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그대와 영원히 (23/23)

외전 그대와 영원히

그는 항상 조용했다. 기척으로만 따진다면 그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분위기는……. 그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저도 모르게 저절로 해바라기처럼 그가 있는 곳으로 고개가 움직이고야 만다. 그리고 그를 보게 되면 시간도, 공간도 뇌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지금처럼…….

“야! 야!”

귀담아듣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아주 작은 음성. 그러나 노아는 순간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야 말았다.

“왜 아직도 벌벌 떨어? 여기는 너 잡아먹을 사람 없다니까.”

여전히 작은 음성. 노아에게만 들리게끔 소리를 한껏 줄인 음성. 그러나 한번 공포에 물들었던 가슴이 듣기에는 천둥 같은 음성이었다. 노아는 심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쩔쩔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 아버지가 살생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었다.

“빨리 하고 나와.”

노아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험한 일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저들 눈에는 한없이 느리게 보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핑계. 저들과 똑같은 처지가 된 지금, 과거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볼썽사나운 핑계에 불과했다.

“네. 빨리 할게요.”

“알았어, 그럼.”

노아를 닦달하러 온 하녀가 조용히 서재에서 물러난 후 노아는 엎드려 걸레질하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다 또다시 저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었다.

햇살이 커다란 창문을 통해 그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비추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자세에서 여유로움이 빚어지고 있었다. 하아……. 그를 이렇게 훔쳐보는 것이 유일한 위안인 노아는 소리 없이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그가 한 번만 바라봐 줬으면. 한 번만.

케이는 그녀의 조용한 시선이 자신의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조용하지만 피부에 꽂힐 것처럼 강렬한 시선. 케이는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 겁이 많은 그녀는 분명 깜짝 놀라 커다래진 눈망울로 도망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턱을 괴고 있는 팔로……. 순간 케이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겁먹은 눈으로 저렇게 쳐다보다니. 문득 그녀가 처음 웨스트필드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노아. 어머니, 에드나가 도성 나들이 갔던 길에 데리고 온 하녀였다. 첫인상은 이랬다. 너무 작다. 너무 작고 형편없이 말라서 가련해 보였다. 더욱이 에드나 뒤에 서 있어서 그런지 더욱 왜소해 보였다. 세상에 에드나와 엘리샤처럼 키가 큰 여자들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녀의 작음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작다. 너무 작아서 그런지 처음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고 그녀는 많은 하녀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우연히 밤에 보게 되었다. 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해 잠자리를 벗어나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노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보름 만인가 그랬다. 그녀는 연한 갈색의 잠옷 비슷한 옷을 입고 에드나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쉬…… 쉬…… 괜찮아, 괜찮아.”

케이는 조용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기척을 알아챈 에드나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침묵의 신호를 보낸 것도 있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노아가 너무도 가련하게 덜덜 떨고 있어 소리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케이는 소리 없이 뒤돌아서 방으로 돌아왔다. 사연이 있는 듯했으나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에드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계획에 없는 하녀가 생기는 경우는 대부분 좋지 않은 사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녀가 너무도 눈에 잘 들어왔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그랬다.

케이는 그녀가 이제 서재에서 일을 끝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서 사라졌다. 그것은 여기서의 할 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노아.”

“네?”

여전히 깜짝 놀라는구나 싶었다. 케이는 시선을 들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저녁 식사는 여기서 하겠다고 전하고 네가 직접 가지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노아는 서재에서 물러났다. 과거보다 훨씬 더 광활해진 웨스트필드. 과거 폴린트 백작 영지를 공작 영지로 흡수한 후부터 그러했다. 노아는 광활해진 웨스트필드 동쪽 영지를 돌보러 온 케이의 수행원들과 하녀들 중, 한 명이 아닌 하나의 하녀였다. 하녀. 하녀로 전락한 순간부터 인간의 존칭이 사라진다. 계속 살기를 원하면 과거의 영광을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그녀는 빠르게 깨달았다.

연좌제. 아비의 죄는 가족의 죄. 아비의 몰락은 가문의 몰락. 그 연결 고리를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순리니 죽을 때까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생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아버지는 자결을 했고, 남은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 났다. 혼란과 공포 그 자체였다. 떵떵거리는 권력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화로우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 삶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노아는 남은 가족의 행방도 모른 채 천민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하녀로 팔려 나갔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게 된 삶은 그 어두움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녀를 산 상인의 집에서 처음으로 매를 맞았고, 처음으로 쓰레기 같은 음식 찌꺼기를 먹게 됐고, 처음으로 남자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애원했었다. 제발, 제발, 제발. 그녀는 체구가 작고 왜소해 남자에게 붙잡히면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애원하고 또 애원했었다. 살려 달라고, 그것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었다.

그녀의 애원이 통했는지 매를 많이 맞기는 했지만 강간은 피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녀가 강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애원 때문이 아니라 질투가 심했던 상인의 아내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친 밧줄로 목이 묶인 채 도성 노예 시장으로 끌려가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네년이 내 남편을 후리는 것을 볼 수는 없지.”

밧줄을 확 잡아당기며 상인의 아내는 독살스럽게 내뱉었다.

“반반하게 생긴 얼굴값은 다른 데 가서 하라고.”

그랬다. 얼굴이 제법 반반하고 우아한 기품이 있는데다가, 자꾸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녀를 집 안에 둘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상인의 아내는 그녀를 헐값에라도 팔기 위해 상인 몰래 시장에 내놓고 말았다.

노아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갇혀 있는 작은 철창 속에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똑같을 것이고, 어디를 가도 끔찍할 것이다. 매를 맞을 것이고, 강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미처 몰랐지만 그녀의 몸은 계속 쉴 새 없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미 상인의 집에서 지냈던 한 달이 노아의 신경을 다 갉아먹은 탓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고개를 휙휙 돌려 살피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거친 욕설과 호된 손찌검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 새로운 주인에게 팔렸다. 그녀가 예측한 대로 더 지옥 같았다. 누가 자신을 때릴까, 덮칠까 두려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점점 더 갈가리 찢겨 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주인 여자가 자기 아들의 앞날을 망칠 계집이라며 그녀에게 호된 매질을 한 끝에 시장에 내놓고 만 것이다.

그렇게 전락된 삶을 산 지 5년이 지났다. 이미 오래전에 희망의 빛은 사라졌지만 가슴에 남은 가족의 추억이 유일하게 그녀를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살아 있어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때까지만 제발……. 몇 번을 팔리고, 또 팔리고……, 결국 다시 만날 거란 희망이 사라지고 추억도 빛을 바랬다.

노아는 이번에 자신을 사겠다고 나선 사람이 포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음란한 몸짓과 음탕한 눈빛. 노아는 걷잡을 수 없이 떨고 말았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자신을 감정한다는 이유로 젖가슴에 손을 뻗는 행위를 피하고만 싶었다. 사창가.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더 버틸 수 없겠다 싶었고 마음속으로 어딘가에 있을 가족들에게 신의 가호를 빌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 내가 데리고 가고 싶네요.”

“뭐라고? 이 아이는 내가…….”

순간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 고요함이 오래갔다. 노아가 고개를 들 때까지도 계속 침묵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개를 든 순간, 노아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에드나. 얼스월드에서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영지 출신이지만 그녀를 모르지 않았다. 웨스트필드, 에드나 공작 부인. 그녀의 호위 기사인지 순하게 생긴 남자가 날카로운 검으로 포주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불만이 있나요? 나는 은화 한 닢을 더 줄 수 있는데도?”

조용하지만 은근한 힘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구세주처럼 보였다.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내려보낸 천사처럼 보였다. 그 느낌은 정확히 맞았다. 에드나는 그녀를 지옥에서 건져 올렸으니 말이다.

노아는 종종걸음을 쳐 한창 저녁 준비 중인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제 끝났어?”

목소리에 가시가 돋치긴 했지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노아의 손이 느린 탓에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새벽에 더 일찍 일어나 홀을 청소할게요.”

하녀들은 힐끔 노아를 쳐다보았다. 에드나가 데리고 왔기에 사연이 있을 거라는 것은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었다. 그런데 뭘 어쩌겠는가? 그냥 불쌍할 따름이지. 그렇다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이들의 몸도 무쇠가 아니니 그러했다.

“제가 저녁 설거지를 다 할게요. 죄송해요.”

속삭이는 듯한 음성. 노아의 음성은 신기하게도 그랬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해지게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묘한 음성이었다. 일은 서툴지만 자신의 잠을 줄여서 노력하는 것은 인정해 줘야겠다 싶어 그들은 다시 묵묵히 저녁 준비에 집중했다.

“저기…… 케이 영주님께서 저녁 식사를 서재에서 드시겠답니다.”

“그래? 알았어.”

노아는 잠시 입술을 자근거렸다. 케이가 자신에게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단순히 쟁반을 나르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무슨 할 말 있어?”

노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아니요. 이제 저는 뭘 할까요?”

케이는 노크 소리에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들어와.”

“저녁 식사를 여기서 드시겠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순간 케이는 고개를 들었다. 노아가 아니었다.

“노아는?”

“네?”

들고 온 쟁반을 거대한 책상에 올려놓던 하녀는 깜짝 놀라며 무심코 되물었다.

“노아요?”

“노아에게 가져오라 시켰는데?”

하녀는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냉정하면서도 다혈질적인 알렉스와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의 소유자, 케이. 항상 조용하고 온화한 사람. 그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너무도 조용한 음성. 달빛처럼 은은하면서도 은근한 힘이 서린 음성. 하녀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노아는 홀에서 기사들의 식사 시중을 들다가 서둘러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 의해 서재 쪽으로 끌려갔다.

“야! 진즉 말했어야지. 너에게 시중을 명령하셨다면서!”

“죄송해요.”

그게 그런 의미였는지 몰랐다. 단순히 저녁 식사가 담긴 쟁반을 가져오라는 뜻으로만 알았지 식사 시중까지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빨리 들어가, 빨리.”

노아는 등 떠미는 손에 밀려 서재 안으로 황급히 들어서야 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 잘못입니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남이 피해를 입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케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가 벌을 주려고 부른 건가?

“이리로.”

케이는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그녀가 책상 앞에 서자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녁은?”

“네?”

“저녁은 아직이겠지?”

노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았다. 밤 호수와 같은 눈동자에 서린 금빛.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차분한 눈빛.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이성을 잃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답은?”

“네?”

또다시 그를 너무도 뚫어지게 쳐다보고야 말았다. 노아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거짓말처럼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우면서도 조용한 남자. 얼스월드 최고의 신랑감으로 손꼽히는 절대적인 존재, 케이 공작. 주워듣기로 그를 위해 왕, 알렉스가 연일 배우자를 물색 중이라 했다. 그의 아내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그 행운을 차지할 것인가?

케이는 입술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노아.”

“네.”

“내가 좋은가? 그렇게 나를 쳐다보는 것은 그런 의미인가?”

그 말은 천둥처럼 노아의 머리를 강타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도 남을 유혹한 적이 없었다. 남을 이렇게 쳐다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남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녀로 전락하면서 겪었던 수모와 공포는 남자를 한층 더 두렵게 보이게만 했는데 이상하게 케이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위로, 위안, 그리고 바람. 노아에게 케이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케이는 그녀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곳에 있는 남자.

노아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뭘 몰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노아를 쳐다보았다. 사과하는 음성이 점점 더 흔들리는 것을 보니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일까……. 이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은데. 이 아이가 힘든 일을 하는 것도 보고 싶지가 않은데. 이 아이가 편하게 밥을 먹게 해 주고 싶은데. 정말 왜일까…….

노아는 뜨거운 눈물이 넘쳐흐르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쳐다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서러워졌다. 나의 유일한 위로가 사라질 것이다.

“노아, 고개 들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나 볼썽사나워 보일까 싶었다. 이렇게 눈물범벅이 된 바보 같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목석처럼 서서 울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노아는 숨을 죽이고 말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턱에 닿았고 이어 그녀의 숙여진 고개가 그를 향해 들어올려졌다. 너무도 따뜻해 보이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노아. 다시 묻겠다. 혹시 내가 좋은 건가?”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이 너무도 격렬하게 뛰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묻는 건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뒷일은 더더욱 생각나지 않았다. 노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네.”

케이는 묵묵히 청소를 하고 있는 노아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그녀는 깨끗하게 빤 걸레로 저녁 마무리 청소를 한 후 이제 그의 침대를 말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초겨울이지만 한겨울처럼 매서운 바람이 벽 틈새로 새어들어 왔다. 이제 이 성도 대대적인 수리를 해야 할 때가 된 듯했다. 케이는 다시 작은 체구를 열심히 움직이는 노아를 지켜보았다.

그때 노아는 저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납작하게 엎드리고 말았다. 그제야 스스로 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 깨달은 것처럼 그랬다. 그런데 그 말은 케이에게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갔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혹시 내가 좋은 건가?”

그래도 그녀가 계속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케이는 그녀의 앞에 몸을 숙여 일어나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두려운 것인지 벌벌 떠는 몸짓이 너무도 애처로워 보여 케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신분의 차. 이들 사이에는 엄청난 신분의 격차가 있었다.

케이는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보호하고 싶은 것인지, 두 개 다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원한다면 두 개 다 가능한 일. 그녀를 안는 것도, 보호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라이를 비롯해 알렉스도 아내 외의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린 경우가 없었다. 남자의 정조를 강요한 교육은 없었지만 책임지는 것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은 배워 왔다. 노아를 안는다면 책임은 지겠지만 그 한계가 너무도 뚜렷했다. 그녀의 신분과 그의 신분.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책임이란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 없게 해 주는 것. 바로 그것뿐이었다.

마침내 청소를 끝낸 노아가 문가에 기대서 있는 그의 앞에 서서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제 끝났습니다, 영주님.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케이는 그제야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작고 아담한 그녀. 처음 웨스트필드에 왔을 때는 형편없이 말랐었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전신에서 물씬 풍겼었다. 공포와 경계. 그것이 그녀의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 달라졌다. 커다란 갈색 눈에 담긴 다정함과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품. 예전 그녀의 신분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거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말투와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음성.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아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사유로 인해 이렇게 됐는지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케이가 궁금해서 넌지시 에드나에게 물었을 때, 에드나는 깊이 있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로 그를 지그시 보며 말했다.

“케이. 네가 웬일로 관심을 갖는 거니?”

에드나에게 넌지시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전에 알았기에 케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짧으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에드나는 자신과 닮은 케이의 눈을 보며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케이. 현재가 중요할까, 아니면 과거가 중요할까?”

“제 마음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순간 에드나는 케이의 듬직한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이거 아니, 케이? 넌 나를 정말 놀라게 해. 너를 보면 내 마음이 따뜻해져, 케이. 너를 보면 네 아버지가 보여.”

그때 케이는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일라이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바로 알렉스라는 것을 알기에 그러했다. 자신은 알렉스의 그림자이자 웨스트필드의 후계자. 알렉스가 태양이라면 그는 달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알렉스와 자신을 한시도 차별한 적이 없었다. 왕이 된 알렉스에게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만큼 케이의 공작 수업에도 많은 노력과 애정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스가 부럽다면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케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언제쯤 네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렉스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케이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알렉스와도 관계가 있다. 그는 알렉스의 그림자. 알렉스를 감당하려면 그림자 역시 커야 한다. 그림자가 작으면 앞에 서 있는 알렉스를 절대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에드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항상 네 편이다, 케이.”

“영주님?”

케이는 그녀의 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필요한 거 없다. 그만 가서 쉬도록.”

“감사합니다, 영주님.”

노아가 문을 닫으려고 할 때 갑자기 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아.”

“네, 영주님.”

“이 방은 열려 있다.”

순간 노아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에게만 열려 있다.”

노아는 초겨울 바람이 스며든 긴 복도를 걸어 나갔다. 반역의 끝이 무엇인지 여실하게 보여 주는 과거 폴린트 백작의 성. 겨울을 여기서 보내기로 결정한 케이이기에 노아 역시 여기서 봄을 맞이할 때까지 지내야 한다. 문득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반역의 끝을 기억하라.

노아는 우아하게 걸음을 옮기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네.”

케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녀를 안고 싶은 건가? 결국 욕망인 것인가? 케이는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가 온다면……. 하아.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저 편안한 삶. 케이는 다시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가 그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순간 케이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야 말았다.

“아니, 내가 그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케이는 포근한 이불을 젖히고 차가운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생각은 이제 그만하련다. 생각으로 멈출 것이었다면 이렇게 잠이 오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 케이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은 이미 격하게 뛰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가장 순수한 본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오지 못한다. 절대로 오지 못한다.

“정말 어리석은 말을 했어. 내가 가야 하는 것인데.”

그녀를 안고 싶다. 안으면 알 것 같다. 이 마음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다. 한 번. 그래, 한 번. 케이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여전히 기척도 내지 않았다. 겉보기에 그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차분해 보였지만 무언가 달랐다. 미친 듯이 뛰는 가슴. 자꾸 마르는 입술.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찬 눈. 그녀를 안아야겠다.

소리 없는 걸음으로 홀에 내려가 그녀를 찾았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는 그녀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없었다. 순간 케이는 처음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없다. 그녀가 없다.

‘설마 나를 거부하는 건가? 그래서 피한 건가?’

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지독한 상실감이 그를 뒤흔들어 버렸다. 빌어먹을. 상스러운 욕설도 저절로 입 속에서 감돌고 말았다.

케이는 다시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잠자는 위치가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것이다.

잠시 후, 케이는 경직된 얼굴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없다.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디에? 도주한 건가? 노예 주제에 도주를? 기사들을 풀어서 그녀를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케이는 극으로 치닫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거칠게 쓸어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후욱.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조금은 이성이 돌아오는 듯했다. 다시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 그랬다. 만일 정말 그녀가 도주했다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침실로 오라는 자신의 말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행방불명은 바로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바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군, 케이.”

핏! 어이없는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의 가슴이 점점 더 차갑게 식는 듯했다. 싸늘한 분노. 알렉스가 불같이 화를 내는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라면 케이는 화가 나면 날수록 싸늘하고 차분해지는 얼음 같은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고 그의 가슴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상실감을 동반한 분노가 그를 채우고 있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시간을 주겠다, 노아. 돌아오지 않으면 잡아서…….”

순간 케이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긴 복도 끝에 있는 그의 방문 앞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 노아? 노아!

노아는 차마 케이의 방문을 열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한 번만.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바랄 수 없는 처지임을 잘 안다. 그러나 그가 준 기회.

“이 방은 열려 있다.”

“너에게만 열려 있다.”

딱 한 번만 그에게 안기고 싶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위로 삼아 앞날을 살아갈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그녀의 마지막 욕심. 딱 한 번만 그를 내 품에 안고 싶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찬물로 몸을 씻은 탓인 모양이다. 그녀는 주저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다 다시 화들짝 놀라며 놓고 말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말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는데……. 아, 나는 그냥 그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다. 내 주제에 감히 누구의 품을 욕심내는 것인가.

노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걸음을 옮겼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덥석 안겼다. 앗! 순간 깜짝 놀라자 그가 더욱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는가?”

케이! 노아는 그 순간 자신의 신분을 잊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케이의 여자이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촛불이 출렁이는 가운데 그녀가 짙은 회색의 튜닉을 벗고 있었다. 구불거리며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이 드러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가렸다. 케이는 태고의 모습으로 침대에 앉은 채 그녀가 옷을 벗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순수하면서도 지극히 여성스러운 자태. 성급하게 터져 나가지 않으려고 자신을 단단히 다잡으며 드러나는 그녀의 숨겨진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기억에, 그리고 가슴에 담았다. 이윽고 노아의 아름답게 굴곡진 알몸이 그 앞에 드러났다. 케이는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며 속삭였다.

“이리로, 노아.”

노아……. 그가 이름을 불러 주자 정말 그와 동등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노아. 그래, 내 이름은 노아. 그에게 안기려는 여자는 바로 노아. 노아는 꿈길을 걷는 것처럼 손을 내민 채 기다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자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젖가슴을 가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우고, 드러난 가슴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노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지난 5년간 그렇게 무서워하며 도망쳐 다녔는데, 남자의 진득거리는 욕망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고 빌고 또 빌며 살았는데 케이에게는 다 주고 싶다. 그에게는 전부 다 주고 싶다. 노아는 한 손을 뻗어 케이의 머리를 가만히 끌어안아 자신의 젖가슴에 밀착시켰다.

케이는 전신이 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살갗으로 인해 그녀가 어디에 갔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차가운 개울물에 씻고 온 것이다. 이 추운 날씨에 얼음장 같은 물로 씻고 온 것이다. 케이는 그녀에게 온기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녀의 차갑게 얼어붙은 몸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처럼 뜨거웠다. 항상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라 여자를 대할 때도 그럴 거라 여겼었다. 그가 여자를 안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누구도 그런 말을 수군거린 적 없지만, 그래도 그는 영주였다. 그것도 도성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공작. 그래서 당연히 여자가 있을 거라 여겼다.

“노아…….”

그의 숨결도 그녀를 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손길로 인해 어지러웠다. 그의 숨결로 인해 어지러웠다. 노아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먼저 입술을 겹치고 말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을 삼키고 싶었다. 아니, 그를 삼키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케이는 지금까지의 침착함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를 침대에 눕혔고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고 그녀의 입술 속으로 뜨거운 자신의 혀를 밀어넣었다. 그녀의 서투른 혀가 다가와 그를 맞이했다. 그러자 그의 본능이 무섭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의 본능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노아는 침대에 눕혀진 채 거친 숨을 내쉬기만 했다. 케이가…… 케이가……. 순간 그녀의 입술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오, 맙소사. 케이는 부드러운 갈색 체모로 덮인 그녀의 은밀한 숲에 머물고 있었다. 자꾸 다물어지는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지만 단단히 잡은 채 그녀를 음미하고 있었다. 무수히 입맞춤을 했고, 미지의 두려움에 떠는 그녀의 작은 구슬을 애무해 주었다. 그녀의 차갑던 피부도 이제 뜨거워졌다. 그가 이번에는 그녀의 입구를 혀로 더듬자 그녀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바들거리는 몸짓이었다.

케이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짜릿한 감촉이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고개 숙여 다시 그녀의 입구를 더듬어 가자 이번에는 발끝까지 짜릿해졌다. 하아…….

“노아. 나를 봐.”

노아는 가까스로 두 눈을 떴다. 감당하지 못할 쾌감과 열정으로 인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눈이었다. 케이는 그녀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며 한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여성을 더듬었다. 그녀의 입구는 너무도 비좁은 듯했다.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들어간다면 무척이나 큰 아픔을 줘야 할 듯했다. 그녀를 아프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아프지 않게. 앞으로도 계속 아프지 않게.

노아는 두 다리를 넓게 벌려 케이의 배려가 넘치는 손길을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자신의 남성을 천천히 밀어넣어 그녀를 채웠을 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단순히 케이를 흠모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케이는 석수장이와 함께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지금은 벽이 얼어 공사를 할 수 없어도 준비는 할 수 있었다. 겨우내 최대한 준비를 갖추어 봄이 오면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갈 것이다. 봄……. 케이는 저절로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그것은 어느 순간 일상처럼 다가왔지만 결코 일상이 될 수는 없었다. 새벽에 어쩌다 눈을 떴을 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항상 혼자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섹스 후 그녀가 소리 없이 마무리하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한, 끝이 정해진 관계였기에 그랬다. 케이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말았다.

봄……. 노아로 인해 처음으로 여자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됐고, 결국 몸까지 소유하게 된 것이 벌써 한 달을 넘었다. 애초부터 끝이 보이는 관계. 그래도 노아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하다못해 힘든 일이라도 그만하게 해 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행여나 자신으로 인해 케이의 명예가 훼손될까 두려운 것처럼 그 작은 체구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다녔다.

“공작님. 이틀의 시간을 주시면 비용을 상세하게 계산해서 올리겠습니다.”

“알았다. 두 번, 세 번, 다시 계산하는 것 원치 않는다. 처음부터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해서 다각도로 계산해 오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석수장이가 물러나고 케이는 차가운 벽을 손으로 만지며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 보았다. 폴린트 백작의 성. 과거 아버지, 일라이와 일전을 벌였던 자이자 베어월드 왕 디바인과 손을 잡고 반역을 일으킨 자. 케이는 냉기가 손끝을 통해 전신의 핏줄로 흘러들어가는 듯했다. 이 땅은, 이 작위는 희생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다. 일라이는 죽음을 밟고 또 밟아 이 자리에 서서 선왕, 케이든을 지켰다. 자식이 없는 케이든은 일라이의 맏아들, 알렉스를 후계자로 세웠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케이. 나는 이제 네가 결혼을 했으면 하는데…….”

무심코 수확 축제 때 만났던 알렉스의 말이 떠올랐다.

“너를 위해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 내가 해 주고 싶어.”

그 말은 케이를 위해 연회를 열겠다는 뜻이었다. 케이를 위해서 출중한 가문의 여자들을 초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케이는 그저 웃기만 했지만 알렉스의 바람이 어디에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특별한 자리’. 알렉스의 아내는 예시카, 노스이언의 여왕이다. 알렉스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케이도 당연히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거니까. 그것이 희생으로 만들어진 이 자리를 물려받은 자식으로서의 의무니까.

케이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녀가 보였다. 공작의 의무. 케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떨고 말았다.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늪과 같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새벽에도, 아침에도 그녀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는 공작. 자신의 감정이 절대 우선시되면 안 된다. 그러기에 노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런 관계. 누군가에게는 그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하녀 중 한 명이겠지만 케이, 그에게는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사람. 분명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처도 점점 더 깊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케이는 깊은 숨을 몰아쉬고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침실 시트를 벗겨 내 복도 바닥으로 모으고 있는 노아에게 다가갔다.

노아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다. 죽어 있는 심장도 뛰게 만드는 너무도 소중한 사람. 그를 너무 사랑해서 가슴이 다 아플 지경이다. 그 무엇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그의 곁에 조금만 더 있고 싶을 뿐이다. 그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들키기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야 그를 하루라도 더 느낄 수 있으니까. 그를 너무 사랑하니까…….

케이는 그녀의 곁에 멈추지 않고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만해야겠다.”

쿵! 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신의 작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케이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자 노아는 주위의 소리가 모두 다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해야겠다. 그만해야겠다. 그만해야겠다. 그 말만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잠시 넋이 나간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손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침대에서 시트를 벗겨 내고 그것을 품에 안아 복도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또 다음 방으로, 또 다음 방으로 들어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튿날, 케이는 몇 명의 하녀들과 기사를 웨스트필드 본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돌려보내진 하녀 중에는 노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2월의 어느 날. 성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노아는 오랫동안 비어 있던 케이의 침실을 다시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고 성의 소란이 누구로 인해서 발생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냥 다시 볼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움에 메말랐던 가슴이 촉촉해지는 듯했다. 입술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걸음도 가벼워졌다. 저도 모르게 말발굽 소리가 나는지 계속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가 돌아온다. 케이가 돌아온다. 그에게 말을 할 기회가 올 것인가? 그가 준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 말을 해야 하겠지? 이 아이는 그의 아이니까. 그는 분명 축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잘 키워 줄 것이다. 자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자격이 없지만 이 아이만은 그가 품어 주길 바란다. 노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직은 납작한 자신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케이는 조금은 여윈 얼굴로 성큼성큼 홀로 들어섰다. 겨울을 보내고 이제 다시 돌아온 길이었다. 홀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저절로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고 말았다. 어디에 있는 건가? 무사한가? 아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가?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영주님. 목욕 준비를 할까요?”

“됐다.”

케이는 냉랭하게 대꾸하며 빠른 걸음으로 2층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피곤하니까 조용히 하도록.”

“알겠습니다.”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여윈 것을 알아챈 사람들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아프지 않는 사람인데 왜 저렇게 아파 보이는지 모르겠다. 초겨울에 본성을 떠났던 케이가 아닌 듯했다. 그때의 케이가 조용한 가운데서도 눈빛이 형형한 남자였다면, 지금의 케이는 지나치게 조용한 정적에 휩싸인 남자인 듯했다. 그의 눈빛도 사라진 듯했다.

“아, 잠깐. 노아는 아직인가?”

“이런, 아직 청소를 끝내지 못한 모양이네요.”

갑작스러운 귀가로 인해서였다. 이미 한 차례 청소를 하긴 했지만 영주인 그를 위해 한 번 더 청소할 필요가 있어 그랬는데.

“하필 손이 느린 그 애를 시키다니. 어서 빨리 가서 같이 해.”

“알겠어요.”

하녀는 허둥지둥 치마를 걷어잡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급히 복도 끝에 있는 케이의 침실을 향해 뛰어갈 때 케이가 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누군가를 발견한 것처럼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그는 ‘탕!’ 소리가 나도록 문을 거세게 닫아 버렸다. 노아의 청소가 다 끝난 건가? 그 아이는 이제 안에 없는 건가? 이어 ‘텅!’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복도에 맴돌았다. 하녀는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노아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침대로 밀쳐지는 바람에 어지러워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케이가 돌아왔다.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잠시 그대로 서 있더니 문을 닫고 빗장을 질러 버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거칠게 낚아채 그대로 침대로 밀쳐 버렸다.

케이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다못해 다른 여자를 안아 볼까 싶은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면 그녀의 체취가 사라지지 않을까,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녀의 감촉이 희석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노아, 계속 그녀만 생각났다. 노아, 노아, 노아. 그가 헌신짝처럼 버린 여자, 노아.

“영주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순간 노아는 싸늘함이 가슴을 점령하는 듯했다. 그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다.

케이는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첫 여자라서 그런가? 그래도 나름 이성적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두 달 만에 보는 그녀 앞에서 다시 무너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보자마자 바로 무너질 줄이야.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녀가 하녀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평민이었다면 이렇게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을. 빌어먹을. 처음으로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가 힘들다고 느껴지게 한 감정, 사랑.

노아는 그가 바지만 벗은 채로 침대로 올라와 곧장 자신의 치마를 들치는 것을 숨 죽여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지쳐 보였고,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슬퍼 보였다. 아……. 이야기를 할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진 아이가 그에게 멍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의 명예는 훼손될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명예가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고 내릴 것이다.

앗! 순간 노아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무런 애무도 없이 곧장 삽입을 시도하는 그였다. 케이의 미간도 잔뜩 좁혀져 있었다. 노아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손을 대려고 하자 그가 싸늘히 내뱉었다.

“손 대지 마라.”

그녀의 이 아름다운 눈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소서.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미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녀를 갈구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녀를…… 그녀를 지금보다 더 사랑하지 않게 해 주소서.

노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케이는 지금 필사적인 듯했다. 그의 마음에서 그녀를 정리하기 위해, 떨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듯했다.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의 정부조차 될 수 없는 신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그가 다시 깊은 삽입을 시도했다. 평소의 부드러움과 배려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작별……. 노아는 무너지는 가슴으로 케이를 받아들였다.

케이는 그녀의 몸 속 끝까지 자신을 파묻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해 주고 싶다. 그녀를 사랑해 주고 싶다. 짓밟는 것처럼 욕정을 푸는 대신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 주고 싶다. 그의 마음은 그랬다.

노아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빠르게 분비되는 애액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그도 상처 입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거친 몸짓이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가느다랗게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그의 눈빛이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감정적인 케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고요한 사람. 그런 그의 고요함이 깨져 나가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굶주린 사람처럼 그녀의 몸을 한없이 파고드는 그. 그는 아파 보였다. 그리고 슬퍼 보였다. 아까보다 더 슬퍼 보였다.

노아는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반역자의 딸. 케이의 곁에 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여자. 미안하다, 아가야……. 너의 존재를 네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지 마라…….

그날 저녁. 노아는 부엌에서 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힘든 몸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수군수군. 평소와 다른 수다스러움이 왠지 거슬렸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시선도 좀 다른 듯했다. 노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가슴이 저절로 묵직해졌다. 누군가가 안 것인가? 케이가 성에 돌아오자마자 무엇을 했는지를? 그러자 수군거림이 더욱 잘 들렸고 저를 힐끔 쳐다보는 시선도 따갑도록 느껴졌다.

그녀는 힘없이 웃음지었다. 그런 모양이다. 그녀가 케이 방을 청소 중이었다는 것은 하녀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녀는 오후 늦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충분히 알 만할 것이다. 문득 케이의 말이 떠올랐다.

“너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다.”

그가 옷을 입으며 했던 말. 노아는 울음이 터지지 않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제 소문은 빠르게 퍼질 것이다. 그럼 자신을 지옥에서 건져 준 에드나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케이는 추문에 휩쓸릴 것이다. 그 전에 떠나야 한다. 다른 곳으로 보내야겠다가 아닌 보내고 싶다고 말했던 케이. 그는 자신을 절대 보내지 못한다는 것을 그 말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갈 수밖에 없다. 그에게 절대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절대로…….

결심은 했지만 실천은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케이의 기척을 따라 움직였고 케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격한 몸짓으로 그녀를 품었다. 이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장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나자 확연하게 보였다. 그의 이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 저녁이면 더 따가운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의 몸에 꽂혔다. 감히 누구를! 섣불리 시샘하거나 질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맹비난이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때가 온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와 마주친 케이가 성큼 다가오다가 별안간 주먹으로 벽을 ‘쿵!’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고 몸을 돌렸을 때, 몸 돌린 그의 손에서 뚝뚝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봤을 때, 그런 손을 꽉 움켜쥐고 스스로를 멈추게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을 봤을 때, 정말 때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새벽. 부엌의 작은 덧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이내 소리 없이 닫혔다. 총총총. 미끄덩. 겨울이 춥기로 유명한 웨스트필드답게 땅 곳곳에는 아직 얼음이 끼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균형을 잡고 걸었다. 걸음을 옮기는 작은 체구의 몸을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매서운 바람이 떠밀었다. 어서 가라고 떠미는 듯했다. 바람을 타고 소금기 어린 물방울이 날렸다. 부디 그대…… 평안하시길…….

케이는 퍼뜩 두 눈을 떴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소리도 어찌나 크던지 그의 귀에서 심장이 미친 듯이 퍼덕거리는 듯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탁자에 놓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빌어먹을. 그는 한 손으로 거칠게 자신의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꿈을 꿨다. 아주 좋지 않은 꿈이었다. 지금도 소름이 남아 있을 정도로 느낌이 안 좋은 꿈에 그녀가 보였었다. 노아. 그녀가 그런 꿈에 보이다니.

케이는 촛불을 켜고 빠르고 옷을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확인해야겠다.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해야겠다. 그저 꿈인데 이렇게 가슴이 뛰다니, 모를 일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녀를 꼭 봐야겠다.

케이는 촛대를 든 채 방에서 나왔다. 그녀가 잠드는 곳을 정확하게 안다. 찾았다. 없다. 그는 당황함을 내비치지 않고 계속 그녀를 찾아다녔다. 부엌, 홀, 복도. 따뜻한 불가에서 잠자는 기사들과 하녀, 하인들 사이를 계속 비집고 다녔다. 없다. 케이는 저도 모르게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올랐다. 도대체 이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심장을 욱죄는 듯했다. 전처럼 목욕을 하러 간 건가?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지난 시간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그녀가 그러겠는가? 결국 그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노아!”

노아는 전신이 다 얼어붙은 듯했다. 바들바들 떠는 몸짓으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딛고 있는 이 얼음이 그대로 깨져 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그 소리를 들었다. 쩍, 쩍, 쩍.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의 방문 앞에 서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오는 건데……. 여기가 끝인 줄 알았으면 그랬을 것을.

노아는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어둠에 잠긴 밤을 향해 속삭였다.

“안녕, 케이.”

쩍, 쩍, 쩍. 노아는 두 눈을 감았다. 새벽이고, 성 밖으로 별로 나간 적이 없어서 이곳이 호수인지 몰랐다. 눈이 덮여 있었고 바닥도 단단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발밑에서 불안한 소리가 들렸다. 쩍! 얼음. 그녀는 얼음으로 덮인 호수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노아는 두 눈을 감은 채 본능적으로 귀를 세웠다. 살 수 있는 건가? 누군가가 오는 건가? 그녀가 입을 벌려 크게 소리치려고 할 때 균형이 흔들리며 다시 얼음 깨지는 소리가 소름 돋게 울렸다. 쩍!

“노아! 노아!”

노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케이? 지금 케이가 온 것인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인가?

케이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노아를 찾아다녔다. 불길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그녀를 당장 찾지 않으면 자신의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다.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그 작은 체구로 이 매서운 날씨에 어디로 간 것인지.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던 순간. 그는 저절로 숨이 멈추고 말았다. 노아? 맙소사, 노아! 케이는 허겁지겁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가는데 그녀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지 마세요, 공작님. 얼음이 깨지고 있어요. 오지 마세요.”

쩍, 쩍, 쩍! 케이도 그 소리를 들었고 그를 수행하고 나온 기사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일제히 케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케이는 자신의 무거운 외투를 풀며 차분하게 말했다.

“길을 열고 불을 호수에 비춰라.”

“안 됩니다.”

케이는 그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로 자신 앞에 벽을 쌓은 그들을 밀치고 걸으며 이번에는 각반을 벗어던졌다.

“성으로 가서 뜨거운 생강차를 준비하고, 내 방에 불을 활활 지피고 여러 장의 모포를 가져다 놓도록.”

“절대 안 됩니다.”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다. 비켜라.”

조용하지만 그 은은한 힘의 끝을 절대 보이지 않는 남자, 케이. 그는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길을 열었다. 케이는 허리띠를 풀어 무장을 해제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호수 위에 올라섰다.

“내가 갈 것이다, 노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버티면 돼.”

“오지 마세요.”

“입 다물고 말하지 마라. 말은 내가 한다.”

그녀가 말을 하면 균형이 흔들린다. 그러면 그녀가 딛고 있는 얼음에서 나는 저 무시무시한 소리가 더 커진다.

“잘하고 있다, 노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라.”

노아는 심장이 갈가리 뜯기는 듯했다. 그가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으로 오고 있다니……. 그때 발밑이 흔들리는 듯했다. 아니, 출렁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세요, 공작님. 얼음이 깨지고 있어요.”

“케이. 케이라고 불러라. 당신에게 진즉 이 이름을 허락했어야 했어.”

노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케이…… 그가 평범한 남자였다면……, 그가 공작이 아니었다면…….

“당신만이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소, 노아.”

물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한 번은 불러 보고 싶다. 단 한 번.

“케이…….”

케이는 자세를 낮춰 신중하게 그녀에게 접근하며 대답했다.

“그래, 노아. 나는 당신의 남자, 케이. 당신만의 남자, 케이요.”

부드러운 그의 속삭임. 이제 됐다. 얼음이 그까지 삼키기 전에 어서 나를 삼켜 주기를. 그때 발밑이 크게 흔들렸고 그녀는 순식간에 깨진 얼음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노아!”

“공작님!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케이를 붙잡을 수 없었다. 바람처럼 얼음 위를 달려 노아가 사라진 얼음물 속으로 뛰어든 케이를 붙잡을 수 없었다.

성의 새벽이 대낮처럼 환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복도를 밝혔고 그의 방에 지펴진 불은 뜨거운 여름을 방불케 했다. 그 가운데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그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외투로 간신히 숨을 쉬는 여자를 감싼 채였다. 그의 숨결이 자신의 가슴에 바짝 끌어안은 여자의 이마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걷는 그의 뒤로 뚝, 뚝 끈적끈적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핏방울은 점점 더 굵어졌고 급기야 실개천처럼 그의 옷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노아……. 제발, 노아…….

“어머니를 청해 다오. 어머니를 모셔 오라.”

여기는 본성. 케이가 공작이 된 후 일라이는 에드나와 함께 다른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성의 주인은 이제 케이이고 철저하게 공작으로의 삶을 살라는 뜻이었다.

케이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을 적시는 그녀의 피를 느낄 수 있었다.

얼음이 깨지고 그 속에 빠진 그녀를 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도도한 물살이 금세 그녀를 끌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본능이었다. 케이는 느낌으로 물살의 방향을 잡았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물살을 힘차게 타고 들어갔다.

그가 물속으로 사라지자 그의 수하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호수의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얼음장 밑에 갇히면 죽는다. 손을 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얼음을 깼다. 케이를 살리기 위해 무조건 최선을 다해 얼음을 깼다. 그들은 그렇게 간신히 노아를 붙잡은 케이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다.

그녀를 뭍으로 끌어내고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케이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그녀의 가슴을 압박했다.

“숨을 쉬어, 노아. 숨을! 나를 두고 가면 안 되지 않는가!”

그녀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계속 가슴을 압박하며 소리쳤다.

“살아서 당신 자리를 찾으란 말이야. 당신 자리는 바로 내 옆이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것이야!”

들어라, 내 말을 듣고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지 마라.

“내 말 들어! 들으라고, 노아!”

간신히 그녀의 숨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신의 외투로 그녀를 감싸고 맨발로 말에 올라타 길을 재촉했다. 정신이 없었다.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피를 흘린다. 케이는 그녀의 허벅지를 감싼 자신의 손에 가장 먼저 뜨거운 피가 닿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그 즉시 출혈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노아? 당신 설마?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고 말았고 속절없이 타는 가슴에서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어머니를 모셔 와라!”

에드나가 왔을 때,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그녀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케이의 방은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벽난로 앞에 길게 누운 여자. 그녀의 하복부를 흠뻑 적시고 있는 피.

“맙소사, 노아!”

어찌 그 아이를 모를까.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었다. 예전의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됐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눈동자였지만 지독한 고생에도 감춰지지 않는 타고난 기품이 깃들어 있던 노아였다. 그때는 이미 정치에서 서서히 손을 떼고 있을 때였다. 언제까지고 두 아들의 조력자로 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느낀 순간부터 일라이와 에드나는 알렉스와 케이, 두 아들이 현실과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열어 가야 한다는 것을 통감했었다. 이제 스스로 거목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어머니, 서둘러 주세요. 제 아이를 가진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아내……. 케이가 노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았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았다. 자신과는 다르다. 일라이와도 다르다.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일라이는 케이든의 정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이 뒤바뀐 신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했지만 케이는 그런 선택을 하면 안 되는 입장이다. 알렉스와 손발이 맞으려면 케이 역시 알렉스 못지않은 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이…… 너 정말…….

케이는 다급하게 다시 에드나를 청했다.

“어머니!”

에드나는 서둘러 정신을 잃은 노아의 곁에 앉았다. 그녀의 몸을 만져 보자 체온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얼은 것이 녹고 있는 것처럼 느낌이 그러했다.

“저 때문에 호수에 빠졌습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됐습니다.”

소름이 돋도록 침착한 케이의 말. 그러나 그의 눈을 본 순간 에드나는 그가 이미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나는 침착해지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필사적인 케이의 눈이 절망으로 뒤덮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감이구나, 케이. 아이는 포기해야 할 듯싶어.”

순간 케이는 노아의 피로 젖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하혈이 너무 심했다. 노아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케이. 노아의 배를 밑으로 밀어라. 노아를 살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케이는 에드나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정신도 못 차린 노아가 고통을 못 이겨 간헐적인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바르르 떨며 그의 손을 피하려 했다. 얼마나 아프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케이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배를 계속 밑으로 쓸어내렸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저 눈물만 쏟아져 내렸다.

에드나와 일라이는 눈에 띄게 얼굴이 여윈 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비를 넘긴 노아가 제법 편한 숨을 쉬게 된 3월의 어느 날. 케이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정식 요청. 결혼.

“너는 네 인생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케이.”

하지만 알렉스는 다를 것이다. 에드나는 그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케이가 입을 열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형은 다를 겁니다.”

일라이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지만 심지가 유독 굳었던 케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숱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도 에드나를 통해 들었었다. 노아를 보면 과거 자신의 하녀였던 시절이 보인다고. 노아는 분명 몰락한 가문의 딸이거나, 아니면 반역자의 딸일 거라고. 케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합니다. 알렉스 형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렇지. 미래는 이들 스스로 열어 가야 하는 것이다. 부모인 이들이 참견하면, 어쩌면 쉽게 풀리겠지만 대신 두 기둥인 아들들은 성장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떤 것을 초래하든 간에, 둘의 우애와 신뢰를 믿어야 한다. 설령 알렉스와 반목을 한다 해도, 그것 또한 이겨 내야 한다. 둘 사이에 어떤 의견 충돌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스스로 풀어 가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충고.

“너를 믿는다, 케이.”

“고맙습니다.”

“좋은 아이다, 노아는.”

“제가 더 노력해서 알렉스 형에게 절대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말하는 케이를 바라보는 에드나의 눈에 회한이 가득 찼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거니? 알렉스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니? 미안하구나, 케이. 그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노아를 선택한 케이에게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라이보다 더 어려운 결정을 내린 아들, 케이.

“노아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

“감사합니다, 어머니.”

방으로 돌아온 케이는 곧장 침대로 다가가 노아부터 살펴보았다. 고비를 완전히 넘긴 노아이지만 아직 얼굴이 창백했다. 너무도 심했던 출혈. 에드나는 마음의 각오를 하라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살아 주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

케이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그녀의 곁으로 들어가 몸을 뉘었다.

“내일 새벽 도성으로 출발할 것이오. 알렉스 형을 만나고 오겠소.”

케이는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잠에서 깨어나 있었는지 노아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지 마세요.”

“응?”

“저는 괜찮아요. 이대로도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어째서? 나에게 놓아 달라고 말할 생각이오?”

노아는 기운 없는 손을 올려 케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저를 정부로 만들어 주세요. 아내라니요, 가당치 않아요.”

“훗, 노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그러지 마세요, 케이.”

케이는 순간 강한 힘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만. 나는 두 번 다시 당신을 잃지 않을 거요.”

“하지만 케이.”

“그럼 내가 공작 작위를 포기하면 내 아내가 되어 주겠소?”

진심……. 케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진실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노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흘 후, 도성 성벽에서 알렉스는 케이와 단둘이 담소를 나눴다.

“정말 오랜만이다, 케이. 너무 바쁜 거 아니냐? 도성에 얼굴도 종종 비치고 그러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 봄이 됐으니 더욱 바빠지겠지요.”

“그렇지. 봄이지, 봄. 그래, 이번에는 혹시 내가 기대하는 소식을 가지고 온 건가?”

역시 알렉스의 눈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렉스를 보며 느꼈던 케이였다. 그러나 케이는 조용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전하가 아닌 가족의 일원인 형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알렉스는 케이가 그렇게 운을 떼자 내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다. 아주 어려운 말을 하려고 온 것이다.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럴까?

“아내를 맞이합니다.”

알렉스는 더욱 신중하게 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여잡니다. 저만을 위한 사람입니다.”

순간 알렉스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동생의 마음을 그렇게 뺏어 간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마도요.”

“스무고개 하고 싶지 않다, 케이. 그냥 말해. 그래야 내가 축복을 해 줄 것 아닌가?”

케이는 고개 들어 알렉스와 시선을 정면으로 부딪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아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가문이 없다는 뜻이다. 케이는 일부러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반역자의 딸. 케이는 노아의 지난 과거를 그렇게 유추했다. 그가 아무리 조사해도 몰락한 가문은 근래 들어 없었다. 단지 5년 전 내전으로 인해 케이든이 단행했던 무자비한 숙청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케이든에서 알렉스로 왕권이 넘어가는 시기였기에 케이든은 알렉스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 내전을 정리하려고 했고, 알렉스를 위해서 조금의 싹도 남기지 않으려 했었다. 그로 인해 살생부에 명단을 올렸던 숱한 남작들이 운명을 달리했었다. 가장의 몰락은 가문의 몰락.

“노아? 노아…….”

알렉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기억력이 뛰어난 알렉스는 한 번 본 것을 잊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한 번이라도 눈여겨봤다면 그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새겨졌을 텐데. 5년 전이라면 노아도 어린 나이였으니 어쩌면 알렉스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알렉스와 충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운은 통하지 않았다.

“노아?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보스빅 남작의 딸, 노아?”

역시……. 순간 알렉스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의 죄가 가족 전부의 죄는 아니잖습니까?”

“이놈. 벌써 알고 있었군.”

케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불가!”

케이는 고개를 번쩍 들고 차분히 말했다.

“허락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통보를 하는 것인가? 네가 나에게? 그때의 일을 잊었는가?”

케이는 알렉스의 딱딱한 말투에서 그가 형이 아닌 왕으로서 반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케이가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도 알렉스는 형이 아닌 왕으로서 말하고 있었다. 형이 아니다.

“저를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케이도 안다. 알렉스는 절대 반역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무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더구나 선왕 케이든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알렉스이기에 두 번째의 반역이 더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살생부는 일라이가 작성한 것이었다.

알렉스는 믿기지 않았다.

“뭐라고?”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가 막히는군.”

알렉스는 싸늘히 내뱉었다. 순간 그는 발끈하며 다혈질적인 성격을 그대로 내보이고 말았다.

“너는 네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고 팔자 좋게 반역자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인가?”

케이는 알렉스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왕의 분노였다.

“그녀의 이름은 노아입니다.”

“네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케이?”

일라이와 에드나.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그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그들의 명분과 사랑은 케이의 사랑과 비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케이의 음색도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반역자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 그건 나와 선왕을 모욕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결정에 불만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크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면, 도대체 뭐지? 그렇게 잘났으면 이렇게 나를 만나러 오지도 말 것이지 왜 온 건가?”

“형!”

“그래, 나는 네 형이다. 그리고 왕이다. 지금 너는 나를 뭐로 보고 있는 건가? 내 동생이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혀 아니다. 나는 너에게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주려고 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런 선택을 나에게 통보할 수 있나?”

“그 기회는 형을 위한 거 아닙니까?”

케이의 음성은 너무도 담담하고 침착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일부러 형이라고 불렀다. 그가 왕이 아닌 형으로서 말을 들어 주길 원했다.

“뭐라고!”

순간 알렉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케이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언제나 기대가 컸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에 케이의 도움은 절대적이지만, 케이와의 우애는 언제나 그를 지탱해 주는 거대한 바탕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반역자의 딸을? 그것도 이미 알면서, 왜?

“저는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전하의 기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형이 아닌 왕에게 매달렸다. 자존심으로 따지자면 케이도 알렉스 못지않으나 반목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알렉스가 반대할 것은 충분히 예상했었다. 그러니 참을 것이다. 노아를 위해서 참을 것이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알렉스는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의 믿기지 않는 통보가 그를 이미 화나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항상 너만은 믿었다. 내 등을 맡길 사람은 너뿐이라 생각했다.”

케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참으려고 해도 차가운 노여움이 피를 잠식해 들어오는 듯했다. 온몸이 점점 더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모르겠군. 내가 과연 너를 믿고 내 등을 맡겨야 할지 말이다.”

알렉스의 차디찬 시선이 케이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케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알렉스의 분노를 부채질한다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케이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알렉스는 계속 자신의 분노를 쏟아 냈다.

케이는 쏟아지는 그의 분노를 받으며 가슴이 아리고 저렸다. 회의가 들었다. 한 번도, 맹세코 단 한 번도 알렉스의 그림자인 삶에 의구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당연히 케이가 해야 할 몫. 알렉스의 그림자인 것은 자신의 삶. 그 삶을 후회한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회의가 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노력하며 살았던 것일까?

“네가 나를 모욕했다, 케이.”

케이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의 참상을 케이도 모르지 않았다. 알렉스가 어떤 심정으로 비소에 중독됐던 케이든의 곁을 지키며 그 사태를 수습했는지 알기에 그러했다. 그래, 알렉스는 이렇게 화를 낼 만하다. 하지만!

알렉스는 기가 막히게 케이가 다시 청을 할 것을 알아챘다.

“불가!”

알렉스는 딱 잘라 냈다. 이어 알렉스는 불이 담긴 눈빛으로 얼음이 담긴 케이의 시선을 마주하며 싸늘히 말했다.

“물론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결혼하겠지만 나에게 축복을 기대하지 마라.”

“그렇습니까?”

“가라, 케이. 너에게 허락된 시간은 끝났다.”

케이는 싸늘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욱신거렸고 형편없이 난도질당한 자존심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듯했다. 그래, 이해한다. 알렉스가 반대하는 이유. 케이는 이해한다. 케이는 더 청을 하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럼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아니, 이것이? 내가 그랬다고 지금 나에게 똑같이 화를 내는 것인가? 형인 나보다 그 여자가 그렇게 중요해?’

알렉스는 케이의 작별 인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이렇게 가려는 건가? 한 번 더 생각하겠다고 하면 안 되나?

“생각해 보라, 케이. 대신들이 네 아내를 어떻게 생각할지, 우리 가문을 어떻게 생각할지.”

케이에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정말! 알렉스도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무는 보통의 의무가 아니고, 우리의 자리는 너무도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다. 케이가 좀처럼 자신의 말을 따를 기색이 없자 알렉스는 타협안처럼 말했다.

“정 헤어지지 못하겠다면 그 여자는 정부로 삼고 아내는 다시 선택해라. 그 여자도 알겠지.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

그 여자……. 케이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팟!’ 끊어지고 말았다. 케이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비록 부족한 놈이기는 하나, 아내에 대한 모욕까지 그대로 참고 넘어갈 놈은 아닙니다. 부디 평온하시기 바랍니다. 전하.”

그렇게 케이가 돌아간 후, 알렉스는 기다렸다. 케이가 다시 돌아와 자신을 설득하기를 말이다. 케이는 항상 그러했었다. 먼저 양보하고, 먼저 배려하고.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케이의 결혼 소식은 들렸으나 알렉스는 초대받지 못했다. 말로는 조용히 치렀기에 그랬다고 했으나 알렉스는 알 수 있었다. 케이와 깊은 감정의 골이 패었다는 것을.

케이는 4년 동안 노아를 보여 주지 않았다. 그가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에는 혼자 참석했고 아내에 대해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가 행복해한다는 것은 그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으나 케이는 알렉스에게 꼭 해야 할 말만 했다. 화해는 없었다. 지독한 놈. 무려 4년간이나 알렉스는 그에게 왕이었을 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형의 자리는 박탈당한 채 보내야 했다. 케이의 말대로 노아는 노아일 뿐이나 알렉스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그러다니. 고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히얏! 알렉스는 박차를 가했다.

케이는 노아를 너무도 사랑했다. 그녀의 사랑 속에서 안정적인 모습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케이의 성장은 알렉스의 힘과도 직결된다. 케이를 그렇게 성장케 한 사람은 바로 노아였다.

알렉스는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다시 박차를 가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간다. 내가 간다. 고집이 그렇게 셀 줄은 정말 몰랐다, 케이.”

온화한 햇살이 대지를 포근하게 달구던 어느 날. 노아는 바쁘게 부엌을 지휘했다. 전령이 와 전했다. 왕의 방문. 케이와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한편 설?다. 알렉스가 온다. 알렉스가 자신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난 시간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케이는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숙일 만큼 잘못한 게 없기에 그렇다 했다. 그러나 노아는 가시방석이었다. 이것이 다 자신의 허물이라 생각했다.

“이제 다 준비가 끝난 거지요?”

자신들과 함께 분주히 음식을 준비한 노아에게 다들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분이 바뀌었는데 잘난 척이 없다. 오히려 이들의 힘겨움을 같이 나누려고 참으로 많이 애를 쓰는 심성 착한 공작 부인, 노아.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도 훈훈하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이제 영주님 곁으로 가셔야지요.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 그렇죠.”

너무 긴장한 탓에 이들과 함께 서 있던 노아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부엌에서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케이가 아들을 안은 채 그녀를 찾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헤이든은 노아를 보자마자 방실 웃으며 두 손을 뻗었다. 노아는 헤이든을 품에 안은 채 불안한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앞으로 이끌며 말했다.

“노아, 당당하게 허리를 펴. 그래야 알렉스 형이 덜 미안해할 테니까. 당신이 당당하게 맞아 주지 않으면 형은 계속 미안해할 거요. 잊지 마시오. 당신은 내 아내이자 공작 부인이오.”

노아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 답을 대신했다. 케이의 말대로 자신은 공작 부인, 노아다. 그래, 내 이름은 노아. 케이가 사랑하는 여자, 노아. 그리고 공작 부인이다.

이윽고 알렉스가 도개교를 통과했다는 전령이 오고, 조금 더 기다리자 홀의 활짝 열린 거대한 문 사이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알렉스.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 케이는 노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어 더욱 꼭 끌어안아 주었다. 문득 케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노아의 허리가 펴졌다. 기품 있는 당당함이 그녀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렇지, 노아. 아주 잘하고 있어.

드디어 알렉스가 이들 앞에 멈춰 섰고 그는 케이보다 노아에게 먼저 시선을 주었다. 케이와 닮은 금빛 눈동자. 알렉스는 노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이 녀석의 부족한 형, 알렉스라고 하오.”

“어서 오세요.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화한 햇살이 대지를 포근하게 달구던 어느 날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운 그런 날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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