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14화 (14/21)

14장        마루가 고개를 돌려 여운을 쳐다보자 여운이 곧 달려들어서 머리 가죽을 벗겨 놓을 듯 천년 마녀 같은 얼굴을 하고 마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차표 끊어 줄 테니 당장 서울로 꺼지라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지금 여기 숨어서 뭐 하고 있어요?”    여운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마루는 갑자기 여운이 나타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운이 하는 소리도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청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보기만 했다.    “서울 갈 거니까 당장 기차표 내놔요! 어디 있어요? 당장 내놓으라구요!”    여운이 갑자기 달려들더니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 마루의 옆구리를 꾹 꼬집은 후 마루의 바지 주머니를 뒤지는 척했다. 마루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여운의 연기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거 놔. 기차표 없어.”    마루가 여운을 밀어내며 대꾸했다.    “왜 없어요?”  “서울 가는 거 다 매진이래.”  “뭐라구요? 말도 안 돼! 자다가 옆집 아저씨 다리 긁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표 내놔요!”  “옆집 아저씨 다리를 왜 긁어? 오늘 가는 거 전부 다 매진이래.”  “거짓말하지 말아요!”  “조용히 해.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쪽팔리게.”  “난 개미 똥구멍만큼도 안 쪽팔리거든요? 더 쪽팔리게 만들기 전에 당장 서울 가는 표 끊어 줘요. 차마루 씨하고는 하루도 더 같이 있기 싫으니까 당장 표 끊어 달라구요!”  “없어. 없다고! 매진이라 했잖아!”    되도록 쪽팔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구경난 듯 쳐다보는 사람은 생겨나 버렸고 여운이 맹렬하게 공격 연기를 하니 마루도 덩달아 맹렬하게 방어 연기를 하는 수밖에.    “거짓말하지 말라구요!”  “진짜야! 가서 물어봐.”  “알겠어요. 물어볼 테니까 당장 따라와요.”    여운이 마루의 팔을 거머잡았다.    “내가 왜 따라가? 혼자 가서 물어봐!”  “같이 가서 확인하자구요! 진짠지, 거짓말인지!”    마루의 팔을 부여잡고 끌고 가려던 여운은 마치 지금 갑자기 발견한 듯 이정민을 보고 깜짝 놀란 척했다.    “어? 이정민 선생님?”    여운이 놀란 얼굴로 알은척을 하자 정민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운이 이정민을 보고 놀라는 척했다면 마루는 여운 때문에 깜짝 놀랐다. 어마무시하게 놀라는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어쩜 눈썹 하나 깜짝 안 하고 저렇게나 감쪽같이 놀라 자빠지는 연기를 잘하는지, 여운의 연기 실력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모든 영화감독님들이 여운의 발연기, 아니 발군의 연기를 봤어야 하는데. 봤다면 당장에 무조건 캐스팅할 텐데. 혼자 보기 아까울 연기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혹시 이정민 선생님 서울 가세요?”  “아, 아닙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아, 그러셨구나……. 이럴 게 아니지. 혹시 돈 있으세요?”    여운이 마루를 뿌리치고 정민에게 다가섰다.    “예?”  “말도 안 되는 부탁인 줄은 아는데요, 돈 있으면 10만 원만 빌려 주실래요? 내가 서울 가면 꼭 갚아 드릴게요. 내가 지금 당장 서울 가야 하거든요.”    여운이 정민에게 사정조로 말하는데 마루가 여운의 팔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이정민 선생님한테 거지처럼 돈 꾸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왜 이정민 씨한테 거지처럼 돈을 꾸냐고.”  “왜겠어요? 차마루 씨 꼬라지 보기 싫어서 서울 가려는데 치사하게 차마루 씨가 돈도 안 꿔 주고 차표도 안 끊어 주니까 그렇죠!”    여운이 마루의 손을 획 뿌리치더니 이정민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더니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에 가여움을 가득 담고 거지처럼 구걸했다.    “이정민 선생님, 이렇게 부탁할게요. 10만 원만 꿔 주세요. 네?”    여운의 애처로운 연기에 정민이 뭔가 의심의 눈초리를 다 지우지 못한 듯 혼란스러운 얼굴로 여운과 마루를 번갈아 쳐다보는데 마루가 여운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만해. 창피한 줄도 모르고. 표 매진됐다고 했잖아!”  “가서 확인하자구요!”  “확인할 필요 없다고! 당장 따라와!”  “안 가요! 난 서울 갈 거예요!”  “서울 못 가! 절대 못 가!”  “가는지 못 가는지 해 보자구요!”    마루는 여운의 팔을 잡고 끌고 가고 여운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우습지도 않은 촌극이 시골 기차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정민 선생님! 이따 저녁에 돈 꾸러 갈게요! 꼭 꿔 주세요! 꼭요!”    여운이 정민을 향해 애절하게 소리치는데 마루가 여운을 기차역 밖으로 끌고 나와 차에 태웠다.  차에 탄 마루는 정민이 기차역에서 나와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차를 출발시켰다.  말없이 차를 몰던 마루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흘낏 여운을 쳐다보자 여운이 입을 꼭 다문 채 바들바들 떨며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괜찮아?”  “아뇨. 안 괜찮아요.”  “어디 아파?”  “아픈 게 아니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갑자기 막 오금이 저리면서 오줌도 마렵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 같아요.”    여운의 얼굴은 진짜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놀라서 그래. 놀라서 그런 거야.”  “그런 것 같아요.”    여운이 점점 더 심하게 떨기 시작하자 마루는 그대로 두면 큰일 날 것 같아 재빨리 약국 근처에 차를 세운 다음 약국에 뛰어 들어갔다 왔다.    “어서 마셔.”    마루가 청심환 뚜껑을 열어 여운에게 건넸다.  여운은 마루가 건네준 청심환을 마시면서도 청심환 병을 자칫하면 떨어뜨릴 정도로 손을 심하게 떨었다.  청심환을 마시고 10분 정도 지났을 때쯤 여운의 손 떨림이 잦아들었고 혈색도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았다.    “좀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여운은 여전히 안쓰러울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차에 있으라고 했잖아.”  “그러게요. 차에 있을 걸 그랬어요. 그런데 시키는 대로 차에 있었으면 차마루 씨 아까 큰일 났던 거 아니에요?”  “맞아. 위험했어.”  “기분이 이상해서 가 봤는데…… 차마루 씨 표정이 정말 큰일 난 표정이더라구요.”  “왜 끼어들었어?”  “그냥 나도 모르게 그랬어요.”    그건 정말이었다. 정말 여운 자신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끼어들어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냥…… 나도 모르게 차마루 씨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운의 말에 마루는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서 먹먹한 기분으로 여운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바르르 떨리고 있는 여운의 손을 잡고 비비기 시작했다.    “손이 많이 차. 많이 놀랐지?”  “진짜……. 진짜, 진짜 무서웠어요.”    여운은 그때의 상황이 다시 떠오르자 오싹 한기를 느끼며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절대 끼어들지 마.”  “이정민한테 들킨 것 같아요?”  “이번은 넘어갈 것 같아. 기여운 덕분에.”  “정말 다행이에요.”    여운이 덜덜 떨며 안도의 미소 지었지만 마루는 웃지 않았다.    “나 연기 잘했죠?”  “잘했어.”  “내가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요.”    여운이 또 미소 짓자 마루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가자.”  “그래요. 가요.”    당연히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마루는 여운을 데리고 국밥집으로 향했다. 진짜 맛있는 국밥집.    “안 사 준다더니.”  “사 주기 싫었어.”  “그런데 왜 왔어요?”  “큰일 해냈잖아. 상 주는 거야.”    마루의 말에 여운이 픽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아요.”  “왜? 먹고 싶어 했잖아.”  “먹고 싶었는데 아직 가슴이 진정이 안 됐어요.”    여운이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쓸어 냈다.    “뜨거운 거 천천히 먹다 보면 진정될 거야.”  “알았어요. 먹어 볼게요. 그런데 국밥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쩨쩨하게 굴었어요?”  “얼마 되지도 않는 국밥값 아끼려고 쩨쩨하게 군 것 아니거든?”  “그럼요?”  “여기 이연우하고 같이 왔었잖아. 그래서 안 사 주려고 한 거야.”  “뭐예요? 질투했던 거예요?”  “질투 아니거든? 내가 질투를 왜 해?”  “질투 아니면 뭔데요?”  “운 나쁘면 이연우하고 마주칠 수도 있잖아. 그럼 또 기여운은 흔들릴 것 아니야. 그래서 안 오려고 했던 거야.”    마루가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내가 흔들리거나 말거나 그게 차마루 씨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나하고 사귄다고 뻥쳤는데 기여운이 흔들리면 기여운은 진짜 줏대도 없이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들러붙는 싼 여자가 되는 거고, 또 나하고 기여운하고 둘이 작당한 거 이연우가 알게 될 텐데 그럼 나까지 이상한 놈 되는 거잖아.”    말이 되는 소리였고 때문에 여운은 더는 따질 수가 없었다.    “그건 그러네요.”  “어쩔 수 없어. 우린 한배를 탄 거야. 이왕 뻥친 거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해.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안 흔들려요. 연우 씨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만난다 해도 절대 안 흔들릴 테니까 걱정 말아요.”    여운이 당당하게 큰소리친 후 진짜 맛있는 국밥을 별로 먹고 싶지 않다던 사람답지 않게 아주 복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가슴이 진정이 안 돼서 먹고 싶지 않다며.”    마루가 타박했지만 여운은 개의치 않고 열심히 퍼먹었다.    “가슴이 진정이 안 되긴 했는데 맛있어서 잘 먹히네요.”  “하여튼 먹성은 좋다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자. 전투적으로.”  “그래, 전투적으로 먹어. 잘 먹으니 보기 좋네.”    마루가 진심을 담았으면서도 농담처럼 말했다. 여운은 그게 농담이든 진담이든 상관없이 맛있는 국밥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식당으로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전투적으로 국밥을 먹던 여운은 이상한 기분에 마루를 쳐다봤다. 마루가 숟가락질을 멈춘 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안 먹어요? 뭐 보는 거예요? 누구 아는 사람 왔어요?”    여운이 고개를 돌리려는데 마루가 여운의 손을 잡았다.    “돌아보지 말고 밥 먹어.”  “왜 그래요?”  “물어보지 말고 밥 먹으라고. 전투적으로.”  “누군데……? 이정민이에요?”    여운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진짜 이정민이 나타났다면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휴, 다행이다. 그럼요? 누군데 그래요?”    여운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마루가 또다시 제지했다.    “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말라고 했지만 여운의 고개는 어느새 돌아갔다. 그리고 연우를 발견했다. 그리고 연우의 어머니도 발견했다.    ‘하필이면…….’    이정민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연우를 만난 것은 불행이었다. 불행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좋을 것이 전혀 없었다.  연우와는 찰나처럼 눈이 마주쳤는데 연우는 재빨리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못 본 척 말이다. 연우의 어머니는 여운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우를 발견한 여운의 얼굴은 금방 시무룩해져 버렸다. 그 바람에 그렇게 맛있게 먹던 국밥도 께적거리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게요. 하지만 뭐 어차피 나갈 때 봤을 텐데요, 뭘.”  “기여운이 이럴까 봐 여기 안 데려오려고 했어.”  “내가 어떤데요?”  “흔들리잖아.”  “흔들리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그냥 불편한 거예요.”  “불편하게 느끼는 게 흔들리는 거야.”  “불편한 건 그냥 불편한 거예요.”    흔들리진 않았다.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왜 불편하지 않겠는가. 썸을 타려다 썸남의 어머니 때문에 썸을 타기도 전에 끝나 버렸는데, 그 썸 타기를 조기 종료시킨 당사자들이 한 공간에 있는데 어떻게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운은 억지로라도 국밥을 다 먹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고 말았다.    “못 먹겠어요. 갑자기 맛없어졌어요.”  “먹지 마.”  “집에 가고 싶어요.”  “그래. 가자.”    마루가 먼저 일어나서 계산대로 가고 마루를 뒤따르던 여운은 뭔가 결심한 얼굴로 연우의 테이블로 갔다.    “안녕하세요.”    여운이 인사를 하자 연우의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물론 연우는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어머, 여운 씨네요.”    연우가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때 연우 어머니가 인사를 받아 주었다.    “네,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연우 씨.”  “예……, 안녕하세요.”    연우도 어색한 얼굴로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식사하러 오셨어요?”    연우가 어색해하거나 말거나 여운은 싹싹하게 연우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우리 연우 선볼 거예요.”    식사하러 왔냐고 물었는데 이연우 선본다는 말을 왜 하는 것일까.    “그래서 옷 좀 챙기 입힐라고 들렀다가 같이 한 그릇 먹을라고 왔어요.”  “아, 네.”    여운은 연우 어머니의 선 얘기에 그저 웃고 말았지만 연우의 얼굴은 점점 더 많은 똥을 씹은 듯 안쓰럽게 일그러졌다.    “여운 씨 혼자 왔어요? 혼자 왔으면 우리하고 같이 먹어요.”    연우의 어머니가 친절을 베풀었다. 물론 전혀 의미가 없는 친절이었다.    “아뇨, 전 남자 친구하고 먹고 가는 길이에요.”  “아, 남자 친구…….”    여운이 마루를 돌아보자 연우 어머니도 마루를 흘낏 쳐다봤다.  마루는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각을 있는 대로 잡고 서 있었는데 어머나, 웬일, 오늘따라 각 잡고 서 있는 차마루라는 남자가 엄청나게 훈남처럼 느껴졌다.  마루는 훈남 각을 멋지게 유지한 채 당연하다는 듯 연우의 어머니에게 절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단 1도 관심 없다는 듯 말이다.  저 거만함마저도 아리따워라!  이 상황에 이런 기분 참 이상하지만 연우 어머니가 마루를 쳐다보는 순간 여운은 괜스레 마음이 놓이며 당당해졌다. 비록 가짜 남자 친구이긴 하지만 어디 내놓아도 기죽을 일 없는 미끈하게 잘 빠진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이, 아니 있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세등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맛있게 드세요. 연우 씨 선 잘 보시구요. 먼저 갈게요.”    여운은 처음보다 한층 씩씩해진 태도로 인사한 후 국밥집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루에게 갔다. 여운이 다가가자 마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운의 손을 움켜잡았다. 나는 기여운의 남자 친구이고 기여운은 내 것이라는 듯 말이다.  여운은 얼마나 유치한지 알면서도 굳이 마루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속물이라 놀려도 상관없다 생각하며 마루의 손을 꼭 잡고 국밥집을 나와 차에 탈 때까지도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마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운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뭐가?”  “기죽지 않게 해 줘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국밥집에서 연우 씨 어머니를 보는데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더라구요. 내가 마사지 숍에서 일할 때 첫사랑 어머니하고 마주쳤을 때 말이에요. 그땐 내가 한없이 초라해서 정말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차마루 씨 덕분에 증발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래서 고마워요.”  “가짜 남자 친구지만 꽤 쓸 만하지?”    마루가 웃으며 농담을 했고 여운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쓸 만했어요. 고마워요, 진심으로. 쪽팔리지 않게 해 줘서.”  “앞으로도 쪽팔리지 않게 해 줄게.”    마루가 농담처럼 대꾸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여운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은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차역에서 있었던 이정민 속이기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연우와 연우 어머니를 마주친 일 때문인지 이상하게 몸이 좀 무겁다 싶어 일단 누웠다. 이정민 사건 때문인지 연우 사건 때문인지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 사건 모두가 여운을 앓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한잠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하며 누웠는데 갑작스레 온몸이 천근만근 늘어지더니 두들겨 맞은 듯 쑤셔 대기 시작했다. 잠들 수가 없을 만큼 쑤셔 대는데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아플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파서 꼼짝도 못할 지경이었다.  진통제라도 한 알 먹었으면 좋겠는데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안 났다. 마루를 부르고 싶은데 소리칠 기운도 없었다. 전화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찾는데 눈도 떠지지 않았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아프냐고.’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무섭도록 끙끙 앓아 대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전에는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어 버리거나 노크를 생략한 채 벌컥벌컥 문을 열어 대는 마루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어 준 마루가 고맙기만 했다.    “자? 자는 거야?”  “아뇨……. 나 죽을 것 같아요. 살려 줘요…….”    여운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마루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죽을 것 같다니?”  “아파요. 진짜 죽을 것 같아요……. 몸이 막 쑤시고…… 눈이……, 눈알이 빠질 것 같아요.”  “갑자기 왜 그래?”  “모르겠어요……. 살려 줘요”    살려 달라는 여운의 말에 여운의 이마에 손을 대보던 마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열이 펄펄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열 때문에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이 너무 많아. 엄청나게 뜨거워.”  “죽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체한 건가? 국밥 괜히 먹였네.”  “모르겠어요…….”    체한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여운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 아파서 누가 강제로 졸도라도 시켜 줬으면 싶을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병원 가자.”  “일어나지도 못하겠어요.”  “내가 업을게. 업혀.”    마루가 여운을 추슬러 일으키는데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운이 마루의 가슴에 폭 안겨들었다. 정말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운은 마루의 품에 안긴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루의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규칙 박동이 또 시작된 것이다.    “여운아, 업혀야 하는데…….”  “업힐 기운…… 없어요. 약 좀 줘요…….”  “약 먹고 열이 좀 내리면 병원에 갈까?”  “그래요…….”    여운이 마루의 품에 안긴 채 끙끙 앓으며 대답하자 마루는 조심스럽게 여운을 다시 자리에 눕혔다.  마루는 부리나케 뛰어나가서 물과 해열제를 챙겨 왔다.    “여운아, 잠깐만 일어나. 약 먹자. 약 먹어야 해.”    약 먹어야 한다는 말에 몸을 일으키려던 여운은 무너지듯 다시 누워 버렸다.    “못 일어나겠어요. 으…… 진짜…… 너무 아파……. 살려 줘요.”    그 힘든 농사일도 척척 해내던 천하장사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열 앞에서는 전혀 힘을 못 쓰는 여운이었다.  마루는 여운을 안아 일으킨 후 입에 알약을 넣어 주고 물도 먹여 주었다.    “물 많이 마셔야 해.”    마루는 억지로 물을 많이 마시게 한 후 이유 없이 여운을 계속 가슴에 안고 있었다. 아픈 사람이니까 어서 편하게 눕혀 줘야 하는데 정말 이유도 없고 쓸데도 없이 계속 안고 있었다.    “열이 너무 높다.”    열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여운의 열기 때문에 땀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마루는 여운을 눕혀 주지 않고 계속 안고 있었다.    “누울게요.”  “잠깐 기다려. 지금 약 삼켰잖아. 내려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약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은 조금 더 안고 있으려는 핑계일 뿐이었지만 너무 아픈 나머지 여운은 마루가 잔꾀를 쓰고 있는 줄도 몰랐다.

“열이 이렇게 높으면 큰일 나. 아무래도 40도 가까이 올라간 것 같아.”  “아이고……. 아이고, 진짜 아파요…….”    여운이 끙끙 앓으며 누우려고 하는데 마루가 여운을 바투 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이정민 앞에서 연기하느라 놀라서 아픈 거야.”  “아니에요.”  “그럼 이연우 때문이야? 이연우 때문에 흔들려서 마음 아파서 아픈 거야?”  “그건 절대 아니거든요?”  “그럼 이정민 때문에 무서워서 아픈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맞아요. 무서웠어요. 진짜 무서웠어요. 진짜 무섭고…… 아파 죽겠어요.”    여운이 끙끙 앓으며 대답하자 마루가 여운을 꼭 안은 채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생했어. 고마워.”  “당연히 고마워해야죠. 생명의 은인인데. 이제 누울게요.”    여운이 안겨 있는 것이 불편해서 누우려는데 마루가 또 붙잡듯 꼭 껴안았다.    “약 아직 안 내려갔을 거야. 그리고 생명의 은인까진 아니야.”  “생명의 은인이거든요? 그리고 약 내려갔을 거예요.”    여운이 더 이상은 눕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는 듯 마루의 품을 밀어내며 누웠다.    “으으……. 아파요.”  “아픈 거 알아. 그리고 생명의 은인이라 해 줄게.”  “이제 나만 믿어요. 다음에도 구해 줄게요.”    여운이 아파 죽겠는 와중에도 농담을 하자 마루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다음엔 내가 구해 줄게.”  “차마루 씨.”  “왜?”  “내가 지난번에 말했죠?”  “뭐?”  “나 때문에 죽진 말라고. 절대 나 때문에 죽지 말아요. 나를 구하지 말고 차마루 씨 스스로를 구해요. 아이고……, 아프다……. 난 당장 죽어도 울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이니까. 이 세상에 요만큼도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이고, 진짜 아프다……. 절대 나 때문에 죽지 말아요. 내가 차마루 씨를 구할게요…….”    아무리 아파 죽겠어도 그 말은 꼭 해야 했다. 기여운 대신 절대 죽지 말라는 말, 차라리 자신이 차마루를 구하겠다는 말. 그 말은 꼭 해야 했다.  하지만 마루는 여운의 말을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기여운이 당장 죽는다면…… 내가 울 거야. 내가…… 많이 울 거야.”    진심이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마루의 본심이었다.  마루의 말에 여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울지 말아요. 겨우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울지 말아요. 아, 진짜 아프다…….”    여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자 마루가 다시 여운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약 기운이 퍼지지 않았는지 여전히 고열이었다.    “나 보여? 여운아, 눈 뜨고 나 봐. 나 보여?”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겨우 눈을 뜨고 마루를 쳐다봤다.    “안 보여요.”    안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운은 눈을 떴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도 못 뜰 만큼 여운은 아주 많이 아픈 상태였다.    “열 때문이야. 열이 너무 높아서 그래. 안 되겠다.”    마루는 부리나케 뛰어나가서 물을 받은 대야와 수건 두 장을 가져와 수건을 물에 적셔 한 장은 이마에 올려놓은 후 남은 한 장으로 여운의 얼굴과 팔과 다리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차가워요.”    여운이 흠칫 놀라며 싫다는 듯 뒤척거렸지만 마루는 찬 수건으로 뜨거운 팔다리를 닦아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열 때문에 차갑게 느껴지는 거야. 참아. 어쩔 수 없어.”  “차갑다구요.”    여운이 흠칫흠칫 놀라며 거부했지만 마루는 계속해서 뜨거운 몸을 닦아 냈다.    “열 조금 내리면 바로 병원 가자.”  “차가우니까 그만 닦아요.”    여운이 징징거렸지만 마루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야 열이 빨리 떨어진단 말이야. 옷 다 벗기기 전에 참아.”  “옷을 왜 벗겨요?”  “몸 닦아 주려고.”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못된 게 아니라 빨리 열 내리려고 하는 거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자꾸 그러면 진짜 벗긴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진짜 벗긴다고!”  “어디서…… 못된 것만…….”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던 여운이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해열제도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마루가 찬 수건으로 계속 닦아 내자 열이 조금씩 내렸기 때문에 잠이 든 듯했다. 열이 조금 내렸을 때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끙끙 앓다가 잠이 든 걸 보니 깨우기가 미안했다.  마루는 하는 수 없이 안심할 정도로 열이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찬 수건으로 여운의 몸을 닦아 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안심할 정도까지 열이 내렸을 때는 혹시 또 열이 오르는지 지켜보느라 한참을 여운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여운의 곁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    잠이 든 줄도 모르고 잠이 들어 버렸던 마루가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곁에 누가 있는 기분에 뒤척이던 마루는 여운이 아팠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홍채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깊은 잠에 빠진 여운의 얼굴이 보였고, 잠든 여운을 바라보던 마루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 봤다. 다행히 열이 오르지 않아 뜨겁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운이 놀란 듯 눈을 번쩍 뜨더니 잡아채려는 듯 손이 올라오는데 마루가 재빨리 여운의 손을 붙잡았다.    “나야. 놀라지 마.”    마루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래듯 말했다.    “차마루 씨?”  “응. 나야.”    마루는 여운의 손을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왜, 왜 여기 있어요?”  “기억 안 나? 많이 아파서 내가 수건으로 닦아 줬잖아.”  “아……. 맞아요. 이제 생각나요.”  “좀 어때?”  “어……, 괜찮아요. 쑤시지도 않고 눈알이 빠질 것 같지도 않아요.”  “다행이다. 열 내리는 거 확인하고 또 열 오를까 봐 지켜보다가 나도 잠들어 버렸어.”  “여기서……, 내 옆에서 잠들었다구요?”  “음.”  “우리 동침한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푹 하고 웃었다.    “맞아. 동침한 거야.”  “큰일 났네요, 차마루 씨.”    여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큰일 나?”  “내가 차마루 씨하고 동침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면 장가가기 힘들잖아요.”  “떠벌리지 말고 더 자.”  “불 켜고 가요.”    여운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불 끄고 자.”  “무섭단 말이에요.”    여운이 다시 눈을 떴다.    “내가 옆에 있을게. 걱정 마.”  “언제까지 옆에 있을 건데요?”  “내일 아침까지.”  “내일 아침까지 계속 동침하려구요?”  “응. 계속 동침하려고.”    마루는 여운이 분명히 한 소리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운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얼레리꼴레리. 차마루 씨 진짜 큰일 났네요. 내가 정말로 떠벌리고 다닐 건데.”  “떠벌리지 말고 자.”    마루가 여운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불을 덮어 주자 여운은 곧 다시 눈을 감았다.    “비 그쳤어요?”    여운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아직 오고 있어.”  “내일 아침까지 계속 왔으면 좋겠어요. 내일까지만 쉬게.”  “비 안 와도 쉬어. 내가 어르신들께 얘기할게. 이해하실 거야. 몸살 날 만해. 그동안 탱크처럼 일했잖아.”    탱크라는 말에 여운이 낮게 웃었다.    “열 내려서 다행이야.”  “고마워요, 보살펴 줘서.”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차마루 씨.”    여운이 눈을 뜨고 마루를 바라봤다.    “아플 때…… 보살펴 준 사람 차마루 씨가 처음이에요.”  “…….”  “보살핌받는 건…… 참 좋은 거네요.”    여운이 다시 눈을 감으며 미소 지었다.    “참 좋은 거네요…….”    여운은 참 좋다는 말을 반복하며 미소 지었다.  마루는 그런 여운의 미소가 괜스레 아프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아프면 보살펴 줄게.”    마루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여운은 이미 잠이 들어 버려서 마루의 말을 듣지 못했다.  마루는 잠든 여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여운과 마루가 동침을 한 후, 그러니까 여운이 몹시 아프고 난 후부터 여운의 가짜 남자 친구 마루는 가짜 남자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여운에게 최선을 다했다. 진짜 남자 친구도 이렇게는 못할 만큼 진심으로 잘해 줬다.  회복이 된 후 여운은 늘 그랬던 것처럼 탱크처럼 농사일을 했고 그런 여운을 위해 아침은 당연히 마루가 차려 주었다. 저녁 역시 마루가 차렸다. 설거지도 직접 하고 청소도 직접 했다. 적어도 집에서는 여운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 주었고 샤워할 때를 제외하고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도록 배려했다.  말투도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들기름에 참기름에 식용유까지 온갖 기름칠을 다 한 듯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스킨십도 갈수록 대담해졌다. 밭에서도 집에서도 온갖 핑계를 다 대며 스킨십을 시도했다.  고추밭에서 아주 살짝 비틀거렸을 뿐인데, 비틀거렸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인데 언제 나타났는지 바람처럼 나타나 와락하고 여운을 껴안았다. 허리를 꺾어 일하다가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펴 주기 위해 상체를 일으키기 무섭게 허리를 두드려 주고 딱딱하게 굳은 어깨도 수시로 주물러 줬다. 하지 말라고,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남자 친구잖아. 여자 친구가 힘든데 당연히 마사지해 줘야지.”  “안 해 줘도 괜찮아요. 어르신들 보기 민망하단 말이에요. 흉보실 거예요. 젊은것들이 어르신 앞에서 못하는 짓이 없다고.”  “이미 어르신들 다 눈치챘어. 그리고 요즘 어르신들 젊은것들이 이러는 거 그러려니 해.”  “난 내 몸에 손대는 거 안 좋아해요. 알잖아요.”  “익숙해지도록 해. 난 나쁜 놈이 아니라 남자 친구니까.”  “남자 친구인 척 연기하는 거잖아요.”  “남자 친구인 척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동침까지 했잖아. 그러니까 기여운도 그냥 받아들여.”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헷갈렸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기하는 거라면서 그래서 같이 연기를 하라면서도 어째 연기가 전혀 연기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여운.”    마루가 불러서 여운이 쳐다본다.    “됐어.”  “뭐가요?”  “얼굴 봤으니까 됐다고.”    마루는 여운에게 하루에 몇 번씩 이런 짓을 했다.    “기여운.”    마루가 불러서 여운이 쳐다본다.    “나 보여?”  “당연하죠.”  “그런데 왜 없는 사람 취급 해?”  “내가 언제요?”  “한 시간 동안 나를 한 번도 안 쳐다보고 일만 했잖아.”  “일하러 나왔으니 당연히 일을 하지 차마루 씨를 왜 쳐다봐요?”    마루는 여운에게 하루에 몇 번씩 이런 투정을 부렸다.    “기여운.”    마루가 늘 그랬듯이 노크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젖힌다.    “나 불렀어?”  “아뇨.”  “안 불렀다고?”  “안 불렀어요.”  “부른 줄 알았어.”    마루는 여운에게 하루에 몇 번씩 이런 짓도 했다.    “기여운.”    마루가 밤이고 낮이고 거침없이 벌컥벌컥 방문을 열어젖힌다.    “방에 있었네.”  “당연히 방에 있지 내가 어딜 가겠어요?”  “나간 줄 알았어.”  “나간다면 나가게 해 줄 거예요?”  “아니. 꼼짝 말고 집에 있어.”    마루는 여운에게 하루에 몇 번씩 이런 짓도 했다.    “기여운.”    마루는 밤마다 여운에게 왔다.    “잘 자.”  “차마루 씨도 잘 자요.”  “혹시 잠 안 오면 말해.”  “잠 안 오면요?”  “잠 올 때까지 놀아 줄게.”    마루는 여운에게 밤마다 이런 짓도 했다. 물론 여운은 밤마다 너무 잘 잤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마루는 하루 24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여운으로 시작해 기여운으로 끝났다. 기승전기여운이 돼 버린 것이다.

마을에 있는 모든 남의 집 고추밭의 고추 심기가 끝나고 나서 마지막으로 마루의 밭, 아니 돌아가신 마루의 친어머니 밭에 고추 모종을 심기 하루 전 저녁이었다.    “잠깐 산책 갈까?”    마루가 여운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여운은 피곤해서 잔다고 하려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마루의 표정이 우수에 차 있어서 선심 쓰는 척 따라나섰다. 마루가 여운을 데려간 곳은 바로 내일 모종을 심기로 한 마루의 마늘밭이었다.  마루는 손전등으로 밭 여기저기를 한참 비추며 한 바퀴 돌았고 여운도 마루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우리 어머니 밭이야. 내일 고추 심을 밭.”  “그래요?”  “돌아가셨어.”  “아, 그래요…….”    알고 있었지만 여운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런데 서울에 어머니가 또 계셔. 아버지도 계시고.”    마루의 말에 여운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마루를 올라다봤다.    “친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서울에 계신 부모님은…… 큰아버지 큰어머니야. 최근에 알았어, 내 친어머니가 내가 작은어머니라 불렀던 분이라는 걸.”  “그게……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됐대요?”    여운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게 옳았기 때문이다.    “내가 돌이 지났을 때쯤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로 돌아가셨대. 어머니 혼자 키우려고 했는데 외가에서 청산과부가 된 우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재혼을 시키려고 데려가셨다고 해. 어머닌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도시 사람이었는데 아버지 만나서 결혼해서 살다가 1년 만에 이 마을로 왔는데 신혼에 청산과부가 된 거였대.”  “도시에서 왜 시골로 오셨대요?”  “서울 어머니 말씀으론 이 마을에서 홀로 사시던 친할머니가 같이 살자고, 혼자 농사일하기 힘들다고 자식들한테 말씀하셨는데 서울 아버지는 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시골로 올 수가 없는 사정이었대. 시골로 올 수 없으니 친할머니께 서울로 오시면 모시고 살겠다 했는데 할머니는 살던 집 떠나고 싶지 않다고, 서울에선 못 산다고 둘째 아들인 아버지한테 하소연하셨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 마을로 오신거래.”  “아……. 효자셨군요. 그런데…… ‘안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도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서울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돌 지난 아들 데리고 청산과부가 된 어머니가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걸 친정에서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거라고. 곱게 키운 딸이 결혼해서 1년 만에 갑자기 시골에 가서 시어머니 모시고 산다고 했을 때도 기가 막혔을 텐데 얼마 못 살고 청산과부가 됐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냐고.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 모시고 아들 키우는 꼴은 볼 수가 없다고 재혼시킨다고 데려가셨는데 내가 있으면 재혼하기 힘들다고 외할아버지가 억지로 어머니한테서 날 떼어 내서 큰아버지한테 맡겼대. 큰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친부모님으로 알고 있던 부모님에겐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고, 일이 그렇게 되니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날 자식으로 받아들여 키우신 거야.”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 말이야, 날 낳으신 어머니. 서울에 계신 부모님한테 몇 번이나 찾아와서 날 데려가셨대. 재혼 안 한다고. 당신이 키우겠다고.”    마루의 말에 여운이 울컥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루를 쳐다봤다.  어두웠지만 마루의 얼굴도 여운만큼이나, 아니 여운보다 더 울컥한 듯 어둡게 찌푸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날 데리고 이 마을에 돌아오면 외가 식구들이 또 쫓아와서 날 서울 부모님께 맡기고 어머닐 잡아가고, 어머닌 또 도망쳐서 날 찾으러 서울 부모님께 오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대. 그러면서 외가하고는 연을 끊게 돼 버렸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충격에 외가에서 어머니도 데려가고 하면서 친할머니도 병을 얻으셔서 시름시름 앓고 그러다가 내가 아기 때 탈장으로 수술을 받게 됐었대. 어머닌 외가에 도움을 청할 수가 없어서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대. 어머니한테는 병원비도 수술비도 없었던 상황이거든. 친할머니가 계속 편찮으셔서 일을 못 하니까 어머니가 마을에서 다른 집 밭일 거들면서 받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가까스로 입에 풀칠하고 나를 굶기지 않을 정도밖엔 안 되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날 서울에 데려가서 큰 병원에서 수술을 시켰대. 그때 어머니가 큰 결심을 하셨대. 당신 혼자 고집부리며 키우다가 아들을 병들게 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시어머니는 편찮으셔서 거동이 불편하고 당신 혼자 나를 키우며 일을 하다가 아들까지 병들게 했다고 생각하셨나 봐. 당신이 키우면 해 주고 싶은 거 열에 아홉은 못 해 줄 것이 뻔하다고, 당신이 키우면 아들이 해 달라는 거 열에 아홉은 못 해 줄 것이 뻔하다고. 서울 부모님께 맡아서 키워 달라고 부탁하시더래. 큰아주버님이 키워 주시면 해 주고 싶은 거 열에 아홉은 해 주실 거라고, 큰어머니가 키워 주시면 아들이 해 달라는 거 열에 아홉은 해 주실 거라고. 어머니도 부모님도 서로 울면서 잘 키우겠다고,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보러 오고, 언제든 보고 싶다 하면 날 데리고 마을로 오겠다고 약속하고 수술을 끝내고 퇴원하면서 난 서울 부모님한테 맡겨졌대.”    마루는 최선을 다해 담담하게 말했지만 중간중간 목이 메는 듯 목소리가 억눌렸다.    “어머닌 나를 서울로 보내고 혼자 친할머니 병수발하면서 사셨어. 정성을 다했지만 할머닌 5년 만에 돌아가셨고…… 어릴 땐 이곳에 자주 왔었어. 중학교 때도 명절 때나 휴가 때 여길 와서 어머닐 만났어. 작은어머니라 부르면서 말이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더 어릴 적엔 거의 주말마다 내려왔다 하더라고. 어머니한테 날 보여 주려고 부모님이 배려하신 거야. 유별스럽게 날 사랑해 주셔서 어릴 땐 그냥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좋아했을 뿐 친어머닌 줄 몰랐어…….”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건 차마루 씨 잘못이 아니에요.”  “고등학교 가면서 자주 오지 못했어. 1년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공부하느라……, 방학 때도 학원 다니느라…… 명절에 어머니가 올라오셨지. 농사지으신 거 미어지도록 짊어지고 오셨어. 명절 땐 명절 전날 오셔서 늦은 밤까지 어머니와 제사 음식을 하고 두 밤 주무시고 가셨는데, 내 기억에 부모님이 아무리 하룻밤 더 자고 자라고 붙잡아도 부득부득 가셨어. 오래 있으면 눈에 밟혀 못 견딘다고 하시면서…….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 시골에 있는 일거리나 키우는 소를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눈에 밟히는 건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어.”    마루는 왜 그때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룻밤 더 주무시라 붙잡지 않았는지 너무나 후회했다.    “그냥 난 아버지 차를 타고 어머닐 기차역까지 모셔다 드렸어. 기차역으로 가는 동안에 어머닌 내 손을 연신 만지고 쓰다듬다가 기차역에 도착해서 떠나기 직전에 내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주고 가셨어. 내가 자주 못 가니까 방학 때도 오셨는데 진짜 딱 하룻밤만 주무시고 가셨어……. 그때 난 사춘기였고…… 주말에도 학원을 가느라 어머니 얼굴을 서너 시간도 못 봤어. 그런데도 어머닌 서너 시간 얼굴을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오신 거야.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말이야. 어머닌 재혼도 하지 않고 이곳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사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작전 중이어서 장례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어. 내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난 국수방 작전 중이라 해외에 있느라고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거야.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계실 때도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밖엔 못 갔었어. 한 번밖에…….”    마루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딱 한 번 갔을 때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마루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마루를 바라보던 여운의 눈에서도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모님을 잃은 고통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여운이었기에 마루가 느끼고 있을 고통이 얼마나 무거울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여운과 마루의 경우는 많이 달랐지만 마루의 고통이 여운보다 적다고 할 수 없었고, 어떻게 떠나보냈든 부모를 잃은 고통은 누구든 똑같았기 때문이다.  여운은 가만히 마루를 끌어안았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엔 없었다.  여운이 끌어안자 잠깐 움찔하던 마루가 여운의 품에 안겨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루가 흐느낌을 멈출 때까지 오랫동안 마루를 끌어안은 채 마루의 등을 어루만지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울어도 괜찮아요. 울고 싶은 만큼 울어요.’    여운이 마음속으로 말했고, 마루는 그녀의 손길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얼마나 아픈지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이렇게 아픈 건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뜻이에요. 어머닌 줄 몰랐지만 그래도 사랑했다는 증거예요. 그러니까 울어도 괜찮아요. 울고 싶은 만큼 울어요.’    여운은 마루를 꼭 끌어안고 어루만지며 끝없이 위로해 주고 달래 주었다. 그리고 마루는 그녀의 손길에서 위로와 달램을 받으며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한없이 원 없이 울어 버렸다.  한참 만에 마침내 흐느낌을 멈춘 마루가 말없이 앞장서서 밭을 나왔고 여운도 말없이 마루를 뒤따랐다.  그렇게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걷는데 마루가 걸음을 멈추고 여운을 돌아봤다.    “고마워, 기여운.”    마루의 말에 여운이 씩 웃자 마루는 다시 걸었고 여운도 뒤따라 걸었다.  그렇게 또 말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루가 갑자기 여운의 곁으로 오더니 여운의 손을 잡았다.    “나…… 다시 안아 주면 안 돼?”    마루가 말했고 여운은 뜬금없는 소리에 뜨악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왜요? 또 울고 싶어요?”  “아니.”  “그런데 왜요?”  “느낌이 참 좋더라고.”  “그런 말은 여자가 하는 거 아니에요?”  “기여운이 남자고 내가 여자라고 생각하고 안아 줘.”  “뭐래. 말도 안 돼.”  “안아 달라고.”  “에이 거참 귀찮게.”    마루가 보챘고 여운은 어쩌면 또 울고 싶은데 울고 싶다는 말을 못 해서 저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루를 끌어안았다.    “됐죠?”    한 10초쯤 안아 주고 나서 여운이 마루를 밀어내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겼다.    “계속 안아 줘.”  “길에서 무슨 짓이에요?”  “아무도 없잖아.”  “아무도 없어도 그렇지.”  “느낌이 좋단 말이야.”  “너무 심하게 감성적인 척하는 거 아니에요?”  “나 감성적인 남자야.”  “작작 하고 그만 떨어져요.”

여운이 마루를 밀어내려 하자 이번엔 마루가 여운을 끌어당겨 안았다.    “작작 하라고 했죠?”  “가만히 있어. 이정민이 오고 있잖아.”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정민이라는 말에 여운이 고개를 돌려보자 정말 저 아래 쪽에서 손전등을 든 검은 그림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캄캄해서 단지 검은 그림자로 보일 뿐 아무리 봐도 이정민인 줄은 모르겠는데 마루의 눈에는 그 검은 그림자의 정체가 환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저 시커먼 게 이정민이라구요?”    여운이 속삭여 물었다.    “맞아.”  “어떻게 알아요?”  “난 알아.”  “오! 국수방 특수 요원!”  “조용히 해!”    마루가 여운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소리쳤다.    “윽, 왜 옆구리를 찌르고 난리예요?”  “이정민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막 해?”  “작게 했잖아요! 그리고 뭐예요? 이정민이 보라고 안아 달라고 했던 거예요?”  “맞아.”  “대체 왜요?”  “완전히 속이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벌써 완전히 속았을 텐데 뭘 또 속여요! 보름 내내 고추밭에서 별 해괴한 짓을 다 해 놓구선!”  “시끄러워. 계속 떠들면 키스한다.”  “하기만 해요. 아주 주둥이를 아작을 내 버릴 테니.”  “남자 친구한테 주둥이라니!”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버럭버럭하는데 이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세요?”    마루는 그때서야 여운을 놓아주었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고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차마룹니다. 누구세요?”  “아, 마루 씨. 이정민입니다.”    정민이 두 사람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차마루 씨 밭에요. 둘러보느라구요.”    여운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아, 그랬군요.”    “그랬군요” 하고 대답하는 정민에게서 이상하게도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런데 여운 씨.”  “네.”  “기다렸는데…….”  “나를요? 왜요?”  “기차표 살 돈 꾸러 온다 했었잖아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가짜 웃음이었다.    “정말 돈 꾸러 가려고 했는데 차마루 씨가 싹싹 빌어서 서울 가려던 거 참았어요.”  “내가 언제 싹싹 빌었어?”    마루가 발끈했다.    “밤새도록 싹싹 빌었잖아요.”  “내가 언제 밤새 빌었다는 거야?”  “밤새도록 내 옆에서 죽치면서 빌었잖아요!”  “두 분 너무 부럽습니다.”    밤새 병간호 해 준 걸 여운은 일부러 죽치면서 빌었다고 표현했다. 마루는 여운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아들었지만 알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절대 기여운 옆에서 죽치면서 빈 적 없거든?”  “그래요? 그럼 끝끝내 나가지도 않고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잠까지 잔 건 뭔데요?”    이쯤 되자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됐다.    “기여운!”    마루가 버럭 소리치는데 이정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때문에 두 분 또 싸우시네요. 죄송합니다.”    정민이 상황을 수습하려 하자 여운과 마루는 서로를 째려보면서도 더 이상 입씨름하지 않고 참았다.    “두 분 너무 다정해서 부러워요.”  “다정해서 부럽다구요? 방금 전에 싸웠는데요?”    여운이 여전히 마루를 노려보며 묻자 이정민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 뜨겁게 사랑하시는 분들이 뜨겁게 싸우더라구요.”  “아……. 저희가 좀 뜨겁긴 하죠.”    여운이 비아냥거리며 대꾸하자 마루도 한 마디 거들었다.    “엄청 뜨겁죠.”  “네, 많이 뜨겁네요.”    정민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마루가 물었다.    “차마루 씨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여운 씨하고 마루 씨한테 전화했었는데 안 받아서요.”  “무슨 일로요?”  “읍내에 볼일 있어서 나갔다 오는 길에 마루 씨하고 여운 씨하고 한잔하고 싶어서 맥주하고 치킨 사 왔어요.”    손에 들고 있는 게 뭔가 했더니, 이 고소한 기름 냄새는 어디서 풍겨 오는 걸까 했더니 맥주와 치킨이었다.    ‘하여튼 치맥 너란 녀석, 간첩마저도 꼬셨구나.’    “마루 씨 집에서 한잔하려고 들고 가던 중이에요. 한잔합시다. 더 친해질 겸.”    ‘이정민이, 간첩이 한잔하자고? 그것도 더 친해질 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마루가 짧은 순간 뇌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 고심하던 때 철딱서니 없이 냉큼 대답한 건 여운이었다.    “좋죠. 좋구말구요.”    ‘이 여자가 미쳤나!’    여운이 대답하기 무섭게 마루가 여운의 옆구리를 꾹 찔렀지만 이미 좋다고 해 버린 걸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이 마루의 집으로 온 세 사람은 거하게 술상을 차렸다.  이정민이 갖고 온 봉지에서 치킨과 맥주를 꺼내던 여운은 날카로운 눈길로 정민을 째려봤다.    “치킨이 딱 한 마리네요.”  “안주로 먹을 거라…….”  “1인 1닭 모르세요? 겨우 한 마리로 누구 코에 붙이라구요?”    여운이 직설적으로 면박을 주자 정민이 무안함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지금 가서 두 마리 더 사 올게요.”  “됐어요. 어느 세월에요. 그리고 진짜 딱 한 잔만 하려고 맥주 세 캔만 사 온 거예요?”  “가볍게 마시려고……. 지금 가서 맥주하고 치킨 더 사 올게요.”  “됐어요. 어느 세월에요. 매실주 꺼내고 호박전 몇 장 부칠게요.”  “맥주 안주에 전이 어울려? 전은 막걸리 안주거든?”    이번엔 마루가 여운에게 면박을 줬다.    “기름에 다글다글 튀긴 닭도 맥주 안준데 기름에 부친 전이 왜 맥주 안주가 아니에요? 호박전 부치면 쪼잔하게 치킨 한 마리하고 맥주 세 캔만 사 온 이정민 선생님하고 나하고 둘이 먹을 테니까 차마루 씨는 코딱지만큼도 먹지 말아요!”    여운이 바락 쏘아붙인 후 밭에서 따 온 애호박을 도마에 놓고 살림 경력 30년쯤 된 이모님처럼 채를 치기 시작하자 마루와 정민이 신기한 얼굴로 여운을 바라봤다.    “칼 잘 쓰네.”    마루의 말에 여운이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을 손에 꽉 쥔 채로 마루를 노려봤다.    “반찬 가게에서 알바했거든요.”    여운이 시퍼런 식칼만큼이나 살기 가득한 눈빛을 번득이며 대꾸한 후 또다시 호박을 아주 아작을 낼 듯이 채를 쳤다.    “잠깐 화장실 좀…….”    이정민이 일어나자 마루가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정민이 화장실에 간 사이 마루가 재빨리 여운의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미쳤어? 간첩을 집에 들여놓으면 어떻게 해! 제정신이야?”    낮은 목소리였지만 어찌나 거세게 소리를 지르는지 움찔할 지경이었다.    “집에서 간첩 감시하고 좋지 뭘 그래요? 그렇게 싫었으면 차마루 씨가 거절하지 그랬어요.”  “기여운이 좋다고 해 버리는 바람에 말을 못 한 거잖아. 간첩을 안전가옥에 들여놓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 거라고!”  “언제부터 내 눈치를 봤다고……. 미안해요.”    여운은 기가 죽어 사과했다.    “우리가 취한 사이에 이정민이 벙커를 보면 어떻게 할 거야?”  “문 잠가 놔요. 그리고 난 절대 취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정민이 벙커를 보려고 하면 내가 해결할게요.”  “어떻게 해결할 건데? 기여운 주제에 뭘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마루이 너무 거칠게 몰아붙이는 바람에 욱하고 성질이 난 여운이 식칼을 들어 올렸다.    “이걸로요.”    여운이 이를 갈며 속삭이자 마루가 섬뜩한 얼굴로 칼을 들고 있는 여운의 손을 꾹 눌러 내려놓았다.    “그냥 절대 취하지 마.”  “차마루 씨 걱정이나 하시죠. 난 절대 안 취하거든요?”    여운이 남 걱정 말고 댁이나 걱정하라는 듯 받아쳤다.    “내가 이정민하고 얘기할 때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럼 난 뭐 하라구요? 옆에 마네킹처럼 앉아 있으라구요?”  “닭 뜯어.”  “내가 닭 뜯는!”    여운이 씩씩거리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마루가 손으로 여운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내가 닭 뜯는 마네킹인 줄 알아요?”  “마네킹은 닭 못 뜯어.”  “나도 얘기할 거예요!”    여운이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분위기 나빠졌을 때 기발하게 전환시킬 자신 없으면 끼어들지 마.”  “기발하게 분위기 전환시킬 자신 있거든요!”  “흥, 두고 보겠어!”    획 돌아서던 마루가 뭔가 좋은 수가 떠오른 얼굴로 다시 여운에게 다가왔다.    “연기해.”    마루가 화장실 쪽을 살피며 명령하듯 속삭였다.    “무슨 연기요?”    이건 또 무슨 뜬금포인가 하는 얼굴로 여운이 물었다.  “내가 신호를 하면 취한 척해.”  “쓸데없이 취한 연기를 왜 해요? 난 일생 동안 취한 적이 없어서 취한 연기 못해요.”  “이번에 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 이정민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살펴보려는 거니까.”  “지금 혹시…… 작전 짜는 거예요?”    여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작전이야. 잘 봐. 내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일부러 기여운을 열 받게 할 거니까 준비하라는 뜻이야.”    마루가 손가락으로 왼쪽 콧잔등을 긁으며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하면 그땐 열 받아서 펄쩍 뛰다가 술 몇 잔 마시고 취한 척하면서 잠이 드는 척하라는 뜻.”    마루가 이번엔 오른쪽 콧잔등을 긁으며 속삭였다.    “취한 연기는 못해요. 다른 작전 없어요?”    여운이 다른 작전을 묻는데 정민이 화장실에서 나와 버렸다.  작전이라는 단어 때문에 은근히 긴장되면서도 왠지 흥미진진해졌지만 일생 동안 취해 본 적이 없어서 취한 연기는 정말 자신 없었다.  실제로 양으로 치면 세 사람 중에 여운이 제일 많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운은 멀쩡했다. 두 남자, 특수 요원 마루와 간첩 정민이 인사불성이 돼서 낙지처럼 바닥에 들러붙었을 때에도 여운만이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부러 취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취한 연기 절대 못한다 했는데 마루가 사람 성질을 잔뜩 치받치게 해 놓고 왼쪽 콧잔등을 긁으며 작전을 시작해 버렸기 때문이다. 마루가 아무리 콧잔등을 긁어 대도 절대 호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러다간 껍데기가 다 벗겨질 듯 계속 긁어 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여운도 연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연기라고 할 수 없었다. 마루는 작전상 여운을 열 받게 하겠다 했지만 작전이 아니라 실제 상황처럼 돼버렸고 그래서 여운은 진짜 열이 받아서 한순간 꼭지가 돌아 버렸다.  마루 때문에 꼭지가 돌아 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여운은 두 남자가 번갈아 가며 자꾸 심부름을 시켜도 군소리 없이 다 맞춰 주었다. 한 성질 하는 여운이 왜 군소리 없이 맞춰 줬겠는가. 간첩 이정민이 무서워서? 아니면 대한민국 특수 요원 차마루를 위해서? 천만에! 대한민국 국가수호방위국 특수 요원과 북한 남파 간첩이 서로의 신분을 숨긴 채 술자리를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여운은 그 역사적인 순간의 목격자였고, 작전을 수행 중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내시처럼 다 맞춰 준 것이다.  그런데! 물심부름도 셀 수 없이 해 주고 호박전도 몇 장이나 다시 부쳐 먹이고 호박이 떨어지자 두부까지 부쳐 먹였다. 묵은 김치까지 들기름에 달달 볶아서. 그렇게 역사적인 순간의 순종적인 증인이자 목격자가 되어 성심성의껏 술 바라지를 했건만 마루가 필요 이상의 연기력으로 여운의 속을 박박 긁으며 꼭지가 돌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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