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카일은 으슬으슬한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무시한 채 매튜와 함께 지도를 보고 있었다.
“여기, 여기에 우리와 계약을 체결한 여인숙이 있으면 좋겠군. 동쪽으로 나갈 때는 이 지점이 적당하고, 서쪽으로는 여기, 북쪽으로는 여기다.”
카일은 계속 용병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이동 경로에 따라 용병들이 숙식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여인숙을 찾고 있었다. 그는 보석 수송으로는 절대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계획과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 계획은 겨울 내내 훈련시킨 용병들을 데리고 1월 말에 맞춰 도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몰라보게 성장한 사우턴야드의 용병을 알리고 무엇이든 수송할 수 있는 힘을 보여 영역을 넓히는 것이 그 목표였다.
“알겠습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아, 듀팡에게 이야기는 했나?”
듀팡에게 1월에 보석 경합에 참여하자고 전하라 했었다.
“다들 웃더군요.”
훗! 카일의 얼굴에 싸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줄 알았다. 겁쟁이들. 강한 자에게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저보다 약한 자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누구보다 잘한다.
“할 수 없군. 눈으로 직접 보여 줄 수밖에.”
보석 경합 참여.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과제를 수행하는 방법이 되겠다. 자율 경쟁. 지금까지 법으로 그렇게 보장되어 있어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성 보석 조합의 막강한 힘은 자율 경쟁을 막고 있었다. 대리인을 시켜 은밀히 보석을 사야 했다. 카일은 그것을 깨트릴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당연히 실력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실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직 멀었다.”
“아…… 역시.”
매튜가 입속말로 욕심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뭐라 투덜거리기 시작하자 카일은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것은 욕심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다면, 목표를 만들어 낼 정도의 욕심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카일은 목표를 욕심껏 설정해 왔고 그것을 이루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때 갑자기 카일이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어제보다 기침이 더 심해진 거 아닙니까?”
카일은 기침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울이면 누구나 쉽게 걸리는 감기일 뿐이었다. 그게 며칠째 계속된 노숙에서 비롯된 거라 하더라도 겨울에는 누구나 감기에 걸린다.
“그 약으로 다들 기침이 금세 가라앉던데. 대장님만 지금 차도가 없는 거 같습니다.”
이제 매튜는 그를 대장이라 불렀다.
“엘리샤 님이 마을 어디에 있을 텐데, 제가 찾아볼까요?”
“아니, 아니.”
마을에 대대적으로 감기가 돌자 엘리샤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케이가 새롭게 보낸 약물을 챙겨 마을로 내려와 환자들을 돌보고 다녔다. 카일은 그런 그녀에게 키안이 보낸 털가죽으로 만든 따뜻한 외투를 내밀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그것을 받더니 마을의 누군가에게 줘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카일의 아내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카일은 꽤 오랫동안 기침을 하다가 간신히 멈추자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찢어질 것처럼 아팠던 가슴을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그럼 집이라도 좀 일찍 들어가서 쉬십시오. 이러다가 덜컥 큰 병 날까 솔직히 무섭습니다.”
그러자 카일이 평소 보이지 않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없으면 매튜, 네가 내 대신 하면 되지.”
그러자 매튜는 펄쩍 뛰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엘리샤 님이라면 모를까 자꾸 이런 식으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거 아닙니다.”
카일은 피식 웃으며 가슴을 계속 문질렀다. 사실 무엇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아픈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엘리샤 때문이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엘리샤로 인해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매일 찢겨 나가는 듯했다. 밖으로 나온 그녀가 반가웠다. 매튜에게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듣자 단편으로 찢어졌던 기억이 조금은 이어졌기에 그녀의 수고에 감사함을 표현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일행도 없었을 것이고 매튜를 잃을 수도 있었다니,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래도 카일은 여전히 그 약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일절 변명하지 않았다. 그 약을 사용한 엘리샤가 누구보다 더 잘 알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약을 이겨 내지 못한 카일의 잘못이었다. 머릿속에 악마가 들어왔어도 그 충동을 이겨 냈어야 했다.
나는 왜 이리 약한 건지. 실력도, 의지도 왜 이렇게 약한 건지……. 그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엘리샤는 창백한 입술이 떨리지 않게끔 꾹 다문 채 나무 숟가락에 걸쭉한 약을 담았다. 그리고 힘없이 눈을 감고 누운 아이의 입 속으로 천천히 흘려 넣었다. 케이가 이런 것을 미리 예측해서 때늦지 않게 약을 보내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카일이 약물이 담긴 궤짝을 집어던지고 짓밟아 난장판으로 만든 후 걱정이 많았었다. 누군가가 아프면, 누군가가 다치면 이곳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고 말았다.
알렉스와 케이는 언제나 그랬다. 매사 빈틈이 없었고 놓치는 것이 없었다. 설령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더 좋은 결과로 이끌어 냈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삼켰다.
“내일부터 약초를 찾으러 다녀야겠어.”
아이 엄마의 고맙다는 말을 뒤로 하고 그녀는 약을 챙겨 거리로 나왔다. 비좁은 길바닥에 살얼음이 끼어 있어 걷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그래도 웨스트필드의 겨울에 비하면 여기는 나은 편이었다. 엘리샤는 순간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얼음. 문득 지난 추억이 떠오른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 도성에서 머물렀던 어느 겨울이었다.
“그가 썰매를 만들어 가지고 왔었는데.”
카일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그는 연일 성벽에 매달려 아이들이 썰매 타는 것을 마냥 부러워하며 지켜보던 엘리샤에게 썰매를 하나 가지고 왔었다. 썰매 하나 갖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면 그 어떤 것도 다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없었던 것은 단 하나. 바로 친구였다. 도성과 웨스트필드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랬다. 아무도 엘리샤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 했고, 그녀를 친구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때 카일은 엘리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썰매를 끌어 주며 놀아 주었었다.
엘리샤는 저절로 카일에 대한 마음이 끓어오르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다시 만난 카일. 그의 눈빛은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한층 더 성장한 것처럼 깊고 또 깊어 그의 눈빛에 사로잡히는 듯했다. 엘리샤는 다시 가슴을 문질렀다.
생각만 해도 아린 사람, 카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욱신거리며 미어지게 만드는 사람, 카일. 그는 여전히 이혼을 반대하며 그녀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우턴야드에 붙잡아 놓고 있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엘리샤는 매서운 해풍이 외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자 털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썼다. 몇 걸음 옮겼을 때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샤 님.”
엘리샤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매튜였다. 매튜가 한걸음에 다가와 웃음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군요.”
마치 엘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가 말하자 엘리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의 열이 좀 높아서요.”
“그러다가 감기 옮습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혹독한 겨울로 유명한 웨스트필드 출신답게 그녀는 겨울을 잘 견디고 있었다. 매튜는 엘리샤를 호위하듯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엘리샤는 천천히 걸으며 물었다.
“당신은 어때요, 매튜? 요즘 일이 줄어들었다고 하던데.”
“그게 이 일의 특징이더군요. 그런데 오히려 요즘이 더 바쁩니다.”
“그래요?”
그러자 매튜는 정말 즐겁다는 듯 유쾌하게 말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카일 대장이 지금 기초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잖습니까. 덕분에 발바닥에 땀나도록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엘리샤는 부드럽게 말하며 자신의 씁쓸한 마음을 감췄다.
“웰든 영지에 있을 때는 사실 좀 무료한 것도 있었습니다. 매일 같은 일상이다 보니까 뭐 그랬는데 지금은 봄이 너무 기대됩니다. 카일 대장은 정말 대단합니다. 같은 후계자였는데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부끄럽긴 하지만 배울 점이 아주 많습니다.”
“즐거워 보여 정말 다행이에요.”
엘리샤가 진심을 담아 같이 기뻐해 주자 매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년 1월 말에 도성에서 보석 경합이 있는데 거기에 직접 참여할 겁니다. 카일 대장이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자율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장인들과 함께 도성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음지에서 양지로 나간다고요?”
역시…… 한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하고야 마는 카일다운 결정이었다. 사우턴야드 장인들이 카일이라는 배경을 얻었으니 내년에는 본격적인 보석 전쟁이 펼쳐질지 모른다. 그러자 엘리샤는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카일도 그런 남자였다. 실수를 기회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 카일…….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아직 그를 사랑한다. 그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만큼 그에게 받은 상처도 깊었다.
“그래서 요즘 훈련 강도도 더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왜요?”
“카일 대장이 좀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카일 대장은 왜 그렇게 차도가 없습니까? 기침이 어제보다 더 심해졌던데.”
그 말에 엘리샤는 매튜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말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일 하루는 아무 일도 없으니 저 혼자 있어도 됩니다.”
전처럼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을 못 챙겨 사람을 잃는 일이 없게끔 매튜는 엘리샤를 만나러 오기 전에 미리 꼼꼼하게 살피고 챙겼다. 그때 그 일. 카일은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멋대로 엘리샤 결정에 동참했던 매튜도 호되게 나무랐었다. 결과적으로 두 명이나 죽었기 때문에 매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실수가 없도록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했다.
“카일이 어디 내 말을 듣는 사람이어야죠.”
엘리샤는 그렇게 대꾸했으나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매튜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카일이 아주 심하게 아픈 거 아닌가? 그러게 왜 문밖에서 그러고 잠을 자는 건지. 처음 그가 문밖에서 잠을 잤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정말 화가 났다. 어쩌면 그렇게 제 몸을 혹사하는지. 어쩌면 그렇게 그녀가 걱정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많이 아픈가? 얼마나 아프기에……, 기침이 얼마나 심하기에…….
“알았어요, 매튜. 내가 보다 더 살펴볼게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카일과 갈등 중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튜도 전혀 모르는 눈치다. 내심 그것에 안도가 되었다.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소문에 휩쓸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카일이 이들의 눈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래, 그에게 약 한 수저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는 분명 오늘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또 사과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샤가 원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절대 자신의 속마음과 몸 상태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다.
갈림길에서 매튜와 헤어져 언덕으로 올라오니 과연 그녀 집 앞에 서 있는 카일이 보였다. 그는 문에 등을 기대선 채 그녀를 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늦게까지 밖에 있는군, 엘리.”
엘리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문에서 비켜 주기를 기다렸다. 역시나 카일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또다시 사과할 차례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말을 쏟아 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을 해, 엘리. 이렇게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엘리샤는 그 앞에 서서 외투 속에 가려진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음성이 쉬어 있었다. 기침이 심하다고 하더니……. 엘리샤는 아무런 말 없이 팔에 걸고 있던 바구니를 뒤적거려 약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
“한 수저씩 아침, 저녁으로 드세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대꾸했다.
“아픈 데 없소.”
그 어떤 약이든 먹을 생각이 없었다. 웨스트필드 의술은 가장 뛰어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엘리샤는 그가 여전히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목소리가 저렇게 쉬어 있는데도 그러다니. 참…….
카일은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모자를 머리까지 썼지만 그는 그 속에 가려진 그녀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외투 옷깃 사이로 손을 밀어넣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엘리샤가 그의 손을 빠르게 쳐냈다.
“내게 손대지 마요, 카일.”
카일은 쓰라림이 손을 타고 그대로 전신으로 퍼지자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잠은 잘 자고 있소?”
카일은 거절당한 손으로 자신을 결박짓듯 팔짱을 끼며 물었다.
“비켜 주세요.”
“잘 자고 있냐고, 엘리. 새벽에 당신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 말에 엘리샤는 얼굴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와의 끝을 결심하고 혼자 자면서부터 새벽에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이제 활짝 열린 기억으로 인해 자신이 실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없음을 알지만 마음이 슬프고 불안정해서 그런지 자꾸 그때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를 적신 붉은 피. 살인자.
“야반도주하지 않을 테니 더 이상 이 앞에서 잠자지 마요.”
엘리샤는 싸늘히 말하며 고개를 쳐들고 그가 이쯤에서 비켜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카일이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몸을 덥석 끌어안고 빙글 돌렸다. 그녀가 어떻게 할 시간도 없이 그의 입술이 곧장 그녀의 입술을 덮쳐눌렀다. 엘리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밀치려 했지만 이렇게 잡히면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너무 안고 싶었지만 계속 참았었다.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 도도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눈빛을 본 순간 격정적인 애정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카일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한 채 너무도 그리웠던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음미했다. 그녀의 체취, 체온, 숨결, 타액. 그 모든 것이 다 그리웠다. 그는 간신히 입술을 떼고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를 몇 번이고 꼭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때 엘리샤가 그의 가슴을 어깨로 쳐 밀어냈다.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고 그녀는 순식간에 그의 뺨을 후려쳤다. 쫙! 카일은 정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서 있었지만 그의 눈은 당황한 듯 크게 떠져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서도 그의 얼굴에 새겨진 자신의 손바닥 자국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엘리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카일?”
그는 정말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 자존심만 중요하고 내 자존심은 우스운 모양이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엘리샤는 너무 기가 막혀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이렇게 이기적이라니, 이렇게 제멋대로라니. 나를 얼마나 무시하기에 이러는 것인지.
“나는 정말 이해를 못하겠소. 당신이 말하는 동반자의 뜻 말이오. 내게는 당신이 기를 쓰고 인정받고 싶은 것처럼 보여. 왜? 당신은 넘치도록 뛰어난 사람인데 뭘 내게 보이고 싶은 거요,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요?”
카일도 계속 지난 시간 동안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말을 되짚어 생각하고 또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계속 같이 의견을 나누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동반자.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기에 그것을 솔직히 말해 버렸다.
엘리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혼이요. 비켜요, 어서!”
감정이 고조되어 목청이 올라가는 바람에 밤의 정적이 그대로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자 카일은 옆으로 비켰고 엘리샤가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바로 따라 들어왔다.
“내게 손가락 하나 대기만 해요.”
엘리샤는 허리에 차고 있던 채찍을 풀어 손에 감으며 냉랭하게 경고했다. 그러자 카일은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 채찍으로 나를 후려쳐도 상관없소, 엘리. 하지만 말은 계속해야겠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조건 같이 의논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 그렇게 합시다. 지금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하오? 나는 사우턴야드를 거점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확대해 가려고 하오. 여긴 겨울이면 아주 비참하게 굶주리는 곳이니 그것을 없애서 사람이 살게끔 하려고 하오.”
엘리샤는 촛불도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게 아니야.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같이 하고 싶으면 해, 엘리.”
“엘리라고 부르지 마요.”
“제기랄. 도대체 나보고 뭘 더 어쩌란 거요?”
카일은 순간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거칠게 후려치며 소리쳤다.
“사과해도 안 되고, 잘못을 인정해도 안 되고, 당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해도 안 되고. 뭘 더 어쩌라는 거요?”
“당신이 이혼만 해 주면 돼요.”
“하! 이혼? 왜, 나와 이혼하고 험프리에게 가고 싶소? 여왕이 되고 싶소? 그렇게는 안 돼.”
“나를 벌주고 싶다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오. 난 당신이 꼭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두고두고 나를 벌주고 있어요. 당신은 마음속에서 나를 원망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노스턴야드 카일, 이제 자신을 속이지 마요.”
카일은 자신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는 엘리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지? 정말 나를 잘 알고 하는 말인가? 내가 의무 때문에, 빌어먹을 맹세 때문에 내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을 그런 놈으로 보이나?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필사적으로 보호할 놈으로 보이나?”
“그래서 내게 복종하라고 강요했어요? 그게 당신에게는 보호인가요?”
“결국 그 말 때문이오? 복종? 난 예전에 당신에게 훨씬 더 심한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 말하지 그랬소. 입 닥치라고. 왜 이제 와서 꼬투리를 잡는 거요?”
“그게 나의 마지막이었어요. 당신은 그 선을 넘은 거예요.”
선을 넘었다는 말에 카일은 양손으로 거칠게 자신의 얼굴을 비벼 댔다. 그러니까 그 선을 넘은 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좀 가르쳐 달라는 거 아닌가!
“다시 선을 세우면 되는 거 아니오. 당신이 정해. 내가 뭘 하면 되고, 안 되는지 당신이 정하면 그 선을 목숨처럼 지키겠소.”
“제발, 카일…….”
그의 자존심. 그는 절대 자존심을 버릴 남자가 아니다. 남의 말을 듣는 남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기대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울렸다.
“웨스트필드 남자들처럼 하면 되겠소? 공작님처럼, 전하처럼 그러면 되겠소? 당신은 평생 그런 모습만 보고 자랐으니 내가 거기에 맞춰야 되겠지?”
순간 보이지 않는 화살이 가슴을 꿰뚫는 듯했다. 웨스트필드 남자들처럼?
“또 뭘 원하오? 섹스? 나는 서툴고 욕망 억제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당신에게 미쳐 있지만, 당신이 원하면 손대지 않겠소. 그렇다고 다른 여자를 찾지도 않겠소.”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의 말이 그녀를 마구 흔들었다. 믿기지 않는 말.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하다니……. 기대하고 싶어 자꾸 가슴이 운다.
“그만. 그만해요.”
그녀의 음성에 어느새 울음이 가득 스며들고 말았다. 카일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가까스로 자신을 붙잡았다.
“당신을 사랑하오, 엘리. 내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시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니, 사랑해. 내 목숨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 당신은 필사적으로 나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소. 당신은 내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있고, 내가 어떻게든 살게끔 만드는 사람이오. 당신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다 무의미해. 당신이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면 나는 진즉 이 성질머리 때문에 길바닥에서 죽었을 거요.”
엘리샤는 울음을 참지 못해 흐느끼고 말았다. 그가 그립다. 새벽에 악몽을 꾸며 놀라 깰 때마다 저도 모르게 침실에서 나와 문 하나를 두고 그를 느끼며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었다. 그럼 불안정했던 마음이, 무서움에 떨었던 마음이 가라앉아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 너무 사랑해서 미워할 수도 없는 존재. 그러나 사랑받고 싶다. 그의 사랑을 받고 싶다.
“사랑하오, 엘리. 사랑해. 한 번만 더 나에게 기회를 주시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오.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오.”
그가 기댄 몸을 바로세우고 한 발짝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난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 당신답지 않아요. 당신은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카일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그녀가 그를 믿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낯선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서러움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녀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를 위해서…… 뭐든 그녀를 위해서……. 그것을 스스로 무너뜨렸던 그날 밤. 그녀의 뺨을 때리고 무서워하는 그녀를 짓눌렀던 그날 밤. 결국 그 밤이 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전 같았으면, 도성에서 쫓겨났던 그때처럼 오만했으면 그녀에게 소리쳤을 것이다. 지옥까지 끌고 가겠다고. 그때 그녀에게 그렇게 퍼부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미안하군.”
카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버렸다.
“카일…….”
엘리샤는 문고리를 잡은 그의 등에 대고 말을 흐렸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카일은 가슴 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조용히 대꾸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소.”
그가 나간 후 엘리샤는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깊은 새벽. 순간 카일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여러 겹으로 덮은 털가죽을 젖히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 마디마디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카일은 자신의 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리?”
기침이 목구멍을 괴롭히며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며 카일은 그녀의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우는 소리 같은데……. 카일은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빗장을 채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엘리!”
쿵쿵쿵쿵! 그는 손으로 문을 치며 소리쳤다.
“엘리. 일어나, 엘리!”
쿵쿵쿵쿵! 안에서 들리는 그녀의 흐느낌이 더욱 커진 듯했다. 순간 그의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녀의 흐느낌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카일은 계속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녀의 흐느낌이 멈추지 않자 카일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덧문이 굳게 닫힌 부엌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날려 그대로 두터운 덧문을 깨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곧장 침실로 들어가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침대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침입자를 알아차린 듯 순간 그녀의 흐느낌도 멈췄지만 카일은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항상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카일은 구석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숨바꼭질. 엘리샤는 그 말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
“정말? 정말 나랑 놀아 준대요?”
엘리샤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연신 되풀이해서 물었다. 숨바꼭질. 신체적 활동을 즐겨 하지 않는 귀족의 자녀들도 좋아하는 놀이, 숨바꼭질. 여태 엘리샤는 그 놀이를 성의 하녀들과 함께 했었다. 그런데 뭐라고? 이게 정말인가?
“마을 아이들이 정말 나랑 놀아 준다고요?”
리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을 위해서 여러 번 꼼꼼히 확인을 했었다. 마을 아이들을 포섭하고, 그리고 이 일을 해 줄 남자를 사로잡고.
엘리샤는 손뼉을 쳐 대며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부모님한테는 정말 창피해서 말 안 했는데 아무도 그녀와 놀아 주지 않았다.
영지 사람들은 다들 부모님을 존경했고 특히 에드나가 나올 때는 그녀와 한마디라도 하기 위해 다가왔었다. 그런 부모님의 딸이니 당연히 엘리샤는 친구들을 잔뜩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수도원이든 어디든 같이 어울리기 위해 다가가면 다들 그녀를 슬금슬금 피했다. 달래도 보고 화도 내 보고 심통도 부려 봤지만 항상 혼자였다. 치사해서 나도 안 논다고 했지만 왁자지껄 소리 내며 함께 노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 또다시 어울려 보기 위해 엘리샤는 성 밖으로 나갔고 또 혼자가 되었다.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숨바꼭질하고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해야지. 그래도 되죠, 리지?”
리지는 바로 대답했다.
“그래. 대신 엘리샤, 규칙 잘 지켜야 해? 어렵게 얻은 기회니까 술래가 되어도 심술 내지 말고.”
엘리샤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 덕분에 얻은 기회 아닌가?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혼자 노는 것에 지쳐 사방에 심술을 좀 부리긴 했지만 절대 안 그러겠다. 기꺼이 술래도 할 것이다.
정말 술래가 됐다. 그녀와 같이 놀아 주겠다고 온 마을 아이들은 전부 여덟 명이었다. 이 아이들을 다 찾을 생각을 하니 엘리샤는 생각만 해도 좋아서 연신 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찾아야지. 그럼 그때까지 계속 놀아 주겠지? 저녁 먹을 때 즈음해서 다 찾아 같이 성으로 가자고 해야지.
“아, 그리고 엘리샤. 그 검 꼭 차고 있어야 하니?”
“엄마하고 아빠가 절대 풀지 말라고 해서. 리지도 알잖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좀……. 네가 검을 차고 있으면 친구들이 겁먹지 않을까? 난 정말 진지하게 충고하는 거야, 엘리샤.”
“그럼 이렇게 할게요. 친구들을 찾으러 다닐 때는 검을 풀게요. 그럼 되겠죠?”
“그래, 그렇게라도 해. 그래도 공작 부인께는 비밀로 해 줄게.”
“정말 고마워요, 리지. 역시 당신밖에 없어요.”
리지는 화사한 웃음으로 엘리샤의 기쁨을 부추겼다.
체스터 숲 중앙으로 들어가면 대낮에도 햇살이 스며들지 않는다.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나무 때문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리지는 정신없이 들떠서 숫자를 세는 엘리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오늘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엘리샤.”
리지는 곁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실수 없어야 해요.”
“당연하지.”
리지의 새로운 애인인 남자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일부러 혀 잘린 놈들을 데리고 오느라 힘들었다고. 나중에 알지?”
“그럼요, 알지요. 저들은 부자가 될 거고 당신은 부와 나, 둘 다 가질 거예요.”
그러자 보기만 해도 끔찍하게 생긴 두 명의 남자가 잘린 혀를 보이며 흉악하게 웃어 보였다.
“이따 봐요.”
리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기만 했다. 그 가운데 엘리샤가 100을 외쳤다. 리지는 그녀가 계속 천천히 숫자를 세는 것을 들으며 곳곳에 숨어 있는 마을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이제 술래만 혼자 남겨 둘 차례였다.
엘리샤는 500을 외친 후 슬그머니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아 처음에는 사물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엘리샤는 어둠에 눈이 익길 기다렸다. 무서움 같은 건 없었다. 어두컴컴하지만 체스터 숲은 안전하다. 일라이가 있는 곳은 언제나 안전하다.
이윽고 어둠에 눈이 익은 엘리샤는 리지의 충고대로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고 인기척을 찾기 시작했다. 숲의 향기가 짙게 퍼져 있는 가운데 엘리샤는 함박 미소를 지은 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인기척을 찾을 수 있었다.
“찾으러 간다. 찾으러 간다.”
부스럭, 부스럭.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일라이에게 모든 것을 배워 왔기에 소리를 구분해서 잘 들을 수 있었다. 토끼가 뛰어가는 소리. 다람쥐가 도토리를 찾는 소리. 그리고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소리.
“여긴가? 여기지?”
버드나무가 길게 가지를 드리워 그 속이 보이지 않으나 분명 사람의 느낌이 있었다. 엘리샤는 두 손으로 가지를 가르며 그 속으로 들어갔다.
“술래가 찾는다.”
생각보다 어둡고 습기가 가득했지만, 여기에 숨어 있을 친구를 찾는다는 기분에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속으로 덥석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이렇게 내 품으로 들어오나?”
엘리샤는 순간 바로 반응을 보였다. 팔꿈치를 쳐들어 반원을 그리며 후려치고 자세를 납작하게 낮췄다. 컥!
“망할 계집 같으니라고. 아프잖아.”
엘리샤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찾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끔찍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치 수십 마리의 뱀이 전신을 휘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름이 돋아올랐고 심장은 더욱 거세게 뛰었다. 그녀가 도망치려고 할 때 징그러운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휘감고,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놔! 그런데 목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천국을 맛보게 해 줄게. 이리 와. 우리와 같이 놀자.”
어버버, 어버버. 또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꽉 움켜잡았고 혀라도 잘렸는지 괴성을 내질러 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 명은 되는 듯했다. 엘리샤는 미친 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더러운 숨결이 그녀의 귀에 뿌려졌다. 순간 엘리샤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짧게 휘두름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놀란 나머지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고 가슴에서만 맴돌았다.
‘뭐지? 도대체 이게 뭐지? 이 끔찍한 기분은 도대체 뭐지?’
그러나 간신히 경직이 풀린 그녀는 순식간에 그 속에서 벗어났다.
“리지!”
엘리샤는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리지를 찾았다.
“리지! 리지! 위험해. 다들 숲에서 나와야 해. 다들 마을로 도망쳐. 범법자가 있어.”
엘리샤는 검을 풀어 놓은 것을 후회하며 달리면서 소리쳤다. 한 번도 체스터 숲에서 이런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감히 일라이와 에드나가 있는 곳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자는 없었다. 계속 인구가 늘었지만 치안이 잘된 곳이다.
“리지! 도망쳐!”
리지는 숨어서 엘리샤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달리는 것과 그녀가 이 일을 하라 시킨 세 명이 엘리샤의 뒤를 쫓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뭘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군. 병신같이.”
엘리샤의 약점인 왼팔을 움켜잡으면 된다고 가르쳐 줬건만 어른 세 명이 아이 한 명을 놓쳐? 그때 리지의 눈에 발에 뭔가 걸린 엘리샤가 앞으로 넘어지는 모습과 이어 놈들이 그녀를 붙잡기 위해 몸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오호……. 리지의 얇은 입술에 다시 미소가 맺혔다.
“너만 없으면 내가 공작의 딸이 될 수 있어. 너만 없으면 돼.”
리지는 계속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엘리샤의 팔을 짓누르고 치마를 걷어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리지의 입술이 휘어졌다. 이렇게 지켜보는 것이 즐거울 줄은 몰랐다.
“리지, 도망쳐! 다들 도망쳐!”
리지는 엘리샤의 외침을 들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엘리샤에게 친구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리지가 계속 마을 아이들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놀다가 엘리샤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면 공작님께서 너희 엄마, 아빠를 다 죽일 거야. 그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더구나 엘리샤는 변덕이 심해. 조금만 수틀리면 너희가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공작님께 고자질할 거야.”
리지의 말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웨스트필드 사람들은 일라이 공작을 무서워한다. 그가 엘리샤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다들 봤기에 리지의 말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아무도 엘리샤와 가까이하지 않았다.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엘리샤의 마음을 마음껏 짓밟았지만 엘리샤는 리지를 믿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도 엘리샤는 계속 다들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을 사람은 리지 외에는 없었다. 이미 리지가 그들을 찾아 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
“미안. 엘리샤가 어디 있는지 도저히 못 찾겠어. 술래도 한다고 하더니 막상 술래가 되니까 기분이 상했나 봐. 미안해. 너무 미안해서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리지를 쳐다봤다.
“리지 잘못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엘리샤잖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고귀한 엘리샤하고 감히 같이 놀 생각을 하다니. 쳇!”
“리지, 당신도 그냥 돌아가요.”
“아니. 난 엘리샤를 데리고 돌아가야 할 책임이 있어. 너희 먼저 가.”
마을 아이들이 등을 돌리고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길 때 리지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 정말 미안하지만 혹시 공작님께서 물으면 오늘 즐겁게 같이 놀았다고 해 줄 수 있겠니? 놀다가 엘리샤가 보이지 않아 먼저 간 줄 알았다고 해 주지 않을래?”
“우리가 그런 것까지 해야 해요?”
“부탁할게. 아니면 내가 혼이 나서…….”
“하긴, 그렇네요.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요, 리지.”
아이들은 분통 터진 채 마을도 돌아갔고 다시는 엘리샤와 놀지 않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제 제대로 끝나는 건가?”
엘리샤. 처음부터 엘리샤가 미웠다. 그녀 대신 자신이, 맥파든이 아닌 일라이의 딸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딸이 될 거야, 엘리샤. 내가.”
열아홉 살. 그동안 쌓였던 모든 미움과 증오, 그리고 소원이 드디어 풀리는 날이다, 오늘은. 엘리샤의 비명 소리. 아……. 너무 즐거워서 마음껏 웃고 싶다. 리지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계속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정말 여자 한 명 당하지 못하다니.
엘리샤는 생전 처음 당해 보는 무자비한 공포 아래 숨을 헐떡이면서도 배운 것을 잊지 않았다. 검이 필요해. 내 검이 필요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뿌리쳤고 다시 벌떡 일어나 달리며 소리쳤다.
“위험해! 누구든 성에 가서 알려야 해. 체스터 숲에 범법자가 들어왔다고 알려야 해.”
순간 엘리샤는 그대로 뭔가에 발이 걸려 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럼에도 엘리샤는 벌떡 일어나 계속 달렸다. 검을 풀어 놓은 곳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엘리샤가 순식간에 도주하자 리지는 숨어 있던 덤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망할 것들!”
너무 빨라서 이대로 엘리샤를 놓칠 것만 같았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없다. 일라이는 분명 이 잡듯이 뒤져 범인을 색출할 것이고 그럼 리지가 뒤에 있다는 것도 밝혀낼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엘리샤. 나를 두고 가지 마. 엘리샤, 살려 줘.”
리지는 일부러 우는 소리를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엘리샤, 살려 줘. 나를 두고 가지 마.”
엘리샤는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리지의 음성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리지!”
“나를 버리지 마, 엘리샤. 무서워.”
엘리샤는 마침내 검을 움켜잡았고 바로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내가 갈게요, 리지. 당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아요.”
그래, 어서 와. 어서 와서 죽어 줘. 제발 처참하게 죽어 줘, 엘리샤.
리지는 엘리샤를 속이기 위해 한쪽에 숨어 계속 비명을 질러 현혹시켰다.
“무서워. 살려 줘, 엘리샤. 어디 있는 거야? 나를 혼자 두지 마.”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어요. 우린 자매잖아요. 항상 함께할 거예요.”
쏜살같이 달려온 엘리샤가 소리친 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달려나온 엘리샤가 도약했다.
리지는 제 눈을 의심했다. 엘리샤가 아주 뛰어난 실력을 소유했다는 것은 알지만 저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왼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데……. 마음이 여려서 벌레 하나 제대로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데……. 이럴 수가…….
크헉! 숨 넘어가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망할! 욕설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쿵!’ 소리와 함께 자신의 애인이 제일 먼저 쓰러졌다. 헐떡임도 잠시, 이내 그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엘리샤는 덜덜 떨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고 이어 자신에게 단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들의 숨도 끊어 냈다.
엘리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으로 검을 쥔 채 자신의 얼굴에 튄 피를 만져 보았다. 뜨끈하면서도 끈적끈적했고, 그리고 끔찍했다.
“리지…….”
엘리샤는 덜덜 떨면서 리지를 찾았다. 리지가 비명을 질렀다. 리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내가 늦지 않게 온 거 맞는 거지?
“리지! 리지!”
엘리샤는 악을 쓰며 정신없이 그녀를 찾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전 처음 한 살인에 그녀는 온몸의 신경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을. 그때 리지가 비명을 지르며 수풀에서 나오면서 소리쳤다.
“맙소사, 엘리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왜 사람을 죽인 거야?”
“리지?”
엘리샤는 갑자기 눈앞으로 튀어나와 소리치는 리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란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남자라고!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난 분명히 당신의 비명을 들었어요. 괜찮아요? 무사해요?”
“엘리샤! 헛소리하지 마. 난 비명 지른 적 없어. 세상에……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 놓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이 남자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란 말이야! 넌 내 남자를 죽였어. 사람을 죽였다고!”
엘리샤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갈가리 찢어진 신경이 비명을 질러 댔다. 내가 실수를 했다고?
“아니야! 난 분명히 들었어요. 저들은 범법자라고, 범법자.”
“제발 엘리샤. 거짓말하지 마. 넌 세 명이나 죽인 살인자야. 살인자!”
“리지, 나는…… 나는…….”
리지는 엘리샤가 급격한 혼란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평소에도 마음이 여린 엘리샤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살인을 했으니 그 혼란함이 어느 정도인지 리지는 마구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몸을 통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인자! 끔찍한 살인자!”
“아니야. 아니야. 저들이 먼저 나를, 그리고 당신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리샤! 넌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였다고. 넌 끔찍한 살인을 한 거야.”
혼란 그 자체였다. 엘리샤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자신이 가슴에 단도를 찔러 넣은 놈의 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리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한 건가? 갑자기 몸에 묻은 피가 자신의 숨통을 꽉 조이는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리지는 덜덜 떨고 있는 엘리샤를 힐끔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네가 저지른 이 끔찍한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공작 부인께서 아시면 얼마나 놀라시고 실망하시겠니. 공작님은 또 어떻고.”
“난 실수하지 않았어요.”
“했어. 세 명이나 죽였다고.”
“나는…… 나는…….”
카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식은땀에 흠뻑 젖어 심하게 떠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고 있었다.
“엘리……. 괜찮아, 엘리.”
그녀가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간간이 나온 말 중 하나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난 살인자가 아니야……. 난 아니야…….”
카일은 순간 깜짝 놀랐지만 그녀를 더욱 꼭 보듬어 안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달랬다.
“그래, 당신은 아니야. 아니야.”
카일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엘리샤가 초점 잃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엘리.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야.”
엘리샤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카일? 지금 카일이 여기에 있는 건가? 그가 지금 나를 안고 있는 건가?
“카일…….”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에게 바짝 안겨 갔다. 카일……. 나 또 꿈을 꾼 건가?
“사람을 죽였어요. 열다섯 살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했다. 가슴에 담아 놓았던 그때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자 카일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혼란이 왔어요. 누구보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를 살인자라고 하는 바람에. 난 어리석게도 너무도 끔찍해서, 너무도 그 순간이 무서워서 그 말을 끝까지 부정하지 못했어요.”
순간 카일은 바로 감이 왔다. 리지!
“난 언니처럼 그녀를 따랐는데……. 세상이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내 잘못으로 부모님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녀가 내 잘못을 덮어 주겠다고, 한 번 나를 용서하겠다고 했을 때 왜 그랬는지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저지른 짓을 아빠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순간 엘리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카일에게 자신을 완전히 의지한 채 이어 말했다.
“그녀가 그들의 시체를 늪에 버리고 나에게 거기서 기다리라고 했죠. 비가 왔는데, 그 비에 피가 섞여서 흘러내리는데,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기다렸어요. 혼자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질 못해서 기다렸어요. 그러면서 계속 생각했어요. 내가 강했다면, 엄마처럼 강했다면 그런 일 없었을 거라고.”
카일은 자신에게 파고드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등을 연신 어루만지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엘리샤가 그런 일을 겪었다니……. 그러자 불현듯 케이의 말이 떠올랐다. 물에 빠진 엘리샤를 구하고 나서 케이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했던 말.
“열다섯 살 때 갑자기 이유 없는 고열이 나서 오랫동안 아팠었지. 그 후로 말수도 부쩍 줄었고 간혹 악몽을 꾸더군.”
그 원인이 바로 리지였다니! 카일은 어금니를 악물며 엘리샤의 말을 계속 들어 주었다.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너무 걱정이 심해서 더 웃으려고, 밝게 웃으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리지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이 조여들었고. 나도 모르게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더라고요. 평소 뭐든 잘 기억했는데, 그날을 기억하는 건 잘 안 됐어요. 잘못을 말하지도 못했고, 바로잡지도 못했고.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카일은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 주며 속삭였다.
“당신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거요, 엘리. 자신을 믿으면 돼. 자신이 한 일의 정당함을 믿으면 돼.”
“나는 잘하고 싶었어요. 부족한 내 자신이 싫어요. 내가 엄마처럼 현명했다면, 내가 엄마처럼 재능이 많았다면.”
그 말에 카일은 뭔가가 느껴졌다. 그녀가 그렇게 뭐든 같이 의논하자고 말했던 이유. 그녀가 말한 동반자의 숨은 뜻. 카일은 고개 숙여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살짝 비비며 속삭였다.
“나에게는 당신이 최고야, 엘리. 당신이 내 인생에서 최고야. 그래서 당신에게 늘 미안했었소. 내가 한 번만 자존심을 굽혔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더구나 그렇게 잘났다고 믿었던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오만했는지 깨달을 일들만 생기니…….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었소.”
엘리샤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던 가슴이 이제 서서히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그에게 가슴에 담아 두었던 그때의 일을 말하는 순간부터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의 체온 때문에 그런 것인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그 틀 안에 자신을 가둬 놓고 산 탓에 정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카일이 오빠들과 다르다는 것 역시 한 번도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다르다. 당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카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는 카일이기에 다르다는 것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이어 말했다.
“나는 아주 부족한 사람이오, 엘리. 아주 서툰 사람이기도 해. 내 부족함을 당신만이 채워 줄 수 있소.”
“미안해요. 미안해요, 카일. 나는 내 시야 안에 당신을 가두려고 했어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손에 쥐려고 안달을 했어요.”
카일은 너무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나도 그랬소, 엘리. 나도.”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서로의 온기로 자신의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어느새 날이 밝아 오는 모양이다. 엘리샤는 덧문 틈 사이로 붉은 햇살이 들어와 눈을 찌르자 저절로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카일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싸고 햇살을 향하게 했다.
“당신…….”
카일은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날이 밝은 건가? 카일은 그녀의 이마에 뜨겁게 입맞춤을 하고 말했다.
“지금은 안 보여, 엘리. 내 눈은 아직 어둠 속에 있소.”
카일은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리. 내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카일은 자신의 뒤통수를 살피는 엘리샤의 손길에 자신을 맡긴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가 건드릴 때마다 저릿저릿한 통증이 머리를 쑤시는 것 같았다.
“매번 그랬어요?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다시 되돌아왔어요?”
카일은 이제 제대로 보이는 눈을 찡그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엘리샤는 그의 상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전에 당신을 속여서 재웠을 때 고름을 꽤 많이 짜냈었는데, 지금 또 그러네요.”
엘리샤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분명 아팠을 텐데, 많이 아팠을 텐데……. 이 남자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좀처럼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기에 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붉게 변한 채 바짝 성을 내고 있는 그의 상처 주변을 살짝 눌러 봤다.
“아프죠?”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 입 다물지 말고 말해요. 그래야 내가 알아요.”
그녀의 음성에 답답함이 서리자 그는 그것을 느낀 듯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그냥 아픈 거로 알면 되지 않을까?”
나름 타협이라 생각해서 말한 건지. 그런데 엘리샤는 그 말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음성은 차갑거나, 나직하거나, 메마르거나……. 그런데 이렇게 피곤해하는 음성은 처음이었다.
하아, 이런. 엘리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너무 잘 참는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카일은 항상 그랬었다. 지독하게 자기 수련을 했고 작은 실수도 커다란 패배처럼 받아들여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남자였다. 엘리샤가 에드나의 등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자격지심에 빠진 것처럼 카일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키안의 등을 바라보며 그 역시 자신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엘리샤는 희미하게 미소짓고 말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이 사람도 그랬구나.’
엘리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해 보았다. 우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정답일까.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의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기억해 줄까…….
그런데 그때 그녀의 생각을 깨듯 갑자기 카일이 가슴을 들썩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서둘러 일어나 약을 수저에 따라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으로 수저를 내미는데 그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카일!”
“약은 필요 없소.”
카일은 정말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개 돌려 피한 가운데 그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자꾸 이렇게 쓸데없는 고집 부릴 건가요?”
그에게 이 약 한 수저를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엘리샤는 그를 자극하듯 말했다.
“세 살배기 아이도 꿀꺽 잘 먹는 안 쓴 약이에요.”
카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부했고 간신히 기침이 멈추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엘리샤는 그런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처럼 고집이 센 남자는 정말 처음 봐요.”
카일은 손으로 옷을 툭툭 털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먹지 않아도 나을 만하니까 그런 거요.”
“그래서 감기 걸려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았던 모양이군요. 나을 만했는데 불행히도 낫지 않아서요. 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그 고집 때문에 내가 혼자가 된다면…….”
순간 엘리샤는 두 눈을 번득이며 그를 약 올리듯 말했다.
“당신을 바로 잊을 거예요. 그리고 험프리와 재혼해서 잘 먹고, 잘 살 거예요.”
그러자 카일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어내며 싸늘히 말했다.
“그 전에 험프리를 먼저 죽일 거요. 당신에게 손댄 놈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지. 다음에 그놈과 마주치면 손가락부터 차례로 분질러서 목을 비틀어 죽일 거요.”
그러면서 카일은 바로 밖으로 나갈 것처럼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엘리샤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아직 풀어야 할 것이 많다. 그녀가 카일에게 풀어 줘야 할 것이 많았다. 자신의 자격지심으로 인해 카일이란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으로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거 아닌가?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될 것이다. 지난 시간이 마음에 걸려서 또다시 보이지 않는 벽 안에 갇힐 것 같았다. 이제 다시는…… 다시는 마음의 빚을 지고 싶지 않다. 실수한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을 갖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때 카일이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며 말했다.
“곧 다시 돌아올 거요.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매튜와 오늘, 내일 일정을 확인하고 돌아오겠소.”
엘리샤는 이틀을 쉬겠다는 그의 말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틀. 또다시 이틀이 주어졌다. 그래, 전에는 그녀가 카일에게 실수하긴 했다. 그때 카일이 그렇게 잠들지 않았다면 그는 진즉 돌아오지 않은 일행을 알았을 거고, 놓치지 않고 데리고 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들을 직접 땅을 파서 묻었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손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모진 말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모욕적인 행동. 그에게도 이 시간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엘리샤는 그가 밖으로 나가자 곧장 솥에 물을 붓고 생강을 달이기 시작했다. 약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생강차라도 다려서 먹게 하면 좋을 듯싶었다. 이어 그녀는 곧 돌아오겠다고 한 그를 위해 스튜와 빵을 구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힘차게 밀가루 반죽을 하며 그녀는 그를 기다렸다.
카일은 언덕 아래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는 매튜를 만났다.
“안 쉬십니까?”
매튜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대뜸 말했다.
“제가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저에게도 뭔가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질 만한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카일은 그런 매튜는 아랑곳하지 않고 1주일 일정을 미리 적어 놓았던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그것을 한참이나 꼼꼼하게 확인했다. 매튜는 곁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제가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일정에 늦은 일행도 없고, 훈련 시간도 잘 짰습니다.”
“숫자와 글자를 그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나와 약속하지 않았나?”
카일은 장부를 덮으며 그에게 냉랭하게 물었다. 그러자 매튜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 평생 그렇게 멍청한 인간들은 처음 봅니다. 아무리 해도 100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카일은 차갑게 빛나는 파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처럼 멍청한 인간을 키우려고 애를 쓰는 나도 있는데, 하루 만에 포기하겠다고?”
그러자 매튜는 무안함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또 그 돌머리들을 데리고 숫자를 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런데 카일이 뜻밖에 생각지도 않은 말을 했다.
“됐다. 그것은 엘리에게 맡기겠다. 무슨 일 있으면 위로 올라와 보고하도록.”
카일은 더 확인할 것이 없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매튜가 그를 따라오며 말했다.
“장인들이 바닷가에 부두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럼 교역이 더 활발해질 것이고 용병들의 일도 늘어나지 않겠냐고 하던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한 것이니 반반으로 쳐서 비용을 절반으로 하자고. 뭐,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교역이 늘어나면 자연히 우리의 일도 늘어나겠지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정말 이기적인 놈들이다, 장인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코를 풀려고 하다니. 그리고 이놈도 정말 한심하다. 아직도 생각하는 것이 저를 지배자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장인들을 만나 빠른 결론을 짓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따라와.”
카일은 매튜를 데리고 곧장 장인들이 모여서 작업하는 석조 작업장으로 갔다.
듀팡은 처음부터 그 계획에 반대했었다. 여기는 부두가 없기에 동방이나 네파르나에서 대규모 상인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육상 통로는 도성 보석 조합에서 장악한 곳이 많아 이 빼어난 실력을 만천하에 알릴 기회가 너무 적다. 그러니 그들에게 부두를 설치하게 하자는 장인 대표의 말을 들었을 때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달랐다.
‘카일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그러다 걷어차이지.’
카일이라는 남자를 가장 많이 겪은 사람은 듀팡이다. 그는 셈이 밝은 카일이 이것을 찬성할 리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차라리 합리적인 방법을 찾게끔 회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사람은 정말 망각의 동물인 듯했다. 그들은 어느새 레드 다이아몬드가 어떤 경로로 손에 들어왔는지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오히려 듀팡을 세상 물정 모르고 헛돈을 쓴 사람 취급 했다.
듀팡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제 장인 대표와 마주 선 카일을 지켜보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우턴야드 장인 대표는 처음부터 기선 제압을 시도하는 것처럼 언성을 높이며 카일에게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조마조마했다. 반반 부담. 전 같았으면 통했을 말이었다. 카일이 없다면 말이다. 용병들의 결속을 막고 철저하게 부려먹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환상적인 양보라 생각할 것이다.
그때였다. 퍽! 다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카일은 바닥을 뒹구는 남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다 다시 발을 들어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미, 미쳤어? 지, 지금 나, 나를 찬 건가?”
듀팡은 멀리서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도 처음 카일에게 맞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이놈은 미쳤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을 공으로 부려먹으려는 당신보다 덜 미친 거 같은데.”
카일은 바닥에 쓰러진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장인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궤변으로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켜 대가 없는 고생을 치르게 하려 하다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들 장인을 위한 것이지, 용병들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비용을 절반씩 부담하자는 계산을 제시하다니. 사람을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빌어먹을. 당장 네 일을 다 끊어 버리겠어. 우리가 일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 버러지 같은 용병이 어디서 감히 나대! 버러지 새끼.”
욕설과 비방이 한꺼번에 섞인 말에 카일은 순간 욱하고 말았다. 그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간신히 일어선 장인 대표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죽고 싶나?”
그래도 장인들을 대할 때 조금은 공손하려고 노력했던 카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제안을 하면 우리가 좋다고 개떼처럼 달려들 줄 알았나? 너희만 좋으라고 하는 짓거리에 장단 맞출 거라 여겼나? 이기적이어도 너무 이기적이군. 도시를 독차지한 것도 이기적인데 감히 전지전능한 것처럼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건가?”
지금까지 참아 왔었다. 제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 습성이 있는 이 고약한 장인들이 지리멸렬하게 임금 협상을 끌고 있는데도 참아 왔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다. 카일은 두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아무래도 적당한 두려움을 심어 줘야 할 때인 듯싶다. 그래야 이들의 시야가 제대로 보일 듯싶다. 카일이 손에 힘을 꽉 주자 장인 대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카일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우턴야드가 그동안 왜 발전을 하지 않았는지 아나?”
“그, 그거야 도성 놈들이 자꾸 우리의 발목을 잡으니까 그런 거 아니오!”
슬쩍 숨통을 풀어 주자 그가 악을 쓰듯 대꾸했다.
“아니. 너희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애초부터 자율 경쟁 지역이었다. 자율이라는 의미는 아나? 그것은 도시 자체가 스스로 규칙을 정할 수 있다는 뜻이자 많은 것을 직접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카일은 냉혹하게 빛나는 남색으로 변한 눈으로 장인 대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는 독점을 했고 전하께서 직접 부여하신 의미를 잃어버리게 했다. 더구나 너희는 용병들만 받아들여 그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카일은 손에서 힘을 풀어 까치발로 서서 매달렸던 장인 대표의 목을 놓아주었다.
“내가 세우는 도시의 한 축이 되고 싶다면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카일은 양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장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듀팡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냉랭히 말했다.
“사흘 후 전체 회의를 소집하겠다. 진정한 대표 자격이 있는 자가 참석해라.”
매튜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카일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쉽게 생각했었다. 어쨌든 돈이 되는 일 아닌가? 그런데 카일의 말을 들으니……. 쩝. 할 말이 없지만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졌다.
“제가 루를 불러서 설계와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차출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네? 아니 그럼 비용을 다 받아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카일은 계속 걸으며 대답했다.
“자율은 아주 무서운 단어다.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는 것은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는 뜻이지. 네가 보기에 이 도시가 준비가 됐다고 보나?”
“지금 대장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이 그거 아닙니까?”
카일은 일차원적인 매튜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 도시는 육상으로 통하는 길목 방어는 아주 좋지만 바닷길 방어는 전혀 하지 않아. 그동안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겠지.”
카일은 잠시 생각을 더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두는 바닷가를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곳은 네파르나와 아주 가까워. 그러니 정말 크고 싶다면, 정말 교역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준비 먼저. 개방은 나중이다.”
갈림길에 서게 되자 카일은 매튜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리도록 해라. 혼자 멍청하게 끌어안고 끙끙거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엘리샤는 그가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적당히 식힌 생강차를 그에게 내밀었다.
“약 아니에요. 생강차예요.”
카일은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뜨끈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카일은 천천히 몇 모금 마셨고 그러는 동안 엘리샤는 그의 뒤로 가 그의 뒤통수를 다시 살피며 말했다.
“고름을 짜내야 해요.”
“고름만 짜면 괜찮을까?”
“전에 어땠는데요? 내가 그렇게 한 다음에도 시력이 그렇던가요?”
카일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바로 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오. 며칠 동안은 멀쩡했었소.”
“그럼 짜는 게 정답이네요.”
그러면서 엘리샤는 그의 상처를 손으로 다시 눌러 보았다. 전보다 더 많은 고름이 차서 그냥 짜면 그의 고통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상처 주변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계속 움찔거리고 있었다.
“카일.”
“응?”
“나에게 당신을 맡겨요.”
카일은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하겠소. 그냥 해, 엘리.”
“카일. 정말 아플 거예요.”
엘리샤는 케이가 수면 약도 같이 챙겨서 보낸 것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약은 웨스트필드가 아니면 만들지 못할 약이기 때문이었다. 엘리샤는 살며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무척이나 많이 아플 거다. 그것을 그대로 참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엘리.”
“네.”
카일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척이나 낯선 일이지만 엘리샤와 그 어떤 오해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 스스로가 못났다고 증명하는 짓이지만 또다시 그런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그 약을 이겨 내지 못하는 듯해.”
“그게 무슨 뜻인가요?”
카일은 최대한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그녀에게 말하고자 했다.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을 제대로 가누는 데 한참 걸렸었소. 서는 것도 힘들었고, 머리는 완전히 비어 있는 듯했어. 속이 완전히 뒤집혀 토악질도 했고, 무엇보다 감정 통제가 전혀 되지 않았소. 전혀.”
그는 ‘전혀’라는 말에 힘주어 말했다. 그는 엘리샤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에 앉히며 이어 말했다.
“내가 한 말, 행동. 아무것도 제어할 수가 없었소. 마치 머릿속에 악마가 들어온 것처럼 나는 그것을 이겨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냥 해, 엘리. 다시는 정신을 놓고 싶지 않아.”
엘리샤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 약이? 물론 억지로 잠을 재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임은 알지만 그런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이런.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 후, 다시 일어났을 때 사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그것을 내 숨겨진 마음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오. 난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당신을 잃을까도 두려웠소.”
엘리샤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럴 수가. 정말 몰랐다. 약에 대한 자부심만 있었지 그 이면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또다시 자부심에 취하고 만 것이다.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녀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 그녀를 강제로 안은 것이. 의지가 강한 그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정도라니.
“아, 미안해요. 그런 부작용이 있다는 거 정말 몰랐어요.”
“아니. 당신이 미안할 필요는 없소. 나를 위해서 그런 거고, 내 의지가 약해서 그런 거니까. 아무튼 그 약은 절대 마시고 싶지 않아.”
엘리샤는 아직 가시지 않은 죄책감이 서린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그가 약해서 약을 이기지 못한 게 아닌데. 단지 웨스트필드 약이라서 맹목적인 신뢰를 한 자신이 잘못한 건데…….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당신이 이기지 못하는 약은 다른 사람을 미치게 할 거예요. 악몽 같은 환각 상태에 빠질 거예요.”
엘리샤는 새삼 그가 어떤 남자인지 다시 보였다. 그녀는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당신이니 그 정도로 견딘 거예요. 당신이니까. 그냥 버릴게요. 아무도 쓰지 못하게 버릴게요. 내 생각이 정말 짧았어요. 미안해요.”
카일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그녀의 따뜻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은 그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그냥 잠시 다 잊고 그녀와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
“엘리.”
“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 손톱, 마디, 손등, 손바닥. 거칠어졌다. 매끄럽고 마디가 가늘던 그녀의 손이 몇 달 사이에 거칠어졌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까지 그를 단 한 번도 탓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자존심과 성질 때문에 벌어진 이 모든 일을 단 한 번도,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계속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엘리샤가 마치 그의 마음을 읽는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채워져요. 항상 부족하고 나약했던 내 마음이 채워져요. 당신만이 나를 채울 수 있어요. 이런 나를 받아 줘서 고마워요.”
카일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결코 탓하지 않는다. 원망도 하지 않는다. 저렇게 진심 어린 눈으로 그를 보며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의미 있는 말을 해 준다. 언제부터, 왜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는지는 카일 스스로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겠다.
“이거 아오?”
“뭘요?”
카일은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당신이 내 생명이라는 것.”
그녀의 얼굴이 살며시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농담 아니오. 난 정말 당신 아니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에서 죽었을 거요.”
다소 어색한 듯 경직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그가 그녀의 가슴을 또 한 번 채우는 듯했다. 엘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카일의 강인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두 사람은 더욱 하나처럼 밀착했다.
이윽고 엘리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경이로운 의지를 한 번 더 볼까요?”
“느낌이 어때요?”
엘리샤는 고름을 짜낸 그의 상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독하며 물었다.
“시원해.”
카일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손을 뒤로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녀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 하루가 한 달 같았고, 그 한 달이 1년 같았다. 그녀를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자신의 가슴에 쌓인 그녀에게 대한 갈망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 알겠다. 허벅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고름을 짜내는 동안 고통을 참으며 계속 그녀의 알몸을 상상했다. 저절로 그렇게 됐다. 쾌감에 찬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고, 매끄러운 그녀의 피부를 상상하고, 그녀의 뜨거운 속살을 상상하고…….
엘리샤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허벅지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어느새 엉덩이로 올라와 은밀하게 엉덩이 사이의 골을 훑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안 끝났나?”
엘리샤는 무뚝뚝하지만 기묘하게 유혹적으로 들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드레스 위로도 그의 손이 어찌나 뜨겁게 느껴지는지 피부에 그의 낙인이 찍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카일이 몸을 돌렸다.
“안 돼?”
그 말과 동시에 그는 그녀의 드레스 끈을 잡아당겨 풀기 시작했다. 순간 엘리샤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바람에 그녀의 가슴도 부풀어 올랐다. 끈이 풀어지자 그는 손을 뻗어 드레스를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마치 드레스로 그녀를 결박시키는 듯했다. 그의 숨결이 가슴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로 그녀의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끽했다.
“앗, 잠깐만요.”
카일은 엘리샤가 갑자기 자신을 밀어내려 하자 다급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단숨에 탁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양옆을 가두듯 팔로 짚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여린 목덜미를 자신의 피부로 먼저 만끽하기 위해 다소 거칠게 얼굴을 비벼 댔다.
엘리샤는 그의 거친 수염이 피부를 쓸고 지나가자 너무 따가운 나머지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한동안 면도를 안 한 게 틀림없는 그의 수염은 날카로운 창끝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모르는 듯해 엘리샤는 따가움을 참아 보려고 했다. 그가 그녀의 드레스를 찢다시피 하며 끌어내리고 젖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그녀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카일은 그녀의 움찔거림이 예사롭지 않자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푸른 눈빛에는 열정이 출렁거리는데 왠지 입매는 단단히 굳어진 듯했다.
“왜? 내가 불편하게 했소?”
“아니요. 전혀요.”
엘리샤는 거의 검다시피 변한 그의 눈동자를 보고 그가 지금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필사적임을 알 수 있었다. 말은 지극히 냉정하게 가라앉았으나 그에게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는 그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문득 카일의 눈에 마치 거친 실로 후려친 듯 벌게진 그녀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자신의 수염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그는 그녀의 여기저기 붉게 변한 피부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턱을 한 손으로 문질렀다. 이런! 굳은살이 잔뜩 박인 그의 손바닥이 따끔할 정도로 어느새 수염이 자라 있었다.
“난 괜찮아요.”
전의 카일이었다면 절대 모르고 넘어갔을 그녀의 몸짓이었다. 자신이 그녀의 어디를 불편하게 하는지, 아프게 하는지 전혀 몰랐던 카일이었다.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닌데……. 카일은 그녀를 놓아주고 떨어지며 말했다.
“미안하군.”
그러더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풀어 놓은 단도를 찾으러 침실로 들어갔다. 엘리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단도를 들고 침실에서 나온 카일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순간 숨이 꽉 막히는 듯했다. 맙소사…… 엘리?
엘리샤는 빙긋 웃으며 어서 이리 와 앉으라는 듯 탁자에 앉은 채 발끝으로 의자를 두드렸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꿀꺽 삼켰다. 발밑부터 잠식당하는 듯했다. 그녀에게 항상 본능적인 그의 신경이 미쳐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이리 와요, 카일.”
부드러우면서도 지독하게 유혹적인 음색으로 그녀가 그를 부른다. 카일은 온몸의 근육이 다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내가 해 줄게요.”
카일은 홀린 것처럼 그녀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그녀 말대로 의자로 걸어와 그녀 앞에 앉았다. 그러자 엘리샤가 두 다리를 살짝 벌려 의자에 앉은 카일의 허벅지에 올렸다. 그의 뜨거움은 그녀의 드러나지 않은 본능도 깨웠다. 열다섯 살 때 겪은 일. 리지는 정말 끔찍한 함정을 팠다. 세 명의 남자. 그 후 스스로 기억을 닫아 그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음탕한 욕망에 찬 남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과민 반응을 했던 그녀였다. 손 닿는 것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졌었다. 험프리에게 잡혔을 때도 그러했었다. 사고가 마비되어 평소 잘했던 것도 잊을 정도로 그녀는 무기력해졌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딱 한 남자 앞에서 그녀는 자유로웠다.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때 그 일 이후 오랜만에 도성에 왔을 때 그를 제일 먼저 찾았었다. 물론 그때도 그는 가장 먼저 도성으로 들어서는 입구까지 그녀를 마중 나왔었다. 반겨 줬고, 평소처럼 그녀를 대해 줬다.
그의 곁에 있으면 그녀도 잊었다. 두려움을 잊고 그의 곁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있고 싶어졌다.
카일은 지금 당장 그녀를 덮쳐누르고 싶은 마음과 그녀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을 보다 더 음미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다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붉은 흔적을 보고 그녀의 손에 자신의 단도를 쥐여 주었다.
엘리샤는 조심스럽게 면도를 시작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단도가 그의 수염을 깎아 갔다. 귀밑을 시작으로 오른쪽을 먼저 밀었다. 엘리샤는 굳이 그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어디에 못 박혀 있는지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아……. 그녀의 몸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제 왼쪽을 밀어야 하는데…….
“계속해, 엘리.”
그가 은밀하면서도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자신의 수염을 면도하게 만들었다. 서걱서걱.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그의 살갗을 건드리지 않고 면도를 다시 시작했다. 그녀의 손놀림. 우아하면서도 자신감이 새겨져 있는 손놀림.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맡긴 채 다시 그녀의 그곳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금빛 체모로 덮인 채 드러난 여성.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녀의 은밀한 곳을 본 적이 없었다. 애무만 했을 뿐 눈으로 음미하진 못했었다. 다시 입 안에 욕망의 침이 고여 들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붉은색의 유혹을 뚫어지게 보았다. 만지고 싶고, 혀로 핥고 싶다. 저 속에 감춰진 그녀의 깊은 동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는 충동을 억제하느라 두 손을 꽉 움켜쥐며 그녀의 은밀한 곳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카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다 내려놓고 그에게 전부 다 바친다는 뜻. 자신을 전부 그에게 바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천천히 멈췄다. 그러더니 손등으로 그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갔다. 카일은 이제 시선을 올려 그녀의 검게 물든 눈과 마주했다.
엘리샤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
“네.”
“당신뿐이오, 엘리. 내 여자는 당신뿐.”
“이제 나도 알아요.”
카일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이어 말했다.
“언제나 당신뿐이었소, 엘리.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할 거요. 당신의 남자로서.”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을 거요.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돼. 당신만 내 여자로 있으면 돼. 그럼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소, 당신을 위해서.”
엘리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들었다. 카일은 너무도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하오, 엘리.”
나의 엘리. 나만의 엘리. 그녀는 문득 그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순간 그가 왜 그렇게 그녀를 과보호하는지 퍼뜩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의 맹세. 그는 한 번도 기사의 맹세로 그녀를 지킨 적이 없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남자로서 지금까지 그녀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 온 것이다. 주르륵. 눈물이 흘러넘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순수하게 사랑만 하는 남자라니……. 엘리샤는 순간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언제나 그들처럼 뛰어나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에드나, 예시카, 노아. 남편의 존중을 받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려면 남편에게 뒤지지 않는 뛰어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여야 한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카일에게 자신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다했었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라 믿었고, 그래야 카일의 진정한 애정을 받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 카일이 미소년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라서 사랑하는 거요, 엘리. 당신이라서. 당신이 일라이 공작님의 딸이라서, 전하의 여동생이라서 사랑하는 게 아니오. 당신이 나만의 엘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요. 그렇지 않소?”
주르륵.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림자…… 빛과 그림자……. 평생을 그것만 생각했고 자신은 평범하기에 회색에 속한다는 비관적인 생각도 갖고 있었다. 정말 어리석었다. 정말 어리석어서 부모님이 했던 말의 뜻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다.
“너는 누구일 필요가 없단다. 나의 사랑하는 딸, 엘리샤.”
에드나의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말.
“주어진 너의 삶을 네 뜻대로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이란다, 엘리샤.”
일라이의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힘이 실려 있던 말.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누구일 필요가 없다. 누구를 닮은 삶을 살려고 자신을 버릴 필요가 없다. 그녀는 엘리샤다. 카일이 숱하게 자신은 카일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엘리샤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다니. 카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엘리샤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그에게 속삭였다.
“면도 끝났어요.”
카일은 입술을 반달처럼 휘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보란 듯이 천천히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자신을 바친다. 카일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 다시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전보다 더 헐겁게 그녀의 손가락에서 맴돌았다. 카일의 눈빛이 미안함으로 흐려지자 엘리샤는 한 손을 들어 다정하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안아 주지 않을 거예요? 아까부터 계속 당신을 기다렸는데.”
카일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몸을 살짝 뒤로 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엘리샤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이내 감싸고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카일. 사랑해요.”
그의 입술이 반달처럼 휘었다.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나고 강인해 보이기만 한 턱에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미소가 이렇게 사람의 얼굴을 달라 보이게 하는구나 싶었다.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의 지배를 받고 싶을 정도로 그의 미소는 치명적인 유혹, 그 자체였다. 순간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너무도 아찔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일은 양팔을 그녀의 몸 옆에 세운 채 몸을 앞으로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카일은 두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친 채 혀끝으로 그녀의 치열을 더듬고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입술을 크게 벌려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임과 동시에 타액을 삼켰다. 목울대를 움직여 그녀의 달콤함을 삼키자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카일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감싼 채 점점 더 깊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타액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느껴졌다. 그는 입술을 더욱 크게 벌려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갔다. 그녀의 혀를 감아 빨아들였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연신 격하게 음미했다. 그러면서 그의 손이 그녀의 탄력적인 젖가슴을 서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거친 손바닥도 부드럽게 만드는 듯했다. 그녀의 피부가 전해 주는 부드러움은 그의 거친 면도 부드럽게 변하게 하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벗어나 고개를 젖힌 그녀의 목덜미로 향했다. 그녀의 우아하고 긴 목덜미에 입술로 뜨거운 낙인을 찍으며 그녀의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에서 젖가슴이 연신 쾌락의 신음을 내뱉는 듯했다. 이제 그의 입술은 쇄골을 지나 젖가슴으로 내려앉았다.
자신의 얼굴로 그녀의 젖가슴을 거칠게 문지르자 그녀의 숨소리가 순간 가파르게 올라갔다. 거칠게 문질렀던 것을 달래듯 그는 이어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들썩거렸고 달콤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음…….
그는 그녀의 다리를 보다 넓게 벌리고 허벅지 안쪽부터 손으로 쓸어 애무하며 그녀의 젖꼭지를 입술로 덥석 삼켜 버렸다. 앗! 그녀의 엉덩이가 움찔거리며 만져 달라는 듯 그의 손을 향해 움직였다. 카일은 급해지는 자신을 억누르며 계속 그녀를 애무해 갔다. 이렇게 천천히 애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달라지는 숨소리가 잘 들렸고, 그녀의 체온이 어떻게 올라가는지도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열리는 느낌까지 본능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젖꼭지가 욱신거릴 때까지 애무하다 다른 쪽 젖꼭지도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애무하는 손길이 점점 더 위로 올라갔고, 또 올라가자 어느새 촉촉한 애액이 그의 손을 반기며 적셔 왔다. 카일은 부드럽게 그녀의 체모를 가르며 여성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손끝에 애액이 가득 묻어났다. 카일은 다시 그녀의 여성을 훑어 손에 애액을 묻혔고 열정으로 나른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외설스럽게 손가락을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하며 빨았다. 너무 달콤해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먹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맛이 그의 입 속에 퍼져 갔다.
카일은 그녀의 젖가슴에서 벗어나 그녀의 몸을 돌렸다. 그녀는 엉덩이를 그에게 향한 채 쾌감으로 저릿한 등줄기를 세웠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려 가슴 쪽으로 폭포처럼 내리게 한 후 등줄기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무릎으로 서게 했어도 그에게는 작게만 느껴졌다. 그의 키가 워낙에 큰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사랑받고 보호받아 마땅한 자신의 여자라 그런지 모르겠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지나 수려한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로 입술을 내렸다. 쭉 뻗은 다리를 한 손으로 애무하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한 채 입술로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순간 엘리샤의 입술에서 거친 신음 소리가 배어 나왔다. 핫! 그도 그럴 것이 다리를 애무하던 그의 손이 순식간에 움직이더니 젖을 대로 젖은 그녀의 여성, 깊은 동굴로 쑥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단단히 결박된 듯했다. 그의 손이 젖가슴을 애무하고 다른 손이 그녀의 몸 속 깊숙이 들어와 애무하고……. 엘리샤는 전율 같은 쾌감의 화살이 전신을 내달리자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에게 자신의 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내가 느껴지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지나?’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네. 당신 느껴져요.”
카일은 그녀의 어깨를 입술로 더듬으며 더욱 깊이 그녀의 뜨겁고 비좁은 동굴을 파고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푼 구슬을 문지르자 그녀의 다리가 저절로 더 벌어졌다. 하나였던 손가락이 어느새 두 개가 되자 그녀에게 가해지는 자극이 더욱 증가되었다. 애액이 그의 손을 타고 흐를 정도로 그녀의 몸은 완전히 열렸고 이제 그를 애타게 갈구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녀의 신호를 바로 알아차렸다. 지금. 지금. 지금. 그는 재빨리 그녀의 몸을 돌려 정면으로 마주 보게 했다. 그녀를 보면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 맞게 끌어당겼고 이어 살짝 엉덩이를 들어올려 빠르게 삽입했다. 그녀가 비명처럼 날카로운 쾌감의 소리를 지르며 몸을 활처럼 휘었다. 카일은 그녀의 등이 투박한 식탁에 쓸리지 않게 그녀의 골반을 잡아 단단히 고정시키고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에게서 흘러나와 서로를 적신 애액이 하나가 되어 섞이며 좁은 집 안에 살갗이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 찼다. 그녀의 뜨거움이 그를 삼키고 그의 뜨거움이 그녀를 삼켰다. 야생 짐승처럼 들끓는 신음 소리를 그대로 내뱉으며 카일은 그녀의 엉덩이를 조금 더 들어올렸다. 그러자 더 깊이 삽입되었고 그녀가 그를 더욱 바짝 조여들어 숨조차 막히게 만들었다.
그는 서툰 사람이었다. 자신의 욕망 통제에도 서툴러 매번 가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몸짓으로 그녀의 몸을 차지했던 사람이었다. 엘리샤는 손을 들어 어금니를 악문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녀를 위해서 그가 지금 얼마나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를 다잡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뜨거운 뭔가가 깊은 곳에서 퍼져 나와 전신으로 흘러들었고 그녀의 몸이 저절로 간헐적인 수축을 하며 그가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쾌감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크흣! 카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숨이 턱턱 막혀 들고 두 눈도 크게 떠지고 말았다. 그녀도 놀란 듯 눈동자가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기를 몇 번. 카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히고는 있는 힘껏 깊숙이 자신을 그녀에게 밀어넣었다. 아…… 맙소사……. 어떻게 이런 쾌감이 있는 건지. 심장까지 오그라들 정도로 아찔한 쾌감이 그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