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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2/23)

에필로그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바닷가를 뛰어다니다가 한편에 주저앉아 모래사장을 파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에드나의 손을 끌어 잡았다.

“좋군, 에드나.”

에드나는 눈부신 금발 머리를 자랑하는 카일과 엘리샤의 아이들을 보며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에요, 일라이.”

“크면 클수록 엘리샤를 보는 듯해. 카일의 모습도 많이 보이고.”

두 사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이었어, 에드나.”

에드나는 갑자기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자 고개를 돌려 일라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 시간이었어.”

일라이의 손길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에드나는 그의 손바닥에 기대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대로 오랜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이…… 그 끝.

“조금 눕고 싶네요.”

그 말에 일라이는 그녀의 몸을 부축해 자리에 눕히고 자신도 그 곁에 누워 그녀에게 팔베개를 내밀었다.

에드나는 그의 팔베개를 하고 비스듬히 누워 언제 봐도 신비로운 금빛 눈으로 그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애정이 가득한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

“당신의 이 눈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이 정말 묘하더군.”

“그랬어요?”

“뭔가에 홀린 것 같았소.”

에드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일라이. 나를 만나 당신도 행복했죠?”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요?”

“듣고 싶어서 그래요. 나로 인해 행복했다는 말, 듣고 싶어요.”

일라이는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을 들어 세월도 비켜 간 듯한 에드나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서서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에드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드나의 건강이 근 1년 동안 급격하게 흔들렸다. 오히려 일라이가 조바심이 날 정도로 그녀의 건강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둘 다 평화로워 보였다. 단지 잠이 많아졌고, 행동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 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당신과 함께니까.”

“나는 이제 미련이 없어요. 아무것도 없었던 곳을 도시로 만들어 낸 카일이 자랑스럽고, 행복한 엘리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요. 우리보다 더 아름답게 사랑하는 그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일라이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에드나…….

“우리는 축복받았어요, 일라이.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아니요, 일라이. 당신이 내 빛이 되어 줬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에드나는 일라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속삭였다.

“사랑하오, 에드나. 당신 덕분에 인생이 의미 있었어.”

“사랑해요, 일라이. 내 영원한 사랑, 일라이.”

일라이는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도,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감긴 두 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고 그의 눈도 천천히 감겼다. 떨림도 없었다. 그저 평화로울 뿐이었다.

“할아버지, 이것 봐요. 모래를 파니까 이렇게 예쁜 조개가 나왔어요.”

엘리샤의 첫아이, 라엘은 두 손에 가득 조개를 주워 들고 일라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제 세 살인 아이가 말이 제법이었다. 그런데 일라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에드나에게 말했다.

“할머니, 자? 자요?”

에드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라엘은 제 뒤를 따라온 남동생이 일라이를 깨우려고 하자 재빨리 말했다.

“주무시는데 깨우지 마. 엄마한테 혼나.”

라엘은 남동생 파웰과 조개를 나눠 들며 활기차게 말했다.

“엄마한테 가서 자랑하자. 할아버지, 할머니 다 주무시니까 깨우지 말고 가자.”

엘리샤는 카일과 같이 아이들을 찾으러 나오다가 저희에게 있는 힘껏 달려오는 라엘과 파웰을 발견하고는 두 팔을 넓게 벌렸다. 망아지처럼 달려온 아이들이 동시에 안겨들자 둘은 아이들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엄마, 이거 봐. 모래 파니까 이렇게 예쁜 게 나왔어.”

“그렇네? 어제보다 더 예쁜 것을 발견했네.”

엘리샤는 빙그레 웃으며 라엘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이것으로는 뭘 만들까?”

그러자 라엘이 카일을 향해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아빠가 목걸이 만들어 주면 좋겠어. 엄마한테 걸어 주게.”

카일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통통한 라엘의 볼을 살짝 잡았다 놓아주었다. 귀여운 녀석.

“라엘.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 봤니?”

엘리샤가 파웰을 안아 올리며 라엘에게 물었다. 두 분이 점심때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온 길이었다. 그러자 라엘이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말했다.

“응, 봤어.”

“어디?”

그러자 라엘은 카일이 안아 주길 기다렸다가 카일이 자신을 안아 올리자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 후 라엘은 엘리샤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조용히 가야 해.”

“왜?”

“두 분 다 주무셔.”

“응?”

엘리샤는 그 말에 눈썹을 파르르 떨며 되물었다.

“주무신다니?”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사이좋게 꼭 끌어안고 주무셔.”

이들에게 호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평범하고도 특별한 일상 속에서 두 손주에게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린 지 오래되었다.

“두 분이서 같이 주무신다고?”

“응. 쿨쿨.”

이번에는 파웰이 자는 시늉을 내 보였다. 엘리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느낌이……. 금세 눈물이 가득 고여 들었다. 엘리샤가 파르르 떨며 카일을 올려다보자 카일은 말없이 한 손을 내밀어 엘리샤의 허리를 끌어당겨 잡아 주며 이끌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래사장을 걸어 멀리 보이는 두 사람에게 걸어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앞에 도착했을 때 엘리샤는 품에서 파웰을 내려놓고 두 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 주무시지? 많이 피곤하신가 봐.”

엘리샤는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그래…….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 이대로 더 주무시게 해야겠다…….”

“잠꾸러기.”

카일은 엘리샤가 어깨를 떨며 흐느끼자 그 어깨를 가만히 잡아 주었다. 엘리샤는 눈물로 앞을 가린 채 그 앞에 엎드리고 말았다. 부모님이 남긴 모든 것. 사랑한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그들의 모습. 영광스럽게 빛나는 그들 앞에 엘리샤는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은 울음을 쏟아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에드나는 항상 말했었다. 울지 말라고. 일라이도 당부했었다. 후회 없으니 울지 말라고. 그런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카일은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온몸을 떨고 있는 엘리샤를 지켜보았다.

일라이는 카일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말했었다.

“우리의 영광은 잊어야 한다, 카일. 너는 너와 엘리샤가 함께 만들어 가는 영광을 생각하면 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미래. 아이들. 일라이는 카일이 원하는 영광에 스스로 이르는 길을 알려 준 것이었다. 카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가슴이 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빠, 울어?”

라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야.”

“엄마는 우는 것 같아.”

“아니야. 인사를 하는 거야. 우는 거 아니야.”

작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사를 하는 것뿐이다. 그래…… 그뿐이다. 그들의 삶이 계속 이어지도록 우린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다. 그러면…….

라엘이 카일의 품에서 벗어나 파웰의 손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파웰. 우리 저 끝까지 달리자. 가서 우리만의 성을 만들어 보자.”

까르륵 웃는 청 높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닷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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