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고 긴 얘기 다 들어 줄 수 있을 만큼 시간 많다고요.” ‘간첩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고 끈질긴 거야?’ “그게…… 차마루 씨하고 얽힌 얘기를 하려면 내가 사기당한 그 시점부터 다 얘기해야 하는 데, 솔직히 떠벌리기 쪽팔린 얘기라서…….” 여운은 다시 한 번 간첩과는 길게 말 섞기 싫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지만 정민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우아하게 여운의 피를 쪽쪽 빨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긴걸요.” 정민이 말했고 여운은 우아한 거머리 정민에게 붙들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을에 소문이 다 났을 테니까 당연히 아시겠죠. 그런데 지금 파출소에 가 봐야 해서요. 도둑의 흔적을 찾았는지 알아보려구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선생님.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운이 인사를 하고 재빨리 정민에게서 벗어나려는데 정민이 여운을 쫓아왔다. “나도 읍내에 나가던 길인데 내가 모셔다 드릴게요.” ‘미쳤냐! 내가 간첩 차를 타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절대 그러실 필요 없어요. 버스 타면 돼요.” “그러지 말고 타세요.” 정민이 친절하게 보조석 문까지 열어 주었다. ‘저 차를 타면 북한에 끌려갈지도 몰라. 아오지 탄광 막 이런 곳으로…….’ 여운은 다소 멍청할 만큼 겁을 먹은 얼굴로 정민과 정민의 차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 오늘 처음 뵀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인데…… 태워 준다고 날름 타고 그러는 거…… 되게 푼수 같은 짓이라서요. 내가 전 재산 털리고 도둑맞고 그러긴 했지만 푼수는 아니거든요.” “푼수라니요. 절대 아니에요. 어차피 읍내에 가는 길이니까 모셔다 드린다는 거죠. 이장님이나 차마루 씨 때문에 상처를 받으셔서 인정이 없다고 하시는데, 사실 시골 분들 인정 많아요. 이장님도 차마루 씨도.” 정민이 아주 기술적인 친절로 여운을 설득, 아니 꼬드겼다. “물론 인정 많은 분들도 계시겠죠…….”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타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어떻게 하지? 끝까지 거절해? 만약 더 거절하면…… 나한테 독침을 쏠지도 몰라.’ 여운은 간첩을 처음 마주친 나머지 도저히 이성적인 상황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독침이라는 엉뚱한 두려움까지 느낀 것이다. ‘어쩔 수 없어.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 했으니까…….’ 더는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여운은 정민의 차를 얻어 타기로 결심했다. “내가…… 좀 푼수긴 해요. 그러니까 그냥 날름 얻어 탈까요?” ‘내가 미친 거야.’ “날름 얻어 타요.” 정민의 말에 여운은 어쩔 수 없이 마치 저승으로 가는 차에 올라타는 듯한 표정으로 정민의 차를 탔고, 정민은 여운의 보조석 문을 닫아 준 후 운전석에 올라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차마루 씨를 잘 아세요?” 여운이 긴장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정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민이 마루에 대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면서 가면서 인사만 해요. 아직 많이 친해지지는 않았어요.” “그렇구나…….” “차마루 씨하고 알게 된 복잡하고 길다는 얘기 해 줄래요?” “그게…….” 여운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지만 절대 안 무서운 척하려고 애쓰며 정민에게 차마루를 만나던 순간부터 마루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복잡하고 긴 얘기를 하며 읍내로 향하던 그때, 마루는 지하 벙커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운이 이정민과 접촉하는 순간부터 여운이 이정민의 차에 올라 함께 떠나는 것을 바라보던 마루는 국수방에 즉시 보고했다. 제5그린벨트 [기여운 이정민 접촉.] 10장 “그렇게 된 거예요.” 여운은 차마루와 엮이면서 결국 하숙까지 하게 된 그동안의 일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내고 난 후 정민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엔 이정민이 간첩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별것 아닌 것처럼 간략하게 간추린 줄거리만 말할 작정이었는데 한 마디 두 마디 설명을 하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 열불이 뻗쳤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정민이 간첩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정민이 간첩이라는 것을 잊은 그 순간부터 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원래 성격대로 속사포처럼 쏟아 냈고 간추린 줄거리가 아니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은 대하드라마가 돼 버린 것이다. ‘어머나! 이 사람 간첩이었지!’ 그간의 사연을 길고 길게 다 설명한 후에야 여운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국수방에 끌려갔다 온 얘기는 완벽하게 감췄다. 마루의 신분도 물론이고. 하지만 상대는 간첩인데 너무 많은 정보를 까발린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솔직히 정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미쳤어. 간첩한테 별소리를 다 해 버렸네. 하여튼 이 푼수.’ “너무…… 수다스러웠죠?” “전혀 아니에요. 좀 놀랐어요.” 정민이 특유의 고운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왜 놀라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수 있을까 해서요?” “아뇨, 아뇨. 진짜 빨리 얘기하는데 진짜 잘 알아듣게 말하는 것 때문에요. 굉장한 기술이에요.” “내가 좀 그렇죠? 버릇이 돼서 그런가 봐요. 오만 가지 일을 다 해 보고 오만 사람을 다 만나다 보니 말이 엄청 빨라졌어요.” “오만 가지 일?” “고생을 좀…… 많이 했거든요.” “고생을 했다고요? 곱게 자랐을 것 같은데.” 정민의 말에 여운이 놀란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곱게 자랐을 것 같다구요? 정말요?” 곱게 자랐을 것 같다는 정민의 말에 여운은 또다시 순간적으로 정민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말았다. “정말 곱게 자란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오만 가지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일도 안 하고 곱게, 예쁘게 자란 것 같아요.” “에이, 뻥치지 말아요.” 뻥치지 말라는 말에 정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뻥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여운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서 씩 웃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여운 씨 낯이 많이 익은데…… 우리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정민의 말에, 아니 수작에 여운은 퍼뜩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만난 적 절대 없다는 표정으로 정민을 쳐다봤다. ‘내가 간첩을 왜 만나니?’ “만난 적 없어요.” 여운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여운은 눈썰미가 워낙 좋은 편이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면 적어도 10년간은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민은 전혀 기억 속에 없었다. 그러니까 정민은 몇 마디라도 대화를 나눈 적이 절대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 없을까요? 진짜 낯이 익은데…….” 가장 재미없고 창의적이지 못한 접근이 낯이 익다, 만난 적 있지 않냐는 말로 접근하는 거라는데, 여운은 설마 정민이, 간첩이 뻔한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흘낏 정민을 쳐다봤다. 아주 깨끗하고 세련된, 딱 귀공자 스타일. 금수저 물고 태어나 지금도 금수저만 쓰고 살 것 같은 이미지. 고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해 보지 않았을 것처럼 선 곱게 생긴 남자. 간첩이라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는 남자. 그런 남자가, 아니 그런 간첩이 설마하니 쌍팔년도에나 써먹던 후진 수법으로 별로 볼 것 없는 여자에게 접근을 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나한테 수작을 거는 게 아니라면 뭐지? 설마 간첩으로 포섭하려고? 그래서 북한에 끌고 가려고? 절대 안 되지. 절대! 기여운, 정신 바짝 차려!’ 여운은 정민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결코 포섭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차마루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정민이 여운에게 물었다. “나보다 더 잘 아실 것 아니에요.” “같은 마을에 살지만 별로 만날 일이 없었거든요. 왕래도 전혀 없었고.” “차마루 씨는…… 진짜 까칠해요.” 여운이 일부러 마루의 흉을 보자 정민이 픽 웃었다. “여운 씨한테 까칠하게 굴어요?” “얼마나 까칠한지 몰라요. 진짜 인정머리도 없고…….” “까다로운 하숙집 주인인가 봐요.” “첫 만남부터 좀 안 좋았던 바람에 계속 그러네요.” “까칠하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상처가 있어서…….” “상처요? 무슨 상처요?” 여운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간첩이 차마루 씨의 상처를 알고 있다? 뭐지? 이정민이 차마루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 아니야? 간첩한테 신상을 다 털린 거야?’ “이런 내가 말실수 했네요.” 정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루 씨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남의 얘기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거 아닌데……. 내가 실수했어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정민에게 눈을 흘기자 정민이 또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요?” “이정민 선생님이 ‘남의 얘기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거 아닌데’라고 말씀하시면 차마루 씨 까칠하다고 흉본 나는 뭐가 되겠어요?” 여운이 순간적으로 또 정민이 간첩이라는 것을 잊고 원래 성격대로 당당하게 따지자 정민이 당황한 얼굴로 웃었다.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이런, 여운 씨한테도 실수를 했네요. 미안해요.” “미안하라고 한 얘긴 아니지만…… 용서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차마루 씨한테 무슨 상처가 있는지 얘기해 주세요.” 여운이 재촉했지만 정민은 계속 망설였다. “차마루 씨 얘기를 하면 나 실없는 사람 돼요.” “난 이미 실없는 사람이니까 같이 실없는 사람 좀 돼 주면 안 돼요?” 여운이 우겼고 정민은 또다시 난처한 얼굴로 여운을 흘낏 쳐다봤다. “알겠어요. 나만 실없는 사람 할게요.” 여운이 삐친 척을 하자 정민이 고민하다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절대 나한테 들었다거나 차마루 씨한테 알은척 안 할 거죠?” “안 할게요. 내가 수다스럽긴 하지만 약속한 건 절대적으로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그렇다면……. 나도 이장님한테 들은 얘긴데……, 차마루 씨 지금 살고 있는 집 있죠? 여운 씨 하숙하는 집.” “네.” “원래 차마루 씨 어머니 댁이었대요.” 정민의 말에 여운이 김샌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차마루 씨 집이 원래 차마루 씨 어머니 집이었다는 게 비밀이에요? 그게 무슨 상처예요? 집을 물려받았으면 복 터진 거죠. 뭐 다른 형제들보다 적게 물려받았다, 그래서 상처다 그런 말이에요? 어이그, 별게 다 상처고 배부른 소리네요. 전 재산 까먹은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여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민이 낮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어머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어머니인 줄 알고 살았대요.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친부모님이고.” 정민의 말에 여운은 그제야 뭔가 상처받을 만한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식상한 레퍼토리였다. 이놈의 출생의 비밀은 왜 이다지도 흔해 빠졌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시큰둥해하면서도 이상하게 정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작은어머니 돌아가셨다는 얘기 들었는데도 그때 해외 출장 중이라 장례식에 참석을 못 했대요. 부모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장례식에는 참석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결국 참석을 못 했는데, 장례식 끝나고 출장에서 돌아오고 나니 부모님께서 그제야 털어놓으셨대요. 돌아가신 작은어머니가 진짜 친어머니라고.” 정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운은 역시 뻔한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했던 게 그 때문이라고……, 지금이라도 산소에 가서 인사하라고. 친어머니께서 차마루 씨 앞으로 살던 집과 밭 몇 마지기를 남기셨다고. 아들이니까, 친아들이니까. 차마루 씨가 이 마을에 내려온 게 그때였어요. 작은어머니가 친어머니라는 걸 알게 됐던 그때.” “그랬군요……. 그런데 친부모님이 왜 그때까지 말씀을 안 하셨을까요?” “글쎄……. 차마루 씨나 차마루 씨 가족들에게나 서로를 위해서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셨겠죠.” “나라면……, 내가 차마루 씨라면…… 굉장히 어이없고, 슬프고, 속상하고…… 화가 났을 것 같아요.” 식상하고 뻔한 출생의 비밀인 것은 틀림없는데 여운은 어느새 마루의 얘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장님 설명으로는 원래 차마루 씨 일가는 이 마을 분이셨대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굉장히 오래전부터요. 큰아버지, 그러니까 법적으로 차마루 씨 아버지도 당연히 이 마을 출신이신데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서울에서 결혼도 하고 아예 서울에서 살게 됐고, 차마루 씨의 친아버지는 돌아가신 작은어머니, 아니 친어머니와 이곳에서 결혼하고 차마루 씨도 낳았대요. 차마루 씨가 아주 어렸을 때 차마루 씨 친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게 됐는데 그때 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가 차마루 씨를 키우게 됐대요. 그땐 차마루 씨의 할아버님과 할머님도 살아 계셨다는데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고, 또 혹시나 재혼을 생각했을 때도 자식이 없는 편이 좋고 큰아버지 댁에도 아이가 없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겠죠. 물론 차마루 씨의 친어머니는 끝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시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정성스럽게 모시다가 홀로 돌아가셨고요. 작은어머니가 친어머니라는 것도 모르고 친아들인데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차마루 씨 가슴에 깊은 상처가 생겼을 거예요. 이장님 말씀으론 차마루 씨가 이 마을에 내려오고 나서 한동안은 마을 사람들과 인사도 하지 않고 여운 씨 말대로 무척 까칠하게 굴어서 어르신들이 꼴 보기 싫어했다고 하더라고요……. 친어머니인 줄 몰랐다 하더라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도 굉장히 괘씸해하시고……. 그러다가 산소에서 고통스럽게 울고 있는 차마루 씨를 어르신들이 몇 번 보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풀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정민의 설명이 끝나자 여운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루의 아픔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들었다는 거 절대 비밀이에요.” 정민이 극비에 대해 말했지만 여운은 마루의 흔해 빠진 출생의 비밀을 생각하느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여운 씨?” “네?” 여운은 그제야 정민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 해요?” “아니 뭐…… 별것 아니에요. 뭐라고 했어요?” “나한테 들었다는 거 절대 비밀이라고요.” “당연하죠. 걱정 마세요. 나도 안 들은 걸로 할게요. 내가 차마루 씨 흉본 거랑 퉁 쳐요.” 여운이 비밀을 꼭 지키겠다는 뜻으로 새끼손가락을 까딱이자 정민은 믿는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떤 거 조각하세요?” “어떤 거냐면…… 설명하기 복잡하니까 집에 놀러 와요. 보여 줄게요.” 놀라 오라는 정민에 말에 여운은 화들짝 놀랐다. ‘집에 놀러 오라고? 간첩 집에? 뭔 짓 하려고?’ “정말 놀러 가도…… 돼요?” 여운은 절대 이정민 집에 놀러 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예의상 물었다. “그럼요. 내 작업실은 늘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놀러 와요. 차마루 씨하고 같이.” 정민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파출소 앞에 차를 세운 정민은 매너 있게 차에서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여운은 정민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잘 가요, 여운 씨.” 정민도 친절하게 인사했다. 여운이 돌아서던 그때 정민은 재빨리 여운의 핸드백 끈을 살짝 잡아당겨 여운이 핸드백을 바닥에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어머나.” 여운이 놀라며 핸드백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데 정민이 더 빨랐다. “갑자기 핸드백이 왜 떨어졌지?” 정민은 핸드백을 들어 여운에게 건넸다. 정민은 여운에게 핸드백을 건넬 때 이미 핸드백 끈 안쪽에 도청기를 부착했다. 아무도 모르게.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안녕히 가세요.” “여운 씨두요. 도둑 꼭 잡길 바라요.” “네!” 여운은 정민에게 씩씩하게 대답한 후 파출소로 들어갔고, 정민은 차를 몰고 파출소를 떠났다. * 여운이 파출소 안으로 들어서자 소장이 여운을 알아보고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연우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고개를 든 연우가 소장의 눈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여운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여운 씨.” “연우 씨. 안녕하세요, 소장님.” “어서 오소.” 소장도 여운을 반겨 주었다. 연우는 헐레벌떡 여운에게 다가오긴 했지만 불쑥 쑥스럽기도 하고 너무 반갑기도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바라보기만 했다. “연우 씨, 잘 지냈어요?” “예, 여운 씨는요?” “나도 잘 지냈어요.” 여운과 연우가 어색하지만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인사를 주고받은 후 또다시 서로 바라보기만 하자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소장이 다가오더니 여운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 “서울로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지. 기여운도 없지, 차마루도 없지, 어느 날 갑자기 두 사람이 감쪽같이 없어지가 이 친구는 기여운 씨가 차마루하고 바람이 나서 토낀 줄 알고 잠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며…….” “소장님!” 연우가 버럭 소리치며 소장의 말을 중간에 자르자 소장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소장님은 내가 언제 식음을 전폐했다꼬……. 농담도 참…….” 연우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장의 말을 어떻게든 농담으로 돌리려 했지만 여운은 이미 눈치를 채 버려서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연락도 없이 서울로 가 버려서 미안해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뭘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요?” 연우가 아니라 소장이 물었는데 연우 역시 대답을 꼭 듣고 싶은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대답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대답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국수방 얘긴 하면 안 돼…….’ “서울에서…… 부동산 사기 친 채 실장 잡았다고 확인하라고 연락이 와서요. 그래서 새벽에 부랴부랴…….” 여운은 거짓말을 하려니 참 갑갑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 사기꾼 잡았네! 돈은 찾았는교?” 연우도 참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고 소장도 잘됐다는 듯이 물었다. “아뇨.” “와? 벌써 다 쓰고 없던교?” “아뇨. 못 잡았어요.” “못 잡아? 잡았다고 확인하라 했다면서요.” “가 보니까 그 채 실장 놈이 아니더라구요.” “아이라? 엉뚱한 놈을 잡았는갑네.” “그렇죠. 그거죠. 그래서 다시 내려왔어요. 도둑이라도 잡을까 하고…….” “시간이 걸려도 잡을 겁니더. 사기꾼 쉐끼요.” 연우가 따뜻함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위로했고, 여운은 고마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도둑의 흔적을 찾은 것 같다고 했죠?” “예. 마을 입구에 있는 감시 카메라에 낯선 승합차가 마을로 드갔다가 나가는 장면이 잡혔어요. 두 번이나.” “두 번요? 내가 좀 볼 수 있을까요?” 여운의 물음에 연우가 소장에게 허락을 구하는 듯 쳐다보자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연우가 여운을 데리고 파출소 안에 있는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굉장히 비좁고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는 너저분한 방이었다. 그래서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오히려 엉뚱해 보일 정도였다. “방이 좀 글치요? 파출소가 워낙 좁고 창고도 없어가…….” “괜찮아요.” “잠깐만요.” 연우가 컴퓨터를 조작해 연우가 확보한 감시 카메라 화면을 보여 주었다. “날짜를 보마 알겠지만 여운 씨가 이삿짐을 도둑맞은 날 새벽 3시예요.” 여운은 연우의 설명을 들으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차체는 물론이고 유리창까지 온통 까만색으로 뒤집어쓴 승합차가 마을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기 마을로 들어가는 장면이고……, 이기 나오는 장면이에요.” 연우가 다시 컴퓨터를 조작해 시간을 설정하자 마을로 들어갔던 까만 승합차만 마을을 빠져나와 사라졌다. “그리고 이거는…….” 연우가 다시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새로운 화면을 모니터에 띄웠다. “여운 씨가 이삿짐을 도둑맞던 날 등장했던 승합차가 다시 등장했는데, 1주일 전이에요.” “1주일 전이면…… 내가 서울로 갔던 날이네요?” 여운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묻자 연우가 “맞아요” 하고 대답했다. “이날 승합차가 다시 마을로 들어갔다가 7분 후에 마을을 빠져나갔어요.” “혹시…… 이 승합차……, 마을 분들 중에 보신 분 없대요?” 여운의 물음에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워낙 깊은 새벽이라……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어가 답답하더라고요.” 연우에겐 답답할지 몰라도 여운과 마루에겐 다행이었다. “그란데 이 승합차가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는 알아냈어요.” “어떻게요?” 여운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고속도로 감시 카메라를 샅샅이 뒤짔거든요. 서울로 간 게 틀림없어요.” “서, 서울로요? 서울 도둑이 여기까지 왔다구요?”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것까지 확인했어요. 지금 서울 경찰청에 협조 요청 해 뒀고요.” ‘안 그래도 되는데…… 너무 열과 성을 다해서 큰일 났네.’ “그런데 아무래도 대포 차 같아요.” “대포 차요?” “차 번호가 조회가 안 되는 번호예요……. 가짜 번호판을 단 것 같아요.” “가짜 번호판을 달고 서울에서 시골까지 도둑질을 하러 다닌다니……. 참…… 이상한 서울도둑놈들이네요.” “서울 경찰청에서 협조를 해 주면 금방 잡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 그러게요. 금방…… 잡힐 것 같네요.” ‘금방 잡힐 리도 없고…… 잡아서도 안 되고……’ 믿음직한 미소를 짓는 연우와는 달리 여운은 어쩐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잠깐! 연우와 여운은 파출소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서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군가는 바로 조각가 이정민이었다. “얼마나…… 있을 거예요? 여기에…….” 연우가 약간 초조함과 간절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물었다.
“좀 오래 있으려구요. 그러니까…… 도둑 잡을 때까지.” “그래요?” 연우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그라모 천천히 잡아야겠네요.” “네?” “아니, 아니……, 농담이에요.” 연우가 너털웃음을 웃었고 여운도 푹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읍내 여인숙이나 여관이나 그런 데서…….” “차마루 씨 집에 있어요.” “예?” 차마루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너털웃음을 웃던 연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차마루 씨 집에서 하숙하기로 했어요.” “차마루 씨…… 집에서요? 와요?” “달리 아는 곳이 없어서요.”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어요.” 연우가 서운하면서도 약간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그냥…… 이삿짐 도둑맞은 곳이 차마루 씨 집 근처니까 혹시 도둑을 잡을지도 모르잖아요.” “도둑은 내가 잡아요.” 연우가 계속해서 서운하면서도 화가 난 투로 말했고, 여운은 안절부절못하며 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연우 씨, 혹시…… 저녁에 시간 되세요?” “시간…… 와요?” “근무해요?” “아니요.” “그럼 나하고 저녁 먹을래요?” “저녁요?” 연우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지난번에 진짜 맛있는 국밥 사 준 거 갚으려구요.” “갚으라고 국밥 산 거 아닌데요.” “갚고 싶어요. 같이 저녁 먹어요. 싫어요?” “싫다니요. 좋아요.” 연우가 화가 완전히 풀린 얼굴로 해맑게 대답했다. “그럼 저녁에 6시에 다시 만날까요?” “그래요.” “그럼…… 나가요.” 연우의 기분이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여운이 그만 철제 의자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잃고 휘청하며 쓰러지는 찰나 연우가 재빨리 여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붙잡았다. 연우가 여운을 붙잡는 순간 여운 역시 자동 반사적으로 연우를 꼭 끌어안아 버렸다. 5초가량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떨어졌다. 연우 덕분에 볼썽사나운 꼬라박힘을 면하긴 했지만 외간 남자와 막 끌어안고 그랬다 보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연우 역시 쑥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쑥스러울 뿐 아니라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꼬라박히지 않게 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덥석 껴안고 말았는데 품 안으로 와락 안겨 오는 느낌이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넘어질 뻔해서…….” “그러니까요. 넘어질 것 같아서…….” 여운과 연우는 너무 쑥스러워 서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웅얼거리다가 모니터 방을 나왔다. “그럼…… 저녁에 6시까지 올게요.” “기다릴게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끝까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연우와 헤어져 부리나케 버스 정류장으로 와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 여운은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괜스레 히죽히죽 웃어 댔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설렘인지. 넘어질 뻔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연우의 품에 안겼던 그때를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리플레이했는데 그때마다 괜스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정말 뭔가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잘될 것 같은 분홍분홍한 기분이랄까? 여운은 핸드백을 뒤져 콤팩트를 꺼내 뚜껑을 연 다음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봤다. “화장 조금 할걸…….”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꾸미고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집에 가면 좀 찍어 발라야겠어.” 여운이 작은 거울에 연신 얼굴을 비춰 보는데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할머니 몇 분이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버스에 올랐다. 여운을 지나쳐 자리를 찾아가던 할머니들 중 한 분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짐으로 여운이 무릎에 올려놓았던 핸드백을 치는 바람에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아이고, 미안하데이.” “괜찮아요.” 여운은 웃는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핸드백을 주워 무릎에 올려놓고 끈을 어깨에 메는데 손에 뭔가가 만져졌다. 여운은 손에 만져지는 게 뭘까 생각하며 핸드백 끈을 뒤집어 쳐다봤다. 끈 안쪽, 그러니까 핸드백과 끈을 연결하는 고리 근처 깊숙한 곳에 콩알만 한 무엇인가가 붙어 있었다. 도청기였다. 물론 여운은 그것이 도청기라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뭐지?” 여운은 콩알만 한 도청기를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여운은 아무도 모르게 도청을 하고 있던 이정민이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음에 고막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헤드폰을 벗어 버린 줄도 모르고 연신 손톱으로 긁어 댔다. 그렇게 긁어 대다 기어이 도청기를 떼어 낸 여운은 버스 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도 모르게 퉁 하고 퉁겨서 버려 버렸다. 여운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척 딴청을 부리다가 마을 정류소에 내렸고, 이정민이 여운의 핸드백에 심었던 도청기는 버스를 타고 멀리 떠났다. * 마루의 집으로 돌아온 여운은 국수방에서 챙겨 온 옷가방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연우와의 저녁 데이트 때 입을 옷을 찾기 위해서였다. 여운이 찾는 옷은 원피스였는데, 여운이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옷이었다. 한 달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문 버튼을 눌러 구입한 무려 6만 9천 원짜리 원피스. “있다!” 여운은 살 떨리게 비싼 원피스를 가방에서 찾아낸 후 원피스에 걸칠 카디건도 찾았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아무렇게나 가방 안에 찌그러져 있었던 탓에 말도 못하게 구겨져 있어서 이대로는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차마루 씨! 차마루 씨!” 밖으로 나온 여운이 툇마루에서 외쳐 부르자 지하 벙커에 있던 마루가 올라와 소리도 없이 여운의 등 뒤로 접근했다. “왜?”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마루 때문에 여운이 깜짝 놀라 돌아서다가 하마터면 툇마루 아래로 떨어지려 하는데 마루가 재빨리 여운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불렀잖아. 그래서 나온 거야.” “기척이라도 내고 나타날 것이지……, 떨어질 뻔 했잖아요.” “떨어지지 않게 붙잡았잖아.” 이 두 사람은 만났다 하면 티격태격이었다. “왜 불렀어?” “다리미 좀 빌려 줘요.” “다리미는 왜?” “옷 다리게요. 저녁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옷이 너무 구겨졌어요.” “저녁 약속? 누구하고?” “이연우 씨하구요.” “이연우하고 저녁 약속이 있다고?” “지난번에 국밥 얻어먹은 게 있어서 이번에 갚기로 했어요.” “국밥 먹으러 가는데 아무거나 입으면 되지, 뭘 다림질까지 하고 그래?” 마루가 시큰둥하게 굴자 여운이 마루를 노려봤다. “아무거나가 아니라 완전 쫙 뻗쳐 입고 갈 거라서 다리미가 필요하거든요?” “국밥 먹는데 쫙 뻗쳐 입고 간다고? 뭘 얼마나 뻗쳐 입을 건데?” “뭘 얼마나 뻗쳐 입건 상관하지 말고 다리미 빌려 줘요.” 여운이 재촉하자 마루가 못마땅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보다가 방에서 다리미를 갖고 나와 건넸다. “분무기 있어요?” “어딘가 있을 거야. 어딘지는 모르니까 직접 찾아.” 비협조적인 마루 때문에 여운은 직접 싱크대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져 분무기를 찾아내 물을 담은 후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 옷을 다리기 시작했다. 비싼 옷 잘못 다렸다가 상할까 걱정돼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원피스 위에 손수건을 덧대 낮은 온도로 조심조심 다리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라는 아주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지키지 않는 남자 같으니라고. “어떻게 됐어?” “뭐가요?” “이삿짐 도둑 말이야.” “아 참!” 여운이 생각난 듯 재빨리 다리미 전원을 끄고 일어나 마루 곁으로 와서 쓸데없이 은밀한 표정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를 국수방으로 납치해 갔던 승합차 있죠? 장례차처럼 새까만 차. 그게 마을 입구에 있는 카메라에 잡혔어요. 이삿짐 훔치러 왔을 때도 잡히고 나 납치했을 때도 잡히고. 그리고 연우 씨가 국수방 승합차가 서울로 간 것도 알아내서 서울 경찰청에 협조 부탁했대요. 어떻게 해요? 연우 씨가 국수방의 정체를 알아내면?” 여운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마루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연우가 국수방의 정체를 알아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우 씨가 어디서 지내냐고 물어서 할 수 없이 차마루 씨 집에서 하숙한다고 거짓말했어요. 국수방 스파이 이런 거 얘기할 수가 없어서요. 잘했죠? 부부로 위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지 않아요?” “또?” “없어요. 그게 끝이에요.” 알려 줘야 할 정보는 다 알려 줬다고 생각하면서 앉으려던 여운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차마루 씨.” 여운이 눈동자가 쏟아 내릴 듯 과장되게 두 눈을 부릅뜨고 마루를 쳐다봤다. “왜?”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 “진짜 겁나 큰일이에요.” “뭔데?” “내가, 내가…… 마침내, 기어이, 드디어!” 여운이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듯 없는 침까지 끌어 모아 꿀꺽 삼키며 한 템포 쉬었다. “간첩을 만났어요.” 여운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지만 강한 어조로 속삭인 후 손을 가슴에 대고 긴 숨을 내쉬었다. “간첩?” “그 사람요. 조각가 이정민 선생님요.” “이정민 선생님?” 난데없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마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 맞죠? 내가 사기당한 집에 사는 사람. 이장님이 그러는데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라면서요?” “억수로 유명하진 않아.” 마루가 유명한 사람 다 얼어 죽은 모양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어. 하여튼 이장님 설레발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여튼 그 사람 간첩 맞죠?”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만났어요. 연우 씨 만나러 가는 길에요. 내가 사기당한 거 이장님이 떠벌려서 다 알고 있더라구요. 처음엔 간첩인 줄 몰랐는데 이정민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면서 차마루 씨가 간첩이라 했던 말이 딱 생각이 나는 순간 소름이 쫙…….” 여운이 처음 정민과 마주쳤을 때가 생각나자 또다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닭살 오른 팔을 손으로 마구 문질러 댔다. “그래서 그냥 인사만 하고 빨리 도망가려고 했는데……. 몇 번이나 싫다고 하는데도 읍내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할 수 없이 간첩 차를 얻어 탔어요.” “이정민 차를 탔다고? 그놈 차를 왜 타? 미쳤어? 그놈이 간첩인 줄 알면서도 차를 탔다고?” 마루가 고함을 치자 여운이 움찔했다. “나도 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몇 번이나 거절을 했는데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탄 거예요.” “끝까지 거절했어야지!” “끝까지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구요!” “그래서, 이정민이 뭐래?” “그냥 뭐 차마루 씨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해서 모든 일은 채 실장 놈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대략적으로 아주 간단하게 간추려서 설명했죠.” 여운은 마루가 펄펄 뛰어 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대하서사극으로 만들어 떠벌렸던 설명을 간단하게 간추려 설명했다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이정민 선생님한테도…….” “선생님이란 말 하지 마, 간첩한테!” 마루가 버럭 소리쳤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 간첩한테…….” “간첩이라는 말도 하지 마! 실수하면 어쩌려고 그래?” 마루가 또 버럭 소리치자 여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 조각가한테도 여기서 하숙한다고 말했어요. 됐죠?” “그리고 뭐래?” “조각 작품 구경하러 차마루 씨하고 같이 놀러 오라 했어요.” “간첩 집에 놀러 가겠다고? 제정신이야?” “절대 안 갈 거니까 걱정 말아요!” 여운이 마루에게 버럭 소리친 후 자리에 앉아 멈췄던 다림질을 다시 시작하는데 마루가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여운이 다림질하고 있는 옷을 살펴봤다. 원피스였다. 싸구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비싸 보이지도 않는 그냥 그런 시장표 원피스. 그냥 그런 시장표 원피스인데 마루는 원피스를 보자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정민과 여운이 만난 것 때문에 기분 나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는 것인지 다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상하게 진짜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마루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원피스를 노려보고 있자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여운이 고개를 들어 마루를 쳐다봤다. “왜 안 나가요? 할 얘기 더 있어요?” “이정민하고 또 무슨 얘기 했어?” “더는 없어요.” 여운은 이정민이 마루의 상처에 대해 말해 준 것은 절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 되도록 끝까지. “나중에 간첩하고 모의했다는 누명 쓰고 싶지 않으면 숨기지 말고 다 말해야 해.” “모의는 무슨! 내가 사기를 당해서 이 마을에 떨어지게 된 순간부터 하숙을 하게 된 얘기만 대충 해 줬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런 얘길 이정민한테 왜 해?” 마루가 버럭 화를 냈다. “나라고 하고 싶어서 했겠어요? 완전 기술적으로 물고 늘어져서 나도 모르게 그냥 말려 버린 거예요.” “기술적으로 물고 늘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그냥 말려 버린 게 아니라 이정민 얼굴에 정신이 나가서 술술 다 불어 버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맹세할 수 있어?” “솔직히…… 잘생기긴 했더라구요. 간첩하기에 아까울 만큼.” 여운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이정민이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 “간첩하기에 아까울 정도는 아니거든?” 마루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 “뭐예요? 이정민 미모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내가 훨씬 낫거든?” 마루의 당당한 대꾸에 여운이 어이없다는 비웃었다. “그건 그렇죠. 솔직히 이장님보다는 훨씬 나아요.” “어디 이장님하고 비교를!” 마루가 자존심 상한 듯 눈을 부라렸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여운은 정성을 다해 다림질을 했다. “언제 들어올 거야?” “저녁 먹고…… 차 마시고…… 가는 시간 오는 시간이 있으니까 11시쯤?” 11시라는 말에 마루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튀었다. 11시라니. 밤 11시라니! 둘이서 무슨 짓을 하려고! 야심한 밤 11시까지 대체 무슨 야시시한 짓을 하려고! “통금 시간 9시까지야.” “통금? 언제부터 통금이 있었어요?” 여운이 기막힌 얼굴로 물었다. “기여운이 내 집을 하숙집으로 만드는 순간부터. 9시에서 1초라도 늦으면 대문 잠가 버릴 테니까 시간 잘 맞춰 와.” 마루가 잔뜩 심술 난 얼굴로 말하고 방을 나왔다. “6시에 만나서 9시까지는 힘들어요. 가는 시간, 오는 시간, 저녁 먹고 차 마시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돌아와야 한단 말이에요. 제대로 대화도 못 하는 시간이에요.” 여운이 마루를 쫓아 나오며 항의했다. “밥 먹으면서 대화하고 커피 마시면서 대화하면 되잖아.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니까.”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니까 대화 많이 하고 싶다구요.” “많이 하고 싶다? 많이 하고 싶은 대화가 뭔데?” “그냥…… 친해지고 싶으니까 이것, 저것, 그런 게 있어요.” 여운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버벅거리자 마루는 점점 더 많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여운을 노려봤다.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몸까지 배배 꼬는 등의 부끄럼을 타는 모양새가 수상하면서도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아니 이상하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구는 모습이 더욱 마루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기분 나쁠 이유가 코딱지만큼도 없는데 기분이 나빴다. “이연우하고 많이 하고 싶은 대화가 뭔지 말을 해.” “왜 내 사생활을 차마루 씨한테 다 말해야 해요?” 여운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해야 해. 반드시!” 마루가 억지를 부리며 몰아붙였다. “그러니까 왜요?” “국수방 파트너니까. 간첩을 잡기 위해 임무를 수행 중인 특수 요원들이니까.” 진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진짜 사람을 천하의 바보 멍청이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수작질인지. 여운은 눈꺼풀이 뒤집힐 듯 눈을 홉뜨고 마루를 째려봤다. “차마루 씨, 단기 기억상실증 있어요?” “뭐?” “차마루 씨가 그랬잖아요. 간첩 검거 작전에서 내 역할은 그저 친한 척만 하면 되는 거라고.” “그건…….” 눈을 얼마나 무섭게 부릅떴는지 스프링이 달려 띠용 하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장난감처럼 여운의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차마루 씨가 이런 말도 했어요. 스파이니 뭐니 그런 거 나 죽지 않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던진 미끼였다고. 내가 죽으면 국수방의 존재가 탄로가 날 수 있으니까 국수방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막음용으로 던져 준 사탕이라고. 그런데 특수 요원? 특수 요원은 무슨 개똥 같은 특수 요원이에요? 말장난하지 말아요. 나 말장난에 홀랑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아요.” 여운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눈을 부릅뜨고 따지자 잠깐 움찔했던 마루가 이내 정색을 했다. “그래, 맞아. 특수 요원 말장난이야. 하지만 국수방에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내 보호를 받으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죠! 아니지. 이건 완전 사육이에요.” “흥, 기여운이 사육당할 사람이야? 감시든 보호든 사육이든! 내 사정거리 안에 있는 한 기여운은 내 소관이야!” 마루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고 여운은 못마땅했지만 딱히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째려보기만 했다. “차마루 씨 사정거리 안에서 이연우 씨 만나고 올게요. 됐죠?” “이연우하고 하려는 대화가 뭐야? 설마 이연우한테 국수방에 대한 비밀을 발설하려는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여운이 펄쩍 뛰며 반박했다. “그럼 말해, 이연우하고 하려는 제대로 된 대화가 뭔지.” “꼭 알아야겠어요? 꼭! 꼭?” “꼭 알아야겠어. 꼭! 꼭!” 마루가 1센티도 물러서지 않자 여운은 졌다는 듯 할 수 없이 털어놓기로 했다. “실은…… 이연우 씨하고…… 좀 잘해 볼까…… 해서요.” 여운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연우와 잘해 보고 싶다는 여운의 고백에 마루의 미간에는 굵은 주름이 잡혔다. 기분 나쁘다는 뜻이었다. 아까부터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진짜 제대로 기분이 나빴다. “잘해 보고 싶다는 건…… 사귀고 싶다는 거야?”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우물쭈물하더니 “가능하다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루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굵어졌다.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는 뜻이었다. “이연우가 사귀자고 했어?” “아뇨. 그런 말은 없었어요. 그냥…… 연우 씨는 참 좋은 사람이니까…….” “이연우가 사귀자는 말도 안 했는데 잘해 보고 싶다고? 헛물켜지 마.” “헛물 아니거든요?” 여운이 바락 반발했다. “연우 씨도 나한테 호감 갖고 있고 관심 있는 게 틀림없거든요?” “뭘 보고?” “아까 파출소에 갔을 때 진심으로 반가워했어요.” “반가워했다고 호감 있고 관심 있는 거라고? 도끼병이야?” 마루가 또다시 빈정거리자 여운이 씩씩거리며 마루를 노려봤다. “도끼병 아니에요! 진짜 보고 싶었던 사람처럼, 진짜 그리워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눈빛이 그랬단 말이에요. 눈시울도 붉어졌구요.” “입 다물고 하품했거나 안구건조증 때문에 붉어졌을 수도 있어.” 마루는 끝까지 비틀었다. 여운이 연우와 사귀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싫고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아니라구요! 소장님이 그러는데…… 내가 국수방에 납치돼서 사라졌을 때 연우 씨가 잠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했대요.” 연우가 사라진 여운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했다는 말에 마루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어금니를 틀어 물었다. 여운을 향한 연우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은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잠 못 자고 식음까지 전폐한다. 그리고 여운은 그런 연우와 사귀고 싶어 한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불이 붙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관심이 있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말릴 이유는 전혀 없고 응원해 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응원할 이유는 전혀 없고 말리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마루에게 여운은 단 1프로도 매력이 없는 여자고 관심은 0프로인 여자인데도 여운이 연우와 잘되는 꼬락서니는 절대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까 파출소에서 감시 카메라 확인하고 나오다가 뭐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는데 연우 씨가 날 확 안아 주는데…….” “뭐? 안아?” 이번엔 마루가 장난감 눈알처럼 눈알이 띠용 하고 튀어나올 듯 부릅뜨고 소리쳤다. “말했잖아요, 넘어질 뻔했다고. 그래서 연우 씨가 날 확 안아 주는데…… 느낌이 거시기 했어요.” 여운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올라오는 걸 보곤 마루가 아득아득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거시기 했는데?” “음……. 쑥스러웠어요.” “쑥스러워? 그럼, 그럼 내가 안아 줬을 때는?” 마루가 잔뜩 화가 나서 거친 어조로 물었다. “차마루 씨가 안아 줬을 때요? 그때는…….” 여운은 마루가 안아 줬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 생각하기 위해 잠깐 뜸을 들였다. “그땐 좀 쪽팔렸어요.” “뭐? 쪽팔렸다고? 왜?” “왜긴요. 얼굴이 괴물이 됐을 때니까 쪽팔리죠.” “단지 그것뿐이야? 쪽팔린 거뿐이야?” 마루가 분통을 터뜨리듯 소리쳐 물었다. “뭐 다른 게 있어야 해요?” 여운이 다른 게 있을 수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쪽팔린 거 외엔 전혀…… 거시기한 게 없었다고?” “없었어요. 아! 있었어요.” 있었다는 여운의 말에 마루는 한 줄기 희망을 가졌다. “좀 고마웠어요.” “좀 고마웠다고? 달랑 고마운 거?” 마루는 또다시 확 실망하며 뿔이 났다. “고마운 게 달랑은 아니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여운이 차마루와는 어떻게도 거시기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고 마루는 상처받고 말았다. 여운은 그저 평온하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마루는 실망하고 뿔이 나고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운이 남다른 느낌이나 감정을 갖게 되길 바란 적이 없었는데도 마치 커다란 다른 무엇인가가 있길 바랐던 것처럼 상처를 받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화가 나고 또 화가 났다. 마루는 이 근거 없는 화가 질투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이연우가 확 안아 주고 잠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니까 그래서 사귀고 싶다고?” “솔직히 멋지고 감동적이잖아요. 나를 진심으로 그리워해 주고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 솔직히 경찰이니까 날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도 같고…… 놓쳐 버리면 앞으로 그런 사람 영영 못 만날 것 같아서요…….” 여운이 쑥스럽지만 진심을 말하자 마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득아득 어금니를 갈아 대며 여운을 노려보기만 했다. 멋지긴 개뿔이 멋지고 밥만 굶으면 감동적인 것이냐고, 그깟 놈 품에 왜 막 안긴 것이냐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치사한 놈을 면하기 위해, 질투하는 놈이 되고 싶지 않아 가까스로 참았다. 여운이 좋은 사람을 만나 잘해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된 심보인지 자꾸만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질투심도 치솟았다. 조금도 질투할 일도 아니고 절대 질투할 필요도 없고 질투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유 없이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짜증과 질투가 치솟았다. 여운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낱낱이 알고 있기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솔직히 연우 정도라면 여운을 아주 많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직업도 좋고 천성도 어질고 부드럽고, 무엇보다 여운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런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지 않았다.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싹수인지. 못돼 먹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냥 싫었다. 여운이 행복해지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아주 못돼 빠진 인간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그저 여운이 다른 사람 때문에 행복해지는 게 싫었다. 다른 사람이 여운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싫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심보냐면, 그건 마루도 아직 잘 모르는 희한한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통금 시간 조금만 늘려 줘요. 나도 오랜만에…… 썸 좀 타 보게요.” 여운의 입술을 통해 새어 나온 “썸 좀 타 보게요”라는 말이 마루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콱 박히는 순간 마루는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나한테 했던 말 잊어버렸어?”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사랑 안 한다며. 국수방에서 나한테 말했잖아. 절대 사랑 안 한다고!” “맞아요. 그랬어요. 사랑은 안 할 거예요.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썸만 타려구요.” “썸만 타?” “네.” “이연우는 무슨 죄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여운 때문에 이연우가 식음을 전폐했다며? 이연우는 사랑을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기여운은 썸만 타겠다고? 이연우는 무슨 죄야. 그건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이용하고 골탕 먹이는 짓이잖아! 그건 나쁜 짓이야! 벌받는다고!” 마루는 여운이 마치 아주 큰 죄를 저지른 듯이 매섭게 몰아붙였다. “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호통을 치는 거예요? 난 썸도 못 타요? 난 썸 타는 것도 죄예요? 대한민국 사람 전부 마음껏 썸 타는데 왜 내가 하면 이용하는 거고 골탕 먹이는 거고 나쁜 짓이라는 거예요? 왜 나만 벌을 받아요?” 여운은 남의 죄를 뒤집어쓴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원통한 듯 반박했다. 여운의 말이 맞았다. 사실 마루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여운이 연우를 만나건 다른 누굴 만나건 마루가 간섭하지 않고 관심을 끊었다면 이런 감정적인 말싸움을 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괜히 질투하고 괜히 뿔이 나는 바람에 마루가 쓸데없이 간섭을 했고, 정도를 넘어선 간섭이었기 때문에 감정까지 상해 버린 것이다. “난 썸 탈 자유도 권리도 없어요?” “내 말은 그 말이 아니라 이연우는 기여운하고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어. 기여운은 썸에서 끝낼 수 있을지 몰라도 이연우는 그게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연우가 썸에서 끝내지 않고 더 깊은 관계를 원하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지, 해결 방법이 있는지 그걸 말하는 거였어. 절대 사랑은 안 한다고 했었잖아.” 그냥 미안하다고 했으면 끝날 일인데 마루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참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여운의 사생활에 끼어든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짓이었지만 한번 어긋나자 정말 산으로 가고 있었다.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뭐예요?”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뭐냐니?” “연우 씨가 썸에서 끝내지 않고 더 깊은 관계를 원했을 때 내가 그걸 받아들였다가 이연우 씨가 죽을까 봐 그래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 죽어 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연우 씨도 나 때문에 죽을까 봐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었다. 맹세코 아니었다.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여운이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었겠다 싶긴 했다. “아니라구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럼 뭔데요?” “그건…….” 대답을 하려고 보니 마루조차도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인지 뚜렷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짜증 나고 질투가 났다. 그냥 기여운이 이연우를 만나는 것 자체가 싫다. 그래서 못 만나게 하려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끌어다 붙인 것일 뿐이다, 하고 말하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됐어. 계속 얘기해 봤자 감정만 상할 것 같으니까 그만하지. 갔다 와. 썸을 타든지 사랑을 하든지 마음대로 해.” 남자로서 참 치사하지만 지금으로선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마음대로 할 테니까 통금 시간이나 늘려 줘요.” 여운이 쌩하게 차가워진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늘려 줘?” 마루는 급격하게 우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음…… 자정?” “미쳤어!” 마루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여운이 깜짝 놀라며 마루를 쳐다봤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그리고 미치긴 내가 왜 미쳐요? 내가 중딩도 아니고 고딩도 아니고 완전 어른인데 자정이면 어떻고 새벽이면 어때요.” “완전 어른이라도 자정도 안 되고 새벽도 안 돼! 여자가 자정도 좋고 새벽도 좋고 밤이슬 맞으며 싸돌아다니면 헤픈 여자 취급 받아. 이연우가 헤픈 여자 좋아하겠어?” 마루가 이연우를 들먹이자 여운은 금방 설득당하고 말았다. “그런가? 알았어요. 그럼…… 11시까지 올게요.” “10시.” “11시요.” “10시!” “10시 반!” “10시! 10시까지 안 오면 칼같이 대문 걸어 잠가 버릴 거야.” 마루가 끝까지 10시를 관철한 후 지하실로 내려가려는데 여운이 마루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10시라고 했잖아!” “알았다고요! 대신에 돈 좀 줘요.” “나한테 돈 맡겨 놨어? 아까 만 원 빌려 갔잖아.” “만 원으로 차비하고 7천 원 남았어요. 국밥 사기로 했는데 돈이 없단 말이에요.” “그건 기여운 사정이고.” 마루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 진짜. 오 팀장님이 채 실장 잡아 준다고 했었죠? 잡았어요, 못 잡았어요?” “그건…….” “채 실장도 잡아 주고 채 실장한테 뜯긴 돈도 다 찾아 준다고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못 잡은 거예요? 내가 그 돈만 되찾으면 이렇게 없어 보이게 구걸하진 않을 텐데. 똑바로 말해 봐요. 잡았어요, 못 잡았어요?” 여운의 추궁에 마루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채 실장은 진작 찾아냈었다. 하지만 여운에게 알려 주지 못했다. 알려 줄 수가 없어서 함구하고 있던 참이었다. “왜 말은 안 해요? 잡았어요, 못 잡았어요? 국수방이 그깟 사기꾼 하나도 여태 못 잡은 거예요?” 여운이 계속해서 몰아붙이자 마루는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찾았어.” “찾았어요?” 여운이 반색하며 물었다. “찾았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나더러 증언하라고 했잖아요. 증언해야 하니까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 했잖아요. 돈 돌려주기 싫어서 말 안 했어요? 채 실장이 내 돈 다 썼대요? 아니면 국수방에서 내 돈 꿀꺽한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요? 아, 됐고. 그래서 지금 그놈 어디 있어요? 국수방에 있어요?” “아니.” “찾았다면서요. 국수방 아니면 경찰서에 있어요? 아예 감방에 처넣었어요?” “아니.” “아니라뇨! 어디 있는데요?” “국과수…… 부검실에.” 마루가 망설이다가 알려 줬다. “국과수? 국과수 부검실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여운의 눈이 경악으로 주먹만 하게 커졌다. “저기요, 차마루 씨. 그건 그러니까…… 채 실장이…… 죽었다는 거예요?” “맞아. 국수방에서 채 실장을 찾긴 찾았는데…… 우리가 찾았을 땐 이미 죽어 있었어.” “왜, 어떻게, 뭣 때문에요?” “부검 중인데…… 부검 결과로는 자연사가 아니야. 사고도 아니고.” “자연사도 사고도 아니면요?” “누군가 채 실장을 살해했어. 세 명 모두 목뼈가 부러져 있었어.” “헉. 누군가 채 실장을 죽였다구요?” 여운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채 실장뿐이 아니야.” “채 실장뿐이 아니라니요?” “김정훈과 박동진도 살해당했어.” “김정훈도요? 헉……!” 여운은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며 다시 한 번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박동진은 누구예요?” “이정민 집을 구경하러 갔을 때 예술가 조수라고 했던 사람. 권우진이라던 그 사람 본명이 박동진이야. 채 실장, 김정훈, 박동진은 한패였어.” “헉.” 여운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날 여운에게 사기 쳤던 패거리들 모두가 살해를 당했다는 말에 무슨 할 말이 있을 수 있을까.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몸이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돈은 못 찾았어. 놈들이 다 살해된 채 발견됐기 때문에 돈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어.” “그랬겠네요……. 그랬겠어요……. 그런데 누가 죽인 거예요? 범인…… 찾았어요? 나처럼 그 사람들한테 사기당한 사람이 죽인 거예요?” “전문가 솜씨야.” “전문가? 어떤 전문가요?” “살인 기술을 익힌 전문가.” “헉.”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익힐 게 없어서 살인 기술을 익히다니. 뭐 그런 소름 끼치는 전문가가 다 있을까. “그 전문가……, 살인 전문가가 누군지 알아요?” “우린 이정민이라고 단정하고 있어.” “뭐, 뭐, 뭐라구요?” 정말 갈수록 태산이었다. 사기꾼 세 사람이 나란히 살해를 당했는데 그들을 살해한 살인 전문가가 몇 시간 전 여운을 읍내까지 태워다 준 이정민이라니. 여운은 몸은 물론이고 오장육부가 다 같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정민이 채 실장 일당을 왜 죽여요?” “감히, 사기꾼 주제에 간첩의 집을 갖고 사기를 쳤기 때문이겠지. 집 안으로 들어갔었다고 했지?” “네.” “비밀이 많은 간첩 집에 함부로 들어갔으니 이정민 입장에선 당연히 제거해야 했을 거야.” “제거…….” 여운이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