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조, 기차역 상황 어떤가? 오 팀장이 이정민을 미행 중인 4조에게 물었다. - 4조 혼잡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민간인 수가 제법 많습니다. 그때 임정화를 뒤쫓던 검거 팀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 검거 1, 2, 3조 5분 후 톨게이트에 도착합니다. - 검거 1, 2조, 임정화 차량 앞질러 톨게이트 통과 후에 전방에서 차단, 3조가 후방에서 막는다. 오 팀장이 지시를 내리자 임정화를 뒤따르던 검거조 차량 두 대가 속도를 올려 임정화의 차량을 앞질렀다. - 1, 2조 임정화 차량 앞질렀습니다. 1, 2조 톨게이트 통과! 검거조장이 보고를 하자마자 임정화의 차량도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 임정화 차량 톨게이트 통과! - 1, 2조 전방 차단했나? 오 팀장이 상황을 물었고 1분 후 보고가 들어왔다. - 1, 2조 전방 차단했습니다! 3조 곧 후방 차단합니다. 검거조의 다급한 보고와 함께 시끄러운 소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임정화가 탈출을 시도합니다. 검거조 전방 후방 모두 차단했습니다! 시끄러운 소음은 다름 아닌 전방을 차단한 검거 1, 2조 차량과 임정화의 차량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곧 또다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는데 전방을 차단당한 임정화가 후진을 하다가 후방을 차단한 검거 3조 차량과 부딪히는 소리였다. - 검거조, 검거 작전 시작합니다! 검거조의 외침과 함께 차량 문을 두드려 대는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시끄럽게 터져 나왔다. - 임정화 검문 불응! 임정화 검문 불응! 17장 - 밀어붙여! 오 팀장이 명령했다. - 임정화가 통화를 시도합니다! - 통화 못 하게 빨리 제압해! 오 팀장이 소리쳤다. - 차량 문 강제로 열겠습니다! 임정화가 순순히 차량 문을 열지 않고 버티는 듯 보고와 함께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4조. 이정민 휴대폰으로 전화가 옵니다. 기차역에서 이정민을 전담하고 있는 4조의 보고가 들어왔다. 임정화가 통화를 시도하고 이정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면 그건 분명 임정화가 이정민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잠시 후 찢어질 듯 높은 고음의 여자 목소리와 요원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 이거 놔! 무슨 짓이야! - 손 들어! 손 머리에! 움직이면 쏜다! 반복한다. 손 들어! 손 머리에! 불응시 발포한다! - 끌어내! - 이거 놔! 놓으라고! 아악! 이거 놔! 놓으라고! 아악! 여자의 비명 소리와 발악하는 소리가 요원들의 경고와 함께 긴박하게 들려오자 마루는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이어폰 소리에 집중했다. - 4조입니다. 이정민이 통화를 못 했습니다. 벨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 총이다! 용의자 제압해! 총이라는 외침에 마루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다행히 발포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 임정화 제압! 반복합니다. 임정화 제압! 검거조의 보고가 들어오는 순간 마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검거 1, 2, 3조 임정화와 차량 즉시 국수방으로 후송한다! 오 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 예! 출발합니다! - 4조 현 상황 보고. 오 팀장이 이번에는 이정민을 감시 중인 검거 4조에게 지시했다. - 4조, 이정민 기차역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요원 두 명이 이정민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 4조, 이정민 화장실에서 통화 시도합니다. - 2좁니다. 임정화 휴대폰 울리고 있습니다. - 번호는? 오 팀장이 물었다. - 발신 제한입니다. - 4조, 이정민이 통화를 끝냈습니다. - 2조, 임정화 휴대폰도 끊어졌습니다. - 4조 이정민 지금 화장실에서 나갑니다. - 4조 이정민 화장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 4조 요원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정민을 감시 중인 4조 요원들이 번갈아 보고했다. “4조. ○○역에 도착한 기차 있습니까?” 마루가 검거 4조에게 물었다. - 2분 후 도착 예정인 기차 있습니다. “출구로 나오는 사람들 면밀하게 살펴보세요. 연락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4조, 이정민 기차역 커피매장 오픈 카운터에서 커피 주문하고 있습니다. 4조의 보고를 들으며 혹시나 연락책이 기차역 밖에 있다가 기차역 안에서 이정민과 접촉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차역 주변을 망원경으로 살펴보던 마루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게도 여운의 모습이 잡혔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마루가 차 창문을 내리고 다시 쳐다보자 진짜 기차역 근처에 여운이 있었다. 여운과 연우가 나란히 기차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길 왜 온 거지? 제기랄!” 마루는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려다가 내려놓고 말았다. 휴대전화는 임정화 검거 작전 때문에 국수방 팀과 검거조가 모두 연결해 교신 중에 있었고 현재로선 교신을 끊을 수도, 끊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마루는 다시 망원경으로 여운과 연우를 바라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여운 곁에 연우가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왜 하필 이럴 때 두 사람이 기차역에 나타난 것인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4조, 기차 역사 상황은 어떤가? - 4조, 지금 기차 도착해서 혼잡스러워졌습니다. 나오는 사람들 확인 중입니다. - 이정민은? - 이정민 커피 들고 중앙 대합실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마루는 검거조의 보고를 들으며 망원경으로 여운과 연우의 동선을 살폈다. 두 사람은 기차역 정문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오 팀장님, 7요원 기차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 무슨 소리야? 현 위치 유지. 상황 대기! “안 됩니다.” - 안 된다니? “기여운이 기차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 기여운이 기차역으로 가고 있다니? 왜? “이연우 순경과 기차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 이연우 순경이 누구야? 그 잎사귀 두 개? “예, 맞습니다.” - 기여운이 잎사귀하고 왜 기차역으로 가? 둘이 도망가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정확한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 7요원. 차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국장님.” - 상황은 작전이 끝난 후에 보고하도록 하고 기여운 씨 동선 살피세요. “알겠습니다, 국장님.” 마루는 지체 없이 차에서 내려 기차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4조, 이정민, 커피를 들고 중앙 대합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합니다. - 2조, 임정화의 휴대폰이 울립니다. 발신 제한 번호입니다. 4조와 2조의 보고가 연달아 들어왔다. - 4조, 이정민이 통화를 포기합니다. - 2조, 임정화 휴대폰 끊어졌습니다. 길을 건넌 마루는 재빨리 기차역 안으로 뛰어 들어가 이정민은 물론이고 여운과 연우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이정민은 중앙 대합실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여운와 연우는 기차 타는 곳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행히 여운이 있는 곳과 이정민이 있는 곳은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정민도 여운도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마루는 검거조의 위치도 파악했다. 검거조는 감시 중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각각의 위치에서 은밀하게 이정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7요원. 기차역 진입. 이정민, 기여운, 이연우 위치 파악했습니다.” 마루는 재빨리 국수방에 보고했다. - 7요원. 이정민, 기여운, 이연우의 동선만 살피세요. 노출되면 안 됩니다. 차연화가 명령했다. “7요원, 알겠습니다.” - 4조, 30대 중후반 정장 차림 남자, 주시 중. - 4조, 30대 초 중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에 서류가방 든 남자, 주시 중. - 4조, 40대 베이지 컬러 점퍼 차림의 백팩 착용 남자, 주시 중. 수상쩍은 사람들을 주시 중이라는 검거 4조 요원들의 보고가 잇달아 들어오자 마루의 시선이 번개처럼 빠르게 요원들이 보고한 사람들로 향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서류 가방 남자, 백팩 착용 남자를 차례로 훑어보던 마루의 시선이 백팩 착용 남자에게 고정됐다. “7요원입니다. 40대, 백팩 착용 남자 주시하세요. 이정민과 접촉했던 연락책입니다.” 마루의 보고에 요원들이 재빨리 수신호로 의견을 나누어 두 명의 요원은 40대 베이지 컬러 점퍼를 입고 백팩을 멘 남자를 주시하고 두 명의 요원은 이정민을 주시했다. - 7요원, 연락책 확실한가? 오 팀장이 물었다. “확실합니다. 지난번 기차역에서 이정민에게 백팩을 건넨 사람입니다.” 마루는 오 팀장에게 대답한 후 재빨리 여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운은 기차 타는 곳 근처 의자에 연우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 마루는 불안한 눈길로 여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 4조, 백팩 남자 이정민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4조, 이정민 움직임 없습니다. 이어폰을 통해 4조 요원들의 보고가 들어오자 마루의 시선이 다시 백팩 남자와 이정민에게로 향했다. 백팩을 멘 남자는 중앙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는 정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4조, 이정민이 대합실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민은 연락책과 마주치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4조, 이정민이 움직입니다. 연락책과 마주 보는 방향입니다. 곧 연락책과 만날 것 같습니다. 4조 요원이 그렇게 보고하는 순간 정민과 연락책의 시선이 부딪혔다. 하지만 정민은 연락책을 외면했다. 정민이 외면하자 연락책도 시선을 외면했고 서로 전혀 모른 척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7요원, 이정민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마루가 조용히 보고했다. - 눈치챘다고? “이정민과 연락책이 분명 서로를 알아봤는데 서로 외면하고 지나쳤습니다.” - 7요원, 4조, 이정민에게 노출됐습니까? 차연화가 물었다. - 4조, 아닙니다. “7요원, 아직 아닙니다.” - 이정민에게 요원들의 위치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세요. 상황에 따라서는 이정민에게 노출되기 전에 철수하는 것도 허락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마루는 재빨리 여운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여운과 연우가 몇 마디 나누는 것 같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4조, 이정민 발권 창구로 갑니다. - 4조, 연락책 중앙 대합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4조의 보고대로 정민은 발권 창구 앞에 있었고 연락책은 의자에 앉아 전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 오전 8시 20분 서울행 표 있습니까?” 정민이 발권 창구 직원에게 물었다. “한 장요?” “예.” “네, 있습니다. 발권해 드릴까요?” “아니, 잠깐만요. 시간 다시 확인할게요. 감사합니다.” 정민은 발권 창구 직원에게 인사한 후 돌아서서 중앙 대합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4조, 이정민 서문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4조의 보고를 듣던 마루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을 때 이정민은 보고대로 서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돼!’ 마루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일그러졌다. 이정민이 향하고 있는 서문 쪽에 여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은 서문 쪽 기차 타는 곳 입구 앞에서 연우와 함께 있었다. ‘어떻게 하지?’ 마루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바라보던 그때 연우가 기차 타는 곳으로 들어갔다. 여운은 멀어져 가는 연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마루의 시선이 이정민에게 향했다. 정민과 여운의 거리는 10미터. ‘기여운, 빨리 밖으로 나가. 빨리.’ 마루가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여운은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4조, 이정민 서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서문으로 나갈 듯합니다. - 4조, 연락책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정민이 발권 창구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4조 요원이 방금 정민이 다녀간 발권 창구로 갔다. “저기 저 남자 보이죠? 조금 전에 여기 왔었는데.” 4조 요원이 발권 직원에게 정민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런데요?” 발권 직원이 수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4조 요원이 발권 직원에게 은밀하게 경찰 배지를 보여 주었다. “발권했습니까?” “아뇨. 내일 아침 서울행 표 물어봤고 표가 있다고 했는데 갑자기 시간을 다시 확인하겠다면서 그냥 갔어요.” “예, 고맙습니다.” 4조 요원은 나머지 요원들에게 정민이 발권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갯짓으로 알렸다. - 4조, 이정민 서문에 곧 도착합니다. - 4조, 이정민 내일 아침 서울행 표를 알아본 후에 발권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연락책은? 오 팀장이 물었다. - 현 위치 그대로 있습니다. - 눈치챘다. 4조 요원들 두 조로 나뉘어서 이정민, 연락책 감시해. - 예! 마루는 정민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서문 쪽으로 움직였다. 여운과 이정민과의 거리는 이제 불과 5미터. 그때 여운이 서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운아, 빨리 나가. 빨리!’ 마루가 그토록 애타게 외쳤지만 상황은 마루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이정민이 여운을 알아본 것이다. “여운 씨?” 부르는 소리에 여운이 돌아섰다가 정민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이정민 선생님?” 정민과 여운이 만나고 말았다. “제기랄!” 마루는 국수방 요원들과 교신 중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도 모르게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 7요원, 무슨 일이야? “기여운이 이정민과 접촉했습니다.” - 에이 씨! 오 팀장의 입에서도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여운 씨.” 정민이 반가운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선생님 여기 왜 왔어요?” “내일 서울 갈 일이 있어서 발권하러 왔다가 원하는 시간대의 표가 매진돼서 돌아가는 중이에요. 여운 씨는요?” “누굴 좀 배웅하느라구요.” 마루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정민과 여운이 대화 나누는 것을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 차마루 씨 어디 갔어요?” “차마루 씨 아니고 다른 사람요.” “다른 사람?” “친구요.” 여운은 대충 친구라고 둘러댔다. “혼자 왔어요? 차마루 씨는요?” “혼자 왔어요. 차마루 씨는 집에 있어요.” “혹시 다른 볼일 있어요?” “아뇨.” “그럼 같이 갈까요?” “그럴까요?” 마루는 정민과 여운이 함께 기차역을 나가는 모습을 미칠 것 같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 4조, 연락책 발권 창구에서 기차표 발권 중입니다. 마지막 기차를 탈 것 같습니다. - 4조, 연락책 사진 확보했나? 오 팀장이 물었다. - 4조, 확보했습니다. - 4조, 연락책 기차 타면 철수해라. - 알겠습니다. “4조, 요원 한 명만 이정민 차 따라붙어 주세요.” 마루가 다급하게 부탁했다. - 무슨 일이야? 오 팀장이 물었다. “기여운이 이정민과 함께 움직입니다.” - 4조, 7요원 말대로 두 조로 나누어서 한 조는 연락책 맡고 한 조는 이정민 따라붙어. - 4조, 알겠습니다. 마루는 여운이 정민의 차에 올라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미친 듯이 자신의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7요원, 그린벨트로 복귀합니다.” 마루는 오 팀장에게 보고한 후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 * “생각해 봤어요?” 여운을 옆자리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정민이 갑자기 물었다. “뭘요?” “미국 같이 가는 거요.” “아……. 에이, 어떻게 같이 가요. 못 가죠.” 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못 가요?” “이정민 선생님 전시회 하는 데 내가 따라가면 방해만 되죠.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방해 안 돼요. 이미 여운 씨 이름 이미 스태프 명단에 올렸어요.” “명단에요?” 여운이 놀란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뭐하러 그랬어요? 이름 빼세요. 난 안 가요.” “미국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가고는 싶죠.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에요. 나중에 내 힘으로 갈 거예요. 아무리 공짜라도 이정민 선생님한테 신세 지기 싫어요. 신세를 지면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하잖아요. 신세 지는 거, 그건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신세 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갚을 필요도 없어요. 모든 비용은 전시회 측에서 부담해요.” “전시회 측에서 부담한다 해도 결국 이정민 선생님한테 신세 지는 거잖아요. 이정민 선생님은 전시회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실 텐데, 솔직히 내가 이정민 선생님 일정대로 움직여 봤자 뭘 하겠어요. 나란 사람이 조각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고 영어도 잘 못하구요. 이래저래 즐거운 여행이 되진 못할 거예요. 그래서 난 안 가요.” 여운이 미국 여행에 전혀 미련이 없는 투로 말했고 정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풀어졌다. “진짜 신세 지는 거 아닌데……. 그리고 통역이 따라다녀요. 그러니까 영어 못하는 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통역은 이정민 선생님을 따라다닐 것 아니에요.” “난 통역 필요 없어요. 기꺼이 여운 씨한테 양보할게요.” “영어 잘하나 봐요. 부럽다.” “부러워하지 말고 같이 가요.” “아니에요. 내가 이정민 선생님 따라 미국 가면 서로 피곤하고 불편할 거예요. 그냥 홀가분하게 다녀오세요.” 여운은 끝까지 거절했다. 당연했다. 간첩과 미국을 간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 “7요원입니다. 4조, 이정민 차량 위치 알려 주세요.” - ○○마을로 가는 ○○국번 도로로 진입했습니다. 마루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정민이 ○○국도를 탈 것이라고 예상하고 ○○마을로 가는 반대편 국도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편 국도는 이정민이 타고 있는 ○○국도보다 마을로 가는 시간 3분의 1 정도는 더 걸렸기 때문에 마루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올려야 했다. “4조, 이정민 차량에 함께 탑승한 여자 확인됩니까?” - 확인됩니다. “이상 징후 없습니까?” - 없습니다. 마루는 일단 아무 일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핸들을 꽉 틀어잡았다. 솔직히 읍내에서 마을까지 가는 동안 이정민이 여운에게 해로운 짓을 할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의 가슴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정민이 기차역에서 연락책과 접촉하지 않은 것은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이유는 임정화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불발됐기 때문이고, 그래서 연락책과의 접촉도 포기하고 기차역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정민은 요원들이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 틀림없이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민이 이판사판 여운을 볼모로 나쁜 짓을 벌일 수도 있었다. 물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럼에도 마루는 그 낮은 확률에도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불안에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여운 때문이었다. 여운, 기여운! 어떠한 경우에라도 여운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운은 온전히 안전하게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었다. 꼭 그래야만 했다. 왜, 무엇 때문에 여운의 안전을 그토록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였다. ‘사랑하니까.’ * “솔직히 공짜라는 말에 엄청 솔깃했거든요. 그런데 공짜도 공짜 나름이지, 과자 한 봉지, 음료수 한 병 그런 것도 아니고 미국에 공짜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거지 근성 티 내는 것 같아 싫어요.” “거지 근성 아니에요. 난 여운 씨하고 미국 같이 가서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정민의 말에 여운이 정민을 째려봤다. “이정민 선생님이랑 미국까지 가서 데이트를 할 수는 없죠.” “왜요?” “왜요라뇨? 난 남자 친구가 있잖아요. 남자 친구를 두고 미국에 가서 이정민 선생님하고 데이트를 한다는 게 말이 돼요? 나란 여자, 재산은 못 가졌지만 양심과 의리는 가진 여자거든요. 차마루 씨가 들으면 거품 물 거예요.” 여운의 말에 정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한 데이트는 플라토닉 데이튼데.” “플라토닉 러브는 들어 봤지만 플라토닉 데이트는 처음 듣네요.” “플라토닉 데이트라는 말은 이럴 때 미국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면 좋겠다, 그런 뜻이에요.” “취지는 매우 플라토닉하네요. 하지만 플라토닉이건 안 플라토닉이건 하여튼 이정민 선생님하고 미국 가는 건 불가능해요.” 여운이 야무지게 거절하는데 여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마침 마루였다. “이것 봐요. 차마루 씨 전화했잖아요. 이정민 선생님이 미국 가자고 꼬시는 줄 알고 득달같이 전화했잖아요.” 여운이 농담처럼 말한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디야! 휴대전화 밖으로 고함 소리가 다 들릴 만큼 마루가 버럭 호통쳤다. “집에 가고 있어요. 소리 좀 지르지 말아요.” - 아까 왔어야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면 어떻게 해? 어디쯤이야? 데리러 가? “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이미 반 정도 갔어요. 20분 정도면 도착해요. 이정민 선생님을 읍내에서 만나서 차 얻어 타고 가는 중이에요.” - 이연우 만난다더니 이연우가 아니라 이정민 만난 거야? 나한테 뻥친 거였어? “뻥은 무슨 뻥이에요? 연우 씨는 만나고 헤어졌고, 집에 오는 길에 이정민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거예요.” - 못 믿겠어. 하여튼 빨리 와. 집에 오면 따져 보자고! “알았어요! 기다려요! 확실히 따져 줄 테니까!” 여운도 바락 소리친 후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여튼 이놈의 잔소리는 진짜 역대급이야. 이쯤 되면 의처증 아닌가?” 여운이 투덜거리는데 정민이 “의처증 같아요” 하고 거들었다. “그죠? 의처증 같죠? 아니지, 결혼을 안 했으니까 의처증은 아니고 아! 스토커다. 진짜 중증 스토커야. 진짜 내가 갈 곳만 있다면 차마루 씨랑 당장 헤어질 텐데.” 여운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지만 정민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서 말이다.
“차마루 씨랑 헤어지고 나하고 미국 갑시다.” 정민이 농담 같은 진담을 말했다.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간첩하고 미국은 안 간답니다.’ “확 그럴까요? 그런데 이정민 선생님.” 여운이 미안한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미안한데 조금만 빨리 달리면 안 되겠죠? 의처증 차마루 씨가 하도 난리를 쳐서요.” “알았어요. 조금 더 달려 볼게요.” 정민은 여운의 요구대로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 - 4조, 이정민이 속도를 올립니다. 15분 이내 마을에 도착할 듯합니다. “제기랄!” 4조의 보고에 마루는 모든 교통 신호를 무시하며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민보다는 5분이라도, 아니 1분이라도 먼저 집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운에게 전화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운의 목소리를 들어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될 것 같아 전화를 걸었던 바람에 속력을 더 높여야 했다. - 4조, 연락책 서울행 기차 탑승했습니다. 기차역에서 연락책을 맡은 4조의 보고가 들어왔다. “7요원입니다. 이정민 차량 마을로 진입하면 이정민 미행조 철수하세요.” - 4조, 알겠습니다. 마루는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속도를 최고치로 올렸다. * “7요원, 5그린벨트 복귀했습니다.” 마루가 차에서 내리며 보고했다. “4조, 이정민 지금 어딥니까?” - 지금 ○○마을로 진입했습니다. “여성 동승자, 이상 없습니까?” - 이상 없습니다. 이상 없다는 대답에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4조, 철수해도 되겠습니까? “철수하세요. 수고했습니다.” 마루는 재빨리 셔츠를 벗은 다음 방탄복을 벗어 차 안에 넣어 두고 셔츠를 다시 껴입으며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저 멀리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마루는 이정민보다 빨리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대문 앞에서 정민의 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정민의 차가 마루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마루는 차에서 내리는 여운과 정민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봤다. “차마루 씨.” 여운이 마루에게 다가왔다. “지금 몇 신 줄 알아?” 마루가 기다렸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아직 10시도 안 됐잖아요. 이만하면 빨리 온 거니까 잔소리 좀 작작 해요.” 여운이 바락 맞받아쳤다. 마루는 여운을 두고 정민에게 직진했다. “내 여자 꼬시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둘이 언제 약속한 겁니까?” 마루가 정민에게 경고하는데 여운이 당황한 얼굴로 마루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정민 선생님이 꼬신 거 아니에요. 이정민 선생님 미안해요. 이 남자가 또 시작이네요.” 여운이 펄쩍 뛰며 정민을 감싸자 마루는 더욱 화가 났다, “이정민 씨가 꼬신 게 아니면 기여운이 꼬셨어?” “아무도 안 꼬셨다구요!” 여운이 또다시 펄쩍 뛰었다. “약속한 것도 아니에요.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거예요.” “우연히? 그리고 기차역? 기차역엔 왜 간 거야? 서울로 둘이 도망가려고?” 마루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도망은 무슨 도망이에요! 내가 이정민 선생님하고 도망을 왜 가요?” “도망치려던 거 아니면 기차역엔 왜 간 거야?” “도망치려던 거면 여기 왜 돌아왔겠어요? 그냥 토꼈지!” 여운이 주먹까지 틀어쥐고 소리치자 마루가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럼, 기차역에 왜 갔는데?” “연우 씨가 ○○시에 볼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배웅해 달라고 해서 기차역에 갔던 거예요. 거기서 이정민 선생님 만나서 운 좋게 차 얻어 타고 온 거구요. 차 태워 준 사람한테 왜 난리를 치고 그래요?” 여운이 마루에게 따진 후 미안한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이정민 선생님,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선생님 차 얻어 타는 게 아닌데, 날 봐서 의처증 중증 환자인 차마루 씨를 용서하세요.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네요.” 여운이 마루를 대신해 정민에게 사과를 하는데 마루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뭐? 의처증 중증 환자? 날 지금 정신병자 취급 하는 거야?” “이정민 선생님, 어서 가세요. 지체 말고 가세요. 환자가 더 날뛰기 전에.” 여운이 정민을 차 안으로 밀어 넣었고 정민은 못 이긴 척 차에 올랐다. “잠깐 기다려요!” 마루가 차로 다가갔다. “기여운은 내 여잡니다.” “알고 있습니다.” 정민이 노여워하지 않고 사람 좋게 대꾸했다. “절대 넘보지 말아요. 이런 여자 세상에 또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진짜 창피해 죽겠어. 들어가서 얘기해요! 이정민 선생님, 태워 줘서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경고했어요! 내 여자 꼬시지 말아요!” 마루가 정민을 향해 소리쳤고 정민은 웃는 낯으로 손을 들어 보인 후 차를 돌려 떠났다. “연기가 너무 과했어요. 남자 친구인 척하는 연기가 너무 과했다구요.” 여운이 집으로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여운이 야단치는 투로 말하면서 대문을 닫는데 대문이 닫히자마자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왜 이래요?” 여운이 놀라며 마루를 밀어내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가만히 있어.” “갑자기 왜 이러냐구요.” “가만히 있어. 가만히.” 마루가 여운을 껴안은 채 속삭였다. 여운이 집에 무사히 도착하기 전까지 마루의 가슴이 얼마나 불안했으며 얼마나 초조했는지 그건 마루만 알고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정민이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운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건 마루만 알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 탈 없이 돌아와 품에 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것 역시 마루만 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여운이 묻자 마루가 여운을 놓아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 “왜요?” “기여운 때문에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왜요?” “네가…… 이정민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간첩하고 있었으니까. 네 옆에 내가 없었으니까.” “에이, 그냥 차만 얻어 타고 온 거예요.” 여운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마루에겐 절대 별것 아닌 일이 아니라 엄청나게 위험한 순간이었다. “놈은 간첩이야.” “알아요. 하지만 그냥 차만 얻어 탄 거예요.” 여운의 천진한 반응에 마루는 다시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다행이야.” “뭐가요?” “그런 게 있어.” “너무 걱정을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됐으니까 그만 놔줘요. 숨 막혀요.” 여운이 마루를 밀어냈고 마루는 아쉬움을 느끼며 여운을 놓아주었다. “앞으로 이정민 차 얻어 타지 마.” “그러려구요. 이정민이 미국 가자고 자꾸 꼬셔서 피곤하더라구요.” “뭐? 저놈을 그냥!” “안 간다고 했으니까 걱정 말아요.” 여운이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깐! 거기 서!” 마루의 고함에 여운이 걸음을 멈추고 마루를 돌아봤다. “또 왜요?” “이연우를 왜 배웅한 거야? 뭣 때문에 배웅까지 한 거야!” “작별 기념이었어요.” “작별 기념?” 마루의 눈동자에서 새빨간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해.” “뭘 사실대로 말해요?” “작별 기념으로 또 뭘 했는지.” “뭘 하긴 뭘 해요? 차 마시고 대화하고 배웅하고 그게 끝이에요.” 여운이 아무렇지 않을 얼굴로 말했지만 마루는 이미 질투에 사로잡힌 질투 마왕이 돼 있었다. “그것뿐이었다고?” “그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설마…….” 마루가 여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틀어잡았다. “설마 뭐요?” “입술을 준 건 아니겠지?” 마루가 이글거리는 눈길로 여운의 입술을 노려보며 물었다. “진짜 중증이야. 왜 이래요?” “말 돌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입술 줬어, 안 줬어?” “안 줬어요! 안 줬다구요! 나란 여자가 가진 건 없어도 의리는 있는 여자거든요? 아무리 가짜 남자 친구라도 남자 친구 두고 다른 남자랑 입술을 쪽쪽 해 대진 않거든요!” 여운이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마루의 손을 획 뿌리치며 말한 후 돌아섰다. “확 키스해 버릴 걸 그랬어. 차마루 씨 약 올라 죽으라고!” 여운이 투덜거리는데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여운의 입술을 삼켜 버렸다. 마루와 여운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꼬랑지 살랑살랑 흔들며 곁에서 쭉 지켜보고 있던 메주는 마루가 여운에게 키스하는 순간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배를 깔고 누웠다. 두 사람의 키스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메주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날 밤,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뭐, 할 얘기 있어요?” 여운이 상체를 일으키며 묻는데 마루가 “없어”라고 대답하며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왔다. “불은…… 왜 꺼요? 할 얘기 없다면서 왜 들어와요?” “불은 내가 있을 거니까 켜 둘 필요 없고, 할 얘기 없어도 여기 있어야 해서 들어온 거야.” 마루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허락도 없이 이불 속으로 막 들어오고 그래요?” 여운이 움찔 질겁하며 거리를 넓히자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겼다. “무슨 말을 해도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거 허락 안 할 거잖아.” “그거야, 그렇죠.” “그래서 허락 안 받은 거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여기서 잘 거야.” “뭐라구요?” 여운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물러나려고 하는데 마루가 여운을 꽉 붙들었다. “도망가도 소용없어. 안 나갈 거니까.” “무슨 수작이에요? 설마 지금 날 노리는 거예요?” “솔직하게 말할게. 오늘은 안 노려.” 오늘은 노리지 않는다는 마루의 대답에 여운은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나가지도 않고 노리지도 않는다면 여기서 뭐 할 거예요?” “여기서 잘 거야. 기여운 옆에서.” “왜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마루가 여운이 멍한 얼굴로 쳐다보든 말든 먼저 자리에 누웠다. “쳐다보지 말고 누워.” “왜 내 옆에서 자야지 마음이 편하다는 거예요?” “눈에 안 보이니까 안심이 안 돼.” “지금은 편해요?” “편해. 비로소.” “헐.” 여운은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거죠?” “응.”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면 됐어. 빨리 누워. 아무 짓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자.” 마루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여운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한 얼굴로 마루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등을 보이고 누웠다. “자?” “안 자요. 못 자요.” 여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차마루 씨가 옆에 있잖아요. 밤 꼴딱 새울 거예요.” “밤새우지 말고 자.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흥! 절대 안 잘 거거든요?” 여운이 씩씩거리며 큰소리쳤다.
절대 안 잘 거라고 큰소리쳤던 여운은 어이없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어 버렸다. 아주 깊게, 아주 편안하게. 깊은 밤,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여운을 보듬어 안았다. 마루가 여운을 보듬어 안는 순간 여운이 잠결임에도 깜짝 놀라며 팔을 뻗어 경계했다. “나야, 여운아. 괜찮아.” 마루가 조용히 안심시키자 경직됐던 여운의 몸이 서서히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루는 여운을 끌어당겨 가슴속에 폭 보듬어 안았다. 잠깐 몸을 움츠렸던 여운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마루의 손길에 이내 움츠렸던 몸을 풀었고, 곧 다시 잠들었다. 잠든 여운의 머리카락을 오랫동안 쓰다듬던 마루도 여운을 보듬어 안은 채 잠이 들었다. * 마을 회관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여운을 위한 잔치였다. 여운이 큰일을 해냈고 큰일을 해낸 여운에게 보답하기 위해 마을 어르신들이 마련한 잔치였다. 여운이 해낸 큰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마늘 팔기였다. 올해 마늘 농사는 풍년이었다. 알도 굵고 상한 것 없이 깨끗해서 상품 가치가 높았다. 다들 작년보다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마늘값은 똥값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바닥을 쳤고 고생, 고생 생고생해서 수확한 마늘이 똥값이 되자 헐값에 파느니 갈아엎는 것이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때 슈퍼맨처럼 나선 사람이 여운이었다. 불과 몇 달이지만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체험한 여운이었기에 힘들게 수확한 마늘을 똥값에 넘기기도 싫었고, 갈아엎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여운은 서울에서 식당 종업원을 할 때 시장에 장을 보러 다니며 친해진 도매 농수산물 사장님들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농수산물 시장 사장님들로부터 믿을 만한 처녀, 딸 같은 아이, 똑똑한 친구, 인정 많은 아가씨로 인식되어 있던 여운이었기에 사장님들은 여운의 도움 요청에 즉각 응답했다. 여운은 서울 시장으로의 장거리 배달도 마다하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해 늦은 밤에 도착하는 강도 높은 출장 배달이었지만 이장님과 트럭 가득 마늘을 싣고 서울 도매 시장까지 직접 찾아가서 배달했다. 장거리 배달을 열 번이나 하면서 몸살까지 났지만 마을 어르신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강행군했다. 첫날 백 접을 팔았다. 시장 상인들이 입소문을 내 주면서 다음 날 2백 접 주문이 들어왔다. 사흘째는 5백 접을 배달했고, 여운이 나선 지 20일 만에 마늘을 몽땅 다 팔아 치웠다. 그래서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똥값에 파느니 갈아엎겠다는 말까지 나왔던 마늘을 제값 제대로 받고 팔아 준 여운이 마을 어르신들께 예쁘고 귀한 보물이 된 것이다. 여운을 위해 차린 잔치인 만큼 여운은 주인공 노릇도 톡톡히 했다. 마을 회관에 있는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트로트 노래를 열 곡이나 메들리로 불러 젖혔다. 여운의 노래에 마을 어르신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웃음꽃이 만발했다. 그야말로 신나고 즐거운 잔치가 된 것이다. 마루는 노래하는 여운의 모습에 흠뻑 빠져 있었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여운을 바라봤다. 여운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너무나 예쁜 사람이라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잔치 음식 양껏 먹고 어르신들이 주는 술도 넙죽 다 받아 마시고 노래까지 실컷 부른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가 지면 유별스레 캄캄해지는 시골 마을 길. 요즘은 그나마 조금 뜸하지만 엊그제 멧돼지가 출몰했던 터라 여운은 마루 옆에 바짝 붙어서 걷던 중이었다. “무서워?” 웬만해서는 옆에 잘 붙지 않는 여운이 바짝 붙어서 걷자 마루는 여운이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마루 씨는 안 무서워요?” “안 무서워. 뭐가 무서워, 내가 있는데.” “캄캄한 거 무서워요.”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고. 내가 있으니까.” “아까 어르신한테 들었잖아요. 엊그제 멧돼지 내려왔다구요.” “그놈의 멧돼지 한주먹에 때려잡아서 구워 먹자.” 마루의 말에 여운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데 마루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됐어요.” “잡아 줄게.” “안 잡아 줘도 돼요.” “잡아 준다니까.” 마루가 억지로 여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여운은 마루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려다 못 이긴 척 그냥 잡혀 있기로 했다. 그냥 손만 잡아 줬을 뿐인데 이상하게 무서움이 한결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래 잘하더라.” 마루가 말했다. “내가 노래 좀 해요.” “잘 놀던데?” “내가 좀 잘 놀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좀 놀던데?” “내가 이런 여자예요. 마늘도 잘 팔고 노래도 잘하고 잘 놀고. 대단하죠?” “대단해. 못하는 게 없어.” “칭찬이죠?” “칭찬이야.” 마루가 진심으로 말했다. “차마루 씨.” “응.” “작전 끝나면 서울로 갈 거죠?” “그래야지.” “그럼, 지금 사는 집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생각 안 해 봤어.” “나한테 세 주면 안 돼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걸음을 멈추고 여운을 바라봤다. “세를 달라고? 왜? 여기서 살려고?” 마루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 여기서 살려구요. 이 마을이 참 좋아요. 여기서 할머니들이랑 할아버지들이랑 농사일 거들면서 계속 살고 싶어요. 솔직히 갈 데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집이 없는 나를 위해 세 줘요. 아주 싸게.” 여운이 아양을 떨듯이 말했다. “어차피 차마루 씨 없으면 그냥 비워 둘 집이니까 내가 살게 해 줘요.” “나하고 같이…… 서울 안 갈 거야?” “같이 서울 가면 뭐 해요? 서울에 가도 살 집이 없는데. 그리고 여기가 좋아요. 정들었어요.” “나 없이 혼자 살 수 있어?” 마루는 진지하게 말했는데 여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왜 못 살아요? 혼자 살 수 있어요. 사실 좀 무서울 것 같긴 해요, 밤에는. 그러니까 메주도 두고 가요. 메주랑 둘이 살게요.” “언제까지?” “계속. 계속 여기서 살려구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차마루 씨가 세만 주면. 나중에 돈 모아서 아예 집을 살 수도 있고. 내가 돈 모을 때까지 내가 살게 해 줘요. 해 줄 거죠?” “…….” 마루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여운이 불안한 얼굴로 마루의 눈치를 봤다. “집…… 팔 거예요?” “생각해 볼게.” 마루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팔지 말고 나한테 세 줘요. 나중에 내가 돈 모으면 살게요.” “생각해 본다고.” 여운의 손을 꽉 잡고 집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던 마루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 여기서 혼자 살 거야?” “그러려구요.” “혼자 어떻게 살아?” “왜 못 살아요? 여태 혼자 살았는데.” “지금 나하고 같이 있잖아. 그런데도 혼자 살 수 있다고?” “지금은 작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리고 난 원래 혼자 살았어요.” “나하고 서울 같이 가면 되잖아.” “아까 말했잖아요, 서울에는 내가 갈 곳이 없다고. 그리고 정말 여기가 좋아요.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요.” “결혼은? 결혼도 안 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산다고?” “당연하죠. 나 결혼 안 해요.” “왜?” “내가 했던 말 잊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전부 다 죽어 버리기 때문에 난 절대 사랑 안 해요. 사랑을 안 하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요? 이제 썸도 안 탈 거예요. 차마루 씨 말대로 썸 타는 건 상대방한테 할 짓이 아니라서 썸도 안 타기로 결심했어요.” 여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하게 말했지만 마루는 여운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기여운이 사랑하는 사람, 기여운을 사랑하는 사람 전부 다 죽어 버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그런 건 없어!” 마루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있어요. 내가 산 증인이잖아요.” “아니! 난 절대 그런 거 안 믿어.” “믿든 안 믿든 차마루 씨 서울로 가게 되면 내가 집에서 살게 해 줘요. 농사지으면서 럭셔리하게 전원생활을 누리면서 살게요.”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죽어라 일하는 게 럭셔리한 전원생활이야?” 마루가 화가 나서 물었다. “나한테는 진짜 럭셔리한 전원생활이에요. 굶지 않아도 되고, 신문지 뒤집어쓰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노숙하지 않아도 되고, 따뜻한 물에 언제든지 씻을 수 있으니까. 진짜 럭셔리한 생활이에요.” “내가 서울에서도 그렇게 살게 해 줄게. 굶지 않게 해 주고, 신문지 뒤집어쓰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노숙하지 않게 해 주고, 따뜻한 물에 언제든지 씻게 해 줄게.” “서울에도 집 있어요? 우와, 되게 부자네.” 여운이 천진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래도 난 여기가 좋아요. 여기서 처음 느꼈거든요.” “뭘?”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좋은 거구나……. 마음이 편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런 거 말이에요. 오늘도 무사히 살아냈구나,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일 끼니는 또 어떻게 해결하지? 그런 거 걱정하지 않고 그냥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이 편하다는 게 뭔지 여기 와서 알았어요. 여기서 살면 앞으로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요.” 여운이 여느 때보다도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없어도……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어?”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가 이렇게 편하게 느끼는 거, 차마루 씨가 옆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할 수 있다면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요. 차마루 씨랑 메주랑 셋이.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차마루 씨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는데 내가 차마루 씨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질 순 없잖아요.” “그래도 돼.” 마루의 말에 여운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픽 웃는데 마루가 여운의 손을 잡았다.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져도 된다고.” “안 할 거예요, 그런 짓.” “왜?” “나란 여잔 가진 건 없어도 양심은 있거든요.” 여운이 씩씩하게 말하는 순간 마루가 여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기여운.” “왜요?” “기여운…….” “왜요. 말해요.” “키스하고 싶다.” “뭘 하고 싶다구요?” 여운이 깜짝 놀라 묻는데 마루의 입술이 여운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얼마나 애틋한 입맞춤인지, 마루의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여운을 알까? 알았다. 아니, 알 것 같았다. 마루의 입술이 여운의 입술을 덮었을 때 여운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루의 입술에서 애틋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애틋함과 속상함이 마루의 입술을 타고 여운의 입술로 전해지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로 전해진 애틋함과 속상함은 여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고, 그 울렁거림 때문에 갑작스레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렇게 애틋하고 이렇게 속상한 순간인데, 여운과 마루의 가슴이 입술로 연결돼 하나로 이어지던 그때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누군가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에 여운이 움찔 몸을 움츠리며 마루를 밀어내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으며 발자국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와요.” “알아.” “놔줘요.” “안 돼.” “누가 온다구요.” “고형택이야.” 마루가 다시 여운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형택이요?” “고형택에게 모든 걸 비밀로 해야 해. 알지?” “알아요.” 여운도 입술을 붙인 채 대답했다. “곧바로 서울로 돌려보내. 절대 재워 줄 수 없어.”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그만 놔줘요. 형택이한테 키스하는 걸 보여 줄 필요까진 없잖아요.” 여운이 마루에게서 벗어나려고 꼼지락거리는데 마루는 놓아주는 대신 입술을 다시 더욱 꾹 눌러 덮었다. 그 순간 휴대전화 플래시 불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그리고 곧이어 귀에 익은 목소리의 남자가 바락바락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야! 기여운! 지금 뭐 하는 거야!” 진짜 형택이었다. 형택의 고함 소리에 여운이 고개를 돌려 형택을 쳐다봤다. 하지만 플래시 때문에 눈이 부셔서 형택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여운! 지금 차마루하고 뭐 한 거야!” 형택이 푸들푸들 떨며 고함을 쳤다. “조용히 좀 해.” “기여운, 너 지금, 와, 사람 그렇게 안 봤더니, 너 지금 길거리에서 남자하고 와……, 들켜 놓고 놀라지도 않네.” “닥치고, 플래시 좀 끄지 그러니.” 형택이 비춘 휴대전화 플래시 때문에 여운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자 형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플래시를 껐다. “지금 차마루 하고 뭐 한 거야!” 형택이 또 고함을 쳤다. “뭐 했는지 몰라?” 여운이 까칠하게 되묻자 형택이 멍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뭐, 뭐라고?” “뭐 한 건지 모르냐고. 뽀뽀했잖아.” “새까만 밤에 길거리에서 남자하고 뽀뽀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새까만 밤에 길거리에서 남자하고 뽀뽀한 게 자랑이 아닐 건 뭔데?” 여운이 형택의 말을 자르고 한 걸음 다가서며 쏘아붙였다. “그거야 여자가…….” “여자가 뭐! 그럼 내가 새까만 밤에 길거리에서 여자하고 뽀뽀해야 자랑이니? 아니면, 훤한 대낮에 길거리에서 뽀뽀해야 자랑이야?” 여운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쏘아붙이자 형택이 움찔 한 걸음 물러났다. “뭘 잘했다고 난리야? 쪽팔려해야 정상 아니냐?” “내가 잘못한 게 뭐야? 내가 왜 쪽팔려? 내가 유부남하고 뽀뽀했어? 내가 미성년자하고 뽀뽀했어? 뭐가 잘못이고 뭣 때문에 쪽팔려? 그리고 내가 뽀뽀하는데 네가 왜 지적질이야? 네가 왜 훈계질이냐고!” 여운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머리통으로 면상을 들이받을 듯 매섭게 몰아붙이자 형택이 세상에 뭐 이렇게 뻔뻔한 년, 아니 여자가 다 있냐는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내가 뽀뽀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묻잖아!” “아니, 내 말은 새까만 밤에 남자하고 막 길거리에서 입술을 막 찍어 대고 그러면 누가 봐도 좋게 안 보이고 음흉한 거니까…….” “누가 봐도 좋게 안 보는 게 아니라 네가 좋게 안 보겠지! 바로 너 말이야! 나란 여잔 말이지, 원래 새까만 밤에 뽀뽀하는 거 좋아해. 길거리에서 음흉하게 입술 막 찍어 대는 거 좋아한다고.” “말도 안 돼.” “되거든! 완전 되거든!” 여운이 버럭 소리쳤다. “됐고! 너 여기 왜 왔어?” “너 찾으러 왔지!” “왜?” “왜긴! 갑자기 사라져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너 찾으려고 사방팔방 전국 팔도를 미친 듯이 돌아다녔단 말이야!” “뻥 치시네.” “뻥 아니거든?” 뻥이 아니라는 형택을 향해 여운이 새빨간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눈으로 노려봤다. “좋은 말로 할 때 똑바로 이실직고해라.” 여운의 경고에 형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닌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대체 왜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거냐고! 납치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확 죽어 버리려다 안 죽고 살았어.” “죽어 버리려고 했다고? 왜?” “몰라서 물어? 전 재산 털리고 이삿짐까지 도둑맞아서 개털 됐잖아!” “그랬지, 참……. 하여튼 그럼 안 죽고 살았으면 나한테 와야지 왜 여기 왔어?” “너한테 가면? 뭐 있어?” “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너한테 왜 가?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이연우 순경한테 전화했더니 알려 주더라고. 그리고 너! 차마루 씨하고 사귀는 거 진짜야?” 형택이 마루와 여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여운은 슬쩍 마루의 눈치를 보다가 일부러 뻔뻔한 표정으로 형택을 쳐다봤다. “뽀뽀하는 거 봤잖아. 새까만 밤에 길거리에서.” “말도 안 돼.” “되거든?” “된다고? 차마루 미워서 미쳐 버리려고 했잖아!” “지금은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거든?” 여운이 이를 바득 갈며 소리치자 형택이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얘기를 들은 것 같은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사람이 그렇게 변하냐?” “변한 지 오래됐거든?” “좋아, 좋다고! 그래, 차마루가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다고 치자! 그래서 어디까지 간 거야?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어디까지 건 거냐니? 뭘 어디까지 가?” “왜 쓸데없이 못 알아듣는 척이야! 두 사람 진도가 어디까지 갔냐고!” 형택이 창자가 꼬이는 듯이 온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똥마렵니? 몸은 왜 비틀고 소리는 왜 지르고 지랄이야!” “말해. 어디까지 간 거야?” “나하고 차마루 씨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는지 네가 뭔데 따져?” “따져야지!” “왜!” “네 친구니까!” “나는 지금껏 네가 만났던 여자들하고 전부 끝까지, 완전 끝까지 나갔어도 안 따졌거든?” “그건 다른 거지!” “뭐가 달라?” “넌 여자고 난 남자고. 여자와 남자는 다른 거야.” “이 자식이 어디서 조선 시대에서 뽕 맞은 소리를 하고 있어?” “뽕 맞은 소리가 아니라…….” 형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데 마루가 불쑥 끼어들었다. “끝까지 나갔습니다, 진도.” 끝까지 나갔다는 마루의 말에 형택이 벼락 맞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여운 역시 벼락까지는 아니고 조금 놀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끝까지 나갔다니, 끝까지라는 게 어딘데요?” 형택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루에게 물었다. “어디겠어요? 우리 동침하는 사입니다.” 마루가 여운의 어깨를 훅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형택은 두 번째 벼락을 맞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고, 여운은 첫 번째 벼락을 맞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사실이야? 기여운, 말해 봐. 사실이야?” 형택이 여운에게 다그쳤다. “사실이냐고!” 여운은 온몸의 힘을 죄 다 쥐어짜 낸 듯이 소리치는 형택에게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는 대신 마루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정확한 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여운이 자신의 입으로 동침했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형택이 재워 주면 안 돼요?” 여운이 마루에게 속삭여 물었다. “안 돼.” “너무 늦었잖아요.” “안 돼.” 마루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여운! 대답 안 하고 어디 가는 거야!” 형택이 부리나케 따라와 여운을 붙잡았다. “집에.” “집에 가다니. 대답해야 할 것 아니야!” “집에 빨리 가야 해. 그러니까 너도 그만 가.” “왜? 왜 빨리 가야 하는데!” “……동침하러.” 여운이 형택의 손을 털어 내고는 마루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미쳤어! 기여운 너 미친 거야!” 형택의 외침을 들으며 여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할게요. 형택이 재워 줘요. 하룻밤만.” “고형택을 꼭 재워 주길 바란다면 오늘 밤 나하고 같이 자야 해.” 마루의 말에 여운이 깜짝 놀라며 마루를 쳐다봤다. “진짜 동침하자구요?” “아니면, 고형택하고 동침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선택해. 우리 집에 방은 두 개야. 나야, 고형택이야?” 마루의 말에 여운이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는데 형택의 외침이 들려왔다. “기여운! 야, 기여운! 너 정말 이러기야? 걱정돼서 온 사람한테 이럴 수 있어?”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그만 떠들어!”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그렇지, 친구를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냐?” “부탁이니까 재워 줘요. 안 재워 주면 대문 앞에서 밤새 저 지랄을 할 거란 말이에요.” 여운이 사정하자 마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선택하라고. 나야, 고형택이야?” “동침은 좀…….” “왜 갑자기 부끄럼을 타고 그래? 처음도 아닌데. 며칠 전에도 내 품에 꼭 안겨서 잤잖아.” “그땐 차마루 씨가 막무가내로 내 방에 와서 내 옆에 누운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동침했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형택이 마루에서 재우면 안 돼요?” “쥐도 새도 모르게 기여운 방으로 숨어 들어갈 거야, 고형택 저 자식.” “그건 일리 있네요.”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재워 줘?”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어떻게?” “밤새 대문 앞에서 저 지랄하게 내버려 두자구요.” 마루와의 동침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여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형택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대문 앞에서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떠들고 있었다. 여운의 말대로 지랄을 해 대고 있었던 것이다. 형택이 지랄을 해 댈 때마다 메주도 장단 맞춰 짖어 대니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귀도 시끄럽지만 속도 시끄럽고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알게 될까 걱정돼 딱 미쳐 돌아가실 것 같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버텨 보려고 귀를 틀어막고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소용없었다. 목이 아파서라도 그만둘 거라고, 기운이 떨어져서라도 포기할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형택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정력적으로 지랄을 퍼 대고 있었다. 여운이 더는 견디지 못해 방에서 뛰쳐나오자 거실에 있던 마루가 여운을 노려봤다. “선택해. 내가 해결할까, 기여운이 해결할래?” “차마루 씨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간첩 혐의 뒤집어씌워서 국수방에 보내 버릴 거야.” “그건 안 되죠!” 여운이 기절초풍하며 소리쳤다. “형택인 나처럼 버텨 내지 못할 거예요? 저 자식은 무조건 자기가 간첩이라고 할 자식이라구요!” “그럼 당장 나가서 해결해. 보내든지, 죽이든지.” “해결할게요. 대신에, 보내거나 죽이는 게 아니라…… 재워 줘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운을 쳐다봤다. “방 두 개라고 했잖아.” “알아요.” “결론은?” “동침할게요. 저기서.” 여운이 마루의 방을 가리켰다. “오늘 드디어 역사적인 동침의 밤이네요.” 여운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