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3)

17

카일은 깊은 파란 눈으로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선 엘리샤는 양 손바닥이 뜨거워질 정도로 비비더니 펼친 손바닥을 빠르게 그의 눈에 대 주었다. 후끈한 열기가 그의 눈을 덮어 오자 카일은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따스함이 눈의 피로함을 덜어 주는 듯했다. 벌써 몇 주 동안 계속하고 있는 치료법이었다.

“어때요? 편해요?”

엘리샤는 갈색으로 눈 밑을 물들인 채 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카일은 그녀가 온기가 식은 손바닥을 마찰시키려 하자 그녀의 손목을 가만히 붙들었다.

“왜요?”

엘리샤가 짐짓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그의 눈에는 안쓰럽게만 보였다. 그러다 엘리샤가 순간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마른기침을 해 댔다. 카일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아이를 토닥거리듯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의 오랜 기침이 낫자마자 이번에는 엘리샤가 아프기 시작했다.

“당신, 기침이 좀처럼 낫지 않는군.”

“나을 거예요. 그래도 어제보다 또 괜찮아졌어요.”

카일은 그녀의 기침이 가라앉아 자신의 허벅지에 그녀를 올려 앉히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봐요?”

그녀에게 이 생활은 맞지 않다. 자신은 어떻게든 견디겠는데 그녀가 이렇게 아픈 것을 보자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또 돌려보내려고요?”

“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조금 편하게 해 줄 생각은 없나?”

엘리샤는 새침하게 입술을 오므린 채 그의 허벅지에서 냉큼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절대 없어요.”

“그럼 날이 풀릴 때까지라도 집 안에만 있을 생각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엘리샤는 다시 애교스럽게 웃으며 카일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그의 턱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가르치는 것도 그만하라는 뜻이오.”

그러자 엘리샤의 두 눈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요? 당신 진짜 못됐어요. 어쩜 그렇게 당신 뜻대로만 하는 건가요?”

“내 아내가 피곤해서 아프니까. 그게 싫어서 그래.”

카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다. 글자, 숫자를 가르치는 것도 엘리샤. 그것은 카일이 엘리샤에게 부탁한 일이기도 했다. 매튜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안 들을래요.”

엘리샤가 단호하게 카일의 말을 일축했다.

“엘리!”

“당신도 허락한 일이잖아요.”

물론 카일이 허락한 일이고 부탁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까지는 절대 아니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가 바닥에 개떼처럼 모여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기겁을 했던 카일이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의 소유자인 엘리샤가 또 무엇을 하려는 건지.

“버려진 아이들이에요.”

정확하게는 장인의 후계자로 지목받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장남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는 관습으로 인해 천덕꾸러기가 되어 배움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아이들을 데리고 와 엘리샤는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거 반발이 일어날 텐데.”

카일은 장남을 최우선시하는 오랜 관습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키안조차 그랬다. 카일과 케니스. 간발의 차이로 차남이 된 케니스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하층민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심했다. 장남에게도 줄 것이 없으니 차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뭔가를 하려면 이 아이들도 배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카일, 이 일은 내게 맡겨 줘요. 필요하면 당신 도움 청할 테니까 나 혼자 해결하게 해 줘요.”

카일은 그녀와 나누기로 약속했었다.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겠다고.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그녀였다. 모든 것은 엘리샤를 위해서니 그녀는 언제나 예외였다. 단지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더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계속 우려했다. 결코 쉽게 바뀌지 않을 관습. 자식에게 복종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교육의 자격도 장남에게만 주는 관습. 엘리샤는 그 관습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카일이 잠시 사우턴야드를 비운 틈을 타 엘리샤를 찾아왔고 격앙된 말싸움을 펼쳤다고 했다. 루가 그들이 싸운 내용을 고스란히 카일에게 전했을 때 카일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당신들이 버린 아이들을 내가 건사하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엘리샤는 차디찬 음성으로 새로 선출된 장인 대표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카일은 듀팡이 새로운 장인 대표가 되길 원했는데 보석의 아름다움에 중독된 듀팡이 거절했다고 한다. 대표를 맡으면 아름다움에 취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신 때문에 아이들이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럼 당신들이 원하는 질서는 이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는 겁니까?”

순간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지만 이내 장인 대표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것이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입니다. 후계자는 단 한 명, 장남. 잘난 귀족들도 그리하지 않습니까? 한 명을 정해 놓는 것은 집중해서 인재를 키우기 위함입니다. 당신이 저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주입하니 저것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엘리샤는 차갑게 빈정거렸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키는 대로 무조건 죽도록 일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빵 한 조각과 무시와 냉대. 당신 같으면 복종하고 싶겠습니까?”

엘리샤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당연히 저것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튼 참견하지 마시오. 당신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카일이 용납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엘리샤는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할 수 없지요. 아무튼 건드리지 마십시오. 저것들을 모두 마을로 내려보내세요. 가뜩이나 쓸모없는 것들인데 머리까지 제정신이 아니면 곤란하잖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정말 축복받은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라이와 에드나의 아이로 태어나 평생 이런 불공평함을 모르고 자랐다. 그녀가 배운 모든 것. 지극히 당연하다고 배운 모든 것.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달랐고 사람의 생각도 제각각 달랐다. 엘리샤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장인 대표에게 도전적으로 말했다.

“난 못 내주겠으니 한번 끌고 가 보지 그래요?”

“그럼 못할 줄 알고!”

그들이 겁에 질려 헛간에 숨어 있는 아이들을 잡으러 우르르 몰려가려 할 때 허공을 찢어 대는 날카로운 울음이 그들의 발을 멈추게 했다. 쫙! 특이하게 생긴 은사 채찍이 눈으로 덮인 땅을 내리치자 눈안개가 피어올랐다.

“거기서 더 움직이면 안전을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채찍을 가벼이 휘두르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나는 채찍을 상당히 잘 다루는 편인데 가끔 실수를 합니다. 이렇게요.”

그러면서 그녀는 순식간에 채찍을 휘둘러 그들 머리 위의 적어도 어른 종아리만 한 나뭇가지를 옭아매 와지끈 부러뜨렸다. 그 바람에 그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은 눈을 뒤집어써야 했다.

엘리샤는 남자들이 카일이 없는 자신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카일이 항상 먼저 나서서 전부 다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카일이 곁에 없는 지금, 그녀는 이참에 자신에 대해서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챙!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녀는 순식간에 장인 대표의 턱수염을 가볍게 쓰윽 베고 지나갔다. 당연히 그들은 경직되었고 그녀를 우습게 본 만큼 두려움도 크게 다가갔다.

“이제 어쩔까요? 난 검도 꽤 잘 다루지만 가끔 실수를 하는데.”

“그래서 결국 멈추지 않겠다는 거요?”

엘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살갑게 말했다.

“저 아이들은 나에게는 기쁨이에요.”

엘리샤는 감기 기운으로 인해 피곤했지만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듯했다. 그것을 느낀 카일은 깊은 한숨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했다.

엘리샤는 카일의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게 하며 아예 말을 돌려 버렸다.

“당신 눈은 확실히 피로와 연결되어 있어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피곤하니까 또 안 보이잖아요. 뒤통수를 가격당한 충격이 피곤과 맞물려 오랫동안 당신을 괴롭힌 거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소?”

카일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올려 다소 여윈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비고는 되물었다.

“그러니까 잘 들으라고요. 내 말을 잘 들어야 해요.”

그의 나직한 웃음이 맞닿은 그녀의 볼을 타고 전해졌다.

이른 아침. 엘리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열심히 마신 생강차 덕분인지 기침이 한결 가라앉았고 몸 상태도 지극히 좋게 느껴졌다. 모처럼 몸이 가볍게 느껴졌고 머리도 지극히 맑았다. 그녀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이어 옆을 돌아보았다. 새벽에 들어온 카일이 많이 피곤했는지 엎드린 채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용히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자마자 졸음으로 가득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

엘리샤는 고개 숙여 밤새 수염이 자란 그의 턱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쉬……. 더 자요.”

“가지 마…….”

“곧 올게요.”

카일은 뭐라고 입속말로 투덜거리는 것 같더니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엘리샤는 며칠 전 그녀가 직접 다듬어 준 그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그러자 잠결에도 기분이 좋은지 카일의 모양 좋은 입술이 살짝 휘어졌다. 엘리샤의 입술에도 미소가 맺혔지만 피곤함이 역력한 그를 쓰다듬는 손길에는 애잔함이 묻어났다.

도성으로 출발할 준비가 한창인 지금, 그는 연일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며칠 후면 도성에서 열리는 보석 경합에 참석하기 위해 사우턴야드를 떠난다. 지금까지 도성 보석 조합에 밀려 보석 경합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우턴야드 장인들이었다. 그래서 카일의 제안을 받았을 때 대부분 노골적으로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카일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훈련시켰던 용병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매서운 겨울 속에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담금질을 당했던 용병들.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듀팡이었다. 레드 다이아몬드 탓에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넘겼던 그는 단숨에 그때 동행했던 일행인 루, 제이슨, 러크, 잭, 그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카일이 이번 여정을 위해 뽑아 훈련시킨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인들은 의논하기 시작했다. 1월 말에 열리는 보석 경합. 단순히 보석만 경합하는 게 아니라 그 보석을 세공한 완성품을 구매할 고객층도 확보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자존심으로 도성 보석 조합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그들은 심사숙고했다.

용병들을 믿고 과연 도성에서 무사할 수 있겠는가? 카일이 제시한 비용은 도대체가 흥정이 안 되는 것인가? 비싸도 너무 비싼 몸값. 하지만 정말 이 일이 성공한다면……. 카일의 장담대로 성공한다면……. 그들의 의논은 꼬박 사흘 동안 계속됐었다.

마침내 카일의 제안을 고스란히 수용한 장인 대표가 카일을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는 자리에는 엘리샤도 있었다. 그녀는 이번 일을 수행하는 용병들의 계약서를 일일이 작성했고, 그동안 글을 배운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계약서에 쓸 수 있게끔 해 주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같이 도성으로 갑시다, 엘리. 당신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어.”

순간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나 그녀는 빠르게 그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웃고 말았다. 도성으로 데리고 가 봄까지 강제로 알렉스 곁에 묶어 놓을 심산이라는 것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카일은 자신의 감정을 확 드러내진 않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 그녀를 힐끔 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었다.

엘리샤는 소리 내지 않고 움직였다. 세수를 하고 옷과 외투를 입은 후 마지막으로 바구니를 하나 들었다. 집에서 나오니 매서운 겨울바람에 저절로 발이 동동걸음을 쳤다. 순식간에 축사에 도착한 엘리샤는 바람이 훌륭히 잘 막아지는 축사의 뜨끈한 온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일은 정말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엘리샤가 닭과 양을 키우고 싶어 하자 가장 가까운 마을로 사람을 보내 사 오게 했고 자신이 직접 빈집을 축사로 개조해 주었다. 엘리샤는 그런 그를 보면서 웃으며 말했었다.

“당신은 기사가 되지 않았다면 목수가 됐을 거 같아요.”

“성질깨나 더러운 목수가 됐겠지.”

“당신이 목수였어도 멋있을 거 같아요. 분명 당신에게 빠져서 또 주변을 맴돌았겠죠.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몰랐을 거예요.”

그 말에 카일은 망치질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까 내심 기대하며 엘리샤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미소년처럼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가지런한 치열과 아름답게 휜 입술. 평소 날카롭고 매서워 보이는 그의 눈도 개구쟁이처럼 반짝거렸다. 엘리샤의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고 가슴은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그의 웃음이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다 들려주는 듯했다. 그의 미소년 같은 수줍어하면서도 부드러운 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며 새겨졌다.

엘리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닭과 양들의 먹이를 주고, 이어 더러운 것을 치웠다. 그러는 사이 몸이 더워져 엘리샤는 외투를 벗어 깨끗한 지푸라기 위에 던져 놓고 이번에는 알을 품고 있는 암탉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능숙하게 손을 밀어넣어 달걀을 끄집어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따끈따끈한 달걀이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러면서 엘리샤는 머릿속으로 양털 시장을 생각해 보았다. 카일이 사 오게 한 양은 털의 질이 좋기로 유명한 품종이었다. 그런데 키우는 것이 까다로워 좁아터진 축사에서는 좀처럼 성공하기 어려운 품종이기도 했다.

“여긴 조건이 아주 좋아. 여기라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엘리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봄이 되어 날이 풀리면 너른 풀밭에 방목할 수 있다. 실패는 필연적으로 따르겠지만 얻어지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장사해야지. 양털은 어디에나 쓰이니까. 열심히 해서 사우턴야드에 양털 시장을 형성해야지.”

아직 얼스월드에는 양털만 거래하는 시장은 없다. 엘리샤는 보석 장인들이 독점하여 일개 마을처럼 초라해진 이 도시를 키워 카일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곰곰이 장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장사는 곧 시장이다. 그리고 시장은 인구 증가와 직결된다.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양털 시장. 특화 시장이 성공하면 자연적으로 더 다양한 물품들이 거래가 될 것이고 먼저 선점한 특화 시장의 이점을 톡톡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이곳이 바로 자율 경쟁 지역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열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그런 이점을 제대로 살리고 싶다.

그녀가 성공하면 인구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늘어난 사람들이 카일이 기초적인 체계를 갖추게 한 이 도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자 그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만 해도 멋진 것 같았다. 카일이 만든 기초 틀을 가진 도시를 그녀가 함께 키운다……. 엘리샤는 한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카일이 아무리 유혹해도 가지 말아야지. 양을 잘 보살펴야 해. 양도 더 사야 하고.”

“목장 주인이 되고 싶어, 엘리?”

순간 엘리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가 나무 벽에 기대서 있었다.

“카일. 벌써 일어났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찾으러 나올 수밖에.”

엘리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와 멀찍이 떨어져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이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나른한 눈빛. 그와 대조적으로 지독하게 남성적인 턱과 날렵한 몸. 엘리샤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리 와, 엘리.”

그가 나직하면서도 잠긴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더 가까이 와, 엘리.”

그가 한층 더 잠긴 음성으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잠긴 것처럼 그의 눈빛도 차츰차츰 어둡게 물들어 갔다. 엘리샤가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눈빛은 거의 검게 물들 정도로 짙어졌고 그의 전신에 팽팽한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카일은 다가오는 그녀를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그를 미치게 한다. 엘리샤는 그의 피를 뜨겁게 끓도록 만든다.

마침내 엘리샤가 다가오자 카일은 팔을 뻗어 그녀가 아직도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받아 몸을 숙여 저만치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을 숙였던 그는 일부러 양손으로 그녀의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더듬어 올라와 그녀의 숨을 순식간에 가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치마를 걷어올렸고 이내 헐벗은 채 드러난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움켜잡아 자신의 성난 남성에 바짝 밀착시켰다.

하아……. 엘리샤의 뜨거운 숨이 그의 셔츠를 뚫고 가슴에 닿았다. 카일은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위치를 바꿔 그녀를 나무 벽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바지를 벗어 그녀를 간절하게 원하는 자신을 드러냈다. 엘리샤의 숨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거칠고 뜨거운 숨을 내쉬며 카일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올려 자신의 허리에 감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금빛 수풀이 온전하게 드러났고 그렇게 드러난 곳을 그의 손이 찾아들었다.

순간 엘리샤의 두 눈이 감기고 말았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여성을 덮고 숨겨진 감각까지 깨우며 애무하자 척추에서 전율적인 감각이 내달리는 듯했다.

“하아…… 카일…….”

그는 그녀의 여성을 애무하며 고개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낙인찍듯 입을 맞췄다. 그녀의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숙여질 때까지 그는 그녀의 길고 우아한 목에 뜨거운 낙인을 찍어 갔다. 그의 입술과 혀는 그녀에게 감미로운 애무를 선사했고, 여성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은 그녀에게 전율적인 쾌감을 선사했다.

그의 손가락이 깊숙이 밀고 들어오자 그녀의 숨이 저절로 멈추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숨을 깨우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음미하며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덜미와 어깨를 애무하는 그의 얼굴을 찾았다. 그의 입술을 느끼고 싶었다. 그의 키스를 받고 싶었다.

카일은 얼굴로 자신을 비비적거리며 입술을 찾는 그녀의 몸짓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 들어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 무섭게 뜨거운 혀를 밀어넣어 그녀의 달콤한 혀를 휘감아 빨아들였다. 그의 숨도 점차 거칠게 변해 갔다. 그녀의 배에 문지르고 있는 남성 끝에서 특유의 향을 지닌 애액이 흘러나왔고, 그녀의 여성을 애무하는 손가락에는 그녀만의 애액이 듬뿍 묻어 나왔다.

엘리샤는 그의 키스를 받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자신의 여성을 애무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목을 밀어내고 그의 단단하면서 커다랗고, 뜨거운 불방망이 같은 남성을 자신에게 인도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녀에게 이끌려 무릎을 살짝 굽혀 그녀의 깊은 곳에 자신을 묻었다. 크흣! 그의 거친 신음 소리가 그녀의 귀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엘리샤는 다시 그의 목을 단단히 감고 아예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카일은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치고 가볍게 그녀를 자신에게 맞게 들어올렸다. 그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렇게 그에게 안기니 그가 더 잘 느껴졌다. 폭주하는 감정을 그대로 풀어 거침없이 움직이며 쾌감의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흥분도 더 잘 느껴졌다. 엘리샤는 그의 목에 더욱 꼭 매달렸다. 그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겼다. 카일도 그것을 느꼈는지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가 얼마나 깊게 들어올 수 있는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쾌감을 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그의 입 속으로 삼켜졌고 그 끝을 모르는 쾌감이 그녀를 집어삼켜 갔다. 하아…… 카일……. 나의 카일…….

카일은 숨을 고르며 그녀의 드레스를 다시 단정하게 매만져 주었다. 엘리샤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를 안고 서 있었던 사람은 카일인데 그녀의 다리가 힘이 다 풀려 버렸다. 엘리샤는 지푸라기가 깔린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못 걷겠어요. 당신 때문이니까 당신이 안고 가요.”

카일은 피식 웃으며 외투로 그녀를 단단히 감싸 주고는 너무도 가뿐하게 그녀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그녀를 자신의 팔에 걸터앉게 한 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구니까지 챙겨 축사에서 나왔다.

“나, 여기서 기다릴게요.”

카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여기서 기다린다고 하는지 알지만 그동안 몇 번 설득하려 했었다. 카일이 닦아 놓은 틀은 기초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 놓은 틀은 이끄는 사람이 없으면 더 짧은 시간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엘리샤가 남는 이유는 카일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카일. 여기서 기다릴게요.”

묵묵히 걸어 이윽고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온 카일은 한 손에 들고 온 바구니는 내려놓았지만 엘리샤는 놓아주지 않았다. 카일은 그녀를 팔에 안고 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했기에 나름 그가 없는 이곳의 방비를 더욱 철저하게 점검했었다. 도성에서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의 실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돌아올 이 도시를 온전하게 지키는 자들의 실력도 뛰어나야 한다.

카일은 바다 건너 완성된 보석 세공품을 받으러 올 고객들의 명단까지 장인들에게서 뺏어 살펴보았었다. 공동체이면서도 저들끼리 경쟁을 하고 있어 각자 은밀하게 마음속에 보관했던 고객 명단이었다. 카일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일정을 적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그렇게 받은 명단을 살핀 끝에 그가 돌아올 때까지 사우턴야드는 조용할 거란 판단이 섰다. 겨울에는 모든 것이 전부 잠드는 것처럼 이들도 모두 겨울잠을 자는 듯 보였다.

보석을 연마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겨울이 바다를 지배하는 동안 장인들은 처박혀 보석만 세공할 뿐이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카일은 신중하게 경비를 설 인원을 추렸다. 그러면서도 엘리샤에게 같이 도성에 가자고 설득했었다. 물론 그녀는 설득되지 않았지만.

엘리샤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대고 속삭였다.

“다녀오세요. 가서 도성 보석 조합의 콧대를 아주 납작하게 하고 오세요.”

그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비책도 완벽하게 세워 두었다. 그런데……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다. 여기에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 그때 엘리샤의 달콤한 입술이 그의 입술을 살짝 삼켰다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 이어졌다.

“당신을 위해서 여기를 지키며 당신을 기다릴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카일.”

그로부터 사흘 후 카일은 일행을 이끌고 도성으로 출발했다.

일라이는 두 눈을 빛내며 에드나의 팔에 안겨 있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기를 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알렉스가 도성으로 돌아와 성벽에 서서 뒤늦은 신년 인사를 하는 것까지 본 후 이들은 케이의 아들을 보기 위해 웨스트필드에 왔다.

“정말 잘생긴 놈이구나.”

일라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나 행여나 잠든 아기가 놀랄까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렇죠? 어쩌면 이렇게 케이와 노아를 절묘하게 섞어 닮았을까요? 이 귀를 좀 보세요. 노아 귀를 쏙 빼닮았어요.”

“이 눈썹 모양은 케이를 완전히 빼닮았군.”

“손가락도 케이네요.”

“이마는 노아를 닮았군. 그래서 케이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이는 거였어.”

케이는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의 아들을 온 마음을 다해 아껴 주고 축복해 주는 일라이와 에드나를 바라보았다. 일라이와 에드나는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케이와 노아를 닮은 아기를 살펴보았다. 그들이 하나씩 발견한 것을 말할 때마다 케이의 가슴에는 뜨거운 뭔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자부심. 헌신. 아이에 대한 부정. 그것은 곁에 앉아 있는 노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케이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댄 그녀도 그럴 것이다. 아니, 그녀는 더할 것이다.

케이는 무의식적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노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었다. 노아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아는 첫 아기를 유산했고 그 후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는 남모를 걱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녀는 케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가 걱정할까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그녀의 눈물은 눈가가 짓무르도록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느 순간 새벽 잠결에도 흐느껴 울게 되었고 그제야 케이는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케이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자신 때문이니 그랬다. 노아가 유산한 것은 어리석은 자신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케이 잘못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내색 하지 않고 함께 기다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케이는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노아가 너무 힘들어했다. 그녀가 케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감추면 감출수록 그의 눈에 더 잘 보였다.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의 고통은 바로 자신이 만들어 낸 고통이자 그가 대신 짊어져야 할 고통이었다.

케이는 그녀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노아, 당신만 있으면 돼. 나에겐 당신만 있으면 돼.”

노아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케이는 공작이다. 그의 후계자를 낳는 것은 노아의 당연한 의무. 그녀는 케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케이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해 갔다.

“당신만 있으면 돼, 노아.”

케이의 설득을 받아들일 수 없어 힘들어하는 노아를 붙들어 준 사람은 에드나였다. 노아가 아니면 지금의 케이도, 앞으로의 케이도 없다며 눈물이 마르지 않는 노아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준 사람도 에드나였다. 노아는 그녀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고 차츰 케이의 설득에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단념 아닌 단념을 하고 억지로 지었던 웃음이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바뀔 때, 아이가 그녀를 찾아왔다. 케이는 신줏단지 모시듯 그녀를 보살폈다. 에드나 역시 노아를 사랑으로 감싸며 보살폈다. 케이의 아들은 그런 사랑 속에서 태어난 후계자였다.

“아버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으면 해요.”

노아가 웃으며 말하자 일라이가 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내가?”

“아버지께서 당연히 이름을 주셔야죠. 아니면 우리 아들은 이름이 없을 겁니다.”

“케이의 넉살이 많이 늘어난 듯하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라이.”

케이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지만 이내 태연하게 웃고 말았다.

“잠깐만요, 일라이. 이 아이의 이름을 나에게 양보하실래요?”

에드나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자 다들 의아해하며 에드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나는 일라이에게 주어진 권한을 한 번도 대신하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라이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은 이름이 있는 모양이군. 당신이 이 아이의 이름을 주시오, 에드나.”

에드나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아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와 울음이 묻어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알렉스의 맏아들 이름은 이든. 나중에서야 일라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탁했는지 알렉스에게 전해 들었었다. 에드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일라이를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눈동자. 그녀를 살게 한 남자의 눈동자.

“헤이든. 스스로는 자신을 그림자라 여기지만 사실 그 존재 자체가 빛이었던 위대한 남자의 이름을 주길 바란다, 케이.”

순간 일라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 아주 오래전에 잊고 있던 이름, 헤이든. 그의 원래 이름은 헤이든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가문 대대로 물려진 이름이었다. 미쳐 버린 아버지 역시 같은 이름이었다. 그때 에드나가 이어 말했다.

“일라이. 어린 헤이든이 바라보는 것은 당신뿐이에요. 그리고 헤이든이 자신의 인생을 살게끔 케이와 노아가 이끌어 줄 거예요. 당신이 만든 세상에서 어린 헤이든은 빛이 될 거예요.”

일라이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지만 그는 눈물을 참아 냈다. 그런데 그때 의자에 앉아 있던 노아가 일어나더니 그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그를 안으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렇게 훌륭한 이름을 주셔서. 주신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최선을 다할게요. 감사합니다, 아버님.”

주르륵. 결국 일라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출정을 앞둔 케이가 일라이와 에드나 앞에 서 있었다. 일라이는 근엄한 얼굴로 무장을 갖춘 케이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윽고 다 살핀 후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너의 이름은 케이든에게서 받은 것이다, 케이.”

혈통의 오래된 비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엘리샤뿐이었다. 엘리샤가 어느 정도 크면 그것에 대해 말해 주려고 했었다. 알렉스도 알고 케이도 안다는 것을 알면 은근히 호승심이 강한 엘리샤가 무척이나 많이 서운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었다. 엘리샤가 마음을 닫아 버린 그 일이 있었다. 이번에 엘리샤를 만나면……, 카일과 함께 있는 엘리샤를 만나면 마음의 감옥에서 나와 행복해하는 엘리샤를 보길 바란다.

“그 이름에 걸맞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라이는 든든한 케이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케이든은 항상 신중하고 사리 판단이 빨랐다. 그리고 너 역시 신중하며 사리 판단이 정확하고 빠르다. 더욱이 너에겐 앞으로 성장할 기회가 무궁무진하게 주어졌다, 케이. 부탁한다. 네가 있어야 알렉스가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알렉스가 있어야 너 역시 기울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놓지 말고, 균형을 잃지 마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케이는 4년 가깝게 알렉스와 불화를 겪었던 것을 후회하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때 일라이가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알렉스는 가끔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너무 참지 마라, 케이. 한 번씩 정신이 번쩍 나도록 해 줘. 알렉스의 실력은 오래전부터 너보다 못했으니까.”

에드나는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으나 가슴이 애잔하게 끓어올랐다. 일라이가 마지막처럼 말하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케이는 일라이와 에드나를 번갈아 꼭 끌어안으며 다시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또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제야 일라이와 에드나는 케이가 왜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도 느낀 것이다. 일라이가 마지막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에드나는 일라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엘리샤만 남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치면…….

에드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일라이의 손을 잡았다. 꼭 잡았다. 당신과 함께 갑니다. 어디든, 언제든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에드나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있어서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케이. 소중한 우리 아들. 너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깃들 것이다.”

순간 케이의 두 눈이 커졌고, 일라이는 그녀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어머니…….”

“너는 우리보다 더한 행복을 일굴 거다, 케이. 다녀오너라.”

아……. 케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 숙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무서운 폭풍이 지배하는 겨울 바다. 그 바다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파르나에도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알렉스는 빠르게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앉아 있지도 못하겠다. 얼마나 기다렸던 소식이었던가! 알렉스의 금빛 눈동자가 빠르게 양피지를 훑었다. 예시카…… 나의 여왕 예시카……. 콜로 공작이 중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일선에서 물러난 후 그를 대신할 사람은 예시카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스가 그녀의 출정을 반대하자 그녀는 단호한 의지로 바다를 닮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알렉스. 정말 판도를 바꾸고 싶어요?”

“예시카.”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돼요.”

예시카는 자신을 걱정하는 알렉스의 마음을 달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린 곧 다시 만날 거예요.”

알렉스는 잠시 양피지 읽던 것을 멈추고 크게 숨을 골랐다. 예시카는 예상되는 해적 근거지를 찾아 돌아다녔고 마침내 다섯 번째에 그들의 근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처럼 여기는 콜로 공작의 부상. 그녀는 복수를 천명했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얼스월드 후발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예시카가 이끄는 노스이언을 당하지 못한다. 그들이 구상한 전술을 다 펼칠 수 있게끔 얼스월드는 철저한 지원을 맡았다. 그 후발대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케이였다.

알렉스가 도성을 찾아온 케이에게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밝히며 직접 출정할 거라 했을 때 케이는 그 일은 자신의 몫이라며 그의 출정을 만류했다. 예시카가 출정하고 알렉스까지 출정해 버리면 두 나라 행정이 다 공백이 될 것이며, 만에 하나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기면 지휘 체계가 무너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케이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렇게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알렉스에게 피를 말리는 고통과도 같았다. 더구나 맏아들 이든이 예시카를 따라 같이 생애 첫 출정을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알렉스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빠르게 다시 냉정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휘해야 하는 사람이다. 예시카와 케이가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그는 모든 것이 빈틈없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알렉스가 귀국해서 신년 인사를 하자 괜한 불안함에 도성에 빠르게 퍼져 가던 뜬소문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키안과 케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 동요를 막는 것. 이것은 오로지 알렉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알렉스는 얼스월드의 신년을 활짝 열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에 불안함이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다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접전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여왕님. 곧 해가 저뭅니다.”

예시카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서쪽 하늘을 응시했다. 빛이 만천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철수할까요?”

바다에서의 이동은 밤을 틈타 할 수 있지만 전투는 그렇지 못하다. 자칫하면 아군끼리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바다에는 안개가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어둠과 안개. 예시카는 힐끔 이든을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를 쏙 빼닮은 그를 보는데 마치 알렉스를 보는 것처럼 마음의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이든. 바다 생활을 오래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겠지?”

이든은 미간을 신중하게 좁혔다가 이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야전을 생각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마치 예시카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야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조건이 주어진 가운데 시행되는 야전.

“내 생각과 같구나, 이든. 그럼 어떤 방법으로 진행해야 할까? 네 생각을 말해 보렴.”

예시카는 흐뭇한 얼굴로 이든이 자신의 생각을 지도 위에 펼쳐 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케이는 어둠을 뚫어지게 보며 예시카의 신호를 기다렸다. 예시카는 50여 척의 작은 배를 띄우게 했다. 음습한 안개가 가뜩이나 어두운 시야를 기괴하게 가린 밤바다. 이 밤바다를 화려하게 지펴 줄 화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격적인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는 케이지만 그는 타고난 침착함과 잘 닦은 신중함으로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을 하며 예시카의 뒤를 훌륭히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야.”

케이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여왕, 예시카. 알렉스와 함께 있는 그녀는 한없이 부드러운 여인이지만 여왕인 그녀는 알렉스와 비슷했다. 대범하고 단호했다. 육지에서 알렉스가 최고라면, 바다에서는 단연코 그녀가 최고일 것이다.

시커먼 기름을 끼얹은 지푸라기에서 두통을 유발하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지만 아무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야전이다. 이들이 조류를 따라 흘려보낼 작은 배들이 뜨거운 불로 밤하늘을 밝혀 주면 날이 저물 때까지 펼쳤던 격전과 밤안개로 인해 마음 놓고 잠들었을 해적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 줄 것이다.

예시카는 해적의 뿌리를 완전히 뽑을 수는 없지만 다시 이만한 세력을 규합하는 데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었다. 육상에서 도적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와 동일했다. 근절은 불가능, 하나 그렇다고 손을 놓으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케이는 침착하게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피이잉!’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가르는 불화살. 조류가 그들의 편이 되는 시간이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험프리는 거칠게 연신 욕설을 퍼부어 댔다.

“서둘러라. 어서 서둘러.”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검집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미친 듯이 닦달을 했다. 정신이 없었다. 붕괴된 정신은 좀처럼 이성을 찾지 못했다. 조국에서 도주를 하다니. 그것도 제가 다스리던 나라에서 도주를 하다니.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지독한 악몽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총독님, 위험합니다. 선실로 들어가십시오.”

매정한 바다는 네파르나에서 도주한 험프리의 뒤를 회색의 날을 세운 채 바짝 뒤쫓고 있었다. 겨울 바다를, 그것도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나오다니. 험프리는 순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르륵. 비릿한 맛이 느껴짐과 동시에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정말…….”

험프리는 회색의 이빨을 드러낸 바다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 패배한 건가? 내가?”

믿기지 않았다. 절대적인 우세를 점치던 험프리였다. 더구나 갑작스럽게 방문한 알렉스는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지금의 권력을 영원으로 가져가는 것이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피에테 공작과 에델로 후작을 제거하면 이제 모든 것은 영원하다고 생각했는데……. 피에테 공작과 에델로 후작이 손을 잡아도 얼스월드가 뒤에 있으니 쉽게 끝날 거라 믿었다. 연일 공격의 수위가 올라가 사방에 피가 난자했지만 내 피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이 벌어졌다. 점점 더 크게 번져 가는 싸움에 간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험프리를 보호하던 얼스월드 주둔군이 험프리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알렉스! 개 같은 놈. 나를 속이다니!”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었다. 왜 그들이 검 끝을 돌렸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에델로 후작이 저벅저벅 걸어 나와 에몬 지휘관 옆에 섰을 때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당했다! 그 후부터는 순식간이었다.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험프리 기사들의 힘을 빼는 전략이었던 모양이었다.

험프리 가문의 대저택이 불탔고 총독 관사가 공격받았다. 험프리는 거센 불길로 야기된 혼란을 틈탄 기사들의 필사적인 충성심으로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다.

갑자기 울분이 치밀어 오르자 험프리는 밤바다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듣고 있나, 알렉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반드시 복수할 테다. 네놈을 갈가리 찢어 바다에 뿌려 줄 테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처럼 분노가 폭발했다. 험프리는 그 후로도 계속 목이 쉴 때까지 밤바다를 향해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뒤를 봐주고 있는 해적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총독님! 총독님!”

험프리는 갑자기 망루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뭔가!”

“불, 불, 불길이 보입니다. 불길이…….”

험프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망루에서 포착된 불길이 그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가 또다시 욕설을 퍼부으려던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노스이언 깃발이 보입니다.”

“얼스월드 깃발이 보입니다.”

“총독님, 이대로 계속 전진할까요? 어째야 합니까?”

당했다. 아주 철저하게 당했다. 알렉스는 나를 끌어내렸고, 노스이언 여왕 예시카는 내 수족을 다 잘라 내고 있구나. 당했다. 당했어…….

“뱃머리를 돌려라.”

지금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험프리는 침착해지려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침착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그는 갑자기 그것이 생각났다.

“그 마녀를 끌고 오라.”

그래. 그 계집이 나타난 다음부터 배신을 당했고, 패배를 거듭했다. 그 계집은 악마의 계집이자 마녀가 분명하다. 교황이 있는 곳에서 수녀원장을 하고 싶다던 그녀는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하다. 애초부터 그녀의 조건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험프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패배를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

험프리는 패배를 짊어질 희생자를 찾아야 했다.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하는 자신의 참모의 입을 닥치게 해야 했다. 자신이 어리석게도 알렉스에게 속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훌륭한 화풀이 대상이었다. 혼란의 상황이기에 그녀에게 마녀의 낙인을 찍는 것은 너무 손쉬운 일이지만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일단 한번 여자가 마녀, 악마라 낙인찍히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험프리는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녀를 바로 죽이진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알렉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쩡하게 두지도 않았다. 그는 화가 나면 그녀를 인정사정없이 매질해 댔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돛대에 매달고 이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매질을 할 작정이었다.

이윽고 발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숨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끌려 나온 사람은 바로 리지였다. 갈증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그녀의 입술은 갈라 터졌지만 최음제에서 풀려난 두 눈은 형형한 빛으로 가득해 오싹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험프리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충성스러운 수석 기사에게 명령했다.

“돛대에 묶어라.”

“이제 그만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마녀를 그대로 바다로 던졌다가 우리를 저주하면 우리가 이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

아직은 쓸모가 있을 것이다. 쓸모가 있길 바란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었으니…….

“돛대에 묶어라. 매질을 해야겠다.”

리지는 자신을 또 매질하겠다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생각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리고 초점이 흐려졌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경련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험프리가 그녀를 마녀라 낙인찍고 매질할 때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듯했다. 그런데 또.

“나는 마녀가 아니에요.”

리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며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 맞을 수 없다. 이번에 맞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마녀의 입을 틀어막아라. 혹시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르지.”

험프리는 어느새 손에 검은 뱀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둘둘 말고 잔혹하게 말했다.

“잠, 잠깐. 잠깐.”

리지는 그가 흔들어 대는 채찍을 보며 다급하게 애원했다.

“제발. 잠깐만요.”

리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왜 망망대해에 나와 있는 것일까? 전날 있었던 매질에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험프리에게 질질 끌려온 탓에 바다로 나온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다……. 결국 진 건가? 험프리는 지금 도주를 하는 건가?

리지는 두 눈을 기괴하게 빛내며 험프리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을 느낀 험프리가 저벅저벅 고압적으로 고개를 쳐든 채 다가왔다. 리지는 그가 자신을 채찍으로 후려치기 전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갈 곳이 없는 거지요, 험프리?”

험프리의 손이 위험하게 바르르 떨렸다. 리지는 굴하지 않고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엘리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엘리샤예요.”

어떻게든 살고 싶다. 엘리샤와 다시 마주치면 그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엘리샤는 마음이 약하다. 분명 그녀가 눈물로 호소하고 애원하면 엘리샤는 연민에 젖어 동정을 베풀 것이다. 엘리샤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 일단 엘리샤에게 가야 한다. 그럼 살길도 열릴 테니까.

리지는 이어 악마처럼 속삭였다.

“설령 엘리샤가 사우턴야드에 없다 해도 나만이 엘리샤를 당신에게 인도할 수 있어요.”

순간 험프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사우턴야드, 엘리샤, 그리고 레드 다이아몬드. 엘리샤에게 결혼 선물로 주려고 의뢰했던 ‘태양의 눈물’, 그 레드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그것을 밑천삼아 용병을 부릴 수도 있다.

‘그렇군. 아직 내게 기회가 남아 있었어. 엘리샤, 그리고 레드 다이아몬드.’

막혔던 생각이 그제야 뚫린 듯 험프리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다. 리지가 아니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절망 속에 바다를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네파르나 사람들이 최대의 치욕으로 생각하는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네파르나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다. 육신은 너무 무거워 천국의 문을 넘지 못한다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최대의 치욕적인 죽음. 그것은 바로 바다를 떠도는 것이다. 이들은 바다를 지배할 곳으로 여겼기에 살았든 죽었든 간에 바다를 목적 없이 떠돌게 되면 괴롭힘을 당한 바다가 그들의 영혼에 보복을 한다고 믿었다. 끔찍한 치욕이다. 육신이 너무 무거워 지독이든 천국이든 아무 데도 못 가고 영원히 바다에 갇히다니…….

순간 그 생각이 들자 험프리는 저도 모르게 오싹한 소름이 돋고 말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천국에 갈 수가 없다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래, 엘리샤……. 그녀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험프리의 얇은 입술에 한줄기 잔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렉스!

험프리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뱃머리를 돌려 사우턴야드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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