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19화 (19/21)

여운이 전화를 끊자 정민이 마루의 전화냐고 물었고, 여운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엄마 사진 말이에요. 우리 엄마 사진을 어떻게 이정민 선생님이 갖고 있다는 거죠?”  “사진 보면서 설명할게요. 여기서 간단하게 얘기할 문제가 아니에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지? 차마루 씨한테 집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망설이던 여운은 한참 만에 결심했다.    “그래요. 가요. 가서 우리 엄마 사진이 맞는지, 우리 엄마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들어 볼게요.”    여운은 뭔가 엄청나게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 버린 엄마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마루와의 약속을 어기고 정민을 뒤따랐다.  정민의 집으로 온 여운은 라면을 끓여 주겠다는 정민의 제의를 거절했다. 지금은 도저히 뭔가를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정민 선생님이 지금 배가 고파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 아니라면 라면은 나중에 먹고 우리 엄마 얘기 먼저 해 주세요.”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정민은 여운을 거실 소파에 앉혀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운은 조각을 하는 예술가 집이라서 그런지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참 예쁘고 멋진 정민의 집 안 인테리어를 요만큼도 구경하지 않았다. 집이 예쁜 줄도 모르고 멋진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쁘고 멋지면 뭣 하겠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여운의 머릿속과 마음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엄청나게 복잡하기만 했다.  방으로 들어갔던 정민이 예쁜 서류 봉투 크기의 봉투를 들고 나왔다.  정민은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더니 첫 번째 사진을 여운에게 내밀었다.  여운은 정민이 내민 사진을 받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자신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내 사진이잖아요.”  “맞아요. 여운 씨예요.”  “누가 찍은 거예요?”  “내 친구가요.”  “이정민 선생님 친구가요? 이정민 선생님 친구가 왜 내 사진을 찍어요?”  “정말 알고 싶어요?”  “당연하죠.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나를 도촬했잖아요! 도대체 왜 내 사진을 찍은 거예요?”    여운이 약간 흥분하자 정민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랜 시간 여운 씨를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비로소 올 초에야 여운 씨를 찾았어요.”  “나를 찾았다녔다구요? 누가요? 왜요?”  “내가. 여운 씨를 꼭 만나야 해서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알아듣게 설명해 줘요.”  “솔직히 말하면 내 친구가 찍은 게 아니라 내가 고용한 사립 탐정이 찍은 거예요. 내가 여운 씨를 찾아 달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왜요?”  “여운 씨 어머니 때문에요.”  “우리 엄마요?”  “잠깐만, 이 사진 먼저 봐요.”    정민이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여운에게 내밀었고, 여운은 얼른 받아 들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여자 두 명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고 몇십 년 된 듯 굉장히 오래된 사진이었다. 놀라운 것은 배경이었다. 여자 두 명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뒤쪽으로 커다란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틀림없이 북한 국기야.’    여운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이 국기 말이에요.”    여운이 조심스럽게 정민을 쳐다봤다.    “이 국기…….”  “맞아요. 북한 국기예요.”    정민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사진 속의 이 장소가…… 북한이에요?”  “맞아요. 북한이에요.”  “그럼 이 여자분들도 북한 사람이라는 뜻이네요?”  “맞아요.”  “우리 엄마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 북한 사람들 사진을 보여 주는 거예요?”    여운이 긴장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사진을 잘 봐요. 사진 속의 사람을.”    정민이 사진 속 두 여자 중에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고, 여운은 정민이 손가락으로 짚은 사람을 유심히 바라봤다. 잠시 후 여운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더욱 가까이 들여다봤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두 명의 여자 중에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여운의 엄마였던 것이다.    “여기, 이 사람…….”    여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예요.”        19장        여운의 말에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우리 엄마예요. 우리 엄마…….”    여운의 목소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맞아요. 여운 씨 어머니예요.”  “우리 엄마…… 맞죠? 진짜 맞죠?”  “맞아요. 진짜예요.”  “우리 엄마…… 고등학교? 아니면 아가씨 땐가요?”  “고등학교 다닐 때예요.”    여운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등학교 다닐 적의 엄마의 모습은 지금 여운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참 예뻤네요.”  “예뻤어요.”  “자, 이 사진도 봐요.”    정민이 사진 한 장을 더 내밀었다.  두 번째 사진도 여운의 엄마 사진이었다. 혼자 찍은 독사진이었는데 화장을 하고 잘 차려입은 것으로 봐서 처녀 때인 것 같았다.    “아가씨 때인가요?”  “맞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스무 살, 스물한 살 정도 됐을 때래요.”  “그렇구나…….”  “여운 씨하고 많이 닮았어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왜…… 북한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이상하죠?”  “네, 너무 이상해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우리 엄마가 북한 사람이에요?”  “맞아요.”  “맞는다구요? 우리 엄마가 북한 사람이라구요?”    여운은 충격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는 것 같았다.    “우리 엄마가 북한 사람이라니……. 그런데 이정민 선생님이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알아요?”  “여운 씨 어머니, 여운 씨 엄마……. 내 이모예요.”  “뭐, 지금 뭐라고, 뭐라구요?”    여운이 깜짝 놀라 정민을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이정민 선생님 이모라구요? 그게 무슨…….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여기, 여운 씨 엄마 옆에 있는 사람이 우리 엄마예요. 두 사람은 자매고. 그러니까 여운 씨하고 나는 이종사촌지간이에요.”    여운은 완전히 넋이 나간 버린 얼굴로 정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  국수방에서 이정민은 간첩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마루와 함께 간첩 이정민을 경계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는데 간첩과 이정사촌지간이라니. 누군가 지어내도 이렇게 엉뚱하게 지어낼 수 없고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여운이 알고 있기론 이정민은 간첩이었다. 그리고 여운의 어머니는 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북한 사람인 여운의 어머니의 조카가 간첩 이정민이다?    ‘그럼…… 우리 엄마도 간첩이었다는 뜻?’    여운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으로 두려워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여운이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가 북한 사람이었다니. 어머니의 조카가 간첩이라니. 간첩 이정민과 이종사촌이라니.  간첩 이종민과 이종사촌? 사촌이 간첩인데 여운은 여태껏 사촌이 간첩이라는 물증을 찾기 위해 마루와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돼버렸다.    “혼란스럽죠?”    여운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챈 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치 네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너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듯이.    “네, 너무 혼란스러워요. 너무 혼란스러워서…… 믿어지지가 않네요.”    여운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이제 설명해 줄게요. 너무 놀란 것 같으니까 잠깐만요.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얘기해요. 여운 씨 얼굴이…… 곧 쓰러질 것 같아요.”    정민이 안쓰러운 듯 달래듯이 말한 후 주방으로 가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받아 찻물을 끓였다. 싱크대 수납장에서 한자로 적힌 차 통을 꺼냈는데 아무래도 차를 우려낼 모양이었다.  여운은 정민이 찻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는 것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이정민은 간첩인데 간첩과 이종사촌이라니. 너무 황당하고 기막히고 어이없었다.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거짓말이고 백 퍼센트 거짓말이고 간첩이 기여운을 포섭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고, 그의 거짓말에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이정민이 왜 나 같은 사람을 포섭하려는 거지?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라면 우리 엄마 사진을 어떻게 갖고 있는 거지?’    백 퍼센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거짓말이라고 딱 잘라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엄마의 사진 때문이었다.  여운은 다시 사진을 들여다봤다. 백 번 보고 천 번을 봐도 엄마였다. 북한 인공기를 배경으로 닮은 듯도 하고 닮지 않은 듯도 한 여자와 함께 사진을 찍은 여자는 아무리 보고 또 고쳐 봐도 여운의 엄마였다. 독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엄마였다.    ‘이렇게 오래된 사진도 조작할 수 있을까?’    좋다. 조작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정민이 왜? 무엇 때문에 여운의 엄마 사진을 조작해서 여운에게 들이댄단 말인가. 여운을 포섭하기 위해? 포섭을 한다? 대체 여운이 이정민에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포섭을 한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차 들어요.”    정민이 따뜻한 물에 우려낸 차를 권했다.  여운은 정민이 내준 차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기계처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감각이 마비가 된 듯 차 맛이 좋은지 나쁜지 뜨거운지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많이 놀랐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감이 안 잡히죠?”  “네……. 무슨 얘긴지, 어떻게 된 건지…… 너무 혼란스러워서 힘들어요.”  “차근차근 설명해 줄게요.”  “네, 설명이 필요해요. 아주 자세히.”  “그래요. 자세히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여운 씨 어머닌…… 탈북민이었어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놀란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우리 엄마가 탈북민이었다구요? 그러니까 북한을 탈출했다구요?”  “맞아요.”    탈북민이라면 북한 인공기도 설명이 됐다.    ‘간첩이 아니었구나.’    탈북민이라는 말에 여운은 괜스레 안도감마저 느꼈다.    “우리 엄마가…… 탈북민이었다니…….”  “나도 탈북민이에요.”  “이정민 선생님두요?”    여운이 두 번째로 놀라며 정민을 쳐다봤다.

“난 젖먹이였을 때라 부모님한테 전해 들은 거예요. 탈북할 때 외갓집 가족들이 모두 함께 탈북한 거였어요.”  “온 가족이 모두 함께요?”  “그래요. 어떻게 된 거냐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두 분, 이모,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그리고 나. 모두 여덟 명이었대요. 그때 이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닐 때였다고 해요. 그런데 모두 함께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중국에서 제3국으로 넘어가려 할 때 문제가 생겼대요.”  “어떤 문제요?”  “되도록 다 함께 있으려고 했지만 무리 지어 움직이면 의심을 받으니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세 무리로 나눠서 움직이게 됐대요. 그런데 그때 그만 외할머니와 외삼촌 두 분은 중국 공안에 발각이 돼서 다시 북한으로 끌려갔대요.”  “북한으로 끌려갔다구요?”  “예,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대요.”    정민이 속이 상한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아버지와 이모가 중국에서 제일 먼저 탈출했고 1주일 뒤에 우리 엄마 아버지 내가 탈출했는데 열흘 후 마지막으로 중국을 탈출하려던 외할머니와 외삼촌 두 분이 국경에서 중국 공안에 발각이 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외할머니, 외삼촌들과 헤어지게 된 거네요.”  “그렇죠.”  “그럼 북한으로 끌려간 외할머니와 외삼촌 두 분은 어떻게 됐대요?”  “제3국 도착한 후부터 계속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소식을 들을 수 없었어요. 틀림없이…… 처형됐겠죠. 탈북했다가 들킨 사람들은 무조건 총살이니까.”  “처형, 총살…….”    처형과 총살이라는 말에 여운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외갓집 식구들과 부모님은 북한을 탈출할 때 약속한 게 있대요. 만약 북한 인민군이나 중국 공안에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모두 자결하기로. 그런데 차마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은 자결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죽을 각오로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에 도착해서 몇 달을 숨어 지내다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탈북민을 돕는 한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탈출해 다른 나라를 거치고 또 다른 나라를 거치고 겨우 캄보디아에 도착했고,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거예요. 북한을 탈출해서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꼬박 2년 만에야 자유의 땅인 한국으로 온 거예요.”    여운은 심장이 조일 만큼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끼며 정민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한 달 만에 겨우 다시 만난 외할아버지와 가족들은 탈출을 도운 한국 선교사로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중국 공안에 발각돼 북한으로 압송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을 때 죽음만큼이나 큰 아픔을 느꼈다고 해요.”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가족이, 피를 나눈 혈육이 함께 탈출하지 못하고 북한으로 끌려갔다는데,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지 뻔히 아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만 흘렸을 만큼 고통스러워했다고 해요. 차라리 다 같이 죽자는 말도 했을 만큼…….”  “무슨 말인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것 같아요.”  “예, 맞아요.”  “그 후에…… 다 같이 한국으로 온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어디로 망명할 건지 서로 의논을 했는데 외할아버지와 이모는 대한민국으로 오길 원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미국으로 가길 원했대요. 탈북할 때의 계획은 대한민국으로 오는 것이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고 해요. 한동안 어느 나라로 망명할 것인가를 두고 꽤 많이 다퉜대요. 결국은 외할아버지와 이모는 대한민국을 택했고, 우리 부모님은 미국을 택했죠.”  “어렵게 북한을 탈출했는데 캄보디아에서 가족이 헤어지게 된 거네요?”  “그렇죠.”  “왜, 왜 이정민 선생님 부모님은 미국으로 가길 원했대요? 원래 한국으로 오기로 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미국으로 가신 거예요?”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북한으로 압송됐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두려웠대요. 대한민국으로 오는 것이.”  “두려웠다구요?”  “북한이 바로 위에 있으니까요. 미국은 북한하고 한참 멀지만 대한민국은 북한과 가장 가까우니까……. 북한으로 압송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간첩들한테 잡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모든 것이 너무 두려웠대요.”  “아……. 그랬군요.”    일리 있는 이유였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탈북민들이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간첩들한테 잡혀서 죽임을 당했는지,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는지는 여운으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탈북민이라면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일인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는 왜 한국으로 오려고 하셨던 걸까요? 외할아버지도 이정민 선생님 부모님처럼 두렵지 않으셨대요?”  “두려우셨겠죠. 하지만 꼭 한국으로 오셔야 했을 거예요. 왜냐면 외할아버지 고향이 바로 여기거든요.”  “여기요? 이 마을?”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맞아요. 바로 이 마을.”  “아, 그랬구나……. 그럼 외할아버지와 엄마만 한국으로 온 거예요?”  “아뇨.”  “아니라니요?”  “우리가 먼저 미국으로 떠나고 한 달 후 외할아버지와 이모가 대한민국으로 오기로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캄보디아에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구요? 어떻게, 왜요?”    여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원래 지병이 있으셨는데 북한을 탈출하면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북한으로 압송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러다 보니 심적으로 너무 힘드셔서 악화가 됐던 거예요.”  “아……. 결국 한국에 못 오셨군요.”  “그랬대요…….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탈북한 거였는데 결국은 고향 땅을 밟지 못하신 거예요.”    정민과 여운은 동시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엄마 혼자 한국으로 온 거예요?”  “예.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먼저 미국으로 떠나 버렸고, 여러 사정으로 연락이 닿지 않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모는 어쩔 수 없이 혼자 한국으로 와야 했대요. 고향에 묻어 달라는 외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에라도 한국에 와야 했죠. 이모는 외할아버지 유골을 묻어 드리고 나서 미국으로 와서 우리 가족과 함께 살 계획이었는데, 그게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요. 한국으로 오자마자 국가 기관에서 한동안 이모를 보호하면서 조사도 했고, 또 교육도 받고 하면서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버렸대요.”    ‘국가 기관이라면…… 국수방이겠구나.’    “시간이 지났다니요?”  “이모는 미국으로 가길 원했지만 이미 한국으로 왔고, 한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미국 정부와의 협의도 쉽지가 않았고. 그렇게 하루 이틀이 한 달 두 달이 되고, 한 달 두 달이 1년 2년이 되고, 그러다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거예요.”  “우리 엄마하고 미국으로 가신 이정민 선생님 부모님하고는 그때 완전히 헤어지고 못 만난 거예요?”  “아뇨. 이모가 한국에서 살겠다고 최종적으로 결정한 후에야 기관에서 이모한테 우리 가족의 연락처를 알려 줬대요. 그러니까 이모가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자 정부 조직에서는 이모가 포기할 때까지 일부러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헤어지고 5년 만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대요.”  “아……,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맞아요. 다행이에요.”  “그럼 한국에 적응해서 살면서 우리 아빠를 만난 거예요?”  “맞아요.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여운 씨한테 충격적인 얘기일 수 있어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민이 침착한 얼굴로 말했고, 여운은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는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서 북한으로 압송된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여러 경로로 북한 사람들과 접촉했던 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도 미국에서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노력한 것과 같은 마음이었겠죠.”  “그건 당연히 그래야 했던 거 아닐까요?”  “맞아요.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가족인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지 대한민국 정부 조직에서는 내통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통요?”  “간첩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오해한 거죠.”  “설마……. 말도 안 돼요!”    여운은 분함과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여운 씨. 정부 조직에서 이모를 그렇게 오해한 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이상한 게 아니라구요? 우리 엄만 단지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의 안부를 알아보려 했던 것뿐이잖아요.”  “하지만 이모는 탈북민이었어요. 내 생각에 이모가 조심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조심하다니요? 뭘 조심해요? 탈북민이라고 해서 간첩하고 내통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탈북민이라고 해서 간첩하고 내통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이모는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정한 탈북민뿐 아니라 일본 조총련계 사람들과도 접촉을 했어요.”  “일본 조총련계…….”    여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조총련계라면 일본에 살지만 국적이 북한이라는 말을 여운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엄마는 북한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뜻이 됐다.    “이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족의 생사를 알아보려 했던 건데 솔직히 오해받기 좋았던 거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전혀 달갑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게요…….”    여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모는 탈북민과 탈북민이 소개한 중간 브로커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한민국 조직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 조총련계 사람과 접촉한 것도 들켜 버렸어요. 결적정인 사건은 일본 조총련계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간첩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는데 그 사람이 이모에 대해 이상하게 진술을 하면서 상황은 이모에게 너무나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 진술을 하다니요?”  “그 조총련계 사람이 이모를 계획적으로 탈북해서 한국으로 잠입한 간첩이라는 식으로 진술을 했대요.”  “그럴 수가……. 사실이 아니잖아요!”    여운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사실이 아니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한 거죠?”  “조총련계라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줄이려고 거짓 진술을 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아니면요?”  “대한민국 조직에서 그런 거짓 진술을 요구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거짓 진술을 요구했다구요? 그게 가능한가요?”    여운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정민의 대답에 여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모는 붙잡혀 가서 아주 오랫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풀려나긴 했지만 감시는 더욱 심해졌대요. 그런데 하필 그때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생사를 알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요. 어머닌 그날 이모와의 통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세요. 이모가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이번엔 틀림없다고,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대요. 이번엔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요. 어머닌 이모를 말렸다고 해요. 지금은 감시가 너무 심하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구요. 하지만 이모는 미룰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인상착의나 신상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는 데다가 다행히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말했고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있는 곳도 알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이모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이모로선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이 대한민국 땅에는 오로지 이모 혼자였으니까. 너무 외롭고 너무 그리웠을 거예요. 가족이 말이에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람을 만난 건데……, 그런데 그 사람은…… 또 다른 간첩이었던 거예요.”  “아!”    여운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쏟아 내고 말았다.  첫 번째 조총련계 간첩 사건 때문에 감시가 심해졌다면 그때부터는 되도록 아무하고도 접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그건 엄마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그리웠으면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가족의 생사를 알고 있다는 그 간첩을 또 만났을까.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안타까움에 가슴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이모와 간첩이 만나기로 한 날, 간첩을 추적 중이던 정부 조직 사람들에게 들켰고 곧바로 간첩 검거 작전이 시작됐는데…….”    정민이 갑자기 설명을 멈추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데요?”  “그게 좀…….”  “왜……. 왜 갑자기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여운 씨가 너무 괴로워할까 봐…….”    정민이 몹시 괴로운 얼굴로 망설였다.    “말해 줘요. 간첩 검거 작전이 시작되고 뭐가 어떻게 됐는데요? 우리 엄마가 어떻게 됐는데요? 또 잡혀간 거예요?”  “그 간첩은 총기까지 꺼내 들고 극렬하게 저항했고, 되도록 생포하려던 정부 조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어떻게……?”  “간첩과 함께…… 이모까지…… 사살됐어요.”    *    대구에 위치한 안전가옥에서 오 팀장을 만난 마루는 심각한 표정으로 오 팀장이 건넨 파일을 읽고 있었다. 기여운과 관련된 파일이었는데 파일 내용은 실로 놀라웠다.  마루는 한참 만에 파일을 덮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파일에 담긴 내용이 모두 사실입니까?”    마루의 물음에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놀랍지? 나도 놀랐다.”  “기여운의 어머니가 국수방과 그런 인연이 있었다니……. 기여운은 알고 있습니까?”  “전혀.”  “기여운의 돌아가신 아버님은요?”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다. 국장님이 말하지 않았어.”  “기여운은 계속 몰라야 하겠죠?”  “당연히. 알아서 좋을 것이 전혀 없으니까. 국장님은 너한테도 이 파일을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 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보여 주는 거야.”  “왜…… 제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기여운에 대한 네 감정 때문에.”  “제 감정요?”  “달라졌잖아.”    오 팀장이 돌직구를 던지자 마루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봤다.    “제가…… 달라진 것 같습니까?”  “아니야?”  “…….”  “말해 봐. 어느 정도인 거야?”  “…….”  “좋아하냐?”  “…….”  “남자 새끼가 좋아하면 한다, 아니면 아니다 말할 것이지 뭘 질질 끌고 그래? 좋아해, 아니야?”  “좋아합니다.”    마루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찍은 거야.”  “예?”    마루가 낚였다는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보자 오 팀장이 픽 웃었다.    “국장님하고 같이 갔던 날, 기여운이 내 머리털 뽑으려고 했던 날 말이야. 그때 눈치챘어.”  “그땐…… 그땐 좋아하지 않았을 땝니다.”  “좋아하지 않았을 때긴 뭐가?”  “그땐 정말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어?”  “그땐…….”    정말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하려던 마루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 팀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맞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기여운은 어때?”  “기여운은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뭐야? 그럼 짝사랑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루야.”  “예.”  “네가 기여운을 좋아하는 건 국수방 사람은 몰라야 한다.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마루야.”  “예.”    마루의 얼굴을 다소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오 팀장은 낮은 숨을 한 번 내쉰 후 곧 입을 열었다.    “네가 기여운을 이정민 검거 작전에서 제외시키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게 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곧 이정민 검거 작전이 시작될 거다.”  “임정화가 이정민에 대해서 진술했습니까?”  “모르쇠로 일관하던 임정화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어. 조만간 이정민에 대한 진술을 받아 낼 거야. 임정화의 입에서 이정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작전 개시다. 주말부터 마을 인근에 요원들 배치할 거야. 이정민 검거 작전이 시작되면 그때 기여운을 활용할 생각이야.”  “기여운을 활용하다니요?”    마루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도 그렇고 국장님도 그렇고 되도록 기여운은 작전에서 제외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윗선에서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 이정민만 체포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래서요?”  “윗선에서는 기여운을…… 미끼로 쓰길 원해. 이정민을 낚을 미끼.”  “말도 안 됩니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입니다!”    마루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제가 국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루가 벌떡 일어나자 오 팀장이 찌푸린 얼굴로 마루를 붙잡았다.    “앉아, 자식아.”    오 팀장은 마루를 억지로 끌어 앉혔다.    “국장님께 말해도 소용없어. 국장님도 별수 없어. 윗선에서 그렇게 하길 원하는 이상 국장님도 나도 다른 방법이 없어.”  “윗선이라고요?”  “그래, 윗선. 누군지 알잖아.”  “그럼 제가 직접 윗선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윗선이 널 만나 준다냐?”    오 팀장의 말에 마루의 얼굴이 좌절로 일그러졌다.    “팀장님! 기여운은 민간인입니다.”  “알아. 알고 있어.”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 알고 있다고.”  “만약, 만약 잘못되면요?”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오 팀장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항력적인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발생 가능한 변수마저도 제거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어.”  “팀장님, 기여운이 많은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기여운은 훈련받은 요원이 아닙니다. 민간인입니다. 어떻게 민간인을 간첩 작전의 미끼로 쓴단 말입니까?”  “말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야. 우리도 알아. 하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그건 불법입니다!”  “불법이라…….”    오 팀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 국가수호방위국의 최고 대장께서 국무총리 자리를 노리고 있단다. 국무총리 다음은 어느 자린지 알지? 국무총리가 되려면 내세울 만한 커다란 업적 하나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이정민이야. 너도 알잖아, 이정민이 중요 인물들만 골라 죽인 거. 이정민만 잡으면 최대 간첩 조직을 소탕한 것이나 다름없어. 업적을 위해서라면 그깟 불법 따위? 위쪽에 사시는 분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이정민을 필두로 대대적으로 간첩 소탕 작전을 벌일 거야. 생각보다 판이 커졌다.”  “꼭 그래야 합니까? 도저히 기여운을 제외시킬 방법이 없는 겁니까?”  “없다.”    오 팀장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제가 국수방을 그만둬도 안 됩니까?”  “네가 국수방을 그만두면 너만 제외될 뿐 기여운은 이정민을 잡을 때까지 미끼로 쓰일 거야. 그래도 그만둘래?”    오 팀장의 냉정한 물음에 마루의 얼굴은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    “기여운한테 도청기 심어.”    오 팀장의 말에 마루가 날 선 눈빛으로 오 팀장을 노려봤다.    “얼마든지 노려봐. 그래도 별수 없다. 명령이다.”  “팀장님.”  “차마루. 내 말부터 들어.”  “하십시오.”  “기여운을 정말 좋아한다면 기여운이 다치지 않도록 네가 최선을 다하거나 기여운을 좋아하는 걸 그만두거나,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오 팀장은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말했다.    *    “뭐, 뭐라구요? 우리 엄마가 사살이…… 됐다구요?”    여운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정민에게 물었다.    “예……. 이모가 여운 씨를 낳은 지 불과 사흘밖에 되지 않은 때였어요.”  “우리 엄마가……,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우리나라 정부 조직에게 사살이 됐다구요? 우리나라 정부에서 우리 엄마를 죽였다구요?”  “예.”  “어떻게 그런…….”    여운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를……, 나를 낳은 지 사흘밖에 안 된 우리 엄마를 우리나라 정부에서…… 살해했다구요?”  “……예.”  “말도 안 돼.”    여운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요……. 우리 엄마가 무슨 죄가 있다고…….”  “더 충격적인 건……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모를 간첩으로 오인해 사살한 후에 자신들의 실수가 들통날까 봐 이모를……, 여운 씨 어머니를 간첩으로 만들어 버린 후에 사건 종결 처리 했어요.”  “그럴 수가!”    여운은 너무나 엄청난 은폐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은 이모가 간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모는 단지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  “정말 기가 막히는 건 대한민국 정부는 나까지도 간첩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며 놀란 눈으로 정민을 쳐다봤다.  정민의 말이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운 역시 이정민을 무조건 간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뿐 아니라 여운도 ‘이정민은 간첩’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 두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정민은 간첩이 아니라 간첩으로 오해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정민은 간첩인데, 틀림없이 간첩인데 간첩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여운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다면, 여운조차도 본 적이 없는 가족의 사진을 갖고 있을 정도라면 이정민은 이정민이 말한 대로 여운과 이종사촌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정민은 간첩이 아니라 간첩으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이정민이 여운과 사촌인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지금부터 여운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이정민이 제시한 모든 증거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이정민이 사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운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오픈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여러 가지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의심을 남겨 두고 경계를 하는 것이 옳을까.  믿지 않자니 증거들이 너무나 확실하고, 믿자니 그동안 마루로부터 들은 얘기들 때문에 세뇌가 되어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믿어야 할까? 믿지 말아야 할까?’    지금 당장은 어떤 판단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정민을 따라 이정민의 집으로 왔던 그 순간부터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여운의 머리와 가슴은 무척이나 호되게 시달린 상태였다. 여러 가지 감정으로 격앙돼 있었고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은 무질서한 난장판이었다.    “이정민 선생님을…… 간첩으로 생각하고 있다구요? 왜요?”    일단 여운은 아무것도 모른 척했다. 이정민을 믿지 않기로 어떤 판단을 내려서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른 척했기 때문에 우선은 일관된 자세를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계신 어머닌 여동생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줄 모르고 동생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고 어느 순간 전화번호도 바뀌어 버리자 어머닌 기다림에 지쳐 직접 이모를 찾으러 한국에 들어오셨죠. 그리고 이모를 수소문한 끝에 아주 어렵게 이모부를 만날 수 있었대요. 이모부는, 그러니까 여운 씨 아버지는 그간에 일어났던 끔찍했던 일들을 모두 알려 주셨는데 어머니께 그 사실이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외부에 알려지면 가족 모두가 위험해진다고,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아들과 핏덩이 딸을 위해서라도 모르는 일인 척, 처음부터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인 척하고 살아야 한다고…….”    정민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끝을 흐리자 여운 역시 억울함과 속상함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어머닌 동생이 아무런 죄 없이 정부 조직의 손에 살해당한 것도 너무나 속상한데 동생에게 간첩 누명까지 씌우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자 도저히 분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모 사건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셨죠. 미국 정부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수차례 보냈는데,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이모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것처럼 우리도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됐어요.”  “그럼, 그럼 이정민 선생님도 간첩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 정부 조직에서요?”  “처음엔 아니었어요. 왜냐면 우리 가족마저 간첩 누명을 썼다는 걸 알게 된 후 우리 가족은 한국 정부에서 감시하거나 추적하는 것이 어렵도록 미국에서 다른 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 개명을 했고, 얼마간은 캐나다로 이주한 적도 있고 또 얼마간은 멕시코로 이주한 적도 있어요. 정말 끝없이 이사를 다녔죠. 그렇게 이사를 다니면서 한국 정부에서도 우리 가족을 더 이상 추적하는 것이 어렵게 됐어요.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 정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거예요. 한동안 우리는 조용히 살았어요. 이모에 대해 어떤 말도 못 하고 입 다물고 숨어살다시피 한 거죠. 그러다 나와 내 가족이 다시 대한민국 정부의 감시망에 잡힌 것은 내가 전시회 때문에 5년 전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을 때였어요. 그때 어머니도 함께 동행을 했었죠. 어머니도 나도 미국 국적의 미국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했는데, 내 전시회 기사에 실린 나와 내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 정부 조직에서 알아차린 거예요.”  “아, 이런……. 그렇게 된 거군요.”  “다행히 나와 어머닌 미국 국적을 갖고 있었고 또 간첩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잡혀가거나 조사를 받진 않았지만 감시를 받고 있는 처지예요. 감시가 너무 심해서 여기 시골에 내려와서 조용히 작품 활동만 하는데도 여전히 정부 조직의 감시는 계속되고 있어요.”    정민의 말에 여운은 가슴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정민이 시골에서도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찔렸기 때문이다.    ‘이미 전부 다 알고 있었어. 아, 어떻게 하지?’    “여기에서도 감시를 받고 있다구요?”    여운은 여전히 모른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꽁꽁 숨겨 놓은 비밀을 들키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감시받고 있어요.”  “그럼 여기도, 이 마을에도…… 정부 조직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이 시골 마을까지 이정민 선생님을 감시하려고 쫓아온 사람이 있다구요?”    이미 처음부터 전혀 모른 척했으니 계속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정민과 자신이 이종사촌지간이라는 게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 ‘지금까지 국수방 사람과 함께 당신을 감시한 사람이 바로 나다!’ 하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있어요. 여운 씨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당연히 잘 아는 사람이겠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요? 누구…….”  “차마루 씨예요.”  “뭐라구요?”    여운은 화들짝 놀라며, 아니 화들짝 놀라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민을 쳐다봤다.    ‘역시 몽땅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아, 진짜 어떻게 하지?’    “차마루 씨가…… 정부 조직……. 말도 안 돼. 차마루 씨가 이정민 선생님을 감시하고 있다구요?”    여운은 전혀 몰랐던 것처럼 딱 잡아뗐다.    “맞아요.”  “그럴 리 없어요. 차마루 씨는 이정민 선생님을 감시한 적이 없어요.”  “언제나 감시하고 있었어요. 차마루 씨는 날 감시하기 위해서 이 마을로 온 거예요.”  “설마……. 이 마을은 차마루 씨 친어머니의 고향이라고 했잖아요. 차마루 씨도 여기서 태어났다고 했어요.”  “이상하죠?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우연이죠.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는데…… 난 이곳이 외할아버지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온 건데, 차마루 씨와 인연이 깊은 곳인 줄 모르고 왔던 건데 이상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얽히게 된 거예요.”  “감시받고 있는 줄 알면서 왜 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 그게 궁금했다. 감시받는 줄 알면서 굳이 떠나지 않고 버티는 이유.    “여운 씨 때문에요.”  “나요? 나 때문에요?”  “여운 씨가 내 사촌이니까. 나와 내 어머니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내 혈육이니까.”    혈육…….    “한국에 머물기로 결정하면서 난 어머니 부탁으로 여운 씨를 찾기 위해 사립 탐정을 고용했어요. 어머니가 한국에 와서 마지막으로 이모부, 그러니까 여운 씨 아버지를 만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정부 조직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없이 이사를 다니다 보니 완전히 연락이 끊어져 버렸어요. 나와 어머니가 전시회 때문에 한국을 찾았을 때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어머닌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이모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운 씨 가족은 어머니에게 유일한 혈육이니까 말이에요. 여운 씨가 이 마을에서 살려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여운 씨가 내 사촌이라는 걸 몰랐어요. 내가 고용한 사립 탐정이 여운 씨 사진을 갖다줬을 때는 여운 씨가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난 후였어요. 정말…… 너무 놀랐죠. 사촌을, 혈육이 바로 지척에 있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혈육은 서로 끌어당긴다는 말이 있던데, 예전에 절대 믿지 않았던 말을 여운 씨를 만나고 나서는 믿게 된 거예요.”  “…….”  “충격적이죠? 여전히 믿어지지도 않죠?”  “충격적이에요. 그런데…… 믿어져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증거가 너무 명백했고 정민의 말은 누가 들어도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마루였다.  여운은 정민의 눈치를 보다가 통화 거절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죠? 차마루 씨가 집에 돌아온 것 같아요. 집에 가야 해요.”  “그래요. 어서 가요. 아! 휴대폰 번호 알려 줄래요?”  “네.”    여운은 정민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줬다.    “내가 연락할게요. 다음에 또 얘기해요.”    정민은 더는 여운을 붙잡지 않았다.  여운이 정민의 집을 나서려는데 정민이 봉투를 내밀었다.    “사진이에요. 여운 씨가 갖고 있어요.”  “내가 가져도 돼요?”  “당연하죠. 여운 씨 어머니 사진이니까 여운 씨가 가져요. 봉투에 내 전화번호도 있어요.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감사해요……. 그런데 이정민 선생님.”  “여운 씨, 언제까지 이정민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우리 사촌인데.”  “그건…… 아직 어색해서……. 이정민 선생님도 여운 씨라고 부르잖아요.”  “아, 그랬구나…….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서둘렀네요. 우리가 사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차근차근 해요.”  “네…….”  “그런데 무슨 말 하려던 거예요?”  “아, 그게…… 이정민 선생님한테 들은 얘기, 차마루 씨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죠? 차마루 씨가 이정민 선생님 감시하는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그건 여운 씨가 판단해요. 내 생각엔…… 차마루 씨한테 말하면 여운 씨도 간첩으로 오해받을 것 같은데…….”  “나도요? 정말 그럴까요?”  “틀림없이.”  “차마루 씨가 정부 조직 사람이라면 나하고 이정민 선생님이 사촌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까요?”  “의심스럽긴 해요. 아니, 알고 있다고 난 믿고 있어요.”  “믿고 있다구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사기당한 사람에게 너무 지나칠 정도로 인정을 베푸는 게 의심스럽지 않아요? 혼자 사는 남자가 여자인 여운 씨를 너무나 순순히 하숙생으로 받아 준 것 말이에요.”  “그건…….”    ‘하숙생으로 받아 준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 말 못 할 사정.’    “하숙생으로 너무 쉽게 받아 준 것도 모자라서 두 사람 사귀는 걸 보면…….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차마루 씨하고 사귀는 거예요?”  “그건…….”    여운은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이연우를 정리하려고 가짜로 사귀는 척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우습고, 진짜 사귀는 거라고 대답하자니 사촌 오빠를 감시 중인 사람과 사귄다는 게 어쩐지 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을 많이 해 버렸는데 어쩌지?’    그랬다. 이미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 버렸다. 국수방에 대해서 잘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고, 정민을 간첩이라고 믿고 있었으면서 전혀 모르는 척했고, 마루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 처음 듣는 척했다. 벌써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 갑작스레 솔직해질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됐어요.”    여운은 사귀는 것처럼 대답했다.    “잘 생각해 봐요. 먼저 사귀자고 한 사람이 누구예요? 여운 씨예요, 차마루 씨예요?”  “먼저 사귀자고 한 사람은…….”    사귀자고 한 것이 아니라 남자 친구인 척해 주겠다고 했던 거였다. 그것도 이정민 때문이 아니라 이연우 때문에.    “차마루 씨죠?”    정민이 마치 강요하듯 물었고 여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까칠하게 굴던 사람이 갑자기 사귀자고 했을 때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요?”  “이상했다기보다는…….”    여운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정민이 다 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외롭고 힘들 때라서 의심하지 못했죠?”  “네?”  “의지할 곳이 생긴 것 같아 그냥 좋았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여운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엔 차마루 씨가 계획적으로 여운 씨한테 접근한 것 같아요.”    “계획적으로……. 계획적으로 접근했다구요? 대체 왜요?”  “나를 잡기 위해서.”  “네? 이정민 선생님을 잡기 위해서라구요?”  “나를 잡기 위해 여운 씨를 미끼로 쓰려구요.”  “미끼……?”  “어쩌면 나와 여운 씨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  “그게 무슨, 나를 왜요?”  “자기들이 거짓으로 간첩으로 몰아 죽인 여자의 딸이 여운 씨고, 나와 여운 씨는 사촌지간이니까. 자기들의 실수를 영원히 덮기 위해 이모의 혈육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서요.”    정민이 섬뜩한 눈빛으로 여운을 바라보며 말했고, 여운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럴 리가……. 나도 이정민 선생님도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아무 잘못 없는 이모, 여운 씨 엄마도 죽인 사람들이에요. 단지 가족의 생사를 알고 싶어 했을 뿐인데도 그런 이모를 실수로 살해했으면서 실수를 덮기 위해 간첩 혐의를 씌워 사건을 은폐한 자들이에요. 그런 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요.”    여운은 어쩌면 정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죄 없는 엄마를 죽인 사람들. 간단하게 사건을 은폐한 조직.    “우린 사촌이에요. 여운 씨와 난 피를 나눈 혈육이에요. 내 사촌 동생이라서, 어렵게 찾은 내 동생이라서…… 여운 씨마저 다칠까 봐 너무 걱정돼서 하는 얘기예요. 너무 안심하지 말고 차마루 씨한테 마음 다 주지 말고 조금은 경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돼요. 그리고 내가 빠른 시간 안에 방법을 찾을게요.”  “무슨…… 방법요?”  “여운 씨가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는 방법. 여운 씨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을 내가 찾을게요.”  “……이 마을에서 떠날 수 있는 방법요?”  “날 믿어요. 이모는 못 구했지만 여운 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할 거예요. 안전하게. 조금만 기다려요.”  “…….”    여운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두워진 낯빛으로 정민의 집을 떠났다.    *    마루의 집으로 돌아온 여운은 마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민에게서 받은 사진이 든 봉투를 재빨리 가방에 숨겼다.  정민을 만난 것도 비밀이었지만 정민에게서 들은 얘기들과 정민에게도 받아 온 사진들이야 말로 비밀 중에서도 일급비밀이었다. 그 어떤 것이든 정민과 관계된 것은 마루에게는 일단 비밀로 해야 했다.  솔직히 지금으로선 마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든 숨기든 어느 쪽이든 위험했다.  정민과 사촌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털어놓고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됐다며 정민에게서 들은 얘기를 마루에게 모두 털어놓는다면 마루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국수방 특수 요원인 마루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정민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말해 줄까? 아니면 이정민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모든 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속지 말라고 할까?  어느 쪽도 장담할 수 없었고, 어느 쪽도 믿을 수 없었다.    ‘누굴 믿어야 하지? 차마루? 이정민?’    여운은 누굴 믿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정민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얘기 듣기 전까지 여운은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마루의 말을 무조건 믿었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루가 여운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두 사람 중에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었다.  봉투를 숨긴 여운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과연 정민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 그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정민이 들려준 얘기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곱씹어보았다.    ‘엄마가 탈북민이었다니…… 믿어야 할까?’    북한 인공기 앞에서 찍은 엄마의 사진. 사진으로 미루어 봤을 때 탈북민이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온 가족이 죽을 고비를 넘겨 북한을 탈출했지만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은 중국 공안에 발각돼 다시 북한으로 압송이 됐다……. 가까스로 캄보디아에 도착했지만 외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언니네 가족 그러니까 이정민 가족과는 헤어졌다……. 그래서 엄마는 홀로 한국으로 와서 지내다가 아빠를 만나 결혼도 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조총련계 간첩을 만났고…… 국수방 요원들에게 살해를 당했다…….’    여운은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팔로 몸을 감쌌다.    ‘어떻게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 엄마를 죽일 수가 있지? 어떻게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놓고 사건을 은폐할 수가 있지? 엄마도 미국으로 갔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미국으로 갔다면…… 나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여운은 엄마 생각에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수방에선 내가 자기들이 죽인 사람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억울하게 죽은 우리 엄마 딸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한테 간첩 혐의를 씌워 잡아갔던 걸까? 그런데 알고 있다면 나를 국수방에 끌고 갔을 때 왜 우리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여운은 국수방에 납치당하듯 끌려갔을 때를 생각해 봤다. 국수방 요원들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자신이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을 최대한 되살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누구도 엄마에 대해 말한 사람은 없었었다.    ‘엄마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어. 그렇다면 내가 우리 엄마의 딸이라는 걸 몰랐던 걸까? 그래 어쩌면 30년 전 일이기 때문에 전혀 몰랐을지도 몰라……. 그런데 몰랐다면 왜 나한테 간첩 혐의를 씌워 잡아갔던 거지? 정말 단순히 실수였던 걸까? 정말 실수?’    여운은 머릿속이 또다시 복잡해지자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만약, 만약에 실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계획된 거라면……. 그래서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라면…….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고 이정민과 사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면…….’    여운의 눈동자가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라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를 풀어 준 거라면…… 왜 풀어준 걸까? 풀어 준 것뿐만 아니라 왜 죽으려고 했던 나를 기어이 붙잡아 살린 걸까? 왜 기어이 살려서 차마루와 함께 이 마을에서 강제로 살게 한 걸까?’    여운은 순간 또다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정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운의 어머니에 대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풀어 주고 죽으려는 사람 기어이 붙잡아 마루와 함께 이곳에서 살게 만든 이유. 그건 어쩌면 정민의 말대로 여운을 미끼로 써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손쉽게 감시하다가 여운이 정민과 접촉하는 순간 정민과 여운을 동시에 간첩으로 검거하려는 계획일지도 몰랐다.    ‘그래, 맞아. 차마루 씬…… 벙커에서 감시 카메라로 날 감시했었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민이 말한 대로였다.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 벙커에서 여운을 감시했던 것.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 마을로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이 마을에서 사기당한 걸 어떻게 안 거지? 설마 그것까지 나를 잡기 위한 작전이었단 말이야? 나를 이 마을로 불러들이기 위해 부동산 사기 작전을 짰다고? 그렇다면 나한테 사기를 쳤던 채 실장 무리들도 모두 국수방 사람들이라는 거잖아. 차마루 씨는 채 실장 무리가 다 살해당했다고 했어. 이정민이 죽였다고 확신한다고 했어. 하지만 나한테…… 채 실장 무리들이 죽었다는 걸 확인시켜 준 적은 없어.’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의심은 꼬리를 물고 끝도 한도 없이 이어졌다.    ‘이정민의 짐작이 맞을 지도 몰라.’    이정민의 짐작이 맞는다면 여운은 국수방에서 촘촘하게 짜 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걸 알려 준 걸까?’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여운이 정민과 사촌지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정민이 간첩이라는 것을 알려 줄 리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걸 나한테 알려 줬을 때 내 반응이 어떤지 알아보려 했던 걸까? 도대체 뭐지?’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했는데, 생각을 하면 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럽고 더욱 심하게 엉켜들다가 한순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버린 기분이었다.    ‘왜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걸까? 국수방 요원들이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걸까? 엄마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도 오빠하고 나 때문에 억울해도 참았던 걸까? 그래서 도저히 분노와 슬픔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빤 매일매일 그렇게 술을 마셨던 걸까? 아, 아빠! 너무 혼란스러워요. 난 어떻게 해야 하죠? 누굴 믿어야 하죠?’    여운은 극심한 두통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일까? 이정민의 말이 다 사실일까? 사실이 아니라면 이정민이 나한테 접근해서 그런 얘길 할 이유가 없잖아.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 엄마 사진과 내 가족사진을 갖고 있을 리가 없어.’    여운은 가방에 숨겨 두었던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들여다봤다.    ‘이정민을 믿지 않을 수 없어. 사진이 증거인데 어떻게 믿지 않겠어.’    여운은 사진 속 엄마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정민과 내가 사촌이 아니라면, 이정민이 거짓말한 거라면 이 사진을 갖고 있을 리가 없어. 이정민이 정말 사촌이 맞기 때문에 사진을 갖고 있는 거야.’    아무리 의심을 하려 해도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사진은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계획적이었을까? 차마루 씨가 나한테 보여 줬던 그 행동들도 다 계획적인 연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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