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프롤로그 】
고운 새소리가 들려오는 이른 아침.
래희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눈을 반쯤 뜬 채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어젯밤에 물을 잠그지 않고 잠이 들었던가? 스킬로 지어진 집이라 수도세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전생을 포함해 소시민의 삶을 산 지도 몇십 년.
래희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통장 잔고를 걱정하며 헐레벌떡 화장실 문을 활짝 열었다.
‘오… 맙소사.’
반투명한 샤워 커튼 너머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실루엣. 그리고 그 위로 살짝 드러난 물에 젖은 검은색 머리카락.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샤워를 하고 있던 남자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일어났어요?”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래희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아 화들짝 놀라며 문을 다시 한번 닫았다 열었다.
하지만 변한 건 없이 저 몸 좋고 잘생긴 남자는 그녀의 집 화장실에서 태연하게 샤워하는 중이었다.
꿈이 아니야.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돌과 결혼하는 꿈을 꿨던 적이 있던 시절도 있었다. 심지어 팬 사인회 때 혼인 신고서까지 들고 가는 기행을 벌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꿈속의 아이돌이 내 집에? 이건 팬픽이나 소설로 써도 개연성 없다고 욕먹을 상황이었다.
“…류정우 씨?”
“내 팬이었다더니, 씻고 있는데 계속 구경하는 거 보면 그동안 많이 궁금했나 봐요?”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제일 인기 많은 아이돌이었지만 지금은 S급 헌터로 더 유명해진 류정우가 태연한 어조로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쾅!
그녀를 놀리듯이 능청스러운 류정우의 얼굴을 본 래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화장실 문을 강하게 닫았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분명 자신의 구오빠는 온통 블랙으로 인테리어 된 무채색의 집에 살법한 차가운 이미지였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래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 어젯밤 일을 기억해 냈다.
“아…….”
래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20평의 작고 아담한 래희의 요새에 낯선 침입자가 등장했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저 인간이랑 같이 사는 데 동의한 거지?’
류정우란 남자가 래희의 삶에 엮이기 시작한 건 반년 전부터였다.
【 히든 클래스: S급 빵집 사장 】
“저기, 누군가 있어요!”
한때는 서울 안전 구역 7-7이었던 폐허 위로, 몇 년 만에 갑작스럽게 생긴 S급 게이트 입구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키에 청색 멜빵바지와 하얀 면티. 그리고 밀짚모자.
긴장한 헌터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게이트에서 걸어 나오는 누군가를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애?”
누군가가 탄식하며 말을 내뱉었다.
걸어 나온 사람은 기껏해야 초등학교 5, 6학년으로 보이는 양 갈래로 땋은 머리의 어린이였다.
많은 어른이 무기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걸 발견했는지 아이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떨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가 완전히 던전 밖으로 걸어 나오자마자 게이트의 입구가 닫혔다.
고랭크 헌터들이 모두 모여 경계 태세를 갖췄던 게 무색하게, 아이의 무해한 인사를 끝으로 게이트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권래희.
S급 던전에서 5년 만에 살아 돌아온 13세 최연소 귀환자였다.
* * *
“…망했네.”
하늘에서 하얀색의 쓰레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 쌓인 퇴근길. 차가 도로 위에 멈춘 채로 몇십 여분 째 이동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인도 위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 있어 걸어서 이동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구해 뒀지만 이대로라면 걸어서 집에 가는 것도 글러 먹은 듯했다.
‘어쩐지 오늘 하루 종일 영 재수가 없더라.’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침부터 환승 이별을 알리는 ‘전’ 남친의 문자 메시지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아마 B급 헌터라던 돈 많은 새 여친님과 함께 호화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계획이겠지.
게다가 출근 후 들려온 크리스마스 당일 추가 근무 소식은 래희의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이 거지 같은 X소기업에 버려지다니!’
만약 그녀가 평범한 사회 초년생이었다면 서러워서 엉엉 울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래희는 전생에도 전쟁 같은 직장 생활을 경험했던 경력직(전생) 신입 사원이었다.
그래, 어차피 크리스마스에 약속도 없잖아. 외로운 솔로는 일을 핑계로 크리스마스를 피해야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던 래희는 모처럼 일찍 퇴근한 상사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정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눈앞에 잔뜩 쌓여 있는 눈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총 3만 2천 원입니다.”
편의점 계란 샌드위치 하나에 뚱캔 하나.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만.’
식량난으로 인해 날로 치솟아 오르는 물가 상승을 몸소 느끼며 래희는 편의점 한구석 빈자리에 자리 잡았다.
이대로 퇴근을 글러 먹었으니 저녁이나 대충 때울 생각이었다.
미완결 헌터물 소설 속에 빙의한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과몰입하며 읽었지만, 원작 남주를 제외하고는 기억나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물론 빙의 직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빙의하면 소설 내용이 모두 다 기억이 난다고? 심지어 연재 중인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동시에 읽은 소설이 너무나도 많아 등장인물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가 빙의한 소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건 빙의 직전 마지막에 정주행해 가며 읽었던 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남들 다 얻는다는 빙의자 버프도 없는데…….’
소설 속 언급조차 안 된 엑스트라의 몸에 빙의했다.
권래희. 24세. E급 비전투계 헌터. 할 줄 아는 거라곤 ‘쓱싹쓱싹’ 따위의 청소 스킬.
꿈은 내 집 마련. 아니, 돈 많은 백수.
너무나도 초라한 스펙에 전생이나 현생이나 평범한 월급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련한 전생 시절을 떠올리는 그때, 옆자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매너 없게 이어폰으로 안 듣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휴대전화의 볼륨을 크게 올려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 데뷔 7년 차 그룹 피에타가 재계약을 앞두고 새로운 음원을 발표했습니다. 신곡 ‘memories’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조회수 6,000만을… (중략) 다만, 그룹의 멤버 최재휘 씨가 B급으로 각성해 재계약에 성공…….
“야, 류정우 머리 연하늘색 미쳤네.”
“데뷔 7년 차에 처음 아냐? 맨날 검은 머리만 유지하길래 톤그로라 안 하는 줄.”
“재계약 시즌 다가오니까 회사에서 하고 싶은 대로 풀어 줬겠지. 제발 재계약 해 줬음 좋겠다.”
“최재휘 B급으로 각성했잖아. 아이돌 따위보다는 헌터가 더 낮지. 인기로 보나 돈으로 보나. 내가 최재휘면 재계약 안 하고 길드 가입한다. 아, 제발 이번 각성 검사 때 B급 이상만 나와 줬으면.”
래희는 그들의 말을 엿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환생한 지구의 10대들도 기본적으로 인 서울은 껌이고 탑3 대학은 무조건 갈 수 있다는 헛된 생각을 가진 전생의 10대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 뭐하나. 100만 헌터의 90%는 E급, F급인데. E급까지는 감정사같이 특수직이 아닌 이상 비각성자와 생활 수준이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폐급이라고 무시당하면서 이리저리 치여 살아가는 것보다 비각성자로 살아가는 게 훨씬 더 나았다.
물론 운이 좋아 S급으로 각성에 성공하게 된다면, 대한민국 부자 순위에 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벌겠지만.
래희는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나도, 영상이나 볼까. 혼밥에는 역시 유튜브지…….’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를 결제하지 않은 탓인지 영상 앞에 등장한 광고를 어쩔 수 없이 시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래희는 광고 속에 등장하는 연하늘색 머리의 윙크를 하는 잘생긴 남자의 푸른 눈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까지 옆자리 10대들의 입에서 시끄럽게 언급되었던 대화의 주인공이었다.
‘하… 진짜 재수 없어.’
‘류정우’. 아이돌 그룹 ‘피에타’의 메인 댄서.
한때 래희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아이돌이자 빙의한 소설 속의 원작 남주였다.
물론 탈덕한 지 5년이 된 래희에게 있어서 류정우는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구오빠일 뿐이었지만.
지난 9년 동안 유지하던 검은색 머리는 어디로 가고 나이에 맞지 않게 상큼한 연하늘색의 솜사탕 같은 색으로 머리가 물들여져 있었다.
평소에 활짝 웃어 보여도 냉해 보이는 인상이 염색 하나만으로 사람이 이전보다 아주 선하고 맑아 보였다. 생전 하지 않던 밝은 머리에 어색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역시, ‘정석 미남’의 얼굴에는 퍼스널 컬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여전히 잘생겼네.’
광고 촬영 전 머리를 단정하게 세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탈색을 거쳐 상한 머릿결은 격렬한 춤을 춰서 그런지 부슬거리고 있었고, 땀에 촉촉하게 젖은 앞머리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류정우는 그 밑으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살짝 눈을 찡그리다가도 카메라를 마주할 때 윙크를 시도하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은 그가 어릴 적 참가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외하고선 성인이 된 이후, 아주 오랜만에 윙크를 해 본다는 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역시 프로 아이돌…….’
흐릿한 초점과 색기가 흐르던 조각 같은 얼굴에 ‘생명’이 한 스푼 끼얹어진 듯 생기가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소설 속 힘숨찐 남주라는 것을 증명하듯, 말 그대로 얼굴에 ‘생명’이 더해졌을 뿐이었지 전신을 모두 담은 전체 샷에서 보이는 이미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조금 더 생기 있어 보이긴 했지만, 전체적인 몸짓과 실루엣에서는 여전히 키 크고 몸 좋은 음기 가득한 미남이었을 뿐.
래희는 렌즈를 낀 것같이 푸른 빛이 도는 류정우의 눈을 바라봤다.
‘분명 각성자라 본인 눈일 텐데. 렌즈라고 둘러대며 지내고 있나 보네…….’
S급 헌터면서 그 사실을 숨길 정도로 아이돌이 좋은 건가?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지만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아이돌 생활을 지속하는 것을 보면 그럴지도 몰랐다.
역시 주인공이란. 힘숨찐이 미덕이지.
래희는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왕 빙의시킬 거면 능력이라도 빵빵하게 줄 것이지.”
헌터의 등급은 거의 불변이다. 그러니까 래희는 죽을 때까지 앞으로도 별 볼 일 없는 E급일 예정이었다.
물론 성좌와의 계약을 통해 재각성을 하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래희는 한숨을 쉬며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윤재언]
받으려 하자마자 끊기는 진동에 당황한 래희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잘 못 걸었나?’
지잉―
화면 위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윤재언: 래희야, 너 지금 어디야?]
쾅!
답장을 위해 휴대폰의 잠금을 푼 순간 어디선가 큰 굉음이 들려왔다.
‘뭐지?’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오래전 봤던 영화 속 대사 하나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쿵! 우르릉!
편의점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편의점 내부에 배치되어 있던 상품들이 거센 진동에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잉―
[윤재언: 아직 회사야? 내가 데리러 갈까?]
래희는 메시지에 답할 정신 없이 곧바로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건물에 깔려 죽는 것보다는 게이트에 휘말리는 게 낫지.’
전자는 바로 죽고 후자는 천천히 죽는다는 차이겠지만 운이 좋다면 그 천천히 사이에 구조대에 의해 구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잉―
[긴급 재난 문자
[던전관리청] 오늘 20시 45분 서울 안전 구역 30-7번가 게이트 경보. 게이트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 화면 위로 긴급 재난 문자가 떠오르기 무겁게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그러자 지진에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안전지대에서 게이트가 나타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모두 당황한 듯했다.
허벅지까지 잔뜩 쌓여 있는 눈 때문에 이동하기도 힘들었다. 도로 위는 차로 막혀 있었고 도망치는 사람들로 인해 매우 복잡했다.
별 볼 일 없는 스킬로 눈을 치워 가며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사이렌이 울린 이상 게이트에서 멀어지기는 힘들어 보였다. 제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진 곳에서 게이트가 발생하기를 비는 수밖에.
래희는 도망가는 걸 포기한 채 손에 쥔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마저 털어 넣고 자리에 멀뚱히 서서 소꿉친구 재언에게 답장을 보냈다.
[사무실 앞.]
“게이트가 열렸어요!”
사무실 건물 앞 허공에 하얀 실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금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래희가 서 있던 편의점 바로 옆 건물 앞 도로에서 생긴 균열은 거센 바람을 불어왔다.
“아… X발.”
넓고 넓은 이 도시에서 하필이면 바로 코앞에서 게이트가 생성되다니.
소설 속 힘없는 엑스트라로 빙의시킨 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나 좀 책임져 달라 소리치고 싶었다.
[익명의 누군가가 당신의 생각에 흥미를 가집니다.]
어?
콰과광!
순식간이었다. 균열은 점점 커지기 시작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래희는 강한 바람에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몸이 떠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시야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