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15화 (15/21)

‘이놈은 국수방 요원이고 이놈은 간첩이야!’    오죽 꼭지가 돌았으면 확 폭로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참았다. 고함치고 폭로하고 싶어 혀끝이 근질거렸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참았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여운이 진짜 꼭지가 돌았는지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처음엔 그저 소박한 담소나 나누며 간단하게 입가심으로 마시는 정도로 시작된 술 타임이었다. 그래서 별 시답지 않은 담소를 나누며 서로 예의바르게 천천히 마셨다. 그런데 정민이 마루에게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묻는 그 시점에서 마루와 정민 사이에 주량을 두고 불꽃이 튀더니 경쟁이 시작됐다.  마루가 집에서 담근 매실주를 꺼내 오면서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지면서 두 남자의 물심부름도 시작됐고 두 사람의 혀도 꼬부라지기 시작했다.    “이정민 선생님은 여자 친구 없습니까?”    마루의 물음에 정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자들이 날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여자들이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게 보입니까?”  “잘생겼고, 조각가로 이름도 있고, 돈도 잘 벌고.”  “내가 돈을 잘 번다고요?”  “돈을 잘 버니까 저렇게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 시골에 와서 사시는 겁니까?”  “서울 집값이 너무 비싸서요. 작품하려면 작업실도 필요한데 서울에서 감당이 안 돼서 말입니다.”  “하긴 서울이 비싸긴 하죠.”  “마루 씨는 계속 여기서 살 생각입니까? 서울에서 직장 다녔다고 들었는데. 회사 그만두고 내려온 겁니까?”  “처음엔 몇 달 쉴 생각으로 내려왔는데 이상하게 서울로 돌아가기가 싫습니다.”  “그렇죠. 시골에 맛들이면 떠나기가 싫죠.”  “가끔 이정민 선생님 집으로 손님이 오던데 가족입니까?”  “가족도 있고 일 때문에 오는 사람들도 있고. 마루 씨 집에도 가끔 손님이 오던데. 서울에 있는 가족입니까?”  “가족도 있고, 회사 동료들도 놀러 오고 그렇죠.”  “마루 씨 손님들은 주로 밤에 오시더군요.”  “회사 끝나고 오니까 밤이죠.”  “그렇군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여운은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저렇게나 떡이 되도록 취했으면서도 말실수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속으로 놀라며 역시 특수 요원은 특수 요원이고 간첩은 간첩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루가 “이정민 선생님 집으로 손님이 오던데 가족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정민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 역으로 마루의 집에도 가끔 손님이 오더라고 묻는 것에 깜짝 놀랐었다. 마루 역시 정민의 질문에 실수하지 않고 대답을 잘했다. 가장 놀란 부분은 정민이 “마루 씨 손님들은 주로 밤에 오시더군요”라고 말했을 때였는데, 정민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왠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루 씨는 서울에서 어떤 일 했습니까?”  “그냥 평범한 회사에 다녔어요. 별 재미 없는.”  “별 재미 없는 평범한 회사가 어딘데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회사예요.”  “말하고 싶지 않은 회사는 어떤 회사일까요?”    정민이 취한 상태에서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마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무역 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돼 있었지만 간첩인 정민에게 그런 것마저도 말해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싫었다기보다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자신의 뒤를 캘 것 같아 그래서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밀스러운 회사인 모양이네요.”    정민이 허를 찌르듯 한마디 했지만 마루는 용케도 당황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죠. 비밀스러운 회사죠.”  “비밀스러운 회사라…….”    두 남자가 서로 비밀스럽다는 단어를 주고받자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실주를 홀짝거리던 여운은 드디어 자신이 끼어들 차례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기발하게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하는 바로 그 타이밍. 여운은 지체하지 않고 잽싸게 끼어들었다.    “진짜 비밀스러운 회사예요. 굉장히 은밀한…….”    여운의 말에 마루와 정민의 눈빛이 동시에 번득거렸다.        15장        “진짜 비밀스럽고 은밀한 회사였어요.”    여운의 천연덕스럽고 은밀한 말투에 마루와 정민이 번득이는 시선으로 여운을 쳐다봤다.  마루의 번득이는 눈빛 속에는 여운이 혹 실수를 할까 봐 조마조마함도 담겨 있었다.    “비밀스럽고 은밀한 회사라니요?”    정민의 번득이는 시선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솔직히…… 회사라고 하기엔 좀 거시기해요.”  “회사라고 하기엔 좀 거시기하다?”    정민이 힐끗 마루의 얼굴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기여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마루가 국수방의 ‘국’ 자라도 꺼냈다간 결딴을 내겠다는 강렬한 눈빛을 던지며 경고했지만 여운은 마루의 경고에도 느긋하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기여운, 그만하지!”    마루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더욱 강력하게.    “한마을에 살면서 뭘 그렇게 숨기고 그래요? 영원한 비밀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정민 선생님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입 싸게 소문내고 그럴 분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선생님?”    여운이 해맑게 묻자 이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문을 막 내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정민이 여운을 거들자 마루의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럴 줄 알았어요.”  “대체 마루 씨가 뭐 얼마나 비밀스럽고 은밀한 일을 했기에 마루 씨가 이렇게 긴장을 하는 거예요?”    정민이 크게 관심 없는 척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운에게 은근하게 답을 재촉했다.    “긴장할 일이긴 해요.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나도 처음에 듣고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거든요.”  “기여운, 내가 그만하라고 했어.”    마루가 마지막으로 경고했지만 여운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차마루 씨요…….”    여운의 얼굴과 목소리는 은밀 덩어리 그 자체였다.    “술집에서 일했대요.”  “술집?”    기대했던 대답이 전혀 아니었는지 정민의 눈에 실망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루는 일단 한숨 돌린 표정이었고.    “술집에서 일한 게 뭐가 비밀스럽고 은밀하다는 거예요?”  “그 술집이 좀 특수하거든요.”  “특수한 술집?”    정민이 그런 술집도 있냐는 듯 다소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마루의 표정도 정민과 똑같았다.    “모르세요? 특수한 술집? 여자 전용 술집요. 여자들은 손님, 남자들은 접대.”    여운의 말에 마루가 경악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미쳤어. 기여운은 미쳤어!’    “그게 무슨, 그만해!”    마루가 버럭 소리쳤지만 그만하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여자 전용 술집이라면…….”    정민이 성난 마루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에이, 모르세요? 호스트 바…….”    여운의 입에서 ‘호스트 바’라는 말이 나오자 마루가 “미쳤어!” 하고 고함을 쳤다.    “다 지난 과거인데 뭘 그렇게 펄쩍 뛰면서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차마루 씨만 남자 접대부로 일한 것도 아니고.”    여운이 약 올리듯 말했고 마루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호스트 바 뭔지 아시죠, 이정민 선생님?”  “아, 그거요.”  “네, 그거요.”    정민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고 여운도 정민을 따라 웃었다. 마루만 웃지 못하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뜨거운 콧김을 풍풍 내뿜고 있었다.    “깜짝 놀랐죠?”  “예, 뭐, 좀 그러네요.”    정민이 여전히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대답했고 여운은 기발하게 분위기를 전환시켰다고 자축하며 웃는 낯으로 마루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루가 분기탱천하여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여운에게 쏘아 댔다.    ‘죽었다 복창하고 있어!    “여운 씨 말대로 다 지난 얘기예요. 절대 소문내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한잔합시다.”    정민이 마루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고 마루는 정민이 따라 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잘근잘근 씹어 마셨다.  여운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마루에게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뀌어 주었다.  이보다 더 어떻게 기발할 수 있다고! 나라를 위해 그 정도도 희생하지 못한다면 어찌 특수 요원이라 할 수 있을까.  마루가 분해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든지 말든지 여운은 정민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이정민 선생님, 지난번에 기차역에서 만났었잖아요. 기차역에 왜 가셨던 거예요?”    여운의 질문에 밝았던 정민의 얼굴에 찰나지만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    “서울 가려던 거였어요?”  “아, 그게……, 서울 가려고 차표를 알아보다가 일정이 바뀌었다는 연락이 와서 그냥 왔어요.”  “아, 그랬구나.”    거짓말. 마루와 여운은 이정민이 거짓말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분히 받아넘겼다.    “그런데 여운 씨는 어떻게 그렇게 농사일을 잘하는 겁니까?”    정민이 화재를 급하게 농사일로 돌렸고 마루와 여운은 정민이 의도적으로 화재를 전환시켰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타고난 것 같아요.”    여운이 으스대며 대꾸하자 정민이 “부럽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난 선생님이 더 부럽거든요?”  “내가요? 내가 왜?”  “나도 선생님처럼 조각에 소질이 있었다면 전 재산을 사기꾼한테 털리지 않고 지금쯤 멋진 전원주택에서 우아하게 조각을 하고 있을 텐데……. 채 실장 그 개시키 때문에!”    순간 욱해서 자신도 모르게 육두문자를 내뱉었던 여운은 흠칫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욕을 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채 실장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채 실장을 죽인 사람 앞에서 채 실장을 향해 욕을 하다니. 정민이 마치 ‘이렇게 욕을 잘하는 욕쟁이었어요?’ 하듯 벙한 얼굴로 쳐다보자 여운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머나, 내가 취했나 봐요. 갑자기 욕을 하고……. 내가 원래 웬만해서는 입에 욕을 안 올리는데…… 가끔 이렇게 술을 마시면 나도 모르게 욕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호호호.”    이것은 절대 작전상 연기가 아니었다. 욕한 것이 창피해서 평소에는 욕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순박하고 조신한 여인네인 척 가식을 떨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여자가, 아니 어떤 사람이 자신을 욕쟁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마루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접대부로 만들어 버린 여운에게 복수의 칼을 빼들었다.    “웬만해서는 입에 욕을 안 올려? 술 한 방울 안 마시고도 수틀리면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쌍욕을 내지르면서?”    마루가 여운의 가식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자 여운의 표정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루가 콧잔등을 박박 긁어 대기 시작했다. 작전 개시 신호였다. 하지만 여운은 이것이 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루가 아무리 콧잔등을 긁어 대도 작전이 아니라 복수의 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언제 수틀리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해요?”    여운은 일단 딱 잡아뗐다.    “차마루 씨, 그게 무슨 자다가 닭 다리 긁는 소리예요? 내가 언제 욕을 했다고? 난 욕하는 사람 경멸하거든요?”    여운이 계속해서 꿋꿋하게 욕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조신한 숙녀인 척하려는데 마루는 작전을 가장한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헐, 그러셔? 좋겠어. 셀프 경멸하고.”    마루가 왼쪽 콧잔등을 껍데기가 벗겨질 만큼 박박 긁으며 비꼬았다.    ‘저놈의 콧잔등을 그냥 콱!’    “그래요! 나 욕쟁이예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이렇게 돼 버린 마당에 더는 조신한 척할 수도 없었다.    “이정민 선생님, 나 욕쟁이 맞아요. 욕 엄청 잘해요. 듣도 보도 못한 쌍욕이 내 주특기예요.”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오징어 귀때기 씹듯 잘근잘근 씹듯이 말했다.    “욕쟁이하고 상종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욕 할 만하니까 했겠죠.”    정민이 험악해진 분위기를 물타기하기 위해 여운의 편을 들려 했지만 여운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오직 어떻게 하면 마루를 혼쭐내 줄까 그것밖엔 없었다.    “그런데 말이죠, 차마루 씨, 욕쟁이보다 남자 접대부가 더 쪽팔리거든요?”    여운이 반격을 가했다. 여운은 틀림없이 마루가 한풀 꺾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남자 접대부도 좋다고 사귀자며?”    마루가 입가에 아주 얄미워 죽이고 싶은 비웃음을 걸어 놓고 지껄였다.    “어머머, 내가 언제요?”    여운은 속에서 천불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이 남자가 미쳤나!’    “차마루 씨가 사귀자고 매달렸잖아요!”  “누가? 내가? 내가 기여운한테 매달렸다고? 사기당해 거지 된 욕쟁이한테?”    마루의 도가 지나친 막말에 여운은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주잔이 아닌 물 컵을 꽉 틀어잡았다.  여운이 물 컵을 틀어잡자 마루가 긴장한 얼굴로 여운과 물 컵을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그 컵을 나한테 던질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진심으로…… 이 물 컵으로 차마루 씨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네요.”    여운이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한 후 물 컵에 매실주를 양껏 채운 후에 마루를 매실주에 익사시킬 듯이 노려보며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루 씨, 말이 심했어요. 많이 심했어요.”    정민이 마루에게 조심스레 충고했다.  마루도 알고 있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는 것을. 솔직히 그렇게까지 막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감정 조절을 못 해서 막말을 내뱉은 것인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여운이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매실주를 또다시 물 컵 가득 채운 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운 씨, 이거 술이에요. 물 아니에요.”    정민이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매실주 두 잔을 한 번에 들이켠 여운이 세 잔째 채우려는데 마루가 매실주 병을 붙잡았다.    “그만 마셔.”  “아까워요?”  “아까운 게 아니라…… 그만 마시고 자.”    마루가 오른쪽 콧잔등을 긁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취한 척하라는 신호였다.  취한 척은 얼어 죽을. 열이 확 받아서 매실주 병으로 한 대 갈겨 버리고 싶은데 작전은 무슨!    “내가 얼마나 마셨다고 그래요?”    여운이 분기탱천해 소리쳤다.    “소리 없이 홀짝홀짝 마신 게 소주병으로 치면 벌써 세 병쯤 되거든? 몸에 안 좋아.”    마루는 연신 오른쪽 콧잔등을 긁으며 대꾸했다.    ‘그만 마시고 빨리 자는 척해!’    마루가 강력하게 신호를 보냈지만 여운은 마루의 신호를 반사해 버렸다.    “몸에 안 좋아요? 몸에 안 좋은 술을 차마루 씨하고 이정민 선생님은 아주 들이붓고 있으면서 몸에 안 좋아요? 그깟 세 병이 그렇게 아까워요? 난 더 마셔야겠어요. 오늘 아주 끝장을 안 보면 돌아 버릴 것 같아서 더 마셔야겠다구요!”    여운이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소리쳤고 마루는 지금은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발 물러섰다.    “알았어. 더 마셔. 대신에 쉬었다가 마셔. 쉬었다가 천천히.”  “그래요, 여운 씨. 쉬었다가 천천히 마셔요.”    정민도 마루를 거들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말했어야 했다. 딱 거기까지. 그런데 눈치 없는 마루가 쓸데없는 말을 걸쳐 버렸다.    “쉬면서 계란말이라도 좀 해 줘.”    여운의 화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서 했던 말인데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말을 하는 바람에 간신히 가라앉으려 하던 여운의 분노가 또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여튼 차마루라는 남자, 달래고 어르는 데는 단 1도 재주가 없고 눈치도 더럽게 없는 남자였다.    “뭐? 계란말이요? 사람 열 받아 뒈지게 만들어 놓고 계란말이요?”    여운의 눈에서 단 1초 만에 흔적도 없이 홀라당 태워 죽일 만큼 시뻘건 레이저가 발사되기 시작했다.    “안주가 없어서…….”  “안주가 왜 없어요? 치킨에 호박전도 있고 두부 김치도 있잖아요!”  “호박전도 두부 김치도 기여운이 다 먹고 치킨도 뼈다귀만 남겨 놨잖아.”    마루의 말에 술상을 내려다보니 마루의 말대로 호박전도 두부 김치도 감쪽같이 여운의 위장으로 사라졌고, 치킨도 정말 뼈다귀밖에 없었다.    “무슨 여자가 안주를 쌍끌이로 쓸어 먹냐. 빨리 계란말이 해 줘.”    마루가 타박하듯 말했고 여운은 드디어 꼭지가 완전히 돌아 버렸다.    “차마루! 당신이 해 먹어! 이정민! 당신이 직접 해 먹으라고!”    여운이 마루와 정민을 향해 소리쳤다.    “물심부름도 열 번 넘게 들어 주고 호박전도 세 번이나 더 부쳐 주고 두부도 부쳐 줬는데 계란말이까지 하라고? 내가 당신들 식모야? 내가 당신들 접대부냐고! 계란말이로 확 목을 졸라 죽여 버리기 전에 당신들이 직접 해 먹어!”    여운이 바락 소리치자 마루는 멍한 얼굴로, 정민은 미안한 얼굴로 여운을 바라봤다.    “여운 씨, 안 해 주셔도 됩니다. 화 풀어요. 미안해요.”    정민이 마루를 대신해 사과하자 여운이 마루를 노려봤다.    “차마루 씨, 당신은 왜 사과 안 해요?”  “계란말이에 목 졸려 죽기 싫어서 사과할게. 미안해.”    마루가 더는 열 받게 하지 않겠다는 듯 순한 어조로 사과했다. 손으로는 오른쪽 콧잔등을 아주 뜯을 듯이 긁으면서.  여운은 정말로 마루의 코를 쥐어뜯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그때부터 취한 척하기 시작했다.  어쩌겠는가. 열 받아 죽겠지만 작전이라는데.    “아, 어지러워……. 열 받으니까 술이 확 오르네.”    여운은 벽에 등을 기대며 취한 척하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초점을 잃은 척했다.  여운이 생각해도 진심 발연기였다. 조금 전까지 계란말이로 목 졸라 죽이겠다 날뛰던 사람이 갑자기 어지럽다니.    “이상하네……. 왜 이렇게 어지럽지?”    여운이 일부러 혀가 살짝 풀린 말투로 말하자 마루가 더 열심히 연기하라는 듯 오른쪽 콧잔등을 계속 긁었다.    “여운 씨, 취한 거예요? 취했어요?”    정민의 물음에 여운은 늘어진 오징어 다리처럼 손을 저었다.    “안 취했거든요? 하나도 안 취했거든요? 그냥 좀 어지러운 거예요.”    여운은 취한 연기의 정점을 찍어 주듯 혀를 세 바퀴쯤 꼬부라뜨려 대답했다. 그때 마루가 누우라는 듯이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여운은 마루가 시키는 대로 많이 취한 듯 슬그머니 드러누우며 눈을 감았다.    “많이 취했네요.”    정민이 마루에게 속삭였다.    “많이 취했어요.”    마루도 정민에게 속삭여 대답했다.    “방에 눕혀야 하지 않나요?”  “이따가 옮겨 눕히죠, 뭐.”    여운은 두 남자의 속삭임을 들으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두 남자는 매실주를 정종 병으로 두 병이나 마시는 동안 술독에 빠져 죽을 듯이 취해 갔다. 어찌나 취했는지 막판에는 혀가 꽈배기처럼 꼬여서 대화를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냥 대충 이해하자면 서로 안 취했다고 우기는 말 같았다.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를 남발하던 두 남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여운이 자다가 돌아눕는 척하며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보니 두 남자가 바닥에 낙지처럼 들러붙어 버렸다.    ‘나더러 취하지 말라더니 자기가 취하면 어쩌자는 거야.’    두 남자는 완전히 실신한 채였다. 시쳇말로 떡실신.    ‘무슨 작전이 이따위야. 어이가 없네.’    두 남자를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던 여운이 작전이 끝났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마루 쪽으로 있던 정민의 고개가 여운 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운은 재빨리 눈을 감고 다시 작전을 시작했다.  일단 10초 정도는 아주 조용했다. 그러다가 미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번쩍 뜨고 정민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고 싶었지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떴는데 만약 정민이 총이라도 빼들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여운은 몸에 있는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키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정민은 마루와 여운을 면밀하게 살핀 후 싱크대 쪽으로 움직였다. 정민은 다시 한 번 마루와 여운을 살핀 후에 싱크대 상판 아래에 무엇인가를 붙인 후 마루와 여운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마루 씨. 마루 씨?”    정민이 취한 어투로 마루를 불렀지만 마루는 인사불성이 돼서 깨어나지 못했다.    “여운 씨, 여운 씨?”    정민이 이번엔 여운을 불러봤다.  여운은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며 잠에 빠진 척했다.  취한 척 이름을 부르던 정민은 잠시 후 멀쩡하게 걸어서 조용히 마루의 집을 떠났다.  바깥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마루와 여운은 동시에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치던 그때 마루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여운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가 소리도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싱크대 쪽으로 가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운도 조용히 일어나 마루 곁으로 갔다. 싱크대 쪽을 한참 살피던 마루가 무엇인가 찾아낸 듯 다시 한 번 여운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입에 댄 후 손가락으로 싱크대 상판 아래를 가리켰다. 여운이 몸을 낮춰 마루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콩알만큼 작은 무엇인가가 붙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하고 물으려는데 마루가 재빨리 손으로 여운의 입을 막은 후 조용히 하라고 경고했고, 여운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가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이번엔 화장실로 향했다. 극도로 조심하며 화장실 문을 연 마루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 안을 샅샅이 살핀 후 변기 물받이 통 뒤쪽에 붙어 있는 도청기를 찾아냈다.  화장실에서 나온 마루는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여운에게 계속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댄 후 갑자기 코고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운이 대체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쳐다보는데 마루가 여운에게로 따라 하라는 손짓을 했다. 여운이 싫다고 손을 저었지만 마루가 계속 코 고는 소리를 내며 따라 하라고 손짓을 하자 결국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마루를 따라 코 고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박자 맞춰 코 고는 소리를 한참 내다가 마루의 손짓에 코 고는 소리를 멈췄다.  마루는 연기를 끝낸 후 여운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왔다.

“크게 말하면 안 돼.”    마루가 속삭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코 고는 연기는 왜 한 거예요?”    여운이 속삭여 물었다.    “이정민이 듣고 있을 거니까.”  “듣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싱크대 밑에 있던 거, 변기 뒤에 있던 거, 그게 뭔지 알아?”  “그게 뭔데요?”  “도청기. 이정민이 도청기를 심었어.”  “도청기? 첩보 영화에 나오는 도청기 말이에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 스파이들이 주로 쓰는 러시아제 도청기야.”  “북한 스파이가 쓰는 러시아제 도청기……. 그런데 이정민이 왜 우리 집에 도청기를 심어요?”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뭔가 낌새를 느낀 것 같아.”  “어떤 낌새요? 차마루 씨가 국수방 요원이라는 거요?”  “글쎄, 어디까지 알아차린 건진 몰라도 수상한 낌새를 느낀 건 틀림없어.”    마루가 신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청기를 여기 심어 놓으면 이정민이 우리가 하는 얘기를 다 들을 수 있는 거예요?”  “맞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우리는 앞으로 마당에 나와서 얘기해야 해요?”  “도청기를 제거해야지.”  “제거를 안 하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라든지,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를 이정민이 몽땅 다 듣는 거죠?”  “맞아.”  “화장실에도 설치했다면…….”    여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정민 이 변태 간첩. 똥 누는 소리까지 들으려는 거예요? 으, 드러…….”  “똥 누는 소리까지 못 듣게 제거할게.”  “그런데 도청기를 제거하면 이정민이 완전히 의심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제거해야지.”    자연스럽게 제거해야 한다고 했지만 마루도 당장은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화장실에 붙은 건 반드시 제거해야 해요. 도청기 화장실 어디에 붙어 있어요?”  “변기 물받이 뒤쪽.”  “변기 물받이 뒤쪽이라…….”    곰곰이 생각하던 여운이 눈을 번쩍 떴다.    “차마루 씨.”  “왜?”  “아까 그게 도청기라고 했죠?”  “응.”  “그거…… 본 적 있어요.”  “언제?”  “언제냐면…… 이정민 처음 만난 날요. 연우 씨가 도둑의 흔적을 찾았다고 해서 파출소로 연우 씨 만나러 갔던 날 있죠?”  “이연우 어머니 만나서 끝내고 온 날?”  “맞아요. 그날 이정민이 파출소까지 데려다줬다고 했잖아요. 그날 봤어요.”  “어떻게?”  “파출소에서 연우 씨 만나고 저녁에 데이트하기로 약속하고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에 할머니가 엄청 큰 짐을 들고 버스에 탔었는데, 지나가다가 할머니 짐 때문에 내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졌었거든요. 그래서 안 떨어뜨리려고 핸드백을 어깨에 메다가 뭔가가 만져져서 보니까 그게 있었어요. 아까 싱크대 밑에 있던 그거, 그거 맞아요. 틀림없어요. 지금 생각났어요.”  “지금도 그 핸드백에 붙어 있어?”    마루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아뇨. 왜 그런 게 붙어 있는지 이상해서 손으로 긁어서 떼어 냈어요.”  “떼어 낸 다음엔?”  “버스 바닥에 버렸어요.”  “진짜 버렸어?”  “진짜 버렸어요.”    버렸다고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버렸지만 그때부터 여운과 마루는 마음이 복잡하고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정민이 도청기를 핸드백에 언제 붙인 것 같아?”  “그러니까…… 아!”    여운이 놀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파출소에 도착했을 때 인사하고 돌아서다가 내가 핸드백을 떨어뜨렸거든요?”  “왜?”  “모르겠어요. 그때도 이상하다 했어요. 잘 메고 있던 핸드백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져서. 그때 이정민이 주워 줬는데…….”  “그때였군.”  “그런 것 같아요.”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파출소에서 이연우하고 나눴던 대화가 어떤 대화였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어?”  “그게…….”    여운은 파출소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올 때까지 연우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해 내기 위해 뇌를 풀가동했다.    “기억하고 있어요.”    여운은 그날 연우와 나누었던 대화를 최대한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때부터 눈치챘을 거야. 새벽녘에 마을로 들어왔다가 서울로 사라진 승합차의 차적 조회가 안 된다는 부분에서부터 수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하죠?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여운이 걱정 때문에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기여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 전부터 뭔가 낌새를 차린 거겠지. 다시 잘 생각해 봐. 그 후로 이정민과 근접 거리에 있었던 적이 없었는지.”  “근접 거리요?”    여운은 정민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때를 꼼꼼하게 상기해 보았다.    “내 옷에나 물건에 도청기를 달았을 만큼 가까이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도청기 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오늘 술을 마시자고 했을 거야.”  “이제 어쩌죠?”  “우선 집에 심어 놓은 도청기를 제거해야 해.”  “그건…… 내가 해결할게요.”  “어떻게?”  “차마루 씨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여운이 집으로 가려는데 마루가 붙잡았다.    “지금 당장은 안 돼. 이정민은 우리가 지금 취해서 자는 줄 알잖아.”  “그렇구나……. 아 참, 그런데 취했던 것 아니에요? 난 정말 이정민하고 차마루 씨 완전히 뻗은 줄 알았어요.”  “연기였어.”    그렇게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니. 주량도 놀랍고 정신력도 대단했다. 차마루, 이정민 둘 다.    “그럼 어떻게 해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해요?”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말해 봐.”  “화장실에 있는 건…….”    마루의 요구에 여운이 자신이 생각해 낸 방법을 설명했다.    “기발하죠?”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싱크대에 있는 건?”  “그것도 나한테 맡겨요.”    여운은 싱크대에 있는 도청기 제거 방법도 마루에게 설명했다.    “어때요? 기발하죠?”  “꽤.”    마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세 시간만 버티자. 세 시간 후쯤에 일어난 척하면서 도청기 제거하자고.”  “이번엔 도청기 제거 작전이네요.”  “맞아.”  “그런데 세 시간 동안 뭐 해요? 방에 들어가서 세 시간 잘까요?”  “잠 와?”  “아뇨. 전혀.”  “집 안으로 들어가면 힘들어. 입 꼭 다물고 억지로 코 고는 소리만 내야 하니까.”  “아, 그러네요. 그냥 마당에서 버텨야겠네요.”  “앉을 곳이 마땅치 않네.”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마루는 별다른 수가 없자 대문으로 이어진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마루가 앉자 여운도 마루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말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중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여운이었다. 여운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어떻게 내가 욕쟁이라는 걸 폭로할 수가 있어요?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는데 어떻게 내 약점을 폭로할 수가 있냐구요!”    여운이 깜빡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나자 분해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기여운은 날 접대부로 만들었잖아.”    마루가 항의하듯 말했다.    “그건 무슨 일 했냐고 캐묻는 이정민 때문에 분위기 전환용으로 만들어 낸 얘기잖아요. 내 덕분에 고비 넘겼잖아요.”  “만들어 내는 것도 정도껏 만들어 내야지, 왜 하필 남자 접대부냐고!”  “기발한 걸 생각하다 보니 접대부가 생각났던 거예요.”  “다른 거 더 기발한 걸 생각해 냈어야지! 어떤 남자가 접대부라고 하면 ‘아이고, 좋다!’ 하고 받아들이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내 약점을 폭로할 수가 있어요? 남자가 쪼잔하게.”  “내가 쪼잔하면 기여운은 잔인한 거거든?”  “국수방 특수 요원이 나라를 위해서라면 남자 접대부가 아니라 접대부 할아버지라도 해야죠! 그리고 어차피 이정민은 차마루 씨가 접대부였다는 걸 믿지도 않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난 욕쟁이라는 걸 들켰다구요!”  “그렇게 치면 간첩한테 욕쟁이라는 거 들키면 좀 어때? 무슨 상관이야?”  “난 상관있어요. 그리고 진심이었어요.”  “뭐가?”  “계란말이로 목 졸라 죽이려 했던 거요.”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정민은 간첩이야. 간첩한테 뭣 때문에 조신한 척을 해? 간첩이든 뭐든 남자라면 무조건 예뻐 보이고 싶은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요?”  “맞잖아. 예쁜 척하고 싶은 거잖아.”  “아니라고…….”    여운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마루가 재빨리 여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르자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마루의 손을 치워 버렸다.    “예쁜 척한 거 아니에요. 예뻐 보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그건 그냥……. 맞아요. 예쁜 척한 거예요. 예뻐 보이고 싶어요.”    여운이 결국 솔직하게 실토했다.    “간첩한테도? 미쳤어?”  “그냥 난…… 차마루 씨하고 형택이 외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 실체를 그대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정민이 간첩이라 하더라도 말이에요. 차마루 씨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난 그래요.”  “뭣 때문에?”  “창피해서요.”  “뭐가 창피해?”  “가족이 없다는 거.”    여운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차마루 씨나 형택이는 내가 왜 이렇게 욕을 잘하는 여자가 됐는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억세빠진 사람이 됐는지 나에 대해서 다 알기 때문에 이해를 해 주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내게 가족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내가 백 번을 잘하다가 한 번만 실수를 해도 무조건 가정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라 결국 티를 내는 거라고 결론을 내려 버려요. 물론,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았죠. 너무 일찍 혼자가 돼 버렸으니까. 하지만 나름대로는 누구보다 가정교육 잘 받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에요. 나를 억울하게 만들지만 않으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않으면 난 절대 내가 먼저 남을 해롭게 하지 않아요……. 난 굳이 다른 사람들이 선입견을 갖고 날 엉망인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간첩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가식적이어도 좋으니까 가식을 떨어서라도 기여운이라는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보이고 싶어요.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엉망인 사람이 아니라 예쁘게, 좋게, 예뻐 보이고 싶어요.”    여운이 설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설명하자 마루가 가만히 여운을 바라보다가 여운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확 끌어당겼다.  여운이 깜짝 놀라며 벗어나려 했지만 마루는 단단히 붙잡으며 여운을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래요? 나 지금 엄청 심각하거든요?”  “나도 엄청 심각해.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잘 들을 거니까 놔줘요.”  “잘 들어. 기여운은 괜찮은 사람이야. 아주 괜찮은 사람.”    마루의 말에 여운이 가만히 마루를 바라봤다.    “예뻐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어. 이미 예쁘니까. 충분히.”    마루의 말에 여운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기당한 욕쟁이가 어쩌고 막말해 놓구선.”  “그건 그냥 작전 대사야.”  “웃기지 말아요.”  “알겠어. 미안해. 사과할게. 나도 모르게 약이 올라서 막말해 버렸어. 진짜 미안해. 진짜. 진심으로.”    마루의 거듭된 사과에 여운은 슬슬 화가 풀리는 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미안해. 그리고 이미 충분히 예쁘다는 말도 진심이야.”  “나 같은 여자 취향 아니라 했었잖아요. 비쩍 마른 여자는 싫다면서요.”  “취향이 달라졌나 봐.”  “혹시…… 지금도 작전이에요?”  “지금은 작전 아니야.”    마루가 여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    “지금은…… 기여운 남자 친구야.”    마루가 너무나 깊은 눈길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닭살 돋는 멘트를 연신 날려 대자 여운은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이 남자 왜 이래? 이러다 또 키스하면 어쩌지?’    자신도 모르게 마루의 입술을 바라보던 여운이 머쓱해하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마루가 손으로 여운의 얼굴을 꽉 붙잡더니 다시 자신의 쪽으로 돌려 고정시켰다.    “고개 돌리지 마.”  “어쩌라구요?”  “나 봐.”  “왜요?”  “남자 친구니까.”  “좀 취했죠?”  “아니. 많이 취했어.”  “그럴 줄 알았어.”  “기여운한테…… 취했어.”    마루가 속삭이더니 여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어쩔 거야. 진짜 또 키스했어! 어쩔 거냐고!’    아주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난 아주 담백하고 순수한 입맞춤. 그런데도 여운의 가슴은 아주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깐 입을 맞춘 마루가 입술을 떼더니 다시 여운을 바라봤다.    “당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알아. 기여운은 나한테 아주 예뻐.”    마루가 정말 기여운이라는 사람에게 완전히 취한 듯한 눈길로 여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여운은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루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    “시작해요.”    여운이 수건을 손에 든 채로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하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마루는 무슨 신호인지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라구요!”    여운이 다시 입 모양으로 말했지만 마루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할 수 없이 여운이 목이 말라 죽겠다는 듯한 행동을 직접 보여 주자 마루가 그제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아 목말라.”    마루가 자다가 목이 말라 깬 것처럼 연기를 시작했지만 여운이 보기엔 국어책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    “리얼하게 하라구요!”    여운이 엄한 표정과 손짓을 해 대며 다그치자 마루가 다시 한 번 목마른 척을 했다.    “물, 물 좀, 물 줘…….”    마루의 연기에 여운도 시동을 걸었다.    “뭐라구요?”    여운도 자다가 시끄러워서 깬 것처럼 연기했다.    “물, 목 말라…….”  “냉장고에 있으니까 빨리 먹고 자요. 깨우지 말고.”    여운이 일부러 짜증을 내며 냉장고 쪽으로 살금살금 움직이자 마루도 냉장고 앞으로 와서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냈다.    “물통이 없잖아. 물, 물 줘!”  “냉장고에 있다구요!”  “없어. 목말라 죽겠어. 물 내놔!”  “으이그, 진짜! 정말 귀찮아 죽겠어!”    여운과 마루는 일부러 싱크대 상판 아래에 붙어 있는 도청기 앞에서 큰 소리로 연기를 했다.  여운은 일부러 발을 굴려 쿵쿵거리며 걸어오는 척을 한 후 마루의 손에 들린 물통을 받아 들었다.    “여기 있잖아요!”  “물, 물!”  “마셔요!”    마루가 물을 홀짝홀짝 마시는데 여운이 무슨 놈의 연기를 저따위로 하냐는 듯 마루에게서 물통을 빼앗았다. 여운은 마루에게 입을 벌리라고 시킨 후 마루의 입에 물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아르륵, 아르륵 콜록콜록.”    여운이 너무 급하게 물을 들이붓는 바람에 사레가 걸린 마루가 기침을 해 대고 난리를 치는데 여운은 이때다 생각하며 도청기에 물을 뿌려 버렸다.    “왜 물을 흘리고 난리예요! 이게 뭐야! 물을 마시랬지 누가 뿌리랬어요!”    진짜 사레가 들린 마루가 계속 기침을 하는 동안 여운은 도청기에 연신 물을 뿌려 댔다.    “그만 마셔요! 싱크대랑 바닥에 다 흘렸잖아요! 물을 입으로 마셔야지 왜 얼굴로 마시고 지랄이에요!”    여운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싱크대를 닦기 시작했다.    “물도 제대로 못 마셔서 질질 다 흘리고! 내가 반짝반짝 닦아 놓은 싱크대인데!”    여운은 싱크대를 닦는 척하면서 수건으로 도청기를 떼어 냈다.  수건으로 도청기를 떼어 내는 순간 정민은 자신의 집 비밀 방에서 도청을 하다가 헤드폰을 뚫을 듯 들려오는 높은 소음에 낯을 찡그리며 재빨리 헤드폰을 귀에서 뗐다. 하지만 곧 다시 헤드폰을 쓴 정민은 도청기 하나가 박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민은 기계를 조작해 화장실에 심어 놓은 도청기에 연결했다.    *    여운이 겨우 기침이 진정이 된 마루에게 수건에 붙어 못 쓰게 된 도청기를 보여 주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은 마루가 해야 할 다음 동작을 직접 보여 주었다. 바로 토하기였다.  여운이 소리 없이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해 보이자 마루는 곧바로 여운이 시키는 대로 우웩 우웩 하며 헛구역질하는 소리를 과장되게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리얼리티가 떨어졌다. 작전을 구상한 당사자인 여운이 보기에 이건 안 하느니만 못한 연기였다.    “어머머 왜 이래요? 토할 것 같아요?”    여운은 마루에게 입을 벌리라고 시켰다. 마루가 아무것도 모르고 입을 벌리자 여운은 재빨리 마루의 입 속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우우웩엑……. 워워워웩…….”    그제야 비로소 리얼한 오바이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웩엑……. 워워워웩…….”    마루가 리얼하게 토하는 연기를 하고 있던 그때도 정민은 마루가 고통스럽게 토하는 소리를 냉정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물론 마루와 여운은 정민이 그렇게 하고 있을 줄 알고 있었다.    “우에엑……. 어어어엑…….”    목구멍에 갑자기 손가락을 넣으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여운이 입만 벌리면 곧바로 찔러 넣을 듯 손가락을 곧추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바이트하면 죽여 버릴 거예요! 당장 화장실로 가요!”    여운이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격정적으로 연기를 하자 마루는 재빨리 화장실로 이동했다.  화장실에서 또다시 꾸엑꾸엑 토하는 연기를 하자 여운이 마루의 팔을 붙잡으며 물통을 내밀었다. 여운이 마시라고 재촉하며 손가락 두 개를 동시에 쑤셔 넣겠다는 듯 치켜들자 마루는 재빨리 물을 양껏 마신 후 꾸엑 하고 격정적인 소음과 함께 입에 가득 물고 있던 물을 변기에 쏟아 냈다. 마루가 변기에 물을 쏟아 낼 때 여운은 수건에 붙어 있던 박살 난 도청기를 변기 속에 넣어 버렸다. 물통에 든 물을 몇 번이나 마셨다 쏟아 냈다를 반복하던 마루가 녹초가 된 얼굴로 더는 못 하겠다는 듯 여운을 쳐다봤다. 여운은 그만하면 수고했다는 듯 미소 짓고는 변기를 눌러 도청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마루를 화장실에서 끌고 나와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어이쿠!”    마루가 발랑 나자빠지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운의 연기가 시작했다.    “어머머, 웬일이야! 대체 얼마나 퍼마셨기에 자빠지고 난리야!”    여운은 재빨리 화장실로 이동했다.    “에이, 더러워! 변기 어떻게 할 거야! 바닥에 다 튀었잖아. 어떡하냐구! 더러워, 진짜!”    여운이 혼자 생 난리치며 연기하는 것을 마루는 놀랍다 못해 경이롭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운은 재빨리 변기 물받이 통 뒤에 붙어 있는 도청기를 확인한 후 일부러 도청기 가까이에서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정민 선생님은 언제 간 거야? 가다가 논두렁에 처박힌 거 아니야? 설마 내일 아침에 고추밭에 고꾸라져 있는 이정민 선생님을 발견하는 건 아니겠지?”    열정적으로 대사를 내뱉은 여운이 솔을 들고 샤워기를 들었다.    “으, 드러. 아, 냄새! 내가 미쳐, 정말! 내가 지금 새벽 4시에 화장실 청소를 하게 생겼냐고!”    여운은 양손에 솔과 샤워기를 들고 화가 나서 꼭지가 돌아 버린 여인의 대사를 멋지게 해냈다.    “두고 보자구.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기필코 차마루를 이 변기통에 쑤셔 넣고 말겠어!”    여운이 무시무시한 대사를 내뱉으며 변기를 향해, 특히 변기 물받이 통 뒤를 향해 샤워기 물을 사정없이 뿌려 댔다. 물을 뿌리며 열심히 솔질도 했다. 솔질로 도청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여운은 자연스럽게 짓밟아 버렸다. 우지직하는 느낌에 발을 들어 보자 콩알만 한 도청기가 박살이 나 있었다. 여운이 고개를 돌리자 화장실 문 앞에서 지켜보던 마루가 완벽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두 번째 도청기마저 박살 나 버리는 소리를 듣던 정민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헤드폰을 벗어 버렸다. 정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    도청기 두 개를 제거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연기한 두 사람은 완전히 지친 채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수고했어.”  “차마루 씨도 수고했어요.”  “천재적이었어.”  “차마루 씨는 엉망이었어요.”  “대단한 기여운이야.”  “알아요.”  “기여운은 말이야, 진짜 귀엽진 않거든?”  “…….”  “그런데 이상하게…… 여운이 참 오래 남는 사람이야. 그래서 기여운인가 봐.”  “…….”  “꽤 멋진 대사였던 것 같은데 어때?”    칭찬을 바라며 고개를 돌려 여운을 바라보던 마루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지쳤는지 몇 초 사이에 여운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는 방으로 가서 이불과 베개를 가져왔다. 이불을 덮어 주고 여운에게 베개를 베어 주기 위해 여운의 머리를 조심스레 드는데 여운이 눈을 번쩍 뜨며 마루의 팔을 움켜잡았다.    “누구야…….”  “나야, 차마루.”    마루가 조용히 속삭이자 가만히 마루를 바라보던 여운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마루는 여운에게 베개를 베어 준 후 여운의 곁에 가만히 누웠다. 마루는 날이 밝을 때까지 깊이 잠든 여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수상했다. 점심까지 먹었는데도 이정민이 마루네 고추밭에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도 아직 밭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작전이었다.  어젯밤 이정민이 심어 놓은 도청기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말도 안 되는 발연기를 다 해 댄 터라 숙취 때문에 완전히 뻗어 버린 상황으로 설정을 했기에 마루는 작전상 점심을 먹은 후에나 밭에 나타나기로 돼있었다. 그런데 이정민도 여태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정민도 작전인가?”    작전일 확률이 높았다.    “작전이든 뭐든 속아야 할 텐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여운과 마루가 어젯밤 벌인 도청기 제거 작전을 정민이 계획된 작전이 아닌 우연히 제거된 것이라고 믿는 것.  오후 2시. 밭에 먼저 등장한 인물은 간첩 정민이었다.  여운은 정민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민이 여운에게 다가와 먼저 알은척하기 전까지 절대 모른 척 열정적으로 고추를 심고 있었다.    “여운 씨.”    정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운은 정민이 나타난 것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인사했다.    “어머, 이정민 선생님, 왜 이제 나왔데요?”  “어제 술이 좀 과해서…… 아직도 정신이 없네요.”

정민이 숙취 때문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웬걸 오늘따라 더 말쑥한 것이 훤했다. 마치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몸에 좋은 것만 먹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제 언제 갔어요?”    여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집에 온 것도 기억 안 나는데 깨 보니까 집이더라구요.”    ‘뻥치고 있네.’    “혹시 여기저기 막 어디 아프지 않아요?”  “글쎄, 아프진 않은데……. 왜요?”  “차마루 씨는 어제 토하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이정민 선생님도 집에 가다가 논두렁에 처박힌 건 아닌가 해서요.”  “다행히 처박힌 것 같진 않아요.”  “솔직히 말해도 돼요. 눈 뜨니까 논두렁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런데 마루 씨는요?”  “집에요. 떡실신해서 못 일어나더라구요. 여태 자나 봐요. 오늘이 어떤 날인데 여태 떡실신이라니. 자기네 밭농사 짓는데도 저러고 있어요.”    여운이 못마땅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랬군요……. 어제 많이 마시긴 했어요.”  “많이 마셨죠. 매실주를 바닥냈는데.”  “여운 씨도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나도 조금 늦었어요. 어젯밤에 차마루 씨 때문에 진짜 어찌나 화가 나는지…….”  “무슨 일 있었어요?”    ‘이 요사스러운 간첩 놈이 다 알면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하도 시끄러워서 깨 보니까 차마루 씨가 목마르다고 물 달라고 허수아비처럼 허우적거리고 있더라구요. 이러고 말이에요.”    여운이 허우적거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냉장고에 있으니까 갖다 먹으라 했더니 세상에, 물을 마시는 게 아니라 얼굴에 들이붓더라구요.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싱크대며 바닥이며 물바다가 됐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화장실 변기랑 바닥에 죄 다 토하고! 으, 드러…….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자빠지질 않나. 아주 가관이었어요. 차마루 씨랑 이정민 선생님 때문에 오밤중에 화장실 청소까지 하고 잤잖아요!”    여운이 정민이게 짜증을 내자 정민이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하여튼 술도 못 마시는 사람들이 센 척은!”    여운이 아주 징글징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술 먹고 진상 부리는 것들은 엉덩이를 팡팡 패 줘야 해요!”    여운이 버럭 소리치는데 갑자기 마루의 얼굴이 여운의 얼굴 앞에 쑥 나타났다.    “아고, 깜짝이야.”  “술 먹고 진상 부리는 것들이 누군데?”  “알면서 뭘 물어요?”  “뭘 알아? 나 안 취했거든?”  “안 취한 사람이 왜 일어나지도 못하고 떡실신이 됐을까요?”  “떡실신은 무슨! 피로가 쌓여서 오랜만에 늦잠 잔 거야.”  “그러세요? 안 취했는데도 그렇게 진상을 떠셨어요?”  “내가 무슨 진상을 떨었다는 거야?”  “진상 진상 그런 진상이 없었거든요?”  “그런 적 없거든?”    마루가 딱 잡아뗐다.    “잘났으니까 당장 고추나 심어요! 여기, 바로 여기! 차마루 씨네 밭에 심어요!”    여운이 소리치자 마루는 슬그머니 정민의 팔을 잡고 여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 내가 어제 무슨 실수했어요?”    마루의 물음에 정민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너무 취해서 기억이 안 납니다.”  “기여운이 뭐라고 했어요?”  “마루 씨가 너무 취해서 물 마시다가 바닥에 다 흘리고 화장실에 다 토했다고.”    정민의 말에 마루가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전혀 기억이 없는데.”  “그랬을 수도 있어요. 솔직히 우리가 많이 마시긴 했잖아요.”    정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어제 내가 집에 온 기억이 없어요.”  “많이 마시긴 마셨죠.”  “너무 많이 마셨어요. 맥주 한 캔에서 끝냈어야 하는데.”  “매실주는 한 병만 마셨어야 했는데…….”    마루가 후회하는 말투로 말하자 정민이 “그러게요” 하고 화답했다.    “마루 씨, 다음 주에 또 한잔할까요?”    정민이 마루를 꼬셨다.    “다음 주에?”  “다음 주에는 가볍게.”  “가볍게 좋죠.”    마루가 꼬임에 넘어가는 척하는데 여운이 버럭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좋긴 뭐가 좋아요!”    여운이 갑자기 끼어든 통에 마루와 정민이 깜짝 놀라며 여운을 돌아봤다.    “꼭 마시고 싶다면 이번엔 이정민 선생님 집에서 마셔요. 이정민 선생님 집 화장실에서 토하게요. 우리 집은 절대 안 돼요!”  “내 집이거든?”  “나도 사니까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당장 일해요! 어르신들한테 엉덩이 맞기 싫으면.”    여운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고 마루와 정민이 쳐다보자 어르신들이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루와 정민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루와 정민은 재빨리 작업 장갑을 끼고 고추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형편없는 실력으로.    *    고추 모종 심기가 끝나기 무섭게 고구마 심기와 참깨 심기 일이 이어졌다. 그리고 심기 농사가 끝나마자마자 마늘 캐기가 시작됐다.  여운은 당연히 정해진 순서대로 마을 어르신들 마늘밭을 순회하며 마늘 캐기를 거들었다. 마늘 캐기는 고추, 고구마, 참깨 심기보다 열 배는 더 힘들었다. 하지만 여운은 마늘 캐기에도 절대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거들었다.  쉬는 날 없이 농사일이 계속되는 동안 웬일인지 정민은 조용했다.  조용히 밭에 나와서 일만 거들뿐 수상쩍다 할 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여운과 마루에게 티타임이나 치맥 타임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도청기를 심기 위해 술자리까지 제안했던 간첩이 갑자기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난데없이 동면을 취하는 것이 어찌 수상쩍지 않을까.  정민이 활동을 멈췄다고 해서 마루도 한숨 돌릴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전보다 더 면밀하게 정민의 행동을 감시해야 했다. 국수방과의 연락도 은밀하지만 더욱 활발하게 주고받았다.  여운은 간첩 이정민 검거 작전에 절대 동참하지 않겠다고 차연화 국장에게 큰소리쳤었다. 하지만 기차역에서 위기에 빠졌던 마루를 구해 냈던 일과 도청기 제거 작전에서 맹활약을 한 덕분에 자의반 타의반 어느새 작전에 투입돼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스파이 활동이라고 해서 아주 그럴듯한 활동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밭에서 정민을 만나게 됐을 때 티 나지 않게 동태를 살피는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감시 활동이 절대 식은 죽 먹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계속 감시한다는 것. 전문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덮어 놓고 감사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간첩을 감시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더욱이 정민은 마음만 먹으면 여운의 핸드백에 그랬던 것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든 도청기를 다시 심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핸드백 도청기는 정말 운 좋게 발견해 도청기인 줄도 모르고 제거했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유 없이 핸드백을 떨어뜨린다든지 깜빡하고 근접 거리에 있다든지 하는 실수가 없도록 늘 긴장해야 했다. 백 번 천 번 조심했지만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일옷이라든지 모자라든지 어디에든 도청기가 심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청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한 마디 말도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늘 긴장 상태였고, 긴장 상태였지만 긴장한 티를 내지 말아야 했으며, 그래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마루는 여운이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이정민 검거 작전에서 여운을 제외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국수방 본부에서 여운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지침이 있기도 했지만, 정민이 있는 곳엔 항상 여운이 있었고 여운이 있는 곳엔 항상 마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정민과 여운은 따로 떼어 놓을 방법이 마땅하게 없었다.  여운은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열렬하게 예쁨을 받는 인기 스타였다.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돼 버린 것이다. 여운은 예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인정이 많고 후천적으로 부지런한 체질 탓에 참 열심히도 일했다. 농번기라서 당연히 일손을 도와야 했다. 그래서 마루와 정민도 농사일을 못하는 똥손임에도 날마다 밭으로 나왔다. 한마을에 살면서 당연히 일손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이 있기에 밭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세 사람은 마치 세트처럼 항상 묶여 있어야 했다.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여운이 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한 여운을 이정민 검거 작전에서 제외시킬 방법이 없었다.  방법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국수방에 여운 대신 전문 훈련을 받은 여자 요원을 배치하고 여운은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켜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여운을 대신해 여자 요원을 배치하는 것은 이정민의 의심만 더 키울 뿐이라며 국수방으로부터 불가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마루는 여운의 안전을 위해 마루의 친구인 척 남자 요원을 한 명 더 배치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하지만 남자 요원을 한 명 더 배치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는 답변을 받았을 뿐, 시간이 꽤 지나도록 아직 결정이 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정민을 지금처럼 신경 쓸 필요 없어. 적당히 해.”    마루는 여운에게 늘 말했다. 적당히 하라고.  하지만 언제나 말뿐으로 끝났다. 앞서 말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싫든 좋든 비가 오지 않는 이상 밭에서 이정민을 만나야 했고, 일단 만나게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거리 유지하기, 말실수하지 않기, 티 나지 않게 감시하기 등등의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정민이 누군가하고 통화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엿들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일하는 척하면서 가까이 가니까 이정민이 자리를 피해 버렸거든요.”  “앞으로는 엿들으려고 하지 마. 이정민의 의심을 사는 행동은 위험해. 그리고 기여운은 일반인이야. 국수방 요원이 아니야. 기여운이 이 작전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걸 원하지 않아.”  “하지만 차연화 국장님이 이정민하고 친해지라고 했잖아요.”  “거절했잖아.”  “거절했지만 벌써 진도를 너무 많이 빼 버린걸요.”  “지금이라도 멈춰.”  “왜요? 국수방에서 이젠 난 빠지래요?”  “아니. 내가 싫어.”  “왜 싫어요?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 작전을 망칠 것 같아요?”  “이정민은 간첩이야.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야. 기여운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야. 이건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야. 쉽게 생각하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어.”  “쉽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무서워요. 하지만 내 생각에…… 내가 빠지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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