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큰 결심했군.” “큰 결심까지는 아니고……. 처음도 아니잖아요, 뭐.” “좋아. 들어오라고 해, 고형택.” 마루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여운은 미쳤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마당을 달려 대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소리를 내질렀다. “고형택! 제발 좀 닥쳐!” 여운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형택의 멱살을 잡고 집 안으로 끌어당긴 후 문을 닫았다. “고형택 다 너 때문이야.” “뭐가?” “다 너 때문이라고, 이 화상아.” “그러니까 뭐가?” “몰라도 되니까 닥치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여운이 씩씩거리며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형택이 꼬랑지 잡듯 여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또 왜?” “혹시 뭐 먹을 거 없냐? 배고프네.” “그렇게 지랄을 해 대니까 배고프지!” “하여튼 먹을 거 없어?” 형택의 물음에 대답을 한 사람은 마루였다. “없습니다, 아무것도. 있어도 안 줄 겁니다.” 마루가 냉정하게 말하자 형택이 치사하다는 듯 입술을 실룩였다. “여전히 까칠하네.” “그러니까 까칠한 사람 열 받게 만들지 말고 들어가서 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 해 뜨자마자 깨울 거니까 곧바로 번개처럼 가. 알겠어?” “넌 정말 저렇게 까칠한 남자가 좋냐?” 형택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좋아. 나한테는 안 까칠하거든.” 여운이 약 올리듯 말하고는 마루에 올라서는데 형택이 재빨리 여운의 손을 잡았다. “여운아,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당장 놔요, 그 손!” 마루가 번개처럼 다가와 여운의 손에서 형택의 손을 떼어 냈다. “내 여자 손 함부로 만지지 말아요.” 마루가 소유욕을 드러내며 경고하자 형택과 여운이 동시에 뜨악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여운이 눈빛으로 마루에게 물었다. ‘이 정도는 해야지. 명색이 남친인데.’ ‘가짜 남친인데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구요.’ ‘전혀.’ 여운과 마루가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보통 수상한 게 아니라는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형택이 여운을 데리고 방으로 가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손을 잡아끌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뭐 하는 짓은요. 방에 들어가려고요.” “그러니까 기여운은 왜 데리고 들어가느냐 그 말입니다.” “왜겠어요? 여운이하고 할 얘기도 있고, 어차피 여기서 같이 잘 거니까…….” “같이 자다니! 기여운은 내 여잡니다! 어느 미친놈이 자기 여잘 다른 남자하고 재운답니까?” 마루가 버럭 호통치자 형택이 너무 황당해서 턱이 빠진 듯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여운아, 차마루 씨 너무 심하지 않냐?” 형택이 편들어 주길 바라는 듯 여운에게 물었다. 여운은 기꺼이 편을 들어 주었다. 형택이 아닌 마루의 편을. “조금도 심하지 않아. 넌 네 여자를 다른 남자하고 재울래?” 여운의 물음에 형택은 완전히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넌 어디서 자는데?” 형택이 여운에게 묻는데 역시나 대답은 마루가 했다. “어디겠습니까, 내 방이지.” 마루가 여운의 어깨를 폭 감싸 안은 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데 형택이 여운을 붙잡았다. “여운아, 잠깐 얘기 좀 해.” “우리 기여운은 고형택 씨하고 할 얘기 없습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내가 좀 알아야겠단 말입니다.” “기여운 살아 있잖아요. 내 곁에서 안전하게. 그럼 된 것 아닙니까?” 마루의 대답에 형택은 도저히 마루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운에게 달라붙었다. “여운아, 정말 나하고 한 마디도 안 할 거야?” “이미 수십 마디 했거든?” 여운 역시 형택에게 단 1도 협조하지 않았다. “여운아, 너 정말 거기서 잘 거야?” “네가 안 가고 밖에서 버티면서 지랄하는 바람에 여기서 자는 거잖아, 이 멍청아!” 여운이 버럭 소리치는데 마루가 여운을 방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만 들어가시죠, 방으로.” 마루가 여운이 쓰던 방을 가리키며 말했고, 형택은 마루의 방을 흘낏거리다가 별수 없는 얼굴로 돌아섰다. “저기, 진짜 먹을 건 없겠죠?” “없습니다.” 마루는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말했다. “들락거리지 말고 조용히 잡시다. 서로 방해하지 말고.” 마루가 경고성 발언을 남긴 후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자 형택의 배에서 꼬르륵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짜 배고픈데…….” 형택이 눈치를 보다가 혹시 싱크대 위에 먹을 것이 없을까 찾기 위해 기웃거리는데 마루의 방문이 불쑥 열렸다. 형택이 동작을 멈춘 상태로 마루를 쳐다보자 마루는 형택을 노려보다가 거실 불을 끈 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 불을 끄자마자 캄캄해져 버렸기 때문에 형택 역시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럴 수가……. 기여운이 남자한테 미치다니…….” 형택이 마치 자신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형택이 활짝 웃더니 전화를 받았다. “웅, 우리 지은이야?” 형택이 열흘 넘게 코감기에 걸려 콧구멍 두 개가 꽉 막힌 목소리로 갑자기 교태를 피우기 시작했다. “웅, 오빠 친구 찾았쪄요. 웅, 살아 있었쪄요. 우리 지은이 저녁 먹었쪄요? 오빠는 못 먹었쪄요. 친구가 밥을 안 줘요. 맞아요. 나쁜 놈이야. 에이, 진짜야. 남자 친구라니까. 전화 바꿔 줘요? 어뜩하지? 저놈 벌써 잠들었는데? 깨울까요?” 사람이라면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들어 줄 수 없는 교태를 피우며 통화를 하던 형택은 잠들었다는 친구 놈을 진짜 깨우기라도 할 태세로 돌아서다가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방문 앞에 여운과 마루가 토할 것 같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택은 재빨리 돌아섰다. “우리 지은이, 오빠가 쪼큼 뒤에 다시 전화할게요.” 형택은 목소리는 낮췄지만 여전히 양껏 코를 먹은 목소리로 말한 후 전화를 끊고 나서 민망한 표정으로 여운을 쳐다봤다. “너 유치원생하고 사귀니?”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데 형택이 펄쩍 뛰었다. “아니야! 스무 살이야.” “스무 살짜리하고 그러고 통화해? 우리 지은이 저녁 먹었쪄요?” 여운이 형택의 말투를 흉내 내자 형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여운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형택을 쳐다보다가 짐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들었다. “우웅, 우리 형택이 잘 자요.” 여운이 형택의 코 먹은 말투를 흉내 내며 놀리자 형택이 욱해서 반발했다. “어린 친구니까 맞춰 주는 거야!” “웅, 그랬쪄?” “그만해라.” “어린 친구라서 나를 남자 친구로 둔갑시켰쪄?” “여자 친구라고 하면 우리 지은이가 싫어하니까…….” “웅 그랬쪄요? 지랄을 하세요.” 여운은 형택을 싸늘하게 째려봐 준 다음 마루와 함께 마루의 방으로 돌아왔다. 마루의 방에는 침대 아래 이불이 따로 깔려 있었다. 여운이 마루의 방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침대 아래에 이불을 깐 일이었다. “오늘 역사적인 동침의 밤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런데 어째서 이불을 따로 깐 거야?” “역사적으로 따로 자려구요.” “따로 자는 게 역사적인 동침이야?” “매우 역사적이에요. 남녀가 한방에서 자는데도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자는 건 누가 봐도 역사적인 동침이에요. 그러니까 잠깐 나가 있어요.” “왜?” “옷 갈아입게요.” “알았어.” 마루가 삐친 얼굴로 거실로 나와 잠깐 서성이는데 방문이 열리며 여운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루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여운이 재빨리 바닥에 깔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여전히 삐친 얼굴로 누워 있는 여운을 노려봤다. “왜 그런 얼굴로 노려봐요?” “화나서.” “왜 화가 났어요?” “몰라서 물어?” “진짜 몰라서 물어요.” “이건 역사적인 동침의 밤이 아니잖아!” “그럼 어쩌자구요?” 여운이 이불을 더욱 꼭 여며 덮으며 따지듯 물었다. “난 진정으로 역사적인 동침을 원해.” 마루의 말에 여운이 긴장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진정한 역사적인 동침이…… 뭔데요?” “기여운이 짐작하고 있는 거.” 마루의 말에 여운이 화들짝 놀랐다. “차마루 씨.” “왜?” “내가 짐작하는 진정한 역사적 동침은…… 19금이에요.” 여운이 우물쭈물하다가 솔직히 말했다. “맞아. 바로 그거야.” 마루의 대꾸에 여운이 이불을 획 뒤집어썼다. “그건 안 돼요.” “왜?”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단 말이에요!”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여운을 내려다보던 마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 당장 준비해.” “지금 당장 어떻게 준비해요?” 여운이 이불 안에서 소리쳤다. “절차가 복잡하단 말이에요.” “무슨 절차가 복잡해?” “샤워도 하고, 머리도 말려야 하고…….” 부끄러워서 쩔쩔매는 여운의 모습에 마루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서른이나 먹은 여자가 이렇게나 순진할 수 있다니. “그냥 옷만 벗으면 되잖아!” 마루가 일부러 골려 주려고 소리치자 여운이 이불 속에서 몸부림을 쳤다. “절대 안 되거든요!” “좋아. 그럼 19금 안 할 테니까 침대로 올라와서 같이 자.” 마루의 말에 여운이 이불을 걷고 얼굴만 쏙 내밀었다. “과연 우리가 한 침대에서 19금을 하지 않고 잘 수 있을까요?” “기여운은 자신 없어? 자신 없으면 기꺼이 19금을 통해서 내 특등급의 정력을 확인시켜 줄게.” “그런 말 아니거든요! 나도 자신 있거든요? 내 말은 차마루 씨를 못 믿는다는 말이었어요.” 여운이 기겁한 듯 소리친 후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부끄러워하는 여운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마루는 당장에라도 이불 속으로 뛰어들어 끌어안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난 19금 안 할 자신 있어. 그러니까 침대로 올라가. 지금 당장 올라가지 않으면 강제로 19금 할 거야.” 마루가 짐짓 협박조로 말하자 여운이 이불을 획 걷으며 마루를 노려봤다.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야.” “진짜…… 19금 안 할 거죠?” “안 할 거야. 맹세코!” 마루가 자신 있게 대답하는데 여운이 마루를 노려봤다. 영 미덥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루는 반대로 해석했다. “왜 그렇게 노려봐? 어떻게 19금을 안 할 수 있냐 그거야? 원하는 거야? 19금 해 줘?” “아니라구요!” 여운이 바락 소리친 후 베개를 들고 침대로 올라가 마루의 이불을 뒤집어썼다. 마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가 여운의 곁에 누웠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여운이 경고하자 마루가 콧방귀를 뀌었다. “잊었어? 지난번에 내 품에 꼭 안겨서 잔 거?” “그땐 잠결이라 정신이 없었어요.” “거짓말하지 마. 즐겼잖아.” “아니거든요?” “솔직히 말해, 안아 달라고.” “안아 줄 필요 없다구요!” 여운이 약이 올라서 푸르르 소리쳤다.
그 후로 괜히 머쓱해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만 껌뻑거리며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루도 여운도 오늘따라 유별나게 신경이 쓰였다. 처음도 아닌데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떨렸다. 신경 쓰이고 가슴이 떨려서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 “형택이 자는 것 같았어요?” 여운이 어색하지 않은 척하려고 일부러 말을 걸었다. “아니. 계속 통화 중이야. 낯 뜨거워서 미칠 것 같은 목소리로.” 마루도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대꾸했다. “형택이한테는 일상이에요.” “매번 저랬단 말이야?” “매번 그래요. 저러다 헤어지면 세상에 종말이 온 듯이 술 퍼먹고 울고불고 그래요.” “미치겠네.” “순수해서 그렇대요.” “누가?” “형택이가요. 자기가 너무 순수해서 그러는 거래요.” “언제부터 순수가 주접과 동급이 된 거야?” 마루의 말에 여운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형택이하고 왜 말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형택이가 좀 엉뚱하고 시끄러워도 진심으로 내 걱정 하는 친구예요. 잠깐이라도 얘기 좀 하게 해 주지, 왜 못 하게 했어요?” “혹시라도 기여운도 모르게 실수할까 봐.” “무슨 실수요?” “국수방과 간첩.” “그런 실수 안 해요.”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러네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여운은 일리 있다 생각해서 수긍했다. “내일 되도록 빨리 보내도록 해.” “여자 친구 때문에 오래 붙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렇긴 하더군.” “혹시라도 들러붙으려 하면 떼어 낼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어떤 방법?” “내일 보면 알아요. 아, 그리고 그거 어떻게 됐어요?” “뭐?” “이정민 집에 왔던 그 여자 말이에요. 정말 미국 미술관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래요? 국수방에서 조사 안 했어요?” “했어. 임정화라는 간첩이야.” “간첩이래요? 그럴 줄 알았어.” 별것 아닌 듯이 반응했던 여운은 순간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라구요? 진짜 간첩이라구요?” “음. 간첩이야.” 마루도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역시 내 촉은 정확했어. 으……. 소름 끼쳐.” 여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요? 그 여간첩 검거했어요?” “지난달에 검거했어. 지금 국수방에서 조사 중이야.” 국수방에서 조사 중이라는 마루의 말에 여운은 자신이 국수방에 끌려갔을 때 어떤 식으로 조사를 받았었는지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난달에 검거했는데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요?” “깜짝 놀라서 지난번처럼 또 아플까 봐.” 마루는 임정화 검거 작전 때 이정민이 연락책과 접촉하려 했던 기차역에 갑자기 여운이 등장하는 바람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난달에 검거했는데 왜 아직도 조사 중이에요? 그 여간첩 입이 엄청 무겁나 보네요.” “남파 간첩들은 자수하지 않는 이상 쉽게 입을 열지 않아.” “아직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말도 안 했겠네요?” “아직. 이정민의 검거는 임정화의 입에 달려 있어.” “그 말은 간첩 임정화가 이정민도 간첩이다 하고 말하는 순간 이정민을 잡는다는 거죠?” “맞아.” “아 참, 총은요? 총도 진짜 총이래요?” “진짜 총이야. 전문가용 총.” “전문가용 총?” “살인 청부업자나 스나이퍼들이 암살용으로 쓰는 총이라는 뜻이야.” “암살……. 너무 무서워요.” 여운이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자 마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운을 내려다봤다. “무서워? 안아 줄까?” “됐거든요?” 여운이 즉시 경계했다. “알았어! 하여튼 설마 또 아프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왠지 으슬으슬 몸이 떨리긴 하네요. 그리고 사건이 아니라 작전이라고 해 줘요. 어쩐지 있어 보이니까.” 여운이 계속 몸을 떨며 자리에 눕자 마루가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 “그러게요.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평소에 애국심이 투철했던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저질러 버리고는 후회했어요.” “어때? 아플 것 같아?” “아직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내 덕분에 여자 간첩도 알아내고, 국수방이나 차마루 씨한테는 좋은 거죠?” “좋은 거야.” 마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다신 그러지 마.” “나도 두 번 다신 그런 짓, 아니 그런 작전 안 할 거예요.” “약속해.” “약속은 못 해요.” “왜?” “말했잖아요. 나도 모르게 저질러 버린다구요.” “앞으론 절대 저지르지 말라고.” “노력할게요. 그런데 말이에요, 요즘 북한은 간첩을 비주얼 보고 뽑나 봐요. 이정민도 그렇고, 그 여자도 그렇고, 어찌나 예쁘고 잘 빠졌는지. 간첩을 부러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북한 고위층 자제래.” “누구요? 이정민요?” “여간첩.” “북한 금수저네요.” “그런 셈이지.” “세상에, 북한에선 금수저가 간첩을 하다니……. 하여튼 이상한 나라예요.” “그러게 말이야. 어때?” “뭐가요?” “아플 것 같아?” “지금은 괜찮아요.” “아프지 마. 지금 아프면 안 돼.” “왜요?” “역사적인 동침의 밤이니까.” “19금은 안 하기로 약속했죠? 잊으면 안 돼요.” “자꾸 까먹으려고 해.” “절대 안 돼요. 절대 까먹지 말아요!” 여운이 힘주어 말했다. “미리 차마루 씨한테 말해 둘 게 있어요.” “뭔데?” “난 코도 엄청 골고 이도 갈고 입으로 푸르르 푸르르 숨을 막 불기도 해요. 3종 세트라고 할까? 미리 말했으니까 시끄럽다고 옆구리 걷어차진 말아요.” “3종 세트는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 마.” 걱정 말라는 마루의 말에 여운이 눈을 감았다. “난 이제 잘 거예요.” “자.”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노력할게.” “노력하지 말고 약속하라구요!” “불 켜 줄까?” “괜찮아요.” “캄캄한 거 싫어하잖아.” “차마루 씨 있어서 괜찮아요. 나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있으니까 캄캄해도 잘 잘 수 있다는 거야?” “설마 차마루 씨가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방에 난입할 리는 없고, 난입한다 해도 차마루 씨가 조용히 처리할 테고. 맞죠?” “맞아.” “그리고 차마루 씨가 날 절대 덮치진 않을 것 아니에요.” “그건 안심하지 마.” 마루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을 할 건데요? 기어이 19금을 할 거예요?” 여운이 잔뜩 경계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력은 하겠지만 약속할 수 없어.” “왜 약속을 못 해요? 그냥 약속해요!” “못 해. 기여운처럼 나도 모르게 막 저질러 버리거든.” “안 되겠네요. 형택이하고 같이 자야지.” 여운이 도망가려는데 마루가 재빨리 여운의 몸을 꾹 눌러 눕혔다. “고형택하고 자는 꼴은 절대 못 봐!” “그러니까 약속하라구요!” “최선을 다해 볼게. 됐지?”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데…….” 여운이 불안한 목소리로 징징거렸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너무 불안한데…….” 잔뜩 겁먹은 것처럼 불안하다고 걱정하던 여운은 놀랍게도 5분 만에 잠이 들어 버렸다. 불안하다고, 안심이 안 된다며 걱정하던 여운이 5분 만에 코를 골자 마루는 처음엔 여운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자는 척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뻔한 장난 말이다. “자는 척한다고 날 멈출 수는 없어.” 마루가 허튼수작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지만 여운은 이미 완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마을에 있는 밭이란 밭들은 다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거들고 있는 중이라 저녁이 되면 완전히 녹초가 돼 버렸다. 그래서 베개에 머리만 붙이면 마치 마취를 당한 듯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 벌써 오래전부터였다. 그래도 여운은 오늘만큼은 마루와 함께 자게 돼서, 더구나 19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경이 쓰여 아무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겠구나 생각했는데 고단함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자는 척하지 말래도?” 마루는 순진하게도 진짜 잠든 줄 모르고 실없이 계속 떠들다가 코 고는 소리가 드르렁드르렁 컥컥 금방이라도 형광등이 깨질 듯이 높아지자 그제야 정말 잠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봐, 기여운, 정말 잠들었어?” “커커커컥, 푸르르르르.” 마루의 질문에 여운이 코를 골고 입으로 푹푹 숨을 불며 대답했다. “내가 안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잠들었다고?” 마루가 몸을 일으켜 잠든 여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법 큰 소리로. “드르렁 컥, 푸르르르르 빠드득.” 여운이 이번엔 이까지 갈며 대꾸했다. 완전무결하게 잠들었으니 쓸데없이 그만 떠들라는 듯이. “이봐, 기여운. 나 남자야! 남자라고!” “드르렁 드르렁 컥.” ‘그래서 어쩌라고?’ “나 정말 사고 칠 수도 있어. 사고 쳐?” “푸르르르르 빠드드득.” ‘사고를 치든지 말든지 난 지금 자는 중이라고.’ “진짜 19금 한다. 해 줘? 진짜 19금 해 버린다!” “컥컥컥 푸르르르르. 으드득.” ‘19금을 하든지, 닥치고 자든지.’ 3종 세트를 아낌없이 뿌리며 꿀잠 자는 여운을 황망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마루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드러누웠다. “참 대단하다, 기여운.” 실로 대단한 여자였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정말 너무한다 싶었다. 남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저렇게 겁도 없이 세상모르게 잠들어 버리다니. 여자가 조금이라도 수줍어하거나 신경 쓰이는 척이라도 해야 정상이 아닐까 싶었다. 차마루 따위는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그렇게 편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운이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편하다라……. 마루는 다시 몸을 일으켜 잠든 여운을 바라봤다. <차마루 씨 있어서 괜찮아요. 나 혼자가 아니니까.> 여운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루가 있어서 괜찮다던 여운의 말. 캄캄한 곳에서 혼자 잠드는 게 너무 무서워 꼭 불을 켜야만 잠들 수 있다던 여운인데 마루가 있기에 캄캄한 곳에서도 이렇게 잘 잔다는 것. 여운이 그만큼 차마루라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으면서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믿고 편하게 생각하는 건 나쁘다 할 수 없었다. 물론 너무 믿고 너무 편해하는 건 원하지 않지만 말이다. 여운이 아무 걱정 없이, 두려움 없이 편하게 잘 자고 있는 것에 은근한 안도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여운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마루가 “나야. 괜찮아”라고 말하자 여운은 이내 경계를 풀고 마루의 품에 안겨 왔다. 마루는 여운을 품에 안고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냥 행복했다. 그저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해도 너무 하는군.” 정말 해도 너무했다. 코를 골아도 적당히 골고, 불고 이를 가는 것도 적당히 불고 갈아야 하는데 이건 뭐 사람이 아니라 다른 포유류가 골고 불고 갈아붙이는 것 같았다. 마루가 기절할 듯이 한 대 얻어맞지 않는 이상 도저히 잠이 들 수 없는 수준의 소음이었다. 30분 넘게 귀를 틀어막아 가며 몸부림치던 마루는 진짜 여운의 옆구리를 한 대 걷어찰 작정으로 벌떡 일어났다가 여운이 덮은 이불 속에서 터져 나온 제4의 소음 소리에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제4의 소음이란 바로 방귀였다. 코골이에 불기에 이 갈기에 방귀까지. 아주 완벽한 4종 세트였다. 마루는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여운의 곁에 누워 여운을 감싸 안았다. 어쩌겠는가, 코를 골고 이를 갈고 불고 방귀를 뀌어도 예쁘기만 한 걸.
“내가 방귀를 뀌었다구요?” 마늘밭에서 여운이 펄쩍 뛰며 따져 물었다. “3종 세트가 아니라 4종 세트였어. 방귀까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마루에 나가서 잔 거야! 왜?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방귀 뀐 적 없다고 잡아떼려고?” “아뇨. 그냥……. 내가 얼마나 방귀를 많이 뀌었는지 물어보려는 거예요.” 여운은 방귀를 뀐 적 없다고 잡아떼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뭐야. 방귀 잘 뀌는 거 알고 있었어?” “요즘 소화가 겁나 잘돼서…… 가스가 소통이 잘되더라구요.” 여운이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뭐든 소통이 잘되는 게 좋은 거잖아요.” “소통 잘돼서 참 좋겠어.” 마루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여운이 마루를 노려봤다. “형택이랑 자게 내버려 뒀으면 내가 방귀 뀌는 소리도 안 듣고 좋았을 것 아니에요. 아니면 차마루 씨가 마루로 나가서 자지 그랬어요. 차마루라서 마루랑 잘 어울리긴 했겠네요.” 여운도 마루처럼 빈정거리자 마루가 눈에 불을 켰다. “지금 내 이름 갖고 인신공격하는 거야? 그리고 뭐? 고형택이랑 자?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 절대 그 꼴은 못 봐!” “왜요?” “왜냐니? 남자 친구니까 그렇지!” “가짜 남자 친구잖아요.” “가짜라도 진짜인 척하기로 했잖아.” “그럼 잔소리도 하지 말고 억울해하지도 말아요. 이미 뀌어 버린 방귀를 항문으로 빨아들일 수도 없으니까.” “무슨 여자가 낯 뜨거운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야?” “아무렇지 않지 않거든요? 나도 창피하거든요? 그러니까 잔소리 그만해요!” 여운이 쏴붙이자 마루가 입술을 실룩이다가 마늘밭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고형택은 어디 있어?” “저쪽에서 이정민하고 전문 용어로는 접촉, 비전문 용어로 노가리 까고 있어요.” “뭐?” 마루가 고개를 돌려보자 정민과 형택이 정말 함께 있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보나 마나 나하고 차마루 씨를 욕하고 있겠죠. 염탐하고 올게요. 기다려요.” 여운은 재빨리 정민과 형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고형택, 내가 일하라고 했지 누가 한가하게 놀라고 했어? 밥값 하라고 했잖아!” 여운이 버럭 혼을 내자 형택이 씩씩거리며 여운을 노려봤다. “죽도록 일하다가 잠깐 쉬는 거거든?” “웃기지 마. 너 지금 이정민 선생님하고 30분째 놀고 있었거든? 너 때문에 이정민 선생님도 일을 못 하고 있잖아!” 여운이 계속 쏘아붙이자 형택이 억울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 때문에 일을 못 하는 거였거든? 이 사람이 나한테 말시킨 거였거든?” 형택이 따지고 들자 여운이 정민을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여운 씨 친구라고 해서 인사 나누느라고 내가 먼저 말시킨 것 맞아요. 미안해요, 여운 씨.” 정민이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자 여운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에요. 미안하긴요. 인심 좋으신 분이니 당연히 그러실 수 있죠.” 여운이 정민에게 친절하게 응대한 후 곧바로 형택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리고 너! 이분이 누군지 알고 이 사람 저 사람이야?” 여운이 형택에게는 정민에게 했던 것과는 180도 다르게 대하자 형택이 눈에 불을 켜고 여운을 쏘아봤다. “인간이 이렇게 변하니? 나한테 지랄지랄 해 놓고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친절하다니. 이 사람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차별을 하는 거야?” ‘당연히 차별해야지. 이 사람은 간첩이란 말이야! 까불다간 뒈지는 수가 있단 말이야!’ “여기 계신 이분은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선생님이거든? 곧 미국에서 전시회도 하시거든? 선생님한테 잘 보이면 공짜로 미국 여행을 갈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백 번 천 번 친절해야지.” “뭐? 미국 여행? 공짜로?” 형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민을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조각가 선생님? 선생님한테 잘 보이면 정말 공짜로 미국 여행 갈 수도 있는 거예요?” 이번엔 형택이 여운이 그랬던 것처럼 180도 달라진 태도로 정민에게 물었다. “예, 가능합니다.” “아 그렇구나……. 하하하하하. 우와,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어쩐지, 보자마자 딱 느낌이 오더라고요. 아!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이에요. 아하하하하.” 형택이 정민에게 급히 친절해지며 교태를 떨기 시작하자 여운이 명치에 음식물이 얹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형택을 쳐다봤다. ‘이 자식이 공짜 미국 여행에 눈이 홀랑 뒤집혔네. 공짜라면 똥도 처먹을 자식!’ “혹시, 진짜 혹시나 해서 여쭤 보는 건데요, 내가 여운이랑 엄청 친하거든요. 여운이랑 엄청 친한 나도 선생님께 잘 보이면 여운이랑 같이 미국에 공짜로 여행을 갈 수도 있을까요?” 형택이 온몸으로 찌질함을 뿜어내며 물었고, 여운은 처음으로 이런 자식이 친구라는 것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쪽팔려 죽겠으니까 그만해라, 고형택.” 여운이 경고했지만 이미 공짜 미국 여행에 영혼을 팔려 버린 형택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원하신다면 선생님 대신 이 밭을 모조리 갈아엎을 수도 있습니다. 아하하하하.” 형택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해맑게 웃어젖히는 동안 여운은 한없이 부끄러운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선생님, 오늘부터 이 자식하고 친구 안 하려구요. 그러니까 그냥 개무시해 주세요.” “아니에요. 형택 씨도 스태프로 참여시키면 미국 같이 갈 수 있어요.” 정민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진짜 형택도 미국에 데리고 갈 것처럼, 아니 북한으로 끌고 갈 것처럼 말했다. “정말요? 야호!” 정민의 실체를 모르는 형택은 그저 미친 듯이 기뻐하며 환호할 뿐이었다. “역시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형택이 갑자기 정민에게 악수를 청하자 정민이 인심 좋게 정민의 손을 잡아 주었다. “선생님, 정말이죠? 정말 나도 미국 갈 수 있는 거죠? 공짜로.” “정말이에요. 전화번호 줘요. 연락할게요.” “와우! 당연히 드려야죠.” 형택은 휴대전화를 꺼내 그 자리에서 정민과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멍청한 자식. 너 가면 죽어, 이 자식아!’ 여운이 마음속으로 고함을 쳐 댔지만 형택이 들을 리 만무했다. “정말 연락 주실 거죠?” “연락할게요. 여운 씨하고 같이 갑시다.” “우와! 진짜 화통하시네요! 역시 유명한 조각가 선생님은 통이 엄청 크다니까! 아하하하하.” ‘좋단다, 이 멍청이.’ 여운이 벌레를 뭉텅이로 씹은 얼굴로 형택을 노려보는데 형택이 기쁨에 못 이겨 정민을 와락 껴안았다. 그것도 모자라 여운도 끌어당겨 안았고,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이 한데 엉켜 안는 형상이 됐다. “그만해!” 여운이 형택을 거칠게 밀어냈다. “너 때문에 쪽팔려서 절대 미국 안 갈 거니까 너 놈이나 혼자 가세요.” “네가 안 가면 나도 못 간단 말이야.” “너 못 가게 하려고 안 가는 거야, 이 멍충아! 빨리 일해!” 여운이 형택에게 버럭 소리친 후 씩씩거리며 마루에게로 돌아오자 마루가 어쩐지 심드렁한 얼굴로 본체만체했다. “차마루 씨, 저 자식 미쳤어요. 저 자식이 글쎄…….” 여운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마루가 재빨리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댔다. 여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루를 쳐다보다가 움찔하며 조용히 마늘을 캐기 시작했다. 마늘을 캐던 여운은 형택과 정민이 안 보는 사이 재빨리 마루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여운은 옷깃을 만지는 동작이 무슨 뜻일까를 생각하다가 퍼뜩 생각난 듯 조용히 옷깃을 뒤집어 보았다. 옷깃 안쪽에 있었다. 도청기가. 여운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아무것도 모른 척 마늘을 캐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인 것 같았다. 형택이 정민을 끌어안은 후 여운까지 끌어당겨 안았을 때 말이다. ‘고형택, 저 화상!’ 도청기 때문에 여운은 어쩔 수 없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열심히 마늘만 캤다. 간간이 여전히 정민과 노가리를 까고 있는 형택을 노려보는 척하며 동태만 살필 뿐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봐 마루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루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일만 했다. * “고형택 어디 있어?” 점심을 먹고 나서 잠깐 관심을 끊은 사이 형택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고형택 어디 있는지 몰라?” 마루가 물었지만 여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손짓만 해 댔다. 아직도 말을 하면 안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말해도 돼.” “해도 된다구요? 이거 어쩌려구요?” 여운이 옷깃을 가리키며 소곤거리자 마루가 “괜찮아” 하고 말했다. “떼어 냈어.” “언제요?” 여운이 옷깃을 뒤집어보자 정말 도청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점심 먹으러 갈 때.” “점심 먹으러 갈 때? 그런데 내가 왜 몰랐죠?” “모르게 뗐으니까.” “올…… 특수 요원.” 여운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자 마루가 별것 아니라는 듯 거만스레 미소 지었다. “그런데 고형택 어디 있는 거야? 이정민 옆에도 없는데.” “갔을 거예요.” “갔을 거라니?” “서울로 도망갔을 거라구요.” “도망갔다고?” “어제 내가 말했잖아요. 형택이가 들러붙으려 하면 떼어 낼 좋은 방법이 있다고.” “좋은 방법이 일시키는 거였어?” “맞아요. 나한테 서울 간다고 말하면 내가 비틀어 버릴 줄 알고 소리 소문 없이 도망친 거예요. 서울 도착하면 연락할 거예요.” “남자가 이 정도 일도 못 해서 도망을 친다고?” 마루가 어처구니없어하자 여운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차마루 씨나 이정민이나 형택이나 그게 그거거든요?” 여운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마늘을 캐느라 쩔쩔매고 있는 정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간첩이 농사일을 못하다니. 하긴 비밀 요원도 농사일은 못하는데 뭘.” 여운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도청기는 어떻게 했어요?” “버렸어.” “어디에 버렸어요?” “고형택한테.” “형택이한테요?” 여운이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고형택 허리띠에 붙여 줬어.” “언제요?” “점심 먹을 때. 도청기는 지금 고형택하고 기차 타고 서울 가고 있을 거야.” “그럼 이정민은 형택이가 지껄이는 말을 도청하는 거네요?” “그렇지.” 여운은 낮게 웃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왜 웃어?” “이정민이 도청할 말이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아서요.” “어떤 말인데?” “우리 지은이 저녁 먹었쪄요? 오빠는 못 먹었쪄요.” 여운이 형택을 흉내 내자 마루도 여운처럼 웃기 시작했다. “큰일 났어요.” 여운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뭐가?” “이정민이 토할 것 같아서 형택이 죽이러 가면 어쩌죠?” 여운의 말에 마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러게 웃을 일이 아닌데 웃기네.” “웃을 일 아니라구요.” “알아. 안다고.” “웃지 말라구요.” “안 웃어.” 하지만 웃을 일 아니라고 웃지 말라던 여운도, 안 웃는다는 마루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웃고 있었다.
실제로 정민의 집 비밀 방에서는 여운이 웃을 일이 아니라고 했던 것처럼, 하지만 참지 못하고 계속 웃어 젖혔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민은 당장에 서울로 달려가서 형택의 목을 꺾어 죽일 정도로 살기가 번득이는 표정으로 도청하고 있었다.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형택의 대사를. - 우리 애기 지은이,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쪄요. 우리 지은이는 오빠 안 보고 싶었쪄요? 토할 것 같은 형택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타고 들려왔다. - 보고 싶었어요, 오빵. 심각한 축농증 환자 같은 여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우리 애기, 오빠가 얼만큼 보고 싶었쪄요? - 많이많이 보고 싶었어요, 오빵. - 오빠도 우리 애기, 너무너무, 엄청엄청, 완전완전 보고 싶었쪄요. - 오빵, 우리 밥 먹고 어디 가요? - 어디 갈까? - 저녁인데 어디 가지? - 저녁에 가면 좋은 데 오빠가 아는데. 우리 애기 같이 갈까요? - 어딘데요? - 웅웅. 부끄럽게 물어보면 어뜩해요, 우리 애기. 형택이 소름 끼치도록 교태를 떨며 말했고, 정민은 처음으로 토할 것 같은 욕지기를 느꼈다. - 왜 부끄러워요? - 알면서. 웅웅. - 어응, 오빵. 형택 못지않게 축농증 걸린 여자도 양껏 교태를 피우자 형택이 예뻐 죽겠다며 몸살 앓는 소리를 냈다. - 우리 애기 예뻐서 어뜩하지? - 우리 오빵도 진짜 멋있어요. - 오빠가 우리 애기 엄청 사랑해 줄게요. 준비하고 있쪄요. - 어응, 오빵. 정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빵’이라는 말에 두 번째 구역질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청을 시작한지 30분 후. - 우리 애기 같이 할까? - 아웅, 오빵, 부끄럽게. 오빵 먼저 해요. - 알았어. 오빠 먼저 할게. 초큼만 기다려요, 우리 애기. 곧 옷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5분 후. - 어머, 오빵. 얼른 가려요. - 에이, 뭘 부끄러워해, 우리 애기. 벌써 몇 번이나 봤으면서. 어때? 오빠 멋져? - 멋져요, 오빵. 우리 오빵 최고! - 빨리 씻고 나와요. 오빠 목 빠지게 기다릴게요. - 넹. 20분 후. 드디어 헤드폰을 통해 맨 정신으로는 들어 줄 수 없는 야릇한 소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정민은 헤드폰을 벗어 버렸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군.” 정민이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여운이 씩씩하게 말했지만 마루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국수방 요원을 만나기 위해 대구에 다녀와야 하는데 새벽에 출발해도 오후 늦게나 돌아올 것 같았다. 마루가 집을 비우면 여운 혼자 있어야 하는데 여운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이런저런 걱정 할 것 없이 여운을 데리고 가면 제일 간단했다. 하지만 여운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여운과 동행하지 말라는 최연화 국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동행하지 말라고 했는지 그 이유는 국수방 요원을 만나야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보통 때라면 여운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위험할 것이 없었고,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때가 아니었다. 주변에 간첩이 있었고, 간첩은 이미 여운과 마루의 생활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걱정했고 그래서 염려가 됐다. 자신이 여운의 곁을 비운 사이에 혹시라도 정민이 여운에게 해로운 짓을 할까 봐. “오전부터 비 온다 했어.” 마루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안 오니까 밭에 나가긴 해야 해요.” “밭에 나갔다가 비 오면 곧장 집으로 와서 문 걸어 잠그고 집에 없는 척해. 알았지?” “알았어요.” “내가 없는 걸 알면 이정민이 접근할지도 몰라. 절대 받아 주지 마.” “차마루 씨 어디 갔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요?” “이력서 내러 갔다고 해. 취직하려고.” “알았어요. 그런데 국수방 요원이 여기 오면 될 걸 왜 대구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이정민이 뭔가 낌새를 챈 것 같아서 나 외에 국수방 요원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야. 같은 이유로 이 마을이 아니라 대구에서 만나는 거고.” “아, 그렇구나. 어서 가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내 말 잘 새겨들었지? 비 오면 곧장 집으로 와서 문 걸어 잠그고 없는 척하면서 잠이나 자. 알겠지?” “알았으니까 걱정 말고 빨리 가요.” “최대한 빨리 올게.” “오는 길에 햄버거 사다 주면 안 돼요?” 여운이 마루를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알았어.” “운전 조심해요.” “알았어.” 차에 오르던 마루가 여운을 돌아봤다.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아?” “분위기가 좀 그렇다뇨? 뭐가요?” “우리가 최대한 빨리 올게, 운전 조심해요, 이러는 거 말이야.” “그게 뭐 어떻다구요?” “부부 같잖아.” 부부 같다는 마루의 말에 여운이 픽 웃었다. “아니거든요? 전혀 부부 같지 않거든요?” “그래? 그럼 이러면 어때?” 마루가 갑자기 여운의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제 부부 같지?” 마루는 깜짝 놀란 여운에게 씩 웃어 보인 후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마루가 여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출발하자 여운은 멀어져 가는 마루의 차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으응, 자꾸 입술을 쪽쪽 하고 그래.” 여운이 좋으면서 괜히 투덜거렸다. “정말 부부 같나?” 여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밭으로 향했다. 오전부터 온다는 비는 점심때가 돼서야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자연스레 밭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정민이 여운을 쫓아왔다. “우리 집에서 같이 점심 먹어요. 마루 씨 면접 보러 갔다면서요.” “아니에요. 집에 가서 대충 먹고 곧바로 낮잠 잘 거예요.” “대충 뭐 먹을 건데요?” “라면 끓여 먹을까 생각 중이에요.” “내가 끓여 줄 테니까 같이 먹어요.” ‘간첩이 라면으로 날 꼬시네. 헛수고하지 마셔. 절대 안 넘거가거든?’ “미안한데 오늘은 거절할게요. 진짜 낮잠 자고 싶거든요.” 여운은 깔끔하게 거절했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정민이 서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어쩌나, 여운 씨만 믿고 있었는데.” 정민이 난감함과 서운함이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만 믿고 있었다니, 뭘요?” “실은 지난주에 상추랑 파랑 몇 가지를 심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다 죽어 버렸어요. 그 녀석들 키워 보려고 조그마한 비닐하우스도 마당 한쪽에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다 말라 죽어 버렸어요.” “웬만해선 잘 안 죽는데……. 물 제때 안 준 것 아니에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작품을 하느라 자꾸 물 주는 걸 잊어버렸거든요.” “물을 안 줘서 말라 죽었나 봐요.” 여운의 말에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종은 있어요?” “전씨 할머니 댁에서 얻어다 뒀어요. 마침 비가 와서 쉬게 됐으니까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데, 여운 씨 낮잠 잔다고 하니 할 수 없죠. 다음에 시간 될 때 도와줘요.” “다음에 비 오면 도와줄게요. 오늘은 정말 쉬고 싶거든요. 비 오는 날 아니면 쉴 수가 없잖아요.” 여운은 또 한 번 깔끔하게 거절했다. ‘잘했어!’ “그렇죠.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다음에 꼭 도와줄게요. 당분간 모종에다 물 흠뻑 주세요.”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봐요!” 여운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손까지 흔들고 돌아서는데 정민이 여운의 꽁무니를 물고 늘어졌다. “실은…… 여운 씨한테 할 얘기가 있었어요.” ‘아, 진짜 그 간첩 집요하네.’ “할 얘기요? 무슨 얘긴데요?” 여운은 약간 귀찮은 투로 물었다. “여기선 말할 수 없어요. 굉장히…… 중요한 얘기라서요.” ‘중요한 얘기? 뭐지? 혹시 미국 가는 거? 안 갈 거거든?’ “중요한 얘기라면…… 어떤 얘긴지 대충 알려 줘야 가든지 말든지 결정을 하죠.” 여운은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여운 씨 어머니에 대한 얘기예요.” 정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족요? 내 가족요?” 여운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졌다. ‘내 가족 얘기? 대체 무슨 수작이지?’ “이정민 선생님이 내 가족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다구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운의 얼굴이 살짝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여운 씨 어머니에 대해서 해 줄 얘기가 있어요.” 정민은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말했고 여운은 혼란스러웠다. “우리 엄마를…… 알아요?” 여운이 초점이 흔들리는 눈길로 정민을 바라보자 정민이 여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여운 씨가 꼭 들어야 하는 얘기.” “…….”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간첩 이정민이 우리 엄마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다니…….’ 여운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길로 정민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쩌지? 차마루 씨가 절대 이정민하고 접촉하지 말라고 했는데…….’ 상추 심는 일을 도와 달라 했을 때는 깔끔하게 거절했지만, 난데없이 엄마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고 하자 한순간 흔들리고 있었다. 간첩 이정민이 기여운의 돌아가신 엄마에 대해 알고 있다? 도무지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혼란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정민 선생님이 우리 엄마를 알고 있다는 게. 우리 엄마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다는 게 말이에요.” 여운이 의심스럽다는 듯 따지자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상하게 느껴질 거예요.” “네, 이상해요. 엄청 이상해요. 완전히 이상해요. 나도 잘 모르는 우리 엄마를 이정민 선생님이 어떻게 알고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거죠?” 여운은 의심스럽다 못해 불쾌한 듯 따져 물었다. “많이 이상할 거예요.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그동안 많이 생각했고 많이 망설였어요. 그런데…… 이젠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요.” “…….” 여운은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인 것인지 생각도 해야 했고, 또 들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얘기…… 여기서 해 줘요.” “내 집으로 가요. 보여 줄 게 있어요.” ‘보여 줄 거? 그게 뭔데 자꾸 집으로 가자고 하는 거지?’ “보여 줄 게…… 뭔데요?” “사진. 여운 씨 어머니 사진요.” “우리 엄마…… 사진요?” “보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루였다. “여보세요?” - 비 오지?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했어요. 집에 가려구요.” -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알아요.” - 혹시 이정민 옆에 있어? “아뇨…….” 여운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바로 옆에 있었지만 옆에 있다고 말하면 마루가 더욱 호들갑을 떨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바로 집으로 가. 집에 가면 문 잠그고 한잠 자.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문 열어 주지 말고.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