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알렉스는 굳은 표정으로 일라이를 살피듯 바라보기만 했다. 도성에서는 키안의 지휘 아래 해적 소탕을 위한 장기 출정 준비가 한창이었다. 알렉스는 그보다 먼저 네파르나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주둔하고 있는 얼스월드 병력을 안전하게 귀향시키기 위해 네파르나로 가야 한다. 그의 전령이 예시카에게도 소식을 전했고, 예시카도 알렉스를 만나기 위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노스이언 국경에 있는 온천 휴양림. 알렉스는 출정 전 일라이와 에드나를 만나 지금까지의 일을 말하기 위해 이제 막 도착했다.
일라이는 연륜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눈빛으로 알렉스를 한동안 마주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상태를 살피지 말고 말해라, 알렉스.”
알렉스는 일라이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자마자 일라이가 원하는 대로 바로 입을 열었다.
“네파르나를 품에서 버리려 합니다.”
일라이와 에드나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 눈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결국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제가 치달아 가게 만들 수도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냥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복수는 철저하게 그러나 방법을 달리 한다. 네파르나를 그냥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여기 있는 세 사람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전에서나 통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소모되는 막대한 재정. 헤아릴 수 없는 죽음들. 모든 사회적 기반이 일제히 적어도 10년 이상을 후퇴하는 막대한 후유증. 이것이 10년 전 네파르나와 해전을 치르며 알렉스가 깨달은 값비싼 대가였다.
처음에는 승리에 취해 그렇게 크게 생각지 않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지난 전쟁의 그림자에 갇혀 허덕이는 백성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을 잃어 빈민층으로 전락한 사람들.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게 만든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전쟁은 피해야 한다. 거듭되는 전쟁은 결국 알렉스의 뒤를 잇는 그 언젠가의 시대에서 암흑의 시대로 전락하게 만들 것이다.
“분열을 일으켜 저들이 온전한 나라를 갖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할 겁니다.”
일라이는 알렉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것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에드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듣기만 했다. 알렉스는 그런 부모님의 침묵에서 그야말로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진 막중한 책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의 침묵은 이제부터는 전부 다 혼자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알렉스는 이어 말했다.
“지금 도성과 웨스트필드를 중심으로 해적 소탕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장기전을 예상하고 있으나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예시카와 협력하여 겨울 바다가 닫힌 후 해적을 소탕하려고 합니다.”
에드나는 다정하게 일라이의 손에 자신의 손을 밀어넣었다. 듣는다. 이것이 가능할지 한때 이들도 의심한 적이 있었다. 과연 자식들의 말을 듣기만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얼스월드와 관련 있는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고 참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그 시기는 언제가 적절할까? 지금 아니면 언젠가?
그런데 알렉스와 케이의 갈등, 그리고 엘리샤의 일을 겪으며 이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의 조언이 자식들에게 보이지 않는 자격지심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전 그날,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참고, 듣고, 스스로 깨우쳐 나아가기를……. 기다린다. 특히 엘리샤는 그래야 한다. 스스로 기억하고 벗어나야 한다.
알렉스는 계속 얼스월드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에드나는 3년 전, 그날을 떠올리고 말았다.
“일라이, 일라이.”
일라이는 깜짝 놀라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밤늦도록 아침에 리지와 체스터 숲으로 놀러 간 엘리샤가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샤와 같이 나갔던 리지만 혼자 저녁에 돌아왔다. 리지는 엘리샤가 보이지 않아 먼저 성으로 간 줄 알았다고 했다. 결국 일라이와 에드나가 엘리샤를 찾으러 나왔다. 그런데 엘리샤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라이, 어서요!”
일라이는 에드나의 외침을 따라 말을 달렸다. 겁에 질린 목소리. 에드나는 평생 이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일라이는 난생처음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가 무엇을 보게 될지 두려워 저도 모르게 떨고 말았다.
마침내 일라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안도와 걱정이 뒤범벅이 된 채 말에서 뛰어내렸다.
“엘리샤?”
엘리샤는 자신의 얼굴과 손을 거칠게 문지르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왜 저렇게 멀찍이 서 있는 거지? 왜 이렇게 우리 아이가 붉게 보이는 거지? 일라이는 에드나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에드나는 엘리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라이는 이 모든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마침내 엘리샤를 무사히 찾았다는 안도에 한걸음에 다가서려고 했다.
“오지 마!”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엘리샤의 음성. 그래도 일라이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에드나가 재빨리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에드나는 덜덜 떨었다. 일라이는 그런 에드나가 정말 낯설었다. 평생 두려움을 모르던 사람 아니던가? 그 무슨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데 일라이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엘리샤가 붉어 보이는 이유.
엘리샤는 전신에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진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그녀의 하얀 피부를 가리고 있었다. 일라이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움직였다. 순간 그의 눈이 믿기지 않다는 듯 가늘게 떠졌다. 피? 엘리샤의 발밑에 고여 있는 피. 설마 엘리샤? 그제야 에드나가 왜 이렇게 겁에 질려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는지 일라이도 알 수 있었다. 일라이는 손을 뻗어 에드나에게 힘을 불어넣듯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마침내 에드나가 가까스로 다시 움직였다. 일라이 덕분에 미친 듯이 두근거렸던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은 듯했다. 그러자 덜덜 떨렸던 몸도 그제야 침착해지는 듯했다.
“엘리샤. 엄마야, 엄마.”
일라이는 계속 엘리샤의 발밑에 고여 있는 피를 쳐다보았다. 이런…… 엘리샤……. 일라이는 순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엘리샤를 자상하게 바라보았다.
“괜찮다, 아가야. 엄마와 아빠가 왔어. 괜찮다, 이제.”
에드나는 조심스럽게 엘리샤에게 다가가며 속삭였다.
“엘리샤. 엄마가 왔어. 아빠도 왔고. 엄마가 가서 안아도 되겠니?”
엘리샤는 순간 멍한 눈으로 에드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그래, 엘리샤. 엄마야.”
엘리샤가 비틀거리며 에드나를 향해 양손을 뻗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엄마, 내가 잘못한 거 같아. 내가 크게 잘못한 거 같아.”
“아니야.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엘리샤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면서 자신의 손을 마구 문지르며 소리쳤다.
“나 같은 거 태어나지 말걸 그랬어. 태어나지 말걸 그랬어!”
충격이었고 경악이었다. 왜 혼자 숲에 남아 있었는지 물을 수도 없었다. 엘리샤의 울음이 충격에 빠졌던 에드나와 일라이를 움직이게 했고 그들은 낮부터 내린 비에 흠뻑 젖은 엘리샤를 단단히 감싸안고 한걸음에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드나는 온몸을 떨며 우는 엘리샤를 진정시키기 위해 끌어안고 밤을 새웠다. 일라이는 그런 딸과 아내를 밤새도록 침대 곁에 앉아 지켜보았다.
엘리샤가 진정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대신 그녀는 펄펄 끓는 고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에드나는 이제야 엘리샤를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일라이는 방 밖에서 에드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에드나가 밖으로 나오자 일라이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엘리샤는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어요.”
그러자 일라이는 그제야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엘리샤가 몹쓸 짓을 당한 것은 아닌가 싶어 어찌나 걱정되고 화가 나던지. 그는 어젯밤부터 케이를 시켜 영지 전체를 들쑤시게 하여 의심쩍고 신원이 불명확한 남자들을 색출해 붙잡게 했다.
에드나는 잠시 말을 아끼더니 일라이에게 말했다.
“일라이. 체스터 숲을 수색해야 할 것 같아요.”
“엘리샤를 그렇게 만든 놈이 체스터 숲에 있을 거 같나?”
일라이는 순간 자신의 건강도 잊었다. 작년부터 심장이 콕콕 쑤시더니 어느 순간부터 지독한 통증을 동반한 아픔이 찾아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다 잊었다.
“나도 분명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체스터 숲을 샅샅이 수색해야 할 거 같아요.”
엘리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엘리샤는 지독한 고열에 시달리며 앓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약을 써도 좀처럼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비를 맞은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겠지만 다른 상처는 하나도 없는 엘리샤가 이렇게 심하게 아픈 적은 없었다.
일라이와 에드나는 계속 고열에 시달리는 엘리샤 곁을 지켰다. 도대체 왜 혼자 체스터 숲에 그렇게 피범벅이 되어 서 있었던 것일까? 그 피는 도대체 누구의 피였을까? 에드나는 리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다들 엘리샤의 상태를 보고 놀란 상태였다. 그럼 사람은 일시적으로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된다. 특히 리지처럼 엘리샤와 같이 있다가 혼자 돌아온 경우에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에드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숲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냐고. 그러자 리지는 마을 아이들하고 함께 놀았고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우리 아기가 왜 이렇게 아플까요…….”
며칠이 지나도 엘리샤의 고열은 내리지 않았다. 에드나도, 레오의 어머니이자 얼스월드 최고의 치료사라고 알려진 리아도 속수무책이었다. 갖은 노력 끝에 가까스로 열이 떨어져 잠시 안도를 하면 그 밤에 다시 뜨겁게 돌변해 있었다. 원인을 모르니 미칠 노릇이었다. 고열에 시달린 엘리샤의 입술이 바짝 말라 갈라졌고 에드나, 일라이의 입술도 새카맣게 타 버렸다.
엘리샤가 그렇게 아픈 원인은 며칠 후에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체스터 숲을 수색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라이는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샅샅이 뒤졌고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다시 되짚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진흙탕 속에 파묻혀 있는 바람에 놓쳤던 그들.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세 구의 시체. 그중 한 놈의 가슴에 엘리샤의 단도가 꽂혀 있었다.
일라이는 시체를 수습하고 엘리샤의 단도를 가지고 돌아와 에드나를 불러 서재로 들어갔다. 일라이는 품에 가지고 온 엘리샤의 단도를 내려놓고 말했다.
“세 구의 시체가 있었소. 이놈들이 엘리샤를 겁탈하려고 하다가 엘리샤 손에 죽은 듯해.”
에드나는 엘리샤의 단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단지 그런 것인가? 그런데 엘리샤는 왜 실수를 한 것 같다고 그랬지? 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소리친 거지?
“에드나?”
일라이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에드나를 깨어나게 했다.
“내 생각과 다르오?”
“아니요. 난 그저…… 엘리샤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엘리샤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고, 스스로를 혼자 지켰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엘리샤가 입을 안 여나?”
아침부터 열이 떨어진 엘리샤는 에드나가 아무리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물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에드나도 엘리샤에게 자극이 될까 두려워 체스터 숲에서 시체를 찾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시체를 찾은 것은 일라이와 에드나, 그리고 그의 수하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우리를 노리기 위해 엘리샤에게 그런 짓을 한 것 같지 않나?”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에드나에게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정말 모르겠다. 자신들을 노리기 위해 엘리샤에게 그런 참혹한 짓을 하려다 도리어 당한 걸까? 그러기에는 너무…….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거 같군. 우발적인 일인지도 모르오. 그들의 행색이 너무 남루했소. 내가 보기에 떠돌이들 같더군. 웨스트필드 주민들은 분명히 아니오.”
“일단 엘리샤의 건강부터 회복시키고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에드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일라이가 항상 우리 아기라고 부를 만큼 사랑스러운 엘리샤가 아프고 힘들어하는 것을 어쩌지 못하다니. 부모의 자격이 없는 듯했다.
“일단 엘리샤가 말할 때까지 모른 척합시다. 지금의 엘리샤가 감당할 수 있는 충격이 아니니 기다립시다.”
일라이는 손을 내밀어 에드나의 눈물을 닦아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엘리샤가 말할 때까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그 후로도 엘리샤는 몇 번을 더 크게 아파 혹독한 열다섯 살을 보내게 되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며 울음을 터트리면 일라이가 엘리샤를 품에 안고 방 안을 돌아다니며 달랬다. 엘리샤는 일라이에게 안긴 채 여러 번 헛소리를 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내가 잘못한 거 같아.”
“내 잘못이야.”
일라이는 그때마다 엘리샤를 더욱 꼭 끌어안은 채 다독였다. 엘리샤는 그렇게 헛소리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그때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열에 시달려서 그런 듯했다. 그러나 일라이와 에드나는 엘리샤가 열에 들떠 내뱉은 소리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또 모았다.
“리지는 괜찮아? 나를 미워하고 있지?”
“난 정당했어. 아니야? 나 정말 실수한 거야? 어떻게, 나 어떡해…….”
“엄마, 미안해요. 엄마 닮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어리광쟁이 엘리샤의 입에서 나온 그 모든 말들은 일라이와 에드나의 가슴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가설을 세우게 만들었다. 리지가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리지는 거듭 부인했었다. 마을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고 놀았고 엘리샤가 먼저 사라졌다고. 같이 놀았다던 마을 아이들도 전부 다 불러들여 위협을 동반해 다그쳤었다. 다들 리지의 말과 일치했다. 엘리샤가 먼저 사라졌다고.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고.
그러자 점점 더 의심이 생겼다.
“리지는 괜찮아? 나를 미워하고 있지?”
에드나와 일라이는 그날의 일이 엘리샤와 리지, 두 사람과 얽힌 일이라는 것에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엘리샤가 그때를 잊고 싶은 것처럼 필사적으로 밝아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자 애잔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때 에드나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엘리샤 혼자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그때의 기억을 닫았으니 혼자서 부딪쳐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 얼마나 더 엘리샤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일라이는 남은 평생을 엘리샤를 지켜보고 싶어 하지만 그의 건강이 그를 자꾸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에드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샤에게 맡긴다. 일라이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엘리샤가 다시 진심으로 웃기만을 기다린다. 억지로 웃는 엘리샤가 아닌, 성에만 머물며 갑자기 얌전해진 엘리샤가 아닌 카일의 곁에 있을 때처럼 발랄하게 웃어 대는 엘리샤로 돌아오기를.
그래도 엘리샤의 웃음은 너무나 그리웠다. 에드나와 일라이는 엘리샤의 진정한 웃음을 보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더 자주 도성 나들이를 하기 시작했다.
에드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그랬니, 알렉스?”
알렉스는 경직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카일과 엘리샤가 결혼을 했습니다, 어머니.”
“카일이 키안 백작을 설득시킨 거니?”
키안은 줄곧 카일이 엘리샤의 배우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었다.
“아닙니다. 저와 키안 백작이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제 오만함이 눈에 보였고 네파르나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일라이와 에드나는 정치 이야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엘리샤와 카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였다.
“그럼 엘리샤는 도성에 있는 거니?”
알렉스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보며 에드나는 나직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 있지? 노스턴야드?”
“아닙니다.”
“알렉스!”
결국 참다못한 일라이가 알렉스를 다그치고 말았다.
“케이가 전하기를 사우턴야드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봐라, 알렉스.”
알렉스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노여움에 이글거리는 일라이의 검푸른 눈을 마주했다. 엘리샤가 기가 막히게 빼닮은 아버지의 눈동자.
“나는 네가 행하는 그 어떤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 하나 지금 너는 왕으로서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는 바, 네가 네파르나에서 돌아올 때까지 도성에서 기다리겠다.”
알렉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라이는 자신의 검을 풀어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아버지…….”
에드나는 일라이가 무슨 뜻으로 그것을 풀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와 케이가 화해를 했다니, 이제 너희에 대한 마지막 걱정을 털어 버렸다, 알렉스. 그러니 이제 네가 돌아오면 나는 엘리샤를 보러 가겠다. 그리고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일라이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비록 4년이나 걸렸지만 케이와의 화해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을 거라 믿는다. 서로를 비춰 보며 오만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알렉스. 너에게 주는 마지막 충고다. 받아라, 알렉스. 이것은 이제 너의 것이다.”
알렉스는 받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일라이의 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그 검을 받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듀팡은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호기롭게 카일을 돌아보았다. 사흘이 지났는데 순조롭기만 했다. 튼튼하게 수리를 해 온 수레바퀴는 겨울 식량을 싣고 잘 굴러가고 있었고, 그의 품에 있는 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빛을 만천하에 떨칠 그날만 숨 죽여 기다리며 듀팡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이 길은 우리만 아는 길입니다.”
카일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듀팡이 자신 있게 덧붙였다.
“사우턴야드까지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의 그 상처가 덧날 일도 없을 겁니다.”
카일은 듀팡의 거만한 말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손에 쏠려 있었다. 엘리샤가 세심하게 그의 상처를 돌봐 주는 덕분에 화농이 생기지 않고 있고, 염증에 따른 고열도 없었다. 키안이 네파르나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을 때, 키안의 다리를 자르지 않고 살려 냈던 웨스트필드 레오의 실력에 감탄한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그렇게 빼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었던 웨스트필드였다.
그 의술이 근 10년이 흐른 지금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카일은 지금까지 강행군을 하면서도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증은 아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통증이 가라앉을 것이다.
카일은 왼손을 대신할 오른팔로 계속 단련하며 이 길을 걸어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오른손으로 검을 잡고 연습을 했고 그 상대는 때론 매튜, 때론 여섯 명의 용병이었다. 매튜와 용병들은 카일의 왼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소극적으로 대했다가 그 즉시 뼈저리게 후회하고 말았다. 그들이 직접 느껴 본 카일의 오른팔은 왼팔과 다를 게 전혀 없어 보였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느끼는 사람은 카일과 엘리샤뿐이었다.
엘리샤는 수레에 앉아 듀팡의 도발적인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카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 카일이었다면 분명 욱해서 듀팡을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음속으로 어떤 정리를 한 듯 전처럼 듀팡에게 하대하지 않고 있었다. 정리……. 엘리샤는 가만히 그가 어떤 정리를 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내 감이 왔다.
카일은 정말 사우턴야드에 정착할 생각인 것이다. 아버지, 키안이 만들어 놓은 길로 돌아갈 생각이 이제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다. 엘리샤는 날카롭게 빛나는 카일의 눈을 보며 자신의 감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만드는 길.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자 부모님의 영광을 뒤로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미래를 향하는 길. 그럼 이제 마음의 정리가 완전히 다 끝난 걸까?
그러자 갑자기 리지의 생각도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엘리샤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리지를 바라보았다.
“왜?”
리지는 자신을 쳐다보는 엘리샤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도 들지 않고 조그맣게 물었다. 남들이 있는 곳에서 그녀는 엘리샤와 편하게 말을 주고받지 못했다. 엘리샤를 올려다봐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지에게 그 길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레오처럼 순응하며 만족하고 있을까?
“리지.”
“응?”
리지는 거친 무명실을 이로 물어 끊어 내며 되물었다.
“지금이 만족스러운가요?”
리지는 느닷없는 엘리샤의 질문에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족?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궁금해서요. 지금까지의 삶이 만족스러웠나요?”
리지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엘리샤를 새카만 눈으로 보기만 했다. 대답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만족하냐고? 남들은 당연히 만족해야 한다고 여기는 삶. 아버지, 맥파든처럼 당연히 공작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 제 목숨을 산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삶. 만족하냐고?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리지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른 바느질감을 꺼냈다. 그녀의 역할은 인도자.
엘리샤는 대답하지 않는 리지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와 많은 것을 공유하며 자랐다. 많은 추억을 함께하며 웨스트필드를 누비며 자랐다. 그만큼 애정이 있고, 그만큼 믿는 사람이었다. 에드나도 일라이도 두 사람을 대할 때 그 어떤 차별도 하지 않았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자상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리지의 칭찬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자 가슴 깊이 담아 두었던 그리움이 들끓어 올랐다. 건강은 괜찮아지셨을까? 이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시면 안 되는데……. 부모님은 자신들의 결혼을 축복하셨을까?
하아……. 그러자 더더욱 그리움이 짙어졌다. 아마도 부모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다. 엘리샤의 선택을 믿고 응원해 주셨을 것이다. 아버지 건강이 좋아지셨기를. 그래서 카일과 자신의 아이들을 품에 안아 보시기를. 그리움이 절절하게 끓어오르자 엘리샤는 충동적으로 리지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리지. 리지도 부모님이 그립지요?”
바느질을 하던 리지의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그립지요? 내가 왜 그리워해야 하지? 리지는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어머니, 알마. 아버지, 맥파든. 삐쩍 말라 가며 맥파든에 대한 악다구니를 쏟아 냈던 어머니. 리지를 낳은 후 알마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계속 유산을 하는 바람에 몸이 급속도로 약해졌었다. 그러나 맥파든은 언제나 그녀의 곁에 없었다. 영지를 비울 때도 많았지만 영지에 있을 때도 집에서 함께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알마는 점차 모든 것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돌봐 주지 않는 맥파든을,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리지를 끊임없이 원망했지만 그녀의 원망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경하는 일라이 공작과 에드나 공작 부인의 충성스러운 오른팔, 맥파든의 아내가 된 것으로도 인생의 모든 행복을 다 얻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믿는 시선들이 알마의 고통을 외면했고 그녀를 고립시킬 뿐이었다. 그 속에서 리지는 언제나 알마의 모든 원망을 한 몸으로 받아야 했었다. 리지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맥파든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을 거라며 소리쳤던 알마.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집에서 쫓겨나 덜덜 떨고 있는 리지를 발견한 사람은 에드나였다. 그때 에드나는 처음으로 알마가 리지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알게 되었었다. 그때부터 에드나는 리지를 자주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맛보게 된 엘리샤의 생활. 에드나의 향기와 일라이의 따뜻한 품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리지는 차츰 그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엘리샤와 같은 옷을 입게 되었고, 그녀도 자신만의 액세서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리지의 옷차림을 본 맥파든이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제 딸은 자신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맥파든. 자네 딸도 내 딸이나 마찬가지다. 리지에게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다.”
“공작님. 저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제 딸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리지는 떨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맥파든은 일라이의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옷과 액세서리를 모두 뺏어 버렸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맥파든의 딸이 아니라 일라이의 딸로 태어났다면 좋았을걸! 나는 맥파든을 모른다. 맥파든의 품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품은 일라이의 품이다. 내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고 애정도 주지 않은 맥파든을 내가 왜 존경해야 하고 내가 왜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우냐고? 그래, 그립다. 일라이가 그립다. 그 품이 그립다.
훗! 아니지. 맥파든도 그립다. 너무 그리워서 나중에 죽어 맥파든을 만난다면 꼭 이렇게 비웃어 주고 싶다.
‘아버지가 그토록 애달파하던 공작 가문. 그 딸을 내가 망가뜨렸어요. 왜냐고요? 왜일까요? 아버지는 죽어서도 모르지요? 모를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나와 엄마는 없으니까요. 우리를 버렸으니까요.’
엘리샤는 리지의 입술에 갑자기 실오라기 같은 미소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고 말았다. 그러자 퍼뜩 뭔가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미소. 이렇게 소름이 돋았던 리지의 미소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거 같은데…….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옆에 내려놓은 채찍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그때 밖에서 듀팡의 자신만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점심은 좀 편하게 먹읍시다, 카일. 뭐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다 온 거 아닙니까?”
사흘의 평화가 그의 긴장을 사라지게 만든 것 같다.
“이 계약서를 찢어도 될까요? 보아하니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거 같은데.”
듀팡은 이제 오만한 모습을 다 찾았다. 사람은 정말 편리한 존재인 것 같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카일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용주 행세를 제대로 하고 있었다. 만일 카일이 고용주가 된다면……, 카일이 고용주가 되어 용병들을 아우르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보일까? 우리의 마음이 그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까?
엘리샤는 듀팡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듀팡 말처럼 그 계약서가 쓸모없기를 바란다. 그래서 카일이 전투를 해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사히 사우턴야드에 정착하면 계약서를 제대로 손봐 주겠다. 그리고 그 즉시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 주겠다. 모든 용병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끔.
그러자 엘리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자신이 가진 재능. 카일은 분명히 용병들을 자신의 밑으로 모이게 할 것이고, 자신은 그렇게 모이게 될 용병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엘리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그것이 엘리샤의 검푸른 눈에 생기를 듬뿍 불어넣었다.
이윽고 수레가 멈추자 말에서 내린 카일이 다가와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수레에서 내려 주었다.
“뭐가 즐거워, 엘리?”
엘리샤는 발꿈치를 올려 그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눈빛. 꼭 사고 칠 만한 것을 찾았을 때 반짝이던 어릴 적 엘리샤의 눈빛이다.
“사우턴야드로 가면 용병들의 계약서를 어찌 쓸까 생각 중이에요.”
카일은 그녀의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듀팡이 그 계약서를 쓰면서 얼마나 경기를 했는지 봤다. 그런데 오만하고 저들만 아는 장인들을 상대로 계약서를 쓰겠다고? 이런, 엘리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엘리샤뿐일 것이다. 그도 엘리샤가 계약서를 쓰자고 했을 때 깜짝 놀랐으니까.
“그때 당신은 내 뒤에 서 있기만 하면 돼요.”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니오?”
“당연하잖아요. 당신은 카일인데.”
카일은 자신을 믿고 장인들을 상대로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깜찍한 포부를 가진 엘리샤가 놀랍기만 했다. 그녀의 믿음은 어느 정도의 깊이일까? 그 끝이 과연 있을까?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엘리샤는 그를 믿어 줄 것 같다. 그럴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편들어 줘요.”
엘리샤가 장난스럽게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매달리며 하는 말에 카일은 웃기만 했다.
“응? 무조건 내 편 들어줘요.”
엘리샤가 이렇게 나오면……. 카일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소.”
듀팡은 정말 모든 걱정을 내려놓았는지 전 같지 않게 인심을 베풀었다. 그는 특히 매튜의 환심을 사고 싶은지 연신 그에게 돼지 뒷다리 살 중에서도 맛있는 부위를 내밀었다. 매튜는 그런 듀팡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는지 사납게 내뱉었다.
“그따위 맛없는 거는 너나 먹어라, 듀팡. 내 입에는 맞지 않으니까.”
그러자 듀팡의 얼굴이 소태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귀족이란…… 자기 배가 고파야 제 주제를 알고 세상이 어떤지 알지. 쯧쯧쯧.
엘리샤는 매튜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까다롭게 고르는 것을 보다가 곁에 있는 카일을 고개 젖혀 올려다보았다.
“왜?”
“매튜를 보다가 당신을 보니까 진짜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 것 같아서요.”
카일은 피식 웃으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엘리샤는 카일의 그런 수줍어하는 모습에 가슴이 격렬히 두근거렸다. 이 남자, 정말 멋지다. 냉정할 때도 멋있지만 이렇게 얼굴을 붉힌 모습은 더더욱 멋있어 보였다. 그것은 아마 자신만이 독점해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의 남자. 나만의 것.
“식사 다 하고 상처를 보러 갈까요?”
카일은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 앞에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식사를 바로 끝낸 카일은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식을 하는 매튜와 서로 많이 먹겠다고 옥신각신하는 용병들이 식사를 마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해 카일은 붕대와 약을 챙겨 들어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움직였다. 잠시 그녀와 단둘이서 고요함을 느끼고 싶었다.
“어디 가십니까?”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알아챈 매튜가 큰 소리로 물어 왔다. 그러자 용병들이 그에게 면박을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면서 뭘 물으십니까?”
그리고 들리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카일은 그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엘리샤의 손을 잡은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자 그는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그는 붕대가 감긴 자신의 왼손을 그녀에게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나약함의 상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빨리 끝내지.”
그런데 그때였다.
“엘리?”
그녀가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며 안겨들었다.
“당신이 이렇게 안아 주면 참 좋아요.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겨요.”
카일은 순간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라……. 손가락이 이렇게 되어 불안한데, 그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까 두려운데……. 조용한 숨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내렸다. 가슴도 제 박자를 유지하며 뛰었다. 그녀가 나를 믿는다.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믿는다. 카일은 그녀의 가냘픈 등으로 양손을 둘러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한편, 레드 다이아몬드 행방을 줄기차게 쫓던 도성 보석 조합에서 보낸 용병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사우턴야드에서 여러 갈래 길로 나뉘어 움직이는 바람에 이들도 그렇게 인원을 분산시켜 추적했었다. 레드 다이아몬드. 그것을 뜨내기 사우턴야드 장인들에게 뺏길 수는 없었다. 이 일에는 도성 보석 조합의 사활이 걸려 있으니 말이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야 한다. 레드 다이아몬드가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판가름해 줄 것이다.
“저희가 동쪽 길목에서 잡은 사우턴야드 장인이 토설했습니다. 듀팡이라고 합니다.”
“듀팡? 그 뚱땡이? 그자는 원래 사우턴야드에서 잘 나오지 않지 않았나?”
용병대장, 주빅은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오자 의심쩍은 듯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듀팡은 사우턴야드 이인자이고, 세공이 주는 아름다움에 미쳐 있는 인간이라 사우턴야드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라고? 그가 레드 다이아몬드를 직접 인수했다고?
주빅은 의뢰받은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다각적으로 사우턴야드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추적했었다. 그러나 좀처럼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고 어느새 사우턴야드에서 불과 열흘 거리밖에 남겨 두지 않은 웰든 자작 영지까지 오게 되었다. 이 전에 끝냈어야 했는데 어찌나 영악하게 움직였는지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뚱땡이가 나왔습니다. 그자가 레드 다이아몬드를 가졌습니다.”
주빅은 신중하게 생각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이놈이 어디로 갔을까? 그때 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오가는 수레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수하가 돌아왔다.
“대장님, 듀팡이 여기에 왔었답니다.”
“그래?”
주빅은 순간 떡갈나무 숲이 떠올랐다. 험한 길. 그러나 사우턴야드로 가는 지름길. 사우턴야드 장인들이 자신들만의 개척지인 것처럼 생각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비가 너무 많이 왔고 벼락에 맞아 쓰러진 나무가 많을 것이 당연하니 그 지름길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듀팡이 일행을 이끌고 떡갈나무 숲으로 갔다고 합니다.”
순간 주빅은 너무도 어리석은 듀팡의 생각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길이 막혀 있을 텐데.
“멍청하기는. 그저 빨리 갈 생각에 천재지변에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군.”
주빅은 출발 준비를 하라 지시하며 생각해 보았다.
“이참에 사우턴야드까지 들어가 용병들의 씨를 말려 버릴까?”
사우턴야드의 보석 시장이 활성화되니까 덩달아 용병들도 모여들었다. 그러자 도성 용병들의 일감이 그들로 인해 줄어들고 있었다. 이참에 확!
“스스로 죽겠다는 놈을 누가 말리겠나? 씨를 말려 주지.”
도합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용병들이 일행을 나누어 자작 영지 병사들의 시선을 끌지 않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마을에서 벗어나 숲길로 들어가면 미친 듯이 달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레드 다이아몬드를 고용주에게 돌려주겠다. 그럼 우린 일인자가 될 것이다!
카일은 미간을 좁힌 채 매튜와 나란히 서서 그의 구시렁거리는 말을 듣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오더니만 이럴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 이것을 치우라고 말씀하신다면……. 설마 그러진 않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요.”
카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장정 몇 사람이 손에 손을 잡아도 끌어안을 수 없는 굵직한 아름드리 떡갈나무가 벼락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자연의 힘이 보여 주는 눈앞의 현실이 이들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당연히 치울 수 없다. 넘어갈 수도 없다.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로 인해 길이 막히자 듀팡은 슬금슬금 게걸음을 쳐 엘리샤 등 뒤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저 뚱땡이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는데…….”
매튜는 금세라도 듀팡의 투실한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것처럼 연신 발을 굴러 댔다. 카일은 그런 매튜를 내버려 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길. 그 외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떡갈나무.
“세상 물정 모르는 장인 놈이 다 그렇지.”
카일의 입술에 차가운 조소가 맺혔다. 그렇지. 그러나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은 귀족도 마찬가지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고 있는 매튜는 날이 갈수록 배고픔을 짜증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매튜는 아직 즐거움을 위해 음식을 찾는 주의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자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모르는 귀족, 매튜.
그때 다른 길을 알아보러 갔던 숀과 루가 돌아왔다.
“수레를 끌고 갈 길이 있나?”
“있긴 있습니다만 너무 비탈져서 안 가느니만 못할 거 같습니다.”
그러자 매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짜증을 잔뜩 담아 듀팡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그냥 웰든 영지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 카일은 손을 들어 매튜의 불평 가득한 입을 다물게 했다.
“왜 그러십니까?”
카일은 몸을 납작하게 엎드려 땅에 귀를 대 보았다. 희미하지만 뭔가가 느껴졌다. 엘리샤는 그런 카일의 동작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레드 다이아몬드!
카일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수레로 앞을 막아 벽을 세운다.”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한 용병들이 카일에게 저마다 큰 소리로 물어 댔다. 그러자 엘리샤가 카일 대신 말해 주었다.
“듀팡의 목숨값을 벌게 됐다는 뜻입니다.”
엘리샤는 어깨에 걸친 외투를 벗어 리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리지, 이 나무를 넘어갈 수 있겠어요?”
“엘리!”
그때 카일이 달려와 엘리샤의 어깨를 붙들더니 순식간에 번쩍 들어올렸다.
“당신은 리지와 함께 넘어가 있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하지.”
엘리샤는 순간 반박하려고 하다가 자신을 안아 올린 그의 몸에 흐르는 긴장을 느끼며 순순히 말을 들었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카일의 신경이 분산된다. 그는 엘리샤의 실력을 폄하하지는 않지만 반응이 워낙 본능적이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고 했었다. 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알았어요. 순식간에 해치워야 해요!”
“물론이오.”
카일은 그녀가 순순히 말을 들어주자 재빨리 그녀로 하여금 나무를 넘어갈 수 있게 자신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도록 했다. 엘리샤가 길을 가로막고 쓰러진 나무를 타고 넘어가고, 이어 리지가 넘어갔다. 듀팡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카일을 쳐다보았고 카일은 그의 몸을 잡아 나무를 넘어가게 하며 말했다.
“떨 것 없다, 듀팡. 두려워할 것도 없다. 괜히 혼자 도망치다가 짐승의 먹이가 되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
두두두두두! 이제 카일만이 느꼈던 그 미세한 진동이 이들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흡사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따라붙은 것이기에 이렇게 땅이 울리는 것인지……. 이들은 겨우 여덟 명인데…….
“어서 넘어가, 이 멍청한 돼지야!”
매튜가 달려와 겁먹은 나머지 다리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듀팡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쳤다. 그래도 듀팡은 덜덜 떨며 카일의 허벅지를 발로 밟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일이 냉혹하게 내뱉었다.
“혹시라도 방해가 되면 네 손가락을 다 잘라 주겠다, 듀팡.”
그러자 그제야 경직된 몸이 풀린 듯 듀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일은 두 대의 수레로 앞을 막은 후 주변 비탈길을 살펴보았다. 가파른 비탈길. 일단 저들도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위치의 고저는 승패에 막대한 영향이 있다. 카일은 오른손으로 검을 움켜쥐며 용병들에게 말했다.
“내 아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잊지 마라. 너희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어 매튜에게도 말했다.
“너는 방해가 되는 순간 내 손에 죽는다, 매튜.”
매튜는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손가락이 잘린 원한을 여기서 갚으려나 보다 싶었다. 그렇다면! 매튜는 카일과 간격을 넓혀 일직선으로 섰다. 비록 카일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스스로의 실력을 믿었다. 용병들보다 훨씬 낫다. 그것을 보여 줄 수밖에. 나도 괜찮은 실력자라는 것을 보여 줄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라!”
카일의 차디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땅이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가까이 온다. 두두두두! 그들이 온다. 두두두두!
주빅은 앞을 가로막은 두 대의 수레를 보고 수신호를 올리며 날렵하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가소롭기는. 마을에서 정보를 캐기로 용병은 여덟 명. 웰든 자작의 아들 매튜가 끼어 있다는 것을 들었지만 아무런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귀족이든 평민이든 목숨은 하나고, 죽어서 짐승의 먹잇감이 되면 신분 같은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죽여라!”
매튜는 거친 숨을 내쉬며 피가 흘러내리는 팔을 꽉 움켜잡았다.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후계자들 사이에서는 제법 순위가 높은 검술 실력을 가졌다고 자부했는데…….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시달린 귀가 멍멍했다.
매튜는 경악 어린 눈으로 도성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서른 명과 여덟 명.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카일의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면 숫자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오른손으로 저렇게 싸워 대다니, 왼손이었다면……. 순간 매튜는 자신의 성급함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냉정했어야 했다.
“매튜, 정신 차려라!”
순간 눈앞이 아찔하다 싶더니만 바로 눈앞에서 바람이 베어지는 듯했다. 카일이었다. 언제 달려왔는지 그는 어깨로 매튜를 밀어내며 그에게 내리쳐진 주빅의 검을 받아쳤고 이어 매튜의 목을 왼손으로 움켜잡고 거세게 집어던졌다. 매튜는 얼빠진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용병들의 싸움. 이것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없는 카일로서는 처음으로 목숨을 건 일전을 펼치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도성에서 규칙이 있는 검술을 익혀 왔다면 이들은 그런 규칙이 없었다. 오로지 죽이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시무시했다.
그것은 용병인 루를 비롯한 여섯 명을 봐도 그랬다. 정식 대련에서는 카일에게 밀렸으나 목숨을 건 일전에서는 또 달랐다. 이것이 바로 용병의 삶이었다. 매튜가 일어나게끔 시간을 벌어 주던 카일의 눈에 이번에는 수세에 몰린 루와 제이슨이 포착됐다. 그들이 밀리자 상대적으로 숫자가 우세했던 도성 용병들이 나무를 넘기 시작했다.
카일은 다시 달렸다. 절대 나무를 넘어가게 할 수 없다. 엘리샤가 있으니 안 된다.
“멈춰라!”
퍽!
벼락같은 고함과 둔탁한 울림이 들리자 엘리샤는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치마에 문질러 닦고 다시 힘주어 검과 채찍을 움켜잡았다. 아무래도 리지와 듀팡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할 듯싶다.
“듀팡, 리지. 이리로.”
엘리샤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들을 재촉해 앞으로 달리게 하며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런데 얼마 뛰지 않은 채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한마디의 외침이 그녀를 멈추게 만들었다.
“카일!”
엘리샤는 뒤로 돌아섰다. 카일? 왜 저런 절박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는 것인가?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그런 외침으로 그를 부른 것인가? 도대체 왜? 그녀가 언성을 높여 그를 불렀다.
“카일!”
카일은 두 눈을 깜빡이며 순간 벌떡 몸을 굴려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어디서 엘리샤의 음성이 들린 듯했다. 엘리? 카일은 고개를 흔들어 제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다했다. 나무를 넘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 기억났다. 이어 제이슨을 베려던 검을 막았고, 루의 다리를 후려치려던 검도 막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었다.
카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빠르게 상황을 점검했다. 한 놈이라도 나무를 넘은 놈이 있는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숫자와 아직 서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죽은 자, 열일곱 명 정도. 서 있는 자 일곱 명. 그렇다면! 카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몸짓으로 반원을 그려 주빅의 허리를 그었고 이어 매튜를 공격하던 놈들의 등을 베어 무너지는 그 몸을 짓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나는 듯이 나무를 밟고 넘어섰다.
“엘리!”
엘리샤는 채찍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후려쳐 감았고, 있는 힘을 다해 뒤로 당겼다가 확 풀어 주며 달려들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나 둘씩 뛰어내린 숫자가 무려 여섯 명이었다. 듀팡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채 엘리샤는 벌써 두 명을 죽였다. 떨림이 사라졌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두려움에 휩쓸렸었는데…… 그 떨림이 사라져 있었다. 살기 위해서 싸운다. 지금 이 순간, 그 원초적인 욕망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마치 그때처럼?
엘리샤는 양손으로 검 자루를 움켜쥐고 놈의 가슴에 힘껏 쑤셔 박았다. 순간 그놈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엘리샤를 쳐다보았다. 여자, 그것도 손목도 가녀린 여자. 이렇게 차갑게 빛나는 눈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놈의 거대한 몸이 나무에 박힌 채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피가 엘리샤의 얼굴에도 튀었고, 검을 움켜쥔 손도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엘리샤는 죽음의 경련을 일으키는 놈에게 박아 놓은 검 자루를 놓고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았다.
“리지…….”
엘리샤는 멀찍이에서 고개만 삐죽 내민 채 상황을 살피고 있는 듀팡과 리지의 모습을 찾았다.
“리지…….”
엘리샤는 자신을 보고 있는 리지와 공중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왜…… 도대체 왜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