이런 클리셰가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명의 누군가가 당신의 ‘빙의자’ 언급에 관심을 가집니다.]
[검색을 통해 당신이 전생에 읽었다는 『아이돌이 S급을 숨김』이라는 소설을 찾아냈습니다.]
뭐야. 성좌면 저런 것도 알아낼 수 있는 건가?
아무래도 시스템에는 개인 정보 보호라는 기본적인 매너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역시 인권 침해가 만연한 디스토피아 답네.’
뭐, 어차피 개인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가 S급 각성이라면 그깟 개인 정보, 다 팔려도 상관없었다.
[익명의 누군가가 문스타 계정 @JW_SSS 의 201X년 게시물 ‘정우 찍사 컬렉션’을 발견합니다.]
[저 남자가 원작 남주냐며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더 잘생겼다고 말합니다.]
아, 역시 다 삭제된 계정도 확인이 되는구나.
그래도 S급 각성을 생각하니 이것 또한 참을 만했다.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다는 덕질의 과거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래희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매력 어필을 시전하는 성좌가 어이없었다.
류정우가 누군가?
‘최애는 최애, 류정우는 류정우’라는 유명한 문장을 만들어 낸 남자가 아닌가. 게다가 래희는 살면서 류정우보다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소설 속의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었다.
앞으로 영원히 볼 일 없을 성좌 얼굴 따위보다 저 완벽한 피사체인 류정우 얼굴을 보는 게 더 생산성이 있을 게 분명했다.
래희는 성좌의 말을 가볍게 씹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래희에게 꽂힌 성좌 또한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익명의 누군가가 201X년 당신이 팬 사인회 때 들고 간 혼인 신고서를 확인합니다.]
“잠깐만! 에이~ 이건 아니지.”
래희는 혼인 신고서 내용을 줄줄 읽고 있는 성좌를 향해 소리 질렀다.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과거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했던가? 지금 그 말, 취소하겠다.
[익명의 누군가가 자신은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의 사위는 별로라고 혀를 찹니다.]
[오늘 아침 헤어진 당신의 전남친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당신의 얼빠력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래희는 꼰대 같은 성좌의 ‘얼빠’ 발언에 분노하며 머리가 아파 와 이마를 짚었다.
날 키워 준 보호자도 남의 연애에 관여 안 하는 데 첫 만남부터 이 성좌가 무슨 상관이람? 혹시 님이 돌아가신 제 부모님인가요?
그리고 안 그래도 얼굴만 밝히다 배신당한 전남친을 떠올리자 오전에도 안 났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인생에 보탬도 안되는 똥별, 꺼지라지.
래희는 갑작스러운 성좌의 팩트 폭격에 기분이 나빠져서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 성좌라는 것도 잊고 속으로 그의 욕을 중얼거렸다.
[익명의 누군가가 S급 재각성 카드 여러 장을 들고 흔들어 보입니다.]
[이 정도면 권한이 있지 않을까? 라고 당신을 비웃어 보입니다.]
S급?
성좌의 언어폭력을 잠자코 듣는 대가가 S급이라면 상황이 다르지.
“아이고, 당연하죠.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S급으로 만들어 주신다면요~. 부디 제 성좌가 되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래희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S급이라니, 아파 왔던 머리가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인싸의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 남들은 회빙환 중에 하나만 해도 돈도 얻고 사랑도 얻는데, 나만 집도 절도 없는 불행한 인생이라니.
[익명의 누군가가 당신의 가식적인 미소에 코웃음 칩니다.]
[당신의 보잘것없는 상태 창에 계약을 고민합니다.]
“저도 알아요…….”
성좌님 당신 눈에 E급은 우주 속에 떠도는 한 점의 먼지만큼이나 하찮겠죠…….
심지어 E급인데도 F급 스탯이었다. 체근민 총합이 F급 평균치에 조금 모자란 정도. 이럴 거면 F급으로 판정 났어야 하는데 운과 마력 스탯이 쓸데없이 높아 겨우 F급을 면했다. 다시 말해 래희의 상태 창은 폐급이란 뜻이었다.
래희가 급격하게 우울한 기색을 보이자 성좌가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익명의 누군가가 당신에게 알맞은 적성을 찾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누구나 어딘가에는 쓸모 있는 존재라고 당신을 위로합니다.]
“그게 뭔가요? 마법사? 마검사? 아니면 힐러?”
래희는 현대 사회에 주류로 알려진 헌터들의 직업명을 줄줄이 말하며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메시지 창을 바라봤다.
“원거리 딜러여도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더 좋죠!”
[익명의 누군가가 S급이기만 하면 상관없는 게 맞냐고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당연하죠!”
래희는 자신의 손에 쥔 앙증맞은 핑크색 마법봉을 내려다봤다.
이런 오글거리는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한 성좌라면 마법 소녀 따위를 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 또한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S급’ 마법 소녀면 그 어떤 비웃음도 이겨 낼 수 있겠지.
뭐가 되었든 간에 S급이기만 하면 대우받을 수 있다. 래희는 E급 헌터로 살아오면서 무시당한 과거를 떠올리자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힘숨찐은 무슨 소리. 이번 생은 인싸의 삶을 한번 살아 보자.’
래희는 눈앞의 달콤한 과실에 눈이 팔려 뒤따라오는 능력자의 책임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익명의 누군가가 수준이 낮지만, 당신의 재능을 믿는다며 계약을 제안합니다.]
[성좌 ‘???’와의 계약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 / N]
당연히 예스지.
‘화려한 재각성으로 금의환향한 각성자 권래희!’
래희는 눈 앞에 펼쳐질 꽃길을 상상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스템 창을 눌렀다.
‘……?’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래희가 의문을 가진 순간 귓가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빰빠바빰빠밤!!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와 함께 화려한 색감의 시스템 메시지 창이 래희의 눈앞에 떠올랐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와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클래스 ‘빵집 사장 S’으로 각성하였습니다!]
……?
“…빵집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