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은 머릿속에 몇 가지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국수방에 납치당해 잡혀갔다가 간첩 혐의를 벗고 풀려나던 날, 그때 마루는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나기로 결심하고 증거 보관소에서 편지와 사진만 챙겨 나오다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럽게 울고 있던 여운을 안아 줬었다. <여운 씨…….>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안아 줄까요?> 마루가 말했었고 여운은 거절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여운은 마루에게 안겨 있었다. 여운의 등에 마루의 넓은 가슴이 느껴졌었다. 마루의 긴 팔이 여운의 몸을 감싸 안고 있었었다. 그리고 여운은 마루의 탄탄하고 듬직한 팔 안에 안겨 있었었다. <하지 말아요.> 여운이 마루를 밀어내려 했지만 마루는 여운을 놓아주지 않았었다. <하지 말라구요. 이제 안 울려고 하는데……. 그만 울고 싶은데…….> 여운이 재차 마루를 밀어내려 했지만 마루는 여운을 더욱 꼭 감싸 안으며 놓아주지 않았었다. ‘그때 날 안아 줬던 것도 계획적이었을까?’ 여운은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렸다. 여운이 국수방에서 풀려나 부모님과 오빠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을 때 마루는 진심으로 여운을 걱정하며 붙잡았었다. <여운 씨, 날 봐요. 날 보라고요.> 마루의 말에, 아니 애원에 여운이 마루를 바라봤다. <이렇게 가지 말아요. 이렇게 가버리기엔 기여운이라는 사람 너무 아까운 사람이에요. 이렇게 포기하지 말아요.> <내가요? 내가 아깝다구요?> <아까워요. 너무 많이 아까워요.> <나 같은 게 아깝다구요? 진심이에요?> <진심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에요.>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진심으로 느껴졌었는데 그것도 계획적이었던 걸까?’ 여운은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놈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알면요? 잡아다 때려 주게요? 진짜 좀 때려 줄래요?> <죽일게. 죽여 줄게.> <뭐라구요?> <죽여 준다고. 그 새끼 죽일 거야.> 여운이 이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앞집 아저씨로부터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됐던 때를 얘기했을 때 마루는 온몸으로 분노와 살기를 내뿜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여운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그 놈을 죽여 주겠다고, 죽이겠다고. “그것조차도 연기였다고? 계획적이었다고? 아……. 제발 아니었으면…….”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루가 여운에게 보여 줬던 모든 것들이 연기였다는 것을,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야. 차마루 씨가 그랬을 리가 없어. 차마루 씨는 그랬을 리가 없어…….” 여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기여운!” 갑자기 방문 밖에서 마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여운은 재빨리 사진을 가방 속에 숨기고 급하게 이불을 편 다음 누워서 자는 척했다. “기여운?” 마루의 목소리가 가까워졌고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기여운.” 마루는 방으로 들어와 잠들어 있는 여운을 깨우려고 손을 뻗다가 멈췄다. 여운의 얼굴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많이 운 듯 눈과 얼굴이 많이 부어 있었다. 그리고 여운은 자는 것이 아니라 자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울었을까? 왜 자는 척 하는 거지?’ 여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마루는 여운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마루가 방을 나가자 여운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어떻게 하지?’ 정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놀랍고, 모든 것이 복잡하고, 모든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운으로선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마루 씨한테 말해야 할까? 이정민의 말처럼 정말 계획적으로 나한테 접근한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던 여운은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번쩍 눈을 떴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총!’ 이상했다. 이정민이 간첩이 아니라 간첩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라면 진짜 간첩이 아니라면 어떻게 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살인 청부업자나 스나이퍼들이 암살용으로 쓰는 총이라는 뜻이야.> 마루가 그랬었다. 살인 청부업자나 스나이퍼들이 암살용으로 쓰는 전문가용 총이라고. 정민이 간첩이 아니라면 어째서 암살용 총을 갖고 있는 것일까? 단순하게 간첩으로 오해만 받고 있는 사람이 총을 갖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 도청기! 여운은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옷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혹시 이정민이 자신에게 도청기를 또 심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샅샅이 살폈음에도 도청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도 살폈지만 봉투에도 없었다. ‘오늘은 나한테 도청기를 심지 않았어.’ <북한 스파이들이 주로 쓰는 러시아제 도청기야.> 마루가 그런 말도 했었다. 북한 스파이들이 쓰는 러시아제 도청기라고. ‘간첩이 아닌데 총을 갖고 있고 도청기를 심는다?’ 이쯤 되자 여운은 어떤 것이 백이고 어떤 흑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함정…….’ 함정에 빠진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함정이 누가 파 놓은 함정인지 안타깝게도 현재 여운에겐 범인을 선별할 지혜가 부족했다. 여운은 자신에게 선구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가려내는 타자의 능력을 선구안이라고 한다는데 그런 선별 능력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자신이 지금 깊이 빠져 버린 이 함정이 누가 파 놓은 함정인지 가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지금은…… 누구든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이정민도 차마루도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해…….’ 어느 쪽이 옳은 길이고, 어느 편이 아군인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양쪽 다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은 가슴 한복판에 거대한 바위를 울려놓은 것처럼 꽉 막히고 답답해서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운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듯한 기분으로 어딘지 모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20장 지하 벙커에서 녹화된 감시 카메라를 살펴보던 마루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여운이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마루와 통화를 한 시간보다 한참 후였기 때문이다. 처음 여운과 통화했을 때 여운은 집으로 갈 것이라고 했었다. 마루는 휴대전화를 꺼내 여운과 통화했던 시간을 확인한 후 녹화된 감시 카메라 화면도 앞으로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통화를 끝내고 늦어도 15분 내로는 집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여운은 한참 후에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루는 자신이 여운에게 전화를 걸었던 마지막 시간을 확인한 다음 여운이 집으로 돌아온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마루가 여운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은 대구에서 돌아와 읍내 햄버거 가게에 도착해서였다. 그때 여운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마루는 여운이 잠들어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루의 전화를 받지 않은 그 시간에도 여운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운은 마루가 마지막 전화를 하고 20분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20분…….’ 이정민의 집에서 마루의 집까지의 거리는 20분 거리. 여운이 정민의 집에서 출발해서 마루의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마루는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집으로 들어서는 여운의 손에 들린 봉투 때문이었다. ‘무슨 봉투지?’ 마루는 여운이 자고 있었던 게 아니라 자는 척했던 것을 확신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여운은 곧바로 집에 오지 않고 어디에 갔던 것이며, 어디에 있었기에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며, 들고 있는 봉투는 무엇이며, 왜 자는 척했던 것일까? 마루는 굳은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자판을 조작해 여운의 방 모니터를 켰다.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운에게 지하 벙커를 공개했던 날 자신이 머무는 방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여운이 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려 버렸기 때문이다. 마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이크 볼륨을 올렸다.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뭔가 불편하고 복잡한 기분으로 벙커에서 나오던 마루는 막 방에서 나오던 여운과 마주쳤다. “일어났어?” 마루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여운을 바라봤다. “어, 언제 왔어요?” 여운이 자연스러운 척하며 물었지만 마루는 여운이 어색하게 군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30분 전에. 잘 잤어?” “네. 오는 줄 모르고 잤네요.” “이거 먹어.” 마루가 쇼핑 봉투를 내밀었다. “뭐예요?” “햄버거 사다 달라고 했잖아.” “아……. 고마워요.” 여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식었을 거야.” “괜찮아요.” “어서 먹어.” “네…….” 여운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성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햄버거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맛이 없었다. 식어서 맛없는 게 아니라 그냥 맛이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더 맛있을 텐데 이상하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모래를 씹는 기분마저 들었다. 마루는 여운이 억지로 먹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먹는 것 앞에서는 언제나 무장해제가 되던 먹보 여운이었는데 지금 여운은 마치 사약을 먹는 듯한 얼굴로 억지로 씹어 삼키고 있었다. “맛없어?” “네?” 여운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멍한 얼굴로 물었다. “맛없냐고. 진짜 맛없게 먹고 있어. 식어서 그래?” “아니에요. 맛있어요.” 여운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무슨 일이 있겠어요.” “기운이 없어 보여.” “기운이 왜 없어요. 아직 잠도 덜 깨고 약간 두통이 있어서 그래요.” “두통 있어?” “조금요.” “많이 아프면 참지 말고 두통약 먹어.” “그럴게요.” 여운은 괜히 햄버거를 사다 달라고 했다고 후회하며 억지로 햄버거를 다 먹었다. “맛있네요.” 햄버거를 다 먹은 후에 또다시 영혼 없는 소리를 했다. “고마워요.” “고맙긴. 먹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지 사다 줄게.” “알았어요……. 그런데 국수방 사람 만났어요?” 여운이 마루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응.” “누구 만났어요?” “오 팀장님.” “무슨 말 했어요?” “곧 작전이 시작될 것 같아.” “작전이라면…… 이정민 잡는 작전요?” “음.” “그렇군요…….” 여운의 얼굴이 금세 굳어 버렸다.
‘어쩌지? 이정민을 잡으면……. 만약 이정민이 진짜 사촌 오빠라면…….’ “차마루 씨.” “응?” “저…… 이정민 진짜 간첩 맞아요?” 여운이 마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진짜 간첩이 맞냐니?” “어쩌면……, 어쩌면 나처럼 오해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오해 아니야. 이정민은 진짜 간첩이야. 기여운하고는 달라.” “차마루 씨는 나도 진짜 간첩이라고 확신했었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그건 실수였어. 명백하게 실수였어. 하지만 이정민은 실수가 아니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확신해.” “그러니까 어떻게요?” “기여운 덕분에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증거가 확보됐으니까.”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증거?’ “어떤…… 증거요?” “미안하지만 그건 기여운한테 알려 줄 수가 없어. 기여운은 민간인이니까.” “그렇군요…….” 마루의 눈치를 보던 여운이 한참 만에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증거라는 거…… 믿을 만한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날카로운 눈길로 여운을 쳐다봤다. “국수방에서 수집한 증거를 불신하는 거야?” “불신하는 게 아니라…… 나도 하마터면 간첩으로 몰릴 뻔해서…… 이번에도 실수하는 걸까 봐 물어보는 거예요.” “이정민은 실수 아니라고 했잖아. 놈은 정말 간첩이야.” “나는요?” “‘나는요’라니?” “난 이제 정말 간첩이 아니라고 확신해요?” “당연하잖아.” “어떻게 확신해요?”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마루가 여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그냥…… 궁금했어요.” “이정민이 간첩이 아닌 것 같아?” “솔직히…… 차마루 씨가 간첩이라고 하니까 간첩이구나 하는 거지,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니까…….” “총 봤잖아. 우리 집에 도청기 심은 것도 봤잖아.” 그래, 그 부분에서는 여운도 할 말이 없었다. “간첩이 아니라면 암살용 총을 갖고 있을 리가 없어. 그런 총은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도청기도 마찬가지고. 기여운이 본 총은 한 자루였지만 틀림없이 이정민의 집에 더 많은 총이 숨겨져 있을 거야. 이정민의 집에는 총이나 도청기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벙커처럼 비밀 방도 있을 거야.” “비밀 방두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 도청기를 심었다는 건 도청한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기계도 있다는 뜻이야. 이정민 집에 갔을 때 못 봤어? 사방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감시 카메라? 이정민 집에 감시 카메라가 있었어요?” 그건 여운도 전혀 알지 못한 것이었다. “아주 교묘하게 숨겨 뒀지만 내 눈엔 다 보였어.” 여운은 재빨리 정민의 집에 갔을 때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시 카메라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감시 카메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고. 이정민에게서 엄마의 얘기를 듣게 되면서 다른 것들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여운은 이정민이 간첩이 아닌 것 같아? 기여운한테 실수했던 것처럼 이정민도 헛다리 짚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냥 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솔직히 이정민이…… 간첩처럼 생기진 않았잖아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가만히 여운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뭔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요?” 여운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마루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못 본 거 지금 다 보려고. 보고 싶었거든.” 마루는 일부러 엉뚱한 말로 분위기를 바꿨다. 마루가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여운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뭐야, 그 반응은?” “…….” “설마 기여운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농담 그만해요. 안 재밌어요.” 여운이 시큰둥하게 말한 후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루가 여운의 손을 붙잡았다. “기여운.” “왜요?” “물어볼 게 있어.” “뭔데요?” “아까 낮에 곧바로 집에 오지 않고 어딜 갔다 온 거야?” 마루의 물음에 여운은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굴러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늦게 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여운은 긴장으로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벙커실 감시 카메라로 확인했어.” “아직도 날 감시하는 거예요?”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어디 갔었어? 혹시…… 이정민 만났어?” “아니거든요? 왜 이정민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정민을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왜 늦게 온 거야? 누구하고 있었어? 마을 어르신들?” “아뇨. 그냥 혼자…… 산책했어요.” 여운은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정민에게도 거짓말, 마루에게도 거짓말. 온통 거짓말이었다. 어쩌다 거짓말쟁이가 돼 버린 것인지. 정말 답답하고 슬픈 일이었다. “비 오는데 산책을 했다고?” “비 오니까…… 괜히 기분이 가라앉아서 비 맞으면서 돌아다녔어요.” “갑자기 왜 기분이 가라앉은 거야?” “그냥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나도 말하기 싫은 게 있거든요?” 여운이 귀찮고 성가시다는 듯 말한 후 돌아서는데 마루가 여운을 또 붙잡았다. “말하기 싫더라도 말해. 내가 오해하지 않게.” “무슨 오해를 한다는 거예요?” “집으로 가겠다 해 놓고 집으로 오지 않았고, 내 전화도 받지 않았잖아.” “말했잖아요, 산책했다고.”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뭔지 말해.” “꼭 해야 해요?” “해야 해.” “그러니까 왜요?” “내가 오해하지 않게.” “왜 오해하는데요? 내가 아직도 간첩이라고 생각해서 오해하는 거예요?” “왜 갑자기 간첩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많이 입에 올리는 거지?” 마루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여운은 움찔하며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갑자기……. 휴……. 엄마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 아빠도 보고 싶고, 우리 오빠도 보고 싶고……. 가끔 그래요. 갑자기 막 보고 싶고 그래요. 이유도 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래요.” 그건 거짓말이라 할 수 없었다. 이정민 덕분에 오늘 하루 가슴이 미어질 만큼 가족이 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가족이 생각나니까 울적해졌고 그래서 그냥 걸어 다녔어요.” “비 오는데…….” “비 오니까 더 좋죠. 비 오면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별로 없고, 사람들이 없으니까 청승맞은 얼굴 볼 사람 없고. 난 혼자 산책도 못 해요? 가족을 보고 싶어 하면 안 돼요?”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래서 얼굴이 안 좋구나.” “내 얼굴이 안 좋아요?” “많이 울었지?” “…….” 여운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마루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도 갑갑하고, 울었다는 걸 들킨 것도 싫고, 갑자기 또 울고 싶기도 했다.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어. 내가…… 위로 기술이 많이 부족하거든.” 마루의 말에 여운이 슬프게 미소 지었다. “위로해 줄 필요 없어요. 위로해 준다고 금방 좋아지는 게 아니니까. 이러다 괜찮아져요. 그냥 그렇게 말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나가서…… 외식할까?” 마루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여운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무슨 외식을…….” “밤바다도 보고 좋잖아.” “바다요? 아니에요. 바다가 얼마나 먼데. 대구 갔다 와서 피곤할 테니까 쉬어요.” “안 피곤해. 전혀.”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지 없어요.” 여운이 한사코 거절했지만 마루는 여운을 억지로 차에 태워 바다로 향했다. “10프로 정도는 기분이 나아질 거야.” “10프로 때문에 바다에 가는 거예요? 겨우 10프로 때문에?” “기여운의 기분이 10프로라도 좋아진다면야 얼마든지.” 마루가 따뜻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도 계획적인 걸까? 지금도 연기일까?’ 여운은 혼란스러운 눈길로 마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집에서 바다까지 한 시간을 달려 바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노을이 지는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좋지?” “그러네요.” “오길 잘했지?” “그래요. 오길 잘했어요.”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탁 트인 바다를 보자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기분이었다. “10프로는 나아진 것 같아?” “50프로 정도 좋아진 것 같아요.” “성공했네.” 즐거워하는 마루의 모습에 여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 없어?” 말없이 나란히 모래사장을 걷던 마루가 불쑥 물었다. “무슨…… 얘기요?” 여운이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무 말이든.” “바닷가에 데려와 줘서 고맙다는 말요?” “아니. 그것 말고.” 마루가 걸음을 멈췄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얘기가 듣고 싶은데요?” “글쎄……. 어떤 말일까?” “딱히 할 말이 생각이 안 나는데 어쩌죠?” 여운의 말에 마루가 여운을 바라봤다. 여운의 얼굴 위로 주황빛 노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운의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황빛으로 물든 슬픈 여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예뻤다. 마루는 예쁜 여운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알았어. 할 말이 생각나면 그때 말해. 언제라도 괜찮아. 알았지?” 마루는 여운에게 지금은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기여운이 기여운답지 않으니까 재미없어.” “나다운 게 뭔데요?” “힘들어도 힘든 티 내지 않고 씩씩한 거. 병이 날 정도로 벌벌 떨면서도 용감한 거. 바락바락 큰소리치며 장군처럼 용맹한 거.” 마루의 설명에 여운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오늘 기여운은 내가 알던 기여운이 아닌 것 같아.” “설마. 난 너무 힘들고 병이 날 것 같아서 더는 바락바락 큰소리칠 기운이 없어서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이렇게든 저렇게든 난 그냥 기여운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위로 기술이 많이 부족해. 기여운처럼 너무 외로워서, 너무 그리워서 힘들어할 때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 몰라.” “이미 많이 해 줬어요. 바닷가에 데려와 줬잖아요. 이거면 됐어요. 위로 기술 아주 훌륭해요.” 여운이 진심으로 말한 후 모래사장에 앉아 하늘을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인 노을을 바라봤다. 마루는 여운의 곁에 따라 앉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딱 한 사람만 가족을 만날 수 있다면 누굴 만나고 싶어?”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엄마요” 하고 대답했다. “엄마?” “네, 엄마요.” “왜?” “만난 적이 없으니까.” 여운이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난 적이 없으니까 만나고 싶어요.” “그렇구나…….” 만난 적이 없어서 만나고 싶다는 여운의 대답에 마루는 가슴 한쪽이 욱실하고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만약에…… 엄마를 딱 한 시간만 만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
마루의 물음에 여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만요?” “응.” “진짜…… 잔인하네요, 한 시간은.” “미안. 그럼 두 시간.” 마루가 재빨리 정정하자 여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만 해도…… 떨리네요.” 여운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진짜…… 설레네요.” “미안해. 울리려고 한 소리 아닌데……. 말 안 해도 돼. 미안해.”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로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던 여운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엄마하고 꼭 껴안고…… 자고 싶어요. 그냥 엄마 품에 안겨서 자고 싶어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여운의 눈에서 아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있죠, 차마루 씨. 난 엄마를 몰라서…… 만난 적이 없어서…… 엄마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어요. 늘 아빠하고 오빠만 그리워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우리 엄마가…….” 여운의 너무나 애가 끓는 듯한 말에 마루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픈 것을 느끼며 애처로운 눈길로 여운을 바라봤다. “우리 엄마가 만약에 죽지 않았다면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 엄마도 나를 너무나 사랑해 줬겠죠?” “물론이지.” “우리 엄마도 매일매일 안아 주고 뽀뽀도 해 줬겠죠?” “그럼.” “매일매일 머리도 빗겨 주고, 묶어 주고, 핀도 꽂아 주고 그랬겠죠?” “그럼.” “씻겨 주고 옷 입혀 주고…… 잘 자라고 인사해 줬겠죠?” “그럼. 그랬을 거야.” “배가 아프면 배 만져 주고, 보채면 업어 주고, 내 손 잡고 유치원도 데려다주고 그랬겠죠?” “그랬을 거야.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운동회에도 왔겠죠? 부모님 참관 수업에도 왔겠죠? 갑자기 비가 오면 우산 들고 학교에도 왔겠죠? 졸업식에도…… 입학식에도…… 우리 엄마가 꽃다발 들고 왔겠죠?” 여운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차마루 씨, 우리 엄마가 날 사랑했겠죠? 우리 엄마가 날 정말 많이, 너무너무 많이 사랑했겠죠?” “물론이야. 어머닌 기여운을 정말 많이 너무너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정말이죠? 정말이죠?” “정말이야. 내가 알아.” “지금도 저기서 나를 보고 있겠죠?” 여운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기에서 내가 울고 있는 걸 보고 있겠죠?” “…….”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걸,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우리 엄마가 저기서 다 보고 있겠죠?” “그럼. 보고 있을 거야. 전부 다 보고 있을 거야.” “그래요. 믿을게요.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여운이 흐느껴 울면서도 억지로 미소 짓는데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미안해. 달랠 줄 몰라서. 내가 많이 미안해.” “아니에요. 고마워요. 진심으로.” 마루는 여운을 오랫동안 꽉 보듬어 안고 있었고, 여운은 마루의 품에서 오랫동안 흐느끼고 있었다. * 자정이 넘은 시간에 톡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여운이 메시지를 열어 보자 톡을 보낸 사람은 정민이었다. ≪여운 씨, 자요?≫ 여운은 정민의 메시지를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아뇨.≫ ≪기분 괜찮은지 걱정돼서요.≫ ≪솔직히 좀…… 안 좋아요. 많이 심란해요.≫ ≪그럴 것 같아서 말 건 거예요. 나 때문에 많이 힘들 것 같아서.≫ ≪선생님 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몰랐던 일들이라서…… 많이 놀랐어요. 하지만 내가 알아야 할 일들이잖아요.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얘기들.≫ ≪맞아요. 여운 씨가 꼭 알아야 하는 일이고 알아야 했던 얘기들이에요. 여운 씬 내 사촌 동생인데 가족을 지척에 두고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알려 준 거예요.≫ ≪네, 알아요, 선생님도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거. 감사하게 생각해요.≫ ≪차마루 씨는 자요?≫ ≪모르겠어요.≫ ≪지금 따로 있어요?≫ ≪네.≫ ≪혹시, 말했어요?≫ ≪아뇨.≫ ≪여운 씨가 날 만난 거 차마루 씨가 눈치챈 것 같아요?≫ ≪아뇨.≫ ≪늦게 들어왔다고 의심하지 않아요?≫ ≪차마루 씨 도착하기 전에 집에 와서 내가 늦게 온 거 차마루 씨 몰라요.≫ 여운은 왠지 아직까지는 정민에게 솔직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둘러댔다. ≪그랬군요. 오후에 차마루 씨하고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 정민의 메시지에 여운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이상한 기분인데 딱 꼬집어서 어떻게 이상한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가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정원에 있었는데 차 지나가는 거 봤어요.≫ ≪아, 그랬군요. 바닷가에 갔었어요.≫ ≪바닷가?≫ ≪내 기분이 좀 울적해 보인다고 바람 쐬러 가자고 하더라구요. 가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갔었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조심해요.≫ ≪네? 뭘요?≫ ≪갑자기 바닷가에 데려갔다고 하니까 뭔가 좀 수상해요.≫ ≪수상하다구요? 뭐가요?≫ ≪그냥 뭔가 기분이 그래요.≫ ≪…….≫ ≪여운 씨.≫ ≪네.≫ ≪여운 씨가 나 때문에 위험해질까 봐 걱정돼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괜히 여운 씨한테 모든 걸 다 알려 줘서 그래서 여운 씨까지 정부 조직의 표적이 될까 봐 걱정된다고요.≫ 여운도 두려웠다. 그래서 정민이 무슨 뜻으로 한 얘긴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다 알아 버렸는데 어쩌겠는가. 되돌아갈 수 없는 걸. ≪여운 씨.≫ ≪네.≫ ≪지난번 기차역에서 만났을 때 말이에요.≫ ‘기차역? 왜 갑자기 기차역 얘기를 꺼내는 거지?’ ≪네.≫ ≪그때 정말 서울로 가려고 기차역에 왔던 거예요?≫ ‘지금 그걸 왜 묻는 거지?’ ≪네, 맞아요.≫ 여운은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 봐요. 그때 차마루 씨가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이상하지 않았냐구요? 뭐가요?≫ ≪일부러 여운 씨를 기차역으로 데려갔다든지 그런 거 말이에요.≫ ≪그건 아니에요. 일부러 기차역에 갔던 건 아니에요. 읍내로 장을 보러 갔었는데 가는 길에 싸웠고, 내가 너무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서울로 가려고 했던 거예요.≫ 이미 여운은 기차역에서 정민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정민과 마루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을 공유하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그건 다 지어낸 거짓말이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여운은 몇 시간 전 결심했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면 양쪽 다 의심하고 경계하겠다고. ≪정말이에요?≫ ‘왜 자꾸 확인하는 걸까?’ ≪정말이에요.≫ ≪정말 아무런 낌새도 없었어요?≫ ≪낌새요? 그런 거 없었어요.≫ ≪마을에서 기차역으로 바로 왔던 것 아니에요?≫ ≪전혀 아니에요. 읍내 슈퍼에서 장 보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그렇군요. 난 그때 차마루 씨가 일부러 날 미행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본 거예요.≫ ≪물어볼 게 있어요.≫ ≪말해요.≫ ≪차마루 씨가 정말 국가 조직…….≫ 여운은 여기까지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차마루 씨가 정말 정부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틀림없어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우연히.≫ ≪우연히? 언제요?≫ ≪한 달 전쯤.≫ ≪한 달 전쯤?≫ ≪그때 한밤중에 차마루 씨 집으로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왔었죠?≫ ≪한밤중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요?≫ ≪생각 안 나요? 한 달 전쯤 자정 조금 지나서예요.≫ ≪자정 지나서?≫ 여운은 재빨리 기억을 되짚어봤다. 한 달 전쯤 자정이 지난 시간에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아, 그때!’ 최연화 실장과 오 팀장이 방문했던 때가 생각났다. ‘이걸 어떻게 알았지? 알은척해야 하나?’ 고민하던 여운은 일단 답장을 보냈다. ≪아, 맞아요. 기억나요. 차마루 씨의 친척분들이 오셨었어요. 고모와 고모부라고 했었어요. 대구에 사신다고 했었어요.≫ 알은척은 했지만 그들이 누군지 사실대로 말해 줄 수는 없었고 그들의 실체를 아는 티도 낼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 여운이 정민과 메시지 톡을 하고 있을 때 마루는 차연화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가 밖으로 나가자 차연화가 차 창문을 내리며 마루를 쳐다봤고, 마루는 재빨리 차에 올랐다. 마루는 차연화와 함께 온 오 팀장과 눈인사를 나눈 후 차연화를 바라봤다. “국장님,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오 팀장한테서 기여운 씨 어머니 파일 받았죠?” “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하고 기여운의 엄마하고 어떤 관계인지 7요원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예, 알고 싶습니다.” “내가 국수방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습 기간이 끝난 직후에 남파 간첩 체포 작전에 투입됐었어요. 내가 국수방 요원이 되고 처음으로 체포한 간첩은 겨우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는 아주 어리고 아주 예쁜 여자 간첩이었어요. 나보다도 어린, 정말 어린 간첩이었죠. 위조 신분증으로 북한에서 독일로 잠입했다가 독일에서 다시 미국으로,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동안 신분을 다섯 차례나 세탁하고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 8개월이 걸렸죠. 북한을 떠나 8개월 만에 한국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한국으로 잠입한 지 5개월 만에 우리 국수방 작전 팀에 체포된 거예요. 그 친구는 국수방에서 3년 넘게 조사를 받았어요. 그 친구는 북에 대한,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고 그래서 그 친구가 입을 열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어요. 입을 열고 또다시 1년. 그 친구가 실토한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또 1년.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걸린 거예요. 처음 1년 동안 난 아주 새까만 신참 요원이었기 때문에 직접 취조를 하진 못했어요. 하지만 그땐 국수방에 여자 요원이 귀할 때라서 성별이 같은 내가 가장 오랜 시간 그 친구 곁에 머물렀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죠. 그 친구가 국수방을 떠날 때,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 국수방이 그 친구에게서 빼낼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빼낸 후에 비로소 그 친구를 놓아줄 때 나와 그 친구는 꽤 가까운 관계가 됐어요. 국수방은 그 친구가 다른 남파 간첩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신분을 완벽하게 세탁해 줬죠. 난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그 친구의 소망대로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어요. 솔직히 도와줬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 친구는 워낙 명석하고 똑똑했고 또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해서 스스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으니까. 그 친구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결혼한다고……. 아주 쓸쓸한 결혼식이었어요. 너무나 쓸쓸한……. 부모님도 형제도 없는……. 대학 때 사귄 친구들 몇 명과 학교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내가 전부였죠. 그날, 그 친구는…… 정말 예뻤어요. 그렇게 예쁜 신부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예뻤죠. 너무나 예쁜 신부는…… 결혼식이 진행되던 내내 사무치도록 아프게 흐느꼈어요……. 북에 있는 부모님이 그리워서였겠죠. 북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그리웠겠죠…….”
차연화는 그때 너무나 아프게 울던 그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울컥 가슴이 저며 오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친구의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첫 아이가 돌잔치를 할 때도 그 친구는 참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그 친구의 다급한 연락을 받았을 때는 막 태어난 둘째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에요.” <언니. 뭔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그들에게 들킨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들키다니? 그들이라니?> <한 달 전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미행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밖에 있어요.> <수상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에요. 고향 사람들.> <고향 사람? 북한 사람이라는 거야?> <맞아요. 그들이 왔어요. 그들이…… 날 찾아냈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난 국수방 요원들과 그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어요. 내가 갔을 때……. 내가 갔을 때는…… 그 친구는 거실에 있었어요……. 살해된 채.” 차연화의 말에 마루가 굳은 얼굴로 차연화를 쳐다봤다. “그 친구 말이 사실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북한의 남파 간첩들이 그들에겐 배신자인 그 친구를 처단하기 위해 오랜 시간 뒤를 쫓았고, 결국 발각이 된 거죠. 놀랍게도 그 친구의 시신에는 어떤 방어흔도 없었어요.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살해를 당한 거예요. 온갖 살인 기술을 익히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받았던 간첩인데, 일곱 살 때부터 간첩으로 길러진 살인 병기였는데, 시간이 꽤 흘렀다 하더라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어떤 반항도 방어도 하지 않고 순순히 죽임을 당한 거예요. 그 이유를 우리는 뒤 베란다에서 찾았어요. 뒤 베란다 끝 잡동사니 뒤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잠들어 있더군요. 그 친구는 시끄러운 소리에 아기가 놀라서 울까 봐, 그들에게 아기의 존재를 들킬까 봐 뒤 배란다에 숨겼던 거예요. 기특하게도 그 아기는 울지 않고 잠들어 있었어요. 엄마가…… 살해당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그 친구가…… 윤소정이에요. 그리고 윤소정이 지키려 했던, 어떤 방어도 하지 않고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살해당하면서까지 지켜 낸 그 핏덩이 딸이…… 기여운이에요.” 차연화의 말에 마루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국수방은……, 우리 국수방은 국수방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윤소정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윤소정의 시신만을 수습해서 나와야 했어요. 그건 윤소정의 유언이기도 했어요. 윤소정은 남편과 아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우리는 그래서 핏덩이 아기…… 기여운만 남겨 두고 나와야 했어요. 못할 짓이었죠. 해서는 안 될 짓이었지만 우리로선…… 국수방을 위해, 윤소정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결국…… 모든 게 다 비겁한 핑계죠.” “…….” “윤소정이 살해당한 후 한동안 나는 복지 센터 직원인 척하면서 기여운의 가족들을 도왔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윤소정에게 진 빚을 갚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여운이 일곱 살쯤 됐을 때 나는 해외 파견을 나가게 됐고, 5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을 때 기여운의 가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아니, 자취를 감춘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거죠.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예요. 나는 1년 만에 다시 해외로 파견을 나갔고 3년 후 돌아왔을 때 기여운의 존재를 잊어버렸어요. 너무 쉽게 잊어버린 거죠. 너무 쉽게……. 비겁하게…….” 차연화가 죄책감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국수방은 윤소정에게 큰 빚을 졌어요. 끝까지 지켜 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지켜 주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국수방이 윤소정을 지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기여운이 그렇게나 힘겨운 삶을 살아온 거예요. 윤소정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 나는 기여운이라도 지켜 줘야 해요.” “기여운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죠?” “몰라요. 그리고 앞으로도 몰라야 해요.”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7요원.” “예.” “기여운을 이정민 검거 미끼로 쓴다는 말도 들었죠?” “예.” 마루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으세요. 이정민의 정체가 밝혀졌어요. 임정화가 모든 것을 실토했어요.” 차연화의 말에 마루가 긴장한 얼굴로 차연화를 쳐다봤다. “이정민은 짐작했던 대로 청소부예요. 청소를 담당하는 암살자예요. 대한민국에 망명한 북한 고위층과 변절한 남파 간첩들을 청소하는 암살자.” 차연화의 말에 마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알고 있겠지만 청소를 담당하는 암살자는…… 탈북자와 남파 간첩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까지 남김없이 청소해 버리기로 악명이 높아요. 김정은을 배신한 변절자들은 자손까지 씨를 말려 응징하겠다는 거죠. 변절자들을 처단한 암살자들은 북한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아요. 북한 청소부들이 윤소정을 살해한 직후 기여운의 가족들을 미처 다 암살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나와 국수방 직원들이 복지 센터 사람들인 척하면서 기여운의 가족들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일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도 어느 순간 기여운의 가족들을 놓쳤던 거겠죠. 이정민은 기여운이 누군지 알고 있을 거예요. 변절한 남파 간첩의 딸이라는 걸 알고 접근한 것 같아요. 남파 간첩의 가족까지 청소하기 위해서.” 차연화의 말에 마루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버렸다. “국장님, 놈이 청소 암살자인데, 기여운이 누군지 알고 있는데도 기여운을 미끼로 쓴단 말입니까?” 마루가 격앙된 목소리로 묻자 오 팀장이 마루를 진정시켰다. “끝까지 들어. 끝까지.” “작전이 시작되기 전 기여운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거예요.” “예?” “그래서 왔어요. 7요원에게 알려 주려고.” 차연화의 말에 마루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채 차연화를 바라봤다. “윗선에서 어떤 명령이 내려왔든 난 절대 기여운을 이정민의 미끼로 쓸 생각이 없어요. 기여운의 엄마인 윤소정은 지키지 못했지만 기여운만큼은 지킬 거예요.” “그렇다면…….” “7요원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기여운을 숨길 장소는 내가 이미 마련해 뒀어요.” “국장님, 이정민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왜 지금 당장 검거하지 않는 겁니까?” “임정화에게서 이번 주 금요일에 북한 대남 공작 기구 소속 인사가 극비리에 입국해서 이정민을 비롯한 남파 간첩들과 접촉한다는 정보를 받아 냈어요. 임정화가 시간과 장소도 모두 실토했고, 국수방에서는 그곳을 쳐서 한꺼번에 검거한다는 작전 시나리오를 마련해 뒀어요. 7요원은 작전 전에 기여운을 이동시키고 작전에 합류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장님, 만약 기여운을 숨겼다는 걸 윗선에서 알게 되면…….” “이번 일은 내가 책임져요. 7요원은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알겠습니까?” “국장님.” “알겠습니까, 7요원?” 마루가 고민하는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보자 오 팀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로선 차연화 국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 ≪친척 아니에요.≫ 정민의 답장이 도착했다. 당연히 친척이 아니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여운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요?≫ ≪조직 사람들이에요.≫ ‘그것까지 알고 있었구나.’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때 왔던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거든요.≫ ≪여자? 고모요?≫ ≪그 여잔 차마루 씨의 고모가 아니라 상사예요. 그리고 여운 씨 어머니가 탈북해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여운 씨 어머니를 담당했던 요원이에요.≫ ‘그럴 수가……. 국장님이 엄마를 담당했던 요원이라고?’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내가 5년 전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우리 어머니를 알아보고 감시하러 왔던 사람도 바로 그 여자예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랬군요.≫ ‘최연화 국장은 그때부터 국수방 요원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최연화 국장은 내가 우리 엄마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날 그들하고 차마루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었어요?≫ 정민의 질문이 도착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여운이 긴장한 얼굴로 방문 쪽을 쳐다봤다. 그 바람에 정민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운 씨? 왜 대답을 안 해요?≫ ≪잠깐만요. 밖에 차마루 씨가 있는 것 같아서 눈치 보고 있어요.≫ 여운이 긴장한 얼굴로 재빨리 답장을 썼다. 여운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휴대전화 소리 모두를 무음으로 바꿔 버렸다. ≪그렇군요. 계속 밖에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혹시 내가 갑자기 대답을 안 하면 차마루 씨가 방에 온 거예요. 대답 못 하더라도 이해해 줘요.≫ ≪알았어요.≫ ≪그리고 그날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난 못 들었어요. 인사만 하고 방에 있었거든요. 차마루 씨하고 그 사람들은 차마루 씨 방에서 얘기했어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여운이 빠른 손놀림으로 답장을 쓰고 전송 버튼을 터치하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여운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이불 속에 감춰 버렸다. 여운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마루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안 잤어?” “잠이 안 와서요. 차마루 씨도 안 잤어요?” “나도 잠이 안 오네.” “왜요?” “기여운이 못 자니까.” “내가 못 자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또 감시 카메라 봤어요?” “아니야. 카메라 기여운이 가려 놨잖아.” “감시 카메라로 본 게 아니면 내가 못 자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코 고는 소리가 안 들리더라고.”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피식 하고 웃었다. “방문 앞에서 내가 코를 고는지 안 고는지 듣고 있었어요?” “응. 듣고 있었어.” “그런 짓을 왜 해요?” “왜 했겠어. 여친이 잠을 못 자니까 마음이 아파서 그랬지.” 마루의 유치찬란한 대사에 여운이 징그럽다는 듯 낯을 찡그렸다. “대체 그런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는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이런 대사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나?” “전혀, 절대 아니거든요?” “그럼 이런 대사는 어때?” “어떤 대사요?” 여운이 또 얼마나 이상한 대사를 하려나 기대도 하지 않고 물어봤다. “같이 잘까?” 마루의 말에 여운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온몸이 쪼그라들 것 같으니까 그만하고 가서 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같이 잘까?” “또 무슨 수작이에요?” “아무 수작 아니야. 그냥 같이 자자. 19금도 안 할게. 약속해.” “문이나 닫고 가서 자요.”
여운이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다는 투로 말하고 자리에 눕는데 마루가 무작정 불을 꺼 버리고 들어오더니 여운의 옆자리에 누웠다. “어딜 누워요? 또 왜 이래요?” 여운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마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누워. 누워 봐.”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눕혔다. “같이 안 잔다구요.” 여운이 일어나려는데 마루가 또다시 끌어당겨 눕혔다. “왜 이래요?” “같이 자자고.” “안 잔다구요.” “설마 부끄럼 타는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그럼 같이 자자. 불 끄고. 나란히 누워서.”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막 같이 자자고 할 수가 있어요?” “같이 자자는 말을 우회적으로 할 방법이 있나? 혹시 알면 알려 줘. 우회적으로 다시 말할게.” “그건…… 나도 몰라요.” 같이 자자는 말을 우회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여운도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거봐. 그러니까 대놓고 말한 거야.” “우리가 같이 막 자고 그럴 관계는 아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같이 자면 큰일 나는 관계도 아니잖아.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 “그건…… 그건 그렇죠.”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 미루에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럴 기분이 아니에요.” “알아. 하지만 혹시나 내가 기여운한테 단 1프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기여운의 그리움과 외로움에.” “바닷가에 데려가 줘서 50프로나 도움이 됐어요. 도움 더 안 줘도 괜찮아요.” “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어.” “그럴 필요 없대두요.” “그럴 필요 없는데도 그러고 싶어.” 마루가 부득부득 우겼다. “기여운.” “왜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배 아프면 말해. 배 문질러 줄게.” “헐.” “보채도 괜찮아. 내가 업어 줄게.” “헐! 뭐예요? 엄마 노릇 하겠다는 거예요?” “엄마를 대신해서 남자 친구 노릇 해 주려고.” “됐거든요?” “기여운.” “부르지 말고 그냥 자요.” “기여운.” “부르지 말고 자라구요.” “기여운.” “왜 자꾸 불러요?” 여운이 획 돌아누우며 버럭버럭하자 마루가 씩 웃었다. “안아 줄까?” “됐거든요!” 여운이 버럭 소리쳤다. “수작 피우지 말고 당장 차마루 씨 방에 가서 자요!” “안아 줄게.” “됐다구요! 절대 싫어요!” 여운이 딱 잘라 거절한 후 또다시 획 돌아눕는데 마루가 여운을 등 뒤에서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이거 놔요! 수작질 안 한다더니 이게 수작이지, 뭐가 수작이에요?” “뽀뽀해 줄까?” “싫다구요!” 여운이 마루를 밀어내려고 낑낑거렸지만 마루는 여운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당장 놔요. 놓으라구요!” “펄떡거리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싫다는 사람 왜 끌어안고 이래요? 숨 막히니까 놔줘요!” “풀떡거리니까 점점 더 세게 안게 되고 그러니까 숨 막히는 거잖아. 가만히 있으면 숨 막히지 않을 거야.” 마루가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점점 더 꽉 끌어안으며 말하자 여운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반항을 멈추고 내버려 뒀다. “거봐, 가만히 있으니까 서로 편하고 좋잖아.” “전혀 안 편하고 전혀 안 좋거든요?” “가만히 느껴 봐. 분명히 좋을 거야.” “흥!” 여운은 콧잔등이 떨리도록 거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할 얘기가 있어.” 마루가 갑자기 진지해진 말투로 말했다. “해요.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잖아요.” “굉장히…… 기분 나쁠 얘기야.” “기분 나쁠 얘기면 하지 말아요. 아니, 그냥 해요.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할 사람이니까.” “하면 안 되는 얘긴데, 기여운한테는 극비인 얘긴데 나로선 안 할 수가 없어.” “나한테 극비인 얘기라구요?” 그제야 여운의 말투도 진지해졌다. “먼저 미리 말해 둘 게 있어.” 마루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 작전은…… 내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라는 거. 난 지금 그 작전을 막아 보려 애쓰고 있다는 거. 그것만은 알아줘.”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뭐 얼마나 기분 나쁠 얘기기에 그렇게 뜸을 들여요?” “곧 이정민 검거 작전이 시작된다고 했지?” “네.” “국수방에서는…… 이정민 검거 작전에 미끼를 쓸 계획이야.” “미끼요?” “음, 미끼.” “그런데 왜…… 내가 기분이 나쁠 거라는 거예요?” 여운은 마루가 내뱉은 미끼라는 단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끼쳐 오는 것을 느꼈다. “왜냐면 그 미끼가…… 기여운이야.” 여운이 이정민 검거 작전의 미끼라는 마루의 말에 여운이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미끼라니요?” 여운이 얼어붙은 얼굴로 물었다. “국수방에서는 이정민 검거 작전에서 실수가 없도록 기여운을 미끼로 쓸 계획이야.” 마루도 몸을 일으켰다. 여운은 크나큰 충격으로 아무 말도 못 한 채 마루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막아 보려고 했는데…… 나뿐만이 아니라 국장님도, 오 팀장님도 기여운을 이 작전에서 제외시키려고 노력했는데…….” 마루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끼……. 미끼라니……. 이정민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어. 모두 다…….’ 여운은 절망감을 느끼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마루를 바라봤다. 소름이 끼쳤다. 두려움도 끼쳐 왔다. 오금이 저리고 몸이 떨렸다. 이 모든 것이 이정민이 말한 그대로라니. 믿고 싶지 않았던, 믿으려 하지 않았던 추악한 비밀들이 모두 까발려져 이제야 비로소 진실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함정을 파 놓은 사람은 이정민이 아니라 차마루였어…….’ 이정민이 아무리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을 보여 줬어도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마루를 향한 믿음이 있었다. 여운이 마루를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마루가 여운에게 보여 주었던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던 말과 행동들 때문에 여운은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 간첩 잡는 미끼라는 말을 한 걸까?’ 마루가 그랬었다. 기여운에게는 극비라고. 정말 극비였다. 여운이 생각하기에도 간첩의 미끼로 쓰인다는 것은 여운 자신에게만은 극비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마루는 그토록 중요한 극비를 당사자에게 알려 준 것이다. 그것은 함정을 파 놓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지? 왜 나한테 말한 거지?’ 조금 전까지 함정을 파 놓은 사람이 마루였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과 분노를 느꼈던 여운은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기여운.” “말해요.” 여운이 긴장으로 굳어 버린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어?” “무슨 말이에요?” “난…… 기여운을 빼돌릴 생각이야.” “빼돌린다니요?” “기여운이…… 미끼가 되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어. 기여운이 지금처럼 계속 나하고 같이 있으면 국수방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해. 꼼짝없이 미끼가 돼야 해. 그건 너무 위험해. 난 기여운이 미끼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아. 기여운이 위험해지는 걸 용납할 수 없어. 싫어. 그래서 난 기여운을 이 마을에서 내보낼 거야. 기여운을 숨길 거야,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날…… 이 마을에서 내보낸다구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이정민을 검거하기 전까지 몸을 숨겨. 내가 도와줄게.” 이정민의 검거 작전에 미끼로 쓰려던 여운이 사라진다면 여운을 보호하고 있던 마루에게 피해가 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만약 여운이 사라지면서 이정민 검거 작전까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땐 마루에게 불이익을 넘어 어떤 엄중한 책임을 물릴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왤까? 차마루 씨는 왜 자신에게 피해가 갈 걸 알면서도 날 숨기려는 걸까?’ “왜요?” “왜라니?” “내가 이정민 검거 작전의 미끼라는 거 나한테는 극비라고 했죠?” “맞아.” “극비를 나한테 말한 이유가 뭐예요? 왜 나한테 말했어요? 왜 나를 숨기려는 거예요? 내가 사라지면 차마루 씨가 곤란하잖아요.” “내가 곤란해지는 건 신경 쓰지 마.” “왜, 왜 차마루 씨가 곤란해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날 숨기려는 거예요? 말해 줘요. 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혹시 내가 불쌍해서 그래요? 가족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불쌍해서 그래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여운의 얼굴을 감쌌다. “기여운……, 참 둔하다.” “……?” “정말 모르겠어?” “…….” “내가 기여운을 사랑해서 그래.” 마루가 두 손으로 여운의 얼굴을 꼭 감싼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뭐라구요?” “내가…… 기여운을 사랑한다고.” 여운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듯,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은 전혀 모르는 듯한 얼굴로 마루를 바라봤다. 사랑……. 사랑이라니……. 여운은 진공상태에 빠진 기분이었다. 사랑이라니……. 갑자기 사랑이라니……. “안 믿어져?” “차마루 씨는…… 믿어져요?” 여운의 되물음에 마루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믿어져. 지금은 믿어져.” “날…… 사랑한다구요?” “음. 사랑해. 그렇게 돼 버렸어.” 마루가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말투로 속삭였다. “왜, 어떻게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랑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아서. 기여운을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 같아서.” 마루가 진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니. 차마루가 기여운을 사랑한다니. ‘이것도 연기일까? 연기? 이 사람의 눈빛이 진심이라고 말하는데?’ 여운은 마루의 눈동자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려는 듯 마루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기여운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하지만 괜찮아. 내가 사랑하면 되니까.” “아니, 안 돼요.” 여운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날 사랑하면 안 돼요. 날 사랑하면…… 차마루 씨 위험해요.” “난 그런 거 안 믿어.” “아니, 믿어야 해요. 날 사랑하면…… 죽는다구요.” 여운이 애가 타는 얼굴로 말했지만 마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그런 거 절대 안 믿어. 그따위 말 나한테는 안 통해.” “차마루 씨 난…….” 여운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말했지? 난 그런 거 안 믿어. 나한테는 안 통해.” “차마루 씨…….” “사랑해, 여운아. 그것만 기억해.” “안 돼요. 그럴 수 없어요.” “아니! 내가 사랑한다는 거 그것만 생각하고 나만 믿어. 난 절대 죽지 않아.” 마루가 여운의 얼굴을 감쌌다. “절대 안 죽어. 널 두고 절대 못 죽어. 널 두고는 절대 절대 못 죽어. 내가 기여운을 지킬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기여운은 내가 지킬 거야. 내가 네 옆에 있을 거야. 사랑해, 여운아.” “사랑하면 안 된다구요. 그러면 안 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