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3)

9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마을에 들어섰다. 저녁에 도착한 웰든 자작 영지 입구에서 간단히 행선지를 밝히고 통과한 이들은 이번에도 카일로 인해 가장 깨끗해 보이는 숙소를 잡았다. 카일은 방을 잡자마자 바로 엘리샤를 데리고 들어갔다.

“곧 리지를 들여보낼 테니까 쉬고 있어, 엘리.”

“저들과 대련은 언제 할 건가요? 저녁 먹은 후 뒷마당에서?”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러자 엘리샤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쳐다보았다.

“괜히 구경하다가 검이 비켜 쳐지기라도 하면 다칠 수 있소.”

“난 괜찮은 반사 신경을 지녔어요. 쉽게 다치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요.”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상대적으로 약해진 왼손을 가리켰다.

“그래도 내 반사 신경은 그대로예요.”

카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편하게 방에 있어, 엘리. 그렇다고 속이지 않을 테니까. 속일 것도 없고.”

설마……. 엘리샤는 그래도 웃으며 말했다.

“나도 보고 싶어요, 카일.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요.”

당연히 봐야 한다. 저들은 일대일로는 절대 카일을 이기지 못할 테니. 전투라는 게 어디 혼자서 하는 마상 시합과 같은 것이겠는가? 도성에서 하는 격조 높은 검술 시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평범한 용병들. 그러니 용병답게 싸워야 한다. 그녀의 지휘 아래서.

카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혹시라도 구경하는 엘리샤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내 말 들어, 엘리. 방에서 쉬고 있으면 이따 데리러 오겠소.”

겨우 방문 하나 사이의 거리인데 데리러 오겠다니……. 엘리샤는 카일이 내려놓은 돈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야무지게 손에 쥐며 말했다.

“내가 숙식비를 계산할래요.”

그러자 카일은 손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오래간만에 영지로 들어왔지만 손이 빠른 도적은 사방에 있는 법이다. 그녀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이리 줘, 엘리. 내가 할 테니까.”

엘리샤는 이제 분명하게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카일을 쳐다보았다.

“왜?”

“왜 당신은 아직 나를 그렇게 보나요?”

“내가 뭘?”

카일은 그녀가 좀처럼 주지 않는 가죽 주머니를 받으려고 손을 내민 채 되물었다.

“나를 못 믿고 있잖아요.”

카일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한 마음을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당신의 눈에 흡족하지 않다는 거 알겠는데, 그래도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하며 엘리샤는 풀 죽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두 눈에 바짝 힘을 줬다. 그러자 살짝 치켜 올라간 눈초리가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보였다. 카일은 그녀의 고양이처럼 번득이는 눈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렸을 때도 저런 눈을 하고 덤비면…… 져 주고 싶은 충동이 불끈불끈 올랐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성에서의 일. 여기는 도성이 아니다.

“엘리, 전에도 말했지만 난 웨스트필드 남자들과 달라. 내 아내인 이상 내 말에 복종해, 엘리.”

태고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한 남성 우월주의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 비하면 연약한 존재고,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엘리샤는 더더욱 연약해 보였다. 그녀의 빼어난 실력, 두뇌. 이런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엘리샤 자체만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키안이 어머니에게 사랑만 하며 살 수 있게끔 배려했던 것처럼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을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잘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그저 직설적으로 말할 뿐이었다.

“당신이 보는 세상은 부모님 그림자 속에서 보는 가죽 지도에 그려진 세상이오. 아까 당신이 듀팡의 지도를 정확하게 본 것도 공작님 덕분이겠지. 하지만 그게 다요. 그림 속의 세상과 현실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단 말이오.”

순간 엘리샤는 가슴이 바짝 조여들고 말았다. 부모님의 그림자……. 그의 말대로 그녀는 일라이의 서재 안에서 세상을 배웠다. 얼스월드 전체 지도를 그린 사람은 키안이었고 그 구석구석을 다 가 본 사람은 일라이와 맥파든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통해 본 세상이지만 언젠가 제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꿈꿔 왔었다. 비록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되길 원치 않았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보는 다른 세상. 그것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있으니 자신의 평범함도 괜찮아 보여 슬슬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다.

순간 카일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를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말았다.

“이런, 엘리!”

카일이 손을 내밀어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하자 엘리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을 피해 버렸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회를 달라고요, 카일. 가죽 세상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요. 나는 더 이상 그림자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웨스트필드를 떠났다. 카일의 아내로 세상을 살고 있고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러자면 서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에게 자꾸 짐이 되고 싶지 않기에 자신도 잘하는 것을 찾고 싶은데, 왜 카일은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왜 뭘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기회를 안 주다니? 당신 말대로 저놈들과 같은 식탁에 앉고, 방도 잡아 줬는데. 마치 내가 당신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건 감사해요.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줘서. 하지만 내가 말한 기회는 당신을 도울 수 있게끔 나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하는 거예요.”

“기껏 계산 하나 놓고 나에게 이렇게 비약적으로 말하는 건가?”

“계산은 시작이죠. 난 방 밖으로, 수레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소. 당신 도움 필요 없다고 해야 알아듣겠나?”

순간 카일의 언성이 버럭 올라갔다. 카일은 순식간에 비약적으로 말다툼을 향해 달려가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고 멈추고 싶었다.

엘리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필요 없다고?

“내가 공작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수치스러운 짓을 했기 때문인가요? 그래서 나를 믿지 않는 건가요?”

헉! 순간 카일의 얼굴도 굳어지고 말았다.

“알겠어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카일은 뜻하지 않게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하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카일은 그녀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창백한 얼굴. 파르르 떨리는 입술. 갑자기 생기가 확 사그라진 눈빛.

“엘리, 말다툼은 이제 그만하지.”

카일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그녀의 눈치를 은근히 살피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다툼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같이 나가서.”

“아니요. 미안해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엘리샤는 바로 그의 손에 돈 주머니를 쥐여 주고 물러섰다. 이어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습기에 눅눅해진 드레스를 벗기 위해 끈을 풀며 말했다.

“리지를 불러 주세요.”

카일은 그녀의 풀 죽은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이 상황을 풀 수 있을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나?

“나가 주세요.”

카일은 그 말에 일단 발걸음을 돌렸다. 어렸을 때 엘리샤는 떼쟁이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도 떼쟁이처럼 보였다. 싸울 거리도 아닌데 저런 반응이라니. 수치? 그래.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분명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연못가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그녀를 뿌리치기 위해 심한 말을 했었다. 그래도 꼭 저렇게 인용을 해야겠나? 웨스트필드 사람들의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은 유명하다. 엘리샤도 당연히 그랬다. 그런데 그 또한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러니 그런 불편한 말은 둘 다 잊는 것이 좋은 것이다. 괜히 들쑤셔서 서로 난처해질 필요 없지 않은가? 쳇! 카일은 입 속으로 투덜거리며 문을 닫았다.

용병들은 희희낙락 웃으며 열심히 고기를 들고 뜯었다. 생각할수록 기분 좋아 죽겠다. 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 글은 모르지만 숫자는 읽을 줄 안다. 듀팡의 목숨값. 1인당 금화 열 닢. 그것도 한 건당이었다. 무사히 사우턴야드까지 가는 게 제일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누가 와도 듀팡을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다.

용기백배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입맛도 좋았다. 아, 듀팡도 자리에 없다. 아무래도 억지로 쓴 계약서 때문에 속이 안 좋은 듯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연신 음식을 섭취하며 얼굴만 마주쳐도 싱글벙글이었다. 품에 넣어 둔 계약서와 자리를 비운 듀팡 덕분에 그들은 눈치 볼 것도 없이 오늘의 식사를 마음껏 즐겼다.

카일은 그런 그들을 계속 지켜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식사 끝나면 몸 한번 풀지.”

순식간에 정적이 식탁을 휩쓸고 지나갔다. 용병들은 동시에 시선을 들어 카일을 쳐다보았다.

“다 한꺼번에 붙어. 각개 전투는 볼 필요도 없지만 같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지. 그래도 같은 길을 가는 용병인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서로에게 목숨을 맡길 만한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을까?”

좋은 취지로 말하는 것 같은데 왠지 섬뜩한 위협처럼 들렸다. 뭔가 수틀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렇게 말하니 ‘너희를 오늘 한번 죽여 보고 싶군!’, 그렇게 들렸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동시에 고개 돌려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엘리샤를 쳐다보았다.

엘리샤는 식사를 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카일이 일부러 한 발 양보해서 한꺼번에 붙자고 말했으나 이대로라면 당연히 카일이 이긴다. 저들은 카일의 발검을 보면 바로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질 것이다. 그녀는 계속 새침하게 모른 척하며 식사만 했다.

카일은 그런 엘리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래 한 명씩 상대하려 했는데 엘리샤의 체면을 조금 세워 주기 위해서 다 같이 붙자고 했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혼자 여섯 명을 대적하다 보면 손쉽게 승리를 얻지 못할 거라는 것을 계산에 깔고 한 말이었다.

카일은 용병들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빈 접시를 계속 핥고 있는 것을 보다 다시 엘리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녀는 말없이 식사만 할 뿐이었다. 불편해 죽겠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풀이 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성에서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카일이 이런 상황에 처해진 것을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감수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의 버릇을 모르지 않는다. 그녀는 마음의 빚을 지면 그것을 꼭 갚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도 마음의 빚을 갚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손목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그녀는 카일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그 빚을 갚을 기회를 찾고 있는 건가?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끼리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엘리샤는 또 엉뚱하게 오해를 할 것 같다.

“심판을 보겠어, 엘리?”

결국 카일이 한 발 뒤로 물러나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다는데, 그가 신경을 쓰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다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같이 뒷마당으로 가겠냐고 묻는 거요.”

그러자 용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편을 들어준 엘리샤가 있다면 카일이 저들을 심하게 다루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엘리샤는 식사를 멈추고 카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화르르 불타는 듯한 호전적인 눈빛. 카일은 대번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렸다.

“난 경우에 따라서 저들을 지휘할 거예요. 그걸 허락한다면 기꺼이 같이 가죠.”

카일은 짙은 남색으로 물든 눈으로 엘리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엘리샤도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좋아, 엘리. 뒷감당은 알아서 해야 할 거요.”

그러자 엘리샤는 순식간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엘리샤가 한층 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유혹하듯 손가락을 그 앞에서 흔들면서 말했다.

“이런, 이런. 그렇게 장담하지 마요, 카일. 앞일은 그 누구도 예측 불가능하니까요.”

엘리샤가 저들을 지휘해? 훗! 그래도 자신 있다. 엘리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실력. 사람을 지휘하는 것을 또 다르다. 더구나 저런 기초도 잡히지 않은 용병들을 상대로 지휘라니. 이 내기는 엘리샤에게 적절한 교훈을 줄 수 있을 듯하다. 그림으로 보는 세상과 현실의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이 작은 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번 다시 그녀와 그런 시답지 않은 것으로 말다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럼 그녀가 그렇게 울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데 아까 그녀의 눈물을 떠올리자 카일은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정말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일은 먹먹한 가슴을 갈무리한 채 냉랭하게 용병들에게 내뱉었다.

“빈 접시 그만 핥고 일어나지?”

카일은 손에 촘촘하게 짜인 쇠비늘 장갑을 낀 채 검을 가벼이 휘둘러 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의 차가운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그는 이 소리를 좋아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 그의 입술이 살짝 반달처럼 휘어지기 시작했다.

엘리샤를 둘러싼 채 선 용병들은 몸을 풀고 있는 카일을 힐끔 본 후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아까부터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제 질리다 못해 새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저기…… 너무 즐기는 거 아닙니까?”

노랑머리, 루가 떨리는 음성으로 엘리샤에게 말했다. 엘리샤는 고개 돌려 카일을 잠시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위력적인 모습. 그가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와 검이 한 몸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는 케니스와 달리 검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카일을 만든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즐겼다. 카일은 검술 자체를 좋아했기에 훈련을 즐거워했다.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법. 카일이 그러했다.

“진검으로 하는 건데 그러다 다치면…….”

이번에는 까만 머릿결을 지닌 나엘이 중얼거렸다. 겁이 덜컥 난 듯했다. 순간 엘리샤는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쳐 그들의 흩어진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련이지만 실전을 대비한 훈련이기도 해요.”

엘리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서로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아야 서로의 목숨을 맡길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니 더더욱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하지요.”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이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들의 주의가 다시 흩어질 조짐이 보이자 엘리샤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명 카일의 실력은 뛰어나요. 하지만 우리는 여섯 명입니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해서 이기기 어렵다는 거 알죠? 서로를 믿어야 해요. 알겠어요?”

“말이 너무 긴 거 아닌가?”

그때 카일이 참견을 해 왔다. 오합지졸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저들의 표정에서 카일은 단시간의 승리를 단정짓고 있었다. 시각적 공포, 청각적 공포. 그들은 이미 기선에서 완전히 카일에게 눌리고 있었다.

엘리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곤거렸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이윽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용병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 대 여섯 명. 분위기로 봐서는 이미 카일의 승리였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들이 대련을 한다는 말을 들은 듀팡이 슬그머니 나와 뒷마당 한편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리지 역시 밖으로 나와 엘리샤 곁에 섰다. 리지는 힐끔 엘리샤가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을 보더니 보일락 말락 쓴웃음을 지었다. 채찍. 엘리샤가 이것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리지도 알고 있었다. 아마 리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일은 검을 손에 쥔 채 하단 자세를 잡았다. 엘리샤가 뭐라고 지시를 내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전술은 말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겨우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지휘라고 할 것도 없는 거 아닌가?

이제 용병들은 저들끼리 뭐라고 숙덕거리더니 카일을 빙 둘러 에워쌌다. 그래 놓고 확인하듯 소리쳤다.

“이것은 대련입니다. 대련!”

“시끄럽군.”

카일이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자 그때를 틈타 용병들이 일제히 여섯 방향에서 쳐들어왔다. 엘리샤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투는 항상 낮에 벌어지지 않는다. 습격도 화창한 대낮에만 벌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이 길을 계속 걷겠다면 연습을 계속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전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용병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는 사람들.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최고의 실력자가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다.

챙챙챙챙! 카일이 순식간에 하단에서 상단으로 검을 비켜 쳐내며 몸을 회전시켰다. 여섯 방향으로 쳐들어왔던 용병들의 검이 시간차를 두고 흔들렸다. 엘리샤는 본능에 의지해서 싸우는 기색이 역력한 용병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엘리샤. 이것은 무의미한 일 같은데?”

리지가 엘리샤에게 나직하게 소곤거리자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피하듯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며 대꾸했다.

“무엇이든 의미가 있어요. 우린 같은 배를 탔으니까요.”

리지는 담담하게 말하지만 자신을 피하는 것 같은 엘리샤의 몸짓을 보고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마을에 오게 되어 리지도 드디어 사람을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엘리샤의 현재 위치와 사우턴야드가 마지막 목적지라는 사실을 그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그에게 그 소식이 전달되려면 아마도 한 달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그의 손목 부상이 완전히 낫기를 바랄 뿐이다.

리지는 계속 주의 깊이 용병들을 관찰하는 엘리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불공평해…….”

입속말로 중얼거리는데 문득 엘리샤가 태어났을 때가 떠올랐다. 항상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일라이가 갓 태어난 엘리샤를 너무도 소중하게 안고 있던 모습. 그때 리지는 네 살이었지만 뚜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일라이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었다. 어찌나 기뻐하던지……. 그리고 엘리샤를 둘러싼 알렉스와 케이, 환하게 웃던 에드나.

리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가슴이 비틀리듯 아려 왔다. 그녀의 시선이 지난 시간을 더듬듯 흐릿해졌다. 맥파든. 항상 일라이 뒤에 서 있던 아버지, 맥파든. 그때 그의 시선도 리지가 아닌 엘리샤를 향해 있었다. 엘리샤가 태어난 그날부터 그녀는 완전히 잊혔다. 맥파든도 그녀를 잊고 말았다.

그때 엘리샤의 몸이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리지는 순간 다시 현실의 눈을 떴고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엘리샤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엘리샤.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엘리샤. 그런 그녀도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엘리샤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리지의 미소가 순간 짙어졌다.

엘리샤를 완전히 망가뜨렸으면 더 좋았을걸. 그래도 그가 대신 그녀를 망가뜨려 줄 것이다. 자신의 몫은 인도자. 그 역할에만 충실하면 카일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엘리샤.

“어리석기도 하지…….”

엘리샤는 리지에게 매달렸었다. 침묵을 지켜 달라고. 기꺼이 지켜 주지, 엘리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러니 너는 끝까지 나에게 죄책감을 가져야 해.

그때 ‘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짧은 비명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카일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하단으로 검을 내린 채 엘리샤에게 말을 건네면서 힐끔 듀팡을 쳐다보았다. 듀팡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 그는 속이 복잡할 것이다. 돈 걱정, 그리고 목숨 걱정. 카일은 뭔가 생각 중인 듯 미간을 좁히고 있는 엘리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골똘한 표정. 뭔가 궁리를 하는 것 같은데. 엘리샤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조금은 힘들게 이겨 주고 싶으나 그것이 불가능했다.

용병들의 간이 이렇게 작은 줄 몰랐는데 이들은 작아도 너무 작은 콩알만 한 간을 소유한 모양이었다. 이것은 몸풀기용도 안 된다.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말하려고 할 때 엘리샤가 손짓으로 용병들을 자신에게 불러 모았다.

엘리샤는 카일에게 등을 보인 채 거친 숨을 헐떡이는 용병들을 지그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서로를 전혀 믿지 않고 있네요. 다수라는 이점을 살리지 못하다니.”

가뜩이나 열 받아 죽겠는데 엘리샤가 그렇게 말하니 용병들의 얼굴이 금세 거무죽죽하게 달아올랐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요.”

용병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쯤 했으면 된 거 아닌가? 그런데 아까부터 등이 뚫리도록 노려보는 듀팡의 시선이 느껴져 그만하자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못했다. 이대로 사우턴야드에 가게 되면 일감이 뚝 끊길지 모른다. 아니면 임금 삭감? 아무튼 좋은 게 하나도 없는 대련이었다. 그러자 이런 대련을 만들어 낸 카일이 원망스러워졌고 저절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엘리샤는 그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이 관찰했던 것을 토대로 일일이 그들의 자세를 잡아 주었다.

“화나지요? 이대로 당할 수 없지요? 그러니 다시 해 봅시다. 지금 잡아 준 이 자세를 잊지 말고, 지금부터 내 지시를 따르세요.”

용병들은 엘리샤를 의지하듯 일제히 그녀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엘리샤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우린 이길 수 있어요.”

그녀의 깊은 검푸른 눈동자를 보니……. 용병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카일을 향해 다가가 자세를 잡았다.

카일은 아무래도 작은 부상을 입더라도 호된 맛을 보여 줘야 엘리샤의 저 호승심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대련은 백날 해도 재미가 없다. 차라리 엘리샤와 대련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그녀의 반사 신경은 정말 뛰어나니까. 카일은 빨리 끝낼 생각에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보폭 한 발 앞. 상단!”

그녀의 음성에는 단호한 힘이 실려 있었다.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명령대로 일제히 동시에 한 발을 내디디며 상단 치기를 시도했다. 순식간에 좁혀 드는 포위 공격. 카일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좁혀 드는 포위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회전시키며 사선으로 검들을 후려치려 할 때 엘리샤가 다시 소리쳤다.

“제이슨, 루, 러크. 하단에서 상단.”

카일은 한 발을 뒤로 내디디며 앞발에 힘을 싣고 방향을 바꾼 공격에 맞섰다. 챙! 두 남자의 힘. 카일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재미가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엘리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숀, 가슴! 잭, 나엘. 사선!”

카일은 바람보다 빠르게 검을 휘둘러 그들의 검을 일일이 맞받았다. 그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이제 좀 할 만하다. 슬슬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을 부딪치자 카일은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엘리샤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저 떼쟁이가 이런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니. 엘리샤는 이들의 동작을 지켜보며 약점을 본 모양이었다. 물 흐르는 듯 이어져야 하는데 꽉 막혀 버린 듯한 동작.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듯했다.

“제법인데, 엘리.”

카일의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엘리샤에게도 들렸다. 즐거우라고 하는 거 아닌데 그는 또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카일과의 대련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엘리샤를 절대 봐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몇 번 봐주더니 나중에는 귀찮아하며 그냥 전력을 다해 그녀를 패배시켰었다. 흥!

그녀는 앞으로 한 발짝 나오며 계속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말대로 움직인 용병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임금 삭감, 절대 안 된다. 일감이 끊기는 거? 더더욱 안 된다. 우리의 몸값은 우리가 올려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일의 미소가 사라져 갔다. 용병들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들도 날로 돈을 받는 사람은 아니기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빠르게 몸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빨리 끝내야겠다. 이러다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까지, 엘리. 당신의 유희는 여기서 멈춰야겠어.

“루, 러크, 잭. 찌르기! 제이슨, 나엘, 숀. 상단에서 하단!”

헉! 카일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가슴이 서늘하게 찔러 오는 검과 피할 방향을 차단하는 상단에서 하단 내려치기. 순간 카일은 욱하고 말았다. 공작 가문에서는 왜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가르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여자는 여자답게 키우면 안 되었을까? 엘리샤의 저 불타는 호승심은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런 것일까?

그때 카일의 왼팔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생겨났다. 그것을 본 듀팡이 저도 모르게 양손을 쭉 뻗고 환호하다가 카일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치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카일은 방어를 버리고 공격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용병들에게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용병들의 얼굴이 납처럼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기가 질렸다. 자신의 몸을 지키지 않고 그들을 기필코 죽이겠다는 듯 달려들다니. 그러나 용병들의 귀는 아직 엘리샤를 향해 열려 있었다. 원래 이들도 나름 검술을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상대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것이다. 엘리샤의 지시대로 움직이다 보니 서로 하나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격과 방어가 이뤄졌다. 몸의 습득.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나중의 일. 그때 카일의 찌르기를 당한 공격 대상자를 양옆에서 대신 막아 주자 검들이 한데 엉켜들었다. 엘리샤는 그들의 이름을 줄줄이 말하며 명령했다.

“숀, 찌르기. 나엘, 뒤로 일 보 후진, 하단에서 상단.”

아, 정말 미치겠네. 오합지졸이 제대로 된 지휘관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카일은 숱한 훈련을 받았지만 주로 일대일 대련을 했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만들었었다. 여러 명과 붙어도 힘과 속도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로 뭉칠 여유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러지? 아무리 협력을 한다고 해도 자신보다 훨씬 아래인데, 도대체 왜 이러지?

카일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평소 하던 대로 범위를 전부 다 써서 싸우면 혹시라도 엘리샤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 저도 모르게 보폭이 좁혀졌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챙챙! 챙챙! 용병들도 점차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무적인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다. 괜히 겁먹었다 싶었다. 그들은 엘리샤의 지휘를 받으며 한 사람처럼 카일을 압박해 들어갔다.

듀팡도 신 났다. 카일도 당할 때가 있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돌변했다. 내 돈!

챙챙챙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허공을 맴돌았다. 엘리샤는 본능적으로 몸이 자꾸 움찔거리자 카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카일. 카일. 그렇게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부르자 몸의 떨림이 사라지는 듯했고 그만 보였다. 카일만 보였다. 그녀는 지휘를 멈췄다. 그녀는 카일에게 충분히 보여 주었다.

카일은 힐끔 엘리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침묵. 카일은 빠르게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퍽!’ 소리와 함께 제이슨이 검을 놓치고 뒤로 넘어갔다. 이어 또다시 들리는 둔탁한 소리, 퍽! 퍽! 퍽! 카일은 검을 놓고 쇠비늘 장갑을 낀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한 대씩 후려쳐 단숨에 그들의 대열을 흩어 놓았다. 순식간에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듀팡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쩍 방으로 들어가고 이어 리지도 얼굴에 낭자한 그들의 피를 보자 기분이 나빠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카일과 엘리샤, 그리고 얼굴을 쥐고 끙끙대는 용병들뿐이었다.

카일은 장갑을 벗으며 엘리샤를 향해 피식 웃었고 엘리샤도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보며 웃음지었고, 이내 카일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샤는 그의 손을 잡고 따라 걸으며 말했다.

“내가 이겼죠?”

“아니. 결국 내가 이겼잖소.”

“내가 지휘를 멈춰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 내가 이겼죠?”

이제 화해를 하는 건가 싶어 카일은 소리 내어 웃고는 손을 들어 엘리샤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이기고 싶었소?”

“한 번도 당신을 이겨 본 적이 없어서요. 비록 내가 이긴 것은 아니지만 내기에는 이겼잖아요. 빨리 인정해 주세요. 빨리요.”

카일은 의기양양해하며 졸라 대는 그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는 것, 이미 알고 있었다. 호승심이 남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이기고 싶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나를 왜 그렇게 이기고 싶었소?”

엘리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며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정말 잘한다고 인정할 거 같아서요. 남들은 다 나에게 져 주는데 당신은 아니었잖아요. 그런 당신을 이기면 내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카일은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왜 그런 인정이 필요하지? 이미 그녀는 엘리샤인데. 그녀는 웨스트필드의 보물, 엘리샤인데. 다른 귀족의 딸들과 애초부터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녀는 모든 면에서 타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런데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가?

“왜 그런 인정이 필요한데? 당신은 이미 넘치도록 재능을 인정받고 있잖소. 당신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나?”

그 말에 엘리샤의 가슴이 묘하게 울리는 듯했다. 엘리샤는 짙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대답을 회피하듯 그의 시선을 피했다.

“엘리?”

그러자 엘리샤는 뭔가 결심한 듯 다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어머니처럼 되고 싶거든요.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 어머니의 딸로서, 아버지의 딸로서,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다 잘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는…….”

카일은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는 엘리샤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말은 카일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해 왔던 말이었다. 키안의 아들로서, 키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어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케니스에게 실망한 아버지를 그가 전부 다 채워 드리고 싶었고 그렇게 노력했었다. 아마 알렉스도 케이도 그랬을 것이다.

당연히 백작의 아들인 자신이 짊어졌던 부담감보다 공작가의 자녀들인 알렉스와 케이가 짊어져야 했던 부담이 훨씬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샤도? 욕심이 정말 많았구나 싶었다. 엘리샤, 그 자체만으로도 보물인데 그렇게 욕심을 냈다니. 카일은 그녀의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하늘로 올렸다.

엘리샤는 그가 갑자기 자신을 들어올리자 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으며 물었다.

“왜요?”

“딱 거기만큼만 나보다 더 올라가, 엘리. 딱 거기만큼만.”

엘리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카일은 그녀를 단단히 안은 채 이어 말했다.

“부모님을 닮고 싶다는 것은 당연해, 엘리. 하지만 엘리. 당신이 에드나 공작 부인보다 뛰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자 엘리샤가 움찔거리며 그에게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카일은 웃으며 그녀를 더욱 단단히 잡으며 이어 말했다.

“나를 봐.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카일이오. 아버지도 아닌, 공작님도 아닌, 바로 카일. 그러니 당신도 그냥 엘리샤여야 해. 나의 엘리여야 해.”

순간 엘리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웨스트필드의 엘리샤가 아닌 그의 엘리샤?

카일은 그녀의 얼굴에 퍼지는 아름다운 미소를 올려다보다 그녀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 주며 말했다.

“그러니 내 기준에 맞추면 돼, 엘리. 딱 아까 올라갔던 것만큼 나보다 더 올라가면 돼. 거기까지는 내가 감당이 되니까.”

카일은 고개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도록 밀착하며 말했다.

“나의 시선에서, 나의 범위에서만 날아다녀, 엘리.”

엘리샤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매번 자신을 면박 주면서도 위로가 필요할 때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적절한 위로를 해 준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말대로 그의 엘리가 되어 평범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다시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내가 이긴 거죠?”

정말 못 말리는 승부욕이군. 카일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고개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며 속삭였다.

“생각해 보겠소.”

“네?”

“경우에 따라 생각해 보겠다고.”

카일은 엘리샤가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엘리샤는 리지의 팔짱을 끼고 제법 융성한 시장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자를 살피고 구입했다.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이런 숙소는 더 없기에 먹을거리와 모포가 더 필요했다. 그녀는 주변을 쉴 새 없이 살피며 걸었다. 그녀는 웨스트필드와 도성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시장이라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신중하게 살펴 구입한 물건은 카일이 달려 보낸 루와 나엘이 들고 다녔다.

카일은 험한 길을 가야 하는 수레바퀴를 탄탄하게 하고, 말발굽을 새로 가는 작업을 하느라 같이 오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카일이 곁에 없는 외출은 처음이었다. 웨스트필드에서는 보호가 필요 없었고 도성에서는 항상 카일과 함께 다녔었다. 엘리샤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담고 다녔다.

리지는 뒤에 따라다니는 루와 나엘의 시선을 의식한 듯 엘리샤의 팔을 풀려고 했다.

“엘리샤,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 않아도 돼. 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뭘 이상하게 생각해요?”

엘리샤는 태연하게 말하며 리지의 팔짱을 더욱 꼭 끼고는 되물었다.

“난 네 시녀로 따라가는 거잖아.”

엘리샤는 그 말에 바로 대답했다.

“리지, 당신은 내 자매예요.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아도 돼요. 이미 그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어요.”

“엘리샤. 나에게 그럴 필요 없어. 난 내 주제를 잘 알아.”

엘리샤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리지의 그 말에 문득 어제 카일과 말다툼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카일. 리지를 웨스트필드로 돌려보내고 싶어요.”

“아직은 아니오.”

카일은 리지가 엘리샤를 보살펴 주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사우턴야드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때 다른 하녀를 고용하고 리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리지는 내 시녀가 아니에요. 그녀가 고생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카일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일, 앞으로 나와 의논하기로 했잖아요.”

그러자 카일이 대번에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경우에 따른다고 분명히 말했소. 이것은 의논할 것이 아니오. 당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보살핌은 당신과 의논할 것이 아니라 남편인 내가 결정할 일이오.”

이어 카일은 너무도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리지는 당신의 자매가 아니오. 될 수도 없고. 그러니 그만합시다.”

“신분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렇다고 해 두지.”

순간 엘리샤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반박했다.

“우리에게 신분의 구별은 없어요. 아버지가 리지의 후견인이 되신 것도 그런 이유고, 나는 그녀와 자매처럼 자랐어요.”

그러자 카일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신분의 구별이 없다고? 엘리. 가끔 당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상주의자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소.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신분으로 구별되기에 혼란스럽지 않은 거요.”

“하지만.”

“나와 리지의 신분이 왜 구별됐다고 생각하오?”

엘리샤는 바로 대답했다.

“그것은 아버지들의 선택이었잖아요.”

“그럼 내 아버지와 맥파든은 왜 서로 다른 선택을 했을까? 두 분 다 일라이 공작님의 수하였는데?”

카일은 엘리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

“그것은 서로 해야 할 일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생각하오. 이렇게 말하면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는 얼스월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여긴 것이고, 맥파든은 한 가지에만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여기오.”

엘리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그래, 엘리샤?”

엘리샤는 리지의 팔짱을 더더욱 꼭 꼈다. 그렇게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카일에게 순간 기가 질렸던 엘리샤는 그의 생각을 말 몇 마디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리지에 관해서는 양보를 하지 않을 것도 알아차렸다.

“그럼 약속해 줘요, 카일.”

“뭘?”

“리지도 보호해 줘요. 당신이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리지도 그렇게 보호해 줘요.”

그 말에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듯 말했다.

“당신과 리지는 다르오.”

“우리가 왜 달라요? 나는 당신과 리지와 전혀 다르지 않아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현실에서 살고 싶다고 그랬지, 엘리? 그럼 눈부터 제대로 뜨지 그래? 당신은 그녀를 자매로 보아도 남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소. 비록 후견인이 얼스월드 최고의 가문이지만 그렇다고 리지가 공작의 딸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오.”

냉정한 말을 하던 카일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윽고 결론처럼 말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가능하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때론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법이오.”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깊게 내쉬고 말았다. 자신의 생각이 꿈의 세상에서나 가능한 것처럼 말했던 카일. 그게 왜 불가능한 일일까?

“혹시 리지에게도 마음의 빚이 있나?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쓰는 거요?”

“네?”

카일이 그렇게 날카롭게 그녀의 감춰진 어둠을 꿰뚫듯 말했을 때,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머릿속도 비워지는 듯했다.

“당신은 가끔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지나친 죄책감을 가지며 마음에 담아 두는 경향이 있는데, 혹시 리지에게도 그런가?”

마음의 빚. 리지를 평생 혼자 살아가게 만들어 버린 그날에 생긴 마음의 빚. 그때 난 정말 정당했을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 정말 그런가.”

엘리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지만 무의식이 그것을 거부하듯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김없이 리지의 울부짖음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소용돌이쳤다.

“살인자!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그때 리지가 다시 그녀의 팔을 풀려고 하는 바람에 엘리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리지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샤, 이러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거야.”

“미안해요.”

엘리샤는 리지의 팔짱을 풀었다. 그녀와 예전의 친밀함을 다시 되찾고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리지를 계속 피할 것이 아니라 그때의 기억도 제대로 살리고, 리지와 풀어야 하는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싶었다. 우리는 자매로 자랐으니까.

리지는 아까와 달리 어두워진 엘리샤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엘리샤. 정말 괜찮을까?”

“응? 뭐가요?”

엘리샤는 무심코 반문했다.

“여긴 웰든 자작의 영지잖아.”

“그런데요?”

리지는 순간 새카만 눈동자를 번득이며 정말 모르냐는 듯 말했다.

“웰든 자작의 딸, 메리나 알지?”

메리나? 순간 엘리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리나. 한때 카일과 연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웰든 자작의 딸, 메리나. 그러나 과거는 과거. 지금의 카일은 아니다.

“그런 과거 이야기해서 뭐 해요. 이미 지난 일인데.”

“나도 그러길 바라.”

엘리샤는 왠지 뒷말을 감추는 듯한 리지의 말에 의아해하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리지는 괜한 말을 꺼냈다고 여겼는지 당황해하며 엘리샤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엘리샤. 어서 돌아가자. 카일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그러자 더욱 그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리지의 짧은 말은 엘리샤의 가슴에 뭔가 불길한 것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메리나와 카일. 한때 연인이었던 관계. 이미 끝난 거잖아. 그런데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엘리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고 말았다.

리지는 힐끔 엘리샤의 어두워진 표정을 살피며 속으로 나직하게 웃음지었다. 메리나가 임신했을 거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았는데 이 순진한 엘리샤는 전혀 모르고 있다. 정말 임신했을까? 그럼 카일의 아이일 텐데. 순간 리지의 눈이 즐거운 빛을 발했다. 그러면 좋겠다. 메리나가 정말 임신을 했고 카일이 여기 온 것을 만일 알았다면, 출발하기 전에 빨리 그를 찾아와 그 기쁜 소식을 카일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엘리샤의 표정이 아주 볼 만할 텐데. 리지는 시치미를 뚝 떼며 연신 엘리샤를 재촉했다.

한편 웰든 자작의 맏아들이자 후계자 매튜는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웰든 자작 앞에 서 있었다.

“확실히 그자가 맞는가?”

“분명합니다. 키안 백작의 아들이 분명합니다.”

“매튜, 내가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정말 카일이 맞냐는 것이다.”

매튜는 붉은색이 감도는 튜닉을 입은 채 거칠어지는 숨을 잠시 골랐다. 어젯밤 늦게 영지 입구를 지키던 수하가 돌아와서 전한 말을 확인하고자 그는 은밀하게 마을에 다녀왔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카일. 그때 웰든 자작이 다시 물었다.

“정말 카일이 맞는가?”

키안 백작의 아들은 쌍둥이다. 두 사람 중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자칫하면 잘못된 복수가 될 테니 말이다. 매튜는 이내 확신을 갖고 말했다.

“분명 카일입니다. 카일이 맞습니다.”

“성에 있어야 하는 카일이 여기에 어떻게 왔을까?”

웰든 자작이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게 중요합니까? 정말 잘됐습니다. 제가 카일을 만나서 담판을 짓겠습니다.”

웰든 자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나. 이번 수확 축제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메리나 때문이었다. 작년 처음 도성의 화려한 축제에 참석했던 메리나는 카일을 보자마자 한눈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카일의 가문은 웰든 가문에서 욕심낼 수 있는 가문이 아니기에 웰든 자작은 그녀를 자신과 비슷한 다른 자작 가문과 정략결혼을 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메리나에게도 그렇게 말해 왔었다. 그런데 며칠 전 메리나가 엄청난 발언을 했다.

그녀는 카일과 결혼을 약속했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웰든 자작과 매튜를 경악 속에 밀어넣었다. 올여름 도성 상인들을 따라갔었는데 그때 카일을 운명처럼 만났고 미래를 약속해 몸을 허락했다고 했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웰든 자작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메리나 말이 사실이면 카일과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카일이 아니라고 거부하면……. 메리나는 낙태를 해서 이 일을 없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은 세상에 태어나야 아무런 소용이 없고, 가문을 불명예 속에 밀어넣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메리나는 카일과 결혼하고 싶다고 울며불며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리고 있었다. 웰든 자작은 키안 백작이 너무 부담스럽기에 그냥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매튜의 생각은 또 달랐다. 매튜는 여동생 메리나의 일에 분노하고 있었다. 당연히 카일이 책임져야 한다.

“만일 카일이 거부를 하면 어쩔 거지?”

“결투를 해서라도 책임지게 만들어야지요. 메리나를 저렇게 둘 수는 없잖습니까?”

시간이 가면 메리나의 배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를 것이고, 누가 그 아이의 아비인지 다들 궁금해할 것이다.

“카일이 뛰어난 기사라는 거 알지만 여동생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이 순간, 저는 절대 그놈한테 지지 않을 겁니다.”

웰든 자작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펄펄 뛰면서 노여워하는 매튜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풀어야지. 혹시 모른다. 메리나의 임신을 알게 되면 카일이 남자답게, 기사답게 책임질지도. 그러길 바란다.

“매튜, 무조건 냉정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매튜는 즉시 서재에서 나갔고 쩌렁쩌렁한 소리로 성의 기사들을 집합시켰다.

그때 카일은 출발할 준비를 빈틈없이 갖춘 후 11월 매서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와 얼굴을 우물가에서 씻고 있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나니 그제야 어제부터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지는 듯했다.

엘리샤와 리지의 거취 문제로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한 후부터 그는 새벽까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것은 자신이 했던 말을 통해 키안의 생각이 정확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절대 불가능한 일. 카일이 리지를 두고 말했던 것처럼 키안도 그런 식으로 카일에게 엘리샤의 배우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저도 모르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더구나 카일은 엘리샤와 함께 아버지가 만들어 낸 자리, 노스턴야드에서 뻔뻔하게 윤택한 귀족의 생활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여워하실 만도 했지.”

문득 그의 입에서 자조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안일했던 생각이 수치로 다가왔다. 리지가 절대로 공작의 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카일이 백작의 아들이라고 해도 절대 엘리샤와 동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그는 욱신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이번에는 엘리샤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엘리샤가 그렇게 이상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신분으로 사람을 보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움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공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차이이자 차별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공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리지도, 카일도 다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훗!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엘리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거라 면박을 줬는데 그 불가능한 것이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정말 멀었다, 카일. 이렇게 부족해서 노스턴야드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카일은 문득 자신의 가슴을 쿵 소리가 나도록 아프게 쳤다. 정말 바보 같으니라고, 카일! 차가운 물이 연신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데 카일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키안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도와주겠다는 케이의 말을 거부한 것은 스스로 자신이 엘리샤의 남편이 될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키안에게 보여 준 후, 뭘 바랐던 것일까?

키안이 자신의 지나친 징벌을 철회하고 자신을 다시 노스턴야드로 불러들이는 것, 궁극적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다니. 카일은 다시 자신의 가슴을 ‘쿵!’ 쳤다. 말로는 사우턴야드에 정착을 하겠다고 해 놓고 정작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그곳으로 엘리샤와 함께 돌아가는 것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는 다시 자신의 가슴을 아프도록 쳤다.

그 자리는, 노스턴야드 백작의 자리는 키안의 힘으로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카일의 힘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다. 그가 그저 키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분에 거저 얻게 될 자리였다. 그러자 엘리샤의 이상적인 생각도 다시 되짚어 보게 되었다. 노스턴야드, 그리고 사우턴야드. 그가 정말 능력이 있다면…….

그때 그의 생각이 멈췄다.

“매튜. 여기 웬일이오?”

카일은 벗어 놓은 셔츠를 입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매튜를 마주 보며 물었다.

매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카일의 차가운 눈빛을 지지 않고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노스턴야드의 카일, 맞소?”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음성에 매튜는 순간 발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 여동생을 농락해서 임신까지 시켜 놓고 책임지지 않은 더러운 놈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내 여동생 메리나, 혹시 기억하시오?”

그래도 매튜는 자신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카일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카일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되물었다.

“기억하냐고 물었소.”

“내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나?”

순간 매튜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이자식이 감히 부정을 해?

“여기서 나갑시다. 여긴 내 아버지의 영지이니 조용히 해결하고 싶소.”

“나와 해결할 일이 있나 물었다.”

카일은 자신의 검집을 고쳐 차고 이제 냉혹하게 빛나는 눈으로 매튜를 노려보며 물었다.

매튜 역시 냉랭한 눈빛으로 카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여동생을 망가뜨린 죄를 묻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겠소, 카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매튜?”

아예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이런 놈을 믿고 순결도 잃고 임신까지 하다니. 메리나! 이 오빠가 너의 불명예를 씻겨 주겠다! 챙! 매튜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메리나가 네놈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카일.”

카일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뭐라고?”

“대단한 백작의 아들인 당신이 내 여동생을 임신시켰다고 말했다.”

카일은 차갑게 코웃음 치며 내뱉었다.

“헛소리가 지나치군, 매튜. 내가 당신의 여동생을 건드렸다고? 아주 미쳤군.”

매튜가 신호를 보내자 웰든 영지 기사들이 일제히 발검을 하며 카일을 빙 둘러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출발 준비를 끝내고 엘리샤 일행이 돌아오길 기다렸던 사람들도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카일은 손까지 저릿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혹시 케니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카일은 가까스로 폭발하려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나와 케니스를 착각한 것은 아니오?”

“더러운 입 그만 다물지.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굴복시킬 수밖에.”

매튜의 신호에 따라 카일에게 근접한 기사들이 그를 찌를 것처럼 검을 날카롭게 쳐들었다. 카일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피식 입술을 비틀어 비웃음을 지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 매튜. 지금 후회할 짓을 하고 있는데.”

“헛소리!”

“별수없군. 그렇게 싸우고 싶다면 한번 해 보지.”

카일은 냉혹하게 말하며 저벅저벅 우물가에서 벗어나 여인숙 뒷마당으로 향했다. 자신의 전신을 겨누는 검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극히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걸음이었다.

“굳이 멀리 갈 필요 있나? 그렇게 자신 있다면 여기서 네 도전을 받아 주지.”

카일은 듀팡을 지켜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것을 남에게 맡겨 놓고 자리를 비우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의 시야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튜는 기가 찼다. 정말 돼먹지 않은 인성 아닌가? 변명조차 하지 않다니. 도대체 여자를 몇이나 건드렸기에 저렇게 함부로 생각하는 것인가!

“당신 체면을 생각해서 한 말을 그렇게 무시하다니. 정말 인간 망종이군, 카일.”

매튜는 수하들과 같이 움직이며 카일의 등에 대고 비아냥거렸다.

“키안 백작에게 당신 같은 아들이 있었다니. 키안 백작도 아시나? 아니면 모른 척하시는 건가? 거참, 아들 사랑이 대단하신 아버지군.”

순간이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몸을 돌린 카일은 순식간에 매튜의 검을 후려쳤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과 엄청난 힘에 순간 매튜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카일! 비겁하긴!”

그런 자신도 수적으로 카일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카일은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키안에 대한 모욕을 듣자마자 욱하고 말았다. 감히 아버지를 욕해? 죽여 버리겠다!

수하들은 황급히 검을 놓친 매튜를 에워싸고 카일과 맞붙었다. 여인숙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무장한 기사들이 싸움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발에 걸리는 것은 다 걷어차고 짓밟았다.

듀팡은 허겁지겁 수레를 보호하기 위해 용병들과 함께 말고삐를 잡아챘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지극히 충실한 것 같은 카일이 사실 저랬단 말인가? 인물값 한다더니 카일이 딱 그 짝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듀팡이 용병들과 함께 가까스로 수레를 끌어냈을 때 허공에는 이미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를 찢을 것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듀팡은 수레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자마자 용병들에게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다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카일의 실력이 미심쩍었다. 어제 용병들과 대련을 할 때 그의 주먹질에 용병들이 나뒹구는 것을 봤지만 그래도 미심쩍었다. 돌다리는 자꾸 두들겨야 한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상관없다. 지금이야말로 카일의 실력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그는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입이 떡 벌어졌다. 몇 명인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웰든 영지 기사 다섯과 종자들 다섯. 벌써 검이 부러진 종자들이 넷이나 됐다. 저게 진짜 카일의 모습이라니……. 듀팡은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 엘리샤가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강함을 지니고 있다면, 카일은 그야말로 최고의 강함, 그 자체였다. ‘태양의 눈물’, 그 목걸이에 이 두 남녀의 절묘한 모습을 넣어 생명을 주고 싶다. 그러자 즉시 보충해야 할 스케치가 떠올랐고 그것을 놓치기 전에 그리기 위해 듀팡은 황급히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때 여인숙으로 들어서던 엘리샤가 듀팡을 붙들었다. 듀팡은 수정할 스케치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들은 그대로 말했다.

“카일이 메리나를 건드려 임신을 시켜 놓고 모른 척하자 그 오빠가 와서 따지고 있습니다.”

순간 엘리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듀팡은 그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리지는 내심 간절히 바랐던 상황이 진짜 벌어지자 환희로 가슴이 짜릿해졌다. 오, 이런. 엘리샤. 그녀는 얼어붙은 듯 굳어 버린 엘리샤에게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이런, 엘리샤. 유감이야. 이런 일만은 정말 없길 바랐는데. 정말 유감이야.”

엘리샤는 일그러진 얼굴로 리지를 돌아보았다. 메리나…….

“그런 과거 이야기해서 뭐 해요. 이미 지난 일인데.”

“나도 그러길 바라.”

이런 뜻이었나? 바로 이런 뜻이었어?

“충격이겠지만 엘리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네. 과거가 현실로 이어졌다는 것을.”

엘리샤는 고개를 흔들었다. 카일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않은 상태로 섣불리 인정할 수 없다. 비록 그에게 많은 여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카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녀는 그의 아내로서 들어 줄 의무가 있다.

“우리의 출발이 늦어지겠어. 카일 덕분에.”

엘리샤는 그 말은 무시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생각했다. 카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카일의 입으로 들어야 한다. 엘리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과 채찍을 다잡았다. 그리고 지시를 내렸다.

“루, 나엘. 사 가지고 온 짐들을 수레에 잘 정리하고 수레 곁에서 대기하세요.”

루와 나엘은 그 말에 즉시 따랐다. 카일이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는데 그런 짓을? 남자라면 열 여자 마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엘리샤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나쁜 놈!

엘리샤는 이번에는 리지에게 말했다.

“리지, 방으로 들어가 우리의 짐이 남은 것이 있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수레로 가서 같이 기다려요.”

“엘리샤, 뭘 어쩌려고? 이 소리 안 들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챙챙! 챙챙! 욕설과 비명 소리. 엘리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리지의 등을 떠밀었다.

“남편의 일은 아내의 일이기도 해요. 리지, 어서 가요.”

엘리샤는 채찍을 풀어 손에 감아쥐고 걸음을 옮겼다.

카일은 순식간에 종자 다섯 명의 검을 부러뜨리고 부상을 입혀 싸움에서 밀어냈다. 이어 그는 기사들과 맞붙었다. 빠른 속도로 상단과 하단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그는 매튜와 일대일로 붙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매튜도 놓친 검을 다시 잡고 자신을 가로막은 기사들에게 비키라고 펄펄 뛰었지만 그들은 카일이 너무 위협적이라며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챙! 검이 또 하나 부러져 허공에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카일은 숨소리도 흔들리지 않은 채 다섯 명의 기사를 압박했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부상을 입혔다. 감히 아버지를 모욕해? 카일은 무서운 실력으로 자신에게 덤비는 기사들을 제압하고, 싸우면서 되찾은 냉정함으로 매튜를 노려보았다. 죽이진 않아도 다시는 그 입 열지 못하게 해 주지!

매튜는 순간 ‘퍽!’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 나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 안에 뭔가 비릿한 것이 가득 고인 느낌에 침을 뱉었다. 헉! 지금 나를 친 건가? 뱉은 침에는 피와 부러진 이가 같이 섞여 있었다. 매튜는 순식간에 검을 손에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죽여 버리겠다. 이 개자식.”

그런데 검을 하늘 위로 세워 상단 자세를 취한 순간 뭔가에 걸린 듯 그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몸을 돌리자마자 소리쳤다.

“뭐야!”

순간 매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람에 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검푸른 눈동자…….

“엘리샤 님?”

엘리샤는 채찍으로 그의 검을 옭아맨 채 싸늘하게 명령을 내렸다.

“싸움을 멈춰라, 매튜. 죽고 싶지 않으면.”

매튜는 자신의 눈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웨스트필드의 엘리샤가 여기에? 왜? 왜? 왜?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양손으로 옭아맨 검을 내리지도 않고 엘리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기사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매튜가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다고 여겼다.

“매튜 님!”

그들은 순식간에 카일과 맞섰던 검을 거둬들여 일제히 엘리샤에게 달려들었다. 매튜가 멈추라고 말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카일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엘리샤만을 향한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을 보였다. 챙!

“카일…….”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파르르 떨고 말았다.

“괜찮소, 엘리?”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왜 이렇게 반응이 빠른 것인지! 엘리샤는 그의 왼손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다쳤소? 다친 거요?”

카일은 바로 몸을 돌려 엘리샤를 살피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전신이 떨려 왔다. 정말 바보 같은 남자다. 제 목숨부터 돌봐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엘리샤의 검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말았다. 그녀는 흐려진 시야로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왼손을 꽉 잡아 지혈하며 말했다.

“이리 와요, 카일. 이리로 와요.”

“정말 괜찮소?”

카일은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잘려 나갔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엘리샤에게 쏠려 있었다. 매튜가 황급히 기사들을 저지한 틈을 타 엘리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카일의 양 손목을 가만히 붙잡고 이끌었다.

“난 괜찮아요. 당신 덕분에 이번에도 다치지 않았어요. 그러니 내게로 와요.”

카일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순간 현기증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엘리샤는 재빨리 그의 품에 자신을 밀어넣어 그가 무너지지 않게 붙잡았다. 새끼손가락 두 마디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카일은 지금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쇼크가 찾아온 것은 아닌가?

“엘리, 난 정말 메리나를 건드리지 않았소.”

카일이 두서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가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뭔가가 자꾸 신경을 갉작거리며 건드리는 듯했다. 그리고 현기증이 자꾸 느껴졌다. 그러나 엘리샤가 오해하기 전에 말하고 싶다.

“난 당신 말고 다른 여자를 안아 본 적이 없소. 당신 외에 다른 여자 쳐다본 적도 없소. 믿어 줘, 엘리. 난 정말 메리나를 건드리지 않았소.”

엘리샤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런 눈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거짓이겠는가! 엘리샤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계속 카일의 손가락을 꽉 움켜잡은 채 그를 여인숙 앞으로 이끌었다.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당신을 믿어요, 카일. 믿어요.”

“엘리…….”

“네, 카일.”

“당신이 내 첫 여자요. 내 아내인 당신이 처음이었어.”

순간 엘리샤는 가슴이 저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당신을 욕심냈었어. 갖고 싶었소.”

“나도 그랬어요, 카일.”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기 시작했다. 엘리샤는 그를 방으로 이끌었다.

“내 아내가 되어 기쁜가, 엘리?”

그의 음성이 자꾸 작아졌다. 걸음도 느려졌다. 엘리샤는 더 참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요, 기쁘고말고요. 항상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었거든요. 당신의 엘리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왜 우는 거요? 혹시 내가 정말 메리나를…….”

엘리샤는 황급히 그 말을 잘랐다.

“당신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아요. 오래전부터 나를 마음에 뒀잖아요.”

엘리샤는 그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카일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 이제 보니 그런 것 같군. 왜 당신밖에 안 보였는지 이제 알겠어. 당신만 보였어. 당신만.”

마침내 방으로 들어와 그를 침대에 앉혔다. 정말 대단한 카일이다. 지혈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가 계속 흘러내려 그의 힘을 앗아 가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엘리샤를 따라 무너지지 않고 제 발로 들어왔다.

“당신 정말 다치지 않았소?”

엘리샤는 그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엘리샤는 단검을 촛불에 달구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일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케이가 주고 간 궤짝에 담긴 약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엘리샤는 눈물이 그대로 말라붙은 얼굴로 출혈이 멈춘 카일의 손가락을 보며 더욱 입을 꽉 다물었다. 루를 통해 매튜에게 말을 전했다. 지금 당장 메리나를 데리고 오라고. 매튜는 아직 카일이 메리나를 임신시켰다고 믿고 있기에 그 오해를 풀려면 메리나가 와야 했다.

“단단히 잡으세요.”

긴장감이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엘리샤의 지시대로 제이슨, 나엘, 잭, 그리고 러크가 카일의 몸을 꽉 붙잡았다. 엘리샤는 단검이 충분히 달궈지자 바로 카일의 곁에 앉았다.

“엘리…….”

차라리 정신을 잃으면 좋으련만. 카일은 쇼크로 몸을 떨면서도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흐릿해진 눈빛으로 그녀만 보고 있었다.

“카일, 나를 믿죠?”

“으응…….”

“조금만 아플 거예요. 아주 조금만.”

“으응…….”

치익! 엘리샤는 자신을 보고 있는 카일의 시선을 마음으로 느끼며 신중하게 그의 잘려 나간 손가락 마디 끝을 지지기 시작했다. 카일의 몸이 고통으로 꿈틀거리자 엘리샤는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더 단단히 잡아요!”

용병들이 있는 힘을 다해 카일을 붙잡았다. 엘리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그의 손가락 마디를 지졌다. 카일은 왼손잡이다. 그런데 왼쪽 새끼손가락 두 마디가 잘려 나갔으니……. 엘리샤는 이를 꽉 물었다. 검술을 즐기는 왼손잡이 카일에게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처가 되고 말았다. 엘리샤는 이를 더욱 악물었다. 아, 카일……. 그가 깨어나 자신의 손가락이 어찌 됐는지 알게 되면…….

매튜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여인숙 앞마당에 서 있었다. 엘리샤의 말대로 성으로 메리나를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린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제 곧 메리나가 도착할 것이다. 매튜는 사나운 기세로 앞마당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초조했다. 갑자기 카일 곁에 나타난 엘리샤의 존재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엘리샤는 단순한 귀족의 딸이 아니다. 그녀는 얼스월드 최고의 배경을 가진 웨스트필드의 딸이다.

“난 잘못한 거 없어.”

그런데 가슴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카일의 곁에 있는 엘리샤. 반사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엘리샤에게 검을 휘두른 기사들. 매튜는 부상을 입은 채 사색이 되어 있는 기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아……. 기사들의 충성심을 탓할 수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정말 유감이나 이 모든 것은.

“카일이 자초한 일이야.”

그렇지. 매튜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카일과 다투고, 그가 엘리샤의 앞을 가로막다 다친 것은 유감이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카일이 자초한 일이었다. 메리나를 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아니 잘못을 인정만 했어도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샤를 공격했던 기사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책임.

그때 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카일의 피로 물든 드레스를 입은 엘리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매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방 앞에 있던 듀팡에게 먼저 말했다.

“출발을 하루 미룹니다.”

하루……. 카일의 상태가 호전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시간. 그러나 카일이 자꾸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길을 가야 한다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계속 헛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엘리샤는 그의 끝도 없는 책임감을 보며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여기서 카일의 걸음이 멈추게 되면, 그것도 자신의 부상으로 인해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다시 막막해지겠지? 이제 재기 불능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미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웨스트필드로 돌아가, 엘리.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그 말에 엘리샤는 카일이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길을 가야 한다. 카일의 책임이 완성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게끔 도와줘야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그의 왼손은 전처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겠지만 아직 오른손이 있다. 양손. 엘리샤가 양손잡이인 것처럼 그도 이제 양손을 써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사람은 바로 자신뿐이다.

듀팡은 엘리샤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전신으로 느꼈다. 인상도 찌푸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카일의 말에 반박도 하고 오만상을 찌푸렸던 자신이 그럴 수가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엘리샤의 분위기가 그를 무섭게 짓눌러 대고 있었다. 그것은 리지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단호한 모습. 평소 마음 여렸던 엘리샤가 아니었다. 그때처럼, 그때처럼 너무도 단호한 모습. 순간 리지는 소름이 돋고 말았다.

이제 엘리샤는 매튜를 향했다.

“매튜.”

“엘리샤 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사들이 엘리샤 님을 공격한 것은 저를 지키기 위함이니 그것에 대한 대가는 제가 치르겠습니다.”

엘리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나는 오고 있나요?”

“거의 도착할 때가 됐습니다, 엘리샤 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사들은 어디까지나 저를 지키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한 겁니다.”

엘리샤는 매튜를 차디찬 시선으로 보며 여전히 자신의 말만 했다.

“만일 메리나가 카일과 케니스를 착각했다면 어쩌겠습니까?”

매튜는 자꾸 요지를 벗어나는 엘리샤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착각이라……. 그러고 보니 카일도 그런 말을 했었다. 설마 메리나가 착각을 했을까? 제 순결을 준 남자를 착각했을까? 매튜는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착각했을 리 없습니다.”

엘리샤는 입술을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매튜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엘리샤가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나? 도성에서 본 엘리샤는 춤을 좋아하고 잘 웃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일이 호위 기사로 따라온 겁니까?”

“내 남편입니다.”

헉! 매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남편이라고? 아니, 언제 도성에서 결혼식이 있었지?

“왜요? 믿기지 않나요?”

엘리샤는 즉시 매튜의 표정을 읽어 내며 싸늘하게 물었다.

“하지만…… 우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매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일의 아내, 엘리샤. 그럼 내 여동생은 사생아를 낳게 되는 것인가? 아니지, 잠깐. 그럼 내가 지금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거 아닌가? 아니다. 그래도 난 정당했다. 이들의 결혼을 몰랐고 가족의 명예를 위해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그래도 카일에 대해서 저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

엘리샤는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말하는 매튜의 흔들리지 않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카일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이렇게 하지요. 만일 메리나가 착각한 거라면 당신은 그 순간부터 당신의 일생을 카일에게 바쳐야겠습니다.”

이번에는 매튜의 뒤에서 부상으로 끙끙거리던 기사들 입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명예를 위해서였으니 책임도 명예롭게 져야지요. 아닙니까?”

엘리샤는 그들의 불만을 눈빛으로 잠재우며 매튜를 다그쳤다.

매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나에게 검을 겨누고 무사할 거 같은가요, 매튜?”

이제는 너무도 부드러운 음성. 그런데 더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배경…….

“그건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책임지겠지만 카일은 아닙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매튜. 카일의 명예는 나의 명예입니다. 당신이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면 이런 일 없었을 겁니다. 나에게 한 실수는 카일에 대한 실수. 이제 그 대가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그러자 매튜는 더 생각지 않고 바로 맹세했다.

“제가 실수한 거라면 평생 카일을 받들겠습니다.”

자칫하면 영지를 몰수당할 수도 있다. 엘리샤에게 검을 겨눈 것이 알려지면…….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 아버지의 노고를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작의 후계자 자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알겠죠?”

매튜는 심장이 떨리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영지가 무사하다면 책임지겠다.

“물론입니다.”

그때 웰든 자작이 메리나를 데리고 여인숙 앞마당에 들어섰다. 웰든 자작은 계단에 서 있는 엘리샤를 보자마자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아주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카일!”

메리나는 매튜가 자신을 말에서 내려 주자마자 바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엘리샤는 계단에 선 채 손짓으로 메리나를 자신에게 오게 했다.

“엘리샤 님! 카일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괜찮은가요?”

“메리나.”

“카일은요?”

웰든 자작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메리나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엘리샤의 눈빛에 눌려 섣불리 메리나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엘리샤가 메리나에게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메리나. 카일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더듬어 생각해 봐.”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우면서도 나직한 음성. 웰든 자작은 매튜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옷을 적신 피. 매튜가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게 만들었다.

“왜요?”

“입 다물고 하라면 해, 메리나.”

메리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엘리샤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잘생긴 카일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더듬듯 움직였다.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 이마, 짙은 눈썹, 깊은 빛을 간직한 새파란 눈, 약간 휘어진 콧대, 그리고 남자다운 입술. 제게 사랑을 속삭였던 입술.

엘리샤는 그녀의 몸짓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콧대가 어떻게 생겼지?”

그 말에 웰든 자작과 매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게 왜 중요하지? 그때 메리나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콧대가 살짝 휘어졌지만 그것이 그의 매력이죠.”

흥! 엘리샤는 차디찬 코웃음을 치며 매튜에게 내뱉었다.

“지금부터 당신의 목숨은 카일의 것입니다. 메리나가 가진 아이는 케니스의 아이니까요.”

순간 메리나는 땅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케니스라고?

이어 엘리샤는 매튜를 보며 말했다.

“억울하단 생각도 사치입니다. 당신은 카일의 말을 듣고 삼자대면을 추진했어야 했어요.”

엘리샤는 망연자실한 웰든 자작을 보며 차디차게 말했다.

“후계자를 다시 정해야겠습니다. 이제 매튜는 평생 카일의 종자가 될 테니까요.”

엘리샤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카일의 상태를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분명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카일?”

엘리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침대로 옮겨 준 사람은 분명 카일일 텐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엘리샤는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카일은 뒷마당에 있었다. 그의 팔 길이와 체격에 맞게끔 특별하게 제조된 장검을 왼손에 들고 그는 가벼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엘리샤는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일은 그녀가 온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 검을 휘둘렀다. 손가락에 감긴 붕대.

그는 점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검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카일은 고개를 숙여 처음으로 바닥에 떨어트린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도 바라보았다. 엘리샤가 뭘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손가락이 화끈거리는 것 외에 다른 아픔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머리가 좀 멍하고 전신의 힘이 풀린 듯했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올려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일은 흉측하게 드러난 왼손 새끼손가락을 보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정신이 조금 더 깨어나는 듯했다. 케니스, 케니스. 케니스.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케니스가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가끔 자신의 이름을 팔아 여자를 유혹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짓을 저질렀을 줄이야.

“아버지가 아시면 절망하시겠군.”

카일은 잠시 더 생각해 보다가 이윽고 케니스에 대한 생각도, 키안에 대한 생각도 접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 그리고 엘리샤다.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떨어트린 검을 주워 오른손으로 검 자루를 바꿔 잡아 보았다. 검 자루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카일은 한숨도 내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쉴 여력도 없었다. 끊임없는 절망이 짧아진 손가락 끝에서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카일은 그래도 오른손으로 검을 휘둘러 보았다. 왼손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오른손도 상당히 쓸모는 있었다. 그러나 왼손만큼은 아니었다. 손목을 유연하게 돌려 검을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쳐 보았다.

“엘리를 보호할 수 있을까?”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체취가 그를 완전히 감쌌다.

엘리샤는 그의 등 뒤에 서서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오른손과 왼손으로 함께 검 자루를 쥐게 해 보았다.

“나는 주로 채찍을 쓰지만 검을 쥘 때는 이렇게 쥐어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랬었다. 엘리샤의 부러졌던 왼팔.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양손으로 검을 자유자재로 써요.”

그녀의 숨결이 카일의 떨리는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듯했다. 카일은 두 눈을 감아 보았다.

“당신도 그럴 수 있어요, 카일.”

“엘리…….”

카일은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사우턴야드로 가는 것은 이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처럼 보였다. 이런 손으로 과연 엘리샤를 편하게 해 줄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유일한 기회. 아무래도 엘리샤를 데리고 가면 안 될 것 같다. 적어도 확신이 설 때까지 그녀는 안전해야 한다. 그런데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엘리샤가 말했다.

“난 안 가요. 당신 곁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엘리.”

카일은 그녀의 손을 풀고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보았다.

“내가 데리러 가겠소, 엘리. 웨스트필드에서 나를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엘리샤는 손을 올려 하루 사이에 여윈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당신을 믿어요, 카일. 그러니 나는 웨스트필드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엘리. 생각을 해 봐. 이런 손으로 내가 당신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겠소? 난 걱정으로 미쳐 버리고 말 거요. 그러니 나를 위해서 돌아가서 기다려.”

엘리샤는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요. 난 당신 없이 단 하루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얻기까지 너무 힘들었기에 나에게 보상해 주고 싶어요.”

카일은 저절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도 그렇다. 엘리샤를 얻기까지 너무 힘든 길을 걸어왔다.

“사우턴야드에 가면 마당이 넓은 집을 사 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마당이 아주 넓어야 해요. 이왕이면 바다가 보이는 곳이면 더 좋아요. 난 바다를 본 적이 없거든요.”

“엘리…….”

“카일. 나를 사랑한다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믿어야 해요. 내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나를 믿어요, 카일.”

카일은 더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하는 엘리샤. 평생 그런 말은 생각지도 않고 살았는데…….

“아니. 내가 없어야 당신이 다치지 않겠죠? 그렇게 나에게 본능적인 반응을 하는 당신이니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낫겠죠?”

훗! 카일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이런, 엘리…….

“당신 말대로 떠날까요?”

카일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내가 없으면 당신이 다칠 일도 없겠죠? 그렇죠? 내가 영원히 떠나는 게 맞겠죠?”

카일은 양팔을 벌려 엘리샤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엘리.”

“그러게요. 당신이 먼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나도 전염됐잖아요. 그러니 당신 책임이에요. 내가 헛소리를 하지 않게 당신이 먼저 헛소리를 멈춰야 해요.”

카일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숙여 엘리샤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정말 가능할까…….

그때 엘리샤가 그의 등을 다독이며 속삭였다.

“난 당신을 믿어요, 카일.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문득 엘리샤는 자신의 목덜미가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워, 엘리. 두려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카일은 저도 모르게 난생처음 울고 말았다. 이런 막막함은 정말 처음이었다. 정말 할 수 있을까,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엘리샤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어요. 당신을 믿어요, 카일.”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를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지금은 참아지지 않았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엘리샤는 더욱 다정하게 그를 다독였다. 그래서 그가 조금이라도 울 수 있게끔,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절망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수 있게끔 그를 계속 다독거렸다.

일행이 한 명 늘었다. 매튜는 붕대를 감고 있는 카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단단히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에게 다가갔다.

“약속대로 평생 섬기겠습니다.”

카일은 의아한 시선으로 엘리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엘리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요, 카일. 아주 쓸 만한 종자를 얻었네요. 마음껏 부려먹으세요.”

α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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