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12화 (12/21)

12장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어?”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묻지.”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손가락으로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척 하고 가리켰다.    “모니터가 왜?”  “모니터에 내 방도 나오네요.”    여운이 이를 갈며 말하는 순간 그제야 마루는 아차 한 얼굴이 됐다.    “지금까지 내 방도 감시했던 거예요?”  “그 방 기여운 방 아니고 잠깐 빌려 준 내 방이야.”    마루가 뻔뻔하게 말하자 여운의 눈이 처키 할머니 눈이 됐다.    “좋아요. 그럼 차마루 씨가 빌려 준 방도 감시했던 거예요?”    여운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물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야.”    마루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뻔뻔하게 대답해야 했다.    “언제부터였어요? 언제부터 날 훔쳐본 거예요?”  “훔쳐보다니! 감시한 거야!”  “훔쳐보든 감시하든 언제부터였냐구요!”  “처음…… 부터.”  “처음? 처음이 언젠데요? 내가 여기 사기당해서 맨 처음 잤을 때부터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서 자는 동안 주욱? 24시간?”    마루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녹화도 되는 거예요?”  “당연히.”    “당연히”라는 대답에 여운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빌려 쓰는 방에서 하는 짓들을 24시간 연중무휴로 다 봤다는 거군요?”  “연중무휴는 무슨, 얼마나 됐다고…….”  “내가 자고! 내가 울고! 내가 욕하고! 내가 방귀 뀌고! 내가 옷 갈아입는 것도 다 봤다는 거잖아요! 차마루 씨 관음증 환자였어요?”    여운이 도끼눈을 뜨고 마치 손에 도끼를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주먹을 움켜쥔 채 마루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소리쳤다.    “관음증이라니! 사람을 뭐로 보고! 아니야! 옷 갈아입는 건 안 봤어!”    마루가 절대 그런 적 없다는 듯, 펄쩍 뛰며 부인했지만 순순히 속아 넘어갈 여운이 아니었다.    “아니라구요? 24시간 녹화된다면서요? 내가 옷 갈아입는 순간엔 못 봤겠지만 녹화해 둔 거 돌려서라도 봤겠죠! 이 간첩보다 더 나쁜 놈!”    여운이 마루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몰아붙였다.    “뭐? 나쁜 놈? 간첩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그것도 간첩하고 비교해서?”  “간첩은 날 훔쳐보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차마루 씨가 더 나쁜 놈이죠!”  “나도 훔쳐보지 않았다고! 내가 뭐하러 기여운 옷 갈아입는 걸 봐? 나 그렇게 할 일 없는 놈 아니야!”    마루가 강력하게 항변했지만 여운의 눈에는 도저히 못 봐 줄 발연기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력 레벨 최상위급에 있는 혈기 넘치는 대한의 건아가 저 모니터에 여자의 은밀한 사생활이 24시간! 적나라하게 펼쳐지는데 안 봤다구요? 그걸 믿으라구요? 안 볼 거면 감시 카메라는 왜 달아 놓은 거예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 주는 척이라도 하죠!”    여운이 반질반질한 이마로 마루의 콧잔등을 들이받을 태세로 바짝 다가와서 닦달하자 마루는 점점 더 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안 봤어. 맹세코 안 봤어!”    마루로선 일단 무조건 잡아떼는 수밖엔 없었다.  마루가 잡아떼자 여운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마루를 노려봤다.    “차마루 씨.”  “왜?”  “정말 안 봤어요?”  “안 봤어!”  “조상을 걸고 맹세해요?”  “조상을…… 걸고…… 맹세해!”    뭐 이런 일에 조상까지 걸어야 하나 싶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차마루 씨 게이예요?”  “뭐?”  “보려고 달아 놓은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안 봤다면서요. 그러니까 게이냐구요.”  “아니거든? 절대 아니거든!”    마루가 벙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게이가 아니면…… 정력이 최하위 레벨이에요?”    여운이 깐족거리며 신경을 건드리자 마루는 또 폭발했다.    “최하위라니! 최상위야! 특상위라고!”  “헐, 정력 레벨이 특상윈데 안 봤다구요?”  “안 봤어. 절대 안 봤어.”  “봤으면서 안 봤다고 딱 잡아떼는 거짓말쟁이 관음증 환자.”  “흥! 셀프서비스 즐기면서 좋았어요?”    여운이 묘한 눈길로 마루를 훑어보며 묻자 셀프서비스의 뜻을 뒤늦게 알아차린 마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셀프서비스…… 안 했거든! 절대 아니거든!”  “잡아떼 봤자 소용없어요! 특상위 레벨의 정력가가 추잡스럽게!”  “훔쳐보지 않았다고! 관증음 아니야! 셀프 서비스도 안 했다니까!”    마루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여운을 이해시키거나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 당장 내 방, 아니 내가 빌려 쓰는 방 모니터 꺼요! 아니, 내가 직접 해야겠어요.”    여운이 모니터로 달려가는데 마루가 재빨리 여운을 붙잡았다.    “함부로 만지지 마! 기계 망가지면 책임질 거야?”    마루가 여운이 모니터와 컴퓨터를 만지지 못하게 한 후 컴퓨터를 조작해 여운의 방을 비추던 감시 카메라를 끄자 모니터도 꺼졌다.    “샤워하고 있는데 문 벌컥 열고 들어올 때부터 수상하다 했지만 차마루 씨 정말 이렇게까지 음탕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음탕하다니! 말 함부로 하지 마!”  “함부로? 내 사생활을 함부로 훔쳐본 게 누군데 그래요?”  “훔쳐본 게 아니라 감시한 거라고! 솔직히 기여운 뭐 볼 게 있어서 훔쳐보겠어? 지난번에 불가항력 상황에서 잠깐 봤지만 알다시피 뭐 볼 게 없잖아.”    마루가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여운의 비위를 긁었다. 하지만 여운은 마루의 밉상 짓에도 더 이상 발끈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차마루 씨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  “꼭 그러더라. 제일 많이 먹은 놈이 먹을 것도 없네, 제일 신나게 논 놈이 할 것도 없네, 제일 많이 싸돌아다닌 놈이 볼 것도 없네, 꼭 그러더라. 비겁하게.”    여운은 마루 네놈이 아무리 널뛰기하듯 폴짝폴짝 뛰어 대고 아무리 비위를 긁으며 눈가림하려 해도 부질없는 아우성에 지나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비겁하다니! 진짜 미치겠네. 아니라고! 아니라고!”    마루가 억울하고 분해서 죽겠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여운의 반응은 명쾌한 콧방귀밖에 없었다.    “음탕한 관음증 환자.”  “말조심해!”  “차마루 씨나 조심해요!”    바락 소리친 후 획 돌아서서 벙커를 나가려던 여운이 마루를 돌아봤다.    “국수방 요원이 관음증 환자라니. 쯧쯧쯧.”    여운은 잔뜩 비꼬아 준 후 혀를 차며 벙커를 나와 버렸다.  절대 아니라는 마루의 외침이 왕왕 울려 댔지만 여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감시 카메라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이렇게 방 전체가 환하게 보였으니까…….”    여운이 모니터에 보이던 방의 각도를 재 보다가 어림짐작한 카메라의 위치를 찾아냈다.    “이렇게 이 방향이면 옷걸이쯤인데…….”    여운은 옷걸이 앞으로 다가가 다시 한 번 모니터에 비춰지던 방 그림을 떠올려 보고 나서 옷걸이가 있는 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천장도 살피고 모서리도 살피고 카메라가 설치될 만한 곳을 다 살폈지만 여운의 눈에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숨긴 거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옷걸이도 살펴보던 여운은 드디어 옷걸이 맨 위쪽 걸이에 교묘하게 설치된 카메라를 찾아내고는 놀란 얼굴로 윤기 나는 새까만 카메라 렌즈를 노려봤다.    “네가 여기서 날 훔쳐보고 있었구나. 고얀 놈.”    성질대로 하자면 돌멩이로 카메라 렌즈를 확 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파손했다가 배상 문제로 시비가 붙으면 골치만 아플 것 같아 성질 죽이고 아쉬운 대로 손수건을 찾아 꽁꽁 묶기 시작했다. 꽁꽁 묶어 카메라 렌즈를 심 봉사로 만들며 날이 밝으면 읍내에 나가서 검은색 테이프를 사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루가 방으로 들어왔다.    “모니터 껐어.”  “흥. 지금 끄면 뭐 해요? 나 몰래 볼 것 아니에요.”  “안 봐.”  “그걸 어떻게 믿어요?”    여운은 손수건을 아주 야무지게 매듭지은 후 마루를 노려봤다.    “할 얘기가 있어.”  “뭐요? 양심선언하게요?”  “양심선언할 거 없어. 그런 얘기 아니야. 중요한 거야.”  “나한텐 이 몰래 카메라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국장님 얘기…… 끝까지 듣지 마.”    마루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국장님 얘기 뭐……. 간첩하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요?”  “듣지 마. 끝까지. 기여운이 거절하면 국장님도, 국장님 위에 계신 분들도 별수 없을 거야.”  “차마루 씨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절대 들어줄 생각 없었어요. 난 차마루 씨나 국장님이나 하여튼 국수방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한 목숨 바칠 수 있을 만큼 열렬한 애국자가 아니거든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애국가 들으며 울 때 나도 좀 따라 울고,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이기든 지든 목청이 찢어지도록 응원하고, 가끔은 태극기만 봐도 대한민국이란 단어만 들어도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우리나라가 북한하고 진짜 맞짱을 뜬다면 그땐 확실하게 목숨 바쳐 애국할 테지만 굳이 그런 식의 어정쩡한 일에 목숨 바치고 싶지 않아요. 일단 난 간첩이 엄청 무서워요. 이정민이 무섭다구요. 채 실장 일당을 죽인 사람이 이정민이라면서요. 실망해도 어쩔 수 없어요. 난 절대 이정민하고 친하게 지낼 생각 없어요.”  “절대 실망하지 않아. 국장님한테 확실하게 말해.”    마루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응원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차마루 씨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 도와 달라고 날 꼬드겨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럴 수 없어. 그러기 싫어.”  “왜요?”  “기여운은 민간인이고 그리고 이 작전은 위험하기 때문이야. 기여운도 알다시피 상대는 간첩이고 살인 병기야.”    마루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여운이 가만히 마루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차마루 씨가 내 안전을 걱정하는 거예요?”  “맞아. 걱정하는 거야.”  “국수방 사람들 아무도 내 걱정을 안 하는데 차마루 씨만 날 걱정하는 거예요?”  “국수방 사람들도 기여운을 걱정해. 그래서 늘 나와 동행하라고 했던 거야.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내가 기여운을 보호해야 하니까.”  “그것도 싫어요. 날 보호하다가 차마루 씨가 다치는 건 더 싫어요. 그런데 이정민이 채 실장 일당 죽인 거 진짜예요?”  “거의 90프로야.”  “90프로면 거의 확실한 거잖아요. 그런데 왜 안 잡아요? 지금 당장 잡으면 되잖아요.”  “안타깝게도 90프로가 정황 증거일 뿐이기 때문이야.”  “정황 증거?”  “그날, 기여운이 이정민의 집을 구경하기 위해서 채 실장 일당과 방문했던 날, 이정민은 그 전날부터 사흘 동안 집을 비웠었어. 아마도 채 실장 일당은 어떤 경로로 이정민이 집을 비운다는 걸 알게 됐을 테고 그래서 기여운을 그 집에 데려갔을 거야.”

마루의 말에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채 실장이 그날 아침에 갑자기 무조건 집을 보러 가야 한다고 우겼어요. 난 일도 해야 했고, 또 너무 멀어서 다른 날을 잡고 싶었지만 그날 안 보면 그 집은 물 건너가는 거라고 억지로 끌고 왔었어요.”  “그날이 아니면 속일 수 없었기 때문에 우겼을 거야.”  “그렇군요……. 그런데 심증일 뿐이라고 했죠? 그럼 이정민이 죽인 게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아니. 이정민이 확실해. 채 실장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제주도야. 채 실장은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 근처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됐어. 채 실장이 살해되던 날 이정민이 제주공항에 첫 비행기로 도착한 게 확인됐어. 그리고 마지막 비행기로 제주공항을 떠났어. 김정훈과 박동진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정선 카지노 근처야. 김정훈과 박동진이 살해됐던 날 역시 카지노 인근 CCTV에 이정민이 포착됐어. 결코 우연이 아니야.”  “그러네요.”  “말했다시피 놈은 전문가야.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고 사라졌어.”    마루의 말에 여운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어두워졌다.    “솔직히 말해 줘요. 내가 이정민하고 친해지면 내가 북한으로 납치되는 거예요?”    여운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어. 기여운이 이정민에게 세뇌가 돼서 스스로 월북하지 않는 이상은.”  “그럼……, 그럼 나도 살해당할 수 있어요?”  “그런 일 절대 없도록 할 거야. 기여운은 내가 지킬 거니까.”    마루의 대답에 여운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웠다.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 때문에 차마루 씨가 다치거나 죽는 건 절대 싫어요. 무슨 일이 생기든 날 구하지 말고 차마루 씨를 구해요.”  “그건 내가 판단해.”    마루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여튼 그럼 운 좋게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쳐요. 그래서 이정민을 잡아서 구속시켰어요. 그럴 경우 내가 다른 간첩들의 표적이 되는 수도 있어요? 표적이 돼서 죽을 때까지 도망 다니거나, 발각되면 죽는 거예요?”  “흔한 일은 아니야.”  “흔한 일은 아니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네요?”  “…….”    마루는 대답 대신 찌푸린 얼굴로 여운을 바라보기만 했다.    “생기지 않은 일까지 걱정하지 마.”  “상대가 워낙 특수하고 어마어마해서 생기지 않은 일까지 걱정하게 되네요.”    여운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국수방도 위험한 일인 걸 아는 거죠? 알면서도 나한테 간첩하고 친하게 지내라고 한 거죠?”  “끝까지 거절해. 절대 이정민하고 가까워지지 마. 가까워지려고 애쓰지도 마.”  “말해 줘요. 내가 무척 위험해진다는 거 알면서도 간첩하고 친하게 지내라는 거죠?”  “거절해. 반드시.”    마루는 여운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한 번 더 다짐하듯 거절하라는 말만 남긴 후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여운은 닫힌 방문을 쳐다보다가 심란한 얼굴로 자리에 누웠다.  심란했다. 정말 심란했다.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킨, 아니 부탁한 차연화 국장이 괘씸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내 한 목숨 지키자고 끝까지 거절했다가 이정민을 못 잡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다. 마루에게도 말했지만 여운은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칠 준비가 완벽하게 된 열렬한 애국자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마루의 말대로 여운은 간첩 잡는 국수방 요원이 아니라 민간인이기에 절대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만 불편하고 심란했다.    “모른 척해. 차마루 씨도 거절하라고 했잖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쓸데없이 애국자 코스프레 하지 말고 무시하자고 생각하면서도 심란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기여운, 너 정말 죽어도 좋아?”    여운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절대. 싫어. 간첩한테 죽긴 절대 싫어.”    여운이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그럼 거절해. 모른 척하는 거야. 그냥 생 까는 거야. 알겠지?”  여운은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말한 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    여운은 하루 종일 고추밭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반강제적으로 전씨 할머니네 고추밭에 고추 모종 심기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찾아와 무조건 일손을 도우라는 이장의 명령에 마루는 당연하다는 듯 동원령에 응했고, 여운 역시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다. 여운은 오히려 신이 나서 고추밭으로 뛰어나왔다. 집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연우 어머니를 만난 후, 또 차연화 국장이 오밤중에 다녀간 후 며칠 동안 후유증으로 기분이 몹시 우중충했는데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시키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고추 모종 심기가 어떤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침 8시에 동원돼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여운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달렸다. 점심시간과 참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잠깐 허리를 펼 사이도 없을 만큼 내달려야 하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여운은 고추밭에서 의외의 능력과 재미를 발견했다.  시골에 집 짓고 텃밭 가꾸면서 사는 게 꿈이라 했던 아버지의 말씀 때문에 시골에 집을 샀던 여운이었다. 아버지도 없고 오빠도 없지만 혼자서라도 시골에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깊었기에 농사일을 배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처음 해 보는 농사일이 전혀 노동처럼 느껴지지 않고 재밌기만 했다.  누가 봐도 체질이라 할 만큼 여운은 마을 어르신들이 한번 가르쳐 주면 즉시즉시 척척 해냈다.  전씨 할머니네 고추밭은 마을에서 제일 넓은 고추밭이었기 때문에 거짓말 보태서 학교 운동장만 했다. 그래서 일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밭에 나온 사람 대부분이 70대를 훌쩍 넘은 노인들이었다. 해서 젊은 피가 절실했는데, 여운은 젊은 피 중에서도 제대로 된 젊은 피 역할을 완벽에 가깝게 해내고 있었다.    “할 수 있겠어?”    여운이 거짓말 많이 보태 만주 벌판만큼 광활한 고추밭에 도착했을 때 마루가 조금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었다.    “까짓것 해 보죠.”    여운은 겁 없이 두 팔을 걷어붙였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여운은 먼저 마을 어르신들이 간격을 맞춰 미리 이랑과 비닐 작업을 해 놓은 곳에 고수의 가르침대로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고 난 다음에는 모종을 심을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에서 흙을 조금씩 퍼냈다. 흙을 퍼내서 움푹해진 공간에 충분하게 물을 뿌려 주고 흙이 충분히 젖은 후 드디어 고추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구멍을 뚫을 때도, 물을 줄 때도, 모종을 심을 때도 허리가 끊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아픈 허리보다 일하는 재미에 빠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알려 주는 대로 모종 높이에 잘 맞춰 심어 주고 마지막으로 물을 흠뻑 뿌려 주면 어르신들이 마지막으로 지지대를 받쳐 주는 순서였다. 여운은 처음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르신들과 손발을 척척 맞춰 해냈다.  이장의 동원령 때문에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간첩 정민도 전씨 할머니네 고추밭으로 나왔는데, 그의 농사 솜씨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 마나 한 솜씨였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냥 유명한 조각가로 위장한 간첩 짓만 해야 할 사람, 아니 놈이었다.  정민은 귀티 흐르는 외모답게 농사라는 것의 농 자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르신들이 가르쳐 준 방법을 한 번에 못 알아듣고 몇 번을 되물었는데, 어찌나 답답한지 속에서 화증이 올라올 정도였다. 몇 번을 다시 알려 주고 또 알려 줬건만 정민이 작업한 부분은 누가 봐도 엉망이었다. 정민이 워낙 일을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금 잘못하는 마루가 일을 잘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여튼 도시 남자들이란.  비닐에 구멍 하나 뚫는 것도 간격을 잘 맞추지 못해 마을 할아버지한테 된통 싫은 소리를 들어 머쓱해하는 정민에게 여운이 슬쩍 다가갔다.    “농사일하는 거 처음이시죠?”  “처음 아닌데 할 때마다 혼나네요.”    정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창피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이 아닌데 이다지도 못하세요?”    여운이 화들짝 놀라며 비꼬자 정민이 더욱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여운 씨는 많이 해 봤죠?”  “아뇨. 난 완전 처음이에요.”    완전 처음이라는 여운의 대답에 정민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도저히 처음 해 보는 사람 같지 않은데.”  “그래서 나도 놀랐어요. 완전 처음 하는 나도 이렇게나 잘하는데 처음도 아닌 이정민 선생님이 이다지도 못한다니.”    여운은 다시 한 번 콕 찍어 비꼬다가 움찔했다. 간첩에게 너무 거리낌 없이 못한다고 흉을 봐서 나중에 보복을 당하면 어쩌나 왈칵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난 아무래도 체질이 농사꾼 체질이라 잘하는 것 같고, 정민 선생님은 조각을 잘하시니까 농사일 못해도 돼요. 암요, 그렇고말구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할게요.”    수습을 하기 위해 여운이 재빨리 말을 바꾸며 사과하자 정민이 여운을 향해 부드러운 살인 미소를 흘려 주었다.    “서운하긴요. 전혀 서운하지 않아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할 뿐이에요.”  “절대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내 고추밭도 아니잖아요.”    여운이 정민이 망쳐 놓은 부분을 제대로 만들어 놓으며 대답하자 정민이 또다시 살인 미소를 날려 주었다.    ‘저 미소에 속았다간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여운은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민의 살인 미소에 대한 화답으로 어색한 웃음을 흘려 주었다.    “내 생각에 선생님이 까먹은 점수를 만회할 방법은, 노인분들 울화통 터뜨리지 말고 읍내에 가서 어르신들 드실 것을 준비하시는 거예요. 막걸리 등등.”    여운의 말에 정민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 활짝 웃었다.    “좋은 팁 줘서 고마워요. 여운 씨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가능하다면 아이스커피?”  “오케이.”    정민은 곧장 읍내로 차를 몰고 나갔다.    “이정민하고 무슨 얘기 한 거야?”    정민이 고추밭을 떠나기 무섭게 마루가 여운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 뻔하죠.”  “뻔하다니?”  “일 더럽게 못한다고 할아버지한테 혼났거든요. 그래서 욕먹지 말고 가서 막걸리나 사 오라고 했어요. 내가 마실 아이스커피랑.”  “이정민하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친해질 생각 없어요.”  “친해질 생각 없다면서 뭐하러 그렇게 오래 얘기를 해?”  “별 얘기 아니었으니까 그만 닦달해요.”  “다른 얘기는 없었어?”  “다른 얘기 없어요. 차마루 씨도 일 뒈지게 못한다고 할아버지한테 혼나기 싫으면 빨리 일해요.”  “이정민하고 친해지지 마.”    마루가 진심으로 말했다.    “친해질 생각 전혀 없어요. 그냥 이정민이 일을 못해서 답답해서 좀 비꼬아 줬는데 나중에 나한테 보복할까 봐 얼른 수습했을 뿐이에요.”  “뭐라고 비꼬았는데?”  “일 더럽게 못한다구요.”

여운의 대답에 마루가 픽 웃었다.    “그랬더니 뭐래?”  “살인 미소 날리며 미안하대요.”  “살인 미소?”    마루가 낯을 찡그렸다.    “틀림없이 살인 미소였어요. 솔직히 잘생겼잖아요. 저런 인물로 뭐 할 짓이 없어서 간첩을 하는지.”    여운이 혀를 차며 다시 고추 모종 심기를 시작하는데 마루가 쓸데없이 여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일 안 해요?”  “할 거야.”  “빨리해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알아서 하기 전에 저기 좀 봐요.”    여운이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고 마루가 여운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자 마을 노인들이 일제히 마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루는 그제야 뜨끔한 얼굴로 부랴부랴 다시 일을 시작했다.    “무슨 남자들이 저렇게나 쓸모가 없는지. 이정민이나 차마루나. 쯧쯧.”    여운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다시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    “젊은 아가씨가 일을 진짜 잘하네.”  “서울깍쟁인 줄 알았는데 일꾼이다, 일꾼.”  “내일 병나서 드러누울라. 쉬면서 해라.”  “아이고, 우리 이쁜 딸내미 얼굴 다 타겠네.”    마을 어르신들은 일 못하는 두 남자, 즉 이정민과 차마루는 완전 찬밥 취급 하고 일 잘하는 여운이 예뻐서 연신 칭찬이었다. 칭찬받은 여운은 고래처럼 더 열심히 일했다.  어르신들과 점심을 먹을 때도 가리지 않고 복스럽게 푹푹 잘 먹고 정민이 준비한 막걸리도 주는 대로 시원하게 들이켜고 새참으로 나온 국수도 부리나케 먹어 치우고는 어른들보다 몇 배는 총총하게 움직였다. 아! 아이스커피도 감사하게 잘 마셨다. 비록 얼음은 다 녹아 버린 그냥 커피였지만.  젊은 사람이 귀한 시골에서 남자도 아닌 여자가 힘든 내색 전혀 없이 남자만큼이나 씩씩하게 일을 해내니 어르신들이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일도 올끼가?”  “당연히 와야죠!”  “우리 밭에도 올래?”  “갈게요, 할머니!”  “우리 밭에는?”  “할머니 밭에도 갈게요!”  “고추 다 심으마 고구마도 심어야 카는데 할래?”  “할게요!”  “고구마 다음에는 참깨도 심어야 카는데.”  “참깨도 심으러 갈게요!”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온나. 할매가 밥 주께.”  “그럴까요?”  “뭐 해 주꼬? 달구 삶아 주까?”  “달구요? 달구가 뭐예요?”  “달구 새끼, 달구 모리나?”    여운이 영 못 알아듣고 마루를 쳐다보자 마루가 닭이라고 알려 줬다.    “아! 닭 잡으시게요?”  “잡아 주께. 일을 이래 열심히 해 주는데 잡아 주야지.”  “안 잡아 주셔도 돼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단 하루 만에 여운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사랑받는 서울 아가씨가 됐다.    “마루야, 느그 밭에도 심어야 안 되겠나?”    점심을 먹고 한창 일하는데 이장이 마루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년에나 심죠, 뭐. 모종 준비해 둔 것도 없고요.”  “모종은 내가 주께. 쪼매라도 심어라.”  “먹을 사람도 없는데요, 뭘.”  “먹을 사람이 와 없어. 서울에 부모님한테 보내 드리마 되지. 암말 말고 쪼매만 심어라. 느그 어머이가 니하고 느그 부모님한테 보내 드리야 된다고 해마다 농사지었다 아니가. 느그 밭은 쪼만해서 다 같이 댐비마 한나절이마 한다.”  “하지만…….”  “암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밭에 아무것도 안 심꼬 저래 내뿌라 놓으면 느그 어머이 하늘에서 운다. 알겠제?”  “…….”  “고추도 심꼬 고구마도 심꼬 참깨도 심꼬 해라.”  “예, 알겠습니다.”    여운은 마루와 이장이 나눈 대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정민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의 출생의 비밀 말이다. 퍽 대단한 출생의 비밀은 아니지만 어쨌건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느그 어머이’가 누군지 ‘서울 부모님’이 누군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운은 마루에게도 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장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몹시 속상해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마루의 밭일은, 아니 마루 친어머니의 밭일은 제일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루에게는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은척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여운 씨, 부탁할게 있는데…….”    일이 거의 끝나 갈 때쯤 정민이 여운에게 접근했다.    “뭔데요?”  “실은 나도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텃밭에 상추하고 방울토마토 같은 걸 키워 볼까 하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고, 여운 씨가 좀 도와줄래요?”    ‘큰일이네. 이런 식으로 은근히 접근하면 안 되는데…….’    여운이 고민하느라 재깍 대답을 하지 않자 정민이 더 적극적으로 여운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내가 일당 넉넉하게 지불할게요. 점심 저녁 모두 해 드리고.”    ‘일당이 좀 탐나긴 하지만…….’    “일당은 무슨, 무료로 도와드릴게요. 그런데 당장은 안 돼요. 아시다시피 예약이 많아서. 내가 갑자기 인기 스타가 됐거든요.”    여운의 말에 정민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어르신들 다 도와주고 나서 마지막에 도와줘요.”  “그럴게요.”  “나도 닭 잡아 줄 수 있어요.”  “닭 키우세요?”  “아뇨. 정육점 닭요.”  “아.”    여운이 웃자 정민도 웃었다. 여운과 정민이 웃을 때 마루만 불퉁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째려보고 있었다. 물론 여운은 마루가 째려본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이정민하고 또 무슨 얘기 한 거야?”  “자기 집 텃밭에 상추랑 토마토랑 심을 거라고 도와 달래요.”  “그래서?”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제정신이야?”    마루가 버럭 야단쳤다.    “나도 해 주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싫다고 해요? 마을 어르신들은 다 도와주고 어떻게 이정민만 싫다고 따시키냐구요.”  “이정민이 누군지 몰라?”  “알기 때문에 처음에 대답을 안 했는데 일당 준다고 꼬시잖아요.”  “일당 준다는 말에 넘어간 거야? 그 일당 내가 줄 테니까 가지 마!”  “이미 도와준다고 했어요.”  “안 된다고!”  “그렇게 걱정되면 차마루 씨도 같이 가요.”  “내가 같이 가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정민이 차마루 씨한테 도와 달라고 했다면, 차마루 씬 대놓고 안면 싹 바꾸면서 거절할 수 있어요? 한마을에 살면서?”    여운이 따져 물었고 마루는 우물쭈물 즉답을 못 했다.    “거봐요. 나도 어쩔 수 없이 도와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리고 일당 안 받겠다 했어요. 사람을 뭐로 보고, 내가 그깟 일당 탐나서 간첩 집에 일 도와주러 가겠어요?”    마루에게 양껏 눈을 흘겨 준 여운은 해가 기울기 전까지 열심히 일하고 닭 잡아 준다는 할머니네서 진짜 할머니가 잡은 닭백숙을 배 터지게 먹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 서 있는 연우를 발견하고 재빨리 숨어 버렸다.  연우가 올 줄 몰랐고, 또 지금 이 상태로는 연우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라는 것은 아침에 이장님이 구해다 준 완전 낡은, 일명 ‘몸뻬’라는 일 바지에 남자 작업 셔츠를 입고 장화를 신고 있는 이 완전한 농부 스타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연우와 썸을 탄다거나 잘해 볼 생각은 접었지만 그래도 이런 꼴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여운이 조심스레 고개만 내밀어 연우의 동태를 살피는데 대문이 열리며 마루가 나왔다.    “여운 씨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니요? 서울…… 갔습니까?”  “아뇨. 마을 어르신네 댁에 저녁 먹으러 갔어요. 오늘 고추 모종 심는 거 도왔는데 일을 너무 잘해서 어르신이 예쁘다고 닭 잡아 먹여 주신다고 해서요.”  “어느 어르신 댁으로 갔습니까?”    연우의 질문에 여운은 마루가 연우에게 어느 할머니 댁인지 알려 줄까 봐 순간 긴장했다.    “알려 줄 수 없습니다.”    마루가 딱 잘라 거절하자 여운은 안심하는 반면 연우의 표정에 나쁜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알려 줄 수 없다니요? 와요?”    연우의 목소리에 불쾌한 감정이 뭉텅이로 실렸다.    “기여운 씨가 이연우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요. 난 지금 연우 씨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여운은 연우가 불쾌하더라도 이쯤에서 그냥 가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연우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여운 씨가 내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꼬요? 그걸 차마루 씨가 우째 압니까?”    연우가 따지듯 물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떻게 알긴요, 내가 말했으니까 알지.’    “여운 씨가 그랍디까? 내 만나고 싶지 않다꼬?”  “정말 몰라서 물어요?”    마루의 목소리에도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모르니까 묻지요. 알아듣게 얘기하소.”  “며칠 전에 이연우 씨 어머니하고 기여운 씨 만났죠?”  “그거를 우째……. 그란데 그게 우쨌다는 깁니까?”  “정말 모릅니까?”    마루가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연우 씨한테 어머니가 아무 말 안 했습니까?”  “그기 무슨 말입니까?”    연우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이연우 씨 어머니가 기여운 씨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좋다, 싫다 어떤 말도 안 했습니까?”    마루가 물었고 여운은 청각의 능력을 최대치로 높였다. 연우의 어머니가 연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누구보다 여운이 제일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우는 약간 찔리는 얼굴로 움찔하더니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이연우 씨 어머니가 기여운 씨한테 상처를 준 것 같더군요.”  “우리 엄마가 여운 씨한테 상처를 주따꼬요?”    연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래요. 상처 줬어요.’    “분명하게 상처를 줬습니다. 물론 이연우 씨 어머니는 상처를 줬다는 걸 모를 수도 있지만요.”    ‘그래, 연우 씨 어머닌 나한테 상처 줬다는 걸 모를 수 있어. 내가 내색하지 않았으니까.’    “몰랐어요?”  “우리 엄마가 뭐 우째 여운 씨한테 상처를 주따는 깁니까?”  “어떻게? 그러고 보니 그때 이연우 씨는 그 자리에 없었군요.”    마루의 말에 당황한 얼굴로 뭔가 생각하던 연우가 두 눈을 치켜뜨고 마루를 노려봤다.    “우리 어머니하고 여운 씨가 같이 있을 때 내가 없었다는 걸 차마루 씨가 우째 압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그래요. 그게 중요한 기 아이지요. 그란데 우리 어머니가 여운 씨한테 어떻게 상처를 주딴 말인데요?”  “어떻게 상처를 줬는지는 어머니한테 물어봐요. 기여운 씨는 분명히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더. 우리 엄마가 처음 본 여운 씨한테 그랬을 리가 없어요.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 아입니다.”    ‘그래, 연우 씨는 그렇게 믿고 싶겠지. 세준 씨도 처음엔 그렇게 믿었으니까. 자기 어머닌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니라면 기여운 씨가 이연우 씨 전화를 왜 안 받겠습니까?”    마루가 중요한 사실을 콕 찍어 말하자 연우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부탁입니더. 여운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기여운 씨가 이연우 씨를 피하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알려 줄 수 없어요.”    ‘절대 알려 주지 말아요.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난 여운 씨를 만나야 합니더. 만나서 정확하게 얘기를 들어야 해요. 그러니까 알려 주소.”    ‘만나고 싶지 않다고요!’    “말했잖아요. 내 마음대로 알려 줄 수 없다고.”

마루가 끝까지 거절하자 연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차마루 씨가 지어낸 얘기 아입니까?”  “지어내다니요?”  “우리 엄마가 여운 씨한테 상처 주따는 말 말입니더.”    ‘지어낸 말 아니거든요?’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여운 씨를 못 만나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뭣 때문에 말을 지어내겠어요?”  “내하고 여운 씨 사이를 방해할라고 그랄지도 모르지요. 차마루 씨 혹시 여운 씨한테 관심 있습니까?”    연우의 말에 마루가 기가 찬다는 듯 픽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두 사람 사이 방해할 이유 전혀 없어요. 그리고 기여운 씨한테 관심…… 아주 많습니다.”    마루의 폭탄선언에 놀란 사람은 연우뿐만이 아니었다. 여운도 놀라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뭐? 차마루가 나한테 관심이 아주 많다고?’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연우가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말했잖아요. 두 사람 사이 방해할 이유 전혀 없다고. 하지만 기여운 씨한테 관심이 아주 많다고.”  “결국 그거였군.”  “그거라니?”  “당신이 여운 씨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내하고 여운 씨 사이를 갈라놓을라고 거짓말을 한 기잖아!”    연우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하지만 마루는 황당하다는 듯 비웃었다.    “과연 거짓말일까?”  “거짓말이지! 남자가 비겁하게 여자 때문에 거짓말이나 하고. 차마루 당신은 남자도 아이야!”  “말조심해!”    마루가 연우를 향해 호통쳤다.    “비겁한 건 이연우 당신이야! 기여운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처음 본 당신 어머니한테 기여운을 던져 주고 자리를 비우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해! 당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 어머니가 기여운한테 마음 놓고 상처를 준 거야!”    마루가 소리쳤다.    “우짤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갑자기 파출소에서 연락이 와서 내도 우짤 수 없었어. 그라고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불과 30분이야! 우리 엄마가 여운 씨한테 상처 주따는 말 믿을 수 없다고!”    연우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30분 사이에 여운이 상처를 받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연우 당신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기여운에겐 비겁한 변명일 뿐이야. 그리고 중요한 건, 당신과 당신 어머니 때문에 상처받은 기여운을 위로한 건 나였다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기여운은 내가 책임질 거야.”    마루의 당당한 말에 연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웃기지 마. 당신이 왜 여운 씨를 책임져? 여운 씨 상처는 내가 치료해 줄 거야! 내가 책임질 기라고!”    연우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기여운이 이연우를 거부한다고.”  “거짓말이야!”  “그럼 그렇게 믿어. 믿든 말든 기여운은 내가 책임질 거니까.”  “웃기지 마!”    연우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야말로 웃기지 마!”    마루가 더 큰소리로 소리쳤다.    ‘저 남자들이 미쳤나. 오글거리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자기들이 뭔데 날 책임진다는 거야?’    “웬만하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기여운이 당신 어머니한테 남자 친구 있다고 말했어. 물론 이연우 당신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그 남자 친구가 누군지 알아? 바로 나야.”    ‘미쳤어. 미쳤어. 자기가 왜 내 남자 친구야? 아, 맞다!’    여운은 연우의 어머니에게 남자 친구 있다고 뻥쳤다는 말에 자신이 가짜 남자 친구가 돼 주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폭로하면 연우 씨가 뭐가 되냐고.’    어차피 연우의 어머니 때문에 연우와는 어설프게 썸 타다가 끝난 마당에 연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고 이렇게라도 하루 빨리 정리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 연우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우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당신이 여운 씨 남자 친구라고?”    연우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 우리 사귀기로 했어.”    ‘사귀기로 한 건 아니잖아! 아니구나. 사귀기로 했다고 해야 말이 되는구나…….’    마루로선 어쩔 수 없었고 여운도 어쩔 수 없었지만 점점 더 마음은 불편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닥치라! 닥치라고!”    갑자기 연우가 마루에게 달려들어 마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머머!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이러면 안 됐다. 마루는 여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우와 맞서고 있을 뿐 솔직히 마루에겐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없는데 멱살까지 잡히다니. 어지간한 선에서 연우가 떠날 줄 알고 계속 숨어 있었는데 이쯤 되자 계속 숨어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꼴로 연우 씨 앞에 나서라고? 요 모양 요 꼴로?’    없어서 너무 없어 보이는 모양새라, 그래도 아주 잠깐이지만 썸을 탔던 남자 앞에 이렇게 후진 모습으로 나서려니 너무 창피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운이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도 두 남자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여운 씨가 니하고 사귈 리가 없어!”  “이거 놔!”    마루가 자신의 멱살을 움켜잡은 연우를 뿌리쳤다.    “내가 기여운하고 사귀는 꼴을 보기 싫었으면 태도를 정확히 했어야지!”  “뭐라꼬? 이 치사한 쉐끼!”    연우가 마루에게 분노의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루는 연우의 주먹을 간단하게 피해 냈다.    ‘주먹질까지 하고 큰일 났네!’    “치사한 새끼라고? 왜? 너 같은 놈한테 상처받은 여자를 내가 위로해 줬다고? 그럼 넌 어떤 놈인 줄 알아? 책임도 못 질 거면서 껄떡거린 머저리 같은 놈이야!”    마루가 소리치는 순간 연우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마루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마루는 이번에도 간단하게 피해 냈다. 온갖 공격 방어 기술을 습득한 명색이 간첩 잡는 비밀 요원인데 요딴 주먹에 맥없이 얻어맞을 리가 없었다. 물론 연우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헛방질을 해 대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운 씨가 니하고 사귈 리가 없어. 여운 씨는 니를 싫어한단 말이야.”  “알아. 싫어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세상에서 날 제일 든든한 사람이라고 했어.”    ‘아주 지랄 뒤차기를 하세요.’    여운이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는데 연우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언제, 대체 언제 사귀기로 한 긴데?”  “이연우 당신이 기여운을 당신 어머니한테 던져 준 날 밤에. 아까 내가 말했지? 기여운과 당신 사이 방해할 생각 전혀 없다고. 왜인 줄 알아? 기여운이 먼저 나한테 사귀자고 했기 때문이야. 기여운이 나한테 먼저 사귀자고 하는데 내가 기여운과 당신 사이를 무엇 때문에 방해하겠어?”    ‘저 인간이 미쳤나! 내가 언제 사귀자고 했다는 거야?’    여운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지만 앞에 나설 수가 없어 이만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연우가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아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여운 씨 어디 있어? 여운 씨한테 직접 들어야겠어.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절대 못 믿어!”  “그래, 그럼 직접 들어. 기여운, 그만 나와!”    마루가 갑자기 여운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소리치자 여운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저 인간이 내가 숨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숨어 있는 걸 마루가 어떻게 알았건 주먹질까지 하며 싸우고 있는데 더는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여운은 정말 창피한 꼬락서니였지만 별수 없이 연우 앞에 등장해야 했다.    “여운 씨.”    연우가 반가움과 불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여운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연우 씨.”  “여운 씨, 내하고 얘기 좀 하입시다.”  “그래요. 해요, 얘기.”    어차피 이렇게 대면했는데 더 피할 수도, 피할 이유도 없었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여운이 마루에게 허락 아닌 허락을 받자 연우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보다가 여운의 팔을 잡아끌며 오토바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타요.”  “어딜 가게요?”  “시내 가서 얘기해요.”  “이런 꼴로 시내를 가자구요?”    여운이 농사꾼 패션을 가리켰다.    “상관없어요.”  “난 상관있어요. 아주 많이.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    연우의 말에 여운이 돌아보자 마루가 눈치 없이, 아니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대문 앞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으이그, 하여튼.’    “차마루 씨, 좀 들어가 줄래요?”    여운이 큰 소리로 부탁하자 마루가 도끼눈을 번득이며 대답했다.    “30분 뒤에 들어와. 안 그럼 문 잠가 버릴 거야.”    마루는 근엄한 목소리로 경고한 후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닫았다. 하지만 대문 곁을 떠나진 못했다. 왠지 모를 불안함과 초조함 때문에 대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장 박동은 또다시 이유 없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여운와 연우와 대화를 엿듣는 짓이 얼마나 유치한 짓인지 알고 있었지만 마루는 유치함 한복판에 있더라도 절대 떠날 수 없었다.    “됐죠? 말해요, 이제.”  “차마루 씨가 그랬어요, 우리 어머니가 여운 씨한테 상처를 줬다고.”  “네, 맞아요.”    맞는다는 여운의 대답에 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머니가 여운 씨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그냥 이것저것 많이 물으셨어요. 나도 많은 대답을 했고. 그러니까…….”    여운은 굳이 생략할 이유도, 미화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에 연우의 어머니가 어떤 걸 물었는지 모두 다 말해 줬다.  집은 어디냐, 서울 어느 동네에서 사느냐, 동네 시세는 어떻게 되느냐, 아파트에 사느냐, 몇 평이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무슨 과냐, 2년제냐 4년제냐, 지방이냐 수도권이냐, 직업은 어떻고 연봉은 어떻고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고 형제는 어떻게 되냐 등등 연우의 어머니가 여운에게 던진 질문들을 모두 까발리듯 말해 줬다. 물론 매우 담담한 목소리였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애써 상처받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얘길 하다 보니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여운은 쓰린 속을 내보이지 않았다.  연우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일그러졌지만 이 마당에 굳이 간추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여운은 남은 얘기까지 모두 들려주었다.    “나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하셔서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어요. 솔직히 처음 만난 분한테 나에 대해서 몽땅 다 털어놓는 거 쉽지 않은 일인데 그냥 말씀드렸어요. 왜 궁금해하시는지 알 것 같았거든요. 연우 씨 짝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그걸 알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다 말씀드렸어요.”    여운은 연우에게 국수방 오 팀장에게 했던 말 그대로, 연우의 어머니에게 했던 말 그대로 자신의 출생부터 현재까지 겪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말해 주었다.    “여운 씨……, 그기 진짭니까? 여운 씨 부모님과 오빠가…… 그래서 중학생 때부터 혼자 살아왔던 게 사실에요?”  “네, 맞아요. 혼자 그렇게 살아왔어요.”

연우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여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만 받은 게 아니었다. 한없이 안쓰럽고 한없이 딱함이 얼굴 한가득이었다. 충격, 안쓰러움, 딱함만도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감싸 주고 위로해 주고 싶어 함도 한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안쓰러워해 주고 딱하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웠다. 감싸 주고 위로해 주고 싶어 하는 것도 고마웠다. 하지만 결국 그런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감정들의 찌꺼기일 뿐이었다.    “연우 씨 어머니 좋은 분이세요. 연우 씨 어머닌 정말 너무 감사할 정도로 위로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격려도 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상처를 주따는 건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딱 거기까지였으면 하셨거든요.”  “그게…… 무슨……?”  “연우 씨 어머닌 나하고 연우 씨가 그저 친구이기만을 바라셨어요. 절대적으로 친구이기만을 바라셨어요.”    여운의 설명에 연우는 잠깐 동안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운 씨가 오해했을 수도 있어요. 엄마의 말뜻을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어요.”  “아뇨. 오해 아니에요. 잘못 이해한 것도 아니에요. 틀림없이 친구이길 바라셨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강조하셨거든요.”  “강조하다뇨?”  “여자 사람 친구여야 한다구요. 그리고 연우 씨 다음 달에 선본다는 얘기도 하셨어요.”    여운의 대답에 연우가 이번엔 꽤 한참 동안 말을 못 하고 여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여운 씨,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전부 미안해요. 내가 정말 미안해요. 엄마가 여운 씨한테 무슨 말을 했든 무시하고 내 말만 들어 줘요. 어머닌 내가 여운 씨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내가 사과할게요. 진심으로 미안해요. 그리고 나 다음 달에 선 안 봐요.”  “알고 있어요, 연우 씨 선 안 본다는 거.”    여운의 말에 연우가 민망한 듯 머리카락을 훑어 올렸다.    “연우 씨가 대신 사과할 일 아니에요. 그리고 연우 씨 어머니도 따지고 보면 나한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그랬던 것도 아닐 거예요. 그냥 연우 씨를, 아들을 너무 사랑하니까 조금이라도 좋은 여자, 팔자 세지 않은 평범한 여자를 만났으면 하셔서 그러셨을 거예요. 다 이해해요.”  “엄마가 무슨 얘길 했든 상관없어요. 난 여운 씨하고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 여운 씨 좋아해요. 진심으로. 나 여운 씨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날 고백하려고 했었어요. 조금 늦었지만.”    연우가 와락 고백을 해 버렸다.  그런데 여운은 연우의 고백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 덤덤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 참 듣기 좋았다. 고맙기도 했다. 한편 약간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슬펐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로부터 이미 너무나 모질게 거절당해 본 터라 연우가 아무리 어머니는 상관없다고 해도 여운은 그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뤄지지 않을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여운은 연우 어머니가 친구 이상은 아니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굳이 연우와 친구 이상이 되려고 애쓸 생각이 없었다. 연우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을 하는 관계도 아니고 또 연우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쯤에서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생각했다.    “결혼이라니…….”    여운이 한숨 쉬듯 웃었다.    “정말이에요. 난 정말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연우가 진심으로 말했다.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미안해요.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여운 씨!”  “우리는 그냥 친구가 제일 잘 어울려요.”  “난 그럴 수 없어요, 난…….”  “미안해요, 연우 씨. 나…… 차마루 씨하고 사귀기로 했어요. 차마루 씨를…… 좋아해요.”    어쩔 수 없었다. 연우가 오래 매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여운은 마루와 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말을 맞추는 것에서 더 나아가 쐐기를 박아 주는 수밖엔 없었다.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는데, 진짜 담담하게 말했는데 심장은 괜스레 급하게 뛰고 가슴은 괜스레 아릿했다.  여운의 심장이 괜스레 급하게 뛰고 가슴도 괜스레 아릿할 때 마루 역시 대문 뒤에서 필요 이상 비정상적으로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 때문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대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용케도, 아니 신기하게도 여운이 한 말, “차마루 씨를 좋아해요”라고 한 말은 놀랍도록 또렷하고 정확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루는 가슴 한복판에서 뜨겁고 행복한 기운이 번져 나오는 것을 느꼈고 마루의 심장은 뜨거운 행복함에 들떠 미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연우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화가 난 연우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래서 마루에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모든 대화가 다 잘 들렸다.    “차마루 싫어했잖아요!”  “맞아요. 싫어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싫어하지 않아요. 연우 씨 어머니 만나고 돌아오던 날 차마루 씨가 정말 많이 위로해 줬어요. 속상해하는 날 차마루 씨가 정말 너무너무 많이 위로해 줬어요. 내 얘기 다 들어 주고 위로해 주고……. 너무 고맙더라구요.”  “차마루씨한테 여운 씨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요? 그기 진짭니까?”    연우의 물음에 여운은 살짝 난간함 얼굴로 연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사귀자는 말 한 적 절대 없지만 마루가 그렇게 말해 버렸으니 그냥 장단을 맞추는 수밖엔 없었다.    ‘하여간 차마루 그 인간은 그런 얘긴 뭐하러 했는지!’    “진짜로 여운 씨가 먼저 사귀자고 했다고요?”    연우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고 여운은 재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마루 씨가 위로해 주는 게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그러자고 해 버렸어요. 홧김에 아니면 감정에 휩쓸려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차마루 씨도 좋다고 했고 서로 사귀기로 약속해 버렸고……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솔직히 후회하지 않아요. 차마루 씨랑 사귀기로 한 것 말이에요. 그동안 내가 차마루 씨를 잘못 알고 있었더라구요. 그날 날 위로해 주는 데 참 좋은 사람이라구나…… 그걸 느꼈어요.”    연우를 설득하기 위해 차마루라는 사람을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했는데, 없는 말 지어내다 보니 자꾸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주 없는 말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연우 어머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던 날 기분 풀라며 맥주도 주고 가짜 남자 친구 해 주겠다고 해서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연우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정말 갈대라고. 어쩜 며칠, 아니 몇 시간 사이에 안면 싹 바꿀 수 있을까,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을까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가 몇 마디 상처를 줬다고 남자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인지. 어째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것인지. 정말 여자란 못 믿을 사람이고 갈대 중에서도 진짜 여려 빠진 갈대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운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연우와는 안 되는 사랑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말이 되든 안 되든 이미 마루가 연우에게 한 얘기가 있으니 그 말대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싫은 사람이 위로해 줬다고 갑자기 좋아질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믿을 수 없어요. 일부러 하는 말이죠? 나 때문에, 우리 엄마 때문에 화가 나서 하는 소리죠?”    ‘저 자식 왜 저렇게 눈치가 빨라?’    눈치 빠른 연우 때문에 여운보다도 마루가 더 긴장했다. 어째서 마루가 더 긴장이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못된 짓 하다가 들킨 것처럼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연우 씨는 내가 이해가 안 될 거예요. 내가 연우 씨라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다 뻥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차마루 씨한테 위로를 받으니까 고마웠고……, 고마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싫어했던 마음이 사라지더라구요.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니까…… 좋은 감정도 생기고…….”    진심이 아닌 말을 하려니 우물쭈물 말투에 자신감이 없었다.    “차마루가 정말 좋아요? 진심으로?”    여운의 자신감 없는 목소리 때문인지 연우가 재차 따져 물었고 마루는 대문 뒤에 숨어 연우가 화가 나서 따져 묻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식이 지질하게 왜 따지는 거야! 한번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묻는 거야! 남자답게 물러날 것이지!’    연우는, 아니 연우와 마루는 긴장한 채로 여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진심이에요.”    여전히 자신이 없었지만 여운은 진심이라고 밀어붙였다.  너무나 크게 실망해 연우의 어깨가 축 처지던 그때 마루의 어깨는 기쁨과 승리감에 도취돼 하늘 끝까지 치솟고 있었다.    “여운 씨.”  “제일 중요한 건…… 연우 씨하고 나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난 알아요, 우리가 안 될 거라는 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연우가 화가 나서 소리쳐 물었다.    “이미 경험이 있거든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끝까지 날 사랑하겠다던 사람이 결국 어머니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떠났어요. 그 사람도 그랬었어요. 자기 어머닌 절대 그런 사람 아니라고. 사람을 돈이나 인격이나 집안이나 그런 걸로 가려서 따지는 사람 아니라고. 팔자 같은 건 믿지도 않는다고. 어머니에 대해 잘 몰랐던 거죠. 그렇다고 그 사람 어머니나 그 사람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물론 그 사람과 헤어지게 하려고 나한테 온갖 나쁜 말과 나쁜 행동을 많이 하셨지만 그분이 나쁜 건 아니에요. 결국 어머니를 이기지 못하고 날 떠났지만 그 사람이 나쁜 것도 아니에요. 그분은 그저 아들을 너무 사랑했던 거예요. 부족한 게 너무 많은 나한테 뺏기기엔 당신 아들이 너무나 아깝고 그만큼 사랑했던 거죠. 그 사람 역시 합리적인 쪽을 선택했던 거예요. 그렇게 억지로 결혼해 봤자 결국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 사람은 알았던 거예요. 그 사람은 부모님이 반대하면 연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날 지켜 주겠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거 안 돼요. 부모님과 연 끊는 것도 하면 안 될 짓이고, 부모님과 연을 끊게 하면서까지 그 사람을 붙잡는 것도 못 할 짓이고. 그거 안 돼요. 못 해요. 해서도 안 되고. 연우 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엄만 여운 씨 반대하지 않았어요.”    연우가 말했지만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당당하지 못한 맥 빠진 목소리였다.    ‘연우 씨도 나처럼 애써 뻥치고 있구나.’    “연우 씨 어머니가 틀림없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기여운이란 친구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안쓰럽더라. 그래도 참 씩씩하게 잘 살아왔더라. 하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한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부모 형제 없는 사람도 어떻게든 다르다. 그래서 친구는 괜찮지만 짝으로는 좀 조심해야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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