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3)

11

순간 카일은 몸을 날려 엘리샤의 뒤를 향한 공격을 막아 냈다. 챙!

“엘리!”

엘리샤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정면을 응시하기만 했다. 카일이 그녀가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몸을 낚아채 안으려 할 때 엘리샤가 움직였다.

엘리샤는 자신의 뒤를 맡아 준 카일을 철저하게 믿으며 다시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 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의 머리를 정확하게 채찍으로 후려쳤으며, 감겼던 채찍을 순식간에 풀어내 이번에는 몸을 회전시켜 도약하며 채찍을 검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카일은 그런 엘리샤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하며 나무를 넘어온 나머지 두 명을 척살했다. 신경을 갉아먹고 있는 왼손의 통증을 무시한 채 거친 숨을 내쉬던 카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엘리샤가 하나 남은 자의 목숨을 단호하게 끊어 내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고 말았다. 휘익! 역시 대단하다. 웨스트필드의 실력은 정말이지 명불허전,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때, 엘리샤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하더니 그녀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일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정면을 보았을 때, 순간 의아해지고 말았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걸까?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뒤를 확 당기는 듯한 저릿함에 흠칫하고 말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묻어나는 미끈하면서도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색깔, 붉은색. 갑자기 발밑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망할!”

저도 모르게 욕설부터 튀어나왔다.

“카일!”

언제 넘어왔는지 나무를 뛰어넘어 온 매튜가 흔들리는 카일을 황급히 붙잡았다. 매튜는 마치 지옥을 경험한 느낌이었다. 평소 일대일 대련에 중점을 둔 검술 연습을 했었다. 기사도에 따라 검에도 예의를 싣는 법을 배워 왔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지옥을 경험하게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죽이고자 달려드는 상대는 매튜의 손발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다.

“다 정리됐나?”

카일이 나직하게 물어 왔다. 잠깐 비틀거렸으나 그의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것은 카일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련을 해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매튜는 그를 힘껏 붙잡은 채 말했다.

“정리됐습니다.”

카일을 오해했었다. 메리나의 순결을 유린하고 버렸다고 오해했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카일과 불신을 쌓아 버렸다. 위기가 닥쳤을 때 설마하니 카일이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카일은 그를 구했다. 매튜뿐이 아니라 용병들도 구했다. 8 대 30. 거리를 떠도는 허풍쟁이나 할 소리, 8 대 30. 그러나 카일은 혼자 상대의 절반 이상을 맡아 줬다. 그렇게 못난 자신들 때문에 카일의 등은 아주 피로 흥건했다.

휴우……. 카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뒷덜미를 달리는 저릿함은 금세 척추를 따라 번져 가는 듯했다. 그리고 산속의 어둠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내려오고 있다.

“일단 이곳을 떠나야 한다.”

누가 또 뒤쫓아 오는지 모르기에 카일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때 저만치 혼자 앞서 걸어갔던 엘리샤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일? 왜 그래요?”

그녀의 뒷말은 비명처럼 퍼졌고, 그녀는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일단 이 자리를 뜬다. 부상 치료는 그 이후다.”

카일은 한 손으로 자신을 살피려는 엘리샤의 어깨를 붙잡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한 채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카일!”

카일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더듬어 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엘리. 조금 찢어진 것뿐이오.”

“내가 봐야겠어요.”

“나중에, 나중에. 지금은 안 돼.”

그러더니 카일은 주변에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몸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순간 깜짝 놀랐으나 그의 손길에 걱정이 느껴지자 침착하게 그가 자신을 직접 확인하게 두었다. 카일은 그녀의 등과 다리까지 직접 확인한 후에도 물었다.

“다친 곳 없소?”

“없어요. 당신이 확인한 것처럼요.”

“다행이군. 갑시다.”

말에 실을 수 있는 정도의 짐만 챙긴 채 이들은 어둠을 뚫고 달리고 또 달렸다. 다시 웰든 영지로 되돌아가 부상을 치료하느냐, 아니면 이대로 사우턴야드까지 달리느냐 하는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카일은 듀팡의 침묵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평소와 다른 침묵이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땅을 보며 서 있는 듀팡에게서 두려움이 절절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이들은 동이 터 온 후에야 밤새 달렸던 말에서 내렸다. 리지가 빠르게 식사 준비를 했고 듀팡이 그것을 도왔다. 추운 날 부상으로 인한 고통에 허기까지 겹치자 몇 곱절의 고통이 이들에게 찾아들었다. 다들 허겁지겁 달려들어 굶주린 배부터 채우는데 카일은 식욕이 전혀 없어 나무에 기대고 앉았다. 피곤하고 머리가 조금 멍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피를 흘려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뒤통수 살갗이 찢어져서 욱신거려 그러는 듯도 했다.

엘리샤는 용병들과 매튜의 부상을 먼저 살핀 후 스프 한 그릇을 떠 카일에게 다가갔다.

“좀 먹어야 해요.”

“별로 생각이 없군.”

“알았어요.”

엘리샤는 그에게 더 강요하지 않고 스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뒤로 돌아갔다.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가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계속 강행군을 하느라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그의 상처였다.

“자리를 좀 옮기지.”

카일은 자신의 부상에 쏠리는 시선을 알아채고 불편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자리를 옮겨 아침 서리에 축축한 나무 밑에 앉아 카일이 셔츠를 벗었다. 순간 엘리샤는 숨이 꽉 막혀 왔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던 피가 그의 등줄기도 적셨지만 상처는 뚜렷하게 보였다. 도성 용병들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다 무기로 쓰는 모양이었다. 카일의 어깨와 등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검에 베인 상처보다 몽둥이와 채찍 같은 거로 맞은 듯한 상처가 훨씬 더 많았다.

“당신은…… 어쩌면 노스턴야드 영주 재목이 아니었나 봐요.”

엘리샤는 그의 핏자국부터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혔다. 카일이 입은 부상은 그의 실력이 모자라서 입은 부상이 결코 아닐 터. 그가 다른 사람들을 구하다가 당한 부상일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먼저 보살피지 않으니 재목감이 아니지요.”

그는 절대 영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니 수명도 짧을 것이다.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런 몸으로 또 자신을 위해 달려오다니.

“미련한 남자 같으니라고…….”

엘리샤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의 부상을 다급하게 치료했다. 카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갑자기 물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나?”

순간 엘리샤의 눈물이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뭐라고? 눈부신 아침 햇살이 아름드리 자란 나무 틈 사이로 이렇게 환하게 비추는데, 뭐라고?

카일은 그녀의 달라진 분위기를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카일은 정면으로 시선을 둔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 됐소?”

“……카일.”

“먼저 돌아가. 잠깐 생각 좀 정리하고 갈 테니까.”

“하지만……”

“내 상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의 말투가 마치 그녀를 밀어내는 듯했다.

“엘리. 어서!”

결국 엘리샤는 약을 챙겨 먼저 일행이 있는 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뒤늦게 이미 아침 식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에게 돌아왔다.

“다들 괜찮은가?”

“저희는 멀쩡합니다.”

다들 카일의 위력을 똑똑히 본 터라 저절로 존경을 담아 대답했다. 오늘 카일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전부 죽었을 것이다.

“짐을 다시 살펴서 두고 갈 수 있는 것은 두고 간다.”

엘리샤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리고 움직이는 카일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아까 그 말은 엘리샤의 심장을 철렁 떨어뜨리게 했다. 뒤통수에 생긴 상처 때문에 단순히 충격을 받아 그런 걸까? 이제 괜찮은 건가? 엘리샤는 계속 카일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극히 멀쩡해 보였다.

“엘리샤. 우리 짐은 그대로 가지고 갈 거지?”

엘리샤는 그제야 리지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카일의 부상에 모든 신경이 쏠려 순간 리지마저 잊고 말았다. 그런데 리지를 보자 아까 무의식적으로 열렸던 지난 3년 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분노. 두려움. 절망.

그러자 순식간에 복잡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녀를 에워싸는 듯했다. 엘리샤는 물끄러미 리지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항상 같이 있었다. 언니처럼 따랐다. 그리고 애정을 느꼈고 그녀가 있어 위안이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리지와 공유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리지…….”

“응? 왜?”

리지의 눈동자에 깃든 빛의 이면에 그런 모습이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를 믿었기에 배신감도 크고, 그녀를 사랑하기에 가슴이 몇 곱절로 저렸다.

“왜 그래?”

리지는 계속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엘리샤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다른 듯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엘리샤의 입술에 문득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슬픈 거 같기도 하고, 우울한 거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엘리샤의 눈을 계속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검푸른 눈빛도 그러했다. 마음의 생채기가 난 것처럼 아파 보이기도 하고, 울고 싶은 거 같기도 하고……. 리지는 저도 모르게 신경이 바짝 곤두서기 시작했다.

“내 옷가지를 두 개로 분리해 주세요.”

리지가 그녀의 말대로 옷가지를 분리하기 시작했고, 엘리샤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카일에게 다가갔다.

“카일.”

“왜?”

카일은 팔짱을 끼고 서서 정면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금화 두 닢만 주세요.”

“응?”

갑자기 돈을 달라는 말에 카일은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지에게 시킬 일이 생겨서요. 약이 부족해서 리지를 웨스트필드로 보내고 싶어요.”

약이 부족하다는 말에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크고 작은 부상이 필수처럼 따르는 것이 용병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그도 톡톡하게 체험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리지를 보내는 것이 의아할 뿐이었다. 전에도 엘리샤는 리지를 돌려보내기를 원했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모양이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자신과 다르게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리지가 다칠까 걱정되는 듯했다.

“꼭 그래야겠소?”

카일은 그래도 엘리샤에게 리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상처가 덧나면 우린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해요. 그것을 원해요?”

약은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웨스트필드를 의지할 생각이 없기에 애초부터 웨스트필드에 뭔가를 요청할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리지……, 더 이상 리지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리지를 죽일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카일의 손에 리지를 죽게 만들지 모른다. 엘리샤도 마음이 복잡했다. 죽이고 싶다. 자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른 그녀를 죽이고 싶다. 그러나 언니 같은 존재다. 차마…….

카일은 평소보다 훨씬 강경한 듯한 엘리샤의 모습에 계속 의아함이 들었다.

“이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소.”

“알아요. 이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가면 갈림길이 나와요. 웰든 자작 영지까지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니 안전할 거예요.”

카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샤가 책상에서 본 세상이 이렇게 넓을 줄이야. 그녀는 항상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를 깜짝 놀라게 하는 듯했다.

“거기까지 매튜가 동행해서 리지가 웨스트필드까지 무사히 가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이미 다 생각한 듯 그녀 입에서 술술 말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여기서 엘리샤와 충돌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엘리샤에게 건네주고 손짓으로 매튜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엘리샤는 카일이 건네준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복잡한 마음이 그녀의 심장을 조이는 듯했다. 엘리샤는 이내 마음을 굳히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리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리지가 분리한 옷가지를 담은 짐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리지.”

리지는 갑자기 엘리샤가 품에 짐을 안겨 주자 뭔가 싶었다.

“웨스트필드에 다녀와야겠어요. 케이 오빠에게 약을 챙겨 달라고 하세요.”

순간 리지의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꼭 보고 싶었는데……. 엘리샤의 끝을 꼭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웨스트필드까지 다녀와도 험프리는 사우턴야드에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손목 부상은 심각하니까.

“알았어. 그렇게 할게.”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거다. 기필코 엘리샤의 끝을 꼭 보고 말 것이다.

엘리샤는 매튜가 준비를 끝내고 말에 올라 리지를 기다리자 리지의 손을 잡고 그에게 다가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돌아오지 마요.”

“응?”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리지가 되묻자 엘리샤는 정면을 응시하며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하게 이어 말했다.

“두 번 다시 나와 마주치지 마요.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도 한때 나의 언니였던 당신에게 주는 내 마지막 애정이라 생각하세요.”

“엘리샤…….”

리지는 순간 숨통이 꽉 막히는 듯했다. 엘리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본능이 먼저 깨달아 버린 탓이었다.

“돌아오지 마요.”

엘리샤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카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 이제 코앞에 사우턴야드를 둔 밤, 엘리샤는 펼친 모포에 앉아 잠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한 카일을 기다렸다. 지난 며칠, 그는 지독한 모멸감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엘리샤는 어둠에 가려진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멀리하고 있었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어제 아침 카일이 자꾸 눈을 비비기에 그에게 물었었다. 눈 괜찮으냐고, 잘 보이냐고. 그러자 그는 흠칫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카일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남자이다. 자신의 부상을 수치로 생각할 정도인지 그 후부터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카일, 그러지 마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미련하고 또 미련한 내 남자. 그녀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야겠다. 그는 절대 먼저 말을 하지 않으니 그녀가 다가가 물을 수밖에 없다.

카일은 한 손으로 나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달릴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금세 터져 버릴 것처럼 불붙은 절망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정신 차려, 카일.”

카일은 스스로를 냉랭하게 질책했다. 그러나 입술이 다시 사납게 비틀렸다.

“내가 겨우 이 정도란 말이지?”

막을 사이도 없이 그의 입술에서 자조적인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이 카일이, 노스턴야드의 카일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이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도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라고 칭송받던 자신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다니…….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용병인데, 어떻게 그들에게 내가 당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그렇게 달라서 이렇게 된 것인가?

카일은 순간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그대로 나무를 내리쳤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평소처럼 잘 보이다가 갑자기 암흑이 눈앞을 덮친 것처럼 캄캄해진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치밀어 올라 머리가 멍해지는 듯했다.

엘리샤가 몇 번이고 그에게 물었었다. 정말 괜찮으냐고.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시력이 자꾸 어두워지니 그의 마음도 덩달아 어둡게 물들어 갔다. 겨우 이런 실력으로 엘리샤의 호위 기사를 했다니.

“나는 도성 안의 개구리였나 보군.”

카일은 뼈저리게 자신의 오만함을 자책했다. 도성과 노스턴야드를 거의 벗어나지 못한 평화의 세대로서의 단점이 고스란히 만천하에 드러난 기분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넓다는 것을 모른 채 계속 도성 안에서 성장했다면 노스턴야드를 부흥으로 이끌기는커녕 아마도 쇠락의 길로 이끌었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기에 죽음을 경외하지 않고, 탄탄대로를 만든 부모가 있기에 고생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평화의 세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가 될 수 없다. 그가 다시 주먹으로 나무를 치려고 할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 피곤하지 않아요?”

엘리샤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이 순간 저릿하게 가슴을 파고들자 카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먼저 자도록 해, 엘리.”

엘리샤는 자신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이 역력한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다. 그에게 상처 주지 않고 그의 상태를 물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 번 시도해 봤지만 그는 계속 멀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급기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 도성에서 쫓겨났을 때처럼 그는 메마른 음성으로 엘리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매정하게 등을 돌린 카일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끌어안고 그의 단단한 등에 자신의 얼굴을 기댔다. 마치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몸이 뻣뻣하게 느껴졌다.

순간 눈앞의 빛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덮치자 카일의 전신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자신의 허리를 감은 엘리샤의 온기도, 그녀의 체취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암흑. 절망. 이제 나의 아내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지?

카일은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엘리샤의 팔을 붙들고 풀어내며 싸늘히 말했다.

“귀찮게 굴지 마, 엘리.”

순간 엘리샤는 날카로운 단도가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좋으나 분위기를 좀 보고 그러길 바라오.”

그의 말이 아픈 게 아니다. 그가 그렇게 만든 거다. 그의 말투가, 매몰차게 밀어내는 그의 태도가 그녀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비수를 꽂는 것 같은 충격을 주고 있었다.

카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느낌만으로도 엘리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망할…… 빌어먹을…….

이튿날 새벽. 다시 길을 떠나려고 분주히 준비를 할 때 갈색 머리의 숀이 카일에게 다가왔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사우턴야드 말고 다른 곳으로 가실 생각은 없습니까?”

순간 카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일은 이내 냉정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냥 다시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뭘 말이지?”

매튜는 분노로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검을 끌어안은 채 정면을 주시했다. 사우턴야드. 이들의 목적지인 자율 경쟁 지역에 드디어 들어왔다. 리지를 웰든 영지에 데려다 주고 웨스트필드까지 갈 수 있게끔 마차를 마련해 준 후 곧장 달려온 사우턴야드였다. 기대를 했었다. 무엇을 옮기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목숨을 걸고 무사히 데려다 줬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에 부푼 매튜를 맞이한 것은 격렬한 검 울음소리였다.

카일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매튜를 발견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었다.

“무법천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매튜.”

오늘이 벌써 7일째. 지난 시간의 일을 매튜는 짧게 제이슨과 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사우턴야드에 입성한 첫날, 듀팡은 안전지대인 사우턴야드로 들어오자마자 이들을 전혀 모른다는 듯 냉담하게 굴었다고 한다. 그가 쓴 계약서에 따라 목숨을 구해 준 값을 받아야 하는 일행을 나 몰라라 한 채 도망치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를 따라잡으려는 카일의 앞을 험상궂게 인상을 쓴 용병들이 가로막았다. 몇 마디 곱지 않은 말이 오갔고 어마어마한 시빗거리가 속출되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될 수 있는 한 충돌을 피하고 싶었으나 결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7일째 이어졌다. 제대로 된 숙식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속에 카일이 서 있었다. 엘리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품에 검을 끌어안은 채 카일을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매튜는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비겁하게 한 사람을 상대로 일곱 명이나 나서다니.”

가관이다. 한 사람을 상대로 일곱 명? 처음에는 카일을 만만하게 보고 일대일로 나섰다가 곤죽이 된 후부터 야금야금 숫자를 늘렸다고 하더니만 이제 일곱 명이다. 하루에 한 명씩 늘어나는 건가? 사람의 진을 아주 홀딱 빼 놓는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비겁?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조건 이기면 되는 세상이야.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맞서야지.”

가래 끓는 소리로 대꾸한, 자칭 사우턴야드 용병의 대장인 루카는 팔짱을 낀 채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이번에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꼭 저 여자를 품어야지.”

루카는 음흉한 웃음을 터트리며 카일을 노려보았다. 뜨내기, 오늘 기필코 네 얼굴을 뭉개 주마.

뜨내기. 레드 다이아몬드 인솔자. 그 위험천만한 수송에 따라갔던 일행이 무사히 돌아왔다. 그런데 낯선 자가 그들을 인솔해서 돌아왔다. 처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장인들의 계책과 천운이 따라 무사히 돌아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뜨내기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뜨내기에게는 보물이 하나 있었다. 여자…….

루카는 저도 모르게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욱신거리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왜 이렇게 아픈 거야. 뭐야! 어제보다 더 부었네.”

루카는 더러운 가래침을 탁 뱉으며 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평생 처음 봤다. 마을에서 제법 반반하고 어린 여자들은 모조리 건드린 그가 그 여자에게 접근한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순수한 본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신천지를 맛보게 해 주겠다고 접근했다가 벼락을 맞고 말았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뜨내기에게 손목을 붙잡혔고 호기 있게 맞서다가 그대로 손목이 꺾인 채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고개 숙이고 말았다. 그러자 뜨내기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지고 말았다. 강하다.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큰 것이 저보다 더 강하다. 그게 싸움의 시작이었다.

“소란 부리고 싶지 않으니 꺼져.”

일단 앞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치욕이었다. 제 힘으로 어쩔 수는 없지만 또 참을 수도 없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아 루카는 술을 엄청 마셨다.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술에서 깨면 부하들을 보내 그를 괴롭혀 쫓아내라고 지시를 내렸고 술에 취하면 여자를 끌고 오라고 난리를 부렸다. 그 결과, 부하들 중 멀쩡한 놈이 별로 없었다. 멀쩡한 놈들을 싹싹 긁어 오니 일곱 명이 전부였다.

“오늘은 기필코 끝장을 내 주지.”

그때 저쪽에 여자와 나란히 서 있던 갈색 머리 놈이 버릇없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같이 하겠습니다.”

그건 안 된다고 말하려 할 때 뜨내기가 먼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닥치고 가만히 있어.”

순간 매튜는 수치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카일의 말투가 달라진 듯했다. 귀족인 그의 말투가 이들처럼 투박하게 들렸다. 귀족이 아닌 바닥을 뒹구는 용병의 말투였다. 흠흠. 흠흠. 매튜는 검을 더욱 바짝 끌어안은 채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달래려 애를 썼다. 이런 무시는 익숙하지 않다. 아무리 카일의 종자 신분이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는 하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때 엘리샤가 그의 팔에 살짝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카일은 당신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래요. 불쾌해하지 마요.”

“하지만…….”

“매튜. 카일은 지금까지 일부러 이 싸움을 혼자서 해 왔고 이제 그 끝이 보이고 있어요. 물론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자리 잡는 방법이죠.”

엘리샤는 지난 7일간 카일의 외로운 싸움을 지켜보며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일부러 보여 주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듀팡을 잡아챌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듀팡이 뭘 믿고 저리 헌신짝처럼 약속을 저버리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들의 정착에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내 알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불쾌한 상황에서 알게 되었다. 감히 엘리샤에게 천국 어쩌고저쩌고 더러운 말을 쏟아 내던 놈. 그의 손목을 꺾어 분질러 버리려 할 때 누군가 소리쳤었다.

“루카!”

그 순간 카일은 빠르게 생각을 했다. 루카. 그에 대해 카일은 이미 경고를 들었었다. 숀뿐이 아니고 다른 용병들도 카일에게 경고했었다. 루카가 지배하는 사우턴야드가 어떤 곳인지 말이다. 장인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용병들. 같은 용병을 등쳐 먹고 장인들에게 아부를 떨며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루카. 주민들을 괴롭히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용병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는다는 루카.

반면 루카는 철저하게 장인들에게는 입 안의 혀처럼 굴어 신뢰를 얻고 있다고 했다. 듀팡이 믿는 것도 바로 그 루카였다. 그러니 철저하게 깨부수어야 했다. 장인과 유착된 그 관계를 깨야 자신의 입지가 바로 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싸움이 벌써 7일째.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짐승과도 같은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카일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저들에게 각인시켜 줄 겁니다.”

하아……. 매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개 같은 성질머리의 카일. 그래도 여자 복은 철철 넘쳐서 이렇게 똑똑하고 배려 깊은 엘리샤를 아내로 맞이하다니. 하지만……. 매튜는 뒤늦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이 왜, 무엇을,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다니는지 말이다. 그래도 좋게 생각했었다. 카일은 노스턴야드의 후계자이니 알렉스의 지시로 얼스월드를 배우라고 수련 여행을 온 거라 생각했었다. 알렉스도 젊었을 때 웨스트필드를 떠나 여행을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카일도 백작이 되기 전에 그런 과정을 거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엘리샤가 하루도 아니고 계속 같이 다니는 것을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비록 두 사람은 부부지만, 서로 좋아 죽어 하루도 떨어질 수 없다고 해도, 그녀는 여자다. 더구나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다.

도대체 왜! 무엇을! 무엇을 위해! 왜 여기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 속 시원하게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때 매튜의 눈에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루카의 팔이 보였다.

“저놈 팔, 금간 거 아닙니까?”

엘리샤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카일에게 잡혔는데 저 정도면 다행이죠.”

“하긴, 그렇군요.”

카일은 힐끔 엘리샤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깨끗한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도도하게 허리를 편 채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을 바닷바람에 나부끼며 매튜 옆에 서 있었다. 문득 카일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왜 저렇게 가깝게 서 있는 거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지? 왜 웃는 거지? 저절로 눈빛이 매튜를 벨 것처럼 날카로워지고 말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매튜가 다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엘리샤 옆에서 한 걸음 떨어져 서고 말았다.

카일은 숨소리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양손으로 쥔 검을 사선으로 들어올렸다. 사우턴야드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계속 살아남는 방법을 궁리했었다. 처음의 자신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그는 계속 밤잠을 설쳐 가며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숀에 이어 루와 제이슨까지 조심스럽게 건넨 말로 인해 더욱 그러했다.

“다시 생각하십시오.”

“무슨 뜻이지?”

“사우턴야드에 정착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시 생각하라고? 여기까지 무엇을 잃어 가며 왔는데 여기서 나가라고? 순간 카일의 눈이 지극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약육강식. 무조건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살기 위해 싸우는 자가 가장 강하다는 것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른 끝에 그가 얻은 교훈이었다. 마음을 읽고, 대세를 따르고, 앞뒤 분간해서 적절한 판단을 하고……. 카일이 계속 귀족의 삶을 살았다면 그것이 당연하지만 평민이 된 지금, 그것은 다 무용지물이다. 방법을 바꾼다. 생존을 위해서.

카일은 순간적으로 발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양손으로 거머쥔 검이 바람을 가르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압박하며 베어 들었다. 카일은 틈을 주지 않았다. 대련 시 하수에게 세 번 양보했던 기사의 예의도 버렸다. 생존이다. 도성 보석 조합에서 고용했던 그 용병들처럼 목숨을 걸고 싸운다. 더욱이 이 싸움 방식은 아주 그에게 적합했다. 시야가 캄캄해져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범위가 좁으니 말이다. 챙챙챙챙!

카일은 무시무시한 속력과 힘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자신의 검을 막아선 사우턴야드 용병들의 검을 반원을 그리며 후려쳤다. 그 힘에 밀려 휘청거리는 자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 쓰러트렸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자의 얼굴을 있는 힘껏 발로 짓밟았다. 퍽! 뭔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구경하던 용병들의 가슴에 스산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비, 비겁하긴. 쓰러진 사람을 발로 걷어차는 법이 어디 있어!”

“너희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일곱 명이나 덤빈 주제에. 입만 살아 가지고!”

“주둥아리 닥쳐!”

“너나 닥쳐!”

매튜가 지지 않고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에 반박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힘은 한 사람쯤 가볍게 누르는 법이다. 매튜의 음성은 금세 시끄러운 야유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때 다시 ‘챙!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야유의 소리가 가라앉았다.

엘리샤는 숨소리도 죽인 채 그를 주시했다. 카일의 싸우는 방법이 서서히 달라지더니 오늘은 아주 정점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 격식, 예의, 자세. 카일은 그것을 하루에 하나씩 내려놓고 싸우더니 이제 그는 저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때 카일이 재수 없게 붙잡힌 용병의 팔을 자신의 겨드랑이에 잡아 끼우더니 팔꿈치로 코를 뭉개고 이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자의 팔을 부러뜨렸다. 아……. 기사의 자세를 버리고 싸우는 모습. 상황에 맞춰 지금까지 배운 긍지와 자존심을 버리다니. 카일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모습이 진짜 카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냉혹하면서도 지독하게 강해 보였다. 이 모습이 더 카일답게 보였다. 그의 깊은 곳에 숨 쉬고 있던 격렬한 기질이 다 드러난 모습. 무조건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그는 순수한 전사,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물까지 고일 정도였다.

“뭐야!”

매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거대한 몸집의 용병들이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일에게도 포착되었다.

“엘리!”

카일은 순간적으로 공중에 도약시킨 몸을 믿기지 않는 각도로 틀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 그가 순간 달라졌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자들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핫!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핏줄기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쿵! 육중한 몸이 땅을 울리며 쓰러졌다. 이어 그의 손에 또다시 누군가 목숨을 내주었다.

“오늘 기필코 저놈의 목을 따고 말겠다. 저놈의 목을 따는 놈에게 상금을 주겠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엘리샤를 향해 달리던 카일의 앞도 가로막혔다.

“엘리!”

“괜찮아요!”

또렷한 엘리샤의 목소리가 들렸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모든 감각이 엘리샤에게 반응하며 몇 곱절로 예민해지는 듯했다. 카일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엘리샤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 또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가 그를 지배했다. 이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을 듯했다.

루카는 순간 눈앞에 번쩍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뭔가 아주 차가운 것이 얼굴을 스쳐 가는 듯했는데……. 주르륵. 루카는 엉겁결에 수염으로 뒤덮인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뭔가 진득거리는 게 잔뜩 묻어 나왔다. 악! 루카는 저도 모르게 냅다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손바닥에 묻어난 붉은 피.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엘리샤는 이 모든 것이 아수라장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정당한 승부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이렇게 괴롭힐 작정인 것이었다. 엘리샤는 망설이지 않고 루카의 얼굴을 다시 채찍으로 후려쳤다. 매튜가 곁에서 다른 놈들을 상대하는 동안 엘리샤는 루카만 잡았다. 이 모든 것의 주도자, 루카. 엘리샤는 싸늘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네 목을 베어야 할 듯싶구나.”

루카는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가녀린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어떻게 된 게 옷깃도 만질 수 없었다. 나름 한힘 하는 용병인 내가! 용병대장인 내가!

“꿇어라!”

쿵! 무릎 깨지는 소리와 함께 루카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발목이라도 부러졌는지 체면 불구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은 다른 비명과 한데 섞이고 말았다.

그때 엘리샤의 등 뒤로 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저벅저벅. 끈적끈적한 피가 흘러내리는 검. 그 검이 천천히 하늘로 치켜 올려지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맙소사, 제발! 휘익! 푸학!

카일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이제 이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대장이 됐음을 보이는 순간이다. 엘리샤는 그것을 위해 일부러 루카를 붙잡아 그 앞에 내밀었던 것이다.

“더 도전할 자 있나?”

묵직하면서도 싸늘한 음성이 겨울 한파보다 더 춥게 이들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압도당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남의 일처럼 싸움 구경을 하던 주민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힌 루카가 당하는 모습이 고소해 계속 이 싸움을 지켜봤었다. 평생 괴롭힐 것처럼 거들먹거리던 루카가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저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모르기에 기뻐할 수도 없다. 루카처럼 비열할까? 루카처럼 밤에 불을 지르며 괴롭힐까? 루카처럼 여자를 요구할까? 그러나 한 가지는 알겠다. 이 남자가 정말 무서운 남자라는 것을!

카일은 끊임없이 감도는 살기와 전율에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자신이 이렇게 싸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냉혹하게 빛나는 파란 눈을 번득이며 다시 말했다.

“더 도전할 자 없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일은 좌중을 압도하는 음성으로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선언했다.

“앞으로 내가 사우턴야드 주인이다. 그 누구든 나에게 도전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덤벼라. 기꺼이 받아 주겠다.”

여전히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샤는 뒷마무리는 카일에게 맡기고 환하게 웃으며 자신 뒤를 둘러싼 제이슨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돈을 받으러 갈까요? 앞장서세요.”

엘리샤는 더 밝은 음성으로 덧붙여 말했다.

“7일간의 이자도 톡톡히 받아야겠죠?”

카일은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밝은 음성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엘리샤는 많은 것을 듀팡에게서 받아 올 듯싶다. 그녀가 이렇게 기다려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 같아서는 여기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미래가 사라지게 된다. 그가 인내심을 갖게 한 것은 그녀의 말 한마디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방식이 옳아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이렇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일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감수해야 할 불편한 상황을 그 말 한마디로 정리해 버렸던 엘리샤였다. 카일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왕처럼 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엘리샤가 장인들이 거주한다는 석조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듀팡은 어색하게 웃으며 엘리샤에게 연신 앉으라고 권고했다. 다른 장인들은 듀팡의 평소와 다른 행태에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듀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석조 벽에 뚫린 창문으로 그 아수라장을 지켜보았다. 내심 사우턴야드로 들어오면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것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너무 위험하다. 기존의 사우턴야드 용병의 체계를 완전히 깨트릴 위험한 존재이다. 그가 사우턴야드에 정착하게 되면 전처럼 용병들을 함부로 부릴 수 없기에 루카가 카일을 내보내길 바랐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니 당연히 가능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도리어 루카가 당하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말았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짧았다는 것과 때론 다수가 소수에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주인이 생기고 말았다. 루카는 그래도 입의 혀처럼 굴었는데 카일은…… 어림도 없다. 그래도 동료들은 아직 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카일도 루카처럼 그저 쓰기 편한 용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듀팡은 생각이 달라졌다. 하나가 아니라 한 명.

“제가 가려고 했습니다.”

엘리샤는 태도가 달라진 듀팡을 보자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사람이란 이런 것인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익만을 찾는 것이 본능인 것일까? 그 오만했던 듀팡이 이제 카일이 여기에 자리 잡을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자 태도를 달리 했다. 씁쓸한 미소가 저절로 입가에 맺혔다.

엘리샤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고 냉랭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지불하세요.”

“아쉽지만 그렇게 많은 현금은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엘리샤는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감히 허언을? 지금 나에게 감히 허언을 한 것입니까?”

그녀의 말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찍어 누르는 압박감이 서려 있는 말투였다.

“대신 가장 좋은 집을 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하겠습니다.”

엘리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도도하게 말했다.

“우리보다 이들 먼저입니다. 현금이 충분히 없다면 이들이 원하는 것으로 지불하세요.”

듀팡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듀팡!”

서늘한 위압감이 서린 말. 듀팡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당신이 우리를 너무 기다리게 했거든요. 난 그 대가를 다 받아야겠습니다.”

억양 없이 냉랭하게 내뱉는 그 말에 이상하게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듀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카일은 매튜를 시켜 용병들의 이름과 나이를 적게 했다. 명단을 작성하는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고 충돌할 테지만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기회가 생겼을 때 확실하게 해야 이들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할 것임을 본능으로 느낀 탓이었다. 이들의 철저한 충성을 받아 낼 것이고, 그 충성을 기반으로 해서 이곳을 지배할 것이다. 그때 그의 고개가 저절로 들렸고, 이내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엘리샤…….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가슴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직 전신에 전율이 맴돌고 아까의 승리와 자신감이 그에게 또 다른 것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분을 그녀를 안으며 만끽하고 싶은 충동이 순간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구석구석,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은 남자의 원초적 본능에 뼛속까지 물든 짙은 남색의 눈동자.

엘리샤는 카일의 시선을 느끼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자신의 시선과 곁을 피하던 카일이었다.

“집은 구했소?”

“그럼요.”

카일은 손을 내밀어 엘리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말없이 재촉했다.

탕! 문이 열리자마자 카일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그녀의 목덜미에 뜨겁게 입을 맞췄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전율처럼 그를 뒤흔들었고 아직 몸에 남아 있는 싸움의 여파가 욕망을 더욱 거세게 부추겼다. 그는 그녀를 벽에 세웠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려 성급하게 더듬어 대기 시작했다.

“카일, 잠깐만요. 잠깐만요.”

엘리샤는 그의 뜨거운 열정에 물들면서도 그를 붙잡았다. 섹스보다 먼저 그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정말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카일은 그것을 달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만. 가만히 있어!”

그의 음성이 거칠게 느껴진 순간 그의 강력한 힘에 허리를 잡혀 그대로 그녀의 몸이 돌려세워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등을 눌러 몸을 숙이게 만들었다.

“카일?”

드레스는 이미 허리까지 올려졌고 맨살이 드러난 다리 사이를 다급한 그의 손길이 아프게 찾아들었다. 으읍! 아무래도 그의 흥분이 지나친 듯했다. 그때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메마른 은밀한 수풀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최대한 그에게 맞춰 주려고 했다. 그는 힘겨운 싸움을 했고 그 싸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녀의 몸은 그의 다정함을 바랐다. 그때 몸을 세운 카일이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잡고 단숨에 그녀를 꿰뚫고 들어왔다.

으읍! 엘리샤는 고통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재빨리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엘리…….”

그가 은밀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자 엘리샤는 가슴이 묘하게 저리는 듯했다. 그의 남성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밀어붙일 때마다 벽을 짚고 있는 그녀의 손이 흔들렸다.

“엘리…….”

순간 아프기만 했던 행위가 갑자기 그 의미를 달리하는 듯했다. 그의 음성. 그의 음성이 그녀의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고, 그러자 가슴 깊은 곳에서 환희가 일어나는 듯했다. 그를 많이 좋아했고, 지금은 사랑하고 있다. 그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엘리샤는 보다 몸을 숙여 자신을 낮췄다. 본능적이었다.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 엉덩이를 들면 그에게 더한 만족을 줄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층 더 자극을 받았는지 더 깊게 치받아 들었고 그의 남성이 더욱 커지는 듯했다. 너무 깊었다. 너무도 깊어 다시 아프기까지 했다. 그의 숨결은 풍랑을 만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고 그의 커다란 손은 행여나 놓칠세라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거침없이 찔러 대는 그의 남성은 그녀에게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보다 더 깊을 수 없다고 여기면 입구까지 빠졌던 그의 남성이 더 깊게 파고들어왔다. 헉!

카일은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오로지 섹스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동안 쌓였던 욕망, 피로가 한꺼번에 다 풀리는 듯했다. 그는 말 그대로 엘리샤를 지배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그녀의 숨결도 다 차지했다. 그녀의 버거움은 조금도 염두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거칠다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갑자기 일으키더니 자신을 바라보게끔 그녀를 돌려세워 그대로 안아 올렸다.

엘리샤는 카일이 자신의 힘겨움을 알았나 보다 싶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데 얼얼해진 은밀한 곳에 다시 그가 자신의 남성을 삽입했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 격렬하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엘리샤는 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거침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그, 그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거친 신음 소리가 그의 대답의 전부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꾸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지난 7일, 아니 10일도 넘게 그녀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카일의 매몰참에 상처받았고 긴장에 휩싸인 채 그의 싸움을 지켜봐야 했었다.

“아…… 엘리…….”

그의 은밀한 신음 소리가 섞인 속삭임. 순간 가슴이 떨리는 듯했다. 그가 그녀를 원하고 있다. 이렇게 원하고 있다. 엘리샤는 두 눈을 감고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겨 버렸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엘리샤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낯선 붉은빛이 눈을 찔러 대며 그녀를 맞이했다.

“카일?”

엘리샤는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반대로 돌려 보았다. 그녀의 곁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대로 잠 속에 빠져든 그녀와 달리 그는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엘리샤는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얼굴을 기댔다.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의 반과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등을 가렸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은밀하고 깊은 곳의 얼얼함. 마음 깊은 곳의 저릿함.

“당신이 너무 멀리 느껴져…….”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눌렀다. 이상하다. 가슴이 미묘하게 저리고 미어지는 듯했다.

“왜 이렇게 아픈 거지?”

요즘 힘들어서 그런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가?

“카일은 어디로 간 거지?”

엘리샤는 다시 힘주어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아프다. 카일의 이름을 말한 순간 마치 반사적인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나 지금 서운해하는 건가?”

그가 다정하게 안아 주지 않아서 서운한 건가?

“난…… 그가 그냥 꼭 한 번 안아 주길 바랐는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러길 바랐다. 카일에게 많은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야. 아니야, 엘리샤.”

순간 엘리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보같이. 누구보다 카일의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고 알면서도 제 바람 하나 무산됐다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고 저리다니.

“아, 이런. 난 정말 이기적이야.”

엘리샤는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는데 카일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앉아서 그가 다정하지 않다고 우울해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기적인 일일 것이다. 그는 지금도 쉬지 못하고 있다. 그도 무쇠가 아닌 이상 몸 곳곳에 피로가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어두워졌다.

“그를 쉬게 해 줘야 하는데…….”

하나 고생은 이제 또 시작이다. 오늘의 일로 카일이 완벽한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리를 완전하게 잡기까지 치러야 할 고생은 이제 시작인 셈이었다.

엘리샤는 서둘러 드레스를 찾아 입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왠지 불쾌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녀는 부싯돌을 부딪쳐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오랫동안 비워진 탓에 침대는 눅눅했고 집 사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더욱 서둘렀다. 풀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 하나로 묶었다.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힘겨운 하루를 끝내고 돌아올 그에게 아늑한 공간을 선사하는 일일 것이다.

“집…….”

그러자 이번에는 가슴이 따뜻하게 뭉클해졌다. 집……, 집이 생겼다. 그녀와 카일의 보금자리. 집에서만큼은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녀가 그런 마음으로 침실에서 나온 순간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작은 홀에 꽤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져다 놓은 건지.

“미안해요.”

그 말이 먼저 나왔다. 잠시 우울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잠시 애잔한 눈길로 물건들을 바라보던 엘리샤는 이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카일은 뒷수습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빈틈없이 살피고 매튜가 내민 명단을 받아 읽었다.

“생각보다 용병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카일도 그러했다. 매튜가 작성한 명단을 보니 용병들의 숫자가 200명을 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용병이라고?”

순간 기가 차 카일은 냉랭하게 내뱉듯이 물었다.

“저들 말로는 그렇습니다.”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저들 말로 그렇다니까요.”

매튜는 뭐가 문제냐는 듯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명단 쓰느라 고생했는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꼭 자신이 조작한 것처럼 말하다니.

카일은 매튜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명단을 쳐다보았다. 심각하다. 여기는 생각보다 낙후된 곳이라는 느낌이 찾아들었다. 비정상적이게 한쪽으로 치우친 곳. 알렉스가 이곳을 자율 경쟁 지역이라 지정한 것이 무색한 도시라니.

“하나같이 무식합니다. 글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것도 제 이름 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카일은 매튜의 투덜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용병이 200명이라…….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다면 적어도 한 가구당 구성원이 다섯 명은 될 것이고, 그럼 적어도 1,000명이라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장인들에게 매달려 살고 있다는 말이다.

“발전할 수 없는 조건이 먼저 갖춰져 버린 곳이군.”

어쩌면 이곳은 얼스월드의 비약적인 발전에 가려진 음지일지도 모른다. 정책 하나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몇 년이 걸리는지 카일도 도성에서 수업을 받았기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정책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각종 이해 집단이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이었다. 알렉스가 이곳을 자율 경쟁 지역으로 선포한 것은 각 조합들의 지나친 독점과 폐쇄성을 깨트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선점한 사람들이 보석 장인들이라니…….

“이제 저녁 먹으면 안 됩니까?”

매튜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이 한꺼번에 올라와 신물까지 넘어오는 듯했다. 그러자 매튜와 함께 뒷정리를 하던 여섯 명의 용병들이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카일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자신을 쳐다보는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마님이 저녁을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뭐?”

마님은 또 뭐고, 저녁은 또 뭔가? 엘리샤가 그런 일을 할 줄 알 리 없는데. 카일은 여자라면 무조건 부엌일에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각자 알아서 먹도록 해.”

“아까 듀팡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엘리샤 님이 저 언덕 전부를 다 차지했다고 하던데요.”

매튜의 말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엘리샤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샤가 본 세상은 책상 위의 세상. 그랬던 그녀가 현실의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세상. 그동안 그녀가 누려 왔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카일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엘리를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도록 해.”

“앗! 저거 연기 아닙니까? 굴뚝에서 지금 연기가 나는 거 아닙니까?”

루가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손짓을 하며 떠들어 댔다.

“마님의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마님……. 아주 제멋대로다. 그러면서도 그 호칭으로 이들의 관계가 정리되는 듯했다. 이들은 카일이 누군지, 엘리샤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주인 같은 사람이라 결정한 듯하다. 그들은 카일의 눈치를 보더니 게걸음 치듯 슬금슬금 언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카일이 저들의 목덜미를 잡아 던질 거라 여겼는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언덕 위의 엘리샤를 향해 뛰어갔다.

“이런. 엘리는 요리를 못하는데.”

그 말을 미처 해 줄 틈도 없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언덕 위로 오르던 카일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을 본 적이 있던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이 그의 눈과 가슴을 가득 채우며 들어왔다.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빛. 붉게 물든 바다. 자연의 위대한 조화까지 느껴지는 붉은 노을이었다. 그 노을을 잠시 더 가슴에 담고 이윽고 카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덕 위에 제 집도 하나 주시는 거죠?”

카일이 올라오길 기다렸는지 매튜가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아마도.”

“저는 저 밑에서 못 잡니다. 카일 님과 함께라면 몰라도 혼자서는 못 잡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무서워서 그런가?”

그러자 매튜가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무섭지 안 무섭겠습니까? 저들이 한 번에 승복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거 바람직한 생각이군. 이제 시작이다, 매튜.”

“그러니 가까이서 자겠습니다.”

“참 솔직하군.”

“그게 제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훗. 카일은 알 만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대로 매튜는 솔직한 사람이다. 여동생을 위해서 펄펄 뛰며 카일에게 덤벼들 정도로 형제애도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지만 카일은 매튜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기사들은 자신의 맹세를 지켰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기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대상이 누구라 할지라도 그래야 한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카일이었다. 단지 그가 더 뛰어났다면 그런 부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부족한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일은 자신이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킨 매튜에게 오히려 호감과 신뢰가 생기고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다, 매튜는. 앞으로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엘리샤 님이 저녁으로 뭘 준비하셨을까요?”

“기대하지 마라.”

카일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도 제 나름 요리와 집안일을 할 사람을 구하려 했지만 아무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 하긴, 지금 누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오고 싶겠는가? 자신이 새로운 주인이라고 선언했지만 카일은 그것을 공포로 이끌고 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공포와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아주 잠시일 뿐,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엘리샤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다. 그러니 생각해야 한다. 다른 방법……. 내가 저들의 고용주가 된다면?

“아! 냄새가 참 좋습니다.”

굶주린 배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 설마, 엘리샤가? 카일은 놀라움으로 눈이 크게 떠지고 말았다.

“이렇게 맛있는 식사는 처음입니다.”

다들 흡족한 표정으로 부른 배를 두드려 댔다. 엘리샤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구간이 붙어 있는 곳을 치웠어요. 오늘부터 거기서 자면 돼요.”

“저희 전부 다요?”

“원한다면요.”

순간 카일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아까 여기도 곰팡이 냄새가 지독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가 덧문을 다 열고 청소를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그렇게 치웠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엘리샤는 금세 그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건 옳은 일이라 생각해요. 말릴 생각 하지 마요. 내 고집이 어떤 고집인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엘리샤는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말해 카일로 하여금 더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카일은 좀처럼 편하지 않은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이윽고 무뚝뚝하게 매튜들에게 말했다.

“숙소에서 기다리도록 해. 곧 나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아……. 엘리샤는 그릇을 치우며 그 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의 말뜻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챈 탓이었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아……. 엘리샤는 속으로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카일은 왜 이러는 걸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카일의 말처럼 그는 웨스트필드 남자들과 달라서 그런 것이든가, 아니면 카일에게 자신이 아주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의논 상대가 되지 못하든가. 엘리샤가 몇 번이고 카일에게 같이 의논하자고 말했지만 카일은 번번이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둘 중의 하나. 설마하니 그녀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카일의 태도는 그녀에게 불쑥 어떤 느낌을 안겨 주었다. 에드나처럼, 예시카처럼, 노아처럼 될 자격이 그녀에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이런 상황에 빠트린 장본인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자꾸 되새기게 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입술을 악물었다.

카일은 엘리샤의 등 뒤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침묵에 왠지 습기가 묻어 있는 기분이었다.

“엘리.”

“네.”

“당신 덕분에 맛있게 먹었소. 고맙군.”

정말 의외였다. 손끝에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자랐을 엘리샤가 요리를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께서 내가 만든 스튜를 좋아하세요. 처음에는 맛이 있어서 좋아하시는 줄 알았더니 그냥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맛없어도 맛있게 드신 거더라고요. 그래서 노력했어요.”

엘리샤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항상 노력해 왔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래 왔었다.

“일라이 공작님은 정말 축복받으셨군.”

“키안 백작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처럼 멋진 아들을 두셨으니 말이죠.”

엘리샤는 자신의 우울함을 깨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오, 엘리?”

“그럼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엘리샤는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며 이번에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주어진 것을 두고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더 어려운 것은 그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일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했어요. 앞만 보고 있잖아요.”

엘리샤는 손을 내밀어 카일의 거친 손을 잡으며 이어 말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 그를 인정하는 말.

“당신처럼 대단한 남자는 없어요. 알렉스도 케이도 당신처럼 대단하지는 않다고 봐요. 그들은 다 주어진 자리에서 시작한 사람들이니까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알렉스와 케이가 들으면 벌컥 화를 낼 만한 발언 아닌가? 그 대단하고도 거대한 두 기둥을 이렇게 평가하다니. 카일은 손을 내밀어 엘리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그때 엘리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저들과 무슨 일을 의논하려고요? 내 보기에는 앞으로 적어도 1주일은 더 격렬하게 싸워야 할 듯싶은데요.”

“당신이.”

엘리샤는 손을 올려 그의 입을 막으며 그에게 자신이 예상한 앞으로의 일을 이어 말했다.

“두고 온 수레도 가져와야 할 것인데 당신이 직접 할 필요는 없죠.”

그 말에 카일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엘리샤다.

“나라면 고용주가 되어 용병들을 고용하겠어요.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까 이들에게는 돈 주는 사람이 최고인 모양이더라고요.”

이런, 엘리샤. 당신 정말……. 카일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뭐,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을 거 같아요.”

“어째서?”

카일은 그녀의 달콤한 살 내음이 나는 손바닥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당신은 분명 이보다 나은 세상을 꿈꿀 테니까요.”

순간 카일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읽어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슴 한편이 절망으로 물들어 있는 카일에게 크나큰 위로와도 같은 일이었다. 엘리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렇게 그를 읽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엘리샤는 계속 종알거렸다.

“아, 그들을 보낼 때 웰든 영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 오라고 시키는 편이 좋겠어요. 목록은 내가 적을게요. 매튜 이름을 덧붙여서 보내면 잘해 줄 듯싶어요.”

카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샤는 그가 직접 입을 열어 구체적인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 동작에서 간파했다. 그러자 간신히 진정시킨 속이 다시 쓰라렸다. 엘리샤는 그것을 꾹 누르고 카일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말했다.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카일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천천히 끌어당겨 안았다. 너른 품에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안아 주다니. 그러지 말자고 해도 자꾸 쓰라리고 저린 가슴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채우는 듯했다. 엘리샤는 두 눈을 꼭 감고 그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아 그의 가슴에 완전히 파묻혔다.

엘리샤의 향기를 가슴에 품은 채 카일은 깨끗하게 치워진 넓은 숙소를 둘러보다가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매튜.”

“네.”

“내일 아침 용병들을 모집해라. 우리가 용병을 고용한다.”

“네? 우리가 용병을 고용한다고요?”

매튜가 놀란 음성으로 묻자 카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하듯 말했다.

“고용하는 목적은 우리가 두고 온 수레를 가져오는 것과 웰든 영지에서 물자를 사 오는 일이다.”

“그건 저희가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우리는 직접 나가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고용을 해야 합니까?”

매튜는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카일은 엘리샤가 얼마나 똑똑한지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설명 자체가 필요 없었다.

“나는 사우턴야드 용병들을 전부 다 내 밑으로 끌고 들어오려 한다. 그러자면 내가 그들의 고용주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지.”

순간 매튜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카일이 자신이 사우턴야드 주인이라 선언했을 때 그가 조만간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고 도성의 지지를 받아 이들을 지배할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반면 루와 제이슨들은 손뼉을 치며 카일의 생각에 탄성을 내질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있다 여겼고 실력이 정말 뛰어나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알았었다. 그 힘으로 이 세계를 지배할 줄 알았다. 무력 충돌이 더 벌어지긴 하겠지만 결국 루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힘으로, 공포로 이곳을 장악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방향이었다. 용병이 또 용병을 고용한다는 발상에 그야말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들은 그동안 용병들을 홀대했었다. 그것을 바꾸어 저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러니 내일 아침 네가 나가서 용병 여덟 명을 고용하도록. 수고비는 은화 일곱 닢이다.”

그러면서 카일은 제이슨에게 물었다.

“그 정도 거리와 위험도를 봤을 때 금액이 어떤가?”

“많은 편입니다. 여기 장인들은 아주 구두쇠들이라 그들이었다면 세 닢에서 다섯 닢 사이를 불렀을 겁니다.”

“그렇군. 매튜, 너에게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발한 발상이었다. 매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일은 이번에는 제이슨들에게 말했다.

“분명하게 할 것은 해야겠군.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밝혀라.”

“따르겠습니다.”

“먹고살게만 해 주십시오.”

“저는 돈도 좀 벌고 싶습니다.”

“좋다. 내일부터 우린 다시 죽도록 싸우게 될 것이다. 길게 끌지 않을 테니 나를 믿고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여섯 명. 여섯 명이 확실한 그의 편이 되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밑으로 끌어당겼다.

카일을 기다리다 저도 모르게 잠들었던 엘리샤는 순간 퍼뜩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등줄기에서 감각적인 느낌이 쇄도하고 있었다. 카일……. 엘리샤는 둥글게 말았던 몸을 펴고 바로 누웠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그의 눈빛이 보였다. 엘리샤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녀에게는 생소한 짭조름한 바다 향이 그의 몸에 서린 것을 보니 밖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들어온 듯싶었다.

그는 바로 그녀의 속치마를 허리까지 끌어올렸다. 엘리샤는 나른하게 몸을 비비적거리며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찬물에 씻은 것처럼 그의 피부는 차가웠다. 그는 이미 옷을 다 벗은 상태였다. 그가 다리 사이에 파고든 채 고개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어찌나 감각적이던지 순간 엘리샤의 피부에 쾌감의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가 채워 준 마음 덕분인지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가 고개 숙여 그녀의 납작한 배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더니 뜨거운 낙인을 찍는 것처럼 입을 맞췄다.

“나 옷 다 벗고 싶어요.”

엘리샤는 그에게 애교 부리듯 말하며 두 팔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카일은 그녀의 말대로 속치마를 묶은 끈을 풀고 옷을 위로 끌어올려 벗기고는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알몸. 카일은 그녀의 눈부신 알몸을 잠시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저절로 떨리는 손길로 그녀의 젖가슴을 가벼이 어루만져 보았다. 으음……. 그녀의 나직한 신음 소리가 그를 쾌감의 세계로 초대하는 소리로 들렸다.

카일은 고개 숙여 뾰족하게 곤두선 그녀의 젖꼭지를 혀로 살짝 건드렸다 입술로 삼켜 보았다. 이내 그녀의 젖꼭지를 그대로 빨아들여 그 달콤함을 음미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애무하면 할수록 그 달콤함이 짙어지는 듯하다. 카일은 저절로 거칠어진 숨결을 내뱉으며 이번에는 다른 쪽 가슴도 흠뻑 젖도록 빨아들였다.

엘리샤는 달뜬 신음 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비적거렸다. 젖꼭지에서 시작된 무수한 쾌감의 줄기가 발가락 끝까지 단숨에 전달되는 듯했다.

“하아…… 카일…….”

카일은 그녀에게 자신을 전부 새겨 놓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곳을 세심하게 더듬고 애무해 갔다. 그녀의 가늘고 긴 목덜미, 가녀린 어깨, 긴 팔과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 그리고 그가 가장 만지기 좋아하는 젖가슴. 그는 다시 한동안 그녀의 젖가슴에 집착하며 그녀의 젖꼭지가 욱신거리도록 세차게 빨아들였다. 그녀가 아프다는 듯 그의 어깨를 밀어내자 그는 그제야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녀의 납작한 복부, 아름다움 수풀, 쭉 뻗은 두 다리. 그는 그녀의 발가락까지 샅샅이 애무하다가 그녀의 몸을 살짝 돌렸다. 그녀의 발을 양손으로 잡고 주무르다가 그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고개 숙여 그녀의 엉덩이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종아리, 허벅지를 양손으로 주무르듯 만져 주며 그는 그녀의 엉덩이에 연신 입술의 낙인을 찍어 댔다. 그녀의 다리를 벌려 엉덩이 깊은 계곡까지 놓치지 않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엘리샤는 그에게 더한 것을 요구하며 엉덩이를 그대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카일은 한 손으로 그녀의 복부를 감싸고 그대로 그녀의 여성을 입술로 덮쳤다. 뜨거운 혀가 단숨에 그녀의 흠뻑 젖어든 깊은 곳을 파고들었고 그의 남성이 그러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으음……. 엘리샤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너무도 부드럽고 섬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쾌감도 그녀를 압도하고 있지만 그보다 그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열리게 했다. 이렇게 그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데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질 사람은 카일뿐이었다.

카일은 흥분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농도가 짙어지는 그녀의 애액을 남김없이 다 핥아먹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다 달콤했다. 카일이 혀를 깊게 집어넣어 그녀의 민감해진 질 벽을 훑자 그녀의 신음 소리가 더욱 뜨거워져 갔다. 그 신음 소리가 카일을 견딜 수 없게 달구었다.

카일은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자신의 남성을 힘껏 그녀에게 밀어넣었다. 앗! 아찔했다. 너무도 지독한 쾌감이었다. 카일은 한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하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부풀어 오른 구슬을 애무하며 연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옭아매져 있지 않았다면 결코 감당하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질 정도로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아까와 다르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쾌감이 빠르게 그녀를 잠식해 들어왔다. 아흣!

카일은 그녀의 신음 소리를 듣자 가슴 한편에 자부심이 채워지는 듯했다. 너무 미숙한 나머지 그녀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그 시간이 이제야 조금씩 지워지는 듯했다. 원래 그는 뭐든 쉽게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격의 사람들처럼 그는 자신의 실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카일은 삽입했던 몸을 빼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쾌감에 물든 그녀의 얼굴을……. 그는 그녀의 양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 해서 엉덩이를 살짝 들어올리게 한 후 다시 삽입했다. 끝까지 삽입했다.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휜 가운데 그는 그녀의 골반을 잡고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격렬한 기질이 숨 쉬는 눈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눈빛에 사로잡힌 채 그는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들의 몸부림은 더욱더 뜨거워져 갔다.

카일은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엘리샤와 깊은 사랑을 나눈 후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는 아직 컴컴한 허공을 보며 두 눈을 깜빡거리다 엘리샤를 더듬어 보았다. 그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았다. 으윽!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뒷목이 당기는 듯한 두통이 그를 덮쳤다.

“또 이러는군.”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입속말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지독한 두통이었다.

“곧 낫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윽고 두통이 가라앉자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 속을 걸었다. 어찌나 어두운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두 팔을 뻗어 앞을 더듬었다. 문이나 벽에 부딪쳐 엘리샤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까스로 침실에서 나온 카일은 이번에는 부엌의 벽을 손끝으로 더듬어 물이 담긴 항아리를 찾았다. 너무 어두워 장님처럼 더듬거려야 하는 게 짜증 났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이윽고 항아리를 찾아 그 안에 담긴 물을 한 손으로 떠서 마신 후 그는 벽을 더듬어 창가로 다가가 덧문을 열어 보았다. 한 치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캄캄하게 물들어 있었다.

“날씨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

달빛도 사라진 밤하늘.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밤은 원래 캄캄하고 날이 궂으면 더 캄캄한 법인데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카일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카일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물이 다 빠졌어. 빨리 들어와. 조개 캐야지.”

썰물? 썰물이란 뜻인가? 카일은 분주하게 머리를 돌렸다. 사우턴야드의 썰물. 썰물, 썰물. 썰물의 시간대. 순간 그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동이 텄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암흑이 그를 덮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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