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알렉스는 아렌의 보고를 듣다가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카일입니다. 카일이 도성에 와서 벌써 여덟 명이나 곤죽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래서 고발이 들어왔단 말이지?”
아렌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보고를 올렸다.
“매년 1월 마지막 날, 전국적인 보석 경합이 도성에서 있습니다. 물론 도성 보석 조합의 대단한 용병들 때문에 항상 독점으로 끝나지만 말입니다.”
독과점. 이것은 쉽게 근절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과 나누는 것을 뺏기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가진 자들의 특징이었다. 더구나 얼스월드 각종 조합들은 그 유래가 길고 깊었으며 단결력도 아주 뛰어났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해 냈고 오랫동안 지켜 왔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독점이 당연해 보였고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었다.
그러나 얼스월드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지금, 그들의 이기심이 알렉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더 많은 인재들을 원하는 알렉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그 조직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세금 문제도 그렇지만 이미 그들은 당연히 그런 존재라고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조직과 맞설 수 있게끔 자율 경쟁 지역을 만들어 냈다. 그랬더니 거기도 보석 장인들이 독점해 폐쇄적인 사회로 만드는 바람에 알렉스의 취지를 어느새 깡그리 잊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카일이 거기에 도전장을 냈다는 건가?”
“네. 아주 작정을 하고 온 듯합니다. 그가 뒤에서 싸우는 동안 사우턴야드 장인들이 경합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훗! 알렉스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역시 카일이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 역시 카일이다. 이제 카일이 알렉스가 풀지 못한 숙제의 물꼬를 터 주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허허허. 알렉스의 웃음이 이번에는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이번에는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였다.
이제 평민이라면 평민이라 해야겠지만 카일은 분위기를 읽는 데 남다르다. 그런 카일이 지금 이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거 아니겠는가? 아니면 알았다 해도 알렉스를 믿고 자신이 정한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어쨌든 알렉스가 분위기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일 것이다.
“한 개도 아닌 두 개나 무서운 거울이 생기다니. 좋군, 아주 좋아.”
아렌은 모처럼 편안한 웃음을 짓는 알렉스를 다소 의아하게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까지 봤던 카일과 달라 조금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키안 백작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인생을 막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하하하하. 알렉스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 어떤 모습이든 지금 보이는 모습 역시 카일이다. 그는 카일일 뿐이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그의 가족, 카일일 뿐이다.
“경합이 완전히 끝나면 그때 카일을 데리고 오라.”
“흐뭇하십니까? 카일이 싸움꾼이 된 것이?”
아무래도 아렌은 카일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렉스를 원망스럽게 보며 대담하게 물었다.
“인생은 원래 싸움의 연속 아닌가? 카일이 자신의 삶을 위해 싸움을 하는 건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건가?”
“그래도…….”
알렉스는 아렌의 걱정을 모르지 않았다. 아렌은 지금 카일의 모습이 너무 당황스러운 것이다. 도성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이자 노스턴야드 후계자인 그가 왜 거리에서 저렇게 시정잡배들하고 섞여 싸움을 해 대는지,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아렌은 다른 것은 다 둘째 치고 그저 인간적으로 카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의 눈으로 직접 보게 할 수밖에.
“일단 고발이 들어왔으니 적당히 조사하는 척은 해야겠지?”
아렌은 그 말을 금세 알아차렸다. 가서 카일을 직접 살펴보라는 뜻이었다. 아렌은 알렉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불쌍한 놈. 키안 백작이 봤다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하셨을까…….”
아렌의 중얼거림을 들은 알렉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일라이와 에드나. 그들은 지금 웨스트필드에 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키안, 오웬, 크리스, 필란, 그리고 필리가 있다. 천천히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라이의 건강이 좋지 않아 며칠째 계속 웨스트필드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 했다. 그 휴식이 끝나면 그들은 사우턴야드로 향할 것이다.
“이 소탕전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알렉스와 예시카는 일라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 뵐 것이다. 다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환한 표정의 레오가 재빨리 들어왔다. 그 표정에서부터 무슨 소식인지 알 수 있었다. 알렉스의 표정 역시 순식간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전하, 네파르나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그래?”
“험프리의 기세가 완전히 꺾여 이제 세 가문의 세력이 거의 대동소이하기에 에몬 지휘관이 귀국을 하겠다고 알려 왔습니다.”
“그렇군.”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에몬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험프리의 세력을 꺾기 위해 에델로 후작의 편을 들 것과 세 가문의 세력이 비슷해졌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네파르나를 떠나 귀국하라 명령했었다. 그리고 네파르나를 떠날 때 자신을 오랫동안 속인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 주기 위해 험프리를 잡아 오라 했었다.
알렉스는 이제 조금 느긋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이제 예시카와 케이만 돌아오면 된다.
네파르나에 있는 에몬 지휘관이 급하게 두 번째 전령을 파견한 것은 얼스월드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들이 탄 배가 바다 폭풍에 휩쓸려 난파되는 바람에 험프리가 네파르나에서 도주했다는 소식은 얼스월드에 전해질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알렉스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불길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카일…….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할 줄이야.”
알렉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연신 감돌았다.
이번에 도성에서 열린 보석 경합은 파란, 그 자체였다. 도성 보석 조합에게 압도적으로 눌렸던 사우턴야드 장인들이 치열한 경합 끝에 상위권 보석들을 상당 부분 차지했다. 그것을 이끌어 낸 사람이 바로 카일이었다.
“카일의 선택이 궁금하군.”
알렉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가 오면 물을 것이다. 카일은 아직 모르지만 그에게는 이제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열려 있다. 키안이 자신의 후계자는 카일밖에 없다는 것을 케니스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노스턴야드일까 아니면…….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날렵한 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지나 알렉스가 앉아 있는 긴 식탁 곁으로 다가왔다. 알렉스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앉아 빠르게 다가오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래도 날카로운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알렉스가 보기에는 치기 어린 모습이 엿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의 카일은 전혀 아니었다. 완전한 남자의 모습이자 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도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윽고 알렉스 앞으로 다가온 카일이 깊게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알렉스는 그에게 자신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카일이 앉자 알렉스는 직접 술을 따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잔은 나에게 서운했던 것을 한 번에 털어 버리라 주는 잔이다, 카일.”
카일은 그 잔을 받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알렉스는 계속 그를 살펴보았다. 성장했다. 달라졌다. 이제 완전히 한 남자, 그 자체였다. 그 성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 알렉스가 툭 말을 던졌다.
“도성 분위기는 어땠나? 낯설던가?”
“제가 꼭 알아야 할 것 같지 않아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전 제 할 일만 할 뿐입니다.”
알렉스는 그 답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다시 한 잔 따라 주며 말했다.
“한 잔으로 털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지. 마셔라, 카일.”
카일은 이번에도 아무런 말 없이 알렉스가 주는 잔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을 때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어떤가? 서운함이 좀 털리는 것 같나?”
카일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알렉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솔직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털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붙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단히 벼려진 검날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원망을 했을까, 얼마나 많은 절망을 했을까……. 더구나 엘리샤를 데리고 떠나야 했으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알렉스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막상 카일을 이렇게 직접 보니 가슴이 뜨거워져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엘리샤. 엘리샤는 행복해할 것임을.
‘네 남자가 이렇게 단단한 거목감이었구나. 밑바닥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자였어.’
그러다 갑자기 알렉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부릅떴고 이어 빠르게 몸을 일으켜 손을 쫙 뻗어 카일의 왼손을 움켜쥐었다.
“카일!”
그의 새끼손가락 두 마디가 사라져 있었다.
카일은 별거 아니라는 듯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손가락 마디를 잃은 대신 제가 엘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알렉스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기사에게 손이란 생명과도 같다. 검을 쥐느냐 못 쥐느냐. 더구나 카일처럼 왼손잡이에게 왼손 부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엘리가 저를 치료했고, 제 의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알렉스는 그의 양손을 다 살펴보았다. 도성에 있을 때부터 카일은 검술을 좋아한데다가 즐겨 하고 또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런 게 틀림없다. 원래도 단단했을 손바닥에 새로 생긴 굳은살이 아프게 와 닿았다.
“양손을 쓰나?”
“엘리처럼 양손을 씁니다.”
그렇지. 엘리샤도 양손을 쓴다.
“아직 완벽하게 익숙하진 않지만 싸우는 데 아무런 지장 없습니다.”
순간 알렉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지.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 이번 보석 경합에서 카일의 손에 곤죽이 된 사람은 거의 열다섯 명에 가까웠다. 도성 용병들 역시 명운이 걸렸다는 것을 알았기에 카일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고 카일은 그것을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싸움 구경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도성 용병들은 압도적인 실력차로 두들겨 맞았고, 아렌의 조사로 카일을 향한 고발 역시 위증이 섞인 거짓말로 판명이 되어 오히려 된서리를 맞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카일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알렉스가 부른다는 전언을 받았을 때, 그는 알렉스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 예상했었다. 케니스와 메리나의 간략한 결혼에 대해 들었을 때, 키안이 케니스를 후계자로 세우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엘리는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특히 곁에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응?”
카일은 엘리샤가 리지와 얽힌 일을 이야기했을 때 그녀가 왜 스스로 기억을 닫았는지 자신만의 느낌으로 추려 보았었다. 그가 보기에 엘리샤는 외로웠던 것이다. 그녀의 신분으로 인해 항상 혼자였던 것이 그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외로움으로 사무쳤던 것이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녀에게 친구가 없었다는 것을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샤가 도성으로 올 때마다 카일만 따라다니며 놀자고 졸라 댔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카일, 카일, 카일. 그녀는 카일만 찾았고, 카일만 따라다녔었다. 그것은 그녀의 외로움을 유일하게 달래 줄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엘리샤의 마음을 리지의 함정이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카일도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러니 엘리샤의 충격은 그 수십 배, 수백 배에 달했을 것이다. 그것도 친언니처럼 믿고 있던 사람의 배신과 거짓말로 인해서였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을 닫은 데는 충격과 두려움, 혼란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샤는 은연중에 리지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는 카일에게 그날의 일 전부를 다 말하고 덧붙였었다.
“언제, 어디서 리지를 봐도 당신은 손대면 안 돼요.”
당연히 처참하게 죽여 줄 생각으로 가슴이 들끓어 올랐던 카일에게는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리지는 착각하고 있는 듯해요. 내가 없으면 자신이 아버지의 딸이 될 거라고요.”
엘리샤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말했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딸로 받아들였어요. 하여 나는 내 손으로 언니를 죽일 수 없으니 아버지에게 맡길 거예요. 리지 역시 아버지의 딸이니까요.”
카일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엘리는 누군가가 배우고자 할 때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곁을 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알렉스는 카일의 말을 듣기만 했다. 자신의 여동생, 엘리샤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듣고 있자니 엘리샤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미처 몰랐었다. 엘리샤가 그런 것을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지…….
“그리고 엘리는 장사를 하고 싶어 합니다.”
순간 알렉스는 다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엘리샤가 장사를? 그런데 왠지 아주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알렉스는 카일의 답이 무엇인지 알 만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엘리샤가 욕심이 아주 많군.”
“그렇습니까? 전 의외로 엘리가 너무 욕심이 없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카일은 무심코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엘리는 너무 욕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놈을 사랑하는 거겠지만 말입니다.”
엘리…… 그녀가 그립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녀도 나를 그리워할까? 드디어 내일 새벽이면 모든 일정을 끝내고 사우턴야드로 출발할 것이다.
알렉스는 희미하지만 그리움이 듬뿍 담긴 카일의 미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렇게 미소를 지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애칭, 엘리. 엘리샤를 엘리라고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그 애칭이 아주 특별하게 들렸다. 사랑……. 독점……. 앞으로도 평생 엘리라는 애칭은 카일만이 부를 수 있는 독점적인 애칭처럼 들렸다.
알렉스는 엘리샤가 받고 있는 깊은 사랑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엘리샤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셈인가?”
카일은 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뇨. 저는 엘리가 사랑만 하며 살게 할 겁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답이 튀어나왔으니 그랬다. 일라이였다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받쳐 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자신이었다면 그래도 조심조심 하자고 했을 거고, 케이였다면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일의 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엘리샤와 상당히 충돌하겠는데?”
“네, 가끔 합니다. 엘리가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래도 듣게 해야죠.”
하하하하. 알렉스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남다르다. 자신이 부담스러울 텐데도 저렇게 자신만의 생각을 담담하게 피력하다니. 엘리샤가 선택한 남자는 정말 남다른 남자이자 가장 제대로 사랑을 표현할 듯한 남자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엘리샤를 마음껏 사랑해 줄 듯하다. 웃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기뻤다. 엘리샤가 받고 있는 카일의 사랑이 마냥 기뻤다. 엘리샤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 뿌리박고 있던 걱정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한 손으로 슬쩍 이마를 가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카일은 선두에 서서 새벽길을 열었다. 밤늦게까지 알렉스와 술을 마시고 짧은 휴식을 취했다. 피로가 쌓이고 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성과가 좋아 돌아가는 길이 결코 힘들지 않을 듯했다. 카일은 말고삐를 단단히 거머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표정이 밝았다. 며칠 동안 내내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냈던 이들의 얼굴이 이제 완전히 펴졌다. 어깨도 기세등등하게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카일은 피식 웃으며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장인들이 의뢰받은 보석에 대한 꿈을 꾸는 동안 용병들도 앞으로 벌게 될 돈에 대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도성 용병들을 제압하는 카일과 일행을 지켜봤던 도성 도매상인들이 은밀히 카일에게 연락을 취해 왔었다. 아직은 도성 용병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승리로 도성 용병들이 오랫동안 얼스월드의 길을 독식했던 것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지. 그 시작이 아주 좋아.”
그렇다. 시작이 아주 좋다. 이제 카일은 몇 번이고, 수십 번이고 부딪쳐 자신들의 실력을 계속 증명하면 된다. 서두르지 않고 탄탄하게 기초부터 다져서 그렇게 서서히 판도를 바꾸면 된다.
카일은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은가?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전사로서 무공을 쌓을 수 있는 기회. 그동안 배웠던 것을 모두 다 펼칠 수 있는 기회. 바로 전투! 카일은 담담하게 답했다.
“저와 엘리는 저희만의 판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끔 전하께서 계속 저희를 보호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카일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카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고, 알렉스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카일은 맨 뒤에서 따라오는 매튜를 불러들였다.
“매튜.”
매튜가 바로 그의 명령에 따라 가까이 오자 카일은 냉랭하게 말했다.
“시간을 한번 단축해 볼까?”
“시간을요?”
“이 정도의 수레를 끌고 얼마나 빨리 사우턴야드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한데.”
시간 단축. 카일은 그것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가벼운 몸으로 달리는 것과 무거운 짐을 이끌고 달리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전에 사우턴야드로 갔을 때 걸렸던 시간은 20여 일. 그것을 15일까지 단축시키면 어떨까? 웨스트필드를 통과하지 않고 계속 숲길로 달리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반드시 시간 단축을 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카일은 알렉스에게 그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엘리샤를 보러 가시는 중이다.”
“아…….”
“키안 백작도 간다.”
“알겠습니다.”
“크리스도 오웬도 필란, 필리도 간다.”
카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듯했다. 꼭 마지막 여정처럼 들렸다.
“카일.”
“네, 전하.”
“아버지가 그곳에 있는 엘리샤를 보고 싶어 하신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얼마나 빨리 말씀이십니까?”
“15일 안에 도착하자.”
순간 매튜가 기겁을 하며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자 카일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꼭 그래야 하는 이유는 첫 번째, 우리의 역량 시험이고, 두 번째, 일라이 공작님께서 오신다. 그분보다 우리가 늦게 도착하면 되겠는가?”
이번에는 매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라이 공작님이?
“달릴 수 있겠는가?”
“하겠습니다.”
일라이 공작이 온다는 말에 매튜는 무조건 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조건 달린다.
그들이 무거운 수레를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고 달려 웰든 영지에 막 들어서던 그때, 사우턴야드에는 낯선 방문자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 방문자들은 부두가 없는 사우턴야드의 특징으로 인해 여러 척의 작은 배에 옮겨 타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새벽을 틈탄 배는 미끄러지듯 물살을 갈랐다. 그중 한 척이 단연 앞장서 있었다. 그 배에는 검은색 외투를 입은 리지가 있었고, 뒤에 따르는 배의 선두에는 검은색 천을 뒤집어쓴 험프리가 있었다.
해안을 경계하던 용병은 갑자기 나타난 배에 경계심을 발동시켰다.
“멈춰라!”
리지는 그 목소리를 즉시 알아들었다.
“루? 루 맞아요?”
“누구냐!”
루는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에 당황하고 말았다.
“나예요, 리지. 엘리샤 님이 가지고 오라 시킨 것과 함께 이제 돌아왔어요.”
루는 리지라는 말에 안심을 하며 같이 경계를 서던 용병들에게 괜찮다고, 엘리샤의 하녀 리지라고 소리쳤다. 이어 루는 리지가 탄 배가 근접하자 배를 끌어 주기 위해 첨벙첨벙 물속을 걸어 다가가며 물었다.
“물건이 많습니까? 저희가 돕겠습니다.”
리지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도움 감사히 받을게요. 뒤편에 있어요. 좀 도와주세요.”
루와 몇 명의 용병들은 아무 의심 없이 리지를 배에서 내려 주고 이어 뒤를 따라 근접하는 배로 다가갔다. 새카만 천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물건이 제법 많아 보였다. 루가 먼저 손을 뻗어 검은 천을 젖히는 순간. 파앗! 핏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짙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고 순식간에 전신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순간 엘리샤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앉아 양손으로 제 몸을 감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가장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하아…….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밤새 식은땀이라도 흘렸는지 머리카락도 축축하게 손에 감겼다. 기분 나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이렇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다니…….
엘리샤는 양손으로 축축하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올리며 비어 있는 옆을 바라보았다. 카일…….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자리를 쓸어 보았다. 오늘따라 그가 그립다. 엘리샤는 비어 있는 그의 자리를 계속 쓸어 보았다. 쓸어 보고 또 쓸어 보고. 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샤 님. 잠깐 나와 보십시오.”
엘리샤는 의아한 마음에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에서 나왔다. 두터운 양말을 신은 발로 나무로 된 바닥을 밟고 문가로 다가갔다.
“엘리샤 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순간 빗장을 치우려고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왠지 목소리의 억양이 거슬렸다. 마치 타국의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느낌이…… 뭔가가 차갑고 매끄러운 것이 발목을 휘감는 듯했다. 느낌이 그러했다. 마치 뱀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내가 검을 어디에 뒀더라?’
저도 모르게 검부터 떠올렸다. 그녀는 저절로 떨리는 숨을 내쉬며 침실로 소리 죽여 걸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느낌이 안 좋다. 이런 느낌은 꼭…….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침착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허리에 검과 채찍을 서둘러 차고, 신을 신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입매를 단단히 굳힌 채 걸음을 옮기려 할 때 그 소리가 들렸다.
“엘리샤.”
그녀의 숨이 갑작스럽게 흔들렸다.
“엘리샤. 어서 이리 나와.”
엘리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문 너머의 그녀를 노려보듯 뚫어지게 문을 쳐다보았다. 리지…… 리지……. 엘리샤는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엘리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명 소리. 애원하는 소리. 울음소리. 죽음의 소리. 엘리샤는 손을 뻗어 빗장을 벗겨 냈다. 삐그덕. 문이 열리고 어스름한 새벽이 그녀에게 왈칵 쏟아졌다.
“오랜만이군, 엘리샤.”
엘리샤는 리지와 그녀 뒤에 서 있는 남자, 험프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저절로 그가 떠올랐다. 카일……, 나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나 다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을까?
엘리샤는 순식간에 채찍을 뽑아 들었다. 휘익! 새벽을 가른 채찍이 험프리의 목을 뱀처럼 노리며 날아들었다. 챙!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를 찔린 험프리가 ‘앗!’ 소리도 내지 못할 때 그의 뒤에 있던 수석 기사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 엘리샤의 채찍을 받아쳤다. 훗! 엘리샤는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한 발로 도약했다. 그녀는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채찍을 휘둘러 다시 험프리를 빠르게 공격해 들어갔다. 채챙!
“엘리샤! 나를 죽일 셈이야?”
다급한 외침이 허공을 찢어 냈다. 엘리샤는 곁을 돌아보지 않았다. 리지. 험프리를 죽이지 못하면 어차피 죽는다. 험프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오로지 하나. 그것도 리지와 함께 나타난 것에 그녀는 다른 이유를 부여하지 않았다. 둘을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죽는다…….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엘리샤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휙!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가르며 또다시 험프리의 뒷덜미를 후려쳤다. 크헉! 험프리의 비명과 동시에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엘리샤는 기세를 잡아 채찍을 검처럼 사선으로 내리쳤다. 챙! 한 개의 채찍과 두 개의 검이 동시에 부딪쳤다. 엘리샤는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엄청난 힘을 재빨리 손목을 뒤로 젖혀 와해시키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가 한 발로 가볍게 도약했다. 그러고는 험프리의 두 눈을 노리며 채찍을 휘둘렀다.
험프리는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눈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피하지 못해 관자놀이가 화끈거렸지만 눈은 무사했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엘리샤가 이렇게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자는 그저 침대에서만 쓸모 있는 존재라 여겼던 험프리였다.
험프리는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는 엘리샤를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불을 질러라!”
아아악! 엘리샤도 이번만큼은 그 소리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 비명 소리는 심장이 비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크게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언덕에는 그녀가 거둔 아이들이 사는 집이 있었다. 그 집 앞에 험프리의 기사가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쓴 아이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설마…… 설마……. 엘리샤의 두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안 돼. 안 돼, 제발!”
“태워 버려!”
“안 돼!”
엘리샤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안 돼. 안 돼. 그녀가 채 세 걸음도 옮기기 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이의 몸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화르르륵! 아아아악! 아이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어둠의 장막을 찢어 냈다.
“저 아이들을 다 죽여야 네가 내 말을 들을 준비를 할까, 엘리샤?”
엘리샤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도 비명을 지르며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질러 대면서 헤매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릴 뿐이었다. 엘리샤는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그 아이의 허리를 채찍으로 감아 그대로 눈 속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몸을 날려 다급한 손으로 눈을 퍼 아이의 몸에 마구 끼얹었다.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았다. 기름이 다 탈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무 소용 없었다.
아이의 거친 숨이 그녀의 귀에 천둥처럼 울리고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허공에 흩어졌다. 비명 소리. 고함 소리. 울음소리. 죽음의 소리. 엘리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는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의 몸부림이 천천히 멈춰지자 엘리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팔을 뻗어 새카맣게 타 버린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 문 앞에 있는 리지와 험프리를 보자마자 바로 위기를 알아차렸고, 험프리를 죽여야 살아남아 카일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주르륵. 볼이 타는 듯한 뜨거움이 흘러내렸다. 혼자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이윽고 그녀는 품에서 죽은 아이를 내려놓고 몸을 바로세워 험프리를 돌아보았다.
“카일은 어디 있나?”
험프리는 자신에게 잊지 못할 치욕을 새긴 카일도 원했다. 그의 심장을 엘리샤가 보는 앞에서 꺼내 발로 밟고 싶었다.
엘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시선을 멀리 두었다.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동쪽에서 붉은빛이 대지를 비추자 기이하게도 소리가 더욱 잘 들리는 듯했다. 새벽의 기습.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잠은 가장 달콤하다. 그 달콤함이 이제 악몽으로 변해 버렸다. 엘리샤는 아이들이 사는 집 앞에 서서 험프리 수하들의 접근을 제 몸으로 막은 채 언덕 아래의 참상을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여자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엘리샤는 두 눈을 가늘게 떠서 멀리 바라보았다. 한 집에서 건장한 남자가 붙잡혀 끌려 나오고 이어 그 뒤를 아내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따라 나온다. 그리고 붉은빛이 곱게 물든 골목에서 그들은 남자의 가슴을 무참하게 찔렀다. 엘리샤는 움찔했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전쟁일까? 말로만 듣던 전쟁의 참상일까? 얼스월드가 지금 침략을 당한 건가? 의문도 잠시. 또 한 가족이 끌려 나온다. 남자를 붙잡아 무릎을 꿇리자 여자가 필사적으로 제 몸을 이용해 남자를 감싸안는다. 푹! 엘리샤는 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할 텐데…….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카일은 어디 있나?”
험프리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엘리샤의 시선을 다시 사로잡았다. 엘리샤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언덕 위로 누군가 헐레벌떡 올라오더니 곧장 험프리에게 뭔가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호오. 그래? 그놈의 명줄이 꽤나 질기군. 하필 이럴 때 자리에 없다니.”
엘리샤는 험프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멈추게 해야 한다. 그의 악랄함에서 사람들을 빼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이윽고 엘리샤는 입을 열었다.
“멈추세요, 험프리.”
험프리는 그녀의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에 순간 기가 질리고 말았다. 이 꼴을 보고도 저런 음성이 나오나 싶었다. 하나 험프리는 한 손으로 엘리샤에게 당한 상처를 꾹 눌러 지혈하며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내게로 오면 저 사람들을 살려 주겠다!”
엘리샤의 입술에 순간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을 본 험프리는 또다시 기가 질리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엘리샤는 험프리와 그의 뒤를 둘러싼 기사들의 실체를 보자 저절로 미소가 나오고 말았다. 이제 대지는 빛으로 가득했다. 그러자 어둠에 감춰졌던 저들의 초췌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마치 필사의 탈출을 한 것처럼 생기를 잃은 눈과 상처 자국들. 오랫동안 굶주린 티가 나는 몰골. 저들은 지금 도주 중인 것이다. 네파르나의 총독 험프리가 지금 도주 중인 것이다.
그를 이렇게 궁지로 밀어넣은 사람. 험프리가 도주하는 이유는 분명 알렉스에게 있을 것이다. 알렉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 그 정치적인 이유는 알고 싶지 않다. 그것은 알렉스의 영역. 험프리가 여기에 나타난 것은 알렉스와 협상하기 위해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전쟁은 아니구나. 알렉스를 피해 도피하는 중인가요, 험프리?”
그러자 험프리 등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이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빙그레 웃으며 이번에는 곁에 서 있는 리지를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과 피로 물든 드레스. 두건이 벗겨지는 바람에 드러난 볼썽사납게 엉켜 있는 머리카락. 겁에 질린 눈과 달달 떨며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이.
“우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군요. 내가 돌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리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그녀의 정신과 혀도 앗아 간 듯했다.
“엘리샤!”
험프리는 고함을 버럭 질러 엘리샤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어떻게 저렇게 담담할 수 있는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협박을 가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입술을 채 떼기도 전에 엘리샤가 먼저 말했다.
“사람들을 전부 다 사우턴야드 밖으로 내보내 주세요.”
“뭐라고?”
엘리샤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사람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 시간이다. 저들을 구원해 줄 카일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사람들을 무사히 내보내 주면 기꺼이 당신이 알렉스를 만날 수 있도록 돕겠어요.”
험프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속마음을 듣기만 했다. 엘리샤가 이런 여자였던가? 저 뛰어난 채찍 기술. 불탄 시체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불구하고 지극히 담담한 모습. 망할……, 너무 매력적이다. 그러자 순간 그의 아랫도리가 반응을 시작했다.
엘리샤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마치 그의 속마음을 읽는 것처럼 잔잔하게 말했다.
“나를 건드리면 둘 다 죽게 될 거예요.”
연거푸 정곡을 찔린 험프리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망할 년 같으니라고. 어디서 감히 협박이야! 누가 네 말에 겁먹을 줄 알고!”
그러면서도 험프리는 한 발도 접근하지 못한 채 그녀의 채찍에 힐끔 시선을 주었다. 저 범위에서 피해야 한다. 목에 감기면 그대로 목이 부러질 것이다.
엘리샤는 한층 더 부드럽게 웃었다.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의 등만 바라보고 있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 그 시선 덕분에 엘리샤는 이렇게 버틸 수 있었다.
“당신의 선택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신들은 굶주려야 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부상당한 고통에 시달릴 거예요.”
그녀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험프리는 분에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죽고 싶은가, 험프리?”
엘리샤의 말투가 위압적으로 바뀌었다. 마치 극에서 극으로 바뀐 듯 그녀의 표정, 눈빛도 바뀌었다. 싸늘하게 빛나는 검푸른 눈동자에는 살기가 가득이었고,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너무도 극단적인 변화라 그런지 순간 험프리를 비롯한 수하들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이미 너희는 기사도를 포기했으니 약자를 보호하라는 맹세를 떠올리라 강요하지 않겠다.”
엘리샤는 차디차게 빛나는 냉정한 검푸른 눈동자로 험프리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살고 싶다면, 목숨을 한 번이라도 빌고 싶다면 저들을 모두 내보내라.”
저들은 쫓기고 있다. 그래. 쫓기고 있다. 갈 곳이 없다. 여기가 저들에게 마지막. 내가 저들에게 마지막 희망. 엘리샤는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끊임없이 다독였다. 일단 사람들을 살리자. 그리고 기다리자. 살아서 카일을 기다리자. 그는 오고 있을 것이다. 카일…….
엘리샤는 검게 물든 눈동자로 험프리를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내 말을 들어주면 알렉스와 협상할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그녀는 일부러 계속 알렉스라고 칭했다. 전하가 아닌 알렉스. 그녀의 오빠 알렉스라 칭했다.
험프리는 욕망에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난다. 이렇게 강단 있는 여자였다니……. 도성에서의 그녀는 어딘가 연약하고 왠지 우유부단해 보였는데 이런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마치 위풍당당한 여왕 같았다. 욕망이 자글거리며 그의 가슴을 태우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쫙!’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베어진 바람이 험프리의 미간을 때리는 듯했다.
“더 말하지 않겠다. 그냥 같이 죽을 수밖에.”
험프리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험프리가 그녀의 요구대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하여 마을로 함께 내려갔다. 그러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험프리는 고작 30명 남짓한 기사들과 50명 정도의 종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처절하게 당했다. 새벽 기습이었고 기선 제압을 위해 극에 달한 악랄함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공포에 물들여 정신을 놓게 만들었다.
남자는 가슴을 찔러 죽이고, 여자는 겁탈을 했고, 아이는 시꺼먼 기름을 뒤집어씌워 불태워 죽였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이들이 기사도만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격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간도 좁히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눈과 마음과 기억에 담았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참상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험프리는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모두 모았다. 그중 듀팡을 앞으로 끌어냈다. 듀팡이 내민 ‘태양의 눈물’, 그것을 본 순간 엘리샤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의뢰인이 험프리였다니. 험프리는 그것을 그녀의 목에 걸었다.
“당신에게 줄 결혼 선물이었지. 아주 잘 어울리는군. 역시 내 안목은 뛰어나.”
엘리샤는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순식간에 목걸이를 잡아 뜯어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험프리는 피식 웃으며 몸을 숙이고는 떨어진 ‘태양의 눈물’을 주워 품에 밀어넣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하나로 만족한다.”
아악! 갑작스럽게 험프리에게 손목을 잡힌 듀팡이 엉겁결에 비명을 질러 댔다. 험프리는 순식간에 듀팡의 오른편 손가락을 날카롭게 벼린 단도로 차례로 잘라 냈다. 아악!
엘리샤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험프리는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이미 기절해서 축 늘어진 듀팡의 손을 휙 팽개쳤다. 그는 잔혹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얼굴에 튄 듀팡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내보내 준다고 그랬지, 무사히 내보내 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험프리는 혀를 내밀어 입술에 튄 피를 핥으며 내뱉듯 말했다.
“나머지도 잘라 줄까?”
엘리샤는 그 말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지?”
“네 몸!”
엘리샤는 피가 사그라지는 듯했다. 예상했었다. 그러나 막상 들으니 순식간에 피가 얼어붙고 전신이 마비되는 듯했다.
“내 여자가 되겠나? 그럼 이들에게 더 손대지 않고 보내 주겠다.”
엘리샤는 자신을 향한 애원의 눈빛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려 달라는 애원의 눈빛. 엘리샤는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뜬 후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일부러 험프리와 그의 수하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너희도 나를 원하나? 내 몸을 원하나?”
끔찍하고도 음란한 시선이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엘리샤는 잇새로 내뱉듯이 말했다.
“제안을 하겠다. 내 제안이 듣고 싶다면 사람들을 지금 당장 보내라. 그 누구라도 털끝 하나 다쳐서 나가면 이 제안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리지도 보내는 건가, 엘리샤? 리지는 너를 무척이나 죽이고 싶어 했는데.”
사람들과 같이 밖으로 나갈 거라 믿었던 리지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엘리샤를 보며 애원했다.
“나를 보내 줘. 제발 보내 줘.”
엘리샤는 그녀를 향해 강경하게 말했다.
“당신은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여기서 죽게 될 거야.”
“엘리샤!”
험프리는 리지가 엘리샤의 발밑에 엎드려 매달리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비틀어 말했다.
“좋다. 네 제안을 말해!”
“하루에 한 명씩 내 몸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순서는 너희가 정하라.”
그녀의 그 말은 험프리를 비롯해 짐승이 되어 버린 수하들의 욕망을 한꺼번에 들끓게 만든 것과 동시에 그들 전부를 경쟁자로 만들어 버렸다.
엘리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고 저릿한 통증이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순간 그녀의 몸을 지탱하던 왼팔이 후들거리더니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런, 아주 보기 좋은데. 그런 자세는 복종의 기본이지.”
험프리의 빈정거리는 음성이 엘리샤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군. 아주 마음에 들어, 엘리샤. 당신 같은 여자를 굴복시킨다는 것은 한 나라를 얻는 것처럼 짜릿한 쾌감이지.”
“훗. 직접 덤비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 가지고.”
엘리샤는 싸늘히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엘리샤는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리샤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기 시작했다. 왼팔이 무겁다. 손가락도 제대로 오므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마치 방에서 한가롭게 머리를 빗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했다.
험프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가 여유롭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하나로 묶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품이 대단하다. 자존심도 대단하다. 도도하면서도 위압적인 모습. 그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봤기에 험프리는 정면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다. 첫 번째는 곧 희생이기 때문이었다.
험프리가 수하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자 난리가 났었다. 저들끼리 피 터지는 경쟁을 하다 결국 칼부림이 나서 세 명이나 중상을 입고 말았다. 망할 계집!
‘정말 끔찍할 만큼 영리하고 담대한 계집이었어. 저걸 왜 몰랐나 싶어.’
험프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인들의 작업장. 이곳에서 엘리샤는 벌써 네 명의 기사를 죽였다. 하루에 한 명씩 상대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숨통을 끊어 냈다. 경악, 그리고 감탄. 그녀는 정말 뛰어났다. 실력뿐 아니라 정신력도 아주 뛰어났다.
“저 도도한 자태 좀 보라지. 여왕 같은 모습이야.”
석양이 어둠을 끌고 석조 창문을 통해 그녀의 등 뒤로 후광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서서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그녀는 여왕 그 자체였다. 서서히 험프리의 얼굴에 악마 같은 잔혹함이 번들거렸다.
반드시 갖고야 말겠다. 사지를 묶고 가져 주마. 그 아름다운 목에도 줄을 묶어 영원히 내 개로 살게 해 주마.
엘리샤는 호흡을 조절하며 검을 하단으로 내린 채 험프리를 똑바로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일은 네 차례인가, 험프리?”
“훗. 글쎄.”
“나가!”
짧지만 단호한 명령. 험프리가 빙긋 웃으며 크게 손뼉을 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하 세 명이 들어와 바닥에 죽어 자빠진 동료를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을 기대하겠다, 엘리샤.”
듀팡의 품에 자신의 조건을 적은 양피지를 쑤셔 놓고 도성으로 가라 일렀다. 그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도착한 알렉스와 카일은 만신창이가 된 엘리샤를 보게 될 것이다. 엘리샤는 조만간 무너진다. 카일의 심장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만신창이가 된 엘리샤를 보면 그도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은 엄청난 치욕을 느낄 것이다.
이윽고 험프리가 등을 돌려 수하들의 뒤를 따라 나가자 엘리샤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것은 약속이었다. 그녀가 죽으면 험프리도 죽는다. 그 명목으로 엘리샤는 밤의 휴식을 당당하게 요구했고, 대신 도망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쿵! 육중한 문이 닫혔다. 그래도 엘리샤는 계속 허리를 편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자 엘리샤는 그제야 몸을 움직여 차디찬 벽에 등을 기대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카일…….”
그 이름을 한 번 입 속으로 부르자 가슴이 북받쳐 올라오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엘리샤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며 온몸으로 울기 시작했다. 이미 체력은 바닥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버틴 것은 오로지 카일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함이었다.
“카일…… 카일…… 카일…….”
그녀는 온몸으로 울며 끊임없이 주문처럼 카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엘리샤가 이윽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후우. 이제 내일을 준비할 시간이다. 숨을 고를 시간이다. 후우. 후우. 엘리샤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카일은 반드시 와, 엘리샤. 그가 지금 오고 있어.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카일에게 그런 모습 보이면 안 돼.”
그럼 그도 죽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 산다는 그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카일도 죽게 될 것이다. 엘리샤의 마음이 다시 평정을 되찾아 갔다. 그가 오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살 것이다. 살아서 그의 품에 다시 안길 것이다.
엘리샤는 이제 피로 물든 채찍과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때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지. 아까부터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이제야 깨어나는 모양이었다. 엘리샤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무기를 손질했다. 부스럭, 부스럭. 리지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샤…….”
엘리샤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할 말은 뻔했다.
“엘리샤…… 엘리샤…… 제발 포기해.”
싸늘한 침묵이 리지의 전신을 후려쳤다. 그러나 리지는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 제발 나라도 내보내 줘. 나는 살고 싶어. 제발…….”
리지는 엘리샤가 자신을 지옥 속에 붙잡았을 때 그녀의 손에 죽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엘리샤는 험프리와 그 수하들이 리지를 강간하려 하는 것도 막아 냈다. 그럼 왜 자신을 붙잡아 두는 걸까……. 죽이지도 않으면서 왜…….
“제발, 엘리샤. 나를 보내 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네 언니처럼 생각했잖아.”
“닥쳐!”
리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엘리샤가 이렇게 강경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여렸던 엘리샤였다. 정당방위를 해 놓고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3년이나 스스로를 닫아 두었던 엘리샤였다.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할 정도로 여린 그녀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나를 왜 살려 두는 거니? 그냥 죽여.”
순간 리지는 악에 받쳐 앙칼지게 소리쳤다.
“나를 죽여. 네 손으로 네 언니인 나를 죽여. 죽이라고!”
그 말에 엘리샤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엘리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를 죽일 사람은 내가 아니야.”
“카일? 하! 설령 그가 돌아오고 있다 해도 이 소식을 알면 돌아오겠니? 죽으러 오겠어?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겠지.”
엘리샤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순간 따사로운 봄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리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엘리샤? 네가 정말 엘리샤?
“그는 와. 그리고 잘못 알고 있네. 네 인생을 끝낼 자격이 있는 사람은 카일이 아니야.”
카일은 한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게 했다. 어디선가 울음이 섞인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절박함이 간절하게 배어 있는 듯했다. 카일의 가슴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심상치 않게 조여들었다.
“매튜. 앞으로.”
매튜가 그의 지시를 받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이 소리가 들리는가?”
매튜도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잘 안 들리더니 계속 집중하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소리였다. 늑대가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상처 입은 이름 모를 들짐승의 신음 소리 같기도 했다.
“짐승 소리 아닙니까?”
“아니. 사람의 소리다.”
순간 카일의 표정이 경직되고 말았다. 왠지 익숙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는 사람의 울음 섞인 외침인 것 같다.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더니 곧 터질 것처럼 격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카일은 매튜에게 지시를 내리자마자 바로 박차를 가해 달려 나갔다.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뛰는지 그의 귀 옆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간격이 좁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일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의 근원을 봤을 때…… 카일의 얼굴은 참담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소리의 근원은 바로 손가락이 잘린 듀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