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지 말아요, 제발.” “아니.”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난 널 사랑해. 이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차마루 씨…….” 여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마. 나쁜 생각 하지 마. 그냥 나를 믿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중에 모든 것이 안전해졌을 때 그때 나하고 여기서 살자.” “내가 숨으면…… 차마루 씨가 곤란하잖아요.” “내 걱정은 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여운이 일그러진 얼굴로 마루를 바라봤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 때문에 목숨 걸지 말라고. 난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도 울어 줄 사람이 없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니까 절대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목숨 걸지 말라고 했잖아요. 차마루 씨를 구하라고 했잖아요.” “아니. 절대 안 돼.” 마루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기여운이 당장 죽으면 왜 울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나는? 기여운을 사랑하는 나는! 기여운이 잘못되면 나도 망가질 거야. 내가 망가질 걸 아는데 기여운이 잘못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그러지 말아요. 나 때문에 그러지 말아요, 제발.” “여운아.”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여운아, 잘 들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내가 기여운을 숨기면 작전을 망친 죄로 분명 혼이 날 거야. 하지만 죽지 않아. 작전을 망친 죄로 죽진 않는단 말이야. 난 그거면 됐어.” “국수방에서 쫓겨나면요?” “쫓겨나면 여기서 너하고 살면 돼. 너하고 나하고 메주하고.” “왜 나 때문에 쫓겨날 각오까지 하는 거예요?” “말했잖아. 내가 기여운 사랑한다고.” “차마루 씨…….” “기여운만 안전하게 지켜 낼 수 있다면 난 괜찮아.” “차마루 씨.” “여운아, 사랑해. 내가 기여운을 사랑한다는 거 그것만 기억해.” 마루가 여운의 얼굴을 꼭 감싼 채 속삭였다. 마루를 바라보는 여운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마루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루는 어떤 수작도 하지 않고 잠만 자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아니, 지키지 못했다. 마루도 여운도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 못 들던 그날 밤 여운은 결심했다. 마루의 곁을 떠나겠다고. 그래야만 마루가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1장 여운은 고추밭에 물을 주기 위해 만난 정민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눈인사만 했을 뿐 마루에게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정민이 여운에게 다가온 것은 정민이 여운에게 어머니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고 열흘 만이었다. 마루가 이장과 함께 다른 밭으로 이동했을 때였는데, 이정민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여운에게 접근한 것이다. “얼굴이 많이 핼쑥해졌네요.” 정민이 안타까운 눈길로 여운을 바라봤다. “차마루 씨 때문에 말을 못 걸었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런 줄 알고 있었어요.” 정민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도 말 걸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혹시라도 여운 씨가 불편해질까 봐요.” “궁금한 게 많았는데 전화도 할 수 없었어요. 차마루 씨가 늘 옆에 있어서.”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요.” “며칠 동안 마음이 많이 복잡했어요.”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많이 걱정했어요. 볼 때마다 핼쑥해져서.” 정민과 여운은 서로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 차마루 씨한테 내가 해 준 얘기 했어요?” “아뇨. 안 했어요.” “왜 안 했어요?” “어떻게 말해요. 차마루 씨가 국가 조직 사람이라면서요. 그리고 이정민 선생님을 간첩이라고 생각해서 감시하고 있다면서요. 말 못 했어요. 나도 그렇고, 이정민 선생님도 그렇고 더 의심받을까 봐요.” “그랬군요. 잘했어요. 그런데 혹시 차마루 씨 좀 살펴봤어요?” “살펴보다니요? 뭘요? 내가 차마루 씨를 살펴봤어야 했나요?” 여운의 되물음에 정민이 약간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내 말은 내가 여운 씨한테 차마루 씨의 정체에 대해 알려 줬기 때문에 혹시 차마루 씨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수상하게 살펴봐서 의심받을 행동을 한 건 아닌가 해서 물어본 거예요.” 정민이 그럴듯하게 설명했지만 어쩐지 여운이 마루의 동태를 살펴 주길 기대했던 것처럼 들려 마음이 언짢아졌다. “그러지 않았어요.” “잘했어요. 잘한 거예요.” 정민이 칭찬했지만 전혀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고 반어법처럼 느껴졌다. “여운 씨.” “네.” “미국에 계신 부모님한테 여운 씨 찾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요? 이정민 선생님 어머니라면…… 저한테 이모인 거죠?” “맞아요. 여운 씨 찾았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사진을 보내 주셨어요.” “사진요?” “이 사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미국에서 보낸 거라 며칠 걸렸어요.” 정민이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여운에게 건넸다. “사진 좀 봐요.” 정민이 건넨 사진은 여운 부모님의 결혼사진이었다. “우리 아빠 엄마…… 결혼사진이네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모님의 결혼사진이었다. 어쩐지 촌스러워 보이는 양복을 차려입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역시나 촌스럽게 느껴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곱게 면사포를 쓴 젊은 시절의 엄마의 결혼식 사진. 하지만 촌스러우면 어떤가. 엄마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아버지는 너무나 멋졌다. 여운은 울컥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사진을 어떻게 이정민 선생님 부모님이 갖고 있었어요?” “이모가, 여운 씨 어머니가 오래전에 미국으로 보내 준 거래요.” “아…….” “이 사진도 봐요.” 정민이 또 다른 사진 두 장을 건넸다. “어? 우리 오빠예요.” 여운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여운의 죽은 오빠가 유치원 다닐 때인지 유치원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오빠 참 잘생겼었는데…… 어릴 때도 귀여웠네요.” 여운은 사진 속의 오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 아빠랑 엄마랑 오빠가 같이 찍은 사진이네요.” 여운은 남은 한 장의 사진을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바라봤다.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함께 찍은 사진.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던 여운은 순간 흠칫 놀랐다. 오빠를 안고 있는 아버지 옆에 서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엄마의 배가 많이 불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임신했던 거예요?” “이 사진 보내 줬을 때 편지에 둘째 낳을 때 다 됐다고, 열흘 정도밖에 안 남았다고 했었대요.” “그럼, 그럼 여기, 여기에…….” 여운이 사진 속의 엄마 배를 가리켰다. “내가…… 있는 거네요? 우리 엄마가 나를 낳기 열흘 전인 거네요?” 여운의 물음에 정민이 먹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의 마지막 편지가 미국에 도착했을 땐 아마 여운 씨가 태어나고 난 후였을지도 몰라요. 그땐 국제 편지가 한참 만에 배달됐을 테니까.” 여운은 두 장의 사진을 한참이나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여운은 정민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아무리 닦아 내고 아무리 애를 써도 멈추지 않았다. 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수건을 건넸고, 여운은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족만 생각하면 한없이 약해지는 여운이었다. 가족사진만 보면 죽을 만큼 외롭고 그리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아파하던 여운이었다. 가족만 생각하면, 가족사진만 보면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버리는 통곡 때문에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되도록 사진을 보지 않으려 애썼던 여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 오빠……. 여운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세 사람이, 여운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하는 세 사람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그리움과 외로움에 불을 댕겼다.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이토록 보고 싶은 사람들이 사진 속에만 있다는 것이 여운의 마음을 너무나 외롭게 하고, 너무나 아프게 하고 있었다.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이라도 잡아 볼 수 있다면, 안아 볼 수 있다면, 그저 짧은 인사라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여운은 몸서리가 쳐지도록 애달픈 그리움을 느끼며 사진을 가슴에 꼭 품고 흐느껴 울었다. “여운 씨…….” 정민이 안타까운 손길로 여운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여운이 가까스로 눈물을 멈추고 정민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눈물이 터져 버렸는데…… 멈출 수가 없어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민의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에 여운이 정민을 바라보자 정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여운 씨. 여운 씨를 찾았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가 너무나 서럽게 울던 게 생각나서…… 나도 눈물이 나네요.” 정민이 눈물을 참으려는 듯 주먹도 움켜쥐고 어금니도 틀어 무는 게 여운의 눈에도 보였다. 눈물을 참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는지 여운의 눈에도 보였고 마음으로도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가까스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울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마음으로 울었다. 적어도 여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핏줄이기 때문에, 혈육이기 때문에 함께 감정을 나누고 울어 주는 것이라고. “이 사진 모두 이모가 미국으로 보내 준 사진이에요. 여운 씨 오빠 돌 때 사진도 있고, 이모가 미국으로 보내 준 사진이 아직 많아요.” “그렇군요……. 다 보고 싶어요. 다.” 여운의 애절한 중얼거림에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볼 수 있어요. 전부 다.” “어릴 때 아빠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엄마 사진이 왜 이렇게 없냐고. 엄마 사진뿐 아니라 가족사진이 왜 이렇게 없냐고. 우린 사진을 안 찍었냐고. 그때 아빤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고, 그게 후회된다고 했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이사를 너무 많이 다녀서 사진이 없어져 버렸다고 했었어요. 우리 가족은 정말 가난했거든요. 가난해서 사진도 많이 못 찍고 작은 집에서 더 작은 집으로, 더 작은 집에서 더 작은 집으로 계속 이사를 다니면서 집이 좁아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많이 버려야 했는데 그때 사진도 다 없어진 것 같아요.” “여운 씨 가족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정민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민 선생님.” “예.” “이정민 선생님이 사촌이라는 게…… 너무 기뻐요.” 여운이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정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뻤다. 정말 기뻤다. 아버지와 오빠가 여운을 이 세상에 홀로 남겨 두고 하늘나라로 가 버렸을 때 또 누굴 죽일지 몰라 절대 받아 줄 수 없다며 냉정하게 내쳤던 친할머니와 친척들 때문에 여운은 이 세상에 친척이라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라 생각했었다. 이 세상은 핏줄 따위에 기대지 말고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과 함께 울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친척이라는 것이 오늘에야 비로소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도 여운 씨가 내 사촌이라는 게 기뻐요. 여운 씨를 찾아낸 것도 너무나 감사하고.” 정민이 애틋한 감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이젠 믿을 수 있어.’ 여운은 더 이상 정민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여운의 가족사진까지 갖고 있는 정민이 아닌가. 정민은 여운의 가족이 틀림없었다. 정민을 계속 의심하는 것은 가족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고,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믿을 사람은 정민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여운 씨를 무척 만나고 싶어 해요.” “나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여운이 울먹이며 정민을 쳐다봤다. “무척이나. 여운 씨를 찾았다는 말에 너무나 고통스럽게 오열하셨어요. 그리고 당장 여운 씨를 만나러 한국에 들어오신다는 걸 겨우 말렸어요. 지금 한국으로 들어오면 자칫 큰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겨우 말렸어요.” 정민의 어머니, 그러니까 여운의 어머니의 친언니이자 여운에겐 이모가 되는 사람이 여운을 찾았다는 말에 고통스럽게 오열하고 당장 조카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려 했다는 말에 여운은 아릿한 고마움을 느꼈다. “나도 이모를 만나고 싶어요.” 만나고 싶었다.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여운도 꼭 만나고 싶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미국 전시회 일정이 잡혔어요. 전시회 장소를 미리 답사하기 위해서 다음 주에 미국으로 갈 거예요. 그때 같이 가는 게 어때요? 이번에 같이 가서 어머니를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시회 스태프로 같이 미국에 가자던 말……. 미국에 가서 플라토닉 데이트하자고 했던 말……. 나하고 이정민 선생님하고 가족이라는 말, 그 말을 하려던 거였죠?” 여운이 울먹이며 묻자 정민이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만나게 해 주려던 거였죠?” 이번에도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어요. 가서 이모를 만나고 싶어요.” 만날 수만 있다면 꼭 만나고 싶었다. 그곳이 어디든 가서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듣고 싶었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배 속에 있는 아이 기여운에 대해 어떤 말을 했었는지. “그런데…… 내가 갈 수 있나요? 미국에 가려면 여권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난 여권이 없어요. 비자 같은 것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여권, 비자 그런 거 걱정하지 말아요. 필요한 건 내가 다 준비할게요. 여운 씨 여권 사진만 있으면 돼요.” “여권 사진……. 알겠어요.” “나머지 미국 방문에 필요한 서류는 모두 내가 준비해 줄게요.” “이정민 선생님이요?” “내가 다 준비할 거니까 그 부분은 아무 걱정 말아요.” “다음 주까지 다 준비할 수 있어요?” “그럼요.” 정민이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준비만 된다면 갈게요. 가고 싶어요.” “그런데 차마루 씨가 순순히 보내 줄까요?” 정민이 걱정스럽게 물었고 여운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예요. 이모 만나고 싶어요. 어떻게 해서든 만날 거예요. 만나서 듣고 싶어요. 우리 엄마에 대해서.” “만나러 가요. 우리 같이 가요.” 정민이 손을 내밀었고 여운은 정민의 손을 잡아 버렸다. “다음 주 금요일이에요.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게요.” “다음 주 금요일…….” “나만 믿어요. 나만.” 정민이 마치 세뇌시키듯 말했고 여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여운은 여권 사진을 찍기 위해 마을 할머니들과 단체로 목욕탕에 가는 길에 따라 나섰다. “할머니들하고 단체로 목욕을 간다고?” 마루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전엔 할머니들하고 목욕하는 거 쑥스럽다고 거절했었잖아.” 마루의 말대로 한 달에 한 번 있는 단체 목욕 때마다 여운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거절했었다. 할머니들하고 친해지기 전이기도 했고, 아무리 할머니들이라 해도 벌거벗은 몸을 보여 주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무조건 따라나서야 했다. “할머니들이 자꾸 같이 가자고 하시는데 계속 싫다고 하면 서운해하실까 봐 같이 가기로 했어요. 오랜만에 목욕하고 올게요.” “이젠 쑥스럽지 않아?” “지금도 좀 쑥스러워요. 그런데 계속 피할 수만은 없잖아요.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라면 더더욱.” “알았어. 갔다 와.” 마루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여운을 보내 주었다. 이장님의 승합차를 얻어 타고 할머니들과 읍내로 나온 여운은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 사진관으로 달려가 여권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정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권 사진 찍었어요. 마을에 도착할 때쯤 톡 할게요. 마을 회관에서 만나요.≫ ≪알았어요.≫ 정민의 답장을 받은 여운은 부리나케 목욕탕으로 달려가 할머니들과의 단체 목욕에 합류했다. “우리 여운이 어데 갔다 왔노?” “약국에 잠깐 갔다 왔어요.” “약국? 와? 어데 아프나?” 할머니들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여운을 쳐다봤다. “어데가 아프노? 우리 여운이 아프면 안 되는데.” “아픈 거 아니에요. 연고 샀어요. 모기한테 물려서요. 요즘 모기 많잖아요.” 여운이 실제로 모기에 물려 가려운 곳을 긁으며 말하자 할머니들이 이구동성 “맞다”를 연발했다. “맞다. 모구새끼가 엄청시리 돌아댕긴다.” “누가 아이라노. 모구 새끼가 울매나 피를 빨아 처묵는가 전신이 간지러바가 잠을 못 자겠다 아이가.” “드러눕기만 하면 앵앵거리고 잡으라고 일나면 또 어디로 숨어 뿠는가 안비이(안 보여).” “모구가 억시로 빠르데이.” 모기를 주제로 와르르 얘기의 꽃을 피웠던 할머니들이 다시 여운에게 관심을 돌렸다. “여운아.” “네.” “여운이 인자 할매들하고 계속 같이 살 끼제?” 할머니가 여운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같이 살까요?” “같이 살자. 할매는 우리 여우이가(여운이가) 참 좋다.” “나도 좋다. 우리 여우이가.” “좋고 말고지. 어데 가서 이리 이쁜 딸아를 또 만나겠노.” “요즘 누가 우리 같은 할매들을 좋아하노. 냄시 난다고 싫고 잔소리나 주깬다고(한다고) 다 싫어하지. 우리 여우이만 할매들을 좋아한다 아이가. 그래가 참 이쁘다.” 할머니가 여운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갑게 쓰다듬었다. 할머니들의 사랑에 여운은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할머니들을 바라봤다. “우리 마을에는 전부 할매 할배 늙은이들이고 니처럼 예쁜 처녀는 딱 니 하나다 아이가. 총각은 마루하고 조각쟁이밖에 음꼬. 자슥들이 있으면 뭐 하노. 다 도시로 떠나서 맹절(명절) 때나 오고 손주 놈들도 대가리 굵어지니까 할매가 죽든지 말든지 전화 한 통도 음꼬. 날마다 이 늙은이들 옆에서 농사도 거들고 노래도 불러 주는 사람은 여우이 니밖에 음따 아이가. 인자 할매는 니 엄스면 몬 살 것 같데이.” “정말요?” “진짜다.” “나도 글타. 우리 여우이 엄스마 심심해서 우찌 살꼬 싶다. 허리 아프다 카면 뚜드리 주제, 어깨 아프다 카면 막 쭈물리 주제.” “아이고, 진짜 우리 여우이 없으면 우야꼬.” 할머니들이 이구동성 여운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내가 이래 보니까 그 조각쟁이는 오래 살 놈은 아이다.” 할머니가 말하는 조각쟁이는 정민이었다. “맞다. 조각쟁이는 틀맀다.” “일도 징그럽게 몬하고. 가는 얼굴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기가 아가 눈까리가(눈이) 이상해.” “맞제. 내도 글트라. 조각쟁이는 눈까리가 보통 눈까리가 아이라.” “가는 인사도 잘하고 실실 잘 웃고 그캐도 이상하게 정이 안 간데이.” 할머니들이 정민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하자 여운은 사촌 오빠 정민을 감싸 주고 싶은 반발심이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징그럽게 일 못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건 아니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게 어떻게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민은 그냥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눈빛이 이상하진 않았다. 아무 문제 없는 보통 눈인데, 오히려 보통보다 더 선한 눈인데 할머니들은 어째서 정민에 대해 이렇게나 점수를 짜게 주는지 이상하다 못해 서운할 정도였다. “여우이 니 조각쟁이하고 친하나?” “그냥 한마을에 사니까 좋게 지내는 거예요.” 여운은 친하다는 말 대신 조금 둘러 표현했다. “니 조각쟁이하고는 너머 좋게 지내지 마레이. 가는 우리 마을에 오래 안 있을 끼다. 그라고 우리가 나이를 똥구녕으로 묵은 게 아니데이. 할매들이 딱 보만 안다. 저놈이 괜찮은 놈인지 영 잡놈인지.” “맞다. 우리처럼 한 80년 살다 보면 이래 얼굴을 보면 딱 비인다(보인다) 아이가.” “조각쟁이 가는 잡놈이라.” ‘너무하시네. 잡놈 아닌데…….’ 여운은 할머니들이 사촌 오빠를 향해 잡놈이라고까지 하자 골이 날 것 같았다. “여운아, 니하고 마루는 어데 가지 말고 우리하고 살자. 어?” 할머니가 친손녀 바라보듯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하고 살자. 마루하고 혼인해라. 마루하고 혼인해서 아도 마이 낳아라. 우리가 다 키아 주께.” “키아 주고말고제. 낳기만 낳아라.” 다른 할머니도 거들었다. 여운은 할머니들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라 생각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이 칠순을 넘겼고 이제 곧 팔순을 앞두고 있는 할머님도 있었다. 모두 다 파파 할머니들이었기에 그 연세에, 그 기력에 스스로 돌보기도 힘든 마당에 아기를 키워 준다는 건 불가능했다. “있제, 마루도 우리가 키았다 아이가.” “마루 탯줄 내가 잘랐데이.” “그러셨어요?”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이고. 또 생각나네. 까딱하면 마루도 죽고 마루 엄마도 황천 갈 뻔했다 아이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얼라가(아기가) 나올라꼬 진통이 시작됐는데 자궁 문이 안 열리는 기라. 마 딱 닫히가 꼼짝을 안 하는 기라. 그래가 마루 엄마가 산만 한 배를 붙잡고 사흘 밤낮을 방바닥을 기 댕깄다 아이가.” “맞다. 그랬다. 마루 엄마가 궁디가 조막만 해서 저기 저래가 얼라를 낳겠나 했는데 진짜 죽을 똥 쌌다. 마루가 꺼꿀로 나왔제.” “그래. 아가 꺼꿀로 디집히가 발부터 나왔다 아이가. 사람 죽는다꼬 난리가 났었데이.” “아이고, 맞다. 진짜 마루 엄마가 마루 낳다가 죽을 뻔했데이.”
할머니들의 대화가 어찌나 리얼한지 그때의 급박했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병원에 안 가셨어요?” 여운이 안타까운 얼굴로 묻자 할머니들이 손사래를 쳤다. “그때는 병원이 지금보다 더 멀어가 갈 수가 음찌. 갈라면 대구까지 가야 되는데 차도 음꼬, 있었다 케도 대구 가다 길에서 죽었다.” “요 가랭이로 발이 요래 나와가 딱 걸리가꼬(걸려서) 나오도 않고 드가지도 않고 딱 죽게 생깄는 기라.” “얼굴이 핼가이(핏기가 없이) 마 힘을 몬 주는 기라.” “힘을 우째 쓰노. 사흘 밤낮을 용을 써 삐맀는데.” “힘을 주다가 꼴딱 넘어가고 막 싸다구를 때리가 정신을 돌리 노면 또 힘주다 꼴딱 눈이 뒤집히고 했다 아이가.” “큰일 날 뻔했네요.” “큰일이제.” “그때 갑수 어머이도 매느리하고 손자도 죽는가 싶어가 뒤로 꼴딱 넘어갔다 아이요.” “와 안 그랬겠노. 갑수 놈 앞세우고(아들 죽고) 정신이 반이 나갔는데.” “갑수 어머이가 누구냐면 마루 친할매다.” 할머니가 틈틈이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그란데 여우이한테 마루 얘기 해도 되는교? 비밀 아잉교?” 한 할머니가 조심스레 제동을 걸었다. “아이고야, 맞다. 여우이 니 마루 친부모 얘기 모리제?” “알아요. 들었어요.” “아나? 우째 알았노? 마루가 말하데?” “네.” “마루 즈그 엄마가 지 낳다 죽을 뻔한 거도 알드나(알고 있더냐)?” “아뇨. 그건 모르는 것 같아요.” “그라마 마루한테 말하지 마래이. 마루 또 즈그 엄마 산소 가서 펑펑 울라.” “네. 말 안 할게요.” “그래가 할매가 어데까지 말했드노?” 할머니가 그새 까먹고 여운에게 물었다. “마루 씨 어머니가 마루 씨 낳을 때 엄청 고생하셨다구요.” “맞다, 맞다. 그래가 아이고, 이라다(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싶을 때 산파가 아 발을 잡고 요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기를 써가(써서) 마루가 딱 티 나왔다 아이가.” “나오긴 나왔는데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부대끼가 얼라가 새파래지가 마 숨을 안 쉬는 기라.” “맞다. 그때 다 죽었다 캤데이.” “그때 종민이 행님이 얼라 콧구녕에 막 숨을 불어 넣어가 살았제?” “맞다, 종민이 행님이 마루 살맀다.” “마루가 죽었다 산 놈이데이.”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이고, 글케도 힘들게 새끼를 낳았는데 그거를 마 친정아부지가 뺏아 가 큰집에 보냈다 아이가.” “얼라 이자뿠다고(잊어버렸다고) 획 돌은 사람처럼 뛰댕깄잖아. 우리가 친정아부지하고 짜고는 얼라 숨갔나 캐서(숨겼나 해서).” “와 안 그랬겠노. 새끼가 음서짔는데(없어졌는데) 눈까리가 돌지 안 돌겠나.” “아이고, 마루 엄마가 마 그때 딱 마음을 고치묵고 다른 데로 시집갔으면 그 고생 안 했을 낀데.” “몸 고생, 마음고생. 새끼 배 속에 있을 때 서방은 죽었 뿠제, 아 낳다가 죽다 살았제, 새끼는 마 뺏깄제. 서방도 없이 시어매이 병수발하다가 그래 죽었다 아이가. 우리 중에 제일 젊었는데, 제일 어린기 제일 먼저 죽었다 아이가.” “외로버가 죽은 기라.” “맞다. 서방도 음꼬 새끼도 음꼬 외로바서 죽은 기다.” 할머니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 다른 서방 만났으마 그리 일찍 죽지는 않았을 낀데.” “마 치아라. 팔자 고칠 것 같았으면 친정아베가 마루 큰집에 처음 보냈을 때 그때 돌아앉았지. 아를 맻 번이나 뺏아 가 큰집에 보냈는데 기어이 찾아왔다 아이가. 결국은 마루가 병에 걸리가 죽게 생기 노이 지 손으로 큰집에 보냈지만 아들만 온다 카면 마 날라댕깄다 아이가. 아들이 올 끼라고, 엄마 보러 올 끼라고 온갖 음식 다 해 놓고 옷 사 놓고 신발 사 놓고. 그 아들 기다리느라 수절하면서 집 지킸다 아이가.” “마루 어매가 아들을 참 많이 기다맀데이. 아들 온다 카면 새벽부터 동구 밖에 나가 기다맀다 아이가. 그래 기다리는데도 마루가 안 왔데이.” “우짜겠노. 마루가 오기 싫어서 안 왔나. 즈그 엄만지 모르니까 안 왔지.” “그래, 맞다. 즈그 엄만지 모르니까 안 왔다. 안 온 게 아이고 몬 온 기다.” “결국은 왔다 아이가. 죽은 후에 알았지만 즈그 엄만 줄 알고 와서 즈그 엄마 집에서 산다 아이가.” “죽은 후에 오면 무슨 소용이고.” “와? 죽은 후에라도 오면 됐지.” “그래. 그라면 됐다. 죽은 후에라도 알았으면 됐다.” 할머니들이 죽은 마루 엄마를 회상하며 측은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운아.” “네.” “할매가 보니까 마루가 여운이 좋아서 난리를 지기드라.” “마루가 우리 여우이한테 하는 거 보면 마루 즈그 아부지가 마루 엄마 델꼬 왔을 때하고 똑같제? 마루 즈그 아부지도 그랬다 아이가. 마누라가 좋아가 입이 찢어짔다 아이가.” “아이고, 누가 아이라. 마루 즈그 아부지도 딱 마루 같았데이. 마루가 즈그 아부지 닮은 기데이.” “마루가 여운이 좋아서 물고 빨고 하는 거 봤제? 하이고, 눈꼴시리바라.” “할매들 있는 데서도 그래 물고 빨면 집에서는 우짜는고?” “우짜기는 뭐슬 우째. 이불 밖으로 나가도 몬 하게 딱 붙잡고 있겠지.” 할머니의 말에 다른 할머니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렇진 않아요.” 할머니들의 거침없는 19금 발언에 여운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눈꼴시립기는 머시 눈꼴시리. 물고 빨아야 붙어 있지. 옛날에 우리 영감재이들처럼 했다가 누가 붙어 있나.” “맞다. 영감재이들처럼 했다가는 벌씨로 도망갔다. 나도 10년만 젊었으면 영감재이 내뿌리고 도망갔다.” 할머니의 말에 다른 할머니들이 또다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여운아, 니도 마루 좋제?” 할머니의 물음에 여운은 그저 서글픈 미소만 지었다. “안 좋나?” “좋아요…….” “둘이 좋으마 됐다. 둘이 살아라. 얼매나 좋노.” “맞다. 여자는 다른 거 다 필요읎다. 서방이 그냥 이쁘다고 물고 빨면 되는 기라.” “맞다. 진짜 여자는 다른 거 다 필요읎다. 서방한테 사랑받으면 되는 기라.” “마루가 속이 마이 아픈 아데이(아이다). 작은어매가 즈그 엄만 줄 알고 나서 얼매나 우는가, 날마다 산소 앞에 엎어져가 울었다 아이가. 마루 우는 거 보는데 아이고, 불쌍해서…….” 할머니가 혀를 차면서 눈물을 훔쳤다. “여운아, 알았제? 마루하고 혼인해서 할매들하고 살자. 어?” “네…….” “진짜제?” “네.” “할매하고 약속하자.” 할머니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여운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을 걸었다. “할매하고 약속했데이.” “네.” 여운은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했지만 지키기 못할 약속을 했기에 먹먹한 눈길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죄송해요, 할머니.’ 여운은 할머니들보다 10분 먼저 목욕탕을 나와 인화를 맡겨 둔 사진을 찾았다. 이장님의 승합차를 타고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미리 정민에게 메시지를 보내 두었던 여운은 마을 회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민에게 여권 사진을 건넸다. “이제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네.” 정민과 헤어진 여운은 큰 비밀을 간직한 채 마루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차마루 씨.” 여운이 마루 위로 올라서며 부르자 마루가 벙커에서 나오다가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뭐가요?” “목욕했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나?”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땟국물이 쫙 빠져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네.” 마루의 과장된 감탄에 여운이 눈을 흘기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붙잡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뭐가요?”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눈만 흘길 거야?” “장난치니까 그렇죠.” “장난 아니야. 진짜 예쁘단 말이야. 진짜 예뻐.” 마루가 여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목욕 자주 해야겠어. 내가 알던 기여운이 아니야.” “치. 그만해요.” “진짜 목 빠지게 기다렸어.” “왜요?” “왜긴. 보고 싶으니까.” “그만하라고 했죠?” 여운이 아까보다 더 찢어지게 눈을 흘기고 방으로 들어가자 마루가 쫓아 들어왔다. “백숙하는 거 알려 줘.” “백숙요?” “이장님이 기여운 몸보신시켜 주라고 토종닭 두 마리 잡아 주셨어. 1인 1닭. 내가 백숙해서 몸보신시켜 줄게.” 마루의 말에 여운이 픽 웃었다. “요즘 되게 잘 얻어먹네요.” “마늘 판매 여왕인데 당연히 극진하게 대접해야지. 즐겨.” “알았어요. 즐길게요. 밖에 솥 걸 수 있죠?” “어.” “불 붙여 놔요. 토종닭은 오래 끓여야 해요. 아주 오래. 불 붙여요.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끓여 준다고 했잖아.” “잔소리 말고 불이나 붙여요. 불 피운 후에 솥 걸어 둬요.” “알았어.” 마루가 마당에 있는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솥을 세척하는 동안 여운은 닭과 재료들을 손질했다. “솥 걸었어!” “나가요!” 마루가 아궁이에 솥을 걸어 놓고 기다리는데 여운이 손질한 닭과 재료들을 갖고 나와 솥에 넣은 후 물을 부었다. “뚜껑 닫아 줘요.” 마루는 여운이 시키는 대로 무거운 무쇠 솥뚜껑을 닫았다. “오래 걸린다고 했지?” “오래 걸려요.” “그럼 우리 뭐 할까?” “하우스에 가 봐야죠. 방울토마토 수확하는 거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목욕하는 날은 쉬는 거 아니야? 그냥 쉬자.” 마루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백숙 끓이고 있잖아. 넘치면 어떻게 해?” “안 넘쳐요. 가까우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 불 조절만 하면 돼요.” “에이, 그냥 기여운하고 둘이 놀고 싶었는데.” “뭐 하고 놀려고 했는데요?” “뭐든지.” “조금만 도와드리고 와서 놀아요. 둘이서.” 여운은 뚱하게 심술이 난 마루의 손을 잡고 하우스로 이끌었다. “그거 알아?” “뭐요?” “기여운이 먼저 내 손 잡은 거.” “칫. 언젠 안 잡았어요?” “기여운이 먼저 잡은 건 지금이 처음이야.” “손잡은 걸 갖고 뭘 그래요? 차마루 씨 품에 뛰어든 적도 있는데.” “언제?” “기억 안 나요? 여기 처음 온 날요. 창고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다가 이장님이 도깨빈 줄 알고 담장까지 뛰어넘으며 살려 달라고 차마루 씨 품에 뛰어들었잖아요.” “아, 그때.” 마루가 쿡쿡 웃었다. “참 볼만했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렇게 높은 담장을 한 번에 뛰어넘고. 난 기여운이 높이뛰기 선수인 줄 알았잖아.” 마루의 놀림에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도깨비가 나타난 줄 알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날 이장님이 기여운한테 들이대다가 허리뼈 나갈 뻔했어.” “맞아요. 그랬어요.” 마루와 여운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이장님 집에 파출소 전화번호 얻으려고 갔을 때 뒤뚱뒤뚱 제대로 걷지도 못했잖아.” “이삿짐 도둑맞았다고 하니까 아주 고소해하던 얼굴 아직도 기억나요.” “고소했을 거야. 총각 허리를 못 쓰게 만들어 놨는데 얼마나 고소했겠어?” “이장님이 총각이라는 말에 어찌나 놀랐는지.” “그래도 파출소 전화번호는 얻어 냈잖아.” “그래요. 나 같으면 괘씸해서 모른다고 딱 잡아뗐을 텐데.” “이연우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기여운한테 완전히 반해서 얼빠진 얼굴 말이야.” “그랬었나요?” “그때 이연우 얼굴 보면서 내가 가슴속으로 뭐라고 외쳤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마루의 외침에 여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차마루 씨는 내가 간첩인 줄 알았죠?” “맞아. 그래서 이연우가 정말 한심해 보였어. 경찰이 간첩한테 홀렸다고 생각했거든.” 여운의 손을 잡고 걷던 마루가 걸음을 멈추고 여운을 바라봤다. “그때 정말 싫었었어.” “언제요? 연우 씨가 나한테 반해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볼 때요?” “아니.” “그럼요?” “이연우하고 썸 타고 싶다고 예쁘게 원피스 차려입고 나갔을 때. 그때 정말 싫었어.” “왜 싫어요?” “그땐 왜 싫었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냥 싫었는데 지금은 알아, 왜 싫었는지. 기여운이 내가 아니라 이연우하고 썸 타는 게 싫었어.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는 게 싫었어.” “질투했어요?” “응.”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했어. 질투 때문에 이연우를 죽이고 싶을 정도였어.” 마루의 솔직한 말에 여운이 픽 웃었다. “그땐 썸 타지 말라고, 썸만 타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막 막말하더니.” “그렇게 막말을 해서라도 썸 타러 못 가게 하고 싶었어.” “못됐어요.” “응. 못됐었어. 알아. 미안해.” 마루의 순순한 고백에 여운은 마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꼭 잡았다. “용서할게요.” “고마워.” 마루와 여운은 다시 나란히 손을 잡고 방울토마토 하우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여운이 나한테 왔을 땐 초봄이었는데, 꽤 쌀쌀했는데 벌써 여름이네.” “그러네요. 간첩으로 몰려서 국수방에 붙잡혀 갔다 오고 고추 심고 마늘 캐고 그러다 보니 여름이고, 곧 가을이 올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까 꽤 재밌었는데?” “그러게요. 재밌었네요.” “우리…… 계속 재밌게 살까?” “…….” 여운이 대답을 하지 않자 마루가 여운을 바라봤다. “싫어?” “살 수…… 있어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여운이 꼬시면 가능해. 열심히 꼬셔 봐. 넘어갈 준비 하고 있을게.” 마루가 장난스럽게 말했고 여운은 그런 마루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마루와 계속 재밌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울토마토 수확 일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백숙은 백옥처럼 뽀얀 국물이 우러나 먹기 딱 좋게 익어 있었다. 일을 하고 온 끝이라 몹시 시장했던 두 사람은 큼지막한 토종닭 두 마리를 커다란 쟁반에 펼쳐 놓고 3일은 굶은 사람들처럼 야무지게 뜯어 먹기 시작했다. 무쇠솥 안에서 오랜 시간 끓인 토종닭이라 질기지 않고 쫄깃쫄깃했고, 국물도 곰국을 우려낸 것처럼 구수한 것이 보약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이거 먹어.” 마루가 실한 닭 다리를 뜯어 여운에게 건넸다. “차마루 씨 먹어요. 나도 닭 다리 있어요.” “먹어. 다리가 제일 맛있잖아.” “괜찮다구요.” 괜찮다는데도 마루가 기어이 닭 다리를 여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내 닭 다리 두 개 두고 마루의 닭 다리를 먹자니 미안해진 여운이 자신의 닭 다리 하나를 뜯어 마루에게 건넸다. “기여운이 다 먹어. 난 괜찮아.” “나도 괜찮으니까 빨리 먹어요.” 이번엔 여운이 기어이 마루의 손에 닭 다리를 쥐여 주자 마루가 못 이긴 척 뜯기 시작했다. “맛있다.”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진짜 맛있어요.” 마루와 여운은 맛있다는 말을 연거푸 할 만큼 정말 맛있게도 닭백숙을 뜯어 먹었다. 여운은 오늘따라 참 복스럽게 음식을 먹는 마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마루 씨.” “응?” “나 없어도…… 잘 있을 수 있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나 어딘가로 보낸다면서요. 그때 나 없어도 잘 있을 수 있냐구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들고 있던 닭 조각을 내려놓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못 있을 것 같아.” “왜요?” “보고 싶어서.”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지 말고 잘 있어요. 나 없어도.” “잘 있으려고 노력할게. 그리고 금방 데리러 갈게.”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여운은? 나 없이 잘 있을 수 있어?” 마루의 물음에 여운은 말없이 마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을게요. 노력할게요.” 여운의 대답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기지 말고 다 먹자.” “그래요. 다 먹어요.” “맛있다.”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여운이가 끓여서 더 맛있다.” “맞아요. 내가 끓여서 더 맛있어요.” 마루가 여운을 보며 밝게 웃었고, 여운도 마루를 향해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은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그 큰 토종닭 두 마리를 그 자리에서 끝장내 버렸다. 물론 상 밑에서 침을 한 바가지나 흘리며 낑낑거리는 메주에게 몇 조각 양보하긴 했지만 말이다. * 자정이 넘은 시간에 메시지 톡 도착음이 울리자 여운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켜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여운 씨, 자요?≫ ≪아뇨. 무슨 일 있어요?≫ ≪미국 갈 준비 완료했어요. 여권, 비자, 비행기 표 모두.≫ ≪그래요?≫ ≪사흘 뒤예요.≫ ‘사흘 뒤…….’ ≪알았어요.≫ ≪준비됐어요?≫ ≪네. 준비됐어요.≫ ≪내일 만날 장소 시간 알려 줄게요.≫ ≪네. 기다릴게요.≫ ≪잘 자요, 내 동생.≫ ≪잘 자요.≫ ‘잘 자요’라고 답장을 찍은 여운은 망설이다가 다시 문자를 찍었다. ≪오빠.≫ 톡 메시지를 끝낸 여운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됐는데 막상 준비가 끝나고 나자 마루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마루에게만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여운이라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 주겠다고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두고, 아니 배신하고 이정민과 함께 떠나려고 결심하자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차피 떠나려고 했어요. 당신을 위해서…….’ 여운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당신을 위해서…… 내가 떠나는 게 나아요. 차마루 씨를 위해서라도 내가 떠나야 해요. 내 곁에 있으면, 나를 사랑하면 차마루 씨도 위험해져요. 나 때문에 차마루 씨까지 잘못되는 건 절대 싫어요. 절대. 절대. 당신만큼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운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진심으로, 당신만큼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만큼은, 차마루 씨만큼은 살았으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행복하게…….’ 여운의 눈물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말아 줘요. 이정민은 간첩이 아니에요. 국수방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한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아무 말도 못 하고 떠나야 해요. 나를 믿어 주지 않을 거니까. 이정민을 믿어 주지 않을 거니까. 이해해 줘요. 어쩔 수 없어요. 난 내 가족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도…… 그래도…… 당신한테는 너무너무 미안해요.’ 여운은 밤새도록 가슴을 끌어안은 채 흐느껴 울며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했다. * “여운아.” 마루가 긴장한 목소리로 여운을 불렀다. 잠자리를 펴던 여운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마루가 여운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내일 여길 떠날 거야. 새벽에.” “내일요?” 여운도 긴장으로 굳어 버렸다. “내일 내가 여길 떠난다는 건…… 이정민 검거 작전이 시작된다는 거예요?” 여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새벽……. 큰일이야. 정민 오빠가 잡히면 난 이모를 만날 수가 없어.’ “내일 새벽에 누구하고 어디로 가요?” “내일 새벽에 나하고 읍내로 나가면 거기서 국수방 요원이 널 다른 곳으로 옮길 거야.” “차마루 씬요?” “난 집으로 돌아오고.” “난……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전.” “대전요?” “대전에 있는 안전가옥이야.” “대전에 있는 안전가옥……. 거기서 얼마나 있어야 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며칠이면 돼. 임정화가 모든 걸 실토했어. 내일 작전대로 이정민을 검거만 하면 내가 사흘 내로 데리러 갈게. 아무 걱정 말고 기다려. 응?” 마루의 말에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가 방에서 나가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여운은 정민에게 메시지 톡을 보냈다. ≪오빠, 오빠!≫ ≪어, 여운아.≫ ≪할 얘기가 있어요.≫ ≪말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던 여운은 결국 다시 메시지를 찍었다. ≪도망쳐야 해요.≫ ≪무슨 말이야?≫ ≪오빠 잡으려고 작전이 시작된대요.≫ ≪작전? 어떻게 알았어?≫ ≪긴 얘기는 내일 만나서 얘기해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얘기는 내일 밤 혹은 그다음 날 오빠를 체포하려고 검거 작전이 시작된다는 거예요. 난 내일 여길 떠나요.≫ ≪떠난다니? 어디로?≫ ≪작전이 시작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대전에 있는 안전가옥으로 보낸대요.≫ ≪언제?≫ ≪내일 새벽에.≫ ≪틀림없어?≫ ≪틀림없어요. 차마루 씨가 읍내로 날 데려가면 읍내에서 다른 요원이 날 데리고 대전으로 간대요.≫ ≪내 말이 맞지? 날 간첩으로 오해한다는 말, 차마루가 정부 조직 요원이라는 말.≫ ≪맞아요. 오빠 말이 다 맞았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어떻게요?≫ ≪내일 새벽에 읍내로 갈 때 내가 조용히 따라갈게.≫ ≪오빠가요? 그러다 들키면요?≫ ≪들키지 않게 따라갈게. 읍내에서 차마루와 헤어지고 다른 요원과 고속도로를 타게 되면 마지막 휴게소에 들르자고 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마지막 휴게소가 어딘지 몰라요.≫ ≪내가 알려 줄게.≫ ≪알았어요.≫ ≪짐 가방은 포기해.≫ ≪포기하라구요?≫ ≪필요한 건 내가 다 준비해 줄게. 휴게소 화장실에 갈 때 짐 가방을 들고 가면 의심할 거야.≫ ≪아, 그렇군요.≫ ≪중요한 건 핸드백에 챙기고 짐 가방은 버릴 생각을 해.≫ ≪알았어요.≫ ≪휴게소에서 만나.≫ ≪알았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알겠지?≫ ≪알았어요.≫ ≪차마루가 절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고.≫ ≪네.≫ ≪휴대폰 소리 무음으로 해 둬. 나하고 연락하는 거 들키지 않게.≫ ≪네.≫ ≪내일 만나.≫ ≪내일 만나요.≫ 정민과 메시지 톡을 끝낸 여운은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난 차마루 씨도 정민 오빠도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나로선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여운은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마루가 여운의 방으로 찾아왔다. 마루는 늘 그랬던 것처럼 불을 끈 다음 이불 속으로 들어와 여운의 곁에 누웠다. “짐 가방 다 쌌어?” “쌌어요.” “며칠 안 걸릴 건데 적당히 쌌지?” “네.” “잘했어.” “…….” “여운아.” “네.” “안아 줄까?” 마루의 물음에 여운은 아무 말 없이 마루를 바라보다가 마루의 품에 안겨들었다. 마루는 거부하지 않고 품에 안겨든 여운을 꼭 끌어안았다. 마루의 품에 안겨들자, 그가 품에 꼭 끌어안자 여운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울면 안 돼. 울지 마.’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이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는데,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픈지, 가슴이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루는 여운이 그토록 가슴 아파하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사랑스럽고 그저 안쓰러운 듯 여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작전 끝내고 데리러 갈게.” “알았어요…….” 여운이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여운아, 내 심장 소리 좀 들어 볼래?” “심장 소리요? 또 이상해요?” 여운이 상체를 일으키며 근심스러운 얼굴로 마루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안 좋아요?” “들어 봐.” 여운은 마루가 시키는 대로 마루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루의 심장은 너무나 경쾌하고 씩씩하게 그리고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괜찮아요. 완전 정상이에요.” 여운이 안심한 목소리로 말하자 마루가 “맞아” 하고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응.”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런데 왜 들어 보라고 한 거예요?” “내 심장이 왜 정상이 됐는지 이유를 알았거든.” “이유가 뭔데요?” “기여운 때문이었어.” “나 때문이라구요?” “처음 기여운이 왔을 때…… 기여운이 옆에 있으면 심장이 제멋대로였어. 그런데 지금은 기여운이 옆에 있으면 정상이 돼.” “…….” “내 심장을 망가뜨린 사람도 기여운이고, 내 심장을 고쳐 놓은 사람도 기여운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기여운은 내 옆에 있어야 해. 앞으로 계속, 계속. 내 심장을 위해서.” “…….” 마루의 말에 여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기여운이 책임져, 내 심장.” “…….” “알았지?” “…….” 여운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루를 꼭 끌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생각해 봤는데, 작전 다 끝나고…… 우리 여기서 같이 살자.” “…….” “같이 살자, 여운아.” 같이 살자는 마루의 말에 여운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왜 울어?” 마루의 물음에 여운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도, 가슴이 왜 아픈지도, 지금은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내일 새벽이면 영영 헤어질 사람이라서, 내일이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라서, 그게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서, 당신을 배신하고 떠나는 게 너무나 미안해서, 떠날 수밖에 없어서, 당신을 위해 떠나야만 해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는 말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데, 내일 새벽이면 이젠 영영 만나지 못할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내일 새벽이면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 여자라는 것도 모르고 너무나 애틋하게 안아 주는 것이 너무나 죄스러워 여운은 그의 품에 안겨 서럽게 흐느꼈다. “울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면 돼. 오래 안 걸려. 금방이야.” 마루가 여운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달랬다. “무서워하지 말고 불 켜 놓고 자. 내 생각 하면서. 응?” 마루의 말에 여운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루 씨.” “응?” “고마워요.” 여운이 마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진짜, 진짜 너무너무 고마워요.” “고맙긴. 그런 말 하지 마.” 마루가 여운의 눈물을 닦아 주며 미소 지었다. “진짜, 진짜 너무너무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고마울 것도, 미안할 것도 없어.” “…….” “내가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해. 내가 기여운을 사랑한다는 것만. 응?” “……고마워요.” 여운이 마루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여운아.” “네.” “사랑해.” “…….” “사랑해, 여운아.” 마루가 여운을 꼭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 장 마루와 여운은 새벽 2시 5그린벨트를 떠나 읍내로 향했다. 읍내에 도착할 때까지 마루와 여운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 후 여운이 자신을 대전으로 데려갈 국수방 요원의 차에 옮겨 타기 직전에야 마루가 여운의 손을 꽉 잡았다. “기다리고 있어.” 마루가 여운을 향해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데리러 갈게. 금방.” 마루가 여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운은 눈물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이 국수방 요원의 차에 옮겨 타자 마루가 문을 닫아 주었다. 마루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여운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요원을 바라봤다. “잘 부탁한다. 도착하면 알려 줘.” “알았어. 걱정 마.” “만약 윗선에서 알게 되면 기여운은 내가 옮긴 걸로 할게.” “됐어, 인마. 까여도 같이 까이는 거야. 잘리기밖에 더하겠냐?” 요원의 말에 마루가 고마운 얼굴로 웃었다. “진짜 잘 부탁한다.” “걱정 마.” 요원이 운전석에 오르자 마루가 밖에서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여운이 창문을 내리자 마루가 여운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응?” “알았어요.” 마루가 여운의 얼굴을 쓰다듬은 후 차 천장을 탕탕하고 두드리자 요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여운은 고개를 돌려 마루를 바라봤다. 마루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마루는 바라보는 여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깐만요. 잠깐만 세워 주세요.” 여운이 다급하게 요원에게 부탁하자 요원이 차를 세웠다. 여운은 차에서 내려 마루에게 달려갔다. 마루가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여운을 바라봤다. 마루에게 달려간 여운은 마루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왜 그래?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마루가 여운의 등을 쓰다듬으며 애써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차마루 씨.” “응.” “다치지 말아요.” “걱정 마. 안 다쳐. 안 다칠게.” “절대, 절대 다치지 말아요.” “알았어. 절대 안 다칠게.” 마루가 약속했다. “차마루 씨.” “응.” “고마워요.” 여운이 마루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재빨리 돌아서서 요원이 기다리고 있는 차로 달려가 차에 올랐다. 여운을 태운 차가 마루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루는 멀어지는 차를 슬픈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여운이 멀어질수록 마루의 심장의 리듬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 여운을 태운 국수방 차가 고속도로를 접었을 때 휴대전화 화면에 메시지 톡 팝업창이 떴다. 정민이 시킨 대로 소리를 무음 처리 해 둔 덕분에 다행히 운전 중인 요원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뒤따라가고 있어. 마지막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가자고 해.≫ ≪알았어요.≫ 여운은 재빨리 답장을 한 후 휴대전화를 숨겼다. 한 시간 후 다시 정민으로부터 메시지 톡이 도착했다. ≪마지막 휴게소야.≫ ‘마지막 휴게소.’ ≪알았어요. 휴게소에서 만나요.≫ 여운은 운전 중인 요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원님, 휴게소가 나올까요?” “왜요?” 요원이 백미러로 여운을 쳐다봤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요.” “5분 후에 나와요. 잠깐 들를게요.” “고맙습니다.” 5분 후 요원이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여운이 차에서 내리자 요원도 내렸다. 요원은 화장실 앞까지 여운을 따라왔다. 여운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화장실이지? “네.” - 출구 쪽에 주유소가 있어. 그쪽으로 올 수 있겠어? “갈게요.” 여운은 화장실 안에서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폈다. 요원이 화장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여운이 초조한 얼굴로 요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갑자기 촤르르 하고 바닥에 동전 수십 개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요원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여운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장실에서 나와 정민이 말한 주차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운이 정신없이 주차장을 향해 달려가는데 자동차 한 대가 여운을 향해 달려오더니 급정거했다. “여운아, 타!” 차 안에서 정민이 소리쳤고 여운은 저 멀리 요원이 있던 화장실 쪽을 살피며 허겁지겁 자동차에 올랐다. 여운을 태운 차가 급하게 휴게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운아, 휴대폰 꺼.” 정민의 말에 여운이 정민을 쳐다봤다. “휴대폰 꺼야 해요?” “차마루가 추적할 거야. 그러니까 꺼.” 정민의 말에 망설이던 여운은 휴대전화마저 꺼 버렸다. 요원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여운을 태운 정민의 차가 휴게소를 완전히 벗어나 최고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요원이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화장실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운은 그곳에 없었다. 여운이 사라졌다는 것을 차연화 국장에게 알리고 차로 돌아온 요원은 자동차 바퀴 네 개가 완전히 훼손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민이 여운을 데리고 휴게소를 떠난 지 20분 후, 여운과 정민은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자동차를 바꿔 탔다. 정민은 자동차를 바꿔 탄 후 여운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 휴대전화 벨 소리에 어쩐지 불길함을 느낀 마루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운을 데리고 대전으로 떠났던 국수방 요원의 전화였다. - 기여운이 사라졌어. “그게 무슨 말이야? 기여운이 사라졌다니?” 요원에게서 여운을 휴게소에서 놓쳐 버린 경위를 설명 들은 마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릿속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원은 여운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휴게소에 들렀고, 여운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지만 그 후로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요원의 말로는 납치가 아니라고 했다. 어떤 납치의 징후도 없었다고 했다. 납치가 아니라면 스스로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여운이가 사라졌다니.’ 마루는 여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ARS음이 들려올 뿐이었다. “휴대폰을 껐다는 건…….” 여운이 스스로 사라졌고 휴대전화까지 껐다는 건 의도적으로 도망쳤다는 말과 같았다. ‘여운이가 왜 도망을 쳤지? 대체 왜?’ 도저히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루는 급히 차연화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7요원입니다, 국장님. 기여운이…….” - 보고받았습니다. 휴게소 CCTV 보고 있는 중입니다. 벙커로 내려가요. 화면 전송할 테니. 마루는 차연화의 지시대로 곧바로 벙커로 내려가 국수방에서 전송한 휴게소 CCTV 화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휴게소 화장실로 들어가는 여운이 보였다. 화장실 앞을 지키는 요원도 보였다.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바닥에 뭔가를 흘리는 것이 보였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보였다. 바닥에 흘린 뭔가는 요원이 말한 동전인 것 같았다. 그때 요원의 고개가 동전 흘린 쪽으로 돌아갔고, 그 순간 여운이 화장실에서 나와 요원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마루는 남자가 동전을 흘리기 전부터 동전을 흘리던 순간 여운이 화장실을 빠져나오는 장면까지 여러 번 돌려본 끝에 여운이 화장실 안에서 조심스럽게 바깥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운이가 도망친 거야.’ 국수방에서 전송한 다른 화면이 도착했다. 새롭게 전송받은 화면을 켜자 주유소 앞에서 낯선 자동차에 오르는 여운이 보였다. 안타깝게도 운전자는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여운을 태운 차는 곧바로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누굴까. 여운일 차에 태운 놈이 누굴까.’ 마루는 재빨리 이정민의 집을 비추는 감시 카메라 화면을 모니터에 띄웠다. 시간별로 녹화된 화면을 돌려 봤지만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이정민이 아니라는 건가? 이정민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기여운이 누구와 사라진 거지?’ 마루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 팀장이었다. - 어떻게 된 거냐? 기여운이 왜 사라져?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영상 봐서 알겠지만 기여운이 스스로 도망친 거야. “……” - 기여운이 사라질 거라는 거 전혀 눈치 못 챘어? “눈치 못 챘습니다. 전혀.”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는 거야? “없었습니다.” -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 이정민 집 감시 카메라 확인했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24시간 전까지 확인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 그럼 이정민이 아니란 말이야? “…….” - 휴게소에서 동전 흘린 놈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추적하고 있다. 현재 위치 파악돼서 검거팀 급파했어. 몇 시간 내로 검거할 거야. “기여운이 탄 차는요?” - 번호판을 추적 중인데 그게 좀 이상하다. “이상하다니요?” - 조회가 안 되는 대포 차야.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증발했다. “증발…… 했다니요?” - 감쪽같이…… 사라졌어. 오 팀장의 말에 마루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 “팀장님, 이정민 집에 가 보겠습니다.” -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며. “감시 카메라에는 움직임이 없지만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 혼자서는 위험해. 요원들을 보낼 테니까 요원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오 팀장은 요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마루는 기다리지 못하고 홀몸으로 이정민의 집을 덮쳤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정민은 놀랍도록 완벽하게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감시 카메라가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정민의 차는 그대로였다. 이정민은 국수방의 의심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국수방에서 파악하고 있던 이정민의 차가 아닌 다른 차로 이동했고, 국수방은 그것을 놓쳐 버린 것이다. 여운이 사라졌는데 이정민마저 사라졌다면 여운을 납치했거나 혹은 동행하고 있는 사람이 이정민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왜? 여운이 왜 이정민과 함께 사라진 거지?’ 마루는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여운은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운은 이정민을 두려워했었다. 그랬던 여운이 이정민과 함께 사라졌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마루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기여운도 결국…… 간첩이었던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마루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루는 깨달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지금은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여운을 찾아야 할 때라는 걸. 마루는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며 오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정민이…… 사라졌습니다.” 마루가 참담한 어조로 오 팀장에게 보고했다. - 그럼 이정민이 기여운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거야?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이정민이 기여운하고 접촉하는 걸 몰랐어?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 죄송합니다.” 국수방의 요원들이 이정민 집에 도착해 대대적인 조사와 감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운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조사해 이정민과 통화한 기록을 찾아냈다. 메시지 톡을 주고받은 것도 알아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휴게소에서 여운을 태우고 유유히 사라진 사람은 이정민이라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비추는 모든 CCTV를 샅샅이 뒤졌지만 휴게소를 떠날 때 포착된 이정민의 자동차는 발견되지 않았다. 국수방은 전국의 모든 톨게이트 CCTV까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국 모든 공항에 이정민과 여운의 사진을 배포해 위험 인물임을 알리고 출국을 금지시켰다. 마루는 여운의 방을 발칵 뒤집어엎으며 뒤졌다. 여운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 빠짐없이 다 살펴봤다. 하지만 여운의 물건에서도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루가 여운이 남김 편지를 발견한 것은 여운이 사라지고 다섯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여운의 편지는 싱크대 서랍장에 들어 있었다. 【차마루 씨. 이 편지를 읽을 때쯤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맞아요. 난 이정민 씨하고 떠나요.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하지만 나로선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모든 것을 다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미국에 이모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정민 씨와 내가 사촌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이정민 씨가 알려 줬어요. 우리 엄마에 대해서. 우리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차마루 씨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국수방 요원이니까. 이정민 씨한테 다 들었어요. 우리 엄마가 탈북민이었다는 거. 탈북하면서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조총련계 사람들과 접촉하다가 국수방의 의심을 받게 됐고, 그러다가 간첩을 잡기 위한 작전 중에 우리 엄마까지 사살됐다는 거. 국수방에서는 실수를 감추려고 우리 엄마한테 간첩 누명을 씌워 사건을 종결했다는 것까지 다 알게 됐어요. 이정민 씨가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겠죠?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겠죠? 이정민의 거짓말에 내가 속은 거라고 생각하겠죠? 아니에요. 난 속지 않았어요. 이정민 씨가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줬어요. 우리 엄마의 사진이에요. 북한에 살았을 때 사진. 그리고 우리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의 사진을 보여 줬어요. 죽은 오빠와 아빠의 사진도 보여 줬어요. 이정민 씨가 내 사촌이 아니라면 그 사진들을 갖고 있을 리가 없어요. 차마루 씨도 국수방에서 우리 엄마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우리 엄마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거 알고 있었나요? 국수방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는 거죠? 우리 엄마를 실수로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간첩 누명까지 씌웠던 것을 우리 엄마의 조카인 이정민 씨가 폭로할까 봐, 그래서 국수방의 실수가 들통날까 봐 그걸 감추기 위해 이정민 씨한테까지 간첩 누명을 씌웠던 거죠? 국수방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만 간첩이 아니었어요! 그저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이정민 씨도 간첩이 아니에요. 이정민 씨는 우리 엄마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주고 사촌인 나를 찾으려고 애를 썼을 뿐이에요. 난 이모를 만나러 가요. 내 혈육을 만나러 떠나요. 난 차마루 씨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라고 믿어요. 차마루 씨도 오래전 국수방이 은폐한 끔찍한 사건을 몰랐을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차마루 씨도 나처럼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차마루 씨한테만큼은 편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차마루 씨한테만큼은 내가 왜 떠나는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차마루 씨는 날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차마루 씨. 사랑해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에야 알았어요. 내가 차마루 씨를 사랑한다는 걸요. 날 사랑한다고 말했었죠?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 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내가 차마루 씨를 사랑하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어요. 그래서 난 차마루 씨 곁에 있을 수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부탁할게요. 제발 찾지 말아 줘요. 나를 잊어 줘요. 제발 잊어 줘요. 그리고 내가 무사히 이모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진심으로 부탁할게요.】 여운의 편지를 다 읽은 마루는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정민이 어떤 거짓말로 여운을 속였는지 알게 되자 눈앞이 캄캄해졌기 때문이다. 이정민은 여운의 가장 약하고 아픈 부분을 파고들어 여운의 판단력을 흐리고 여운의 감정과 이성을 완전히 지배해 버린 것이다. “여운아…….” 안타까운 목소리로 여운의 이름을 부르던 마루는 여운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며 정신을 차렸다. ‘여운일 구해야 해!’ 마루는 곧바로 여운의 편지를 국수방으로 전송했다. 이정민이 여운을 납치한 것이 확실해지자 국수방은 초비상 상태로 움직였다. 여운이 사라지고 여섯 시간 만에 휴게소에서 요원의 시선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동전을 흘렸던 놈을 검거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놈이 국수방 요원들에게 검거되던 순간 몸에 품고 있던 독극물 알약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놈이 목숨을 끊는 바람에 이정민이 어디로 향하는지, 여운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정민의 차가 고속도로 쉼터에서 발견된 것은 여운이 사라지고 열 시간 후였다. 쉼터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톨게이트 CCTV에서도 이정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정민이 어떤 차로 갈아탔는지, 어디로 향했는지 추정할 수가 없었다. 여운이 사라지고 꼬박 24시간이 지나 버렸다. 24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여운이 살아 있을 확률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여운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었다. 국수방과 마루가 이정민과 여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던 그때, 여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결적정인 전화 한 통이 마루의 휴대전화로 걸려 왔다. 새벽 2시였다. 새벽 2시에 전화라니! 발신자는 이연우였다. “여보세요?” - 이연웁니다. 기억하지요? 기억하다마다. 하지만 지금은 이연우의 전화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여운이 사라진 마당에 게다가 비상 상황인 새벽 2시에 연우의 전화는 상황 파악 못 하는 엉뚱하고 귀찮은 전화일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통화하기 곤란하니까 나중에 통화합시다.” 마루는 전화를 끊어 버리려고 했다. - 잠깐만요! 여운 씨 일입니다! 연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라고요?” 마루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운이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여운 씨가 와 이 시간에 이정민하고 대구에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까? “대구라고? 여운이가 지금 대구에 있다고?” - 모릅니까? 우째 모릅니까. 여운 씨하고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여운 씨하고 헤어진 깁니까? “이연우 씨. 지금 어딥니까? 지금 어디예요?” 마루가 소리쳐 물었다. - 대굽니다. 와 그랍니까? “여운이가 맞아요? 틀림없이 여운이에요?” - 맞다니까요. 순찰 중에 신호에 걸맀는데 우연히 옆으로 고개를 돌맀는데 옆 차선에 여운 씨가 있더라고요. 이정민이 운전하고. 창문을 내려서 부르려고 했는데 신호가 바뀌서 못 불렀어요. 하도 이상해서 여운 씨한테 전화를 했거든요. 그런데 휴대폰이 꺼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차마루 씨한테 전화한 깁니다. “대구 어느 동입니까?” - ○○동인데 지금 이동 중입니다. 와 그라는데요? 뭐가 잘못된 깁니까? “여운이 놓쳤습니까?” - 아입니다. 뭔가 수상해서 지금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차 번호 보여요?” - 보여요. 연우가 차 번호를 알려 주자 마루가 재빨리 메모했다. “이연우 씨, 내 말 잘 들어요. 미행하는 것을 들키지 말고 여운이 계속 뒤쫓아요.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절대 놓치지 말고 뒤쫓아요. 들키면 안 됩니다. 명심해요. 들켜서도 놓쳐서도 안 됩니다!” - 무슨 일입니까? 뭐가 잘못된 깁니까? 무슨 일인지 말을 좀 하소! 연우가 답답해서 소리쳤다. “먼저 약속해요. 여운이 놓치지 않겠다고!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마루가 소리쳤다. - 들키면…… 우째 되는데요? “들키면, 여운이도 당신도 위험합니다.” - 그기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하소! 연우도 버럭 소리쳤다. “여운이…… 납치됐습니다.” - 납치? “납치범은……, 이정민은 간첩입니다!” * 연우의 결정적인 제보로 국수방에는 이정민 검거와 동시에 여운을 구하기 위해 작전이 즉시 시작됐다. 마루는 물론이고 대구에 상주 중인 국수방 요원들과 대구 인근에 있던 국수방 요원들이 일제히 대구로 집결했다. 연우가 마루와 국수방 요원들을 기다린 장소는 대구 외곽의 공장지대였다. 연우는 마루의 부탁대로 경찰차 경광등을 끄고 끝까지 이정민의 차를 뒤쫓아 온 것이다. “저 건물입니다.” 연우가 공장 건물을 가리켰다. “틀림없습니까?” “틀림없습니다.” 연우가 긴장된 얼굴로 대답했다. 국수방 요원들은 MP5 기관단총으로 중무장을 한 상태로 외부인이 현장 주변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통제한 후 건물을 완전히 에워쌌다. 연우는 복장과 장비부터 남다른 요원들과 마루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간첩이라니요? 이정민이 간첩이란 말입니까?” “이연우 씨, 정말 고맙습니다. 나중에 모든 것을 다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당장 철수하세요. 작전이 시작되면 이연우 씨도 위험해집니다.” “철수하라고요? 여운 씨가 간첩한테 납치를 당했는데 철수하라고요? 나도 경찰입니다. 경찰이 어떻게 납치 사건이 일어났는데 철수를 한단 말입니까? 절대 못 합니다. 절대로!” 연우가 물러서지 않았다. “이연우 순경.” “차마루 씨 정체가 뭡니까? 저 사람들, 전부 다 정체가 뭡니까?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 당신들이 누구든 난 절대로 못 갑니다.” 연우가 강경하게 버티자 마루는 어쩔 수 없이 신분증을 꺼내 연우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국가수호방위국 비밀 요원입니다. 이곳은 국수방이 통제합니다. 이연우 순경은 국수방의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지금 당장 철수하세요.” “국가수호방위국.” 연우는 국가수호방위국이 어떤 기관인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얼마나 비밀스러운 기관인지 알고 있었다. 국수방의 작전에 끼어들어서도 안 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국수방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운이 간첩 이정민과 함께 있는 이상,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절대 물러설 수가 없었다. “못 갑니다. 여운 씨 무사한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 못 갑니다. 나도 경찰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못 갑니다.” 연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버티자 마루는 난감한 얼굴로 연우를 쳐다보다가 작전 차량에서 방탄복을 꺼내 연우에게 건넸다. “기여운은 내가 살려서 데리고 나올 테니 이연우 순경은 주변을 통제하세요.” 마루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한 얼굴로 방탄복을 껴입었다. “7요원입니다. 작전 준비됐습니다.” 마루가 이어폰으로 보고했다. - 차연화 국장입니다. 이정민 사살 허락합니다. 단! 인질은 반드시 생존시키세요! 반복합니다. 이정민 사살 허락합니다. 인질은 반드시 생존시키세요. 차연화가 강력한 어조로 지시했다. 마루가 요원들을 향해 수신호를 하자 무장한 요원들이 마루의 수신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작전 시작! 5, 4, 3, 2, 1.” 마루의 신호에 따라 요원들이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하기 시작했다. * 여운은 몹시 지친 얼굴로 어수선한 공장 사무실을 둘러봤다.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공장인 듯 사무실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고, 책상과 의자들도 아무렇게나 틀어져 있거나 넘어져 있었다. 사무실 한쪽 모퉁이에 문짝이 떨어져 나간 공간이 있었는데 화장실인지 창고인지 혹은 또 다른 사무실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여운은 24시간 동안 세 도시를 옮겨 다녀야 했다. 옮겨 다닌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 것이지만, 여운은 공장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자신이 끌려 다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휴게소에서 아슬아슬하게 요원의 눈을 피해 이정민의 차에 오른 여운은 고속도로 쉼터에서 다른 자동차로 갈아탄 후 구미로 향했다가 구미에서 다시 울산으로, 울산에서 또다시 대구로 이동했다. 잠깐씩 머문 도시 어느 장소에서 이정민을 기다리던 낯선 사람들과 만났고, 그곳에서 매번 자동차를 바꿔 탔으며, 낯선 사람들이 미리 준비한 음식으로 차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정민은 도시를 옮기는 것도 자동차를 바꿔 타는 것도 모두 국수방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함이라는 말로 여운을 설득했고, 여운은 정민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정민은 만약 이대로 국수방에 붙잡히면 영원히 미국에 있는 이모를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며, 뿐만 아니라 간첩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겁도 줬다. 정민은 국수방에서 전국 모든 공항에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고 그래서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이용해 한국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정민은 걱정할 것 없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고 그래서 무사히 한국으로 빠져나가 미국으로 데려갈 거라고, 반드시 이모를 만나게 해 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약속하며 안심시켰다. 그래서 여운은 정민의 말을 자세히 따져 보지 않았다. 그럴듯하게 들렸기에 정민의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심도 반발도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던 국수방에 대해 정민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정민이 움직이는 대로 군소리 없이 따랐다. 그런데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공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동하는 도시마다 차를 바꿔 탔었다. 그래야만 국수방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다고 말했었다. 울산에서 마지막으로 차를 바꿔 탔을 때는 이제 안심해도 될 만큼 안전하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인근에 인가도 없고 인적도 없는 이토록 외진 곳에 버려진 공장에 숨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민이 그랬었다, 공항에 수배령이 내려졌을 것이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하지만 대구에서는 배를 탈 수가 없었다. 배를 타려면 부산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왜 대구로 온 것일까? 그때 정민이 아주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정민은 짐 가방을 먼지가 뿌옇게 쌓인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배로…… 떠난다고 했죠?” 여운은 자신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힐끗 정민이 여운을 쳐다봤을 뿐 대답은 없었다. “배는 어디서 타요?” 여운이 물었지만 정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쯤 한국을 떠나나요?” 여운이 다시 물었다. “오늘.” 정민이 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오늘?’ 정민의 음성은 너무나 건조해서 서늘하기까지 했고, 여운은 정민의 태도와 목소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 밤에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거예요?” “맞아. 오늘 완전히 떠나.” 정민이 여운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저럴까…….’ 여운이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짐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책상 위로 꺼내놓은 정민을 유심히 쳐다봤다.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화채 만들던 날 집에 왔던 여자분요. 그 여자분…… 간첩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국수방에서 조작한 거예요?” “글쎄.” “글쎄…… 라니요?” 여운이 물었지만 정민은 어깨를 으쓱할 뿐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상해……. 달라졌어. 표정도, 눈빛도……, 목소리도.’ “저 실은, 도청기 알고 있어요. 차마루 씨 집에서 술 마시던 날…… 차마루 씨 집에 도청기 숨겼었죠?” 여운의 말에 정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도청기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도청기 같은 거 일반 사람들도 구입하거나 쓸 수 있는 거예요?” 여운이 묻자 정민이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듯 픽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너무나 섬뜩하게 느껴졌다. * 그때 여운과 정민이 있는 사무실 좌측 창문 밖으로 국수방 요원들이 도착했다. 국수방 요원은 불이 켜진 사무실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국수방 요원은 다른 요원들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낸 후 재빨리 무전 보고를 했다. “용의자와 인질 위치 파악됐습니다. 인질 생존. 공장 가장 안쪽 우측 사무실입니다.” 여운이 살아 있다는 요원의 보고에 마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사살 가능한가? 이어폰으로 차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도하겠습니다.” 요원이 창밖에서 MP5 기관단총을 이정민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사정거리 안에 여운의 몸이 겹쳐져 사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살이 불가능합니다. 인질이 위험해집니다.” * “그…… 총은요?” 여운의 물음에 정민이 여운을 노려봤다. “총? 무슨 총?” “화채 만들던 날…… 뒤뜰 작업실에서 봤어요. 작업대 밑에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던 총. 그 총은 뭐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나 총을 가질 수가 없잖아요.” “이 총 말이야?” 정민이 짐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보여 주었다. “네, 그 총요…….” 여운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민이 갑자기 여운에게 총을 겨눴다. * “용의자가 인질을 향해 총구를 겨눴습니다. 다시 사살 시도하겠습니다.” 용의자 정민이 인질인 여운에게 총구를 겨누었다는 보고에 마루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불안함을 느꼈다.
여운은 정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요?” “왜 그럴까?” 정민이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장난치지 말아요.” “장난? 이게 장난이라고?” 정민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 빈총이었다. 여운이 경기를 하듯 움찔하자 정민이 킥킥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갑자기 왜……, 왜 그러는 거예요?” 공포에 질린 여운이 한발 뒷걸음치는데 정민이 악마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어 둔 채 한 알씩 총알을 채우기 시작했다. “널 낳은 네 엄마가 누군지 알려 줄까?” “이미…… 알려 줬잖아요.” 여운의 대답에 정민이 또 킥킥 낮게 웃었다. “네 엄마는 정화순이야. 국수방에서 만들어 준 이름은 윤소정. 남파 간첩이었지.” “엄마가…… 남파 간첩이었다구요? 엄마는 탈북민이라고 했잖아요.” “네가 속은 거야. 멍청하게.” 정민이 재밌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사악해서 소름이 끼치고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날 속이기 위해 거짓말한 거였어요? 나와 사촌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여운이 경악한 얼굴로 묻자 정민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나 멍청할 수 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정말 믿을 줄은 몰랐어.” “말도 안 돼……. 사진은요? 우리 엄마 사진, 우리 가족사진도 보여 줬잖아요.” “정화순의 어릴 적 사진은 내 조국에서 내가 직접 가져왔고, 나머지 사진들은 위대한 나의 동지들이 변절자인 네 엄마를 처단할 때 네 집에서 가져온 거야. 내 동지들은 변절자의 가족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나에게 물려줬어. 변절자는 물론이고 변절자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처단하라고.” “뭐, 뭐라구요?” “억울해할 것 없어. 네가 변절자 정화순의 딸로 태어난 죄니까.” 정민의 무시무시한 설명에 여운은 숨이 막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네 엄마 정화순은 조국을 배신한 변절자야.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로 온갖 혜택을 다 누렸으면서도 수령님을 배반하고 조국을 배반했어. 조국을 배신한 변절자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배반한 배신자들은! 절대 살려 둘 수 없어. 배신자들의 혈육도 절대 살려 둘 수 없어. 배신자들의 혈육까지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야.” 정민이 권총에 총알을 채우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여운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마루를 믿었어야 한다는 것을. ‘차마루 씨의 말을 믿었어야 했어……. 이정민이 아니라 끝까지 차마루 씨를 믿었어야 했어…….’ 깊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늦은 후회였다. ‘할머니들의 말이 맞았어. 눈이 이상하다던 할머니들의 말이……. 80년 사신 분들의 말을 새겨들었어야 하는 건데…….’ 소용없는 후회였지만 마루도 할머니들도 아닌 이정민을 믿어 버렸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여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변절자들과 변절자의 가족들도 모조리 죽여서 조국을 배신하면, 위대한 수령님을 배반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 변절자들에겐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을 조국의 인민들에게 알려 주는 게 나와 내 동지들의 임무야.” 정민이 탄창을 권총에 끼워 넣은 후 짐 가장에서 소음기를 꺼내더니 권총에 장착했다. “날 죽이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거였군요. 아무도 모르게 흔적 없이 죽이려고…….” 여운이 책상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리자 정민이 씨익 하고 악마를 영혼을 뒤집어쓴 미소를 흘렸다. “끌고 왔다? 천만에. 너 스스로 따라온 거야. 네 무덤을 찾아서.” 정민의 말이 맞았다. 여운 스스로 따라온 것이었다. 여운은 정민이 들고 온 짐 가방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알아차렸다. 자신의 시체가 담길 가방이었다. 그리고 언제 떠나냐는 여운의 질문에 정민은 오늘이라며 완전히 떠난다고 답했었다. 오늘, 완전히 떠난다는 말은 오늘, 여운이 죽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죽어서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난다는 뜻. 여운이 주변을 살폈다. 바로 앞에 허리 아래만 겨우 막아 줄 책상과 옆쪽에는 쓰러진 채 나뒹구는 의자밖에 없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맞서 싸울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구나…….’ 여운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왜 이렇게 됐는지, 왜 어쩌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와 버렸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이제 무의미했다.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방법만 있다면 살고 싶었다. 이렇게 살해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허황된 희망일 뿐이었다. 지금은 그 어디에도 여운을 살려 줄 굵은 동아줄 따위는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내 잘못이야……. 차마루 씨를 배신한 내 잘못이야. 이정민을 믿은 내 잘못이야…….’ 여운은 결국 체념했다. 체념을 하는 것 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체념하자 두려움에 떨던 가슴도 진정됐다. 격동하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엄마, 아빠, 오빠……, 이제 만나요. 곧.’ 여운은 담담한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정민의 얼굴과 입가에 걸린 싸늘한 미소와 인간다움이라고는 단 1퍼센트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봤다. “준비가 끝난 것 같군. 현명하군. 고마워, 시끄럽게 굴지 않아서.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거든.” 정민이 여운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 - 용의자 사살 불가. 용의자가 인질을 사살하려고 합니다. 요원들 진입하십시오! 요원의 다급한 무전이 전해지는 순간 요원들이 사무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마지막으로 할 얘기 같은 건 마음속으로 해. 유언 같은 거 들어 줄 만큼 한가하지 않거든.” 정민이 냉혈한 같은 말을 내뱉었고 여운은 총구가 자신의 머리에 향한 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빨리 끝날 거야. 고통 없이.’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랐다. ‘미안해요, 차마루 씨. 그리고…….’ 정민이 안전핀을 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아주 살짝 당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변절자 정화순의 마지막 남은 혈육까지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사랑해요…….’ 여운이 마음속으로 마루가 듣지 못할 사랑을 고백하고, 방아쇠에 걸린 정민의 손가락이 움직이던 그때였다. 사무실 안으로 무엇인가가 여기저기 뚝 떨어지며 굴러 들어오더니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막탄이었다. 소음에 여운이 눈을 번쩍 떴다. 뿌연 연기 사이로 긴장한 정민의 얼굴이 보였다. 이정민이 겨눈 총구는 여전히 여운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정민이 총구를 여운에게 겨눈 채 재빨리 걸음을 옮겨 사무실 문 쪽으로 갔다. 여운은 주변을 살폈다.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 사이로 소리가 들렸다. 정민의 귀에도, 여운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아주 낮고 작은 소리였지만 발자국 소리가 분명했다. 한 사람의 발자국이 아닌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 그때였다. 정민이 문밖으로 총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아주 이상했다. 소음기 때문인지 슝슝 바람을 가르는 듯, 아니 바람이 아주 작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이상한 소리였다. 그리고 별안간에 시끄러운 총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여운은 진공상태가 됐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전한 묵음 상태가 됐다. 여운은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것도 몰랐다. 연기 때문에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고, 이정민이 자신을 향해 쏜 총탄이 자신을 비켜 가며 벽에 박힌 것도 몰랐다. 이정민이 팔에 총을 맞은 것도 몰랐고, 총을 맞았음에도 짐 가방에서 다른 총을 꺼내 쏘기 시작한 것도 몰랐다. 바깥에 있던 요원들이 창문을 깨트린 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목이 매워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여운은 바닥을 기다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꽉 틀어잡았다. 그리고 정민을 쳐다봤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정민은 문 뒤에 숨은 채 바깥을 향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여운은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손에 무엇인가를 꽉 틀어잡고 몸을 일으켜 정민을 향해 달렸다. 정민이 문밖으로 총을 쏘면서 고개를 돌려 여운을 쳐다봤다. 바깥을 향해 있던 총구가 여운을 향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운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정민을 향해 휘둘렀다. 퍽! 쿠앙! 여운이 손에 쥔 무엇인가가 정민의 머리를 후려쳤다. 총알이 허공을 향해 발사되며 불꽃이 튀었다. 여운은 손에 들고 있던 무엇인가를 집어 던졌다. 그때서야 알았다. 손에 들고 정민의 머리를 향해 휘두른 것이 의자라는 것을. 바깥에서는 계속해서 총소리가 세상을 무너뜨릴 기세로 들려왔다. 밖으로 뛰어나가려던 여운은 문으로 날아와 박히며 불꽃을 터뜨리는 수십 발의 총탄에 놀라 뒷걸음치다가 사무실 모퉁이 문짝이 떨어져 나간 어두운 공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운은 벽에 등을 붙이며 주저앉아 버렸다. 몸이 떨렸다. 온몸이 떨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정민! 너는 포위됐다! 항복하라!” 고함 소리가 들렸다. “다시 말한다! 이정민!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투항하라!” 고함 소리와 함께 또다시 수십 발의 총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여운은 귀를 틀어막았다. 두려움과 공포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여운아! 여운아, 대답해!” 마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마루 씨가 왔어! 날 구하러 왔어. 날 구하러 온 거야!’ “여운아!” 틀림없이 마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루의 목소리는 이내 여운이 숨어 있는 공간을 향해 날아오는 총소리에 묻혀 버렸다.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댔지만 더 이상 자신이 숨어 있는 곳으로 총탄이 날아오지 않자 여운은 조심조심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정민을 살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뿌옇던 연기가 깨져 버린 창문으로 빠져나가면서 정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운이 휘두른 의자에 맞고 쓰러졌던 정민은 책상을 등지고 앉아 등 뒤에서 날아올 총알에 자신을 보호하며 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때 정민과 여운의 눈이 마주쳤다. 정민이 여운을 향해 총을 쐈고 여운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이정민! 투항하라!” 투항하라는 외침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운아, 여운아!” 마루의 목소리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이정민이 총을 겨누고 있어. 차마루 씨가 위험해.’ 여운이 다시 고개를 내밀어 이정민을 살피자 이정민이 문 뒤에 바짝 붙어선 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기여운! 기여운, 대답해!” 마루의 외침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여운이 고개를 내밀자 정민이 총구를 조준하는 것이 보였다. ‘안 돼. 안 돼! 차마루 씨가 위험해!’ 그때 여운의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붙이가 보였다. 둥글고 가운데가 뚫린 아주 큰 파이프처럼 생긴 축구공만 한 쇠붙이였다. 여운은 쇠붙이를 집어 들었다. 쇠붙이를 든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여운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이정민 항복하라!” “여운아! 여운아 대답해!” 마루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여운은 모퉁이 공간에서 뛰쳐나갔다. “안 돼요! 오지 말아요!”
여운이 악을 쓰며 손에 든 쇠붙이를 정민을 향해 던졌다. 총소리가 들렸다. 여운을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쇠붙이가 정민을 향해 날아갔다. 여운은 달렸다. 그냥 달렸다. 마루를 위해, 마루를 지키기 위해. 정민은 쇠붙이를 피하며 비틀거리다가 총을 떨어뜨렸다. “오지 말아요! 오지 말아요!” 여운이 문을 막아서며 소리 지르던 그때 마루가 문 앞에 도달했다. 여운과 마루의 눈이 마주쳤다.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앙! 여운의 머리가 얻어맞은 듯 급한 경사를 이루며 흔들렸다. 마루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여운아!” 마루가 악을 썼다. 쿠앙! 또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여운의 몸이 출렁였다. “안 돼!” 마루가 여운을 한 팔로 끌어안고 벽으로 밀어붙이며 정민을 향해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요원들의 총구도 일제히 정민을 향해 조준되며 수십 발이 발사됐다. 요원들이 총을 쏘며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살된 이정민의 시체 위로 수십 구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었다. 여운의 몸이 마루의 팔에서 빠져나가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마루가 여운을 단단히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여운의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구급대원! 구급대원!” 마루가 악을 썼다. “여운아, 여운아! 정신 차려! 눈 떠! 눈 떠!” 마루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여운의 머리를 꽉 눌러 움켜잡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여운아! 여운아!” 마루가 울부짖으며 소리쳤을 때 여운이 힘겹게 눈을 뜨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마루를 바라봤다. “차마루 씨…….” “나야. 나야, 여운아.”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여운이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안 다쳤어. 안 다쳤어.” 마루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됐어요……. 그럼 됐어요.” 다행이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짓던 여운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안 돼. 안 돼. 제발, 제발 여운아…….” “내가…… 다쳤나 봐요.” 여운이 고통스럽게 중얼거리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쳤어……. 날 구하려다가 네가 다쳤어.” 마루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다행이에요……, 차마루 씨가 아니라…… 나라서……. 차마루 씨를 구해서 다행이에요…….” “금방 병원으로 갈 거야. 조금만 참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여운아.” “차마루 씨…….” “응.” “……사랑해요.”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던 여운이 눈을 감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여운아. 눈 떠! 눈 감으면 안 돼! 제발, 제발, 여운아! 여운아!” 마루가 애끓는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소리쳤지만 여운은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 “예상했던 대로…… 기여운 씨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합니다.” 주치의의 말에 마루는 망연자실한 채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100일 만이었다, 여운이 깨어난 것이. 여운은 마루를 구하기 위해 마루에게로 향하던 이정민의 총탄 앞으로 온몸을 던졌었다. 여운의 머리에 총알이 박혀 버렸고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끝으로 여운은 혼수상태에 빠져 버렸다. 여운을 구하기 위한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 의사가 말했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기여운이 살아날 확률은 1프로도 되지 않는다고. 실제로 열다섯 시간이나 걸린 수술 도중 심정지가 왔다. 의사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운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이 두 번이나 여운을 덮쳤다. 하지만 여운은 또다시 기적적으로 이겨 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여운은 깨어나지 못했다. 모든 위기의 순간을 넘겼지만 시커먼 죽음의 그림자는 두 달이 지나도록 여운을 포박하고 있었다. * 너무나 캄캄한 밤이었다. 너무 캄캄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이 어디를 헤매는지도 모른 채 여운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저만치 불빛이 보였다. 여운은 불빛을 따라갔다. 불빛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보였다. 여자와 남자였다. 여운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운이 다가갔지만 여자와 남자는 여운을 의식하지 않았다. 뜨개질을 하던 여자가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낮은 신음을 흘리자 곁에서 종이비행기를 만들던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요 녀석이 오늘따라 쉬지 않고 걷어차네요.” “여보, 우리 이 녀석 축구 선수 시킬까?” “딸인데?” “여자 축구 선수도 있어.” “그럼, 그럴까요? 아…….” 여자가 낯을 찡그리며 또다시 신음을 흘리자 남자가 여자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요 녀석아, 엄마 힘들어. 우리 아기 착하지?” 그때 어린 사내아이가 두 사람에게 뛰어왔다. “아빠! 내 비행기 다 만들었어요?” “그럼! 우리 진운이 비행기 아빠가 다 만들었지!” 남자가 아이에게 종이비행기를 주자 아이가 행복한 듯 소리쳤다. “엄마! 내 비행기야!” “응, 우리 진운이 좋겠네.” 진운이라는 아이가 들고 있던 종이비행기를 힘차게 하늘로 날렸다.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여운에게로 날아와 발밑에 떨어졌다. 여운이 발밑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주워 드는데 아이가 달려왔다. 여운이 아이에게 종이비행기를 건네자 종이비행기를 받아 든 아이가 여운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안녕.” 아이가 여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녕…….” 여운도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여운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아?” 여운이 다시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 없이 여운에게 활짝 웃어 준 후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운이 아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는 순간 여운은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어느 집이었다. 낯선 어느 집. 여운이 당황한 얼굴로 집을 둘러보는데 조금 전, 임신한 몸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가 불안한 얼굴로 방에서 뛰어나와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봤다. 무엇을 본 것인지 서둘러 창문에서 물러선 여자는 초조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언니. 뭔가 이상해요.” - 이상하다니?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그들에게 들킨 것 같아요!” - 무슨 소리야? 들키다니? 그들이라니? “한 달 전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미행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밖에 있어요.” - 수상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에요. 고향 사람들.” - 고향 사람? 북한 사람이라는 거야? “맞아요. 그들이 왔어요. 그들이…… 날 찾아냈어요.” - 그럴 리 없어! “아뇨. 틀림없어요. 아, 어떻게 하죠? 지금 남편이 큰아이를 시댁에 데려다 놓으려고 갔는데 어떻게 하죠, 언니? 둘째가 사흘 전에 태어났어요. 지금 나하고 아기밖에 없어요. 우리 아기 어떻게 하죠?” -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어. 내가 지금 갈게! “날 죽이러 온 거예요.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배신했다고…… 배신자를 처단하러 온 거예요. 언니! 우리 아기, 우리 아기는 어떻게 하죠? 아기만은 살려야 하는데…….”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아무 일 없어! “제발 살려 주세요. 아직 젖도 못 물려 봤어요. 언니! 제발 우리 아기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 기다려. 내가 갈게. 지금 바로 갈게. 절대 문 열어 주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 절대! “제발, 제발 빨리 와 주세요!” 전화를 끊은 여자가 다시 한 번 창밖을 내다본 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운이 조심스럽게 여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겉싸개에 싸여 있던 아기를 가슴에 꽉 끌어안고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엄마가 너무너무 미안해, 우리 아기.” 아기를 안은 여자가 고통스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것만 기억해 줘. 엄마가 널 사랑한다는 거. 우리 아기를 엄마가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거.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거.” 그때 누군가 강제로 현관문을 열려는 소리가 들리자 여자가 긴장된 얼굴로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여운도 여자를 따라 밖으로 나갔을 때 밖에서 문을 열려는 듯 현관문이 덜컥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여운이 놀란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가 아기를 안고 뒤 베란다로 달려가 잡동사니들이 가득 쌓여 있는 곳 뒤쪽에 조심스럽게 아기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아기를 바라봤다. “깨어나지 말고 자야 해. 절대 깨면 안 돼. 우리 아기 푹 자거라.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울면 안 돼.” 여자가 애가 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우리 아기 사랑해. 사랑해, 우리 아기. 사랑해, 여운아.” 여자가 절절하게 흐느껴 울며 아가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여운아”라고. ‘여운이……!’ 여운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여자와 아기를 바라보는데 여자가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춘 후 서둘러 잡동사니들로 아기를 숨겼다. 여자가 베란다를 빠져나갔다. 여운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잡동사니 사이로 보이는 아기를 바라봤다. “저 아기가 여운이……. 나야……. 나였어. 내가 태어났을 때야…….” 여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운이……. 아까 그 아이는 우리 오빠였어…….” 여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저 사람은…… 엄마야. 엄마……. 우리 엄마. 엄마!” 여운이 엄마를 따라 달려 나갔다. 여운이 달려왔을 때 세 명의 남자들이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누구세요?” 여운이 물었지만 남자들은 여운이 보이지 않는 듯 돌아보지 않았다. “누구냐구요! 우리 엄마는요? 우리 엄마 어디 있어요!” 여운이 소리쳐 물었지만 남자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고갯짓으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남자들이 움직이던 바로 그때 엄마가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엄마. 목이 꺾인 채 죽어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 여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얼굴로 죽은 엄마를 내려다봤다. “안 돼……. 엄마, 엄마!” 여운이 애타게 엄마를 외쳐 불렀다. 여운은 남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우리 엄마 왜 죽였어요!” 여운이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남자들은 여운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남자들은 집 안을 뒤지더니 앨범을 찾아냈다. 남자들은 앨범에서 몇 장의 사진들을 뜯어냈다. 정민이 여운에게 보여 주었던 사진들이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여운이 소리쳤지만 사진을 확보한 남자들은 죽은 엄마를 내버려 두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엄마, 엄마!” 여운이 엄마 곁에 앉아 엄마를 외쳐 불렀다. 아무리 외쳐 불러도 엄마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엄마! 일어나요. 일어나요, 엄마!” 여운이 울부짖으며 엄마를 외쳐 부르는데 문이 열리며 차연화와 요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국장님!” 여운이 차연화를 불렀다. “우리 엄마예요! 남자들이, 남자들이 우리 엄마를 죽였어요! 우리 엄마 좀 살려 주세요!” 여운이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차연화는 여운이 보이지 않는 듯 여운을 지나쳐 엄마에게 다가가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소정아……. 소정아.” 차연화가 멍하게 정신을 잃은 듯한 얼굴로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소정아, 소정아……. 어떻게 이럴 수가…….” 차연화가 여운의 엄마 윤소정의 몸을 살펴봤다. “방어하지 않았어.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았어. 왜 그랬어? 왜 맞서지 않은 거야? 왜 맞서지 않고 당한 거야?” 차연화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그랬어? 소정아, 왜 그랬어! 내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맞섰어야지! 왜 맞서지 않고 당한 거야!” 차연화가 원망스럽게 소리치던 그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기 울음소리에 차연화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일어나 뒤 베란다로 달려갔다. 베란다로 달려온 차연화는 잡동사니들을 헤치고 아기를, 여운을 발견했다. 차연화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 때문이었구나…….” 차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기를 살리려고……, 아기를 살리려고 순순히 목숨을 버린 거구나……. 아기를 지키려고……. 미안하다, 소정아……. 미안해…….” 차연화가 아기를 끌어안고 서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우리 엄마가 날 살리려고……, 나를 지키려고……. 안 돼. 안 돼, 엄마! 엄마!” 여운이 엄마를 외쳐 부르며 달려 나왔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낯선 남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엄마도, 요원들도,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사라졌어…….” 여운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베란다로 달려갔다. “차연화 국장님! 엄마가 없어졌어요! 엄마가 사라졌다구요!” 여운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그곳에도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아기 여운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던 차연화도 아기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여운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운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여운이 고개를 돌리자 엄마가 방문 앞에서 웃는 얼굴로 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해? 안 잘 거야? 어서 와. 엄마하고 자자.” 엄마가 손짓을 하며 여운을 불렀다. “엄마.” “응.” “엄마, 괜찮아?” “무슨 소리야? 괜찮지, 그럼. 어서 와. 자자.” 엄마가 여운에게 다가와 여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갔다. 방에는 침대가 있었다. 여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침대를 바라보는데 엄마가 여운을 침대에 눕히고 여운의 곁에 누웠다. “이리 와.” 엄마가 팔을 벌렸다. “우리 딸, 엄마하고 꼭 껴안고 자고 싶다고 했었지?” “…….” 여운이 놀란 듯 멍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자 엄마가 여운을 보며 활짝 웃었다. “잊어버렸어? 여운이가 그랬잖아. 꼭 한 사람, 꼭 한 시간만 만날 수 있다면 엄마 품에 안겨서 자고 싶다고.” “맞아요. 그랬었어요.” “그러니까 엄마하고 꼭 껴안고 자자. 엄마가 안고 재워 줄게. 이리 와.” 엄마가 팔을 활짝 벌려 가슴을 열어 주었고 여운은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품에 안겨들었다. 엄마는 흐느껴 우는 여운은 꼭 껴안아 주었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여운이 흐느끼며 속삭이자 엄마가 여운의 얼굴에 입을 맞춰주었다. “우리 아기……, 엄마도 보고 싶었어. 그리고 늘 보고 있었어.” “보고 있었어요?” “그럼. 엄마가 늘 지켜보고 있었어. 우리 딸 여운이, 잘 참았어. 참아 줘서 고마워.”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여운이 엄마 품에 더욱 꼭 안겨들었다. “이젠…… 안 떠날 거죠? 이제 우리 헤어지는 거 아니죠?” 여운의 물음에 엄마가 밝게 웃었다. “우리 아기, 얼른 자. 얼른…….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엄마가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불러 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여운은 엄마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자장가를 들으며 여운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여운아. 여운아?” 누군가 여운을 깨우기 시작했다. “여운아, 여운아? 일어날 시간이야. 잠꾸러기, 기여운! 어서 일어나세요!” 친근한 목소리에 여운이 눈을 뜨고 바라보자 아빠가 여운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아빠?” “이 녀석, 어서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빠…… 아빠 맞죠?” “그럼 아빠지. 우리 여운이 아빠. 어서 일어나세요, 우리 공주님.” 아빠가 여운을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빠.” 여운이 반가움에 아빠를 와락 껴안았다. “아빠…….” “이 녀석이 또 이러네. 알았으니까 어서 준비해. 서둘러야 해.” “아빠, 엄마는요?” 여운이 묻는데 문이 열렸다. “여운이 일어났니?” 엄마가 방문 앞에서 물었다. “엄마!” “늦겠다. 빨리 준비해.”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진운이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 여운이 오빠를 향해 반갑게 소리쳤다. “기여운, 너 그러다 지각한다. 빨리 가자. 빨리.” 진운이 여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오빠.” “왜?” “오빠 보고 싶었어.” 여운의 말에 진운이 여운을 향해 씩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운아.”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여운이 고개를 돌리자 아빠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지금 가야 해. 어서 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으로 향하던 여운이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 기다리고 있을 거죠?” 여운의 물음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여운은 고개를 돌려 엄마와 오빠를 바라봤다. “엄마랑 오빠도 나 기다리고 있을 거죠?” 여운의 물음에 엄마와 오빠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올게요.” 이번에도 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엄마가 여운을 불렀다. “여운아.” 여운이 돌아보자 엄마가 여운에게 다가왔다. “우리 아기 사랑해.” 엄마가 여운을 꼭 껴안으며 말했고 여운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은 가슴이 온통 행복으로 가득 채워진 것을 느끼며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여운이 돌아보자 아빠와 엄마 오빠가 활짝 웃는 얼굴로 여운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운도 가족에게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여운은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던 그때 여운이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아주 낯선 사람. 낯선 사람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여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운아.” 그 사람이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여운아, 일어났어?” 여운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낯선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운아, 나…… 보여?” “…….” 여운은 낯선 사람의 물음에 불편함을 느꼈다. 누굴까. 누군데 나한테 말을 거는 것일까. 여운은 누구의 이름일까. “여운아?” “……누구세요?” 여운이 속삭이듯 물었다. “여운아…….” “누구, 누구세요?” 여운의 물음에 낯선 사람의 얼굴이 무겁게 일그러졌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누구, 누구……세요?” 낯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필로그 1 “기억이…… 돌아올까요?” 마루의 물음에 주치의가 비관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 기능이 완전히 손상됐어요.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여운 씨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주치의의 말대로 여운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졌다. 여운이 바라던 대로 된 것이다. 여운이 말했었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감쪽같이 다 지울 수 있다면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지워 버리고 싶다고. 그만큼 여운은 자신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기억들을 모두 지우고 싶어 했었다. 여운이 바라던 대로 여운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픈 기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그리고 차마루라는 사람도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새롭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억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5분 전에 했던 말들, 하루 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절망적인 의사의 말에 마루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여운일…… 만날 수 있습니까?” 마루의 물음에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환자가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중입니다. 깨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왜 병원에 있는지, 어떻게 다쳤는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기억을 못 하는 상황이라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마루가 병실에 들어섰다. 여운이 깨어나고 두 달 만이었다. 두 달 만에야 마루는 여운을 다시 만난 것이다. 짐을 꾸리던 여운이 고개를 돌려 마루를 쳐다봤다. 여전히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무의미한 눈빛이었다. “누구…… 세요?” 여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운 씨 깨어나던 날 만났었는데…… 기억 안 나요?” 마루의 말에 잠깐 생각하던 여운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기억을 못 하겠어요.” 여운이 몹시도 미안해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마루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가슴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절 만나러 오셨나요?” “예.” “어쩌죠? 곧 퇴원하는데……. 복지 센터에서 누가 오기로 했거든요.” 여운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알아요. 오기로 한 사람이 나예요.” “그래요? 복지 센터에서 온 분이세요?” “……예, 맞아요.” 차연화 국장은 여운이 상처를 회복하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복지 센터에서 나온 사람들로 위장하라고 지시했었기에 마루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운 씨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왔어요.” “아……, 감사해요. 짐 다 쌌어요. 짐도 별로 없지만.” 여운이 작은 가방을 손에 들었다. “우리 갈까요?” “네.” 마루를 따라나서던 여운이 걸음을 멈췄다. “저기요.” “왜요?” “저…… 혹시 우리 집이 어딘지 아세요? 제가…… 모르거든요.” 여운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알아요. 내가 알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여운이 다행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내가 사고로 머리를 다쳤대요…….” 여운이 머리를 가리켰다. “여길 다쳐서…… 기억력이 안 좋아졌어요.” “네, 알아요.” “실은 안 좋아진 게 아니라…….” 여운이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해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여운이 또다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갈까요.” “네.” 여운은 무려 5개월 만에야 병원을 나와 마루의 차에 올랐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여운은 그저 낯설게만 느껴지는 도심의 전경을 약간은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여운에겐 온통 낯선 것들뿐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여운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오자 마루가 여운을 바라봤다. 여운의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운은 초조한 듯 팔로 몸을 감싸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더 이상 창밖도 바라보지 않았다. 마루는 그런 여운이 너무나 안쓰러워 소리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마루는 여운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국수방에서 마련해 준 오피스텔로 여운을 데리고 왔다. 여운은 낯선 오피스텔 안을 어색한 표정으로 둘러봤다. 모든 살림들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세트장처럼 더없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여운은 어느 것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기에 남의 집에 온 듯 두렵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마루는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해하는 여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불편해요?” “그냥……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천천히 적응하면 돼요.” 마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하라는 듯 말하자 여운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말…… 여기 살았었나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머리가 많이 고장 났나 봐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여운이 서글픈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여운 씨. 지금부터 하나씩 다시 기억하면 돼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그러면 될까요?” 여운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물었고, 마루는 당장 안아 주고 싶지만 안아 줄 수 없다는 것에 큰 아픔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은 다시 한 번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침대가 보였다. 심플하고 튼튼하고 아주 커다란 침대였다. 침대에는 깨끗하고 포근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침대 옆에는 아주 멋진 스탠드도 있었다. 침대 맞은편에는 서랍장과 화장대가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도 놓여 있었다. 여운은 화장대 앞으로 가서 화장품에 손을 뻗다가 놀란 듯 얼른 손을 움츠렸다.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운은 화장대에서 물러서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이 보였다. 냉장고, 싱크대, 그릇들 그리고 식탁. 식탁 위에는 작고 사랑스러운 화분이 놓여 있었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책장이 있었다. 책장은 아주 여러 개였고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책도 다 내 책이에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책을 많이 읽었나요?” “맞아요. 여운 씨 책 많이 읽었어요. 책을 많이 읽어서 아주 재치 있고 똑똑한 사람이에요.” 마루의 칭찬에 여운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한참이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보던 여운이 뭔가 생각난 듯 마루를 쳐다봤다. “복지 센터에서 나오셨다고 했죠?” “예.” “그런데 내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요? 혹시…… 우리가 알던 사인가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아는 사이였군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우린…… 친구예요. 친구.” 마루가 말했고 여운은 친구라는 단어를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친했나요?” 여운이 다시 물었고 마루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했어요, 아주 많이.” “그랬군요……. 미안해요, 내가 기억을 못 해서.” “아니, 괜찮아요. 내가 기억하니까. 내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다가 책 한 권을 꺼내 드는데 갑자기 극심한 두통을 느껴 책을 떨어뜨리고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왜 그래요? 머리 아파요?” 여운을 지켜보고 있던 마루가 깜짝 놀라며 여운에게 다가왔다. “많이 아파요?” “후유증 때문에 그렇대요. 머리를 다쳐서…….” 머리를 감싸 쥔 여운이 가늘게 몸까지 떨면서 괴로워하자 마루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여운의 몸을 부축했다. “앉아야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약 먹어야 해요. 약이 가방에 있는데…….” “앉아요. 내가 줄게요. 어서 앉아요.” 마루는 여운을 침대에 앉힌 후 여운의 가방에서 약을 찾아 꺼냈다. 마루가 재빨리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온 후 여운에게 약과 생수를 건네자 여운이 떨리는 손으로 겨우 약을 먹은 후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고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해 줄까요? 어떻게 하면 돼요?” 마루가 애가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요. 조금만 있으면…….” 여운이 통증을 참으려고 애를 쓰며 중얼거렸다. “여운아.”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여운아”라고 불렀다가 움찔했다. 여운은 두통 때문에 마루가 그렇게 부른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운 씨, 좀 누워요. 어서 누워요.” 마루가 이불을 걷어 주자 여운이 온몸을 움츠린 채 침대에 누웠다. 마루는 이불을 덮어 준 후 통증을 참느라 식은땀을 흘리는 여운을 일그러진 얼굴로 내려다봤다.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마루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말밖에 없었다. “약 먹었으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이제 그만 가 보세요.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여운이 아픈 중에도 예의를 차리려고 노력하자 마루는 가슴이 무너질 듯 아팠다.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아니에요. 너무 죄송해서…….” “그럴 필요 없어요. 이게 내가 할 일이에요…….” “하지만…….” “이런 일이 복지 센터에서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미안해하지 말아요. 절대.” 마루가 강력하게 말하자 여운이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는 미소를 짓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워했다. 마루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여운의 고통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발, 빨리 약 기운이 퍼져서 통증이 사라지길 기도하는 것밖엔 없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통증이 사라진 여운이 완전히 지친 얼굴로 마루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뭐가요?” “귀찮게 해 드린 것 같아서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도움이 못 돼서 내가 미안해요.” “아니에요. 약 먹게 해 주고 도움이 많이 됐어요. 감사해요.” 여운이 마루를 향해 악한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선하고 그저 착하기만 한 미소를 던졌고, 마루는 여운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저녁 먹을래요?” “아뇨. 괜찮아요.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저 때문에 고생하셨어요.” “아뇨. 지금 안 가요. 못 가요. 여운 씨 저녁 먹는 것까지 보고 갈 거예요. 그게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래요? 그럼 너무 죄송한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런데…… 얼마나 자주 그래요? 머리 아픈 거.”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고 있어요. 지금은 하루에 한 번이나 이틀에 한 번 정도로 많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질 거라고 했어요.” “다행이에요, 갈수록 좋아진다고 해서.” “저, 물어볼 게 있어요.” “말해요.” “혹시…… 나한테 가족이 있나요?” 여운이 기대감을 품은 얼굴로 물었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하고 기부 단체에서 오신 여자분한테 물어봤는데 다들 모른다고 했어요. 내가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거든요. 친구라고 했으니까 혹시 알고 있어요?” “그건……. 네, 있어요. 여운 씨 가족 있어요.” “그래요?” 여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디 있는지 알아요?” “미안해요……. 지금은 나도 몰라요.” 마루로선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결국 내 기억이 돌아와야 하는 거군요.” 여운이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힘들 거래요. 머리를 너무 많이 다쳐서…….” 한숨을 내쉬는 여운의 얼굴이 무척 슬퍼 보였다. “도와줄게요,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마루의 말에 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된대요. 기억을 찾는 건…… 안 되는 거래요.” “아니. 할 수 있어요. 같이 노력해요.” 의사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마루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운이 뭔가 곤란한 얘기를 하려는 듯 마루의 눈치를 살폈다. “뭐 궁금한 거 있어요?” “그게…… 복지 센터에 여자분은 안 계신가 해서요. 남자분이시라서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요……. 제가 이런 말 해서 기분 나쁘시죠?”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데…… 우리가 친구라서, 내가 여운 씨 친구라서 내가 여운 씨를 돌보겠다고 한 거예요.” “우리가…… 친구였어요?” 여운이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한 얼굴로 물었고 여운의 반응에 마루는 가슴이 한없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불과 30분 전에 나눈 얘기를 잊어버리다니, 너무나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하지만 마루는 애써 밝게 웃었다. “예, 나하고 여운 씬 친구예요. 친구.” “아……, 그랬군요. 우리가…… 친했나요?” “친했어요, 무척.” “아…….” 여운이 조금은 안심이 된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는…… 기여운이라고 해요. 내 이름이래요. 기여운. 복지 센터에서 오신 여자분이 알려 주셨어요. 기여운이 내 이름이라고. 내 이름이 기여운이 맞나요?” “맞아요. 기여운 씨 이름이에요. 난 차마루예요. 차, 마, 루.” 마루가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는 듯 한 자, 한 자 천천히 알려 주자 여운이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여린 미소를 지으며 마루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반가워요, 차마루 씨.” “그래요. 반가워요, 기여운 씨.” 마루가 손을 내밀자 여운이 마루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저, 죄송한데…… 자도 될까요. 좀…… 피곤해서요.” “자요. 어서 자요.” “정말…… 죄송해요…….” 여운이 지친 얼굴로 중얼거린 후 눈을 감았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잠이 든 여운을 바라보던 마루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멀어져 식탁 의자에 앉았다. 마루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 잠든 여운을 바라봤다. 꼼짝도 하지 않고 지루해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여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괜찮았다. 자신과 함께했던 그 모든 순간들을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곁에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맞추고 그녀와 얘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그래서 행복했다. 그녀가 살아 있고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고 뭉클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질 만큼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여운이 뒤척거렸다. 뒤척거리는 통에 이불이 벗겨지며 어깨가 드러났다. 마루가 재빨리 침대로 다가가 벗겨진 이불을 끌어당겨 드러난 어깨를 덮어 주는데 순간 여운의 손이 올라오더니 마루의 손길을 막았다. 여운은 눈도 뜨지 못한 상태였다. 잠결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던 것이다. “괜찮아, 여운아. 나야.” 마루가 조용히 속삭이자 여운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깊이 잠이 든 듯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가슴 한복판에서 기쁨의 감정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여운의 몸은 예전의 그것을, 달래 주던 마루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필로그 2 여운이 퇴원을 한 지 6개월째가 됐다. 마루를 구하기 위해 이정민의 총탄에 몸을 던진 지는 거의 1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여운은 이제야 비로소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다. 홀로서기를 위해 그동안 여운은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마루 역시 여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운이 퇴원한 직후부터 6개월 동안 마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여운을 찾아가 챙겼다. 식사는 물론이고 청소와 세탁도 도왔으며, 여운이 1주일에 한 번 통원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갈 때도 늘 마루가 동행했다. 첫 한 달 동안 여운에게는 매일매일이 마루를 만나는 첫 번째 날이었다. 아침에 마루가 여운의 집을 방문하면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누구시냐고 물었다. 저녁에 헤어질 때 내일 만나자고, 꼭 기억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처음 만난 사람처럼 누구시냐고 물으며 마루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잊어버렸다. 마루는 여운을 위해 현관문에 메모를 한 포스트잇과 자신의 사진을 붙였다. 【차마루입니다. 복지 센터 직원입니다. 매일 아침 9시에 방문합니다.】 이뿐 아니라 마루의 메모는 여운의 집 곳곳에 붙어 있었다. 전기레인지를 쓰는 방법이라든가 세탁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자세하게 메모해서 붙여 두었다. 【이름 기여운, 31살.】 가끔이지만 여운은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름과 나이를 적어 둔 메모도 구석구석 붙여 두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여운은 드디어 마루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누구세요?”가 아니라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로 마루를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퇴원한 지 두 달째엔 사고 후유증으로 불시에 찾아오던 끔찍한 두통도 한결 줄어들었다. 여운을 괴롭히던 두통은 하루에 한 번씩에서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으로 간격이 길어졌고 여섯 달째가 됐을 땐 1주일에 한 번 혹은 열흘에 한 번으로 많이 호전됐다. 마루는 여운에게 가족에 대한 얘기도 조금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상세하게 알려 주진 못했다. “어머닌 사고로 돌아가셨고 아버님과 오빠는 질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여운은 며칠 만에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드디어 형택도 만났다. 안타깝지만 당연히 여운은 형택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 친구야. 제일 친한 친구. 한 동네에서 자랐고 학교도 같이 다녔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였어. 네가 늘 그랬었어. 정말 징그럽게도 붙어 다닌다고.” 형택이 손바닥만큼이라도 기억이 남아 있길 기대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여운이 몹시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고 형택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여운의 머릿속에는 그토록 오래된 형택과의 추억마저도 완전히 지워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울지 말아요. 정말 미안해요.” 여운이 형택을 달랬다.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난…… 여운이 네가 나한테 존댓말을 해서…… 그게 조금 슬펐어. 하지만 괜찮아. 오늘부터 다시 친구 하자. 응?” “그래요.” 여운이 울먹이는 형택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석 달째부터는 여운은 마루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방법을 배우고 은행에 가서 저금을 하거나 인출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리고 인근 공원으로 산책도 갔다. 여운은 산책을 특히 좋아했는데, 산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여운은 이렇게 설명했었다. “이상하게 산책할 때면 어떤 생각들이 많이 떠올라요.” “어떤 생각요?” “음……. 생각이라기보다 어떤 장면이나 그림 같은 거예요. 순간순간 스치듯이 떠올라요.” “어떤 장면인데요?” “그게…….” 열심히 생각하던 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렸어요.” 여운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에 생각나면 말해 줘요.” “그럴게요. 다음엔 꼭 메모할게요.” 마루는 금방 잊어버리더라도 무엇인가가 떠오른다는 건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의학적으로는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세상엔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기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적이라는 단어도 생겨나지 말았어야 했다. 기적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마루는 여운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루는 여운에게 버스 타는 법도 가르치고 지하철 타는 법, 지하철 노선도를 보는 법도 가르쳤다. 한두 번이 아니라 거듭해서 가르쳐 주었고 여운은 성실하게 배웠다. 여운은 자립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근 복지 센터에서 제공하는 바리스타 교육도 받고, 미용 기술 교육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보통의 사람보다 수십 배는 노력하고 반복을 해야 겨우 한 가지 기술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지만 여운은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를 무척 행복해했다. 배우거나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모두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고비가 있었다. 여운은 이정민 사건에서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의학적으로 기억을 담당하는 뇌가 완전히 손상된 상태였다. 그래서 충격적인 사건이나 외상을 입은 후 사건 전에 있었던 기억을 모두 상실하는 역행성 기억상실증 증상과 함께 대뇌의 해마도 손상이 되어 새롭게 겪는 일들도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전향성 건망증도 함께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전향성 건망증 때문에 여운은 사소한 고비를 여러 번 겪어야 했다. 사소하더라도 사건이라면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은 주로 일요일에 생겼다. 일요일은 마루가 방문하지 않는 날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가까운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혼자 밖으로 나갔다가 동 호수를 잊어버린다거나 현관문 비밀 번호를 잊어버리는 일이 가장 흔했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을 땐 마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마루는 즉시 달려가서 어려움에 처한 여운을 도왔다. 혼자 장을 보러 나왔다가 무엇 때문에 밖으로 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해 다시 집으로 돌아간 적도 많았다. 그래서 마루는 집 동 호수와 현관문 비밀 번호를 적어 둔 메모지를 여운의 지갑에 넣어 두고 집 밖으로 왜 나갔는지 잊지 않도록 여운 스스로 메모하는 습관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일요일엔 두 시간에 한 번씩 무슨 일이 있어도 마루가 여운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사실 이건 문제라거나 사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진짜 문제는 여운이 마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때였다. 그러니까 지갑에 모든 정보를 적어 둔 메모지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사용법을 잊어버려 연락을 못 할 때였다. 일요일에 산책을 나왔던 여운은 그만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5분 전에 마루와 통화를 하면서 산책 중이라고 말했는데 전화를 끊고 5분 만에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린 것이다. 당황한 여운은 혼자 찾아가 보려고 애쓰며 엉뚱한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고, 당황하고 겁에 질리면서 휴대전화 쓰는 방법마저 잊고 말았다. 어느새 해가 졌고 거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내려앉는 어둠만큼이나 여운의 머릿속도 빠른 속도로 캄캄해졌다. 여운은 낯선 거리에 뚝 떨어져 버렸고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있던 공원에서 무려 두 시간 거리를 걷고 또 걷다가 어딘지도 모를 어느 동네 인공 분수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운은 멍한 얼굴로 휴대전화 화면에 뜬 ‘차마루 씨’라는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다가 정말 어렵게 화면을 터치해 전화를 받는 것에 성공했다. “여보세요?” - 여운 씨? 지금 뭐 해요? “차마루 씨…….” 여운의 목소리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산책을 나왔는데…… 집에 가는 방법을 잊어버렸어요.” 여운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 왜 전화 안 했어요? “전화하는 방법도…… 잊어버렸어요.” 여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내가 갈게요.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요.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요. 여운 씨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옆에 사람이 있으면 전화를 받아 달라고 부탁해요. 여운은 마루가 시키는 대로 곁에 있던 사람에게 전화를 받아 주길 부탁했고, 마루는 시민의 도움으로 곧바로 여운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여운 씨.” 마루가 데리러 갔을 때 여운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루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여운을 안아 주었다. 여운은 마루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여운의 흐느낌에서 마루는 그녀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몇 번의 고비를 넘긴 끝에 드디어 여운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첫 1주일 동안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오래전 국수방에서 태권도 5단, 유도 3단, 검도 3단, 복싱 2년, 주짓수 2년, 합 15단이라던 마루의 무술실력에 콧방귀를 뀌며 업소 전문 청소 2.5단, 치킨·도시락·야식·뼈다귀 해장국 배달 6단, 나이트클럽 주방 보조 1단, 식당 설거지 2단, 각종 서빙 5단, 전단지 붙이기 및 돌리기 2단, 신문·우유·야쿠르트 배달 2단, 도배 2.5단, 이삿짐 2단, 택배 1단! 합 26단이라고 큰소리쳤던 기여운답게 둘째 주부터는 아무런 문제도 실수도 없이 계산은 물론이고 진열과 청소, 손님 응대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얼마나 완벽한지 편의점주가 머리를 다쳤던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 했을 정도로 잘해 냈다. 여운의 홀로서기는 참으로 박수 쳐 주고 응원할 일이었다. 하지만 마루에겐 더없이 슬픈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운이 홀로서기를 선언하면서 복지 센터, 그러니까 국수방의 도움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그런데 이제 혼자 해 볼게요. 혼자 살아 볼게요. 해 보고 또 해 보고 또 해 보다가 도저히 안 되면 도움을 요청할게요. 이젠 스스로 일어설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여운이 마루에게 부탁했다.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여운다운 선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을 모두 잃고도 혼자 살아남았던 여운이었다. 비록 머리에 기록되어 있던 기억은 잃었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던 근성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마루는 여운의 홀로서기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운을 앞으로는 매일 만나지 못하고 지켜볼 수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서운하고 불안했지만 여운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여운이 마루에게 전화한 것은 꼬박 한 달 만이었다. “저 기여운이에요.” - 알아요. 여운 씨. 잘 지내고 있어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내일 저녁에 만날 수 있을까요?” - 그럼요. “내가 저녁 살게요. 꼭 사고 싶어요.” - 알았어요. 만나요.”
오늘은 월급날이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첫 번째로 월급을 받는 날이었다. 편의점 사장이 여운에게 월급을 주면서 말했었다. “고생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여운 씨.”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첫 월급 받으면 어떻게 하는지 알지?” “어떻게 하는데요?” “아, 우리 여운 씨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 옛날엔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내복을 사 드렸어. 그런데 요즘은 내복 대신에 용돈을 드리거나 식사를 대접해.” 사장의 말에 여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용돈을 드리거나 식사를 대접할 부모님이 안 계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안 계세요.” “아, 맞다. 미안해. 내가 깜빡했어. 정말 미안해. 그럼 친구나 도움을 많이 준 사람한테 한턱 쏘는 것도 좋아.” “아 그래요?” 여운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누구, 한턱 쏠 사람 있어?” “있어요.” 여운이 행복한 얼굴로 대답했다. 한턱 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마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루에게 전화했고, 여운은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마루를 만났다. 행복한 여운을 보자 마루도 행복했다. “오랜만이에요, 여운 씨.” “네, 오랜만이에요, 차마루 씨.” 여운이 차마루 씨라고 부르는 순간 마루는 울컥하고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운은 늘 그렇게 불렀었다. 마루 씨가 아니라 차마루 씨라고. 그래서 가슴이 찡했다. 예전에 마루가 알고 있던 그 기여운을 만난 것 같아서. “오늘 기분 무척 좋아 보여요.” “네, 기분 좋아요. 오늘 월급 받았거든요.” “아, 그래요?” “점장님이 그러는데 첫 월급 받으면 옛날에 부모님께 내복을 사 드렸대요. 그런데 요즘은 용돈을 드리거나 식사를 대접한대요. 그런데 나한테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그럴 땐 친구나 도움을 많이 받은 고마운 사람한테 한턱 쏴도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때 차마루 씨가 생각났어요.” 여운이 너무나 기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요, 날 생각해 줘서.” “생각나는 사람이 차마루 씨밖에 없었어요.” “정말요?” “고마운 사람이 차마루 씨밖에 없더라구요.” “진짜 기분 좋은 말이네요.” “기분 좋으라고 한 얘기 아니라 진짜예요. 진짜 차마루 씨만 생각났어요.” “고마워요, 여운 씨. 보고 싶었어요.” “네, 나도 보고 싶었어요.” “정말요?” “네, 정말이에요.” 여운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여운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으로 마루에게 제대로 한턱 쐈다. 식사도 대접하고 후식으로 커피도 샀다. 여운은 보잘것없지만 이렇게라도 마루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일하는 건 어때요?” “재밌어요. 요즘은 일 잘한다고 칭찬 많이 받아요.” “두통은 좀 어때요?” “지난달엔 한 번만 아팠어요. 이번 달엔 아직 한 번도 안 아팠구요.” “정말 다행이에요. 요즘은 괜찮아요? 잊어버리는 거 말이에요.” “지난달에 딱 한 번 잊어버렸어요. 병원에 약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가 타야 하는 버스 정류장이 어딘지 잊어버렸는데,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무사히 집에 왔어요. 그거 딱 한 번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2주일 만에 병원에 간 거라서 편의점처럼 매일 가는 곳이 아니라서 잊어버린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려구요.” “맞아요. 그럴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머리 다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에요.” 마루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여운에게 적극 호응해 주었다. “그때 차마루 씨한테 전화하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병원 갔다가 버스 정류장 잊어버렸을 때요.” “전화하지 그랬어요. 왜 참았어요?” “차마루 씨를 귀찮게 하기 싫어서요. 진짜, 진짜 전화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요.”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귀찮지 않은데.” 마루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고 여운은 그렇게 말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미소 지었다. “요즘도 산책해요?” “네. 산책할 때가 제일 좋거든요.” “산책 갔다가 길 잃어버린 적은 없어요?” “네, 없어요.” 여운이 즐겁게 대답했다. “지금도 산책할 때 뭔가 떠올라요?” “네. 내가 잊어버릴까 봐 메모해 뒀어요.” 여운이 지갑에서 메모지를 꺼내 마루에게 보여 주었다. 여운이 건네준 메모를 본 마루가 약간 의아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장화, 나무 대문, 식물, 흙, 강아지?” “네. 장화는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예요. 장화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무 대문은 정말 큰 대문이에요. 엄청 큰 대문. 낡았지만 튼튼한 대문. 식물이랑 흙은 왜 자꾸 생각나는지 잘 모르겠어요. 식물은 내가 뭔가를 심는 것 같은데 뭘 심는 건지……. 흙도 내가 흙을 자꾸 파는데 왜 파는지, 그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강아지는 아주 큰 강아지는 아닌데 그렇게 막 예쁘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강아지가 자꾸 떠올라요. 그리고…….” 여운이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 갔다. “……메주인 것 같아요.” 여운의 입에서 ‘메주’라는 단어가 나오자 마루는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운이 메주를 기억하는 걸까?’ “무슨…… 말이에요?” “그 강아지 이름이 메주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운의 대답에 마루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여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냥 강아지가 떠오를 때마다 ‘아, 메주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강아지 이름이 메주라는 게 진짜 이상하지만, 그냥 정말 메주인 것 같아요. 혹시 내가 다치기 전에 강아지를 키웠나요? 메주라는 강아지 알아요?” 여운의 물음에 눈시울이 붉어진 눈으로 여운을 바라보던 마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진짜 메주라는 강아지가 있어요?” 여운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있어요.” “어디에요? 지금도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여운 씨가 살았던 집에.” “내가 살았던 집요? 거기가…… 어딘데요?” “시골이에요.” “시골……. 내가 시골에서 살았어요?” “네.”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에서 혼자 살았어요?” “아뇨.” “그럼 누구랑 살았어요?” “여운 씨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하고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요?” “예. 여운 씨를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마루의 말에 여운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와 함께 홍조가 피어났다. “나도…… 그 사람을…… 사랑했나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거기 있어요……. 여운 씨와 살던 곳에. 메주하고.” “시골에요?” “예.” “그 사람…… 내가 다친 거 알아요?” “알아요.” “그런데 왜, 왜 날 보러 오지 않아요?” “그건…….” 마루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운 씨가 기억하지 못해서요…….” “아…….” 여운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그렇군요…….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군요.” “그 사람…… 기다리고 있어요. 여운 씨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곳에서.” “정말요?” “예.” “거기가 어딘지…… 알아요?” “알아요.” “내가…… 가도 될까요?” 여운이 물었고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면…… 그 사람이 날 반가워할까요?” 이번에도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억을 못 해도 반가워할까요?” “그럼요. 반가워하고말고요.” 마루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가고 싶어요?” “네……. 가고 싶어요.” 여운이 약간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사람……,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람 만나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죠? 내가 기억을 못 할 텐데……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죠?” “그냥…… 그냥 안녕하세요, 돌아왔어요, 그렇게 말하면 돼요.” “안녕하세요……. 돌아왔어요…….” 여운은 혼잣말처럼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안녕하세요……. 돌아왔어요…….” 여운은 마루가 가르쳐 준 인사말을 한참 동안 되뇌고 있었다. 마지막 에필로그 여운은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여운의 뒤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형택이 뒤따르고 있었다. 마루는 형택에게 부탁했다. 여운과 시골까지 동행해 달라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 달라고. 형택은 기꺼이 여운과 동행하며 여운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시골길을 걷다가 때때로 여운은 형택을 돌아봤다. 형택은 여운이 돌아볼 때마다 길을 알려 주었다. 여운은 마늘밭 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운은 밭에서 한창 마늘을 캐는 어르신들을 바라봤다. 마늘을 캐던 어르신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돌려 여운을 바라봤다.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어르신들이 여운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운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후 마늘밭은 떠났다. 한참을 걷던 여운이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운은 커다란 나무 대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 한참이나 커다란 나무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 대문이었다. 낡았지만 튼튼한 그리고 커다란 나무 대문.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상하게 벅차올랐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여운이 형택을 바라보자 형택이 비죽비죽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은 크게 한 번 숨을 쉰 후 대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여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여운은 대문을 열면서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여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녕하세요……. 돌아왔어요……, 차마루 씨.” 여운이 마루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여운 씨.” 마루가 눈물을 흘리며 여운에게 인사했다. 메주가 꼬리를 흔들며 짖어 대고 있었다. * 손님이 찾아왔다. 양복을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꽃미남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연우라고 합니다.” 연우와 여운이 재회했다. “안녕하세요.” 여운은 연우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운이 손님을 위해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연우가 마루에게 재빨리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국장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선배님을 복귀시키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국수방 초보 요원이 된 연우가 속삭였다. “아직도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셨단 말이야?” “절대 수리 못 하신답니다. 이번에도 복귀 안 하시면…… 구속시킨답니다.” 연우의 속삭임에 마루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복귀하십시오, 선배님.” “너 같으면 기여운을 두고 복귀하겠냐?” 마루가 속삭여 묻자 연우가 여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서 말씀드려라. 복귀도, 구속도 안 된다고.” 마루의 말에 연우가 긴 한숨을 내쉬는데 여운이 다과를 가져왔다. “그런데요……, 혹시 국수방이라고 알아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와 연우가 기겁한 얼굴로 여운을 바라봤다. “국수방?” “국수…… 방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국숫집인 것 같은데…… 우리가 예전에 국수 먹으러 갔었나요?” 여운이 해맑은 얼굴로 마루에게 물었고 마루와 연우는 감격한 얼굴로 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