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엘리샤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카일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들린 문 두드리는 소리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나갔다.
“엘리샤 님.”
루였다. 그런데 그 음색이 왠지 불안하게 들려 엘리샤는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매튜가 밤새 보이지 않습니다. 어젯밤 보초들의 말로는 성문을 열고 나갔다고 하던데. 혹시…….”
엘리샤는 루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금세 꿰뚫어 봤다. 매튜가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샤는 순간 단호하게 루에게 말했다.
“아니요. 그럴 리 없어요. 매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왜 밤새도록 보이지 않는 건가요?”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혹시 수송에 나선 사람들이 있나요?”
“다섯 방향으로 나간 일행들이 있습니다.”
카일은 다양한 이동 경로에 번호를 붙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런 식으로 번호를 붙여 숙지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동 경로가 머리에 그려지도록 했다.
“그중에서 제 시간대에 돌아오지 못한 일행이 있나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매튜가 밤에 빠져나간 이유.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수송 장부를 읽을 수가…….”
루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카일은 항상 모든 것을 다 기록했다. 소요될 예상 시간, 위험도, 운임, 지원자, 이동 방향. 카일이 바쁠 때는 매튜가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 글을 아는 자만이 그것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샤는 한 손을 뻗어 루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장부를 내게 가지고 와요.”
루가 서둘러 수송 장부를 가지고 올 동안 엘리샤는 안으로 들어가 카일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매튜를 찾아 밖으로 나가야 할 듯싶었다. 약의 분량이 카일에게 적당히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가 먼저 깨어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는데…….
“내가 없는 동안 깨어나면 안 돼요, 카일.”
엘리샤는 고개 숙여 엎드려 자고 있는 카일의 귀에 속삭였다. 카일이 깨어났을 때 그녀가 곁에 있어야 그의 분노를 빨리 풀 수 있을 것이다. 엘리샤는 카일의 상태를 다시 주의 깊게 살핀 후 외투를 찾아 어깨에 걸쳤다. 허리에 채찍과 검집을 단단히 걸었을 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장부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일행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늦어도 어제 아침에 도착했어야 할 숀, 나엘, 그리고 잭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매튜…….”
매튜는 그 일행을 찾으러 나간 게 분명해 보였다.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런 듯했다. 그런데 일행도, 매튜도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니. 엘리샤는 빠르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요, 루.”
“네?”
“그 누구도 여기에 들어오게 하면 안 됩니다.”
카일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다. 카일이 혼자 있는 것도 걱정, 혹시라도 분량 조절이 실패해서 그녀가 없을 때 깨어날까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매튜와 그 일행의 행방이 시급한 일로 다가왔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그냥 이 앞에 서서 도르래를 만드는 사람들을 관리하면 됩니다. 알겠어요?”
루는 따스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는 엘리샤를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잘하겠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잘할 겁니다. 당신을 믿어요.”
엘리샤는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빠르게 움직였다. 누구를 데리고 갈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이동 시간이 느려질 수도 있고 그녀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엘리샤는 마구간에 매인 카일의 군마를 끌어냈다. 그리고 바람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매튜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한쪽 눈이 붉게 물든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내 동료들을 돌려보내면 이쯤에서 끝내겠다.”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이미 죽은 놈을 데리고 가서 뭣 하려고?”
새벽 내내 싸운 탓에 너덜너덜해진 옷감 사이로 숲의 매서운 바람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매튜는 한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이다. 카일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엘리샤에게 말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본인 스스로 먼저 알았어야 했다. 카일은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지나치리만큼 시간에 철저했고 예정 시간에 늦은 일행은 그가 직접 찾으러 나갔었다. 그것을 봤으면서도, 카일의 방식을 봤으면서도 매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어제 엘리샤의 따가운 질책을 듣지 않았다면 정말 지금까지 사우턴야드에서 자작 행세를 하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라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고 돌아오지 않는 잭 일행을 찾아 나섰다. 이동 경로를 따라 달려오다가 새벽에 드디어 동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짐승을 가두는 나무 우리에 그들이 갇혀 있었다. 새벽빛에 물든 채 매튜가 나타나자 그에게 반응을 보인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잭, 그리고 장인이었다. 그리고 숀과 나엘은 기괴하게 꺾인 목을 흔들며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도성 보석 조합 놈들이 이렇게 잔인한 줄 미처 몰랐군.”
“훗! 누가 할 소리!”
새벽 내내 싸웠지만 도성 용병 다섯 명이서 매튜 한 명을 어쩌지 못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사우턴야드 장인을 본 순간 이들과 동행한 도성 보석 장인의 눈이 그대로 뒤집혔었다. 뺏긴 레드 다이아몬드에 대한 원한 때문인지 도성 장인은 사우턴야드 장인을 도성으로 끌고 가 조합원들 앞에서 죽이기를 원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싸움으로 이어졌고, 사우턴야드 용병들이 어찌나 악착같이 달려들던지 제압하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그 과정에서 숀과 나엘이 사우턴야드 장인을 보호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이놈은 더했다. 너무 지독해서 도성 장인의 명령만 있으면 차라리 시체와 다 죽어 가는 두 놈도 던져 놓고 도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매튜는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 사우턴야드로 데리고 가기 위해 혼자임에도 나섰다. 찢긴 이마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렸고 어깨에는 감각이 없었다.
“나의 동료를 돌려 다오.”
카일이 알면…… 엘리샤가 알면……. 매튜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다시 자세를 바로세웠다. 카일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구는 바람에 하늘까지 두려움과 공포가 뒤덮였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던 것이다. 마치 카일에게 믿음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별스럽게 달라졌다. 그것이 왜였는지 이제야 알겠다. 좀 늦기는 했지만 이제 깨달았다.
카일은 약속을 생명처럼 지켰다. 토를 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갈취하지 않았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보호였다.
카일은 자신의 사람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자의 가족에게 보복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아주 뚜렷한 선을 그었고 그어 놓은 선을 정확하게 따랐던 것이다. 그것이 주민들로 하여금 그를 달리 보도록 만든 것이다.
매튜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세웠다. 저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나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귀족은 아니나 인간, 매튜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저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나 역시…… 돌아가지 않는다.
엘리샤는 멀리서 들리는 검 부딪치는 소리에 몸을 납작하게 숙이고 더욱 박차를 가했다. 몇 시간을 계속 달린 카일의 군마는 다행히 힘을 내 주었고 거리가 빠르게 좁혀 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그들이 들어왔다. 매튜, 그리고 그를 둘러싼 갈색의 튜닉을 입은 다섯 명의 남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외투를 먼저 풀었고 이어 채찍을 뽑아 들었다.
도성 용병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았을 때 순간 날카로운 뭔가가 바람을 찢고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게 뭐지? 저도 모르게 놀라 더듬거리며 얼굴을 만지작거릴 때 또다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를 동반한 날카로움이 이들의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뭐지? 뭐지?
매튜는 엘리샤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전신이 경직되고 말았다. 맙소사! 도성 수확 축제에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엘리샤가 검술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항상 카일과 함께였고 그 무엇을 하든 카일에게만 하자고 졸라 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련을 할 때 그녀의 목표는 검술을 즐기는 카일을 한번 이겨 보는 것에 있었다.
“엘리샤 님!”
“여긴 나에게 맡기고 우리 문을 여세요.”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으나 호흡은 빨라지고 있었다. 혼자서 싸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3년 전 그때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혼자 싸운 적이 없었다. 스스로 기억을 닫아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떡갈나무 숲에서 있었던 도성 용병들과의 싸움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싸워야 했고 그 덕분에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기억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도 카일을 의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카일의 존재를 뚜렷하게 느끼며 그를 믿고 싸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없다. 그래도 그녀는 싸워야 하고 이들을 전부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
그녀는 호흡을 조절하려 애쓰며 채찍을 넓게 휘둘러 반경을 넓혔다가 순식간에 채찍을 접어 간격을 좁혀 검처럼 사선으로 휘둘렀다. 쩍! 피부에 채찍이 닿을 때마다 핏줄기가 솟구쳤고 엄청난 통증이 그들의 심장을 쥐어짜며 달려들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채찍을 검으로 후려쳐도 엘리샤는 그 힘을 되받아 오히려 다른 자를 후려치는 데 이용했다. 왼손을 잘 쓸 수 없게 됐을 때부터 줄곧 채찍을 연마했었다. 부드러움이 없는 검과는 달리 채찍은 연습하면 할수록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꺾였다. 그것도 상대방이 미처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였다.
그녀는 그들의 손목을 채찍으로 감아 검을 놓치게 하고 이어 손가락에 타격을 가했다. 숨 가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문득 그녀의 눈에 수레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자가 포착되었다. 그녀는 그가 바로 책임자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순식간에 그녀는 가벼운 몸짓으로 눈치 빠르게 대 준 매튜의 손바닥을 딛고 도약했다. 탁! 그녀가 수레에 뛰어오르는 것을 본 도성 장인은 급하게 도망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느새 차디찬 검이 그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저자들을 다 죽게 할 셈인가?”
“나, 나, 나는, 나는.”
도성 장인은 턱을 딱딱 부딪치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매튜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시간이 질질 끌리기는 했지만 여유가 철철 넘쳐흘렀었다. 그저 매튜도 산 채로 데리고 가 조합원들 앞에서 난도질할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나타나자…….
“도성 보석 조합은 정당한 경쟁을 하지 않는군. 사우턴야드를 자율 경쟁 지역으로 선포한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는구나.”
한마디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열을 가리고 싶은가?”
엘리샤는 두툼하게 살찐 장인의 목에 검 끝을 살짝 찔러 넣어 피를 흘리게 하며 냉혹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누가 얼스월드에서 살아남을지 겨루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는 너희를 보호하는 도성 용병들보다 너희를 먼저 칠 것이다.”
헉! 매튜는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친다면 당연히 용병부터 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장인들을? 그것은 듣고 있는 도성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싸움도, 죽음도 도맡아서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샤는 장인의 목에 보다 깊게 검 끝을 밀어넣어 고통을 새겨 주며 말했다.
“돈으로 저들을 사서 살인을 시키는 주체가 너희다. 너희가 멈추지 않으면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가서 내 말을 전하도록. 카일의 아내인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동료들 앞에서 말하거라.”
순간 엘리샤는 쥐고 있던 검을 핑그르르 돌려 순식간에 장인의 오른 손등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아악! 응집된 힘이 그대로 손등을 뚫고 들어갔고 장인의 비명은 처절하게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입 다물라!”
엘리샤는 싸늘한 눈빛으로 장인의 숨통을 조일 것처럼 노려보며 말했다.
“네 고통은 네가 죽인 우리 동료들의 목숨과 절대 비교될 수 없다.”
맙소사……. 매튜는 저도 모르게 입속말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실은 저리도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이제 보니 웨스트필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무섭다. 왕인 알렉스도, 케이 공작도 그렇고, 그리고 엘리샤도 그렇다. 그러자 갑자기 카일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경도 대단하지만 스스로도 대단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기가 눌리지 않다니. 오히려 엘리샤가 카일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런! 정말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었군.”
그 누구도 카일처럼 엘리샤에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내이긴 하지만 절절매며 받들어야 할 텐데 카일은 그녀를 그냥 평범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군. 진짜 대단한 사람은 바로 카일이었다.
루는 갑자기 안에서 들린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우당탕탕. 뭔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루는 서둘러 정확하게 길이를 측정한 나무를 도끼로 자르라고 지시를 내린 후 카일의 저택 근처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문에 귀를 바짝 대자 안에서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다시 우당탕탕 넘어지는 소리. 욕설 비슷한 거친 소리가 웅얼거리며 안에서 들려왔다.
“카일 님?”
괜한 두려움에 문을 열지는 못한 채 루는 밖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리…… 에리?”
에리? 아마도 엘리샤를 찾는 듯했다. 루는 문밖에 서서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마님은 지금 잠시 밖에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신다고 했으니.”
미처 그 말의 끝을 맺기 전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카일이 어지러운 듯 한 손을 관자놀이에 대고 다른 손으로 문가를 짚은 채 서서 루를 노려보고는 다시 부정확한 발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무…… 어라? 에리가 어디로 가다고?”
루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지만 그래도 바로 대답했다.
“돌아오지 않은 일행과 매튜를 찾아 잠시 나가셨습니다.”
순간 균형을 잃은 카일은 그대로 우당탕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루가 황급히 일으키려 하자 카일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머리가 마비된 것처럼 생각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인적으로 다시 일어섰다. 엘리샤가 없다고? 그에게 오로지 그 말만 제대로 귀에 들어와 박혔다.
루는 비틀거리며 걷는 카일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정신이 없어 보이지? 그런데 화가 아주 많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평소 카일이 부드러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지금은 너무 무서웠다.
어두컴컴한 부엌 한쪽 구석에 놓은 물동이로 다가간 카일은 떨리는 손으로 바가지를 들어 차가운 물을 연신 뒤집어썼다. 순간 소름이 돋아오르며 정신이 보다 돌아오는 듯했다. 그런데 뭔가 구역질 나는 비린 맛이 입 안에서 뚜렷하게 느껴졌다. 욱! 저도 모르게 토할 뻔했던 카일은 물을 더 뒤집어썼다. 춥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결국 속이 뒤집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는 허리를 꺾어 토하고 말았다.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미친 듯이 화가 나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두려움에 벌벌 떠는 소리가 들려오자 카일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나가!”
카일은 자신의 이런 상태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러다 그는 다시 고개 숙여 토하고 말았다. 토하면 웬만큼 속이 나아져야 하는데 지금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토하면 토할수록 그의 속이 뒤집어졌고 엉금엉금 길 힘도 사라졌다.
이렇게 무기력한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더구나 미치겠는 것은 아까 누가 뭐라고 말했는데 그게 누군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엘리!”
그는 엘리샤를 부르짖었다. 이런 자신을 잡아 줄 사람은 그녀뿐.
“엘리!”
싸늘한 정적만이 되돌아왔다. 으아아악! 카일은 너무 답답한 나머지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다시 조심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샤 님은 돌아오지 않는 일행을 찾아 나가셨습니다.”
그 말에 순간 카일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일행? 일행이라니. 그의 기억에는 찾으러 나가야 할 정도로 늦은 일행이 없다. 내일 오전에 도착할 일행은 있어도. 혹시…….
“내가 얼마나 집에 있었나?”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닌 일행. 돌아오지 않는 일행.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루 하고 반나절 이상입니다. 이제 해가 저물고 있으니까요.”
맙소사, 난 왜 기억이 없지? 그때 다시 속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 구역질 나는 비릿한 맛은 도대체가! 가까스로 몸을 추린 카일이 다시 찬물을 뒤집어쓰며 물었다.
“엘리가 나간 지 얼마나 됐나?”
“아침에 나갔으니 벌써 반나절 이상은 됐지요.”
설마 당신…… 나에게 약을 쓴 건가? 일부러 나를 자게 한 건가? 맙소사. 엘리. 도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망할! 엘리!”
순간 카일은 제어할 수 없는 폭발적인 분노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엘리샤는 길을 재촉하면서도 연신 잭과 장인에게 신경을 쏟았다. 사람들을 편하게 데리고 오기 위해 도성 장인의 수레를 아예 뺏어 버린 엘리샤였다.
“엘리샤 님. 앞에 횃불이 보입니다.”
그 말에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횃불?
“신호를 보내는 것을 보니 우리 편입니다.”
그럼 루가 밤길을 밝히기 위해 사람들을 내보낸 건가? 엘리샤는 저절로 떨리는 손길로 말고삐를 바짝 쥐었다. 매튜가 수레 옆에 꽂아 놓은 횃불로 역시 신호를 보내자 반대편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엘리!”
아, 이런. 엘리샤는 그의 음성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욱죄어 들어왔다. 분량 조절에 실패한 것인가? 아직 잠들어 있어야 할 카일이 왜…….
“엘리!”
“엘리샤 님. 카일 님이 나왔는데요?”
매튜는 그 자리에 멈춰 버린 엘리샤를 보고 의아해하며 말을 건넸다.
“왜 그러십니까?”
엘리샤는 그 음성이 어떤 음성인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분노, 걱정, 그리고 또 분노. 엘리샤는 저절로 목이 메어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야겠어요.”
“별말씀을요.”
매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샤는 서둘러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카일이 화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 그녀가 봤던 그 어떤 분노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러했다. 그리고 카일과 마주했을 때 엘리샤는 뭐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쫙! 뭔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매튜는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 뺨을 후려친 소리 같았다.
“설마…… 그럴 리가…….”
그렇지. 설마지. 잘못 들은 거겠지. 매튜가 부상자들이 많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계속 몰고 가는데 카일의 음성이 들렸다.
“사상자가 있나?”
“숀과 나엘을 잃었습니다.”
카일은 뜻밖의 말에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매튜는 더욱 죄책감이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잭과 장인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엘리샤 님이 오지 않았다면 저도.”
“보고는 아침에 받겠다. 그들을 책임지고 잘 돌봐 주도록.”
“알겠습니다.”
엘리샤는 그대로 거칠게 침대로 밀쳐져 나동그라졌다.
“카일!”
그녀는 이렇게 거친 카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뺨을 후려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딱딱하게 경직된 그의 음성. 분노로 검게 물든 그의 눈동자. 엘리샤는 뺨의 통증은 거의 느끼지도 못했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당신의 부상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내 머리꼭대기에 기어올라 쥐락펴락하려는 것이 아니고?”
순간 카일이 아찔한 현기증에 크게 비틀거렸다.
“카일!”
카일은 황급히 한 손으로 벽을 짚어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 끔찍했다. 엘리샤의 말도, 표정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금세 잊어 갔다.
“아니요. 당신의 눈에는 문제가 있잖아요. 당신은 그것을 나에게 감춘 거잖아요.”
엘리샤는 나동그라진 몸을 벌떡 일으키고 거세게 반발하며 소리쳤다. 그가 뺨을 후려쳤다. 어떻게 그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나는 분명하게 말했소. 문제없다고. 괜찮다고. 내 말을 믿지 않은 건가?”
“당신 뒤통수에는 혹이 있었고 거기서 짜낸 고름만 해도.”
“닥쳐!”
순간 엘리샤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저도 모르게 공포를 느끼다니. 카일에게 이런 느낌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당신…… 그렇게 무섭게 굴지 마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카일이니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무서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카일은 방 한쪽에 있는 약물이 담긴 궤짝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벽으로 집어던졌다.
“카일…… 나 무서워요. 그러지 마요…….”
카일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자신을 지배하는 듯했다. 화를 내면 낼수록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악마가 그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부추기는 것처럼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았다. 퍽퍽퍽퍽. 그는 난폭하게 바닥에 떨어진 궤짝을 발로 마구 짓밟아 댔다. 이 약 때문에 내가 지금!
그때 엘리샤의 떨리는 음성이 가느다랗게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나는 아내로서 할 일을 한 거예요. 당신은 부상을 입었고, 나는 그것을 치료하려고 한 것뿐이에요.”
카일은 이제 똑바로 서서 허리춤에 손을 대고 그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엘리.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내게 토 달지 말고 복종해.”
엘리샤는 숨 막히는 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짐승처럼 핏발이 곤두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모르겠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훗! 그가 산산조각 난 파편 위에 서서 그렇게 싸늘히 비웃자 엘리샤는 가슴이 정말 아픈 게 무엇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리고, 저리고, 갈가리 찢기는 것 같다. 너무 아파서 눈물까지 고여 들고 말았다.
“대답해. 복종하겠다고 대답해!”
천천히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두 눈을 번득이며 답을 재촉하는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만일 내가 못하겠다면요?”
카일은 위협적인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내뱉듯이 말했다.
“못하겠다고? 어째서, 왜?”
더욱 뜨거워진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태우며 흘러내렸다. 그는 마치 그렇게 소리치는 듯했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놓고 무슨 헛소리냐고 소리치는 듯했다. 엘리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부상…….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카일이 그녀의 어깨를 뒤로 밀어 침대로 쓰러트렸다.
“카일!”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 딱 두 가지.”
카일은 그녀의 몸을 찍어 누르고 드레스 앞섶을 거칠게 낚아채며 소름 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섹스와 복종. 그 외에 아무것도 필요 없어.”
엘리샤는 찢어진 옷깃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그의 손이 아프게 젖가슴을 꽉 움켜쥐자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카일. 난 그 정도로 만족 못하겠어요. 난 당신의 진실한 동반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 카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놈의 동반자!
“왜 자꾸 나를 웨스트필드 남자와 비교하는 거요? 왜!”
엘리샤가 미처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부욱! 드레스가 다시 찢겨 나갔다. 그 서슬에 그녀의 몸이 크게 출렁거리며 침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몇 번을 말해야 하지? 난 카일이라고. 그 빌어먹을 웨스트필드 남자가 아니라고!”
엘리샤는 그의 무례한 말에 가슴이 이제 난자당하는 듯했다. 그가 너무 아프게 한다.
“당신…… 나 사랑하는 거 맞아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 붉게 물든 눈으로 그녀의 눈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그녀의 허벅지를 억지로 벌렸을 뿐이었다. 미쳤나 보다. 나 지금 미쳤나 보다.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그랬지?
“나 사랑해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순간 엘리샤의 두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손으로 치며 그에게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카일은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찍어 누르고 자신의 어깨와 가슴을 치며 저항하는 그녀의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더욱 거세게 자신의 남성을 그녀에게 밀어넣었다.
당연히 사랑하지. 당신만 사랑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쓰라리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엘리.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이튿날 새벽. 그는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지끈. 카일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버렸다.
“머리가……. 엘리, 머리가…….”
카일은 한 손을 뻗어 옆을 더듬거렸다. 이렇게 심한 두통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필요하다. 읍! 카일은 계속 옆을 더듬거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엘리.”
그러나 엘리샤가 만져지지 않았다. 순간 카일은 두통에도 불구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엘리!”
순간 그는 깜짝 놀라며 바닥을 응시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바닥이 난장판이었다. 산산조각 난 궤짝 파편. 갈색 병 조각들. 흥건하게 고인 액체. 카일은 침대에서 내려와 서둘러 엘리샤를 찾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엘리샤는 무사한가?
“엘리!”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 그의 두통마저 밀어내는 듯했다. 왠지 머리도 맑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무엇에 중독된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더욱 깜짝 놀랐다. 당한 건가? 우리가 지금 습격에 당한 건가?
침실에서 벗어나자마자 카일은 순간 얼어붙은 듯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엘리?”
그녀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찢어진 드레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머릿속을 어떤 장면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와 말다툼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낸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뭐라고 그랬는데……. 그러나 단편으로 조각난 장면만 머리를 스칠 뿐 연결되지는 못했다.
엘리샤는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찢어진 드레스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밤새도록 그러고 있었던 듯했다. 카일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맙소사, 엘리…….”
갑자기 귓가에 소름 돋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쫙! 순간 카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내가? 내가 그런 건가? 내가?
엘리샤는 그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뺨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그의 걱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아니었다. 공포를 느끼게 한 그가, 힘으로 그녀를 누른 그가 그녀의 영혼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다. 계속 참았었다. 그의 성격과 자존심을 알기에 그러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자신. 자신 때문에 손가락 마디가 잘렸고 눈에도 이상이 생겼다. 험프리에게 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린 자신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를 사랑한다. 그를 너무도 사랑한다. 그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랑일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이렇게 된 그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기 위해 이러는 것 아닐까? 우리는 지금 사랑과 책임을 혼동하고 있는 거 아닐까?
카일이 몸을 일으키더니 물에 젖은 수건을 가지고 와 그녀의 뺨에 수건을 대 주었다. 그녀의 깊게 가라앉은 검푸른 눈동자와 맑은 정신을 반영하는 듯한 새파란 눈동자가 지척에서 마주쳤다.
“카일.”
카일은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단편의 기억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상하게 화가 난 기억. 걱정으로 가슴이 무너지다 못해 분노로 변해 버렸던 기억. 그런데 손찌검을 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그러자 이번에는 구역질 나는 비릿한 맛이 떠올랐다. 약……. 그는 하루 하고 반나절 이상이나 잠들었었다는 것도 떠올랐다.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를 미치게 만든 게 무엇인지, 그의 기억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약. 웨스트필드의 명물, 약!
“어제 왜 그랬어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랬어요?”
엘리샤는 대답하지 않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다시 물었다. 듣고 싶었다.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도대체 왜! 왜 그랬는지 설명을 듣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변명을 하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았지만 변명을 해서 그녀가 가진 웨스트필드에 대한 자부심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엘리샤는 짧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이번에도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구나.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끈이 ‘뚝!’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듯했다.
“옷을 다른 것으로 가져오겠소.”
사납게 찢긴 드레스. 그가 이런 짓을 했다. 그러자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드레스만 찢은 게 아니었다.
“내가 당신에게 복종하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음성의 고저 없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무도 삭막하고 메마른 음성. 이런 음성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때론 밝고, 때론 유혹적이고, 때론 지독하게 사랑스럽고, 때론 어머니처럼 부드러웠다. 그렇게 다채로운 색을 가진 그녀의 음성이지만 이렇게 메마른 음성은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스스로가 수치스럽고 창피한 나머지 그의 말이 경직되어 무뚝뚝하게 흘러나왔다.
“대답하세요. 내가 복종하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할 건지.”
카일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잖소.”
그러나 엘리샤의 귀에 그의 사과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엘리샤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와 마주 섰다.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그녀의 품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빛나는 듯했다. 그것은 그녀의 달라진 표정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카일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자 그녀가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한 짓, 다 사과하겠소. 내가 잘못했어. 당신에게 상처 입혀서 정말 미안해.”
“어제뿐이 아니에요.”
엘리샤가 지독하게 메마른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불길한 예감이 더욱 짙게 카일을 사로잡았다. 아……, 이것만은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데. 그녀에게 자신의 부상을 털어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릇된 오만함과 잘못된 판단이 빚어낸 자신의 부상.
“이제 그만해요.”
“뭐?”
쿵! 가슴이 덜컥 주저앉는 듯했다. 카일은 손을 뻗어 엘리샤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았다.
“교황께 이혼 신청을 하겠어요.”
쿵! 순간 카일은 낯선 충동에 입을 꽉 다물었다. 약물이 너무 지독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또 앞을 가로막았다. 약을 쓴 그녀가 누구보다 그 약의 후유증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남들은 멀쩡했으니 카일에게 그 약을 자신 있게 쓴 것일 거다. 그럼 이것은 변명이 안 된다. 치사하고 조잡한 말의 찌꺼기일 뿐.
엘리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문 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 하는 나는 정말 나쁜 년이에요. 당신을, 백작의 후계자인 당신을 이렇게 용병으로 전락시킨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난 정말 나쁜 년이에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지금까지 알던 엘리샤가 아닌 듯했다. 그녀는 마치 단단히 잡고 있던 마음의 끈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카일은 떨리는 손길로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저지했다.
“이제 깨달아서 미안해요. 당신 말대로 나는 당신의 인생을 망치는 여자였어요.”
카일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아니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그만해.”
엘리샤의 담담함이 무너졌다. 그녀는 곧 울 것처럼 너무도 서글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의무이자 책임감이었어요. 나의 기사였기에, 그것이 뼛속까지 스며든 의무였기에 나를 사랑하는 거라 착각했던 거죠.”
카일은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그녀가 너무 슬퍼해서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엘리.”
“엘리샤. 내 이름은 엘리샤예요. 다들 그렇게 나를 불러요. 그러니 이제 당신도 그렇게 불러 주세요.”
엘리샤의 커다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말없이 카일과 마주 선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 무명지에 끼고 있던 헐거운 반지를 빼 그에게 내밀며 목이 메는지 속삭이듯 말했다.
“이혼해 주세요.”
“엘리!”
순간 그의 언성이 버럭 올라갔다. 그는 사납게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편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어제 그녀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손찌검을 했고, 강제로 안았고, 무섭다고 말하는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그래, 그가 다 잘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잘못됐다. 그녀를 의무로 지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녀를 너무 지독하게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
“어제의 일은 내가 다 잘못했으니 당신이 나에게 욕을 하든 때리든 다 감수하겠소.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하지. 난 의무로 당신을 지키는 것이 결코 아니오. 그랬으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내 진짜 의무는 당신이 아니라 노스턴야드에 있었으니까.”
“나를 위로하지 마세요, 카일. 이제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곁을 스쳐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카일은 다급하게 그녀를 따라잡았다.
“당신을 사랑해. 너무 사랑한다고. 당신 없으면 죽을 거 같아, 엘리.”
“엘리샤라고 부르세요.”
카일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영원히 그의 엘리다. 그만의 엘리다.
“난 당신에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소. 당신의 안전을 시작해서 당신이 누렸던 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다 해 주고 싶어. 그래, 난 당신이 보는 것처럼 다정한 남자가 결코 아니야. 하지만 내 사랑을 의무라고 말하지 마. 제발 내 잘못만 탓해.”
그는 저도 모르게 생전 처음 변명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변명을 저도 모르게 서툴게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카일…….”
“나는 당신이 그저 사랑만 하며 살게 해 주고 싶어. 귀하게 자란 당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당신까지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소. 그것을 복종이라 표현했지만 당신은 그게 내 보호라는 것을 알잖소. 나는 당신을 내 품에서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오.”
엘리샤는 정말 안타까워하며 입을 열었다.
“카일. 당신은 당신이 옳다고 믿죠? 나도 내가 옳다고 믿어요.”
정말 끝내려는 것인가? 순간 놀라울 정도로 지배적인 말이 카일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나는 당신이 내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소. 무조건 내 눈에 보여야 해. 불안해. 당신을 잃을까 두려워. 당신이 그동안 봐 온 사랑과 완전히 다른 방식인 것은 아나, 나는 카일이오. 일라이 공작님도, 알렉스 전하도, 케이 공작도 아니란 말이오. 이런 내 방식을 이해해 주면 안 되겠소?”
카일은 생전 이렇게 절박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억장이 무너진 적도 없었다. 도성에서 쫓겨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또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 당신 보기에 어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하는 거요. 사랑에 서툰 내가, 여자에게 서툰 내가 노력을 하고 있단 말이오. 더 노력하겠소.”
그러나 엘리샤는 그의 말은 이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했다.
“난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카일.”
거짓말처럼 카일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된 듯했다. 숨조차 멈춘 듯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도 믿기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듯 공허한 빛을 품은 채 멈춰 버렸다. 엘리샤가 즉시 자신의 말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엘리샤가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카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루가 다가오는 것을 보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일을 의뢰받았는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카일은 냉랭하게 캐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루는 즉각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카일은 그 즉시 감이 왔다. 그는 말없이 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됩니다.”
그러자 카일은 빠른 손길로 루의 가슴팍을 강제로 뒤적거려 엘리샤가 맡긴 양피지를 찾을 수 있었다. 엘리샤가 떠난다는 것을 강제로 가로막자 웨스트필드로 전갈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읽어 보지도 않고 바로 양피지를 갈가리 찢으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헛수고를 하는군, 엘리.”
절대 보내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곁에 붙잡을 것이다. 카일이 양피지를 찢는 것을 본 루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엘리샤는 이 편지를 주면서 카일 몰래 가라고 했지만 이미 카일에게 명령을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찢으면 난 어떻게 하라고?
“괜찮다, 루. 엘리에게는 나한테 잡혔다고 하면 된다.”
알쏭달쏭한 말. 왜 그러지?
카일은 엘리샤와의 갈등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루.”
그는 아예 엘리샤가 신뢰하는 용병들에게 없는 일감을 만들어 밖으로 보내 버렸다.
12월 하순. 완연한 겨울이다. 그런데 용병의 겨울은 아주 냉혹한 듯했다. 거짓말처럼 일이 뚝 끊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던 사우턴야드이기에 그랬다. 이들은 사우턴야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 경쟁하며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굶는 사람도 속출했고 헐벗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종종 목격됐다.
그날도 카일은 매튜를 데리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도시 전체의 겨울나기를 혼자 책임지기에는 그의 주머니도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많은 물건을 확보했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공평하게 나눠 주려고 애를 썼다.
사람을 살게 해야 한다. 그래야 도시가 존재한다. 일정한 계절에만 먹고 그 외에는 굶주려야 한다면 그것은 도시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할 일은 점점 더 늘어났다. 기본적인 의식주, 그리고 안전. 카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바로 도시의 기초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웨스트필드 케이 공작이 보낸 수레들이 도착했다. 엘리샤가 리지를 통해 요청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많았다. 하지만 여동생을 생각하는 케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어 그냥 받았으나 손대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노스턴야드에서 보낸 수레 다섯 대가 도착했다. 키안이 보낸 것이었다. 카일은 그것도 일단 받았다.
“날도 추운데 오늘은 적당히 하는 게 어떻습니까?”
매튜는 카일의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뭘?”
“훈련 말입니다. 훈련만 해도 하루 일당을 책정하지 않습니까? 전 그것을 적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불필요한 적선 말입니다.”
카일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건 적선이 아니라 투자라는 거다, 매튜.”
“그거나 이거나.”
엘리샤가 그립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읽어 내는 그녀가 너무도 그립다. 카일은 입매를 굳힌 채 계속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동안 무질서한 이 도시에 질서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알렉스가 부여한 의미를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 노력한 만큼 누구나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율 경쟁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런 거 아니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의 배만 일방적으로 불린다면 그 의미가 없지 않은가? 카일은 장인들에게 임금 조정을 요구했고 협상 중이다. 그런데 난항이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약점 때문에 장인들의 콧대가 너무 올라가 있는 탓이었다.
“꼭 꺾어 주지.”
기다리면 봄이 온다. 그럼 일감이 다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카일은 봄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듀팡을 통해 들은 1월 마지막 날에 열린다는 보석 경합. 그동안 사우턴야드 장인들은 그 경합에 정식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다. 도성 보석 조합의 강력한 텃세 때문이었다. 그것이 시작. 지금은 그것을 위한 준비 시간.
처음에는 용병들을 장악해 단순히 정착하려고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그 의미가 이렇게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엘리샤 때문이었다. 그녀가 있기에 그렇게 바뀐 것이다.
이윽고 거리를 한 바퀴 다 돈 후 카일은 매튜에게 지시를 내렸다.
“훈련 시작하기 전에 몸이 상하지 않게 충분히 풀어 주고 하도록.”
“알겠습니다.”
입이 댓 발 나온 매튜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카일은 매튜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언덕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샤…… 그녀가 문을 걸어잠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늘도 문을 열지 않을 건가?”
카일은 눈으로 덮인 언덕길을 걸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문에 빗장을 거는 바람에 그는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로 인해 언덕 위에서 같이 생활하던 매튜와 몇 명의 수하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처음에는 무슨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싶어 불안해했었다. 하나 카일이 완전하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불안했던 분위기를 다독이며 치안에 힘을 써 주자 마을 사람들도 점차 이들에게 살갑게 굴었다. 이제는 카일과 같은 곳에 있는 것보다 마을에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카일은 그렇게 엘리샤와의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저들은 모른다. 언덕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언덕 위는 이제 철저하게 카일과 엘리샤만의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문질렀다. 하루에 몇 번이고 문을 부숴서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가슴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는 걱정이 지나치면 그럴 수 있다 여겼던 생각을 달리 했다. 엘리샤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그것은 엘리샤에게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이제는 그것을 분명히 알겠다.
그래도 그는 스스로를 자제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그녀의 집 앞에 필요한 것을 담은 바구니와 물을 떠 놓으면 그녀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다만 카일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카일은 새롭게 생긴 버릇처럼 엘리샤가 머물고 있는 집 주변을 순찰하듯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사랑하는 여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다니.”
그래도 참아야 한다. 그녀를 보낼 수 없다. 그녀의 외면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점점 더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심장에, 머리에, 전신을 도는 핏방울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녀를 너무도 사랑한다. 그녀를 내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 그런 그녀를 보내면…… 그는 미쳐 버릴 것이다.
이윽고 한 바퀴를 다 돈 카일은 다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엘리. 엘리.”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카일은 뚜렷한 목소리로 안까지 전달되게끔 말했다.
“다른 사람이 곤란할 일은 하지 않길 바라오. 이혼은 절대 없으니까.”
그러자 그제야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려, 엘리. 가까이 와서 말하시오.”
카일은 그러면서 한 손을 들어 문에 대 보았다. 그녀가 이 문 건너에 있다. 그녀를 잠시라도 느껴 보고 싶었다.
“고집 부리지 마요.”
왠지 힘이……. 카일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 괜찮소? 어디 아픈 거 아니오?”
“가세요.”
카일은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말았다. 저절로 조바심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그녀의 음성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오? 덧문으로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오는 거 아니오? 엘리, 문을 좀.”
“난 당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나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제 내 기사가 아니에요.”
“엘리, 이 문을 열라니까.”
“나를 놓아줘요, 카일. 여기에 가두지 말고 보내 주세요.”
순간 카일은 울컥하고 말았다. 그녀의 고집이 너무 지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간신히 꾹 눌러 참으며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엘리, 그러지 말고 나를 직접 보면서 분풀이를 해.”
카일은 차가운 나무 문에 귀를 바짝 대며 안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분명 아프다. 어디가 많이 아픈 거다. 그러다 퍼뜩 갑자기 떠올랐다.
“당신 혹시 임신한 거 아니오? 그래서 몸이 안 좋은 거 아닌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카일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알아차린 듯 안에서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다.
“임신 안 했어요. 설령 아이가 생겼어도 그 아이를 빌미로 당신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엘리!”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듣지 않고 있었다. 그냥 문을 부서뜨려야겠다는 생각에 카일은 뒤로 한 발 물러나 발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리를 내렸다. 후욱. 후욱. 후욱. 카일은 자신을 다잡기 위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샤를 또다시 놀라게 할 수 없다. 이미 충분히 놀라지 않았던가…….
그는 나직하게 다시 말을 시작했다.
“오늘 노스턴야드에서 수레가 다섯 대 왔소. 아버지가 보내신 거요. 평소 내 성격이라면 난 받지 않았을 거요. 하지만 받았소. 아버지가 보내신 털가죽으로 외투를 만들 거고 장갑을 만들 생각이오.”
그리고 그것도 말했다.
“케이 공작님께서 당신을 위해 물건을 보내셨소. 사실 도착한 지 며칠 됐는데……. 하아…….”
그녀의 마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받아 두기만 하고 손도 대지 않았다. 케이가 보낸 것들. 웨스트필드의 물건들. 그녀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웨스트필드.
“내가 잘못했소, 엘리. 당신에게 한 짓, 용서받기 어렵다는 거 알아. 그래도 당신 놓아줄 수 없소. 당신 없이는 나도 안 되니까. 당신이 이 문을 열면 케이 공작님이 보낸 것을 들여보내겠소. 그러니 이 문을…… 열어 줘. 제발, 엘리.”
엘리샤는 우두커니 서서 그의 음성을 듣기만 했다. 가슴이 아린 것도, 전신이 아픈 것도 다 사라지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좋다니. 아픈 것도 다 사라지는 것 같다니. 그와 문 하나를 두고 혼자 있자 1분, 1초마다 그가 그리웠다. 눈을 감아도 그가 보였고 눈을 떠도 그가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버렸다. 몸살이 단단히 났다. 며칠 동안 계속 앓아 누웠다. 그가 그립다. 그래서 아팠다.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게 아팠다.
카일은 오늘도 열리지 않은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성질머리를 단단히 다잡고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잘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줬다. 빌어먹을 자존심.
“이럴 때 리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리지에게 생각이 미쳤다. 웨스트필드에서 수레는 왔는데 왜 그녀는 오지 않은 것이지? 그러나 뭘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웨스트필드까지 가서 리지에게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키안이 보낸 물건이 담긴 창고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카일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기함할 짓을 했다. 특히 키안이 그를 봤다면 정말 그에게 백작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카일은 키안이 보낸 털가죽 몇 개를 들고 왔고, 그것을 아예 엘리샤가 굳게 닫은 문 앞에 펼친 후 털썩 누워 버렸다. 누가 보든지 말든지 이제 애가 타서 도저히 안 되겠다. 그녀가 느껴지는 곳에서 잠을 자야 한 시간이라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카일은 벌렁 누운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백작으로서는 아예 자질이 없었군. 여자 한 명 때문에 도대체 내가!”
그는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엘리샤가 느껴지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이어 중얼거렸다.
“이놈의 본능은 그 여자밖에 모르는데 그 여자는 이런 것도 모르고 나를 미워하다니. 아버지가 보시면 나를 쫓아낸 것이 지극히 옳았다는 것을 금세 아시겠군.”
키안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가슴 깊은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경악과 충격, 그리고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그가 도시의 기초부터 만들려니 키안의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노스턴야드를 만들기 위해 키안은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러니 당연히 후계자가 저보다 뛰어나 영지를 이어 가길 얼마나 바랐을까……. 그것을 느끼게 되자 분노와 배신감이 사라졌다. 전부터 키안의 마음을 하나씩 이해할 때마다 사라졌던 분노와 배신감이 그것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키안에 대한 애정이 다시 자리 잡았다. 존경하는 아버지, 키안. 언제나 애정과 경외를 담아 바라보던 아버지, 키안. 그러다 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케니스를 교육시키려면 애를 많이 먹으실 텐데. 케니스가 도망치지 않았나 모르겠군. 그래도 결정한 것은 번복하지 않으시니 끝까지 케니스를 붙들고 교육시키시겠지.”
후후후. 카일은 실로 오랜만에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밤하늘에 샛별이 한가득이다. 반짝거림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이렇게 눕지 않았다면 몰랐을 장관이었다.
“당신도 보고 있나, 엘리? 당신 눈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별이야.”
카일은 제 왼손을 뻗어 밤하늘에 비추어 보았다. 이제 통증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왼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왼손이었다. 이 손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을 것이다.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다니. 도대체 그 약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그러나 차마 그녀에게 말할 수 없다. 그녀는 눈부신 웨스트필드의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웨스트필드의 험담 아닌 험담을 할 수는 없다.
아……. 가슴이 저려서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 정말 가슴 아려 죽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죽겠다.
“당신이 좀 가르쳐 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를 좀…… 가르쳐 줘.”
그 시각 리지는 부푼 희망을 안은 채 무사히 바다를 건너 네파르나에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