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3)

19

카일은 몸을 최대한 낮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가 날까 걱정돼 쇠사슬로 만들어진 갑옷도 벗은 상태였다.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몸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심장이 격하게 뛰며 연신 뜨거운 피를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새벽을 틈타 마을로 완벽하게 진입해 들어온 카일은 뒤따르던 매튜와 수하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 모았다.

“듣기로 저들은 여든 명 남짓이라고 한다. 우리보다 숫자도 우세하며 실력 또한 훨씬 상위다.”

카일은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을 다독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정면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저들은 최고의 기사들이다. 하나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것을 이용하면 된다. 여기는 우리의 마을, 우리의 터전이다. 골목길을 이용하고 주의를 끌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라. 가급적이면 단도를 쓰고 손에 절대 자비를 둬서는 안 된다.”

다들 두 눈이 불타는 듯했다. 카일의 두 눈은 지극히 냉정하게 보였지만 그의 가슴도 이들의 눈처럼 불타고 있었다.

울부짖는 듀팡을 만났고, 이어 무리지어 도주하는 사우턴야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카일을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일제히 그를 에워싸고 울부짖었다. 옷자락 하나하나에도 그들의 눈물과 두려움,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카일은 그들 사이에서 엘리샤를 찾았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이들을 이끌고 나왔을 엘리샤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엘리샤 님은 남으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저희가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순간 카일은 땅바닥에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지. 이들이 이렇게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돕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카일은 이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엘리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자신이 올 거라는 것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엘리샤는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카일은 빠르게 복장을 가볍게 했다. 그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도망쳐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마을의 끔찍한 참상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는 준비했다. 간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간다.

그때 그의 곁에 선 매튜가 쇠사슬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 도성에 같이 갔던 수하들이 일제히 복장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스스로 준비를 할 때 마을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들도 나섰다. 카일은 힐끔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죄책감.

카일은 마지막으로 검과 단도의 날을 확인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따라오지 말고 여기서 여자와 아이들을 지켜라. 너희는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를 더 탓하지 마라.”

“하지만 엘리샤 님은…….”

“엘리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카일은 심호흡을 하고 한 사람씩 일일이 얼굴을 보며 말했다.

“한 명도 죽지 말고 살아서 보자.”

“알겠습니다.”

“가라.”

소리 죽인 발걸음이 새벽의 어둠을 틈타 사방으로 사라졌다. 카일은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잠은 가장 달콤하다. 그 달콤함을 그들이 악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이들 차례.

“엘리.”

카일은 그녀의 이름을 입 속으로 불러 보며 어둠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 이 새벽이 완전히 밝기 전에 찾는다. 당신을 되찾는다. 엘리, 나의 엘리. 나만의 엘리…….

카일은 거친 숨을 내쉬며 끈적끈적한 피가 흘러내리는 단도를 바지에 쓰윽 문질러 닦았다. 그가 죽인 네파르나 놈들만 벌써 여덟 명이었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이 그의 전신을 아프게 내달렸다. 그는 미처 모르고 있지만 뼈 마디마디에 묵직한 피곤이 쌓이고 있었다.

피곤은 골목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우턴야드 주민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아이의 체격이 분명한 듯 보이는 검게 탄 시체를 볼 때마다,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를 부둥켜안고 죽은 부부의 시체를 볼 때마다 무서운 속도로 쌓였다.

참전 경험이 없는 카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죽음이었다. 속이 뒤집어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기가 지옥인지 현실인지 순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카일은 품에 안은 아이와 함께 칼에 관통되어 죽은 한 여인의 시체를 보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냉정이 깨져 나가려 했다. 평정이 무너지는 듯했다. 왜 완벽하게 막지 못하고 사우턴야드가 유린당하게 한 건지……. 알렉스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워졌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키안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눈을 뜨고 똑바로 봐라, 카일.”

카일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세게 악물었다.

“이것이 전쟁이다, 카일. 죄 없는 사람이 수없이 죽어 가는 것이 전쟁이다. 우리는 이런 전쟁을 더 이상 너희에게 물려주기 않기 위해 싸운 것이다.”

네파르나 해전에서 중상을 입고 귀국한 키안이 자신을 보고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하는 어린 카일에게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했던 말이다.

카일은 어둠에 자신을 묻은 채 심호흡을 했다. 평정을 되찾기 위해, 냉정을 되찾기 위해 깊게 호흡했다.

알렉스…….

카일은 알렉스를 통해 현재 얼스월드, 노스이언, 그리고 네파르나가 얽힌 전투에 대해 들었을 때, 내심 도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지만 이렇게 큰 일인 줄 몰랐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서는 사활을 건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데, 얼스월드는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 가고 있다니. 그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알렉스였다.

얼스월드는 두 번의 내전과 전쟁을 겪으며 힘겨운 복구의 시간을 보내 왔다. 찬란했던 전쟁의 승리는 시간이 지나자 그 의미가 퇴색하여 삶의 고단함으로 점철되었다. 전쟁의 승리를 끝까지 기억하며 느끼는 자는 오로지 귀족뿐.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백성들은 그것을 참혹함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카일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알렉스는 그런 그들에게 전쟁을 또다시 겪게 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전 백성을 동원해서 군량미를 걷거나 장정을 징집하지 않고 삶이라는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이 직접 싸우고 있는 것이다.

카일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 눌렀다. 왕은 선택했다. 백성이 아닌 자신들이 희생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길 끝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자신들의 피눈물로 젖을 것이다. 왕인 알렉스는 선택을 했다. 아주 힘겨운 선택을 했다. 그 고단하고 무거운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이 가족인 우리가 할 몫.

카일은 자신의 가슴에 맹세를 새기는 것처럼 다시 가슴을 꾹 눌렀다. 새겨라. 잊지 마라. 우리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 신분이 무엇이든, 우리는 가족이다. 우리만은 절대 그를 욕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선택을 할 왕은 앞으로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카일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카일은 일곱 명을 더 죽인 후 폐부를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무시한 채 단도를 석조 벽 모서리에 대고 조금이라도 더 날카롭게 벼렸다. 카일은 입을 꾹 다문 채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상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도 적잖은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열다섯 명. 그는 열다섯 명을 죽였다.

그때 매튜가 빠르게 다가와 가쁜 숨을 쉬며 보고했다.

“현재까지 서른 명 정도 척살했습니다.”

그럼 현재까지 마흔다섯 명이 죽었다. 이제 남은 놈들은 대략 서른다섯 명. 카일은 동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장엄한 붉은빛이 대지를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튜. 나머지를 감당할 수 있나?”

매튜는 잠시 숨을 죽였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엘리샤. 카일 없이 우리끼리 가능할까? 매튜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네파르나 놈들은 정예 기사였다. 기사가 기사도를 던지고 도살자가 되면 얼마나 끔찍해지는지 그들이 똑똑히 보여 주었다. 서른다섯 명……. 우리끼리 감당할 수 있을까?

“매튜. 수하들을 믿어라.”

카일이 웃으며 피로 물든 매튜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면서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믿는다.”

매튜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그 빛을 발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도 성치 않았다. 두려울 텐데. 무서울 텐데. 이 지옥에 그녀가 있는데……. 그가 이렇게 편하게 웃는다. 자신을 믿고 웃는다.

“걱정 마시고 먼저 가 계시면 싹 다 죽이고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매튜의 등을 격려하듯 툭 쳐 주고 한 손에는 단도를, 다른 손에는 장검을 들고 새벽빛이 빠르게 번져 오는 곳으로 사라졌다.

매튜는 카일이 마을 외곽으로 사라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붉은빛 속에 그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카일은 계속 엘리샤를 찾고 있었다. 그는 몇몇 놈들을 다그쳐 엘리샤의 행방을 물었다. 장인 작업장. 그것을 알자마자 카일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계속 혼자 열고 있었다.

문득 희미하게 단말마 비명이 들려왔다. 매튜는 재빨리 움직여 카일을 살폈다. 그러자 카일이 재빨리 그 입을 막아 한쪽 구석에 소리 없이 눕히고 고양이보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샤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계속 길을 열고 있는 것이었다.

매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힘껏 양손으로 쳤다.

“정신 바짝 차리자, 매튜.”

앞만 보며 달리는 카일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몫. 매튜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릴수록 전에 없던 용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전신으로 펴져 가는 듯했다. 끊어질 것처럼 아프던 몸 마디마디가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매튜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사우턴야드 사람들은 엘리샤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리고 사우턴야드 사람들은 이제 카일에게 미래를 빚지게 될 것이다.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사우턴야드를 되찾을 테니 말이다.

험프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엘리샤를 응시했다. 망할 계집 같으니라고. 끔찍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바닥에 길게 뻗은 수하의 시체가 거추장스러워 험프리는 마구잡이로 발로 걷어찼다. 또 졌다. 분명 어제보다 엘리샤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는데도 또 졌다.

“내일은 네 차례인가?”

험프리는 미친 듯이 수하의 시체를 발로 차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엘리샤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가 나서는 것인가?

“애초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지, 험프리?”

엘리샤는 그를 자극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

“아니, 약속이란 의미는 제대로 알고 있나?”

엘리샤의 부드러운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험프리의 가슴에 푹푹 꽂혔다.

“닥쳐!”

훗훗훗. 엘리샤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험프리를 노골적으로 비웃는 듯 고개까지 흔들면서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멈추며 싸늘하게 말했다.

“어서 와라, 험프리. 기꺼이 죽여 줄 테니.”

엘리샤는 부들부들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검 자루를 움켜쥐고 험프리를 응시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저도 모르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한 건가?’

순간 엘리샤의 시선이 험프리의 등 뒤를 향했고 아침 햇살 같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 갔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자 엉겁결에 험프리도 뒤를 돌아보았다.

“늦어서 미안하군, 엘리.”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힘이 서려 있는 그의 음성!

“카일…….”

엘리샤는 카일을 보자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의 몸을 물들인 검붉은 피. 그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다 그가 정면으로 붉은빛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빛을 품었다.

“그렇게 나에게 오면 돼요. 곧장 나에게 오세요.”

카일은 그녀의 말대로 걸음을 큰 폭으로 옮겼다. 이 건물을 지키던 놈들을 해치우고 막 들어오려 하는데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엘리샤를 안에 두고 눈이 보이지 않다니.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엘리샤가 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샤는 빛을 품고 걸어오는 카일을 보며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하고 만다.

“이 싸움 나에게 양보하겠소, 엘리?”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저놈에게 받을 빚이 있소.”

엘리샤는 목이 메어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것을 알아챈 카일이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엘리. 나는 당신의 남자, 카일이야. 절대 지지 않아.”

엘리샤는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당신은 그런 남자죠.”

험프리는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뭣 하는 것이냐! 카일을 죽이지 않고.”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다, 험프리. 이미 그들은 다 죽었을 테니까.”

순간 험프리는 움찔하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내 기사들이 전부 다? 마치 그것을 눈치 챈 것처럼 카일이 싸늘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허를 잘 찔렀다만 그 운도 이제 끝났다.”

카일은 단도를 허리춤에 차고 장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거머쥐었다. 그는 험프리와 겨뤘던 경험을 떠올렸다. 비록 험프리는 허세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제 허세를 버리고 목숨을 걸게 되었으니 험프리를 이기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성에서 험프리의 손목을 분지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허점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겸허히 생각했다. 상대를 높게 봐야 방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필 이럴 때 눈이 보이지 않다니…….

그때 엘리샤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눈 감고도 험프리를 이기게 해 드리죠. 눈 감아요, 카일.”

훗! 카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의 엘리. 똑똑한 나만의 엘리. 그는 눈을 감았다.

“좌로 한 보 반. 정면으로 열다섯 보 앞에 험프리가 있어요.”

카일은 그녀가 말해 주는 거리를 머릿속으로 가늠했다. 엘리샤……. 그러자 자신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시작해 볼까?”

“훗! 건방진 것은 여전하군. 눈 감고 하겠다? 그래, 어디 한번 건방 떨어 봐라.”

타앗! 순식간에 험프리는 바닥을 박차고 간격을 좁혀 상단에서 하단으로 검을 내리쳤다.

“뒤로 한 보. 중단!”

카일은 엘리샤의 외침 그대로 보폭을 움직이며 검을 가로로 눕혀 그 일격을 받아 냈다. 챙! 손이 묵직하게 떨렸다. 카일은 순간 씨익 웃었다. 받아 냈다. 엘리샤 덕분에 검을 받아 냈다. 그녀가 바로 그의 눈. 그러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때 험프리의 검이 다시 사선으로 쳐 오자 카일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방어했다. 챙!

엘리샤의 외침이 다시 들렸다.

“앞으로 반 보. 찌르기, 상단!”

카일은 충실하게 엘리샤의 외침 그대로 움직였다. 그 날카로움에 험프리의 옷깃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좌로 두 보. 원형 치기.”

팟! 순간 엄청난 속도의 원형 치기가 그대로 험프리의 가슴에 실오라기 같은 선을 그었다. 험프리는 흠칫하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소름이 끼쳤다. 뭔가 흘러내리는 기분에 험프리는 자신의 가슴을 살폈다. 옷이 크게 베여 드러난 속살에 주르륵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맙소사…….”

그러나 그렇게 정신을 놓을 틈이 없었다.

“앞으로 네 보 반. 하단에서 상단!”

챙! 험프리는 또다시 도망치듯 물러나고 말았다.

“좌로 사선.”

챙! 챙! 험프리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는 하나 둘씩 가느다란 선이 생기고 있었다. 그 선을 비집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험프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계속 카일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카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지시대로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샤…….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카일의 보폭과 검의 반경까지 헤아린 지시. 그것에 충실히 따르는 카일의 역량. 이런 결투는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둘이 한 사람처럼 보였다. 험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고 들어오는 카일의 검에 어깨만 베인 채 아슬아슬하게 목은 피해 갈 수 있었다.

카일이 눈을 뜨고 한다면……. 지금 나를 철저하게 조롱하는 것이구나. 내 끝을 이렇게 짓밟는구나. 험프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훗! 그래도 명색이 총독이었던 나를 이렇게 쥐 잡듯이 몰아대다니.”

그는 아직 모르고 있다. 엘리샤는 순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험프리는 카일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조롱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엘리샤의 입술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것은 시작이다, 험프리.”

“쳇! 빌어먹을!”

그때 엘리샤가 소리쳤다.

“45도 각도 앞 여섯 보. 하단에서 상단!”

순식간이었다. 카일은 눈부신 속도로 단숨에 험프리에게 근접했다. 그때 엘리샤의 외침이 다시 들렸다.

“원형치기!”

카일은 검을 원형으로 강력하게 휘둘렀다. 챙! 그 힘을 이기지 못한 험프리의 검이 허공을 날아올랐다.

“검을 놓쳤어요!”

카일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카일은 재빨리 검을 놓고 팔을 뻗어 험프리를 붙잡았다. 근접전이다. 그럼 장검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험프리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도망치려 하자 카일은 더한 힘으로 그를 붙잡았다. 험프리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그를 가깝게 붙잡은 카일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

헉! 험프리는 가슴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신음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퍽! 퍽! 퍽! 퍽! 험프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잡힌 채 계속 가슴을 가격당하자 숨통이 꽉 막히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험프리는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카일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엘리샤는 아찔한 현기증이 엄습해 오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서 있을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는데 이제 카일이 승기를 잡자 몸이 먼저 승리를 만끽하며 무너진 듯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도 엘리샤는 고개를 들려고 했고, 계속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아직은 아니다. 험프리가 죽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여러 군데 터지고 갈라진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어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조금은 밝아진 시선으로 앞을 봤을 때, 그녀는 고함을 쳤다.

“험프리를 놓고 뒤로 물러나요!”

그러나 늦었다. 카일과 험프리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에 걸려 동시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엘리샤는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앞으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헉!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엘리샤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막 손을 뻗어 아까 주저앉으면서 바닥에 떨어뜨린 검을 잡으려 할 때 그것이 보였다.

카일과 험프리는 본능적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굴렸다. 카일이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험프리도 벌떡 일어났다. 험프리의 손에는 죽은 시체의 손에서 빼낸 검이 들려 있었다. 엘리샤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달렸고 카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푹! 엘리샤는 자신의 어금니를 꽉 깨물어 비명을 삼키고 몸을 날려 당황한 험프리를 고스란히 카일에게 노출시키며 소리쳤다.

“정면으로 네 보!”

카일의 감각은 점점 더 예민해졌다. 본능이 완벽하게 깨어난 맹수가 되어 엘리샤의 지시를 따랐다. 그의 걸음은 눈 깜빡할 사이에 간격을 좁혔고 험프리의 더러운 숨소리가 채 피부에 닿기 전, 긴 팔을 뻗어 험프리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흑! 험프리가 그의 힘에 밀리면서도 꺾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할 때, 카일의 발이 무자비하게 그의 발목을 짓밟았다. 와지끈!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카일이 그의 발목을 밟아 부러뜨리자 그는 카일에게 매달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카일은 자신에게 매달린 험프리의 손목을 잡고 무자비하게 비틀어 꺾었다. 끼르륵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지며 피부를 뚫고 나왔다. 험프리는 어느새 쉰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 대며 카일에게 애원했다.

“죽이려면 그냥 죽여 줘, 제발. 제발!”

카일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한쪽 발목과 손목을 부러뜨린 후 그는 다시 그의 목을 움켜잡은 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으으으윽……. 그 신음 소리가 채 사라지기 전에 카일의 주먹이 냉혹하게 그의 가슴 명치에 꽂혔다. 커헉! 어느새 비명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거친 숨소리와 끼르륵,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마침내 장인 작업장으로 달려들어온 매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를 먼저 발견한 엘리샤가 재빨리 손을 들어 침묵을 지시했다. 맙소사…… 맙소사……. 매튜는 한 손으로 제 입을 막고 다른 이들도 침묵을 지키도록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다들 숨을 죽였다.

검이 어깨에 꽂힌 듯한 엘리샤. 매튜가 황급히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엘리샤는 그것을 막았다. 카일이 집중하고 있다. 다른 소리가 끼어들어 그를 방해하게 둘 수 없었다.

매튜는 너무도 단호한 그녀의 손짓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리샤는 카일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고 신음 소리를 참았다. 호흡이 흔들려 헐떡이는 숨이 나오자 숨소리도 죽였다. 검을 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조금도 돌릴 수 없기에 그녀는 자신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며 몸이 흔들리고 집중력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갔다.

엘리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순식간에 눈앞이 어둠으로 들어찼다. 카일은 지금까지 이런 어둠 속에서 싸운 것이다. 순전히 엘리샤를 위해 이렇게 어둠 속에서 싸운 것이다. 엘리샤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이 눈과 머리와 마음에 카일을 담고 싶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다시 보였다.

“엘리. 내가 약속을 지키는 것을 봐.”

엘리샤는 웃으며 이내 희미해지는 시야에 카일을 담았다. 카일…… 나의 카일…….

“손가락부터 차례로 분질러서 목을 비틀어 죽일 거요.”

“순서가 틀렸어요. 당신은 발목부터 분질렀잖아요.”

그 말은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을 적시는 피가 그녀의 기운과 빛을 앗아 가고 있었다.

카일은 미약하게 숨을 헐떡거리는 험프리의 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힘껏 비틀었다. 끼드득! 털썩!

카일은 험프리의 숨이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한 후에야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이제 끝났다.

“엘리. 이리 와.”

카일은 한 손을 뻗어 그녀가 손을 잡아 주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를 꼭 끌어안고 정말 고생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엘리?”

엘리샤는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기운이 썰물처럼 밀려나 움직일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엘리!”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해, 엘리!”

쿵! 카일은 가슴이 그대로 주저앉는 듯했다. 그는 순식간에 침착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방향과 공간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저 어둠으로 가득한 두려움이 그를 거칠게 휘몰아쳤다.

“엘리? 엘리! 엘리! 어디 있는 거요? 엘리!”

매튜는 이 믿어지지 않은 광경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피로 물든 채 카일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엘리샤와 그녀를 전혀 보지 못하는 듯 헤매는 카일. 매튜는 울음이 터져 나왔고 온몸의 힘이 거짓말처럼 쭉 빠져 버린 탓에 기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

그때 그녀가 가까스로 소리를 냈다. 그러자 카일이 바로 반응을 보이며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엘리샤의 몸이 흔들리더니 그에게 뻗었던 손이 힘없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스듬히 쓰러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안아 줘요…….”

“엘리!”

일라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일라이뿐이 아니었다. 에드나도 그러했다. 먼저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키안이었다. 키안은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을 멈추기 위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 소리는 정신없이 질주하던 제이슨의 귀에 화살처럼 꽂혔다.

제이슨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세웠다. 그의 시야에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지닌 사람들이 금세 가득 들어찼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제이슨은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왠지 카일과 닮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바로 대답했다.

“사우턴야드.”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숨이 워낙 가쁜 나머지 답이 짧게 튀어나왔다.

“먼저 가도 되겠습니까?”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제이슨은 금세 박차를 가할 것처럼 초조해하며 키안에게 물었다. 그러나 키안은 그 앞을 가로막은 채 제이슨을 살피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이슨은 더욱 초조해졌다. 한시가 급하다. 지금 사우턴야드는 난리가 나서 갈 길이 급해 죽겠는데……. 제이슨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말했다.

“저는 지금 급합니다. 죽기 살기로 도성으로 가서 전하를 뵈어야 합니다.”

그의 경직된 음성이 키안의 신경을 바짝 잡아당겼다. 사우턴야드……. 그때 일라이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키안. 서둘러라.”

키안은 즉시 제이슨의 앞에서 비켰고 그러자마자 제이슨은 바로 박차를 가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숲의 정적을 깨며 달리는 그 소리에 깃든 불길함에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고삐를 바짝 움켜쥐며 말했다.

“에드나, 달려야겠소. 잘 따라오시오.”

에드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일라이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사우턴야드. 그 한마디가 일라이를 뒤흔들었다. 엘리샤가 있는 곳. 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있는 사우턴야드. 일라이는 지금 자신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엘리샤의 곁으로 달리고 있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에드나는 몸을 납작하게 숙였다.

그들의 질주는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사우턴야드에서 달려 나온 또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잠시 멈춰졌다. 이내 다시 시작된 질주는 그야말로 바람보다 더 빨랐다.

카일은 엘리샤를 자신의 허벅지에 앉히고 그녀의 떨어진 고개를 어깨에 기대게 한 채 숨을 고르고 또 골랐다. 눈이 안 보여 그녀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미친 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카일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엘리샤가 불규칙적이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에게 자신을 전부 의지한 채 숨을 쉬고 있었다.

카일은 어금니를 악문 채 엘리샤의 출혈을 막기 위해 상처 주변을 커다란 손으로 꾹 눌렀다. 검이 관통했다. 하나 관통한 검을 빼낼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가 없었다. 잘못 하다가는 과다 출혈이 발생할 수 있어 그는 이리로 오고 있다는 에드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장님. 말씀하신 대로 그놈들의 시체를 전부 배에 싣고 닻을 끊어 냈습니다.”

순간 카일의 입매에 차디찬 미소가 맺혔다. 네파르나가 생각하는 최악의 치욕스러운 죽음. 영원히 바다에 갇혀 떠도는 형벌. 카일은 혼잣말처럼 차디차게 내뱉듯 말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너희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떠돌고 또 떠돌아라.”

“리지는 어떻게 할까요?”

매튜는 카일의 지시를 받아 혼란에 빠져든 사우턴야드를 수습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시체를 한곳으로 모았고 부상자들을 돌보고 간단한 치료를 진행했다. 이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는 카일의 다그침으로 인해 매튜는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이제 남은 것은 리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일의 얼굴에 순간 얼음장이 내려앉았다. 일목요연하게 모든 상황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탓이었다. 자신이 사우턴야드를 비웠을 때 험프리와 리지가 여기에 도착한 것은 우연일지 모르나 의도는 분명했다. 처음부터 엘리샤를 노렸던 것이다. 도성을 떠났을 때부터 계속 엘리샤를 따라오길 바랐던 리지였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기에 엘리샤를 위해서 리지를 붙여 놓았지만 이제 보니 리지의 검은 속셈을 자신이 제대로 도와준 꼴이었다. 엘리샤에게 그런 짓을 한 것도 모자라 험프리를 이곳으로 이끌고 오다니……. 분통이 터져 저도 모르게 엘리샤까지 내려놓고 리지의 머리통을 발로 짓밟을 뻔했다.

하지만 밟을 수가 없었다. 엘리샤의 부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딸로 받아들였어요. 하여 나는 내 손으로 언니를 죽일 수 없으니 아버지에게 맡길 거예요. 리지 역시 아버지의 딸이니까요.”

카일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분노로 어쩔 줄을 몰라 몸부림을 쳐 댔다. 죽이고 싶다.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다. 뼈를 으스러뜨려 최악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해 주고 싶다. 그때 정신을 완전히 잃었던 엘리샤가 미약하게나마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리지를 밟아 죽였을 것이다.

카일은 가까스로 자신을 다잡았다. 지독한 고통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엘리샤를 안아 주기 위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며 계속 자신을 다잡았다.

일라이의 딸. 또 다른 딸, 리지. 그래, 이대로 리지를 밟아 죽이면 제 분은 풀리겠지만 일라이는 리지가 어떤 딸이었는지, 엘리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엘리샤는 분명히 제 입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엘리샤가 너무 착하다.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특히 어릴 적 외로움을 같이 나눴던 사람은 더더욱 아끼고 좋아한다. 카일은 고개를 젖혀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카일 대장님, 리지를 어떻게 할까요?”

퍼뜩. 카일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리지가 제 몸을 감싸고 앉아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노여움이 다시 출렁거렸다. 카일은 노여움으로 달궈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싸늘히 말했다.

“묶어서 창고에 감금한다.”

“알겠습니다.”

매튜가 지시받은 대로 엉망인 리지를 질질 끌고 나가자 리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엘리샤. 살려 줘, 엘리샤. 엘리샤!”

“그년의 입을 막아!”

카일이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늑골이라도 부러져 나갔는지 몸 속 깊은 곳에서 지잉 하는 통증의 울림이 느껴졌다. 카일은 그래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요란하던 소리가 사라지자 카일은 다시 엘리샤에게 집중했다.

“조금만 참으면 어머니가 오실 거요. 조금만 참아, 조금만.”

카일은 자신보다 먼저 출발했으나 천천히 오고 있는 그들을 재촉하기 위해 전령을 계속 내보냈다. 에드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엘리샤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에드나뿐이다. 그들이 오면 그때 카일도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싫어도 눈을 붙여야 한다. 엘리샤는 그의 눈이 피로와 관계있다고 했으니 잠시 눈을 붙이면 제대로 보일 것이다. 엘리샤를 보려면 그 수밖에 없다.

하아……. 깊은 숨이 바닥을 움푹 파는 것 같다. 카일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온기. 온기가 느껴졌다. 미약한 숨결이 흘러나오는 코 밑으로 손가락도 대 보았다. 이런 중상을 입고도 소리 한 번 내지르지 않다니…….

“당신은 너무 잘 참아서 탈이야, 엘리.”

그의 손이 파르르 떨며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엘리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어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 하자 등줄기에 오싹한 통증이 내달렸다. 카일은 어금니를 악물어 신음을 삼켰다. 아…… 엘리. 나의 엘리. 나만의 엘리.

일라이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모르겠다. 엘리샤가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에드나 역시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엘리샤. 엘리샤. 나의 사랑하는 딸, 엘리샤. 그들이 열린 문을 통해 넓은 작업장에 들어왔을 때 순간 다들 얼어붙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모포를 두툼하게 깐 바닥에 앉아 있는 카일과 그에게 안겨 있는 엘리샤. 둘 다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엘리샤!”

“카일!”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바로 달렸다.

그들의 음성이 들리자 카일은 순간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가슴과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소리의 방향을 쳐다보며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에드나가 먼저 다가왔다. 그녀는 서둘러 카일의 품에 안긴 채 정신을 잃은 엘리샤를 살폈다. 엘리샤의 어깨를 관통한 검. 완전히 멈추지 못한 선혈이 아직도 가느다랗게 흐르고 있었다.

“엘리샤…… 엄마가 왔다. 엘리샤, 엄마가 왔어.”

“제 불찰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엘리가 다쳤습니다.”

“아니. 아니다, 카일. 네가 아니었으면 엘리샤는 죽었을 것이다. 고맙구나, 카일.”

일라이가 말하자 카일의 눈물이 더욱 굵게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제는 가슴이 찢어져도 괜찮을 듯싶었다. 이제는 조금 울어도 괜찮을 듯싶었다.

“엘리를 이렇게 안고 있으면 됩니까?”

순간 다들 의아해하며 카일을 쳐다보았다. 그는 에드나에게 물은 것 같은데 시선은 일라이를 보고 있었다.

“아니면 바닥에 내려놓아야 합니까?”

맙소사. 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가? 끔찍한 두려움이 몰아치자 일라이도 에드나도 순간 얼어붙은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키안이 카일의 눈 앞에 손을 흔들며 파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목메어 불렀다.

“카일…….”

키안의 음성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아챘는지 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피곤이 지나치면 잠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알려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카일. 그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듯했다. 그의 한쪽 어깨가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고 숨 쉴 때마다 저도 모르게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은 아예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에드나는 짧게 숨을 고르며 일단 주변을 살폈다. 아주 눈에 익은 궤짝이 보였다. 공작가 문장이 찍힌 궤짝.

“케이! 너도 엘리샤를 살리는 데 일조하는구나.”

에드나는 서둘러 궤짝을 끌어다 안을 살폈다. 세심하고 빈틈이 없는 케이답게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었다. 에드나는 침착해지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엘리샤에게 바짝 다가갔다. 제발 근육만 다쳤기를. 뼈는 상하지 말았기를. 그것을 확인하려면 검을 뽑아야 한다. 이대로 계속 놔두면 쇳독이 엘리샤를 죽게 할 것이다. 에드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잇새로 말했다.

“카일, 엘리샤를 그대로 꼭 끌어안아라. 검을 뽑을 거다. 엘리샤가 몸부림치지 못하게 그대로 꽉 안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카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엘리샤에게 박힌 검을 뽑을 수 있게끔 엘리샤의 늘어진 몸을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엘리. 엘리. 에드나가 천천히 관통한 검을 뽑기 시작했다. 허억! 순간 엘리샤의 몸이 움찔하자 카일은 더한 힘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쉬…… 엘리. 괜찮아. 괜찮아.”

“너무 아파…….”

“그래, 아프게 해서 미안해. 조금만 참아. 조금만.”

카일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절하게 속삭이며 엘리샤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힘들게 해서 미안해. 자꾸 참으라고 해서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참아. 조금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그 의미가 없다. 촛불이 밝혀진 소박한 방. 덧문 틈새를 막았어도 어디선가 들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으로 인해 그녀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에드나는 깊게 잠들어 있는 엘리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허한 마음을 달랬다. 리지. 리지. 리지. 에드나의 입술에 보기 드문 쓴웃음이 맺히고 말았다.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거구나. 가장 가깝다 생각한 사람이 그럴 줄이야.”

아니다. 사람이란 으레 그래야 한다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맥파든의 딸이니 당연히 맥파든처럼 마음이 깊고 충성스러운 사람일 거라고 믿어 버린 것이다. 에드나의 쓴웃음이 이제 서글프게 흐려졌다. 그것은 모순. 스스로를 한 번이라도 돌이켜봤다면 모순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에드나의 아버지는 폭군 듀케인 3세이니 그랬다.

하지만 너무도 뜻밖이었다. 일라이와 에드나는 리지를 딸로 여겼고 아낌없는 애정을 주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러하다니…….

“우리의 애정이 너에게 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창고에 갇힌 리지를 본 순간, 리지는 일라이와 에드나에게 쉴 새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지난 행적을 토설했다. 카일이 뒤에 있어서 그런지 리지는 연신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덜덜 떨면서 두서없이 실토했다. 그 말을 듣는 일라이와 에드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제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날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리지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라이와 에드나는 알 수 있었다. 세 명의 남자와 세 구의 시체. 그들이 발견했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리지가 미우면서 증오스러웠다. 어떻게 엘리샤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친동생처럼 따르던 엘리샤에게 어떻게! 더구나 험프리를 이곳까지 안내한 사람이 리지였다니. 일라이는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비는 리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의 심정이 어떨지……. 에드나는 자신의 가슴이 무너진 것처럼 일라이의 가슴 또한 무너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살려 주세요. 저 죽고 싶지 않아요. 잘못했어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에드나. 먼저 나가 있으시오.”

에드나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몸을 움직였다. 카일이 따라 나오려고 하자 일라이가 그를 붙잡았다.

“카일은 여기 있어라. 네 도움이 필요하다.”

에드나는 눈을 감았다. 나중에 두 사람이 창고에서 나왔을 때 카일이 숨을 멈춘 리지를 안고 나왔다. 리지는 수장됐다. 리지는 이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에드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다. 안식이 무엇인지 리지는 모를 것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녀가 받은 애정이 독이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리지로 살면 되는 것을 엘리샤로 살려고 했으니……. 리지가 받은 모든 것은 다 그녀를 죽이는 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 밖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이 열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카일이었다.

“엘리의 목욕물이 다 준비됐습니다, 어머님.”

에드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엘리. 카일이 이렇게 부를 때마다 엘리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카일은 늑골에 금이 간 듯했다. 몸을 굽히는 것을 힘겨워했다. 그런데도 언제 상처를 입었는지, 무엇으로 맞았는지, 찔렸는지도 그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아니, 제 몸이 다치고 아픈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엘리. 엘리. 엘리. 이렇게 한 사람만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움직이다니.

‘정말 내 딸의 안목이 아주 정확했구나. 엘리샤. 자신보다 너를 더 사랑하는 남자구나, 카일은.’

“물을 가지고 들어와라, 카일.”

카일은 남에게 아무것도 맡기지 않았다. 저 힘든 몸으로 굳이 목욕 시중까지 하겠다며 직접 나르고 있었다. 무거운 물을 들고 움직일 때마다 아프면서. 옆구리가 욱신거리고 등줄기에는 오싹한 통증이 내달리면서 저렇게 눈이 보이자마자 고집을 부려 대다니.

“엘리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상처를 돌보자고 붙잡는 키안을 뿌리치며 카일이 한 말이었다. 아무도 카일을 말릴 수 없었다. 죽을 것 같다는데, 엘리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데 뭘 어찌하겠는가!

“나가 주십시오, 어머님.”

순간 팔소매를 걷던 에드나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제 아내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에드나는 순간 가슴이 너무 뭉클해서 눈시울까지 뜨거워지고 말았다.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이렇게……. 에드나는 두말하지 않고 드레스 자락을 끌며 그들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카일은 문이 닫히자 몸을 살짝 굽혀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니오?”

카일은 다소 심술궂게 중얼거리며 엘리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으나 에드나는 이제 그녀가 괜찮다고 말해 주었었다. 다만 아직 잠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목욕할까, 엘리?”

카일은 이불을 들춰내고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불로 상처를 지진 붉은 흔적이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카일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상처를 볼 때마다…… 자꾸 숨이 떨렸다. 하지만 카일은 이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이다. 덧문 틈새를 막았어도 그래도 차가운 바람이 어디선가 계속 유입된다. 그녀가 감기라도 걸리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그렇다고 씻기지 않으면 평소 깔끔한 그녀가 상당히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잠들어 있어야 한다.

카일은 적당히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알맞게 짜 엘리샤의 발부터 닦기 시작했다. 그녀의 앙증맞은 발가락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닦았다. 날씬하고 긴 종아리에 이어 허벅지를 닦고, 그녀의 납작한 복부도 부드럽게 문질러 닦아 냈다. 복부를 지나 분홍의 정점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 젖가슴을 닦고 이어 상처 없는 어깨를 닦았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정말 본 적이 없소, 엘리.”

카일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닦기 시작했다. 닦으면서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 또 하나의 손가락을 닦은 후 그 손가락 끝에도 입을 맞췄다. 손등에도 손바닥에도 입을 맞췄다.

그녀의 여위고 핏기 잃은 얼굴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소중하게 닦아 주었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코끝에 입을 맞추고 감겨 있는 두 눈에도 입을 맞췄다.

어깨의 상처 주변을 닦은 후 카일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보다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씻겨 냈다. 이어 그녀를 살짝 안아 일으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등을 닦고, 엉덩이도 닦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겨 주었다.

카일은 그녀의 몸을 다시 마른 수건으로 닦아 내고 깨끗한 잠옷을 입혔다.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가벼워 오히려 화가 조금 치밀어 올랐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 뒷정리를 하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드나가 보였다.

“계속 여기 계셨습니까? 이제 쉬셔야지요.”

에드나는 온화하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맙다, 카일.”

“무슨 말씀을…….”

“고맙다, 카일.”

카일의 몸에는 시꺼먼 멍 자국이 가득이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면서 아픈 기색도 없이 엘리샤만 보살피는 카일. 눈으로 인해 불안할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에드나는 손을 내밀어 카일의 손을 가만히 잡아 보았다.

이런 카일을 두고 떠나야만 한 키안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는 이 엄청난 일의 전말을 알렉스에게 직접 보고하기 위해 도성으로 떠나야 했다. 키안은 에드나에게 수차례 물었었다. 카일의 눈을 어떻게 할 수 없냐고 물었었다. 아비로서의 아픔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였다.

그의 눈에 대한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에드나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카일의 상처는 엘리샤가 가장 정확한 판단을 했고 가장 적당한 처치를 했다. 시간이 가서 상처가 아물고 피로가 완전히 풀리기를 기다릴 뿐. 카일의 눈은 시간이 약이었다.

에드나가 일라이 곁으로 돌아간 후 카일은 힘겨운 몸을 엘리샤 곁에 눕혔다. 그는 밤이 지배하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그리고 그는 나직하게 깊이 잠들어 있는 엘리샤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아버지가 도성으로 돌아가셨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시며 가시는데 그 느낌이 참…….”

카일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키안이나 카일이나 둘 다 무뚝뚝한 성격이라 살갑게 서로를 끌어안거나 서로 미안하다 말하지 않고, 호들갑 떨며 부상을 걱정하지 않는다. 키안은 카일이 기절한 것처럼 간신히 눈을 붙였을 때 그 곁을 지켰고, 이윽고 카일이 깨어나 피로가 조금은 가신 눈으로 키안을 똑바로 봤을 때, 키안은 낯선 표정을 지었었다. 키안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둘은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었다. 어느새 키안을 닮은 카일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갔다.

“못난 모습 보여 죄송합니다.”

그러자 키안이 손을 내밀더니 어색하게 카일의 손을 잡고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손등을 가만히 토닥거렸다. 카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낯선 느낌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그때 키안이 크게 카일의 몸을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몇 번이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말을 했다.

“미안하다, 카일.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

카일은 손등으로 저도 모르게 뜨거워진 눈을 문지르며 엘리샤에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가시다가 또 뒤를 돌아보시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달려가고 말았어. 그리고 말했지.”

“아버지.”

“카일. 그렇게 뛰면 상처가 덧나잖나! 이 녀석은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아.”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에서 내려 카일의 상태를 확인하던 키안이 순간 멈칫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말이야…… 우시더군. 한 번도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카일은 힘겨운 몸을 비스듬히 돌려 엘리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랬어. 생전 처음 아버지 앞에서 눈물이 나더군. 그것도 아이처럼…….”

카일은 손을 내밀어 엘리샤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그를 울게 했던 키안의 눈물을 가슴 깊은 곳에 새겼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깊은 새벽, 일라이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깜빡거렸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에드나.”

일라이는 손을 뻗어 에드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누가 온 것 같지 않소?”

에드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드나가 서둘러 촛불을 밝히는 동안 일라이는 문을 열었다. 가슴이 뛰었다. 기분 좋은 느낌으로 가슴이 힘차게 뛰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아…….”

일라이는 문을 열고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모습이 정말 현실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랬다.

엘리샤는 팔을 벌려 일라이의 너른 품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아빠…….”

순간 일라이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궈지고 말았다. 아빠……. 알렉스와 케이는 어릴 때도 그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샤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한결같이 아빠라고 불렀다. 나의 어린 딸. 나의 사랑스러운 딸, 엘리샤……. 일라이는 고개 숙여 자신에게 안겨드는 엘리샤를 온화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 엘리샤. 아빠다, 아빠.”

“아빠…….”

엘리샤가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지난 시간 피에 물든 자신이 잊히는 듯했다. 평생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랑과 애정이 충만한 가장처럼 느껴졌다. 엘리샤의 아빠라는 말은 일라이에게 그런 의미가 있었다. 엘리샤 앞에서는 어릴 적 일라이가 원했던 평범한 삶이 보였다. 엘리샤는 그런 딸. 알렉스나 케이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나의 소중한 딸.

일라이는 엘리샤를 더욱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너무 미안했다. 엘리샤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음뿐이었나 보다. 엘리샤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엘리샤가 리지를 본능적으로 감싼 이유를 일라이와 에드나도 그렇게 판단했다. 스스로 기억을 닫았던 것은 리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자신의 외롭던 시간을 함께해 줬던 리지에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보상과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두기 위함이었다고 판단했다.

나랏일과 영지 일에 바빠서 엘리샤를 혼자 두었던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엘리샤만을 위한 시간을 조금만 더. 어차피 여기가 끝이라고, 마지막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내려왔지만 엘리샤의 참혹한 진실을 보게 되니 저절로 기도하게 됐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에드나가 다가와 두 사람을 함께 끌어안았다.

“엄마, 죄송해요. 마음 아프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 딸. 잘 견뎠어. 정말 잘 견뎠어. 이 엄마도 너처럼 견디지 못했을 거야. 너무 잘했다, 엘리샤.”

일라이는 에드나의 가늘게 떨리는 몸을 통해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일라이는 한 팔을 풀어 에드나와 엘리샤를 동시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더욱 간절해졌다. 마지막 여정. 조금만 더……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허락해 주시길. 아직 엘리샤의 건강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아직 엘리샤의 행복을 보지 못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허락하소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뚝뚝한 카일의 말이 아니었다면 세 사람은 문 앞에서 이렇게 계속 서 있을 뻔했다. 일라이는 안았던 팔을 풀고 이번에는 카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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