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3)

6

듀팡은 선불로 지불한 돈으로 인해 아직도 손끝을 부들부들 떨며 카일을 힐끗 훔쳐보았다. 비싸도 너무 비싼 몸값.

“그 값에 상응하지 않기만 해 봐라.”

듀팡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루센은 은근한 어조로 카일과 엘리샤의 내력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었다. 왕가와 웨스트필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며, 어쩌면 사우턴야드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살거렸다. 그럼 도성 보석 장인들과의 치열한 다툼에 기울기가 생길 수도 있다고 성급하게 추측하며 그랬었다.

“흥! 그건 나중의 일이고 내 알 바도 아니지.”

듀팡은 쉴 새 없이 입속말로 투덜거리며 가벼워진 자신의 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아후. 속이 쓰라려 죽을 것 같다. 그 어떤 용병도 선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데리고 온 사우턴야드 용병 여섯 명도 당연히 후불이었다. 선불로 지불했다가 제 값어치를 못하고 죽으면 나만 손해. 혹시라도 사고가 있어 용병이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만큼 나갈 돈도 줄어들지 않는가? 투덜투덜. 그는 그러면서 지극히 소중하게 자신의 품에 안긴 레드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렸다.

엘리샤는 카일이 새로 구입한 수레에 앉아 말을 타고 오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계약이 무산되자마자 그는 곧장 수레부터 구입했다. 그가 짐을 옮길 때 뒤늦게 몸단장을 끝내고 방에서 나온 엘리샤는 카일 근처에서 여관 딸이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바구니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였다.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카일은 그냥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다. 햇살을 머금고 있는 짧은 금빛 머리카락. 파란색 눈은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색이 변한다. 부러진 적 없는 오뚝한 콧대와 뚜렷한 인중 밑으로 이어진 육감적인 입술은 지독하게도 매력적이다. 큰 키와 날렵하면서도 아름다운 근육이 새겨진 몸. 표정이 차가운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여자들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엘리샤도 귀로 숱하게 들었었다.

엘리샤는 계속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런데 여관 딸이 주저하다가 카일에게 바구니를 내밀며 뭐라고 말하자 바구니를 받았던 카일이 그것을 그냥 바닥에 내려놓고 말았다. 그러더니 발로 바구니를 ‘퍽!’ 소리가 나도록 걷어차 버렸다.

엘리샤는 빙그레 웃음지었다. 비록 책임감으로 자신을 아내로 맞이한 카일이지만 그의 아내가 되어 좋다는 말은 결코 케이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되어 좋다. 그가 엘리라고 부르는 게 좋다. 왠지 그만의 여자가 된 듯했다. 배경이 아닌 엘리샤라는 사람 자체로 느껴져서 좋다. 카일은 항상 그랬다. 엘리샤. 그는 항상 그녀를 엘리샤로 보고 있었다. 엘리샤는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자 다시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었다. 아침에 카일이 묶어 줬는데 너무 헐거웠나 보다.

카일은 엘리샤가 머리카락을 묶는 것을 지켜보았다. 돈이 조금 더 모이면 하녀를 하나 고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시중을 받아야 한다. 그러자 엘리샤가 리지를 돌려보낸 것이 조금 아쉬워졌다. 이상하게 카일은 리지가 신경에 거슬려 곁에 있는 것도 싫었지만, 그래도 엘리샤는 그녀의 시중이 아쉬울 것이다. 다만 카일이 처한 현실에 같이 적응하기 위해 리지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맨 앞에서 가던 듀팡의 수레가 멈췄다.

카일은 즉각 박차를 가해 선두로 달렸다. 듀팡이 어찌나 서두르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온 탓에 어느새 웨스트필드 영지를 벗어나는 마지막 길목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행렬 앞에 도착하자마자 듀팡이 왜 멈췄는지 알 수 있었다.

폭이 15미터 정도지만 작은 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친 황토색 물길이 폭주하는 것처럼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튼튼한 나무다리가 제구실을 충실히 하며 버티고 있으나 연일 계속 쏟아지는 비로 인해 물은 그야말로 사납게 달려드는 악마처럼 보였다.

듀팡은 초조한 듯 손가락을 연신 비틀어 대며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는 건널 수 있겠지.”

그러더니 듀팡은 카일을 올려다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책임자니까 저를 데리고 먼저 건너시겠죠?”

순간 카일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간신히 꿀꺽 삼켰다. 분명 인솔자는 저라고 말해 놓고 위험해 보이니까 꽁지를 빼? 이걸 그냥!

“몸값을 하셔야죠.”

듀팡은 아무래도 가벼워진 주머니로 인해 자꾸 화가 났다. 이 남자의 가치를 반드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시간이 없습니다. 물살이 약한 곳을 찾아 헤맬 시간 따윈 없다는 뜻입니다.”

듀팡은 다시 초조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연신 비틀어 댔다. 물살이 약한 곳을 찾는 것도, 물살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것도 안 된다. 안전지대인 웨스트필드를 이제 벗어나게 되니 꽁지가 빠지게 사우턴야드를 향해 뛰어도 부족하다. 그러다가 도성 보석 조합에서 눈속임을 알아차리고 정말 보석을 가진 사람이 듀팡임을 알게 되면…… 안 된다. 무조건 여기서 건너야 한다.

카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에서 내려 다리로 올라서서 걸어 보았다. 발밑으로 물살이 일으키는 거센 진동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웨스트필드의 건축은 튼튼하기로 유명하다. 순서를 정해 천천히 건너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엘리샤도 수레가 멈추자 두건을 뒤집어쓴 채 수레에서 내려 흙탕물을 지나 다리가 안전한지 시험해 보는 카일에게 다가갔다. 물이 질풍노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속 다리를 오가며 생각하고 있는 카일을 지켜보았다.

카일은 천천히 다리를 끝까지 건너 보았다. 듀팡이 상당히 못마땅하게 굴지만 그래도 고용주다. 그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더구나 품에 그렇게 귀한 것을 지녔으니 무작정 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일은 다시 되돌아왔다.

“있는 밧줄을 다 꺼낸다. 우선 듀팡 먼저 움직이고 그다음 엘리, 그다음 수레 순서다.”

그러자 듀팡이 서둘러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카일은 엘리샤에게 다가갔다.

“엘리, 내가 갔다가 데리러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조심해요.”

“물론이오.”

카일은 어느새 뚱뚱한 제 허리에 밧줄을 칭칭 감은 듀팡에게 다가가 밧줄을 자신의 허리에도 묶었다. 혹시라도 듀팡이 미끄러지면 그가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불안에 떨며 자꾸 자신의 옷깃을 붙잡는 듀팡을 데리고 계속 부딪치는 거센 물살로 인해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마침내 다리를 건너자 카일은 밧줄을 풀기 위해 재빨리 손을 놀렸다. 그런데 그때 듀팡이 소리쳤다.

“어서 건너!”

순간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짜고짜 세 명의 용병이 앞에서 당나귀 고삐를 끌고 남은 세 명이 뒤에서 밀며 수레를 앞장세웠다. 엘리샤를 위해 산 수레까지 함께 끌며 두두두 빠른 속도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탓에 미처 다리 앞에 서 있던 엘리샤를 보지 못했다.

“엘리!”

엘리샤는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는 수레를 피하며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보았다.

“수레가 먼저입니다, 카일. 재산이 최우선입니다.”

카일은 풀리지 않는 밧줄을 검으로 잘라 버리고 듀팡의 멱살을 움켜쥐어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듀팡, 이 개자식. 죽지 않을 정도로 패 주겠어!”

“당신을 고용한 사람은 접니다.”

“입 닥쳐!”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듀팡은 그의 거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재산이 중요하다. 자신의 품에 있는 것과 겨울을 위한 식량. 카일의 말대로 수레를 마지막에 건너게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도 친절함을 발휘해서 카일의 수레도 함께 끌어오라고 했다. 그럼 이중으로 왕복하는 수고를 덜할 것이니 자신의 친절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수레들이 덜그럭거리며 빠르게 움직여 건너는 것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용병들을 재촉했다.

“뭐 하는 거야! 더 서둘러. 내가 너희를 고용한 건 나와 수레를 지키려고 한 것이었어. 삯을 받고 싶으면 어서 움직이라고.”

용병들은 삯을 받기 위해 듀팡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노려보는 카일의 시선이 아무리 위압적이어도 계약은 계약. 고용주의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엘리샤는 험악해진 카일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침착하게 다리의 주춧대를 살폈다. 수레는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천둥의 으르렁거림도 들려왔다. 지독한 가을장마. 겨울을 재촉하는 자연의 뜻. 이 장마가 그치면 혹독한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엘리, 뒤로 물러나.”

카일의 고함 소리가 거센 물소리를 뚫고 뚜렷하게 귀에 들렸다. 엘리샤는 그 말을 듣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그때 땅 밑이 갑자기 푹 꺼지는 듯했다.

“엘리!”

다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 가운데 카일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서둘러 각반을 벗어던지고 이어 벨트도 풀어 던졌다. 그리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격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엘리샤의 가는 모습을 배웅하기 위해 성을 나선 케이는 그들의 뒤를 따라 웨스트필드 남쪽에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노아의 말이 옳다. 엘리샤는 선택을 했다. 그녀는 이미 카일의 아내. 그것을 존중해 줘야 엘리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이다. 그래야 아직도 저릿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이다. 그가 박차를 가해 엘리샤를 따라잡기 위해 달리고 있을 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샤?”

분명 엘리샤였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토사에 휩싸여 격류 속으로 빠진 사람은 분명 여동생, 엘리샤였다.

“엘리샤!”

케이는 급하게 말을 세우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서둘러 무장을 풀고 각반을 벗어던진 후 수하들이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엘리샤는 순식간에 격류에 휩쓸렸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연거푸 물속에 처박혔다. 젖은 드레스가 그녀의 다리를 옭아맸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과 채찍으로 인해 자꾸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카일! 카일! 그래도 엘리샤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벨트라도 풀어야 한다. 그러나 차디찬 물은 그녀의 몸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는 계속 물살에 떠밀려 버렸다.

카일은 필사적으로 물살을 타며 엘리샤를 향해 헤엄쳐 들어갔다. 카일은 자신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살을 타고 흘러내려온 나뭇가지가 연신 그를 후려쳤지만 그는 무조건 엘리샤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호되게 바위에 부딪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올 정도로 날카로운 통증이 그를 사로잡았다.

“빌어먹을!”

그런데 바위에 걸려 잠시 멈춘 순간에 그는 케이를 볼 수 있었다. 케이도 호되게 바위에 부딪쳤고 그를 따라 달려온 기사 중 한 명이 허리에 밧줄을 묶은 채 케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놔라. 엘리샤!”

카일은 다시 빠르게 엘리샤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엘리샤, 엘리샤. 카일은 무작정 몸을 날렸다.

기진맥진한 케이는 물 밖으로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으나 그를 단단히 붙잡은 수하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영주다. 공작이다. 그런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

케이는 온 힘을 다해 끌어당기는 수하들로 인해 물 밖으로 끌려 올라갔고 단단한 땅을 딛고 말았다. 엘리샤……. 케이는 자신의 부상을 살피는 수하들을 뿌리치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짧은 시간 휩쓸린 물살인데도 그의 힘을 완전히 빨아들인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엘리샤를 뒤쫓아 달리면서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강을 건널 수 있게 길을 찾아라!”

케이는 몇 번이고 고꾸라지다가 격류의 흐름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카일이 물속에 있다. 그가 미친 듯이 헤엄쳐 가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며 케이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카일.”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다리가 다시 힘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케이는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이 정도인데 엘리샤는, 카일은……. 케이는 소스라치는 두려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일 때 수하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잡았습니다, 공작님. 엘리샤 님을 잡았습니다.”

카일은 있는 힘을 다해 엘리샤를 붙잡고 기슭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단단히 끌어잡은 엘리샤에게 닿은 팔에서 맥박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그녀를 끌어냈다. 하아……. 하아…….

“엘리, 가자. 나와 가자, 엘리.”

카일은 절박하게 소리치며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해 마침내 그녀를 기슭으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 그녀를 먼저 올려보낸 후 카일은 잠시 심호흡을 해서 힘을 끌어 모았다. 움직여, 카일! 어서 움직여!

카일은 몸을 끌어올려 그녀의 곁으로 무너지듯 자신을 눕혔다.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너무 힘겨운 탓에 속을 뒤집어 놓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일은 이내 몸을 일으켜 엘리샤를 살폈다. 감긴 두 눈과 하얗게 질린 얼굴,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 그는 서둘러 그녀의 젖은 가슴에 귀를 바짝 대었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순간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했어, 엘리. 아주 잘했어.”

그런데 문득 엘리샤가 누운 주변으로 피가 흐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카일은 금세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녀의 몸에서 피가 나는 곳은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몇 번이고 살폈다. 후유…… 다행이다. 생채기는 있지만 피가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서 피가 이렇게……. 카일은 그제야 베인 것 같은 날카로운 아픔이 등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카일은 그녀를 옆으로 돌려 물을 토해 내게 하려고 등을 두드렸다. 여전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같이 자꾸 조바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카일은 계속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토해. 삼킨 물을 다 토해!”

그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엘리샤가 몸을 둥글게 말더니 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녀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살피며 그녀가 남김없이 토해 내도록 계속 등을 두드렸다. 간신히 물을 토하자 이번에는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녀의 몸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소리쳤다.

“수레를 끌고 와!”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케이가 듀팡 일행을 다그쳐 수레를 끌고 달려왔다. 그는 오자마자 곧장 엘리샤를 안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카일이 그 손을 밀쳐 내며 소리쳤다.

“건들지 마십시오. 제 아내입니다.”

카일이 이쪽 기슭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연결된 밧줄을 타고 건너온 케이는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카일의 찢어진 셔츠. 그의 등 뒤로 피가 섞인 물이 뚝뚝 떨어져 작은 실개천을 만들고 도도한 물결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케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카일이 아니었다면…… 엘리샤는 죽었을 것이다. 목이 메자 케이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다듬고 나직하게 말했다.

“카일. 너도 부상을 입었다. 그러니 내가 돕게 해 다오.”

카일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엘리샤를 번쩍 안아 올려 신속하게 수레로 이동했다. 그녀를 먼저 수레에 태우고 안에 보관하고 있던 휘장을 꺼내 확 펼쳐 순식간에 안팎을 차단시켰다.

카일은 서둘러 엘리샤의 흠뻑 젖은 드레스를 찢어 벗겼다. 이어 다급하게 궤짝을 열고 마른 옷가지를 꺼내 그녀의 젖은 몸을 닦아 내며 문질러 댔다. 너무 차가운 체온. 카일은 그녀의 몸을 계속 문지르고 또 주무르며 속삭였다.

“엘리. 엘리. 아주 잘 버텼어. 아주 잘했어.”

그때 엘리샤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건드렸다. 순간 카일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몸을 숙여 그녀의 차가운 몸을 꽉 끌어안았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대로 멈추는 줄 알았다.

“카일…….”

“그래, 엘리. 카일이야.”

엘리샤가 떨리는 손으로 카일의 허리를 힘없이 끌어안았다. 카일은 고개 숙여 엘리샤의 차가운 이마에 제 입술을 문지르고 보다 꼭 끌어안았다. 눈시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카일…….”

“응, 엘리. 나야. 나야…….”

카일은 덜덜 떨리는 그녀를 제 품에 꼭 끌어안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듀팡은 멀찍이 서서 그들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딱히 잘못했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리가 무너진 것도 아니고 연일 계속된 비에 흙이 무너진 것을 뭐 어쩌란 건지……. 자기가 엘리샤를 물속에 빠트린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 찜찜한 느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자꾸 카일의 시선을 피하며 눈치를 살폈다. 힐끗 카일을 볼 때마다 그가 자신을 차디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 듯했다.

‘내 탓이 아닌데. 내가 떠민 것도 아닌데. 그냥 계약을 파기하자고 할까?’

이런 불편함을 가지고 용병을 상전처럼 떠받들며 가야 하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고용주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인가? 그냥 여기서 계약을 파기하고 돈을 돌려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파기하자!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했단 말이야.’

그 거친 물살 속에서 떠내려가는 여자를 구했을 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었다. 정말 대단했다. 그야말로 가슴이 흥분으로 가득 차 저절로 거세게 뛸 정도로 대단했다. 저런 남자라면 믿을 만하지 않겠나? 나를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겠나? 함께 가자!

‘설마하니 나에게 뒤집어씌우겠어? 혼자 떨어진 걸 뭐 어쩌라고!’

그저 속으로 외쳤을 뿐이다. 듀팡은 계속 머릿속 저울을 가지고 갈팡질팡하면서도 까치발을 들어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계속 쳐다보았다. 그 가운데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뒤늦게 먼 길을 돌아 온 영지에서 준비한 수레가 리지를 태운 채 도착했다. 케이는 수레로 다가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엘리샤를 위해서 가지고 온 궤짝을 열었다. 노아가 챙겨 준 엘리샤의 물건이었다. 궤짝 안에는 노아가 빈틈없이 챙긴 웨스트필드의 자랑인 약도 넣어져 있었다.

“리지.”

“네, 공작님.”

엘리샤의 가는 길을 같이 배웅하고 싶다며 따라온 리지가 케이에게 다가왔다. 케이는 그녀에게 지시했다.

“물을 끓여라. 생강차를 줘야겠다.”

리지는 그 말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물이 끓고 알싸한 생강차의 향이 그윽하게 퍼질 때 휘장이 열리더니 카일이 나왔다. 그는 찢어진 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케이의 시선이 찢어진 틈으로 보이는 붉은 생채기에 못 박혔다. 그렇게 물살을 따라 미친 듯이 헤엄쳤으니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의 등줄기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흘러내려 발밑에 빠르게 고이고 있었다.

“엘리는 괜찮습니다. 물도 다 토했고 다친 곳도 없습니다.”

케이는 그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고 이어 목울대를 움직여 뜨겁게 치미는 숨을 삼키며 리지에게 말했다.

“리지, 이제 네가 엘리샤를 돌봐야겠다.”

“네, 그럴게요.”

케이는 카일에게 다가가 생강차를 내밀었다.

“잠시 엘리샤는 리지에게 맡기고 너를 좀 봐야겠다.”

“전 괜찮습니다.”

케이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일의 떨리는 손에 억지로 생강차를 쥐여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용병을 계속할 생각인가?”

그 말에 카일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감탄과 미묘한 갈등이 서린 시선. 내가 해야 할 일. 카일은 손을 뻗어 생강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알싸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갔다.

케이는 스스로를 다잡는 듯한 카일의 분위기를 읽어 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 살 생각이 조금도 없구나, 카일.’

리지가 수레 안으로 들어가 휘장을 내렸지만 카일은 그 안에 있는 엘리샤를 보는 것처럼 시선을 계속 그쪽으로 고정시켰다. 케이는 그런 카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용병은 몸이 생명이다, 카일. 그러니 너는 네 자신을 돌봐야 한다.”

카일은 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생강차를 천천히 마셨다. 뜨거운 기운이 몸 속에 퍼지며 얼어붙었던 몸이 녹는 듯했다. 케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카일의 등 뒤로 다가섰다. 이내 그는 사납게 눈살을 찌푸렸다. 많이 아플 텐데. 바위가 사납게 그를 할퀸 자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깊게 파이진 않았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곪을 수도 있다. 케이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깻죽지를 꾹 눌러 보았다. 그러자 카일의 몸이 그에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내일 아침이면 타박상으로 꽤나 고생하겠군.”

케이는 카일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근처 바위에 앉혔다. 그리고 궤짝에 담아 가지고 온 고약을 꺼내 와 그의 상처에 직접 바르기 시작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절대 아니다, 카일. 난 여전히 네가 못마땅하다. 하지만 엘리샤를 위해서 네가 아프면 곤란하지.”

카일은 케이의 수하가 한 잔 더 마시라고 건네준 생강차를 받아 마시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웨스트필드에 너의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카일.”

카일은 대답 없이 계속 생강차만 천천히 마셨다. 뜨거운 생강차가 몸에 퍼지자 떨림이 가라앉고 있었다. 곧 출발해야 한다. 듀팡이 지금 갈등하고 있다. 저 오만한 뚱땡이가 또다시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필드로 와라, 카일.”

카일은 계속 듀팡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네 배경이 되어 주겠다.”

케이는 카일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계속 이 길을 갈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길을 열어 주겠다고 하는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케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까부터 자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듀팡을 힐끔 보더니 카일에게 물었다.

“저 뚱땡이가 네 고용주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한마디 해야겠군.”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 힘으로 얻은 일입니다.”

케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저 뚱땡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장인같이 생겼는데. 확실히 밝혀 두는 것이 이들에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그때 카일이 말했다.

“저는……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습니다. 제가 엘리에게 부족하다고 믿으시는 것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러니 저 혼자 힘으로 해야 합니다. 저 혼자 힘으로 엘리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인정.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다. 그 말이 케이의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우리도 그랬다. 알렉스도 자신도 부모님께 인정받기 위해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아직 부족하다. 그것은 카일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키안이 그를 인정 못해 쫓아냈으니 그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케이는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을 꾹 참으며 카일의 등에 생긴 생채기에 약을 다 바르고 이번에는 타박상에 좋은 약을 꺼내 어깻죽지에 펴 바르며 말했다.

“엘리샤는 어릴 때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 우리 형제와 달리 몸이 약한 편이지. 그래도 그렇게 심하진 않았었는데 열다섯 살 때 갑자기 이유 없는 고열이 나서 오랫동안 아팠었지. 그 후로 말수도 부쩍 줄었고 간혹 악몽을 꾸더군.”

카일은 케이의 손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엘리샤는 가끔 악몽을 꾼다, 카일. 그 아이가 악몽을 꾸면 아버지는 엘리샤를 꼭 안고 천천히 걸어다니셨지. 엘리샤가 다시 잠들 때까지 계속 그러셨어. 그걸 이제 네가 해야 한다.”

문득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리샤는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도성에 있는 엘리샤는 절대 조용한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카일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온갖 말을 다 했었다. 그런 엘리샤가 말수가 줄었다고?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절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여동생을 위해서지. 잘 보살펴라. 아껴 주고 존중해 줘라. 엘리샤는…….”

“마땅히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여자입니다.”

카일이 케이 대신 뒷말을 이었다. 순간 카일은 도성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험프리. 그 개자식이 모욕적인 말을 엘리샤에게 퍼부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다음에 만나면.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면 그때는 죽여 버리겠다. 그때는 매인 몸이라 어쩔 수 없이 봐줬지만 나는 이제 복잡한 정치와 관계가 없어졌으니 내 뜻대로, 남편으로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그러자 문득 카일은 묵직했던 가슴 한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유를 가진 평민. 카일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공작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하라, 카일.”

“리지를 엘리의 시녀로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엘리샤의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더구나 이렇게 죽을 고비까지 넘겼으니 더더욱 보살피는 손길이 간절했다. 카일은 수송을 맡아야 하기에 엘리샤 곁에만 있을 수 없다.

“리지는 엘리샤의 시녀다. 나에게 허락받을 것도 없다. 그래도 너무 개고생은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군.”

케이가 웃으며 농담처럼 하는 말에 카일도 웃으며 대답했다.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샤는 끝까지 자신을 따라올 것이다. 그러니 엘리샤를 위해서. 엘리샤가 아무리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엘리샤가 괜찮아지고 이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면 그때 리지를 돌려보내면 된다. 이상하게 리지는 신경에 거슬리는 묘한 느낌이 있지만 엘리샤를 위해서 참을 것이다.

이윽고 케이는 치료를 끝내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가라, 카일. 알렉스는 내가 맡겠다.”

그러면서 케이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수레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일은 말없이 휘장을 살짝 들춰 보았다. 엘리샤가 새 드레스를 입고 모포를 두른 채 잠들어 있었다. 카일은 눈짓으로 리지를 나오게 한 후 케이가 무사한 엘리샤를 볼 수 있도록 휘장을 젖혔다.

케이는 수레 밖에 서서 짙은 속눈썹을 드리운 채 편하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엘리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 번만…… 한 번만……. 케이는 수레 안으로 들어가 엘리샤 곁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말없이 계속,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를 축복한다, 엘리샤. 너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그러다가 케이는 몸을 숙여 엘리샤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카일이 고생시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집으로 돌아와. 웨스트필드로 돌아오면 돼. 뒷일은 이 오빠가 책임질 테니까.”

문득 케이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마치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엘리샤의 손이 그의 등을 토닥토닥하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라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케이는 저절로 고이는 뜨거운 눈물을 엘리샤의 얼굴에 떨어뜨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네 앞날에 영광을…….”

케이는 그들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 멀리서 ‘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케이는 깜짝 놀라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수레에서 굴러 떨어졌는지 뚱뚱한 몸이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식! 케이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식한 놈. 고용주를 그렇게 다루는 놈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무식한 놈. 무식하니 제 아픈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엘리샤를 구한 거겠지. 케이는 이어 카일이 펄펄 나는 것처럼 날렵한 몸짓으로 바닥을 구르는 뚱땡이를 쫓아가 발로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카일은 밤이 깊어지자 아까부터 들으라는 듯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듀팡을 돌아보았다.

“왜 멈추는 겁니까?”

듀팡은 갑자기 멈춘 카일을 향해 저도 모르게 꼬장꼬장하게 묻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카일의 차가운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아이고, 저 눈빛만 봐도 옆구리가 아파 죽겠다. 턱에는 아직 감각도 없었다.

“이런 무식한 놈을 봤나.”

듀팡은 카일이 듣지 못하게끔 입속말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제 분을 못 이겨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쳤다. 정말 믿기지 않는 발길질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감히 용병 주제에. 카일의 등 뒤로 어떤 배경이 있는지 케이 공작으로 인해 가늠할 수 있었지만 골치 아프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고용주는 자신이다.

“여기서 쉬고 새벽에 이동하는 게 좋을 듯한데.”

용병이면서 시종일관 명령을 내리는 카일이었다.

‘주제넘은 놈.’

듀팡은 속으로 욕을 하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미하긴 하지만 달빛도 있고 부슬비까지 그쳤는데 여기서 멈추다니.

“앞으로 두 시간은 더 갈 수 있을 듯한데요.”

카일은 눈썹을 찡그리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내일은 안중에도 없나?”

듀팡은 순간 버럭 고함을 지를 뻔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운송하고 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네 눈에는 지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나?”

이런. 듀팡은 그제야 카일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 때문이다.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지금 멈추고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빌어먹을 용병 같으니라고! 그러나 카일의 눈을 마주하고 속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카일의 말이 귀에 맴도는 듯했다.

“네가 그렇게 수레를 막무가내로 이동시키지 않았다면 다리가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흙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걸 그렇게 연관시키는 것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명백히 자연재해인 것을 뭐 어쩌라고!’ 하고 말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마디에 한 대씩. 카일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의 몸짓이, 지독하게 싸늘하면서도 소름이 돋는 눈빛이 경고하고 있었다.

듀팡은 옆구리가 계속 결리는 듯 아파 오자 슬슬 문지르며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아주 지랄 같은 용병에게 걸렸다. 순간 너무 억울한 나머지 옆구리 통증이 사라지고 그 즉시 오만한 쌍심지가 돋았다. 고용주인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다니. 값도 비싸고 선불에다가 성격까지 좋지 않다니. 순간 루센이 원망스러워졌다. 나쁜 놈. 나쁜 놈!

“방을 잡겠다.”

아예 타협이 불가능한 말투 하고는. 듀팡은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피곤하지도 않은데……. 갈 길이 멀다. 지금부터 밤새워 간다 하더라도 사우턴야드까지 20일은 족히 걸린다. 잠잘 것 다 자고, 쉴 것 다 쉬고, 먹을 것 다 먹고 가면 한 달은 걸릴 것이다.

“불만이 있나?”

“카일,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요.”

기분 나쁘게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었다.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주 몸에 밴 사람처럼 용병들이 자신의 수하라도 되는 양 부려먹으며 내력을 묻더니만 듀팡에게도 내내 명령조였다.

“착각이라니?”

“고용주는 접니다. 이렇게 오만하게 굴면 사우턴야드에서 정착하기 어려울 겁니다.”

카일의 입매가 굳어지고 말았다. 고용주……. 가슴 한편이 그에 반응하며 욱신거렸다. 현실에 적응하고 받아들이자고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감정이 그에 순응하며 통제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카일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가슴 한편이 더욱 저릿하게 욱신거렸다. 하지만 실력으로 말하면 된다. 지금까지 해 온 훈련만 생각하자, 카일. 실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카일. 고용주? 훗!

듀팡은 카일이 차가운 조소를 짓자 얼굴에 노기를 띠며 보다 강력하게 말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고용주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정말 사우턴야드에 정착을 하려면 타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카일은 손을 들어 수레를 완전히 멈추게 한 후 듀팡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타협? 그렇지, 타협. 그럼 실력으로 말해서 타협을 주도하면 되겠군. 일단 당신을 무사히 데려다 주면 굉장히 환영받을 거 같은데.”

순간 듀팡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치 앞으로 닥칠 일을 전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말. 무사히.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실력을 한번 보고 싶다. 이 무례한 놈이 거기에 걸맞은 실력의 소유자인지 정말 한번 보고 싶다. 물에 빠진 아내를 구해 낸 모습이 아직 뇌리에 생생하나 그것과 싸우는 실력은 별개 아닌가?

아니지. 그런 사고가 생기면 정말 안 되지. 듀팡은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도성 보석 조합에서도 분명 최고라 소문난 놈들을 고용했을 것이다. 부딪치지 않으면 다행이나 만일 부딪친다면……, 이자의 실력이 못 미쳐서 뺏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한 번은 이 오만하고 무례한 콧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자꾸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지 싶었다.

그때 카일이 이어 말했다.

“지금은 쉬고 대신 이른 새벽에 출발하겠다.”

카일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듀팡을 힐끗 보고 말을 몰아 이제 막 진입한 작은 마을 입구에 있는 여인숙으로 향했다. 여기서 쉬지 않으면 당분간 마을은 없다. 카일은 어렸을 때 키안을 따라 얼스월드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작성한 적이 있기에 큼직한 얼스월드의 줄기를 머리에 담고 있었다.

카일은 엘리샤를 위해 방을 잡은 후 수레로 향했다. 너무 지쳤는지 엘리샤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래도 열이 오르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케이가 엘리샤를 위해 주고 간 궤짝 안에 든 약들. 앞으로도 쓰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카일은 수레로 올라가 잠든 엘리샤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수레에서 내렸다.

“리지, 가서 침대를 좀 살펴 줘야겠어.”

“그럴게요.”

리지는 상냥하게 대꾸하며 카일의 말대로 앞장서서 삶에 찌든 여관 주인이 열어 준 방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쾌쾌하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작고 허름한 방. 순간 리지는 저도 모르게 입술 끝자락이 올라가고 말았다.

‘오, 이런. 엘리샤. 이 순간만은 네가 부럽지가 않네.’

카일은 엘리샤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와 침대를 정리한 리지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리지가 모포를 펼쳐 바닥에 깔기 시작하자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당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건데요?”

카일은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리지는 지금 습관적으로 그와 엘리샤를 동등하게 보질 않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아닌 호위 기사인 카일로 보는 것이다.

“그만 나가.”

그러자 리지는 모포를 깔던 손을 멈춘 채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가라는 말 못 들었나?”

카일은 리지에게 딱히 설명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케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아내라고 말한 것이 아님을 설명할 이유가 있을까? 이미 엘리샤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굳이 말해야 하나?

“그럼 나는 어디서 묵어야 하나요?”

카일은 엘리샤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도성에서 리지는 항상 엘리샤와 같은 방에 머물렀었다. 시녀로서 당연한 거지만 이제 이들은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 평민들은 방이 여러 개가 있는 집을 소유하지 않는다. 집을 그렇게 짓지도 않는다. 그냥 가장 넓은 공간에서 부부와 아이들, 그리고 미혼의 동생들도 데리고 함께 잔다. 부부만의 침실을 가지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뿐.

카일은 리지의 팔을 끌고 방 밖으로 나와 또 하나의 방을 잡았다. 도성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 카일 역시 거대한 홀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잤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성행위를 귀로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지, 엘리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카일 역시 자신들의 은밀한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보고 듣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곰팡이 냄새가 자욱한 거지 같은 방으로 들어가게 된 리지는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문을 닫으려는 카일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도성에서 당신이 그렇게 떠난 후 구름 같은 소문이 떠돌았어요. 그 소문으로는 당신이 엘리샤 님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죠.”

카일은 문고리를 잡고 뒤돌아 리지를 쳐다보았다. 리지는 새카맣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습관은 무서운 거예요, 카일. 당신은 습관대로 엘리샤 님을 위해 나선 것뿐인데 누명을 뒤집어쓴 거죠.”

카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편들어 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리지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자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기묘해졌다. 그리고 습관이라……. 그도 엘리샤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습관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지만 남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슬슬 나빠졌고 가슴도 저릿해졌다.

리지는 다 안다는 듯 특유의 여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언제나 엘리샤 님을 보호해야 하는 호위 기사, 카일. 그리고 엘리샤 님을 위해 태어난 나. 공작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카일의 표정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은 묘하게 그의 가슴에 있던 울분을 건드렸다.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는가? 평생 대를 이어 복종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이렇게 같은 입장인 리지에게서 들으니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리지는 그대로 굳어진 채 선 카일에게 다가와 그의 손등에 살며시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상처를 돌봐야 하지 않나요? 내가 해 줄게요.”

카일은 미간을 좁히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고는 냉랭히 반응했다.

“나에게 신경 쓸 필요 없소, 리지. 당신은 엘리만 돌보면 돼.”

“당신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카일은 싸늘한 시선으로 리지를 뚫어지게 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냉혹할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분명히 합시다, 리지. 나는 내 자신과 엘리만 보는 사람이라 당신이 웨스트필드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떻게 자랐는지 관심 없소. 주제넘게 나서지 마시오.”

카일은 저린 가슴을 닫아 버리는 것처럼 냉혹한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길 바라오, 리지.”

리지는 카일이 문을 꽝 닫고 나가자 입술을 비틀었다. 하필 카일이라니……, 도성에서 가장 껄끄러운 존재인 카일이 엘리샤의 남편이 되다니. 이것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는데.

“어리석은 험프리. 꾹 참아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어야지. 상대도 안 되면서 덤비기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리지는 더러운 이불을 걷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잠을 자야 하다니. 리지는 탐스러운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쓸어내리며 이번에는 입술을 악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그래도 일단 따라붙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이것으로 계약은 계속 성사되는 거야.”

그러다 문득 카일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 자신과 엘리만 보는 사람이라…….”

엘리? 아무도 엘리샤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엘리라…….

“훗! 그래, 카일. 당신은 항상 엘리샤만 보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애를 많이 먹었어, 당신 때문에.”

리지는 양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계속 빗질하듯 쓸어내리며 얇은 입술을 차갑게 비틀었다.

헉! 엘리샤는 퍼뜩 놀라며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꿈을 꾼 듯했다. 갑자기 사나운 물속으로 빠지는 꿈.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쳐도 계속 끌어당기던 거친 물살. 엘리샤는 꿈의 여파에서 헤어나지도 못한 채 가슴이 무너지듯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엘리샤는 순간 흠칫했으나 이내 그 체온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아, 엘리.”

카일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의 손길이 뚜렷하게 느껴지자 불규칙하게 뛰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가슴이 그의 온기를 흡수하는 듯했다.

“카일…….”

“음…….”

엘리샤는 몸을 돌려 카일을 마주 보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면서 속삭였다.

“무서웠어요.”

“이제 괜찮아.”

카일은 잠을 자면서 대꾸하는 것처럼 음성에 졸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어깨, 등줄기.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그녀를 계속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엘리샤는 그의 손길로 인해 두려움이 점점 더 밀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생각났다. 거의 의식을 잃어 갈 때 그가 그녀를 붙잡았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치지 않게 자신의 몸으로 물살을 가로막았었다. 엘리샤는 그에게 파묻히듯 안겨들었다. 언제나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와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엘리샤는 자신의 몸을 더욱 깊게 그에게 파묻었다. 그의 몸이 그녀를 감싸듯 끌어안았고 그의 손길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과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엘리샤는 그의 체취를 가슴으로 들이마시며 그의 품에 머물렀다. 카일…… 나의 기사 카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당신이 나를 잡아 주기를 얼마나 바랐는데……. 나를 구했던 것처럼 이제 나를 단단히 잡아 주기를 바라도 될까요?

카일은 그녀가 자신의 벗은 가슴에 입술을 꾹 누르며 입을 맞추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본능도 완벽하게 깨어났다. 카일은 몸을 비스듬히 살짝 일으켜 무명 속치마 위로 솟구친 그녀의 젖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두드러진 젖꼭지를 쓸어 보았다. 한번 깨어난 본능은 아직 자제를 배우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던 그녀의 하루를 생각하면 이렇게 그녀를 애무하는 것은 아니 될 일이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엘리샤는 그가 고개 숙여 옷 위로 자신의 젖꼭지를 빨아들이자 저절로 몸을 떨고 말았다. 옷이 젖을 정도로 그는 그녀의 젖꼭지를 빨아들였고 잇몸으로 자근자근 깨물듯 애무해 갔다. 그의 숨결이 점차 뜨거워졌고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애무하는 손길로 인해 전신에 짜릿한 쾌감의 소름이 돋고 말았다.

카일은 그녀의 옷이 자신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버리자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격정이 그대로 숨 쉬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계속해도 괜찮으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샤는 한 손을 내밀어 카일의 조각 같은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의 이마, 콧날,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강인한 턱, 그리고 그의 입술.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안아 주길 바란다. 뜨겁게, 아주 뜨겁게. 그래서 살았다는 것을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싶다.

카일은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지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려 그녀의 손가락을 덥석 삼켜 버렸다. 그녀의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혀로 더듬어 댔다. 마치 오래전부터 축적됐던 욕망이 물 만난 고기처럼 파닥거리며 금세 그녀의 몸 속에서 헤엄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으음……. 카일은 은밀한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도저히 안 된다. 엘리샤 앞에서는 이상하게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는다. 오늘따라 더욱 그랬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향한 욕망으로 몸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도 눈앞에서 그녀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필사적으로 그녀를 쫓아가 붙잡았을 때의 그 심정이 그의 심장을 순식간에 빨리 뛰게 만들었다. 놓치는 줄 알았다. 잃는 줄 알았다.

“카일의 시선에서, 카일의 범위에서,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알렉스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신성한 맹세를 했는데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할 뻔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입에서 빼고 대신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빨아들이며 마음껏 그녀의 타액을 흡수해 삼켰다.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어 자신의 혀로 그녀의 혀를 감아 탐닉의 춤을 췄다. 심장이 더욱 요란하게 뛰었다. 금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한 울음을 쏟아 냈다.

엘리샤는 한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휘감아 그에게 자신의 입술 전체를 내준 채 다른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멈칫하며 입술을 뗐고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젖가슴을 덮은 그의 손을 천천히 움직이게 했다. 이 순간, 그에게 자신을 주는 것이 유일한 표현인 것처럼 느껴졌다. 여러 번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지 않는 카일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 주는 유일한 표현. 그러니 부끄러움이 없었다.

카일은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손을 맡겼다.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고 납작한 복부를 만지고, 그리고……. 그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여 꿀꺽 타액을 삼키고 말았다. 그녀의 속치마가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으로 인해 걷어올려지고, 이어 뜨거운 기운이 서려 있는 깊은 통로가 자리 잡은 은밀한 여성 위에서 비로소 그의 손이 멈춰졌다.

“나를 사랑해 줘요, 카일.”

나를 사랑해 줘요. 당신의 마음이 담긴 손길로 나를 만져 줘요.

“나를 사랑해 줘요, 카일.”

나를 사랑해 줘요. 나를 지키는 이유가 습관과 책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 줘요.

카일은 그녀의 부드럽게 풀린 검푸른 눈을 마주하며 은밀하면서도 지독하게 뜨거운 곳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체모가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그녀만의 열기와 촉촉한 느낌이 그로 하여금 연신 사나운 욕망의 타액을 삼키게 만들었다. 순간 몸을 일으킨 카일은 자신의 바지를 벗어 바닥으로 던지고 그녀의 속치마도 순식간에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

그녀의 등허리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속에 한 손을 밀어넣어 감싼 채 그녀의 입술을 다급하게 덮쳤다. 혀를 그녀의 입 속으로 집어넣고 마음껏 더듬고, 핥고, 빨아들이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애무했다. 그리고 단단히 발기된 남성으로 그녀의 여성을 자극하며 촉촉한 애액으로 스스로를 적셨다.

엘리샤는 그의 거침없는 애무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입술에서 벗어난 그의 입술이 우아하게 뻗은 목덜미를 깨물며 자극하고 혀로 핥자 저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 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말았다. 으으음…….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남성이 벌려진 그녀의 깊은 곳에 닿게 했다. 그가 느껴졌다. 불처럼 뜨거운 기운을 간직한 힘이 느껴졌다. 엘리샤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고개 숙여 자신의 젖꼭지를 덥석 입으로 물고 애무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의 몸짓은 지극히 본능 그 자체. 그런데 엘리샤는 문득 그의 몸짓이 지난번과 또 다르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전에 무슨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들어와 놓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카일. 그때 그는 마치 그녀 전체를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소유한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의 카일은 또 다른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렇게 느껴졌다. 마치 절박한 듯. 그도 엘리샤 못지않게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처럼 보였다.

엘리샤는 자신의 젖가슴이 흠뻑 젖도록 애무함과 동시에 깊은 통로로 자신의 남성을 삽입하기 시작한 그를 붙잡았다. 그에게 꼭 묻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느낌대로 묻고 싶었다.

“왜?”

카일의 거친 음성이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녀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내가 아프게 했소?”

엘리샤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감싼 채 단숨에 물었다.

“어땠어요? 당신도 두려웠어요? 내가 물에 빠졌을 때, 당신도 나처럼 두려웠어요?”

“그걸 말이라고!”

순간 그가 격한 어조로 쏟아 내듯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단번에 끝까지 자신의 남성을 삽입했다. 헉!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젖혀졌고 몸이 활처럼 휘고 말았다. 그러자 더 들어올 수도 없게 깊이 들어온 것 같은 그의 남성이 그녀의 몸을 가르며 한층 더 깊게 들어왔다. 아아아아…….

“나를 구했을 때는 어땠어요? 기뻤어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가슴이 저리는 듯했다. 그녀를 놓치는 줄 알고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뛰었었다. 카일은 그대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처음부터 제어되지 못한 몸짓으로 거칠게 다가들었다.

“카일?”

몸이 그에게 밀려 흔들리면서도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건지 모르지만 카일은 연신 덮쳐 오는 쾌감의 파도에 전신을 부르르 떨며 대꾸했다.

“당연한 것은 묻지 마, 엘리. 당연히 기뻤지.”

“그래요?”

그녀의 음성이 기쁨에 물들어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

“나는 맹세를 지키는 사람이오.”

순간 엘리샤는 저도 모르게 울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맹세. 그가 한 신성한 기사의 맹세.

“앞으로도 그럴 거요. 내 시선에서, 내 범위에서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킬 거요.”

엘리샤는 가슴이 저리듯 아파 오자 더욱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안겨 주는 격렬한 쾌감이 그녀를 삼킬 것처럼 밀어닥쳤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맹세…… 책임……. 그러다가 이내 엘리샤는 고개를 흔들며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끌어당기고는 그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서…….”

카일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오로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쾌감! 어떻게 그녀와 섹스를 할 때마다 이렇게 느낌이 다른지 모르겠다. 중독처럼 그녀와의 섹스에 빠져드는 자신이 느껴졌다. 그녀와 끈끈하게 결합된 몸을 통해 그녀가 느껴지고, 그리고 자신이 느껴지고. 맥박이 서로 결합된 부위에서 파닥거렸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깊은 키스를 퍼부으며 점점 더 격렬하게 움직였다. 쾌감의 몸짓을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숨이 그녀의 젖가슴에 뿌려지고 땀이 흘러내렸다.

뜨거운 숨결이 잦아들 무렵 카일은 몸을 굴려 침대에서 벗어나 탁자로 다가갔다. 새벽에 출발할 예정이라 대야에 미리 물을 받아 놓았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마른 셔츠를 꺼내 적셔 그녀에게 다가갔다. 힘이 완전히 빠진 듯 널브러져 누워 있는 그녀의 몸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꼼꼼하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엘리, 한 시간 정도 후면 출발할 거요. 그러니 조금 더 눈 붙여.”

“괜찮아요. 푹 잤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엘리샤는 그가 허벅지를 벌리고 다리 사이까지 세심하게 닦아 내자 저도 모르는 부끄러움에 움츠러들면서도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정말 좋았어요.”

“응?”

카일은 무심코 되물으며 그녀의 탄력적인 젖가슴에 묻은 자신의 타액도 닦아 냈다.

“당신과 하는 거…… 정말 좋았다고요.”

카일은 저도 모르게 귓불까지 벌겋게 물들고 말았다. 아직 어두운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의 그 말 한마디에 가슴까지 남자의 긍지로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이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된 건가? 거기에 쾌감까지 느끼게 해 주는 건가? 그러자 그의 가슴까지 벌겋게 물드는 듯했다. 어두워서 정말 다행이었다.

카일이 그녀를 거의 목욕시켜 주다시피 씻겨 준 후 따뜻한 면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도 새로 꺼내 단정하게 입은 후 출발 준비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엘리샤는 촛불을 밝히고 바닥에 흐트러진 자신의 옷가지와 카일의 옷가지를 챙겼다. 새벽길이니 불을 밝힐 기름이 충분히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가면서 먹을 끼닛거리도 챙기고 싶었다. 엘리샤는 분주하게 방을 정리하고 여관 주인을 깨우기 위해 방에서 나섰다. 그 순간, 엘리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리지?”

저 칠흑처럼 까만 머리칼과 역시나 새카만 눈동자. 리지? 엘리샤는 순간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리지는 빙긋 웃으며 석상처럼 굳어진 엘리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놓지 않는다고 했잖아, 엘리샤. 벌써 잊었어?”

고요한 침묵이 이들을 에워싸는 듯했다. 엘리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리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살인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