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16화 (16/21)

여운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몰랐다. 빠지기엔 너무 늦어 버린 때.  그럼에도 마루는 여운이 빠졌으면 싶었다. 어떻게든 빼 주고 싶었다. 여운이 손톱만큼이라도 위험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고, 털끝만큼이라도 다치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루가 여운의 안전을 위해 국수방에 이런저런 요청을 하게 된 이유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심경의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루의 임무는 이정민을 검거할 때까지 자신이 작전 수행 중인 국수방 특수 요원임을 들키지 않고 이정민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이 일반인인 여운의 안전이었다. 그러니까 차마루는 국수방 특수 요원으로서 모든 감각을 이정민에게 집중시켜 놓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루의 모든 감각은 여운의 안전에 집중돼 있었다. 사실 어느 쪽으로도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루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의 마음이 이정민의 검거보다는 여운의 안전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대로 국수방에서는 기여운의 안전이 아닌 이정민의 검거에 무게 중심이 완전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수방 요원으로서 상부와 함께 움직여야 했지만 마루의 마음이 여운에게로 향하는 것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정민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고 어째서 반드시 검거해야 하는 제1호 간첩인지 설명하자면.  이정민은 국수방에서 무려 10년간이나 뒤쫓고 있었던 남파 간첩이었다. 남파 간첩은 누구든 무조건 검거해야 하는 요주의 인물들이었지만, 이정민은 보통의 간첩과는 달랐다. 쉽게 말해 남파 간첩들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거물 간첩이었다.  이정민은 마루가 국수방 요원이 되기 전부터 국수방에서 쫓고 있던 인물이었다. 국수방의 추정으로는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던 여러 거물급 북한 인사들을 남김없이 살해한 남파 공작원이 바로 이정민이었다. 탈북 인사들을 살해한 남파 공작원이 이정민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도 불과 3년 전이었다. 3년 전에야 겨우 그 윤곽을 잡아낸 것이다. 그 전까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출귀몰했던 탓에 이 신출귀몰하고 무시무시한 살인 병기의 실체를 아무리 추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살인 병기 이정민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3년 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북한의 대남 공작 기구 소속 인사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는 수많은 남파 공작원 중에 가장 강력한 능력과 권한을 가진 자로 이정민을 지목했고, 국수방은 이정민을 쫓은 지 7년 만에야 겨우 이정민이라는 남파 간첩의 윤곽을 잡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윤곽이라는 것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정민은 본명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가명을 쓰고 있으며 국적도 미국이다’라는 정도였을 뿐이다. 정확한 이름과 나이도 알 수 없었고 사진조차도 없었기에 이정민이라는 가명을 쓰는 간첩이 누구인지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렵게 이정민이라는 간첩이 마이클 정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사용한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그제야 비로소 이정민이라는 간첩이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겨우 알게 됐다. 망명한 북한 대남 공작 기구 소속 인사는 여권상의 사진을 보고 이정민이 바로 그 거물 간첩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고 믿을 만한 증인이 있었기에 이정민 검거 작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정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간첩이 아니었다.  여권 사진으로 마이클 정이 그동안 국수방에서 쫓고 있던 바로 그 거물 간첩 이정민이라고 확인해 준 북한 대남 공작 기구 소속 인사는 겨울 한파가 몰아쳤던 날, 이정민 검거 작전이 시작됐던 바로 그날, 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자살로 위장돼 있었지만 분명 타살이었고, 그를 살해한 인물 역시 바로 이정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수방은 결국 이정민을 검거하지 못했다.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국수방에서 수집한 모든 증거들이 종잇조각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정민은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었기에 언제가 되었든 무조건 검거해야 했고 이정민 검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마루는 이정민의 검거가 아닌 여운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됐다.  이정민이 아니라 여운에게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진 계기는 우습게도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었다.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사소하고 보잘것없었던 일이 마루의 마음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마루의 마음 방향을 완전히 반대편으로 바꾸어 버린 일이기에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은 너무나 특별한 일이 돼 버렸다. 그 일은 바로 마루가 어머니 밭에서 흐느껴 울었을 때 일어났다. 그날 여운은 마루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 줬었다. 여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안아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마루의 고통이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이 여운은 너무나 따뜻한 손길로 마루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었다.  그 손길 때문이었다. 말없이 쓰다듬어 주는 그 손길. 그 손길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여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위로와 달램. 그리고 공감. 마루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감정들이 여운의 손길에 한가득 담겨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그 사소하고 보잘것없었던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마루는 늘 남몰래 눈물 흘려야 했었다.  마루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돌아가신 생모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고 하필 생모가 살았던,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의 파견이 결정됐을 때는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과 죄책감 때문에 국수방에 사표까지 제출했었다. 사표가 반려되고 결국엔 임무 수행을 위해 이곳에 내려왔지만 어머니가 살았던 집, 어머니인 줄도 몰랐던 어머니가 살았던 집, 자신이 태어났던 집에 발을 디뎠던 그날, 마루는 날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었다.  생모라는 것을 알았다면 한 번 더 손잡아 드렸을 텐데, 자신을 낳아 준 분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한 번이라도 더 찾아왔을 텐데, 한 번이라도 더 웃어 보였을 텐데. 후회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모인 줄 몰랐더라도 한 번은 안아 드릴 걸, 단 한 번도 안아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게 뭐가 어려운 말이라고, 사랑한다는 말 그 한 마디를 못 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숨어서 울었던 마루였는데 그날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흐느껴 울었었다. 정말 원 없이, 한없이 마음 놓고 울어 버렸었다. 마루를 다른 사람 앞에서 흐느껴 울어도 괜찮게 해 준 사람이 여운이었고, 그런 자신을 껴안아 준 사람도 여운이었다.  그때였다, 나보다 더 엄청난 상처를 가졌음에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공감하며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줄 줄 아는 기여운이라는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낀 것이. 정말 그때였다, 나를 위로해 준 이 여자를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그때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기여운이라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게 된 것이. 그때였다, 기여운이라는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부인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  그때부터 마루의 마음은 완전히 여운에게 기울어 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만약 이정민과 기여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기여운을 선택할 것이라고.  하지만 상황은 마루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16장        고추 심기보다 세 배는 더 힘든 마늘 캐기가 벌써 여러 날째.  정민이 자신이 직접 참을 준비하고 싶다며 여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운은 재깍 알아차렸다. 동면을 취하던 간첩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뭘 준비하시게요?”  “화채요.”  “시원하고 좋겠네요.”  “날이 부쩍 더워져서 시원한 거 먹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더울 땐 화채가 좋죠. 뭘 도와드릴까요?”  “화채는 먹어만 봤지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 여운 씨가 도와줘요.”    ‘조심해야 해. 기여운, 정신 바짝 차려.’    “재료는 있어요?”  “수박, 얼음, 설탕, 탄산수 정도.”  “그거면 돼요.”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어르신들한테 말씀드려 놨어요. 여운 씨하고 화채 만들어 오겠다고.”    ‘집으로 가자고?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기여운!’    “알았어요. 차마루 씨한테 말하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예.”    여운은 재빨리 마루에게 달려가 정민과 함께 화채를 만들러 간다는 것을 알렸다.    “이정민 집으로?”    마루의 미간이 즉시 일그러졌다.    “혼자는 안 돼. 같이 가.”  “어르신들 일하시는데 젊은 사람들만 전부 쏙 빠질 순 없잖아요. 차마루 씬 여기 있어요. 같이 가는 게 더 수상해 보일 거예요.”  “혼자서는 위험해.”  “알아요. 하지만 차마루 씨한테 말하고 가는 거 아니까 이상한 짓 못 할 거예요.”  “아니, 안 되겠어. 같이 가.”  “말했잖아요. 젊은 사람들만 쏙 빠지면 어르신들 역정 내실 거예요.”  “욕먹으면 돼. 혼자는 못 보내.”  “잠깐만요.”    나서려는 마루를 여운이 붙잡았다.    “티 나게 이러지 말아요. 고작 화채 하나 만들어 오는데 우르르 몰려가면 어르신들도 그렇고 이정민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전화할게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올게요.”    여운이 뜯어말리자 마루는 하는 수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수시로 전화할게.”  “수시로 전화를 하는 것도 의심할 거예요. 수시로 하지 말고 한 번만 해요.”    여운이 돌아서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붙잡았다.    “수시로 할 거야. 남자 친구니까. 알았어?”  “알았어요.”  “뭔가 수상하면 무조건 도망쳐야 해. 알았어?”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여운은 씩씩하게 말한 후 마루를 떠나 정민과 함께 정민의 집으로 왔다. 이정민이 도청기를 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    여운이 사기당한 집. 여운의 전 재산을 다 털리게 했던 바로 그 집.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정민의 집으로 들어온 여운은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정원 가득 전시되어 있는 정민의 조각 작품 때문이었다.  지난번 채 실장 무리들하고 정민의 집을 보러 왔을 때는 무엇에 쫓기는 듯 후다닥 둘러보고 도망치듯 나와야 했다. 그래서 집 안이든 정원이든 자세히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렴풋이 정원 곳곳에 흰 천으로 덮어씌운 거대한 무엇인가가 여러 개나 있어서 대체 저건 뭔데 가려 뒀을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조각품이었다.  조각가의 집이니까 당연히 조각품이 있을 줄은 짐작했지만 정민의 조각품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해서 공원이나 정원 같은 야외에서나 전시 가능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크기 때문인지 괜스레 위압감이 느껴지는 한편 멋지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무엇을 형상화하고 표현했는지는 도저히 짐작하지 못할 만큼 추상적인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전부 이정민 선생님 작품이에요?”  “맞아요.”  “우와, 대단하시네요.”    여운이 양손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대단하긴요.”    이정민이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멋져요. 정원이 엄청 넓은데 조각품이 있으니까 진짜 근사하네요.”  “작품들 때문에 일부러 정원 넓은 집을 구했어요. 뒤뜰에도 몇 작품 있어요.”  “다 구경해도 돼요?”  “그럼요.”  “사진 찍어도 괜찮아요? 인증 샷.”  “얼마든지 찍어요. 난 안에 들어가서 재료 챙겨 나올 테니까 사진 찍고 있어요. 저기 평상에서 화채 만들면 돼요.”  “알겠어요.”    여운은 정민이 화채 재료를 챙기러 집 안으로 들어간 사이 부지런히 조각품들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정원에는 열 개 정도의 거대한 조각 작품이 있었는데 여운은 한 가지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사진을 찍은 다음 재빨리 뒤뜰로 갔다. 뒤뜰에도 다섯 작품이나 있었는데 정원에 있는 작품보다는 사이즈가 작았지만 역시나 집 안에 두기엔 너무 큰 조각품이었다. 뒤뜰에서도 빠짐없이 사진을 찍은 여운은 뒤뜰 한쪽에 꽤 널따란 창고가 보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고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로 보이는 것들이 가득했는데 아무래도 정민이 조각을 하는 작업실인 것 같았다. 여운은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를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널따란 작업대 옆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한창 작업 중인 미완성 작품인 듯했다. 여운은 미완성 작품을 한참 동안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조각하려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미완성 작품을 배경으로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던 여운은 갑자기 벌레가 날아드는 바람에 놀라서 돌아서다가 작업대 위에 있는 조각 도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이, 저 벌레 시키.”    돌덩이에 달라붙은 벌레에게 욕을 해 주고 떨어뜨린 도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몸을 숙여 도구를 줍던 여운은 작업대 밑바닥에 붙어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얼어붙어 버렸다.  총이었다. 아무리 봐도 총이었다. 장난감 총이 아닌 진짜 총.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실물 총.  화들짝 놀라 떨어뜨린 도구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작업실을 빠져나오던 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대로 떠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그냥 모른 척해야 하나?’    모른 척하는 것이 여운 자신에게 가장 안전했다. 하지만 이정민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자꾸만 미적거려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냥 가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운의 발길은 어느새 다시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말 여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벌 떨렸다. 손이 떨리고 몸이 떨렸다. 그럼에도 여운은 작업대로 돌아가서 몸을 숙여 작업대 밑바닥에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는 권총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 헐레벌떡 작업실을 빠져나오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막 작업실로 들어오려던 정민과 딱 마주쳐 버렸기 때문이다!    ‘들켰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정말 오줌을 쌀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들켰다면, 여운이 권총 사진을 찍는 걸 정민이 알았다면 당장에 작업실로 끌려 들어가 조금 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은 권총으로 사살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놀라요?”    정민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권총 때문에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하지만 여운은 용케도 잘 둘러댔다.    “벌레 때문에요. 이만한 벌레가 막 덤벼서 도망 나오던 중이에요.”    여운이 주먹을 들어 보이며 과장되게 말했다.    ‘속아야 할 텐데…….’    속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 벌레……. 원래 벌레 많아요.”    속은 것인지 속은 척하는 것인지 일단 한 고비 넘긴 듯했다.    “진짜 많네요. 어찌나 무서운지…….”    여운은 아직도 무서운 척 몸을 떨었다.    “여기 작업실이죠?”    여운은 최선을 다해 당황하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척 연기하며 물었다.    “맞아요.”  “여기도 구경했어요.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있는데 뭔지 모르겠어요. 조각할 때 쓰는 거예요?”  “맞아요.”    정민이 부드럽게 웃었다.    ‘진짜 속은 건가?’    “재료 준비됐어요?”    여운이 서둘러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정민이 여운의 팔을 붙들었다.  움찔. 여운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정민을 쳐다봤다.    “왜요?”  “사진 많이 찍었어요?”  “그럼요. 전부 다 인증 사진 찍었어요.”  “사진 좀 보여 줘요. 잘 나왔는지 보게요.”    ‘사진을? 왜 사진을 보자고 하지? 들킨 건가?’    사진을 보자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진요?”    ‘이러면 안 되는데……. 사진 보여 주면 권총 사진 찍은 거 들키는데.’    그런데 안 보여 주려니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꼼짝 없이 보여 줘야만 했다.    “선생님 작품만 잘 나오고 내 얼굴은 못생기게 나왔는데……. 내가 장난스럽게 찍었거든요.”  “그럴 리가요. 내 작품보다 여운 씨가 더 예쁘게 나왔을 거예요. 사진 보여 줘요.”    정민이 잘생긴 얼굴로 매너 있게 요청하는데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여운은 별수 없이 휴대전화를 켜야 했다.    ‘큰일 났다!’    진짜 큰일이었다. 진짜, 진짜 큰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냐고!’    방법이 없었다. 도저히 없었다.  꼼짝없이 들켰구나, 사기당한 집에서 간첩한테 총 맞아 죽는구나 생각하며 휴대전화 잠금 패턴을 푸는 그 순간이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루였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은혜로운 차마루!    “아이고, 전화가 오네요.”    여운이 정민에게 활짝 웃어 보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디야?  “이정민 선생님 댁요. 차마루 씨예요.”    여운이 정민에게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리며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왜 전화했어요?”  - 빨리 오라고.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화채 만들려고 해요. 한 30분 정도 기다려요.  - 별일 없어?  “이정민 선생님 정원에 있는 조각품 구경하느라 좀 늦었어요.”    여운은 일부러 딴소리를 했다.    - 별일 없냐고.  “인증 사진 찍느라고 조금 늦었어요. 그리고 뭘 얼마나 늦었다고 닦달이에요?”    여운이 또 엉뚱한 소리를 하자 마루가 잠깐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 혹시…… 이정민 옆에 있어?  “네. 그러니까 보채지 말고 기다려요. 금방 화채 만들어서 갈게요.”  - 혹시 위험해?  “으이그, 그렇다구요!”    여운이 일부러 짜증을 내는 척하자 마루가 잠깐 동안 또 말이 없었다.    “수박 자르고 설탕이랑 탄산수 넣고 맛내려면 시간 걸린다구요.”    마루가 말이 없는 동안 여운은 열심히 떠들었다.    - 끊어. 지금 갈게.  “안 돼요!”    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 위험하다면서. 왜 오지 말라는 거야?  “안 된다구요.”  - 뭐가 안 된다고……. 혹시 끊지 말라는 거야?  “맞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아차려 준 마루가 그저 고맙기만 했다.    - 전화 끊지 마?  “맞아요. 그거예요. 차마루 씨까지 여기 오면 어르신들이 욕한단 말이에요.”  - 알았어. 안 끊을게.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 계속 통화해.  “그러든가요.”    여운은 일부러 짜증 내는 척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때였다.    “이정민 선생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어떤 여자가 뒤뜰에서 앞마당으로 향하는 곳에서 정민과 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누가 봐도 도시에서 왔구나 싶은 아주 세련된 여성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정민이 반갑게 맞이하며 세련된 여성에게 갔다.  여운은 이정민과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재빨리 마루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잘 들어요, 차마루 씨. 이정민 작업실에서 권총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이정민이 인증 사진 찍은 거 보여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보여 주려는 찰나에 차마루 씨가 전화해서 한고비 넘겼어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그리고 진짜, 진짜 무서워 죽겠어요. 그런데 권총 찍은 거 들키면 나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 어떻게 하면 돼요?”    여운이 헐떡거리며 재빨리 속삭였다. 그리고 슬쩍 정민 쪽을 쳐다보자 정민이 세련된 여자와 대화를 하면서도 여운 쪽을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알았어요! 20분 내로 가면 되잖아요!”    여운은 어쩔 수 없이 또 연기를 해야 했다.    - 나한테 사진 전송하고 곧바로 지워.  “알겠어요. 그리고 지금 어떤 여자가 이정민을 찾아왔어요.”  - 어떤 여잔데?  “엄청 세련되고…… 멋진 여자예요.”  - 의심 살 만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더 이상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겠지?  “알았어요!”    일부러 버럭 화를 내고는 전화를 끊은 여운은 일단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미쳤어. 사진은 뭐하러 찍어서 이 난리야. 내 주제에 무슨 스파이라고…….”    후회됐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심장을 진정시키려면 5천 번쯤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5천 번 심호흡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여운은 여전히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정민과 세련된 여성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해요. 화채 재료 어디 있어요? 차마루 씨가 하도 난리쳐서 빨리 만들어야겠어요.”  “저기 있어요. 평상에.”    정민이 평상을 가리켰다.    “내가 화채 만들게요. 신경 쓰지 말고 말씀 나누세요.”  “미안해요, 여운 씨. 손님이 오셔서.”  “괜찮아요.”    여운은 세련된 여성에게 눈인사를 한 후 앞뜰에 있는 평상으로 향했다. 여운은 평상으로 향하며 재빨리 휴대전화로 권총 사진을 마루에게 전송한 후 사진을 삭제해 버렸다.    “아이고, 심장이야…….”    마루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삭제하는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두려운지 현기증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큰일 날 뻔했어.’    여운은 어쨌거나 무사히 권총 사진을 마루에게 보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권총 사진을 들키지 않아 더욱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박을 자르기 위해 칼을 들었는데 칼 든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스파이 짓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맹세코 다시는 이딴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여운은 겁먹은 표정으로 맹세한 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박을 썰기 시작했다.    ‘저 여자도 간첩일까?’    정민과 세련된 여자의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여운은 화채를 만드는 내내 정민과 함께 있는 세련된 여자의 동태를 살폈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엿들을 수는 없었다.

‘여간첩이라……. 간첩들이 되게 멋지네. 요즘은 간첩도 비주얼 보고 뽑나 봐.’    이정민도 그렇고, 세련된 여자도 그렇고, 누가 봐도 워낙 훌륭한 비주얼이라 간첩 선발 기준이 외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첩 두 명과 함께 있다니…….’    오싹하면서 몸이 떨렸다.    ‘간첩이 아닐 수도 있어. 아니야. 간첩이야. 틀림없어. 간첩은 간첩끼리 노는 법이니까.’    간첩은 간첩끼리만 노는지 그걸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여운은 여자를 간첩으로 단정 지었다. 아니면 말고.    ‘왜 안 오지?’    여운은 힐끗 정문 쪽을 쳐다봤다. 마루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빨리 와. 똥줄 빠지게 달려올 것이지 특수 요원이 이렇게 느려 터져서야.’    마루가 오면 한결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아니, 아주 든든할 것 같았다.    ‘저 여자 사진도 찍고 싶은데…….’    어쩌자고 이런 엉뚱한 욕심이 생기는 것인지. 조금 전 다시는 이런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선 또다시 위험한 짓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그러다 너 죽을 수도 있어.’    여운은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수박 한 조각을 손에 들고 평상에서 내려와 정민의 조각품 앞으로 갔다. 정민과 여자가 함께 있는 장소가 가장 잘 나오는 조각품 앞이었다. 여운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조작했다. 여운은 수박 조각을 들고 먹는 척하는 포즈를 잡았다. 조각품과 자신이 잘 어우러지게 해서 일단 셀카 한 장을 찍은 후 재빨리 후방 카메라로 바꿨다. 후방 카메라로 바꾸자 곧 정민과 여자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여운은 다시 포즈를 잡았다. 찰칵. 일단 한 장 성공.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작았다. 여운은 줌을 당겨 여자의 얼굴이 조금 더 크게 나오도록 했다. 찰칵. 두 번째 사진도 성공. 화질은 조금 떨어졌지만 화질은 국수방에서 알아서 개선할 것이라 믿었다.    ‘난 정말 천재적이야. 겁대가리 없는 천재.’    천재적인 것인지, 잔머리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행어처럼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인지. 하여튼 여운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놓고 또다시 덜덜 떨면서 여자의 사진 두 장을 마루의 휴대전화로 전송한 후 사진을 삭제했다.  사진을 삭제한 바로 그때였다.    “미안해서 어쩌죠?”    바로 등 뒤에서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운은 기절할 듯 놀라며 획 돌아섰다.    ‘아이고, 심장이야!’    정말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져서 부서지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놀라요?”  “이정민 선생님이 기척도 없이 음흉하게 다가오니까 그렇죠!”    여운이 버럭 짜증을 내자 정민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지, 저 어정쩡한 미소는?’    “음흉하게 다가온 게 아니라 잔디라서 발자국 소리가 안 났던 거예요.”  “그렇군요. 대화 다 했어요?”    여운은 재빨리 여자 쪽을 쳐다봤다. 여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여자 친구예요?”  “아닙니다. 미국 ○○미술관에서 온 큐레이터예요. 제 작품 전시 때문에 왔어요.”  “아, 큐레이터……. 미국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예요? 되게 멋지다 했더니 보통 사람은 아니었네요. 미국에서 선생님 작품 전시하는 거예요?”  “그러고 싶다네요.”  “우와, 굉장하네요. 미국에서 전시회도 하고. 이장님 말씀이 맞았어요.”  “이장님 말씀?”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선생님이라 했잖아요. 진짜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선생님이라서 미국에서 전시회도 하고 그러네요. 그런데 이렇게 큰 조각품들은 어떻게 옮겨요?”  “주로 배로 옮겨요.”  “아…….”  “그런데 큐레이터분 진짜 미인이네요. 엄청 세련되고. 부러워요.”  “여운 씨도 미인이에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정색을 하고 노려보자 정민이 당황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노려봐요?”  “내가 미인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거든요? 저 큐레이터분이랑 잽도 안 된다는 거 알거든요? 내 말은 립 서비스도 적당히 해야지 지나치면 열 받거든요?”  “립 서비스 아니었는데…….”    여운이 다시 한 번 정색하고 노려보자 정민이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열 받게 했다면 사과할게요.”  “너그럽게 받아 줄게요.”    여운이 화를 푼 척하며 들고 있던 수박을 한입 베어 물었다.    “사진 보여 줘요. 아까 전화 와서 못 봤잖아요.”  “아, 사진…….”  “차마루 씨 왜 전화했대요?”  “왜 빨리 안 오냐구요. 하여튼 잔소리 엄청 많아요. 우리더러 일하기 싫어서 시간 끈다고 난리 치면서 당장 달려오겠대요. 자, 사진 보세요.”    여운은 휴대전화 갤러리에 담아 놓은 사진을 정민에게 보여 주기 시작했다.    “어머, 내가 이렇게 못생기게 나오다니……. 에고, 흐리게 찍혔네요……. 어머나! 내가 이렇게 예뻤나?”    여운이 사진마다 추임새를 집어넣는 동안 정민은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살폈다.    “미완성 작품도 찍었네요.”  “찍으면 안 되는 거예요? 지울까요?”  “아니, 괜찮아요.”  “절대 유출하지 않을게요. 그런데 솔직히 미완성 작품이라 그런지 뭘 조각하려는지 전혀 모르겠더라구요. 내가 조각엔 무식자라서……. 죄송해요, 못 알아봐서.”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작품은 작품을 조각한 사람만 알아보는 거니까.”    정민이 여운이 마지막으로 수박 조각을 들고 찍었던 자신의 작품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국에서 전시하면 미국 가시겠네요?”  “아마도.”  “진짜 부럽다. 미국도 막 가고…….”    ‘미국이 아니라 북한일 거야. 틀림없어.’    “미국 갈 때 같이 갈까요?”    ‘이게 무슨 날벼락에 뒤통수 맞을 소리야?’    “어떻게 같이 가요?”  “내 조수라고 하면 돼요.”    ‘조수 좋아하시네. 됐거든!’    “조수요? 지금 설마 미국을 미끼로 나 꼬시는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정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꼬시는 거예요.”  “조수라고 뻥치면 비행기 표 공짜로 줘요?”  “당연하죠. 숙박비도 공짜예요.”    ‘당연히 공짜겠지. 아오지 탄광도 공짜고.’    “정말요? 진짜 조수라고 뻥치면 미국 갈 수 있는 거예요?”  “진짜 갈 수 있어요. 공짜 미국 여행 끌리지 않아요?”  “엄청 끌리네요.”    ‘끌리긴 개뿔!’    그때였다.    “기여운! 기여운!”    우렁찬 마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루의 목소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여운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기 있어요!”    마루는 여운이 정민과 함께 있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왔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화채는?”  “그새를 못 참고 왔어요? 지금 챙겨서 가려고 했거든요?”    여운은 정민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 후 평상으로 가서 화채를 챙기기 시작했다.    “화채 준다 해서 목 빠지게 기다리는데 대체 언제 오려고 여태 이러고 있는 거야?”  “화채 기다리다 목 빠져서 온 게 아니라 일하기 싫어서 온 거 아니에요?”  “화채 때문에 왔거든?”    마루와 여운은 정말 명콤비처럼 손발을 척척 맞추며 다투는 연기를 시연했다.    “이정민 선생님 미국에서 전시회한대요.”  “잘됐군. 축하해요.”    마루의 건성 축하에 정민이 고맙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건성이었다.    “이정민 선생님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몰라. 알고 싶지 않아.”    마루가 심통 맞게 대꾸했다.    “조수인 척 뻥치고 미국에 같이 가자고 했어요. 비행기 표랑 숙박료 다 공짜라고.”  “미쳤어? 가긴 어딜 가?”  “어디긴요, 미국이죠.”  “어림없어!”    마루가 여운에게 버럭 소리친 후 정민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이정민 씨. 기여운은 내 여자 친구예요. 내 거한테 집적거리지 말아요.”  “이정민 선생님이 집적거린 거 아니에요.”    여운이 정민을 감싸자 마루가 눈에 불을 켰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남자 친구 있는 여자한테 미국 가자고 하는 건 누가 봐도 집적거린 거야!”  “집적거린 거 아니에요! 꼬신 거지.”    여운의 대꾸에 마루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여운을 노려봤다.    “그래서? 가겠다고?”  “얼마나 좋은 기회예요? 공짜로 미국 가는 게 언제나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요?”  “웃기지 말라고!”  “웃긴 거 아니거든요?”    여운이 살살 약을 올리며 화채를 담은 커다란 통의 뚜껑을 닫자 마루가 화채 통을 들고 여운의 손도 꽉 틀어잡았다.    “아무대도 못 가! 알았어?”    마루는 여운의 손을 꽉 틀어잡고 정민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정민의 집을 나왔다.    “왜 이제 왔어요? 차마루 씨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요.”    여운이 차에 오르며 푸념하자 마루가 “미안해” 하고 대답한 후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사진 받았어요?”  “받았어. 곧바로 국수방으로 보냈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무서운 짓을 왜 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해 버렸어요.”  “앞으론 하지 마.”  “맹세코 안 할 거예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때 마루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이정민하고 정말 미국 갈 생각이었어?”  “미쳤어요? 미국은 무슨 얼어 죽을, 아니 총 맞아 죽을 미국이에요? 미국이 아니라 아오지 탄광일 텐데 내가 거길 왜 가요?”    여운의 대답에 마루가 여운을 쳐다보다가 픽 웃으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연기의 신이 다 됐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배우 할까요?”  “하지 마.”  “왜요? 연기의 신이 다 됐다면서요.”  “배우 할 얼굴은 아니야.”    마루가 냉정하게 말했고 여운은 순간 약이 확 올랐지만 틀린 말이 아닌지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연기의 신의 다 됐지만 배우 할 얼굴은 아닌 여운은 어쨌거나 이번에도 무사히 이정민에게서 벗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루와 함께 밭으로 돌아왔다.    *    마루는 영 못마땅한 얼굴로 외출복 차림의 여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썩은 고구마 먹은 얼굴로 쳐다보지 말아요.”  “꼭 그렇게 차려입어야 해?”  “내가 뭘 얼마나 차려입었다고 그래요?”    솔직히 차려입었다고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날마다 유니폼처럼 입었던 일복 대신 그저 아주 평범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꼭 가야겠어?”    마루는 그저 못마땅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운은 연우를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꼭은 아니고, 그냥 만나고 올게요.”    여운이 밖으로 나가자 마루가 따라나섰다.    “왜 하필 저녁에 만나자는 거야?”  “내가 저녁에 만나자고 했어요. 낮엔 일해야 하니까요.”  “이연우하고 저녁 먹지 마.”  “이미 먹은 저녁을 또 어떻게 먹어요?”  “내가 데려다줘야 하는데…….”  “괜찮아요. 이정민이나 잘 감시해요.”    어떻게든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한 시간 후 국수방과의 교신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전가옥을 비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꼭 만나자는 이유가 뭐래?”  “만나서 들어 볼게요, 마지막으로 꼭 만나자는 이유가 뭔지.”  “금방 돌아와. 시간 끌지 말고.”  “알았어요.”  “큰맘 먹고 허락하는 거야. 알지?”

마루의 생색에 여운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마루를 째려봤다.    “차마루 씨가 허락해 줘서 나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내 의지로 만나는 거예요.”  “아니거든? 내가 허락해서 겨우 나가는 거거든?”  “내가 왜 사람 만나는 걸 차마루 씨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요?”  “왜겠어? 남자 친구니까 그렇지.”  “남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인 척하는 거잖아요.”  “이연우한테는 진짜 남자 친구잖아.”  “으이그, 내가 말을 말아야지. 갔다 올게요.”    여운은 계속 받아 주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얼른 대문 밖으로 나왔다.    “일찍 와!”  “알았다구요!”    여운은 연우를 만난다는 걸 마루에게 괜히 얘기했다고 후회했다.    “뭐지?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왜 저러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그 점이 의문이었다.  남자 친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루와 여운이 만든 일종의 계약일 뿐이었다. 연우 때문에 상처받은 여운이 자존심 상하지 말라고 마루가 남자 친구인척해 주면서 시작됐는데, 시간이 갈수록 남자 친구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남자 친구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우 씬 왜 갑자기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만나자고 하는 거지?”    여운도 그 점이 조금 궁금했다.    “만나면 알게 되겠지.”    여운은 큰 의미가 있는 만남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대문 앞에서 멀어져 가는 여운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마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국수방이었다.    “7요원입니다.”    마루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 임정화 검거 작전 시작. 임정화 현재 위치 확인 바란다!    오 팀장이었다.    “확인하겠습니다.”    마루는 재빨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벙커로 내려가며 대답했다.  벙커로 내려온 마루는 능숙하게 컴퓨터를 조작해 이정민의 집을 비추는 모든 감시 카메라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모니터상으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루는 벙커를 비웠던 시간 동안의 움직임을 체크하기 위해 시간을 30분 전으로 돌려 모든 감시 카메라의 녹화된 영상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런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임정화는 아직 이정민의 집에 있다는 뜻이었다.    “이정민, 임정화 위치 상동. ○○마을 이정민 집입니다.”  - 임정화 이정민과 함께 있는 것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오 팀장님, 임정화 혐의 확인됐습니까?”  - 국수방 쪽에서는 아직 확실한 혐의점을 못 찾았는데 다행히 인터폴에 수배된 용의자다. 일단 그걸로 잡아 놓고 족치자.  “이정민은요?”  - 이정민은 아직이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오늘 임정화만 검거하는 겁니까?”    마루가 묻는데 갑자기 차연화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차연홥니다.  “예, 국장님.”  - 오늘 검거 대상은 임정화입니다. 이정민은 제외합니다.  “임정화와 접촉했잖습니까.”  - 확실한 증거 없이 이정민이 임정화와 접촉했다는 것 하나로 섣불리 검거했다가 이정민이 변호사 선임해서 조작이라고 떠들어 대면 그땐 다 된 밥에 코만 빠트릴 뿐이에요. 이정민은 임정화를 먼저 검거한 후에, 이정민에 대한 혐의점을 확실하게 찾으면 그때 검거합니다.    차연화가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어조로 설명했다.    “예, 알겠습니다, 국장님.”  - 검거조 출발했습니다.    그때 검거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7요원 들었지? 검거조 대구에서 출발했다. 약 한 시간 후 ○○시 도착 예정. 7요원 무장 후 검거조 지원, 상황 대기.    오 팀장이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    마루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이정민의 집을 비추는 감시 카메라는 모두 여섯 대. 여섯 대 중 네 대는 이정민의 집 입구와 주변을 비추고 있었고 남은 두 대가 정원과 뒤뜰을 비추고 있었다.  국수방 요원들은 전기 기사, 통신회사 직원, 산림청 직원 등으로 가장해 이정민의 이웃집 호두나무, 뒷산 나무, 전봇대 등 모든 지물들을 활용해 새집, 말벌집 등으로 위장한 다음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었다.  긴장한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던 마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으로 다가가 비밀 번호를 눌렀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루는 거침없이 캐비닛 문을 열어젖혔다.  캐비닛 안에는 온갖 종류의 총기류들이 가득했다. 마루는 우선 입고 있던 셔츠를 벗은 후 방탄조끼를 챙겨 입고 다시 셔츠를 입은 후 캐비닛에 있던 총기류 중에 손에 익은 권총 한 자루를 꺼내 탄창을 꺼내 탄알을 확인했다. 탄알이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한 마루는 탄창을 권총에 다시 장착한 후 캐비닛 문을 닫았다.    *    여운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연우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왔네요.”  “나도 금방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연우 씨.”  “예, 오랜만이에요, 여운 씨.”    여운은 되도록 어색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연우도 꽤 노력하는 듯했지만 두 사람 모두 어색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나 많이 탔죠?”    여운의 물음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밭일하고 있거든요.”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몇 번…… 갔었어요, 여운 씨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여운 씨는 새까맣게 타도 예쁘네요.”    연우가 애정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연우 씨도 여전히 멋지네요.”    여운이 화답하자 연우가 씩 웃었다.    “뭐 드실래요?”  “내가 주문하께요.”    연우가 벌떡 일어서는데 여운이 재빨리 말렸다.    “내가 주문할게요.”  “아입니다. 내가 주문하께요.”    연우가 우겼고 여운은 더는 말리지 않았다.    “커피 드실랍니까?”  “네, 그럴게요.”    연우는 곧장 카운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주문했고, 여운은 연우가 카페 종업원이 능숙하게 원두커피를 내려 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커피 두 잔을 쟁반에 곱게 받쳐 들고 돌아올 때까지 도착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쓰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당연히 마루였다.    《만났어?》  《네.》  《뭐래? 왜 만나자고 했대?》  《아직 못 들었어요. 지금 막 도착했고 대화는 시작도 못 했어요. 집에 가면 얘기해 줄 테니까 문자 그만 보내요.》    여운은 재빨리 답장을 보낸 후 휴대전화를 무음 모드로 바꿔 버렸다.  연우가 주문한 커피를 가져왔고 여운과 연우는 일단 쓰디쓴 원두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연우와 이렇게 서먹한 관계만 아니라면 당장 카운터로 뛰어가서 스틱 설탕 두 개를 가져와서 커피 잔에 몽땅 털어 넣고 싶었지만 지금은 예의상 우아함을 유지해야 하는 터라 쓰디쓴 커피라도 그냥 홀짝거려야 했다.    “나와 주서 고마워요, 여운 씨.”  “고맙긴요. 연우 씨 얼굴도 보고 오랜만에 저녁에 외출도 하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두루두루 좋아요.”  “내는 여운 씨가 거절할 줄 알았어요.”  “왜 거절하겠어요. 오랜만에 얼굴 보고 좋죠.”  “왜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하지요?”  “네. 궁금해요. 꼭 할 말 있다고 했다고 했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예. 무슨 일 있습니다. 두 가지나요.”  “두 가지나요? 무슨 일인데요?”  “먼저, 여운 씨 이삿짐 훔쳐 간 도둑놈들 있지요.”  “이삿짐 훔쳐 간 도둑놈요?”    여운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이삿짐 훔쳐 간 도둑 얘기가 연우의 입에서 나오자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끼쳐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수상한 검은 승합차가 마을 CCTV하고 요금소 그리고 고속도로 카메라에 잡힜다 했잖아요.”  “네…….”  “그때 서울 경찰청에 협조 요청을 했었는데 뭔가 좀 석연치 않은 대답이 돌아와서 제가 개인적으로 좀 알아봤어요.”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도둑놈을 잡아 주지 않았어도 됐는데…….’    심장이 간당간당 떨렸다.    “석연치 않은 대답이라니요?”  “차적 조회 불가라고 하더라고요.”  “차적 조회 불가요?”  “예. 차적 조회 불가라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요. 요즘은 대포 차도 추적할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근데 조회 불가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개인적으로 알아봤어요.”    ‘뭐 하러 그랬어요.’    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이연우 순경의 열정이 여운을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요?”  “서울 청에 가까운 선배님이 계시거든요. 선배님한테 부탁드렸는데 선배님한테서도 이상한,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는 대답을 들었어요.”  “이해가 안 되는 대답이라니……. 어떤 대답인데요?”  “그게 실은…… 선배가 절대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없던 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라고 했는데요…….”    연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선배가 차적 조회를 했더니 정부 비밀 조직 소속 승합차로 나왔다는 깁니다.”    ‘헉. 어떡해……. 큰일 났다.’    “정부 비밀 조직요? 거기가…… 어딘데요?”    여운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물었다.    “그 비밀 조직이…….”    연우가 다시 주변을 살핀 후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간첩 검거를 주 임무로 하는 조직이랍니다.”    *    한 시간 후 마루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마루는 즉각 전화를 받았다.    “7요원입니다.”  - 1분 이내 임정화 작전 검거조, 마을 입구 도착.    오 팀장이 상황을 알려 왔다.    - 검거 좁니다.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후 검거조장의 보고가 들어왔다.    - 검거조 현 위치 대기.  - 알겠습니다.  - 7요원, 임정화 현재 위치는?  “아직 이정민 집에 있습니다. 현재까지 별다른 움직임 없…… 잠깐만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대답하던 마루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 이정민과 임정화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정민, 임정화 차량으로 이동 중……. 이정민 임정화 각자 차량 탑승……. 이정민 임정화 차량 출발했습니다. SUV 차량 번호 29도 ○○○○. 검은색 세단 57가에 ○○○○. 검거조 현재 위치는 어딥니까?”  - 마을 입구 대기 중입니다.  - 검거조 입구에서 계속 대기. 7요원 합류.    오 팀장의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검거조, 이정민 임정화 탑승 차량 3분 이내 마을 입구에 도착합니다. 7요원 지원 출발합니다!”    마루는 검거조에게 알려 준 후 휴대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재빨리 벙커에서 뛰어 올라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둘러 차에 오른 마루는 휴대전화를 이어폰에 연결시킨 후 지체하지 않고 출발했다.    “검거조 ,이정민 임정화 차량 확인했습니까?”  - 검거조. SUV 29도 ○○○○, 검은색 세단 57가에 ○○○○ 차량 지금 확인했습니다. 마을에서 나왔습니다. 시내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지시 바랍니다.  - 거리 유지하고 미행.    오 팀장이 명령했다.    - 검거조 출발합니다.  “7요원 곧 합류합니다.”    마루는 속도를 올렸다.

“간, 간첩요?”    ‘진짜 큰일 났다. 연우 씨가 그것까지 알아 버렸어.’    여운은 발등에 큰 불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안절부절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는 어째서 간첩 검거를 주 임무로 하는 비밀 조직 차가 마을에 들락거렸을까 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마을에 검은 승합차가 처음 나타났던 날 새벽에 탑차도 함께 들어갔는데, 그 탑차와 승합차의 동선이 같다는 거예요. 동선을 함께했다는 건 탑차도 비밀 조직 소유라는 뜻인데……. 내 생각에는 그 탑차에 여운 씨의 이삿짐이 실리지 않았을까…… 그런 추정이 가능해지거든요.”    ‘그런 추정 하지 말지 그랬어요.’    “그렇다면 비밀 조직에서 여운 씨의 이삿짐을 가져갔다는 건데…… 간첩 잡는 비밀 조직에서 여운 씨 이삿짐을 왜 가져갔을까……, 그게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러게요…….”    여운이 어색해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지금은 ‘그러게요’라는 말 외에 여운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억수로 수상한데……. 진짜 억수로 수상하지 않아요?”    ‘맞아요. 연우 씨 입장에선 억수로 수상하겠죠.’    “그러게요. 진짜 억수로 수상하네요.”  “솔직히 순간적으로 좀, 좀 안 좋은 생각도 했어요.”    연우가 여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 좋은 생각…… 어떤 건데요?”  “혹시, 혹시…….”    연우가 차마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혹시 뭐요? 뭔데요?”  “그기…… 절대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요.”  “오해 안 할게요. 혹시 뭔데요?”  “혹시 여운 씨가…… 간첩이 아닐까 하고…….”    연우가 여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요? 간첩이라구요?”    여운이 놀라는 척하자 연우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내저었다.    “진짜 멍청한 생각이라는 거 내도 알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내도 알아요. 그냥 처음에 잠깐 멍청한 생각을 했다는 거지 지금은 아니에요. 기분 나쁘지요? 진짜 미안합니다.”  “아, 하하하하하.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별것 아닌 척 웃긴 웃었는데 이게 웃는 얼굴인지 우는 얼굴인지 참,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던 말과 딱 맞는 상황이었다.    “간첩 잡는 일 하는 곳에서 내 이삿짐을 가져갔다는데 나라도 오해했을 거예요.”    여운은 계속해서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여운 씨가 간첩이었다면 여운 씨를 잡아가야지 이삿짐만 가져가는 건 진짜 말이 안 되는 소리더라고요.”  “그건 그러네요.”    ‘실은 나도 잡혀갔다 왔답니다. 한밤중에 마취돼서.’    “그래서 내가 헛다리를 짚었구나 결론 내렸어요. 탑차가 승합차하고 같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운 씨 이삿짐하고 탑차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거지요.”    헛다리 짚은 게 아니라 아주 제대로 짚은 건데 헛다리짚었다고 착각해 준 것이 여운으로선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번에는 헛다리를 짚었지만 내가 끝까지 추적해서 여운 씨 이삿짐 훔쳐 간 놈들이 누군지 꼭 찾아낼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포기했어요.”    포기하는 것이 연우를 위해 좋았다. 국수방 증거 보관소에 있는 이삿짐을 연우가 무슨 수로 찾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기여운의 잃어버린 이삿짐 찾는 일이었다.    “왜 포기합니까?”  “그때가 언젠데요. 누군지 몰라도 이미 다 팔아먹었을 거예요. 이삿짐에 내 이름 새겨 둔 것도 아니고 못 찾을 거예요.”  “못 찾으면 속상하잖아요.”  “속은 예전에 상했었고, 이젠 그냥 잊어버렸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여운 씨 이삿짐 훔쳐 간 놈들은 잡을라고 했는데…… 미안해요.”  “아뇨. 연우 씨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절대 미안해하지 말아요.”    맞다. 연우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모두 차마루와 국수방 탓이니까.    “그런데 간첩 잡는 조직 이런 얘기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죠?”  “아, 맞다.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여운 씨가 어디 소문낼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밀로 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차마루 씨한테도…… 비밀로 해 주세요.”    ‘그건 안 된답니다.’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여운이 안심하라는 듯 말하자 연우도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여운 씨…….”  “네.”  “……여기 떠납니더.”    연우가 몹시도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떠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운이 놀란 낯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대구로 발령이 났어요.”  “아……, 그래요?”    여운도 어쩐지 서운하고 마음이 짠했다.    “축하해야 하는 거죠? 축하해요.”  “고마워요.”    축하하는 사람도 축하를 받는 사람도 전혀 흔쾌하지 않았다.    “그냥 여운 씨한테는 말해 주고 싶었어요.”  “…….”    여운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운한 미소만 지었다.    “여운 씨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나와 주서 진짜 고마워요. 여운 씨한테 인사하고 싶었거든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인사해 준 것도 고맙고.”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요. 여운 씨가 했던 말이 다 맞더라고요. 미안해요. 엄마 대신 사과할게요.”  “아뇨.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거 알아요? 내가 여운 씨 많이 좋아했어요.”    연우가 약간 수줍어하며 말했다.    “진짜 좋아했어요.”  “……고마워요. 나 같은 사람 좋아해 줘서…….”    여운이 미안한 얼굴로 말하며 차마 연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여운 씨 같은 사람이 어떤데요?”  “알잖아요, 가족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누가 봐도 난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절대 아입니다. 내는 아니에요. 내는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었어요. 지금도 상관없고요. 내는 그냥 진짜 그냥 첫눈에 반했어요. 첫눈에 반해서 그냥 좋았어요. 진짜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어요.”    여운은 첫눈에 반해서 그냥 좋았다는 연우의 사랑 고백에 마음 한구석 아릿한 아픔과 고마움을 느끼며 연우를 바라봤다.    “여운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연우의 말에 여운은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축복해 주는 건 참 감동적인 일이었고, 감동적인 만큼이나 공연히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고마워요. 행복하려고 노력할게요.”  “진짜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라고 했는데……. 진짜 자신 있었거든요.”    연우의 얼굴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 버린 사랑 때문에 몹시도 안타까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여운은 그런 연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이연우라는 사람은 어쩌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 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연우와의 인연은 출발도 하지 못하고 끝맺음됐지만 말이다.    “아이고, 내가 씰데없는 소리를 해서 분위기만 망칬네요.”    연우가 칙칙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애써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고마운 얘기였어요.”    정말 그랬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괜히 뭉클해지는 고마운 얘기였다.    “차마루 씨는…… 잘해 줍니까?”    연우가 망설이다 물었고 여운은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행복하게 해 줍니까?”    이번에도 여운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라마 됐습니다. 여운 씨가 행복하면 됐습니다.”  “미안해요, 연우 씨.”  “뭐가 미안합니까? 여운 씨가 아니라 내가 다 망칬는데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엄마가 다 망친기지요.”  “아니에요. 연우 씨나 연우 씨 어머니가 망친 게 아니라 그냥 우린 인연이 아니었던 거예요. 연우 씬 정말 착하고 멋져서 진짜, 진짜 좋은 분 만날 거예요. 기여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진짜, 진짜 좋은 분요.”    여운이 축복에 이번엔 연우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한 시간 후에 대구 가는 기차 타야 됩니다.”  “한 시간 후에요? 벌써 가는 거예요?”  “내일 아침부터 대구에서 근무합니더.”  “그럼 이제 못 보는 거예요?”  “예. 그래서 전화한 깁니다. 마지막으로 여운 씨 꼭 보고 싶어서요.”    연우의 말에 여운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저…… 미안한 부탁이긴 한데…… 이따 기차역에서 내 갈 때 배웅해 주면 안 될까요? 여운 씨 배웅받고 싶은데.”    연우가 주저하다가 부탁했고 여운은 흔쾌히 수락했다.    “되고 말구요. 해 줄게요, 배웅.”    *    - 7요원, 검거조, 현 위치 보고.    오 팀장이 지시했다.    “7요원, 검거조와 합류해서 이정민과 임정화 뒤를 쫓고 있습니다. 이정민 임정화 차량 방금 ○○읍으로 진입했습니다.”  - 주변 상황은 어떤가?  “차량도 많고 사람도 많습니다.”    마루가 보고했다.    - 이정민 임정화 차량이 어디로 향하는 것 같나?  “경로를 봐서는 시내 중심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신호에 걸려 대기 중입니다.”  - 중심지로 가면 골치 아픈데…….    오 팀장이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출발합니다.”    마루가 보고를 하며 자신도 다시 출발했다.    “팀장님, 임정화가 방향을 틀었습니다.”  - 어느 쪽으로?  “고속도로로 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 검거조, 네 팀으로 나눠서 1, 2, 3조는 임정화 따라붙어. 상황을 봐서 톨게이트에서 검거해. 검거 4조와 7요원은 이정민을 감시한다.  “예, 알겠습니다!”    이정민과 임정화가 타고 있는 차량을 뒤따르던 국수방 검거조 차량 중 세 대가 방향을 바꿔 임정화를 뒤쫓는 걸 지켜보던 마루는 검거 1조가 빠져나간 자리에 재빨리 들어갔다.    “오 팀장님, 방향으로 봐서 이정민이 기차역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 기차역? 기차를 타려는 건가?  “기차로 이동을 하든지 지난번처럼 연락책을 만날지도 모르죠.”  - 4조, 7요원, 그대로 이정민을 뒤쫓아.  “예, 알겠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정민의 차는 기차역 주차장에 멈췄고 검거 4조는 이정민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이정민의 차량과 다소 거리가 떨어진 주차장 자리에 그리고 마루는 기차역 건너편 대로변에 차를 멈췄다.    “오 팀장님, 이정민이 기차역에서 멈췄습니다. 지금 이정민이 차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 7요원, 그대로 차량에서 대기. 4조 요원들, 이정민의 동선에 맞춰 움직인다.    오 팀장이 7요원인 마루를 대기시킨 이유는 마루와 이정민이 알고 있는 관계였고 이번 작전에서 마루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 예, 알겠습니다.    오 팀장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검거 4조 요원 네 명이 차에서 내려 기차역 안으로 들어가는 이정민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마루는 차에 구비해 두었던 망원경을 꺼내 이정민과 이정민을 쫓는 요원들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정민이 기차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4조 요원들도 지금 기차역 안으로 들어갑니다.”    마루가 오 팀장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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