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11화 (11/21)

“정신 차려.”  “차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여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되겠군. 이연우 만나기로 한 거 취소해. 그 상태로는 못 갈 것 같으니까.”  “그건, 그건 안 돼요.”    여운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가볍게 때렸다.    “나가야 해요.”  “그 상태로 나간다고? 넋이 나갔잖아.”  “다시 돌아왔어요. 휴…….”    여운은 심호흡을 하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기꾼 살해, 아니 사망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나가야 하니까 어……. 아, 맞다. 그때 국수방에서 나한테 줬던 카드라도 줘요, 그럼.”  “꼭 나가야겠어?”  “나가야 해요. 갑자기 취소할 순 없어요. 연우 씨한테 둘러댈 마땅한 취소 사유가 없잖아요. 나한테 사기 쳤던 사람들이 몽땅 살해당해서 지금 너무 무서워서 못 간다,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돈을 주든지 돈 주기 싫으면 카드라도 줘요.”  “카드는 안 받겠다 해서 국수방에 반납했어.”  “그럼 돈 좀 줘요. 갑자기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내가 기여운 데이트 비용까지 대야 해?”    마루가 또다시 냉정하게 굴기 시작하자 여운이 마루를 노려봤다.    “활동비로 생각하고 가불해 줘요.”  “활동비?”  “차마루 씨가 그랬잖아요. 임무를 수행 중인 특수 요원이라고. 특수 요원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7천 원밖에 없다는 게 말이 돼요?”  “특수 요원은 무슨 개똥 같은 특수 요원이냐며!”  “진짜 개똥 같지만 오늘은 특수 요원 할래요.”  “이연우하고 데이트하는 사적인 용무가 특수 요원 임무야?”  “특수 요원 임무에 사적인 건 없다고 차마루 씨가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연우 씨하고 밥 먹는 것도 특수 요원 임무죠.”    여운이 야무지게 따지고 들자 마루는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얼마 줘?”    마루가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툴툴거리며 물었다.    “한…… 10만 원?”  “밥 먹는데 무슨 10만 원씩이나 필요해!”  “밥도 사고 커피도 사고 오늘 내가 아주 떡 벌어지게 한턱내고 싶단 말이에요.”  “이연우를 꼬실 특출한 능력이 없으니까 돈으로 잡아 보려고?”  “돈 10만 원이 얼마나 대단한 재력이라고 연우 씰 잡아요? 그리고 돈 한 푼 없이도 연우 씨 꼬실 특출한 능력 많거든요?”  “특출한 능력이 많다고?”  “많고말고. 그냥 한 방에 훅 보내 버릴 특출한 능력이 넘쳐나거든요?”  “넘쳐나는 특출한 능력이라는 게 뭔지 들어나 봅시다.”  “당연히…… 매력 쩌는 미모와 쫙 빠진 몸매와 수려한 말솜씨 기타 등등. 차마루 씨도 확인해서 알잖아요. 훅 가는 몸매.”    여운의 당당함에 마루가 어처구니없는 듯 비웃었다.    “어딜 봐서 쩌는 미모고 어딜 봐서 훅 가는 몸매라는 거야? 난 그런 몸매 본 적 없고 수려한 말솜씨가 아니라 수려한 쌍욕 솜씨겠지.”    마루가 계속 약 올리자 여운이 주먹을 움켜잡았다.    “연우 씨는 내 쩌는 매력에 틀림없이 한 방에 훅 갈 거니까 두고 보면 알 것이고, 돈 줘요!”    여운이 바락 성질을 내며 손을 내밀자 마루가 아주 짜증 나서 죽겠다는 얼굴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열 장을 꺼내 여운의 손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얹어 주었다.    “한 달 치 활동비니까 계획적으로 써.”  “10만 원이 한 달 치 활동비라고요? 그럼 생활비 따로 줘요!”  “직접 벌어서 써!”    마루가 획 돌아서서 지하 벙커 문을 열어젖혔다.    “국수방에 얘기해서 나도 월급 달라고 해요! 나도 스파이니까!”  “직접 달라고 해.”    마루가 냉정하게 내뱉고는 지하 벙커 문을 닫아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마루는 진짜 못돼 빠졌어.”    여운은 지하 벙커 문을 노려보며 투덜거린 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오후 5시.  원피스와 카디건을 차려입은 여운이 샌들을 손에 들고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서 마당을 둘러봤다. 마당에는 메주밖에 없었다.    “또 지하실에 있나? 대체 지하실에 뭐가 있는데 하루 종일 지하실에 처박혀 있는 거야.”  여운은 안으로 들어와 일단 마루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어서 조심스레 열어 보자 빈방이었다. 지하실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여운이 지하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없으면 나간 줄 알겠지 하고 생각하며 조용히 돌아서는데 갑자기 벌컥 지하 벙커 문이 열렸다. 흠칫 놀라며 돌아보자 마루가 도끼눈을 뜨고 여운을 노려봤다.    “안 들어갔어요. 문고리에 손도 안 댔어요. 나간다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서던 참이에요.”    여운이 서둘러 변명 혹은 해명을 했지만 마루의 도끼눈은 풀리지 않았다.  여운이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는데도 마루가 계속해서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운이 지하 벙커 입구에서 얼쩡거렸기 때문이 아니라 여운의 모습이, 원피스와 카디건을 받쳐 입은 모습이 좀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맨날 질끈 묶고 있던 말총머리를 풀어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 짙고 두껍지는 않지만 살짝 분칠을 해서 다른 때보다 훨씬 뽀얗게 보이는 피부. 그리고 원피스와 카디건.  전혀 꾸미지 않고 있었을 땐 평범하기 그지없던 사람이었거늘 아주 조금 꾸몄을 뿐인데 사람이 확 달라 보였다. 꽤 멋지고 제법 매력적인 여자가 마루의 앞에 서 있었다.    “이상해요?”  “뭐가?”  “나 말이에요. 너무 안 어울려요?”    절대 안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어울려서 탈이었다.    “안 어울리는 건 아닌데…….”  “촌년 같아요?”    촌년이라니. 이렇게 예쁜 촌년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촌년은 아닌데…….”  “안 어울리지 않은 것도 아니고 촌년도 아니고……. 그럼 연우 씨 마음에 들까요?”    연우의 마음에?  백 번, 천 번 마음에 들 것이다. 그래서 싫었다. 연우의 마음에 들 것이기 때문에.    “이연우 마음에 들게 하려고 꾸민 거야?”  “당연하죠. 데이트할 사람한테 잘 보여야죠.”    데이트할 사람, 즉 연우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여운의 말이 마루의 심장을 아프게 후비며 파고들었다.    “솔직히 말해 줘요. 나쁘지 않죠?”  “……나쁘진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나쁘진 않다고.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오늘 처음으로 여운이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뻐 보인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만 말했다.    “휴, 다행이다. 그럼 갔다 올게요.”    샌들까지 깔맞춤한 후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며 대문으로 향하는데 마루가 여운을 향해 소리쳤다.    “10시야!”  “알았어요.”    여운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 한 번쯤 돌아봐 주면 좋겠는데 그냥 횅하니 나가 버렸다.  여운이 집을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대문을 바라보고 있던 마루는 괜스레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지하 벙커로 내려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상하게 허전하고 심심했다. 여운이 집을 나간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심심하고 허전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확인하며 5그린벨트 구역에 상주 중인 간첩 용의자의 동태를 살피면 되는데 갑자기 간첩이고 감시고 다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허전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정말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신 차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감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귓가에서 여운이 했던 말만 맴돌았다.    <솔직히 멋지고 감동적이잖아요. 나를 진심으로 그리워해 주고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 놓쳐 버리면 앞으로 그런 사람 영영 못 만나 것 같아서…….>    “멋지고 감동적이긴 개뿔…….”    또다시 배 속 깊은 곳에서 뾰족한 심술이 올라왔다.    <나도 오랜만에…… 썸 좀 타게요.>    “썸 타! 누가 썸 타지 말래?”    투덜거렸지만 마루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큰 숨을 들이쉬었다.  큰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길 몇 차례. 갑자기 마루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더러 진짜 스파이 같다면서! 완전 남자 같다면서! 완전히 미친 수컷이이라면서!”    쩌렁쩌렁 고함을 내질러 본들 들을 사람은 오직 마루 자신. 고막만 따가울 뿐이었지만 마루는 쓸모없는 고함질을 계속 해 댔다.    “섹시하다며! 완전 대박이라며! 나한테 반할 것 같다며!”    마루가 허공을 향해 주먹질까지 해 대며 소리쳤다. 그러다 으득 이를 갈았다.    “뭐? 이연우가 안아 줬을 땐 쑥스럽고 내가 안아 줬을 땐 그냥 쪽팔렸다고? 왜? 왜? 왜!”    마루는 너무 화가 나고 너무 서운하기도 해서 허공을 향해 마구 화를 냈다.    “누구 마음대로 썸을 타! 기여운은 내 허락 없이 썸도 못 타. 절대 안 돼!”    마루는 결심한 듯 재빨리 자리를 옮긴 후 국수방과 접속했다.    제5그린벨트 [차마루 외부 활동으로 외근. 밤 10시 복귀 예정. 이상.]        11장        여운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마을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뒤편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곧 여운의 곁에 SUV 차량이 멈춰 섰다.  여운이 누군가 싶어 살펴보는데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마루가 고개를 내밀었다.    “차마루 씨?”  “타.”  “어디 가요?”  “읍내.”  “갑자기 왜요?”  “타라고.”    마루가 재촉하자 여운은 뭔가 수상하다 싶었지만 일단 조수석에 올랐다. 여운이 조수석에 올라 안전띠를 착용하기 무섭게 마루가 차를 출발시켰다.    “파출소에 내려 주면 돼?”  “네. 그런데 왜 갑자기 읍내에 가는 거예요?”  “외근.”  “외근요? 아깐 아무 말도 없더니.”    여운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혹여나 원피스와 카디건이 구겨질까 봐 옷매무새를 연신 가다듬었다. 마루는 여운의 행동이 연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들자 또 심술이 났다.    “데이트하는 게 그렇게 좋아?”    마루가 삐딱하게 묻자 여운이 마루와 똑같이 삐딱한 표정으로 마루를 흘겨봤다.    “데이트하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요. 긴장된단 말이에요.”  “수 틀리면 쌍욕하는 여자가 긴장은 무슨. 무슨 여자가 쌍욕을 그렇게나 잘하는지. 이연우가 알면 발바닥에 불나도록 도망갈 텐데.”    마루가 갑자기 주제를 쌍욕으로 급전환하자 여운이 잘 나가다가 또 시작이라는 표정으로 마루를 노려봤다.    “나라고 쌍욕을 잘하고 싶겠어요? 살아남으려다 보니 발악하듯이 하게 된 거지.”  “살아남으려고 욕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욕 안 하고도 잘 사는 사람들 많거든?”    마루가 지금까지 들어 본 말 중에 제일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는 듯이 반박했다.    “나처럼 살아 보지 않았으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고생한 건 아는데, 고생했다고 다 쌍욕하는 거 아니거든?”  “맞아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 손을 자기 손인 것처럼 맘대로 만지고, 내 엉덩이를 제 엉덩인 것처럼 맘대로 주물럭거리고, 술집 여자가 아니라 식당 종업원인데 술집 여자 취급 하면서 막 끌어안고 앉혀서 술 따르라 하고, 아버지 할아버지뻘 되는 늙은이들이 싸구려 옷 한 벌 사 줄 테니 같이 자자고 하면서 가슴을 만지는데 욕 안 하고 어떻게 버텨요?”

여운이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울분을 토해 내기 시작하자 마루는 온몸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갓길에 차를 세웠다.    “뭐라고? 손을 만지고 엉덩이를 만지고 가슴을 만지면서 자자고 했다고? 아버지 할아버지뻘 되는 놈들이?”  “더러운 늙다리들…….”    여운이 주먹을 움켜쥐고 씩씩거렸다.    “나도 처음부터 욕을 잘했던 건 아니에요. 욕이라는 거 아예 할 줄도 모르고, 쌍스럽게 욕하는 사람 경멸했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나도 살려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구요. 처음엔 너무 무섭고 더럽고 속상해서 숨어서 울기 바빴어요. 아무도 편들어 주는 사람 없고……, 나한테 나쁜 짓 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남자들은 다 그렇다고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해야지 어쩌겠냐고 말하는 사람뿐이었어요. 무서워서 울고, 속상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죽을 수는 없고, 죽어지지도 않고, 살아야 하는데 살려면 어쩌겠어요. 나도 덤벼야지.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딱 부러지게 거절을 하기 시작했죠. 확실하게 싫다는 표현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래서 딱 부러지게 싫다고, 만지지 말라고 말도 하고, 내 손을 만지거나 엉덩이를 주무르면 손으로 확 쳐내면서 표현도 했어요. 그랬더니 욕하고 때리더라구요. 네까짓 게 어디서 비싼 척하냐고. 장사나 하고 배달이나 하는 년이 주제에 맞게 굴라고 하면서요.”  “때렸다고?”    마루가 금방이라도 시뻘건 레이저가 뿜어져 나올 듯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여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때렸어요. 진짜 많이 맞았어요. 손으로 발길질로…….”  “미친놈들!”  “맞아요. 미친놈들이에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사람들이 와서 말리면 날 때린 사람은 온갖 행패를 다 부리고도 당당하게 가요. 그럼 끝인 거예요. 사람들은 또 말하죠. 술 마셔서 그런 거라고. 그놈의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참으라고. 잊으라고. 참고 잊고 또 참고 잊고. 하지만 절대 안 잊어지거든요. 그런 상처는 절대 잊히는 상처가 아니거든요.”  “그런 놈들을 가만히 놔뒀어?”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욕하기 시작한 거예요. 욕이라도 퍼부으라고 형택이가 가르쳐 준 욕이에요. 완전 미친년처럼 욕하라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건들면 돌아 버리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줘야 한다고. 그래서 절대 참지 않기로 결심했고, 참지 않기로 결심한 날 내 엉덩이를 더듬는 남자의 손모가지를 비틀어 잡고 쌍욕을 퍼부어 대기 시작한 거예요. 사실 나도 놀랐어요. 내가 그렇게나 무시무시한 쌍욕을 퍼부었다는 게.”    여운이 그때 처음으로 욕을 퍼부어 댔던 때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웃을 일 아니야.”  “웃을 일 아니죠. 그런데 웃음이 나네요. 내가 처음으로 맞서 싸운 날을 생각해 보니까 꽤 통쾌해서요. 나한테 쌍욕을 들은 그놈……. 그 늙다리…….”    입은 웃고 있었지만 여운의 눈에는 새파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쌍욕의 폭격기가 된 것처럼 욕을 퍼부었어요. 그 동안 쌓여 있던 서러움 같은 걸 다 토해내듯이 마치 그 동안 이때를 위해 갈고 닦은 것처럼 무자비하게 욕이 튀어나오더라구요. 진짜 미친 것처럼 악을 써대며 마녀처럼 쌍욕을 해댔어요. 내 엉덩이를 만진 사람한테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막 집어던지면서 쉬지 않고 욕을 했어요.”  “잘했어. 잘했어.”    마루가 잘했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어금니를 꽉 다물고 이를 아득아득 갈듯이.    “몽둥이로 마구 패 주면서 욕했으면 더 잘한 건데…….”    여운이 몽둥이로 늙다리를 팡팡 두들겨 주는 장면을 상상하며 마루가 아쉽다는 듯이 말하자 여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몇 번 세상에서 제일 드세고 세상에서 제일 못 배운 사람처럼 쌍욕을 하며 덤벼드니까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은 추행하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더 이상 희롱하는 사람도 없고. 세상에서 제일 드세고 부모 형제도 없어서 세상에서 제일 못 배운 년이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대신에 성추행에서는 날 지키게 됐어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가만히 여운을 바라봤다.    “아빠랑 오빠 돌아가셨을 때는 아는 사람이라서 믿었던 앞집 아저씨한테 몹쓸 짓 당할 뻔 하고, 어른이 돼서는 정신 나간 미친 남자들의 표적이 되고……. 살아간다는 게…… 나한테는 진짜 생존이었어요.”    여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마루는 여운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발버둥 치며 살아왔는지 시간의 고단함과 필사적이었던 생존 본능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혼자 살아남았는지, 이렇게 살아남아 준 것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가여웠다.  국수방에서 여운의 힘들었던 과거를 모두 다 알게 됐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국수방에서 알아낸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오롯이 혼자 스스로를 지켜 내야 했던, 지켜 내고 살아남아야 했던 여자. 짐승 같은 놈들의 성폭행 성추행의 위험에서도 참으로 기특하고 훌륭하게 스스로를 지켜 낸 여자가 기여운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드센 여자가 아닌, 세상에서 제일 못 배운 여자가 아닌, 진심으로 신통하고 훌륭한 여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아버지랑 오빠 돌아가시고…… 한동안 사망 신고를 못 했어요.”  “왜?”  “사망 신고를 하면…… 미성년자라서 시설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고아원에 가는 게 싫고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것도 무섭고 학교를 옮기는 것도 무섭고……. 그땐 어려서 뭐랄까, 마치 감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혼자 살았어요.”  “혼자?”  “네. 아빠랑 오빠랑 살던 집에서 혼자 숨어서 살았어요. 아빠랑 오빠가 안 죽은 것처럼요. 집에 있는 걸로 버티다가 쌀도 떨어지고 라면도 떨어져서 이틀 정도 굶었는데…… 내가 굶고 있다는 걸 안 형택이가 집에서 몰래 쌀이랑 라면 같은 거 갖고 왔어요. 훔쳐 온 거죠. 굶으면 죽는다고, 뭐든지 먹어야 한다고……. 형택이가 훔쳐 온 쌀로 밥 지어서 먹고 라면 끓여 먹고……. 언제 또 쌀하고 라면이 생길지 몰라서 하루에 한 끼씩만 먹으면서 버텼어요. 그러다 옆집 아저씨 사건도 생겨났고…… 결국 시설에 갔었죠. 아, 또 칙칙한 얘기 했네.”    여운이 고통스럽기만 한 옛날 얘기 그만하고 싶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마루가 핸들을 잡은 채 말없이 유리창 너머 어디쯤을 노려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앞으로 말이야.”    말없이 운전을 하던 마루가 어금니를 꽉 다문 채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또다시 기여운한테 추행을 하거나 괴롭히는 놈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말하면요?”  “죽여 버릴 거야!”    마루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여운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가느라 턱뼈가 울룩불룩한 마루의 얼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어젯밤처럼 또다시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을 지켜 줄 것만 같은 든든함과 미친 듯한 수컷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알았어? 나한테 말하라고.”  “열 명이든 백 명이든 다 말해요?”  “다 말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다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요. 꼭 말할게요.”    앞으로는 그런 일도 없겠지만, 혹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마루에게 일러바칠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무척 든든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없을 때 그런 일을 당하면 딱 한 군데만 족쳐.”  “딱 한 군데? 어디요?”  “38선 바로 아래.”  “38선 바로 아래……. 아.”    여운은 38선 바로 아래가 어디인지 알아듣고 픽 웃었다. 38선 바로 아래란 바로 남성의 급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거기만 집중적으로 족쳐. 가루가 될 때까지. 알겠어?”    마루의 말에 여운이 또다시 픽 웃기만 하자 마루가 “알겠냐고!” 하고 소리쳤다.    “알았어요.”  “너덜너덜 가루가 될 때까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족쳐. 알았어?”  “알았어요.”    마루는 심각하게 말하는데 여운은 웃기만 했다.    “농담 아니야. 진심이야.”  “하지만 거기만 집중적으로 족쳤다가 남성 번식의 권리와 의무를 상실하게 됐다고 고소하면요?”  “그런 놈은 남성 번식의 권리와 의무 따위 줄 필요 없어. 고소하면 나한테 말해. 국수방에서 깨끗하게 처리할 테니까.”  “깨끗하게 처리한다는 말……, 은근 섹시하네요.”    여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섹시하다는 여운의 말에 마루는 은근히 기분이 업되는 것을 느끼며 흘낏 여운을 쳐다봤다.    “내가 섹시해?”  “섹시해요.”  “섹시하다면서, 내가 섹시하다면서 왜, 왜 다른 남자하고 썸을 타겠다는 거야?”  “다른 남자, 이연우 씨 말이에요?”  “맞아.”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야 완전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당연하다니?”  “차마루 씨가 얼마나 나를 질색하는지 아는데 어떤 여자가 질색하는 남자하고 썸 타려고 하겠어요? 아무리 남자가 궁해도 그렇지, 내가 남자한테 목이 말라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도 아니고. 지구상에 남자가 차마루 씨 한 사람만 존재한다고 해도 차마루 씨와 썸 탈 일은 없어요.”    여운이 차마루와 썸 탈 일은 한강에 상어가 떼거지로 출현하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여운이 너무 강경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 탓에 마루는 바짝 약이 올라 버렸다.    “나도 지구상에 여자라곤 기여운 혼자만 존재해도 기여운하고 썸 탈 일은 없거든!”    마루의 발언에 여운이 분명 발끈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알고 있어요.”    여운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요만큼도 발끈하지 않고. 결국은 마루만 더더욱 약이 오를 뿐이었다.    *    마루는 차 안에서 여운과 연우가 파출소 앞에서 만나 다정하게 썸을 타러 국밥집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고춧가루를 바가지로 뿌려 주고 싶었지만 딱히 끼어들 핑곗거리가 없어 쳐다만 보고 있어야 했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 괜스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붙어서 걷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세 뼘 정도의 거리가 있었는데 그 세 뼘의 거리가 마루의 눈에는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짜증 나게도 두 사람의 그림은 꽤 괜찮았다.  말랐지만 꽤 굴곡이 느껴지는 여성스러운 몸매의 여운. 경찰복을 차려입은 어깨 넓고 듬직한 체구의 연우. 봄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원피스 자락, 부드럽게 바람결을 타고 흩날리는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 그 곁에서 든든함이 묻어나는 걸음걸이로 발을 맞춰 주는 연우.    “젠장!”    젠장맞게도 두 사람의 뒷모습은 꽤 그럴듯하게 잘 어울렸다. 그래서 젠장이었고, 정말 젠장이었다.  어울리면 안 되는데, 절대로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데 단 1프로도 어울려서는 안 되는데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고 그래서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마루가 속이 상하고 화가 날 이유가 조금도 없는데 말이다.

속이 잔뜩 상한 채로 바라보고 있는 마루를 뒤로 하고 여운과 연우는 맛있다고 소문난 국밥집에서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하는 연인 그 모습으로 다정하게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 다 얻은 듯 행복한 얼굴로 싱글벙글하던 연우가 슬며시 먼저 입을 열었다.    “여운 씨.”  “네.”  “오늘…… 정말 예뻐요.”    연우의 칭찬에 여운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스러운 수줍은 미소를 배시시 흘리며 얼굴을 붉혔다.    “좀…… 신경 썼어요.”  “깜짝 놀랐어요, 천사가 나타난 줄 알고…….”  “어머, 연우 씨잉. 천사라니, 거짓말하지 말아요.”    연우의 부끄러울 정도로 오글거리는 멘트에 몹시 흐뭇해진 여운이 코를 잔뜩 먹은 듯한 비음을 흘리며 교태를 떨자 연우의 얼굴에 예뻐 죽겠다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 천사 같아요.”  “어웅, 그만해요옹.”    여운의 비음은 한층 더 풍부해졌고 연우는 여운이 하는 짓이 너무 예뻐서 기분이 업되는 바람에 입천장이 데는 줄도 모르고 뜨거운 국밥을 머슴처럼 퍼먹었다.    “이따 할 얘기 있어요.”    연우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여운은 즉시 핑크빛 예감이 가슴속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연우의 말투, 표정, 시선. 틀림없이 핑크빛 예감이었다. 하지만 이럴 땐 여우 같은 내숭이 필수 요소. 여운은 둔하고 눈치 없는 척, 전혀, 코딱지만큼도 예상하지 못하겠는 얼굴로 연우를 바라봤다.    “무슨 얘긴데요?”  “차 마시면서 얘기할게요.”  “무슨, 심각한 얘기예요?”    여운이 짐짓 걱정스러운 척하며 묻자 연우가 약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심각한 얘기일 수도 있어요.”    심각한 얘기일 수도 있다는 대답에 여운은 가식이 아닌 진짜로 걱정스러운 얼굴이 돼 버렸다.  분명, 핑크핑크한 예감이었는데 심각할 수도 있다면 어쩜 헛다리를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각한 얘기라면 핑크가 아니라 혹시 국수방 얘기?  ‘기여운 씨한테 반했어요.’  ‘여운 씨하고 진지하게 사귀고 싶어요.’  ‘내 마음을 받아 주면 안 될까요?’  이런 식의 핑크핑크한 예감이 적중한다면 솔직히 그건 완전히 심각한 얘기는 아니었다.  완전 심각하기보다는 완전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국수방 얘기를 한다면? 그건 정말 완전 심각하고 심하게 심각한 일이었다.  완전 행복한 일이냐, 아니면 완전 심각한 일이냐를 가늠하느라 진짜 맛있는 국밥을 대충대충 먹고 카페로 온 여운과 연우는 커피 두 잔을 놓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여운은 연우가 완전 행복하든 완전 심각하든 먼저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고, 연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쑥스러움을 타고 있었다. 서로 말도 없이 미적거리자 맞선 보는 사람들처럼,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 합석한 것처럼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지고 있었다.  이럴 땐 싱거운 농담이라도 해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좀 재미난 농담거리가 없을까 싶어 여운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어째 오늘따라 싱거운 농담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어색할 땐 뇌라도 기발하게 잘 돌아가 주면 좋으련만 뇌까지 어색해져 버렸는지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다.  여운의 뇌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면 남자인 연우라도 좀 똘똘하게 굴었으면 좋겠는데 연우마저 부끄럼을 타느라 10분째 이 말도 저 말도 하지 못하고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뜸을 그리도 오래 들이는지. 기다리다 못해 성질 급한 여운이 혹시 눈 뜨고 졸고 있냐고 한 소리 하려는 찰나, 드디어 연우가 입을 열었다.    “여운 씨.”    입을 열어 준 것이 어찌나 반가운지 여운은 하마터면 기립 박수 칠 뻔했다.    “네.”  “내가 생각을 진짜, 진짜로 억수로 많이 했거든요.”  “무슨 생각요?”    혹 대화가 또 끊어질까 봐 여운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여운 씨 생각요.”    오, 좋은 징조였다. 핑크핑크한 징조.    “내…… 생각요? 어떤…… 생각요?”    여운은 살짝궁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니까 나하고 여운 씨가…….”    연우가 본격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려던 그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는 방울 소리가 들렸고 그래서 무심히 시선을 카페 출입구 쪽으로 던지던 연우가 말벌에 쏘인 듯 화들짝 놀라더니 그만 굳어버렸다.  연우의 뜨악하다 못해 소 뒷발에 꼬리뼈라도 차인 듯한 표정에 여운이 고개를 돌리는데 쑥 하고 누군가 다가왔다.    “어머나, 연우야! 여기 있었나?”    아주 까랑까랑한 아줌마의 목소리. 까랑까랑한 목소리와는 달리 푸근하고 수더분하게 생긴 여인.    “어, 엄마, 여기 어떻게…….”    엄마? 이연우 엄마?  엄마라는 소리에 여운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예고 없이 쑥 끼어든 여인을 다시 쳐다봤다.    “엄마…….”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래서 여운도 연우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엄마, 여기 왜 왔어요?”    연우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왜는, 커피 마시러 왔지.”  “엄마가? 커피 마시면 가슴 두근거리고 밤새 잠 못 잔다고 절대 안 마시잖아요.”  “다른 거 마시면 되지.”    연우의 어머니가 여운을 흘낏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누구…… 실까?”    연우의 어머니가 어서 정식으로 소개시키라는 듯 연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묻자 연우가 여운의 눈치를 보다가 할 수 없이 소개를 했다.    “여운 씨, 우리 엄마예요. 엄마, 이쪽은 기여운 씨예요.”    연우가 마지못해 소개를 하자 연우 어머니가 여운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반가워요.”  “아, 안녕하세요.”  “나도 그냥 여 끼서 마셔야겠다. 괜찮제? 괜찮죠?”    전혀 괜찮지 않은데, 절대 괜찮지 않은데! 연우의 어머니는 굳이 대답할 필요 없다는 듯 연우의 옆자리에 날름 앉아 버렸다.    ‘헐, 저 어머니 패기 보소.’    “뭐 드시겠어요?”    여운이 연우 어머니가 마실 음료수를 주문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연우가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어요, 여운 씨. 엄마, 오렌지 주스 드실 거지요?”  “그래, 주스.”    ‘으이그 저 눈치 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여운은 연우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직접 음료수를 주문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이 어색하고 난데없는 자리에서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연우가 홀랑 그 기회를 채 가 버린 것이다.  연우가 주스를 주문하기 위해 테이블을 떠나자 여운은 본격적으로 어색하고 황망해졌고, 연우의 어머니는 ‘때는 이때다’라는 듯 본격적으로 여운을 꼬치꼬치 뜯어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에 보이는 잡티 하나부터 눈에 안 보이는 내장까지.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훑겠다는 듯 연우 엄마는 눈동자에서는 ×선을 뿜어내며 여운을 보고 또 봤다.    “우리 연우가 여자를 만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과연 몰랐을까?’    “네…….”    여운이 수줍은 것인지 난감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배시시 흘렸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아시면서.’    “그런데…… 말씨를 보니까 서울 사람?”  “네.”  “우리도 다 서울 출신인데 연우 아버지 회사가 갑자기 경상도로 옮겨 오면서 여기서 터 잡은 지 20년 됐어요. 경상도에서 20년 살았지만 억양은 아직 완저이 서울 토박이예요.”    연우 어머니의 말에 여운은 하마터면 푸하 하고 터질 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잡아 눌렀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절대 서울 토박이 억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80에 서울 20 정도?    “기여운 씨라고 했죠?”  “네.”  “기씨는 흔하지 않은데 특이하네. 몇 살이에요? 여자한테 나이 묻는 거 실례인가?”  “서른입니다.”  “아, 서른…….”    “아, 서른”이라고 말하는 연우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배어 나왔다.    ‘뭐지? 나이가 너무 많다는 뜻인가? 서른이 어때서!’    “여운 씨, 이거 우짜지요?”    어머니가 드실 오렌지 주스를 쟁반에 받쳐 온 연우가 오렌지 주스를 쟁반째로 내려놓으며 약간 곤란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파출소에 잠깐 갔다 와야겠어요. 소장님이 급하게 호출을 하셔서요. 금방 갔다 오께요.”  “그래요? 그럼, 그럼 그냥 다른 날 만나죠.”    여운은 도망칠 기회다 싶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연우 어머니가 눈치 없이, 아니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운을 붙잡고 늘어졌다.    “금방 온다잖아요. 금방 오는 거 맞제? 우리 둘이서 얘기하면서 기다리면 되지. 그라면 되겠제, 연우야?”    ‘그걸 왜 연우 씨한테 물어보세요? 나한테 물어보셔야죠.’    여운이 어떻게든 불만스러워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으며 다른 날 만나자고 한 번 더 얘기하려는데, 그 엄마에 그 아들이라고 연우마저 눈치 없이 여운을 붙잡았다.    “금방 오께요. 우리 엄마하고 얘기하면서 잠깐만 기다려요. 30분 내로 올게요.”    ‘뭬야! 30분?’    여운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연우는 어느새 횅하니 카페를 나가 버렸다.  뭐, 저런 머저리 같은 남자가 다 있을까.  앞에 앉은 여인은 내 엄마가 아니라 네 엄마인데, 처음 본 여인과 무슨 얘기를 하라고. 뭘 얼마나 편할 거라고. 너 님이나 편하지 내가 뭐가 어째서 어떻게 편할 것이라고 너 님의 어머니 곁에 나를 던져 놓고 가는 것인지.  여운은 순간 욱하고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솔직히 넉살 좋게 상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연우의 어머니.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고 이제 좀 썸을 타 볼까 말까 둘이 있어도 어색한 관계인데, 그런 관계의 남자의 어머니와 어떻게 오붓하고 재미나게 있으란 말인지. 무려 30분씩이나!    “그래서 집은 서울이에요?”  “서울 어느 동네에서 살아요?”  “그 동네는 요즘 시세가 얼마나 하나?”  “아파트에 살아요?”  “몇 평?”  “어느 대학 나왔어요?”  “무슨 과?”  “2년제, 4년제?”  “지방대, 수도권?”  “직업은 뭐예요?”  “연봉은 얼마나?”  “부모님은 어떤 일 하세요?”  “형제는?”    연우의 어머니는 여운에 대해 신상을 탈탈 털 작정으로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여운은 생각했다. 도대체 오늘 처음 만난 여운에게, 첫 만남인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신상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 대는지를.  연우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패기가 넘치거나, 의욕이 넘치거나, 혹은 푼수기가 다분한 건데 어느 쪽이건 여운을 배려하지 않아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정말 불편한 자리라고, 연우가 30분 내로 번개같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기필코 다른 핑계를 대서 도망갈 것이라 다짐하는데 어렴풋이 어쩌면 연우의 어머니가 여운을 아들 연우의 짝이 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기 꽉 찬 숙맥 아들이 여자를 만나고 있으니 이제야 결혼할 여자가 생겼나 보다 반가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갑자기 고민이 됐다.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곧이곧대로 대답할지, 적당히 숨기는 것이 좋을지.

짧은 순간 뇌에 래그가 걸릴 정도로 고민하던 여운은 결국 더 붙이지도 덜어 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신상에 대해 솔직하게 다 대답해 주었다. 부모님에 대해, 형제에 대해, 학교에 대해, 집에 대해, 근래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까지. 물론 국수방에 대해서는 함구했지만.  여운이 모든 것을 다 솔직하게 대답하고 난 후에도 놀랍게도 연우 어머니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짜 아들의 짝으로 생각한다면, 십중팔구 못마땅하게 여길 터였다. 대놓고 못마땅하다 할 수는 없어도 표정에서 눈길에서 ‘한 가지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라는 티를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연우의 어머니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안쓰럽고 또 안쓰러운 눈길로 여운을 바라보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  여운은 감사했다. 솔직히 많이 고마웠다. 그런데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하고 싶지 않은 상처 가득한 기억을 들춰야 하는 게 싫었고, 자신의 약하고 아픈 부분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스스로 까발려야 하는 것이 싫었다.    “우짜고! 진짜 억수로 고생했네요.”  “진짜 장하네요.”  “옴마야, 그래, 어릴 때 그런 일을 당하고,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팠을까.”  “혼자서 버팄다니 정말 용감하고 훌륭하네요.”  “옴마야, 그래 쎄가 빠지게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사기를 당하고. 그런 나쁜 놈은 꼭 잡아서 아주 작살을 내야 해요!”  “우리 연우가 도둑놈 꼭 잡아 줄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절대 기죽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요.”  “살다 보면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고 해가 쨍쨍한 날도 있는 거니까. 지금까지는 힘들었어도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연우 어머니는 하나 버릴 것 없이 진지하게 그저 감사하고 그저 좋은 말로 응원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말씀이고 정말 감사한 분이었다. 그래서 아픈 부분 끄집어내게 한 것 때문에 속으로 싫어했던 것을 반성하며 무조건 감사하고 좋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는데, 마지막에 연우 어머니는 여운의 가슴을 향해 수류탄 하나를 곱게 투하해 주셨다.    “그란데 우리 연우하고 그냥 친구죠?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여, 자, 사, 람, 친, 구!”    연우 어머니가 ‘여자 사람 친구’라는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여자 사람 친구’여야 한다는 듯이. 절대 ‘여자 친구’여서는 안 된다는 듯이.    “우리 연우 다음 달에 선보기로 했거든요. 혹시 여운 씨가 모르고 있을까 봐……. 여자 사람 친구 맞죠?”    연우 어머니가 남은 수류탄 하나를 더 투하해 주시며 확인 사살을 했다.    ‘다음 달에 선이라……. 진짜 식상하다.’    그토록 감사한 말만 해 주더니, 그토록 좋은 말만 해 주더니. 결론은 그래도 내 아들 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무리 장하고 훌륭하고 용감해도 그건 내 아들의 짝이 아닐 때 얘기고, 내 아들의 짝이라면 그냥 팔자 센 여자일 뿐인 것이다.  여운은 어째서 연우 어머니가 그토록 ‘여자 사람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는지 즉시 알아들었다. 그리고 또 다음 달에 선본다는 얘기를 왜 했는지도 금방 알아들었다. 진짜 선을 보는 것인지, 급하게 만들어 낸 말인지는 몰라도 꽤 예민한 직감을 가진 여운이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또 감정과 표현에 꽤 솔직한 편인 여운이 알아듣고도 못 알아들은 척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다 그런 거지 뭐…….’    가슴에서 수류탄이 펑, 펑 하고 연속으로 터졌다. 죽도록 아픈 것은 아니지만 아팠다. 엉엉 소리 내서 울고 싶은 정도는 아니지만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이 서러웠다.  아픈들 무엇 하리. 서러운들 어찌하리. 인생이 다 그런 거지.    ‘그래, 깔끔하게 원하는 대답을 해 드리자.’    “네! 절대적으로 여, 자, 사, 람, 친, 구예요.”    여운은 연우의 어머니가 원하는 대답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연우의 어머니 얼굴에서 기쁨과 안도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표정 관리에 애는 쓰고 있었지만 피어나기 시작한 기쁨과 안도의 꽃이 갑자기 져 버릴 수는 없었다.    “다음 달에 선보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연우 어머니를 더욱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인데 기쁨과 안도의 꽃이 피어나던 연우 어머니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빨개지기 시작했다.    ‘뻥이었구나…….’    뻥이든 아니든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할까.    “사실 여자 사람 친구라고 하는 것도 무리예요. 이 순경님은 제 물건 훔쳐 간 도둑놈 잡아 주시는 분이고, 전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게 죄송하고 감사해서 차 대접하는 거였어요.”  “그랬구나……. 남자 친구는 있어요?”  “네, 당연히 있죠. 서른인데 남자 친구 없겠어요? 남자 친구 있어요.”  “그렇구나. 남자 친구도 있고 실속 있네.”    여운은 연우 어머니 속을 더욱 후련하게 해 드리기 위해 굳이 없는 남자 친구까지 만들어 버렸다. 여운의 거짓말 덕분에 잠깐 당황했던 연우 어머니의 얼굴에는 기쁨과 안도의 꽃이 완전히 만개해 버렸고, 여운은 터져 버린 연우 어머니표 수류탄 파편에 내상을 입고 쓰라린 가슴을 조용히 달래고 있었다.  다 그런 거라고. 그냥 그런 거라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죠? 남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오기로 해서 그만 가 봐야 해요.”    연우 어머니와 더는 1분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아진 여운은 하는 수 없이 또 거짓말을 해야 했다.    “어머, 그래요? 연우가 여운 씨 기다리고 있을 줄 알 텐데……. 남자 친구 만난다는데 붙잡을 수도 없고…….”  “연우 씨한테는 제가 나중에 따로 얘기할게요.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운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예의바르게 인사한 후 카페를 나와 어딘지 모르는 낯선 길을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뛰다가 그러다 어느 버스 정류장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속이 상했다. 마음이 아팠다.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진짜 오랜만에 뭐하러 태어났을까, 뭐하러 살아남았을까 한탄마저 하고 싶었다.    “쪽팔린다…….”    속상하고, 마음 아프고,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지금의 심정을 ‘쪽팔린다’라는 한 마디에 모두 담아 툭 뱉어 냈다.    “휴…….”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길고 긴 한숨인지 땅을 푹 꺼트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합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여운이 고개를 들자 마루가 여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차마루 씨네요.”    여운은 어쩐지 마루가 와락 반갑다고 생각하며 비죽 웃었다.    “또 멍 때리고 있어?”  “그러네요.”    여운이 기운 없이 대답하자 마루가 여운의 곁에 앉았다.    “집에 가는 버스 이 정류장엔 안 오는데.”  “그래요?”  “이연우하고 썸은 잘 탔어?”  “아뇨.”  “그럼? 까였어?”  “딩동댕.”  “뭐야? 왜 까인 거야?”  “…….”  “이연우가 썸 타기 싫대?”  “……딩동댕.”  “같이 있던 아줌마는 누구야?”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봤어요?”  “봤어.”  “어떻게 봤어요?”  “지나가다가.”    지나가다가? 거참, 때마침 그때 카페 앞을 지나가다니. 어째 수상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 따위를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지나가다가 본 게 아니었다. 마루는 경찰서에서부터 두 사람의 뒤를 쫓아 여운이 카페에서 혼자 나올 때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냐고, 그 아줌마.”  “연우 씨 엄마요.”  “이연우 엄마? 이연우 엄마까지 만났어? 상견례까지 한 거야?”    마루가 삐딱한 얼굴로 묻자 여운이 픽 하고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콧방귀를 뀌었다.    “상견례는 무슨. 그분도 지나가다가 커피 마시고 싶어 카페에 왔다가 만난 거예요.”    사실 연우의 어머니가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카페에 간 것은 아니었다. 아들 연우가 여자를 만난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보자는 당연히 파출소장이었다. 2주일에 한 번씩 혼자 사는 아들의 밑반찬을 챙겨 주러 왔다가 파출소장의 제보를 듣게 된 연우의 어머니는 곧바로 읍내에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카페를 샅샅이 뒤져 드디어 연우와 여운이 함께 있는 카페를 찾아낸 것이다. 참으로 의지의 한국인, 아니 의지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어?”  “무슨 얘기는……. 별 얘기 안 했어요.”  “별 얘기 아닌 게 어떤 얘긴데?”  “그냥 뭐…… 까였어요.”  “누구한테? 이연우한테?”  “연우 씨 엄마한테요.”  “왜? 뭣 때문에 까는 거래?”    마루가 더욱 삐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운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까여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는 듯이.    “그게…… 내가 너무 별 볼 일 없어서요.”  “뭐?”    마루가 삐딱하다 못해 불쾌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별 볼 일 없다고?”  “차마루 씨 말이 맞았어요.”  “내 말이 맞았다니?”  “정말 벌받았어요.”    여운이 창피한 듯 미소 지었다.    “썸 타려다가…… 이용하고 골탕 먹이려다가…… 나쁜 짓 하려다 벌받았어요.”  “내가 했던 말은 그냥 한 소리야. 진짜 벌받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남녀가 만나면 감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서…….”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만 집에 가요. 쪽팔린 얘기 하기 싫어요. 태워 줄 거죠?”  “태워 줄게.”  “고마워요.”    마루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여운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 일부러 자는 척했다. 마루도 굳이 여운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우에게서 두 번이나 전화가 왔지만 여운은 받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방으로 들어간 여운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누워 버렸다.  연우에게서 또 전화가 왔지만 끝까지 받지 않고 아예 전원마저 꺼 버렸다.  여운은 뭐 그깟 일에 이렇게까지 의욕을 잃고 그러냐고 스스로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려고 굳이 애쓰지도 않았다. 이럴 땐 그냥 저절로 괜찮아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가장 빠르고 현명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남자도 어머니라는 사람 때문에 파투가 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사귀지도 않은 남자의 어머니 때문에 마음 상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 달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이든 두 번째이든 열 번째이든 아픈 건 아픈 거였기 때문이다. 반복되면 덜 아플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었다. 때린 곳을 또 때리면 몇 배로 아프듯이 아픈 데를 또 아프게 하면 그 역시 몇 배로 아팠다.  여운은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내버려 두면 어느새 괜찮아지니까. 아니, 괜찮아질 때까지 내버려 두면 되니까.  밤이 깊어지도록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렸다.  여운이 몸을 일으켜 쳐다보자 마루가 캔 맥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 안 잤어요?”  “기여운이 못 자고 있는데 내가 잠이 오겠어?”    마루가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은근히 설레는 멘트를 던지자 여운이 ‘뭐지?’ 하는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내가 못 자는데 차마루 씨가 왜 잠이 안 와요?”  “하숙생이 못 자는데 주인이 잠이 오겠냐고.”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픽 웃으며 캔 맥주를 쳐다봤다.    “나 마시라구요?”  “못 자는 것 같아서.”  “잘됐네요. 목말랐는데.”    여운은 캔 뚜껑을 따서 주욱 들이켰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이연우 어머니한테 까였다면서. 어떻게 까인 건데?”  “쪽팔려서 말하기 싫어요.”    여운이 미간을 찌푸리자 마루도 따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인신공격했어?”  “아니에요. 막 인신공격해 대고 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뭐가 쪽팔려?”  “일단 까인 건 무조건 쪽팔린 거예요.”  “그러니까 왜 기여운을 깠냐고. 어떻게 기여운을 깠냐고. 뭐 얼마나 대단해서 깠냔 말이야.”  “꼭 알고 싶어요? 쪽팔린다는데도?”  “꼭 알고 싶어. 그리고 나한테는 쪽팔려하지 않아도 돼.”  “차마루 씨한테는 왜 쪽팔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기여운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사람이니까.”  “칫, 뭘 얼마나 안다고……. 하긴, 국수방에서 탈탈 털렸으니 알 만큼 아는 거네요.”    여운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니까 말해 봐. 이연우 어머니가 뭐라고 했어?”  “그냥 아주 정중하고 친절하고 센스 있게 까셨어요.”    여운은 잠깐 망설이다가 이연우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그분이 얼마나 정중하고 친절하고 센스 있게 거절했는지. 가슴에 수류탄을 던져 주신 분에게 자신이 얼마나 후련하게 걱정을 날려 주고 왔는지 모두 말해 주었다.    “잘한 거죠?”  “잘한 거야.”  “없는 남자 친구 만든 것도 잘한 거죠?”  “잘한 거야.”  “까인 거 맞죠?”  “까인 거야.”    마루의 정직한 대답에 여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쪽팔렸어요.”    여운은 남은 맥주를 한 번에 주욱 들이켜 버렸다.    “좀…… 억울해요.”  “뭐가?”  “왜 나만 벌을 받는 건지……, 왜 난 썸도 내 마음대로 못 타는 건지 억울해요.”    여운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벌받는 거 아니야. 인연이 아니라서 그래.”  “인연이 아니다……. 역시 결심대로 살아야 하나 봐요.”  “결심?”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라던 결심요.”    여운이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맥주 또 있어요?”  “없어. 그만 마셔.”  “생각해 봤는데…… 진짜 서울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왜? 이연우 어머니한테 까여서?”  “연우 씨 또 만나는 것도 불편할 것 같고, 이래저래 여기 있는 게 편하지가 않아요. 서울 보내 주면 안 돼요?”  “안 된다고 했잖아.”    안 된다는 마루의 말에 여운이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쉰 후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서울도 못 가고, 썸을 타면 벌 받고…….”    여운이 맥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이런 질문 하면 눈치 없는 줄 알지만, 이연우가 만나자고 하면 또 만날 거야?”    마루는 여운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며 물었다.    “진짜 눈치 없네요. 절대 안 만나요.”    여운이 마루가 바라던 대답을 하자 마루는 여운 몰래 씩 하고 웃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1차원적인 인간인지. 마루는 스스로 창피했지만 어쩌겠는가. 일단은 기분이 좋은 걸.    “부모님 상관없다고 자기만 믿으라고 하면?”  “한 번 속아 봐서 그런 말 절대 안 믿어요.”    여운이 다짐하듯 말했고 마루는 이번에도 씩 하고 웃었다.    “미친놈처럼 매달리면?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매달리면?”    마루는 자신이 얼마나 유치하고 인간인지, 1차원이 아니라 0.5차원적인 유치한 질문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도 여운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물었다.    “…….”    그런데 어째 이번엔 여운의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순간 마루는 긴장했고 초조하기 까지 했다.    “미친놈처럼 식음을 전폐하면서 울고불고 하면서 매달리면 받아 줄 거야?” “아뇨. 내가 뭐라고……. 연우 씨가 그렇게까지 매달릴 리가 없어요.”  “매달리면? 정말 매달리면?”  “안 만날 거예요. 절대, 절대.”    여운이 드디어 마루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고 마루는 그 어느 때보다 흐뭇하게 활짝 웃었다.    “그만 물어요, 짜증 나고 귀찮으니까. 진짜 눈치라고는……. 잘 거니까 차마루 씨도 자요.”  “계속 생각해 봤자 기분만 더 상할 뿐이니까 생각 그만하고 자.”  “알았어요.”    여운의 방을 나오려던 마루가 다시 여운을 돌아봤다.    “기여운.”  “왜요?”  “혹시 남자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차마루라고 해도 돼.”    마루의 말에 여운이 몸을 일으켜 마루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연우 어머니한테 남자 친구 있다고 거짓말했다면서. 이연우한테 말할 것 아니야. 이연우가 남자 친구 누구냐고 따지면 나라고 해도 된다고.”  “그거…… 무슨 뜻이고, 무슨 수작이에요?”    여운이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마루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작은 무슨. 국수방에서 기여운한테 실수한 게 있으니까 그 정도는 도와주겠다는 뜻이야. 손해 볼 거 없잖아.”    마루가 절대 다른 뜻은 있을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여운은 재빨리 고민했다. 차마루가 남자 친구 대역을 해 주는 것에 대해서. 고민해 보니 아주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조금은 덜 쪽팔릴 것 같았다. 그리고 연우와의 시작해 보지도 못한 관계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고.    “연우 씨가 남자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진짜 차마루 씨라고 뻥쳐도 돼요?”  “그래.”  “정말요?”  “정말이야.”  “나중에 딴소리하는 거 아니죠?”    여운이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딴소리 안 해.”  “만약 연우 씨가 차마루 씨한테 진짜 남자 친구냐고 물으면요?”  “맞는다고 해 줄게.”    마루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괜찮겠어요?  “어차피 연기잖아.”  “연기라 하더라도 질색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기부해 줄게.”  “엄청 고맙네요.”    여운이 투덜거리며 다시 자리에 눕는데 마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 친구한테 잘 자라는 인사도 안 해?”    마루의 말에 여운이 누운 채 콧방귀를 뀌었다.    “가짜 남자 친구한테 잘 자라는 인사도 해야 해요?”  “연습을 해야 할 것 아니야.”  “거참. 알았어요. 잘 자요. 아주 늘어지게 푹 주무세요.”  “알았어. 잘 자.”  “불 끄지 말아요!”  “걱정 마.”    마루가 방을 나간 후 시무룩한 얼굴로 누워 있던 여운이 갑자기 픽 웃었다.  이상하게 꽉 막히고 꽉 눌려서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 단순하다. 아메바도 아니고 가짜 남친 해 준다는 말에 기분이 풀리다니.”    한심함에 픽 웃던 여운은 웃음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풀리는 것 같던 가슴이 또다시 꽉 막히고 꽉 눌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운은 오랫동안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    한밤중, 누군가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여운은 0.1초 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0.1초 만에 두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에 손을 댄 사람의 어딘가를 온 힘을 다해 사정없이 거머잡았다.    “아! 아악!”    여운의 손에 거머잡힌 누군가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남자다! 이 죽일 놈!’    낯선 남자의 비명 소리에 여운은 더욱 거머잡고 포악하게 쥐어뜯기 시작했다. 남김없이 갈기갈기 찢어 놓을 태세로.    “누구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여운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죽여 버릴 거야! 이 쌍×의 ××! 찢어 죽이고 밟아 죽이고…… 똥물에 튀겨 죽일 거야!”    여운은 마치 악귀가 된 듯 누군가의 어딘가를 쥐고 흔들고 찧어 대며 온갖 패악을 다 부렸다.    “아악! 이거 놔! 이거 안 놔? 이거 놓으라고! 살려 줘!”    여운의 손아귀에 잡힌 누군가가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내지르는데 마루가 허겁지겁 여운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루는 지하 벙커에서 차연화 국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에 오 팀장이 여운을 깨우려다 그만 여운에게 치도곤을 당하는 장면을 모니터로 확인하고 급하게 쫓아오는 길이었다.    “기여운! 그만해!”    여운을 향해 마루가 버럭 소리쳤을 때에야 정신을 차린 여운이 일시 정지 상태로 마루를 쳐다봤다.  마루는 오 팀장이 여운의 두 다리 사이에 목이 졸리고 여운의 두 손에 머리털이 움켜잡힌 채 마치 탭 아웃을 하듯 손으로 다급하게 바닥을 내리치며 푸드덕거리는 참담한 모습을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 남자가…… 날 건드려서…….”    여운이 오 팀장이 옴짝달싹 못 하게 온몸으로 포박한 채 헐떡거리며 말하는데 마루가 재빨리 다가가서 오 팀장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있는 여운의 손을 잡았다.    “오 팀장님이야. 빨리 놔.”  “네? 누구요?”  “오 팀장님이라고.”    여운은 그제야 오 팀장이 누군지 기억난 듯 화들짝 놀라며 오 팀장의 머리털을 놓아준 후 후닥닥 오 팀장을 풀어 주고 뒤로 물러났다.    “괜찮으세요?”    마루가 잠깐 사이에 만신창이가 돼서 늘어져 있는 오 팀장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괜찮아 보이냐?”    오 팀장이 구사일생한 얼굴로 겨우 대답하는데 여운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누군지 몰라서……. 죄송해요.”  “도대체…… 정체가 뭐냐, 넌.”    오 팀장이 아직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진짜 누군지 몰랐어요. 전 도둑인 줄 알고……. 정말 죄송해요.”    진짜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던 여운은 자신의 손에 한 움큼 엉켜 있는 머리털을 보고 깜짝 놀라 오 팀장 몰래 재빨리 떨어냈다.    “일어나세요.”    마루가 오 팀장을 추슬러 일으켜 세우는데 오 팀장이 곧 죽을 듯한 신음을 길게 길게 내뱉었다.    “목이, 목이 비틀어진 것 같아…….”    오 팀장의 과한 리액션에 여운이 깜짝 놀라 오 팀장을 쳐다봤다.    “제가, 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    여운이 오 팀장을 향해 다가서는데 오 팀장이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마.”    오 팀장이 손으로 뒷목을 싸잡은 채 경고하는데 어디선가 싸늘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여운 씨.”    여운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차연화 국장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얘기 좀 할까요?”    차연화가 말했다.  여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차 국장과 오 팀장, 마루를 따라 지하 벙커로 향했다.    “오 팀장님이랑 차 국장님이 이 밤중에 왜 온 거예요?”    지하 벙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여운이 마루에게 속삭여 물었다.    “무슨 사건 났어요?”  “곧 알게 될 거야.”    마루가 왠지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지하 벙커로 들어서던 여운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지하실 모습에 한동안 벙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잡동사니들이 우글거리는, 바퀴벌레와 거미들이 우글거리고 먼지가 잔뜩 쌓인 보통의 지하실을 상상했던 터라 최첨단 기기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깨끗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벙커의 모습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앉아요.”    차연화가 어안이 벙벙한 여운에게 의자를 밀어 주자 여운은 벙커에 있는 온갖 첨단 기기들을 흘낏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여운이 앉자 차연화도 자리에 앉았고, 마루와 오 팀장은 의자가 없어서 그냥 서 있었다.    “벙커는 처음이죠?”    차연화의 물음에 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루 씨가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데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기여운 씨 만나려고 왔어요.”  “절 만나러 이 밤중에요?”  “이정민과 접촉했다죠?”  “이정민……. 아, 그 조각가 간첩요? 맞아요. 접촉, 아니 만났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내가 이정민을 접촉, 아니 만나서요? 그래서 또 내가 간첩이라고 생각해서 잡으러 온 거예요?”    여운이 발끈하자 차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운 씨한테 임무를 주기 위해서 왔어요.”  “임무……? 임무요? 나한테요?”    여운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나한테 무슨 임무를…….”    여운이 마루와 오 팀장을 쳐다보자 오 팀장은 비틀어진 목을 어루만지며 여운을 쳐다보고 있었고, 마루는 왠지 모르게 못마땅한 얼굴로 여운의 시선을 피했다.    “이정민은 간첩이 맞아요. 하지만 아직 국수방에서는 그를 검거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에요. 그리고 이왕이면 이정민뿐만 아니라 이정민과 관계된 간첩들을 한 번에 소탕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운은 차연화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국수방에서는 이정민이 접촉한 JB들의 명단을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예요. 하지만 이정민을 포함한 다른 JB들이 워낙 신출귀몰하고 꼬투리가 될 만한 흔적을 남기지 않아 검거가 쉽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 제비가 뭐예요? 무슨 암호나 간첩을 뜻하는 이니셜 뭐 그런 거예요?”  “제비가 아니라 JB예요.”  “JB? 그게 뭔데요? 엄청 중요한 뜻이 있는 거예요?”  “국수방 요원들이 간첩을 칭할 때 쓰는 은어예요. 국수방 요원들만 쓰는 은어. JB. 종북.”    차연화의 대답에 여운이 엄청나게 실망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다.    “고작 그거였어요? 종북?”    뭐 엄청나게 대단한 뜻이 담긴 건 줄 알았는데 고작 종북을 뜻하는 말이었다니.    “그런데 나한테 무슨 임무를 주겠다는 거예요?”  “차마루 요원과 부부가 아니라 여운 씨가 여기서 하숙을 하는 것으로 했다죠?”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사실 부부보다는 하숙생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구요.”  “잘했어요.”    차연화가 칭찬했고 여운은 이게 칭찬받을 일인가 하는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두 사람이 부부로 위장했다면 이정민이 여운 씨한테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하숙생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이정민이 저한테 접근을 했다구요? 이정민이 저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하세요?”  “아직까지 의도적인지 우연인지 파악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정민과 여운 씨가 접촉한 것은 사실이고, 이정민이 여운 씨한테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차마루 요원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국수방에 보고해요. 여운 씨와 관계된 일도.”  “그런 것도 보고 했다구요? 하여튼 입이 엄청 싸요.”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대놓고 흉을 봤다.    “그런데 그냥 예의상 한 얘길 수도 있어요. 그냥 립 서비스요.”  “그렇다면 그냥 립 서비스로 그치지 않게 앞으로 이정민이 여운 씨에게 접근하는 걸 피하지 말고 받아 줘요.”  “피하지 말라구요? 이정민은 간첩이잖아요! 나한테 독침을 놓거나 북한으로 납치하면 어떻게 해요?”    여운이 펄쩍 뛰며 반발하자 차연화가 피식 웃었다.    “요즘 독침 쓰는 간첩 없어요. 그리고 여운 씨는 차마루 요원이 지키고 있어서 이정민이 북한으로 납치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간첩인데……. 솔직히 무섭단 말이에요.”    여운이 진짜 무서운 얼굴로 말하자 차연화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차마루 요원이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저보고 뭘 하라는 거예요? 이정민이 접근할 때마다 피하지 말고 뭘 하라구요?”  “이정민과 친분을 쌓아요. 자연스럽게.”  “간첩과 친분을 쌓으라구요? 자연스럽게?”    여운은 이게 무슨 똥 같은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차연화를 쳐다봤다. 친분 쌓을 사람이 없어서 간첩과 친분을 쌓으라고?    “친분을 쌓은 후에 자연스럽게 이정민의 집을 방문하도록 해요.”    자연스럽게란 단어를 아무 데나 쓰다니.    “그래서요?”  “이정민 집을 방문할 때 반드시 차마루 요원과 동행하세요.”  “동행하면요?”  “나머진 차마루 요원이 알아서 할 거예요.”    여운은 차 국장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놀랍게도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못 알아들었다.  이정민이 접근할 때마다 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아 이정민의 집에 방문할 때 마루와 동행하라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누구라도,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얘기였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마루가 알아서 할 거라는 그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다.    “저기, 국장님…….”    여운이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마루가 알아서 할 거라는 나머지 일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려는데 차연화가 여운의 말을 잘랐다.    “지금부터 여운 씨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 줘야 해요.”    차연화의 말에 여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기요, 국장님 내 얘기는…….”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에요.”    차연화가 또 말을 끊자 여운이 더는 못 참고 발끈했다.    “자꾸 말 끊지 마세요!”    여운이 와락 성을 내자 마루와 오 팀장이 재빨리 차연화의 눈치를 봤다. 지금까지 차연화에게 감히 말 끊지 말라고 성을 낸 사람은 여운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뭐 어쩌겠는가. 위계질서 확실한 국수방 요원들은 당연히 차연화 국장에게 좋든 싫든 무조건 충성하겠지만 여운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민간인인 것을.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 달라구요?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간첩하고 친분을 쌓는 일이라구요?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라구요? 국가를 위해서 간첩하고 친분을 쌓으라구요? 간첩하고 사이좋게 지내서 나한테 좋은 게 뭐예요? 나 간첩이랑 친구다! 방방곡곡 자랑하라구요?”    여운이 흥분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하지만 여운의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차연화는 차분하기만 했다.    “무리한 요구라는 거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 왜 요구하세요?”  “우리 대한민국 땅에 간첩이 활보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에요.”    차연화가 말했고 여운은 차연화의 투철한 반공정신에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굉장히 번지르르하고 식상한 대답이네요.”    여운이 시큰둥하게 깐족거렸지만 차연화는 노여워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쩌죠? 이미 차마루 씨한테 다 들었거든요. 스파이 시켜 주겠다는 거 다 뻥이라면서요. 국수방에서는 훈련받지 않은 나 같은 민간인은 절대 스파이 안 시켜 준다면서요. 내가 국수방에 대해서 발설할까 봐 입막음하려고 사탕 주듯이 스파이 하라고 뻥쳤다는 거 입 싼 차마루 씨가 다 얘기 해 줬거든요?”    여운이 마루를 쳐다보자 마루가 난감한 표정으로 차연화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오 팀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진짜 입 싸네”라고 중얼거렸고 여운이 재빨리 차연화를 쳐다보자 차연화 역시 마치 표창을 뿜어낼 듯한 시선으로 마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운은 자신이 마루를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쩌겠는가, 간첩 잡는 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 대한민국 땅에 이정민을 비롯해서 간첩들이 활보하지 못하도록 국수방에서 알아서 싸그리 붙잡도록 하세요. 난 이런 무서운 작전에는 눈곱만큼도, 코딱지만큼도 끼고 싶지 않아요.”    여운이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차연화는 여운의 거절을 못 알아들은 척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기여운의 거절 따위는 받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차마루 요원에게 요구해요.”  “서울로 도망갈 차비가 필요해요. 지금 당장 줘요!”    여운이 마루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자 차연화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은 후 일어났다.    “여운 씨가 해야 할 행동 요령은 차마루 요원이 자세하게 설명해 줄 거예요.”  “저기요, 난 하겠다고 한 적 없어요. 절대 안 할 거예요!”    여운이 할 생각 없으니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뜻으로 말했지만 차연화는 여전히 차분했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요. 다음에 또 만납시다.”  “난 절대 간첩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을 거구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망갈 거예요.”    차연화가 꿈쩍하지 않자 여운이 다시 한 번 쇄기를 박듯 명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차연화는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싸늘한 차분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벙커를 나가기 위해 움직였고, 오 팀장도 차연화를 뒤따랐다. 차연화와 오 팀장을 배웅하기 위해 나서던 마루가 걸음을 멈추고 여운을 바라봤다.    “같이 나가.”  “싫거든요? 난 엄청 있어 보이는 이 방에 계속 있을 거예요. 국장님이 가든지 말든지.”    여운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벙커 위로 올라온 마루는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 차연화 국장을 붙잡았다.    “국장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기여운 씨는 민간인입니다. 민간인을 작전에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마루가 항의했지만 차연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아시면서 왜 이런 위험한 작전을 하시는 겁니까?”  “이정민 일당을 검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기 때문이라는 거 차마루 요원도 잘 알잖아.”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여운 씨는 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입니다.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해서 기여운의 신분이 적들에게 노출이 되거나 최악의 상황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반드시 기여운과 동행하라는 거야. 책임지고 기여운의 목숨을 지켜.”  “국장님.”  “명령이야. 알겠나, 차마루 요원? 이정민 검거도 중요해. 명령이야.”  “…… 알겠습니다.”    명령이라는데 별수 없었다.    “기여운이 이 작전에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차마루 요원이 잘 설득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을 숙지시키도록 해요. 다시없을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차연화 국장이 먼저 대문 밖으로 나가고 나자 얼굴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진 마루의 어깨를 오 팀장이 다독였다.    “국장님한테 서운해할 것 없어. 이번 작전 국장님 작품 아니야.”  “그럼요?”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국장님도 이번 작전에 기여운을 이용하는 게 마땅치 않아서 국장님 선에서 막아 보려고 애를 썼는데 소용없었어. 어쩌겠냐? 국장님도 막지 못한 작전인데. 이왕 시작된 작전이니까 어떻게든 성공시켜야지. 판이 커져서 너 혼자선 역부족이라 요원들을 이곳에 더 배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요원들이 더 내려왔다가 이정민이 눈치채면요?”  “그래서 연구 중이라고. 그건 그렇고, 기여운이 그냥 민간인은 아니다. 무슨 민간인이 저렇게 억센지. 절대 그냥 민간인은 아니야. 억센 민간인한테 설명 잘해. 암만 설명 잘해도 씨도 안 먹힐 것 같지만…… 어쩌겠냐. 간첩은 잡아야 할 것 아니야. 고생해라. 간다.”    오 팀장이 마루에게 손을 들어 보인 후 대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벙커로 돌아오던 마루는 여운의 죽일 듯한 도끼눈에 흠칫 놀랐다. 여운의 눈은 못 죽여 안달 난 눈, 살기 가득한 눈, 딱 처키 마누라 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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