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3)

12

카일은 초조한 손짓으로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는 알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어둠에 잠긴 눈으로 엘리샤의 숨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눈이 왜 이럴까? 처음에는 뒤통수에 생긴 혹 때문인 줄 알았다. 전에 찢어졌던 상처가 덧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은 멀쩡했다. 잘 보였다. 그러니 혹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럼 왜 또 이러는 걸까? 이러다 괜찮아지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안 보이는 걸까?

아……. 카일은 양손으로 두 눈을 거칠게 비벼 댔다. 그 무엇이든 간에 아주 미치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니. 이건 마치……. 그때 엘리샤의 호흡이 달라졌다. 잠에서 곧 깨어날 것처럼 느껴졌다. 카일은 자신의 두 눈을 더욱 거칠게 비벼 댔다. 제발 보여라. 제발. 엘리샤에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으니 제발!

“카일?”

카일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녀를 볼 수가 없다니.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볼 수가 없다니. 그런데 그 순간 희미한 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슴 떨리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카일은 제대로 보일 때까지 계속 그렇게 앉아서 기다렸다.

엘리샤는 피부에 와 닿는 초겨울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알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카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덧문을 닫았으나 그 틈새를 완벽하게 막지 못해 스며드는 초겨울 바람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사우턴야드의 아침 햇살이 가늘게 카일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 순간 엘리샤는 가슴이 철렁 주저앉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나?”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갑자기 꽉 막히는 듯했다. 정말 그의 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카일. 왜 거기에 그렇게 있어요?”

그녀는 최대한 떨림을 삼키며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꼭 확인을 해야겠다 싶어 엘리샤는 침대에서 내려와 카일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두 발짝도 채 떼지 않았을 때 갑자기 카일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한동안 더 시끄러울 거요. 그러니 마을로 내려오지 마. 위험하니까.”

이어 카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엘리샤는 그가 입맞춤을 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옷가지를 줍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답답함이 순식간에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말하지 않는 것일까?

그가 아무리 노스턴야드 남자라 해도, 그가 아무리 여자와 그 무엇도 나누지 않는 남자라 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는 오로지 침대에서만 필요한 여자가 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순간 엘리샤의 검푸른 눈에 화르르 불이 지펴지는 듯했다.

“당신!”

카일은 바지를 입고 이어 셔츠를 입으며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엘리샤는 양손을 꽉 거머쥐고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을 너무 뒤로 미루는 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요?”

카일은 새파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천만다행으로 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일시적인 것이다. 피곤해서 그럴 것이다. 괜찮을 것이다.

“난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기다리고 있어요, 카일.”

“무슨 뜻인지 물었소.”

“당신이 나를 정말 아내라 생각한다면 나에게 무엇이든 말을 해 줘야 해요. 당신의 부상도 마찬가지예요.”

카일은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차갑게 힐난했다.

“아침부터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하루 시작을 망치게 해야겠소?”

엘리샤의 얼굴이 순간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하게 된 인생. 카일이 그녀에게 자신은 웨스트필드 남자들과 다른 대부분에 속하는 남자라고 한 것처럼 그녀 역시 대부분에 속한 여자가 아닌 웨스트필드에서 자란 여자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교육을 받아 왔다. 어쩌면 극과 극에 선 교육을 받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도 그녀는 계속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다. 역시 내가 의논할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인가? 엘리샤는 경직된 음성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등에 대고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카일은 문고리를 잡으려다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무슨 소리요?”

“나에게 순종만 원하는 건가요?”

“엘리!”

그는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그녀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우리 어제 좋았지 않았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엘리샤가 그 답을 주었다.

“당신이 나에게 웨스트필드 남자들과 다르다고 말했듯, 나 역시 다른 여자들과 달라요. 나는 어찌 됐든 웨스트필드에서 자랐으니까요. 당신의 이런 태도는,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그런 태도는 나를 힘들게 해요.”

이제야 감이 왔다. 그녀가 화난 이유. 카일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에게 말하라고?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일시적이나마 병신처럼 된 것을 말하라고? 말도 안 된다. 순간 카일의 자존심이 그 칼날을 날카롭게 번득이고 말았다.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소? 아직도 나라는 남자를 모르나? 이런, 엘리!”

카일은 신랄하게 내뱉고 말았다.

“당신 의외로 아주 평범하군. 그래서 내 여자가 된 거겠지만. 공작님 내외께서 당신에 대해 많이 아쉬워했을 게 틀림없어.”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녀의 말을 더 들을 수가 없다. 저도 모르게 또다시 그녀에게 날을 세우고 만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더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다.

“아무튼 내 말 기억하도록 해. 당분간,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꽝! 문이 닫히자마자 엘리샤는 아찔한 어지러움에 휘청거리고 말았다. 싸늘한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너무도 뜨거워졌다. 어지럽다. 머리도 어지럽고 마음도 어지럽다.

나는 도대체 그에게 어떤 존재라는 뜻인가? 그가 말하는 사랑은 내가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는 뜻인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카일의 말대로 평생 책상 위에 놓인 얼스월드를 보고 한정된 사람만을 봤던 그녀이기에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겨우 그 정도라는 뜻이라는 건가? 엘리샤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악문 입술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카일의 진짜 마음이 엿보이는 듯했다. 알렉스, 케이처럼 그도 그런 것이다. 두 오빠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뜻을 강조했던 것은 모두 같은 이유라 생각해 왔었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삶보다 자신들이 만들어 주는 삶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보다 깊게 파고들어가면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이 툭 튀어나온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카일도 그런 것이다.

엘리샤는 고개를 숙인 채 뜨거운 눈물을 바닥으로 뚝뚝 떨어뜨렸다. 악문 입술 사이로 자꾸 울음이 나올 것 같아 더욱 꽉 물었다. 카일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를 신뢰하진 않는다. 그녀를 믿지는 않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원인은 바로 자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또 한차례 격렬한 다툼이 사우턴야드의 아침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번 다툼은 용병들이 서로 죽이든 말든 관심 없던 장인들의 호기심도 자아냈다. 용병이 용병을 고용하는 형태라니. 어제는 숨 죽였던 잔당들이 루카의 복수를 핑계삼아 반발을 했고 또다시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인들이 거주하는 석조 건물에서 이를 바라보던 듀팡은, 팔짱을 끼고 선 채 매튜의 일전을 주시하고 있는 카일의 옆모습을 살펴봤다. 차디찬 오만함이 가득한 얼굴로 싸늘하게 지켜보는 카일.

“아무 쓸모 없는 싸움을 걸고 있군.”

듀팡이 보기에 이미 판도가 달라졌다. 루카라는 구심점을 잃은 저 잔당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카일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또다시 카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듀팡은 슬며시 비웃음을 짓고 말았다. 1주일을 겪고도 아직도 모르다니. 아니면 알면서도 승복을 하지 못하는 건가.

“무식하기는…….”

그래서 저 용병들을 부려먹기 편했는데 이제 그런 날도 끝났다. 카일이 저렇게 고용주가 되겠다고 나선 이상 달라질 것이다. 듀팡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처럼 호기심이 생긴 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을 정말 이들이 알까 모르겠다.

“아마 모를 거다. 직접 겪지 않고서는.”

카일은 정말 남다르다. 그는 어쩌면 용병의 세계를 재편성할지도 모르겠다. 왠지 그는 그럴 것만 같다.

“계약서가 또 작성되겠군.”

듀팡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망할 계약서.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그러자 반사적으로 엘리샤가 떠올랐다. 끙! 망할…… 피할 방법이 없다. 빌어먹을!

길게 뻗은 카일의 손이 매튜의 목덜미를 낚아채 뒤로 밀쳐 내자 매튜는 그의 가슴을 찔러 오던 단도 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카일은 매튜를 안전하게 보호한 채 믿기지 않는 힘과 속도로 자신들을 찔러 들어온 검들을 한꺼번에 쳐냈다. 채챙챙! 날카로운 빛이 눈을 찌르더니 부러진 검이 허공을 핑그르르 돌아 다시 땅으로 떨어지자 카일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검으로 후려쳤다. 챙! 순식간이었다. 카일이 후려쳤던 부러진 검이 다시 그 검의 주인에게 되돌아간 것은.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아침 공기를 갈가리 찢어 댔다.

카일은 피가 튄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들을 철저하게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제와 다르게 하고 싶었다. 계속 이렇게 힘으로, 공포로 압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새벽에 있었던 어둠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일시적이지만 언제 안 보일지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이 저절로 초조해지고 말았다. 눈이 보일 때 확실하게 밟아 굴복시켜야겠다.

매튜는 멍하니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 왠지 더 잔혹해 보였다. 어제보다 왠지 더 무자비해 보였다. 실세를 제거했음에도 이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순간 제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도 잊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끔찍했다. 차라리 죽이면 모를까 저런 부상을 입히는 것은 더 좋지 않아 보였다. 쓰러진 상대의 손목을 발로 꽉 내리찍듯 밟아 부러뜨리고 이어 늑골이 부러질 정도로 옆구리를 거세게 걷어차는 카일의 모습은 매튜조차 숨 막히게 만들었다. 간담이 써늘해졌다. 매튜는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검게 물든 카일의 냉혹한 눈빛과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잔인함에 다들 숨을 죽이고 말았다. 어제와 또 다른 침묵…….

매튜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우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저절로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우린 이들보다 높은 사람이고 더 배운 사람인데 이렇게 잔혹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매튜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언덕 위로 올렸다. 엘리샤도 카일이 이러는 거 알고 있나? 그녀도 카일의 이런 행동을 용납하는 것인가? 그때 마치 매튜의 생각을 읽어 낸 것처럼 카일이 냉랭하게 내뱉듯 말했다.

“우리가 되돌아갈 길은 없다, 매튜.”

매튜는 순간 멍해지는 듯했다. 그럼 이들은 지금 수업을 하는 게 아닌 것인가? 정말 용병으로 살겠다고 이러는 것인가? 카일의 종자가 된 것은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보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기사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매튜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여기가 끝이라고?

“정, 정말입니까?”

“여기가 끝이다, 매튜.”

카일은 매튜의 창백해진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나 역시 여기가 끝이다.”

매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일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엄청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왜 여기가 끝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럼 엘리샤 님의 종착지도 여기인 것인가?

카일은 매튜의 흔들리는 시선이 언덕 위로 향하는 것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신음 소리도 공포에 헐떡이는 숨소리도. 엘리……. 나의 엘리. 나만의 엘리……. 만일 또다시 시력을 잃는다면 그때는…….

“매튜. 지원자를 받아라. 여덟 명, 은화 일곱 닢이다.”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그날의 싸움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일은 곧 끝장을 보았다. 그는 아예 마을 전체를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찾아내 철저하게 밟았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개의 일을 자체적으로 진행시켰다. 하나는 두고 온 수레를 되찾는 일. 그리고 또 하나는 웰든 영지에 들러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는 일이었다. 원래 이것을 하나로 묶어 보내려 했으나 이들에게 자신의 방식을 빨리, 많이 보여 줄 필요도 있고 서로 다른 거리에 따른 소모 시간을 계산하기도 해야 해서 카일은 유연하게 처음 생각을 수정했다.

그는 선불로 절반, 나머지는 임무 완수 후 바로 지급한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지원자들에게 선불을 지불했다. 카일은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일절 보복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싸움을 했기에 주민들은 내심 걱정이 많았었다. 그가 자신들에게도 해코지를 할까 두려웠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철저하게 구분지었고 그 선을 자신이 거둔 용병들 또한 따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쉴 새 없이 다른 일감을 찾았다. 장인들이 주는 일감만으로 이 사람들이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서운 겨울이 들이닥쳤을 때 그의 노력은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일의 방식은 옳았다. 그의 생각대로 사우턴야드는 그를 중심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매튜는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엘리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카일 님이 왜 저러는 겁니까?”

엘리샤는 덧문 틈으로 스며드는 싸늘한 해풍을 맞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말씀하지 않으실 겁니까? 키안 백작님의 아들인 카일이 왜 저렇게 무식한 백성처럼 살고 있는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실 겁니까?”

엘리샤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카일이 혹시 자주 눈을 깜빡거리진 않나요?”

“그게 지금 무슨 상관입니까?”

엘리샤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들어오면서 카일은 엘리샤와 아예 대화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듯해 마을에 내려가면 카일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의 팔을 꽉 움켜잡고 집으로 끌고 올라왔다. 안전하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의 기준은 너무 높았다. 그가 원하는 수준에 다다르려면 그녀는 몇 달을 집 안에 갇혀 지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언덕 위에 자주 섰다. 그를 보기 위해 그랬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의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비빈다. 시간과 때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가 눈을 비비는 횟수가 점점 더 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픈지 자신의 머리를 꾹꾹 누른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며 카일이 왜 이렇게 밖으로 도는지 알 수 있었다. 해풍. 그것도 모래가 섞인 해풍이 부는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눈을 자꾸 깜빡거리며 눈두덩을 신경질적으로 비벼 대는 그를 봐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런 것이다.

그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절대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기에 그녀를 회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바보 같으니…….

“뭐, 카일 님이 그렇게 냉혹하게 한 덕분에 이제 그 누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의 제 가치관에 금이 생겼습니다.”

엘리샤는 매튜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답답한 제 마음을 그냥 엘리샤가 들어 주기를 바라며 찾아온 것이었다.

“그냥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러나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그를 변하게 만든 건가요? 아니면 그가 상황을 변하게 만든 건가요? 아무튼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그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이해가 안 되나요? 이해를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요?”

매튜는 왠지 허를 찔린 듯했다. 엘리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동안 알았던 카일은 모두가 그렇게 되길 바랐던 모습의 카일이었어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했던 모습. 한 가지 묻죠. 당신은 카일과 나를 보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나요?”

매튜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엘리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들을 보면 떠오르는 것? 당연히 배경이다. 웨스트필드. 노스턴야드. 도성. 최고의 배경. 얼스월드를 지배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배경 말고 또 뭐가 떠오르나요?”

마치 그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엘리샤는 여전히 담담하게 물었다. 매튜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야 할 필요도 솔직히 느끼지 못했다. 그게 전부 아닌가? 엄청난 것을 손에 쥔 사람들인데 왜 이 고생을…….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고생을 한단 말인가?

“배경이 사라지면 우린 모두 똑같아요. 신분이 사라지면 카일과 엘리샤라는 존재만이 다른 사람처럼 남게 되는 거죠.”

순간 매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사람은 태생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분도 배경도 다른 겁니다. 한번 결정된 것은 가문이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가는 거고요.”

엘리샤는 매튜의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매튜뿐이 아니니까.

“태생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신분은 변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변화된 신분을 가진 분이에요. 우리 아버지를 모르시나요? 아버지 역시 용병이셨어요. 케이든 전하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한 아주 뛰어난 용병이셨어요. 그러나 지금은 다들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웨스트필드의 일라이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명예와 힘을 만드신 겁니다.”

엘리샤는 양손을 단아하게 마주 잡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카일은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있어요. 백작의 후계자인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고 있어요. 더구나 그는 현명하게도 지배층의 모습을 버렸습니다. 지금의 카일은 순수한 전사입니다. 삶을 위해 싸우는 전사입니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순간 매튜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뭐가 말씀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분. 당신의 신분은 무엇인가요?”

아……. 매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거기에 머물겠어요? 아니면 상승시키고자 스스로 노력하겠어요? 카일은 지금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런 그를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매튜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카일이 왜 밑바닥에서 사는지는 모르나 그는 분명 배경을 이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실력, 그리고 성질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스스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자. 그러자 순간 매튜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카일, 엘리샤, 그리고 자신, 이렇게 한정지었을 뿐이다. 그 외? 그가 알 바가 아니다. 그래도 우린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튜.”

“네, 말씀하십시오.”

“지금 세력이 어느 정도 안정세입니까?”

“이제 밤거리를 안심하고 다녀도 됩니다.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을 거라 자신합니다.”

“카일의 생각도 그런가요?”

그러자 매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카일 님은 워낙 엘리샤 님에 대해서는 완벽주의라서…… 그는 아직이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보기에는 안전하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엘리샤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카일이 며칠 없어도 당신 혼자 조직을 이끌 정도인가요?”

매튜는 그 질문에 왠지 가슴이 묵직해지는 듯했다. 그동안 귀족의 품위와 배려를 완전히 버린 카일을 이해할 수 없어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지냈었다. 그런데 그런 카일 없이 자신 혼자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면…….

“얼마나 혼자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카일을 재워 보려고 한다. 엘리샤는 케이가 준 약을 점검하면서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피곤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병이 생긴 것인지 알려면 일단 그에게 휴식부터 취하게 해야 하니 약물을 이용해 3일 정도 재우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카일은 쉬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쉬기를 기다리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처럼 다가왔다.

절대. 절대! 그는 엘리샤 앞에서 편하게 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며 세력을 다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안정세로 돌아선 지금이라면…….

엘리샤는 매튜를 뚫어지게 보며 솔직한 답변을 재촉했다.

“이, 이틀 정도입니다.”

이틀이라……. 너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

“그럼 내일 아침부터 당신이 이틀 동안 조직을 맡습니다.”

매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의 엘리샤는 아까의 엘리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차갑게 빛나는 검푸른 눈은 마치 그녀의 아버지, 일라이 공작을 보는 듯했다.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단호함이 그녀의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엘리샤는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어찌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던지. 밤늦게 들어오는 카일은 항상 물을 먼저 마시곤 했다. 엘리샤는 그것을 알기에 그가 마시는 물에 미리 약을 섞었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침대에서 들었다. 카일이 이 사실을 알면 어찌 나올지 불 보듯 훤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약을 쓰지 않고 자잘한 상처는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계속 바쁘다고 말하는 그를 억지로 잠재웠다는 것을 혹시라도 알게 되면, 그가 그녀에게 어떤 모진 말을 할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그는 어찌 됐든 거짓말을 싫어하고 속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윽고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 눈을 찔렀다. 엘리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카일의 고른 숨소리를 계속 듣기만 했다. 그가 잠을 잔다. 동이 트자마자 일어났던 사람이 햇살이 벽을 타고 올라오는데도 잠을 잔다. 엘리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그의 잠든 모습을 보자 순간 끓어오르는 듯한 애정이 그녀의 가슴을 설렘으로 떨게 만들었다.

엘리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당신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하세요.”

그녀는 주의 깊게 그를 살피며 그의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이 조금은 길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잡혔다. 도성에 갈 때마다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기다렸었는데…… 이제 그는 달라졌다.

불과 두 달 남짓했던 시간.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그는 몰라보게 단련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도 변화가 찾아든 것처럼 보였다. 조금 여위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 성숙해 보였고 또한 강인해 보였다. 잠든 그의 모습에서도 이제 부드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지독히 남성스러운 모습. 엘리샤는 눈으로 찬찬히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오만하게 살짝 치솟은 광대. 짙고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파란빛을 품은 눈. 짙고 남자다운 눈썹. 엘리샤는 손을 뻗어 살며시 그의 육감적이면서도 지독하게 매력적인 입술을 쓸어 보았다. 그래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엘리샤는 고개 숙여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쉴 뿐이었다.

“고집을 좀 수그리면 더 좋을 듯한데요.”

이번에는 그의 심장이 담긴 가슴에 손을 올려 보았다. 그의 심장이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의 심장이 잘 견디고 있다는 뜻이다. 에드나에게 배운 그대로 약의 분량을 조절했다. 하루 분량, 이틀 분량, 사흘 분량……. 지금 갖고 있는 약의 분량은 닷새 분량이었다. 이 약은 굉장히 까다로운 약이라 이것을 만든 에드나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만들기 힘든 것도 있지만 자칫하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에 에드나도 사용하기 꺼려하는 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웨스트필드의 약은 언제나 효과적이었고 엘리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은 휴식이 먼저.

엘리샤는 잠들어 있는 카일을 가만히 끌어안아 보았다. 그의 고른 숨이 그녀의 솜털을 미풍처럼 간지럼 태웠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나요?”

그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이어 속삭였다.

“당신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요? 혹시 알아도 나를 용서할 거지요?”

그의 규칙적인 심장 울림이 그녀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하는 듯했다. 엘리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틀이에요. 이틀 동안 잘 자요, 카일.”

엘리샤는 침대에서 내려와 간단히 세수를 하고 드레스를 찾아 입었다.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다시 카일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제 그를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의 상처를 찾아보았다. 손끝에 뭐가 느껴지는지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문득 뒤통수에서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엘리샤는 그의 고개를 살며시 옆으로 돌렸다. 그때 갑자기 카일의 손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그녀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일은 잠결에 그녀를 찾는 것처럼 그녀의 드레스를 더듬거리더니 고개를 움직여 그녀의 허벅지에 자신의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엘리샤는 그가 만족스러운 숨을 깊게 내쉬는 것을 불규칙하게 뛰는 가슴으로 지켜보았다.

한참을 그대로 얼어붙은 채 있어도 그녀의 허벅지에 고개를 파묻은 그가 더 이상 미동을 하지 않자 그녀는 다시 고개 숙여 그의 뒤통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헤치고 그 정체를 제대로 본 순간…… 엘리샤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당신처럼 미련한 남자는 더 없을 거예요.”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중앙은 누렇고 주변은 검붉게 번들거리는 혹을 살펴보았다. 누런 고름이 한가득이었다. 전에 떡갈나무 숲에서 당한 상처가 덧난 게 틀림없었다. 엘리샤는 다른 상처는 없는지 좀 더 살펴보다 이윽고 이 상처로 인해 그의 시력에 충격이 가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일단 고름을 빼고 치료를 해야 할 듯싶다. 두통도 심했을 텐데…….

그녀는 부엌 화덕에 불을 지피고 카일의 단도를 꺼내 그 끝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뒤통수에 있는 그의 상처 주변의 머리카락을 면도하는 것처럼 단도로 밀어야 했고 그렇게 드러난 혹에서 많은 양의 고름을 짜냈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고름이 나오자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건 좋은 것이다. 고름을 짜냈으니 그 균이 뿌리를 내려 그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엘리샤는 이번에는 그의 왼손을 살폈다. 어느 순간부터 붕대조차 감지 않은 그의 손이었다. 역시나 고름이 잡혀 있었다.

“이런 손으로 검을 쥐다니, 당신을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남들이 보기에 남자답고 대단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녀가 보기에는 멍청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상처를 키워 병으로 만들고 있다니.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깨끗하게 씻고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도 달군 단도로 살을 찢어 고름을 짜냈다. 이제 어지러운 부엌을 정리할 차례다.

엘리샤는 피고름이 잔뜩 묻은 수건을 빨기 위해 대야에 물을 부어 놓고 통풍이 잘되게끔 하려고 덧문을 열었다. 12월의 바람이 짭조름한 맛을 동반한 채 탁한 공기를 밀어냈다.

“이것으로 그가 괜찮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계속 곰곰이 생각했다. 뭔가를 놓친 것은 없는지, 그녀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그러다 문득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에드나라면 절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런 고민을 하며 계속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야 하는 자신이 순간 초라하게 느껴졌다. 에드나처럼 재능이 뛰어났다면 카일을 보다 잘 보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카일도 그녀를 의논의 상대로 보았을 것이다. 이런 부상조차 그녀에게 말하지 않다니…….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정말 있는 건가?”

그녀는 자조적으로 씁쓸하게 읊조렸다. 자신의 재능이 평범하다는 것을 두 오빠들을 통해 느낀 순간부터 시작된 그녀의 노력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었다. 중간, 중간, 제자리에서 주춤한 적은 있어도 한 번도 노력 자체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언젠가…… 언젠가…… 그녀도 제 몫을 다할 날이 올 거라 믿기에 그러했다. 그 제 몫이라는 것에 뚜렷한 목표도 생겼다. 에드나가 일라이를 단단하게 뒷받침하는 것처럼 그녀도 카일을 그렇게 뒷받침해 주고 싶다. 카일을 빈틈없이 보살펴 그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곁에서 보고 싶다.

“우울해하지 말고 정신 차리자, 엘리샤.”

엘리샤는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12월의 바람을 맞으며 무심코 밖을 살펴보았다.

“응? 지금 뭐 하는 거지?”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엘리샤는 의아해하며 잠시 지켜보다가 이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루.”

루는 어깨에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엘리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엘리샤는 걸음을 멈추려는 그의 등을 살짝 밀어 짐을 받쳐 주며 계속 걷게 했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비탈길에서 멈추면 그 하중이 몇 배로 다가온다. 엘리샤는 루의 짐을 받치고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물자들을 지금 이런 식으로 나르고 있는 건가요?”

밀가루, 마른 고기, 짐승 털가죽 등등의 무거운 것을 옮기느라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연신 구슬땀을 흘리며 루가 대답했다.

“매튜가 빨리 옮기라고 해서요. 매튜는 아이들과 여자들도 동원했습니다.”

엘리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루를 창고로 가게 한 후 언덕 아래를 살펴보았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여자들과 아이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엘리샤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아이의 짐을 대신 받아 들고 상냥하게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야, 이 일을 하는 대가로 얼마를 받기로 했니?”

“그런 거 없어요!”

엘리샤가 아이에게 접근한 것이 못마땅했는지 순간 거리를 좁혀 다가온 아이의 엄마인 듯한 까맣게 탄 여자가 톡 쏘듯 내뱉었다.

“없나요? 아무런 대가도 약속받지 못했나요?”

“매튜인지, 마튜인지. 말끝마다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쳇!”

그러면서 여자는 내심 불안했는지 엘리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카일의 아내. 그러나 마을에는 자주 내려오지 않는 카일의 아내.

“그렇군요.”

엘리샤는 아이의 짐을 끝까지 들고 여자와 함께 창고까지 갔다. 물건을 내려놓고 그녀는 곧장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매튜는 아침부터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장부를 손에 펴 든 채 웰든 영지에서 사 온 물품을 목록과 비교하고 용병들에게 나머지 삯도 지불해야 했다. 제이슨과 루가 열심히 도우려 했으나 이들은 20이 넘어가는 숫자는 세지 못했고, 글은 아예 읽지 못했다. 매튜는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무식한 놈들. 숫자라도 좀 배우지.”

그가 성급하게 툭 내뱉은 말을 들은 제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튜는 그런 그를 힐끔 보고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역시 태생은 못 속인다는 생각뿐이었다.

매튜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제이슨의 엉덩이를 신경질적으로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숫자 파악이 끝난 것부터 빨리 옮겨라. 빨리 해, 빨리.”

매튜는 손에 든 장부를 휘두르며 그들을 몰아붙였다. 카일이 없다. 엘리샤는 이틀을 매튜에게 맡겼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 아무 사고 없이 잘해야 한다. 강박 관념이 매튜의 등을 떠밀고 있는데 그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수많은 물자들을 언덕 위 창고로 올리기 위해 마을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도 손을 뻗었다.

“빨리 해, 빨리.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매튜.”

매튜는 엘리샤의 목소리가 들리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별다른 말 없이 바로 장부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매튜는 즉각 장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그녀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러했다. 그녀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자신이 그녀의 눈에 보였으면 좋겠다.

그녀는 빠르게 장부를 보며 매튜에게 싸늘히 말했다.

“웰든 영지에서는 도르래를 쓰지 않나요?”

“네?”

“거기서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직접 나르는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나요?”

매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엘리샤를 쳐다보기만 했다. 엘리샤는 어렸을 때부터 오웬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그가 발명해 내는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무기를 만들던 오웬은 평화의 시대가 오자 그것을 고스란히 일상생활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어렸을 때부터 엘리샤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엘리샤는 장부를 탁 덮고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매튜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게 있는 거 같아요.”

“말씀하세요.”

그러면서 매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잘못됐나? 실수한 거 없는데…… 왜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

엘리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신분이 중요하다 생각하죠? 저들과 우리는 다르다 생각하죠?”

어제와 비슷한 말이기에 매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훗! 엘리샤의 미소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그럼 우리의 신분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려 드리죠, 매튜. 정확하게 당신, 그리고 우리의 차이입니다.”

엘리샤는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당신이 자작이 되어도 지금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겁니다. 대를 거듭해도 절대 웨스트필드와 노스턴야드 발치에도 못 올 겁니다. 웰든 영지는 낙후될 것이고 그 낙후는 쇠약으로 이어져 결국 강자에게 흡수되는 절차를 밟을 겁니다.”

뭐라고? 매튜는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엘리샤는 그의 표정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냉랭하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신만을 위해 편리함을 찾는 사람은 결국 그 편리함에 물들어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처럼 말입니다. 영지민들을 아낄 줄 모르는 귀족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그것을 배우지 못했군요. 그것이 바로 당신과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우물물을 긷기 위한 두레박 원리를 이용해서 보다 섬세함을 덧붙이면 언덕 위까지 무거운 물자를 힘겹게 올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 부리는 것에만 익숙한 매튜를 보니 엘리샤는 화가 났고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에드나처럼 부드럽게 말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부드럽게 말하면 그만큼 알아들어야 하는데 보아하니 매튜도 카일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듯했다. 그럼 무엇으로 해야겠는가? 바로 명확한 명령으로 이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즉시 운반을 멈추고 나무와 밧줄을 준비합니다. 내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하나요?”

매튜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엘리샤에게 순간 저도 모르게 기가 죽고 말았다.

“설명해야겠군요.”

그녀는 즉시 몸을 낮춰 바닥에 간단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면서 그녀가 물었다.

“매튜. 당신은 이 설계를 볼 안목이 있나요? 아니면 지시만 할 줄 아나요?”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설계도를 읽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엘리샤는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준 부모님께 감사하며 아예 사람들을 곁으로 불러 모았다. 호기심 반, 반발심 반. 엘리샤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설계도를 그리며 말했다.

“이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공사를 담당합니다. 일당과 식사를 제공하겠습니다. 일당은 하루 은화 세 닢. 나를 도와 식사를 만드는 사람과 공사를 직접 하는 사람에겐 두 닢입니다.”

“음식 만드는 것에 너무 많은 돈을 주는 거 아닙니까? 쓸모없이 밥만 축내는 것들이라 그냥 밥만 조금 줘도 되는데요.”

누군가가 불평하자 엘리샤는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

“여자들은 앉아서 놀고먹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애도 키우고 식사도 준비하지 그럽니까? 아, 밀가루 반죽은 할 줄이나 압니까? 물과 밀가루의 분량을 알기나 합니까? 그 비싸고 아까운 밀가루를 쓰레기로 만들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엘리샤의 빠른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불 조절은 할 줄 압니까? 적당한 두께와 불. 빵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빠르게 설계도를 그린 후 엘리샤가 다시 물었다.

“설계도 읽을 줄 아는 사람 있나요?”

그러자 루가 주저하면서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가 목수여서 조금 볼 줄 압니다.”

“목수?”

누군가가 비웃으려고 하자 엘리샤는 즉시 한 손을 들어올려 그 비웃음을 저지하고는 말했다.

“그럼 루. 궁금한 것은 나에게 물으세요. 내가 설명을 해 주겠어요.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누군가가 또 버릇처럼 낄낄대며 비웃으려 하자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어 댔다.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처 느끼지 못할 때 엘리샤는 어느새 풀어서 휘둘렀던 채찍을 손에 감으며 말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용서 없습니다. 다음에는 그 입을 찢어 놓을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입술에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이…….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엘리샤는 다시 매튜를 마주 보았다.

“이리로.”

엘리샤는 그래도 매튜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그를 데리고 한쪽으로 움직였다.

“귀족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면 당신의 배움을 아낌없이 보이세요. 배운 것도 없으면서 계속 허세를 부린다면 당신을 웰든 영지로 보내겠습니다. 필요 없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어떤 사유로 돌아가게 된 것인지 누군가 나에게 물으면 서슴없이 말할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기에 돌려보냈다고 말입니다.”

매튜는 카일과 다르면서 또 비슷해 보이는, 엘리샤의 강렬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말았다. 압도당하고 있었다. 카일에게는 검술과 힘에 압도당했고, 엘리샤에게는 배움과 배려에 있어서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잘하겠습니다.”

이래서 웨스트필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싶었다. 매튜가 자라면서 숱하게 접했던 웨스트필드의 소문의 실체가 그녀를 통해 보이는 듯했다. 그러자 그녀가 달리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녀를 단지 신분으로 십분 어려워하고 존중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 같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두뇌와 배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것에 있어서는 카일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런데 절묘한 조화였다. 힘으로 규칙을 세워 질서를 만드는 카일과 그 틈에 배려를 끼워 넣는 엘리샤라니. 매튜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우선 당신이 무상으로 부린 저들에게 보상을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엘리샤는 말을 마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식사를 준비할 여자들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세 명이나 손을 들었다. 엘리샤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르게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매튜는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거렸다. 그는 사우턴야드 성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성된 보석 세공품을 전달하기 위해 한 장인을 따라나선 일행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의 일이 없었다면 그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샤의 따가운 질책으로 책임이란 무엇인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장부를 보니 그 일행은 늦어도 아침에 도착했어야 하는 일행이었다. 넉넉히 시간을 계산했는데도 그러했다. 그런데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매튜는 힐끔 멀리 보이는 언덕을 쳐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카일이 무엇을 위해 이틀을 쉬고 있는 것인지 모르나 지금의 책임자는 자신이니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하아…….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매튜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쉬운 게 없다. 다 어렵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도대체?”

걱정은 짜증이 되고, 짜증은 다시 더한 걱정이 되고, 그 걱정은 슬슬 불길한 무언가를 자꾸 떠올리게 했다. 이번 일행에 카일은 숀과 나엘, 잭을 달려 보냈다.

“밖으로 나가 볼까?”

매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보초를 서는 용병들에게 성문을 잠시 열라며 횃불을 흔들어 보였다. 삐그덕. 정적을 뚫고 육중한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매튜는 말을 몰아 그 사이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밤새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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