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할머니가 그랬어요, 나한테 사람 잡아먹는 년이라고.” “뭐라고?” 마루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우리 아빠랑 오빠……, 우리 엄마도 그렇고……. 할머니가 나더러 애미 잡아먹고 애비 잡아먹고 오빠 잡아먹었다고……, 사람 잡아먹는 팔자라고 했단 말이에요……. 할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내가 태어나면서 다 떠나 버렸으니까. 그래서 난 차마루 씨까지 잡아먹은 여자 되기 싫어요. 그러니까 그냥 내가 져 준다고요.” 울컥 서러움이 치솟았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콧잔등이 시큰해지자 여운은 울지 않기 위해 급하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겨우 중학교 2학년 때,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오빠를 다 잃어버리고 장례를 치르던 그날. 가을비답지 않지 않게 한여름 폭우 같은 비가 내리던 그날. 할머니의 입에서도 폭우 같은 막말들이 여운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었다. 사람 잡아먹는 년이라고, 또 누굴 잡아먹을지 몰라 무섭다고. 할머니의 입에서 그토록 무서운 막말이 토해져 나오는데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편들어 주는 사람도,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 방울이라도 피가 섞인 사람들은 철저하게 여운을 배척했었다. 오직 한 사람.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담임선생님이 장례식장 한쪽 구석에서 여운을 끌어안고 엉엉 울어 주었었다. “겁나죠? 나 때문에 죽을까 봐.” 여운이 미안한 얼굴로 마루의 눈치를 보며 묻자 마루의 턱이 실룩거렸다. “난 그따위 비상식적인 말 절대 안 믿어! 그건 미친 소리야!” 마루가 화가 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자 가만히 마루를 쳐다보던 여운이 픽 하고 웃었다. “괜히 겁나니까 큰소리치는 거죠?” “겁 안 나! 당신 친척들은 당신한테 잘못한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정말 나쁜 인간들이야!” 마루가 화가 나서 버럭 소리치자 여운이 소리 없이 비실비실 웃었다. “왜 웃어?” “그렇게 말해 주니까 왠지 은근히 고마워서요. 은근히 고마운 게 아니라 진짜 고맙네요.” “고마우라고 한 얘기 아니야.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하니까 진심으로 더 고맙네요. 어쨌건 차마루 씨는 더 이상 술 마시지 말아요. 이 술은 내가 다 마실게요. 그리고 꼭 병원 가서 다시 검사해 봐요. 정밀 검사.” 여운은 정말로 마루가 남긴 술까지 모두 마셔 버렸다. 마루가 남긴 캔 맥주 두 개와 여운의 몫 캔 맥주 다섯 개. 모두 일곱 개의 캔 맥주를 마셨는데 정말 생수나 음료수를 마신 것처럼 여운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맥주가 센 술이 아니라서 주량이 엄청난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지만 여자에게 그 정도 양이면 취기가 오를 만도 한데 마치 술 없이 치킨만 뜯은 것처럼 술기운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술상을 치우는 폼도 그냥 평상시 모습 그대로였다. ‘제법이네.’ 저 정도면 정말 제법이었다. “다 치웠으니까 잘게요. 치맥 고마웠어요.”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붙어.” “심장 고치면 붙어요. 다음엔 소주로.” “좋아. 잘 자.” “잠깐만요.” 여운이 마루에게 다가가더니 마루의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뭐 하는 짓이야?” 여운의 행동에 순간 마루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뭐긴 뭐예요?” 여운이 마루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남의 물건 그런 식으로 슬쩍하는 거 아니에요.” “슬쩍한 거 아니야! 깜빡한 거야!” 마루가 항변했지만 여운은 콧방귀만 뀌어 주었다. “잘 자요.” 방으로 들어가려던 여운이 고개를 돌려 마루를 쳐다봤다. “내가 내기에 져 준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은 켜 놓고 자게 해 줘요.” “귀신 없어. 있다고 해도 기여운이라면 귀신 정도는 한 방에 때려잡을 것 아니야? 꼭 불을 켜야겠다면 전기세를 내.” “1원도 없는 거 알잖아요. 그럼, 저기 저쪽 포기할게요. 영원히.” 여운이 지하 벙커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불 끄고 자.” 마루의 흔들리지 않는 강경한 태도에 여운이 할 수 없이 먹음직한 미끼를 던졌다. “삼시 세끼 밥 다 할게요.” 삼시 세끼라는 단어에 솔깃한 듯 마루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불 꺼. 꼭!” “에이, 진짜……. 귀신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말 못 할 사정이라면 말하지 말고 불 끄고 자.” 마루가 냉정하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운이 재빨리 달려와 마루를 붙들었다. “진짜 매정하게 이럴 거예요? 좀 봐주면 안 돼요?” “그럼 말 못 할 사정을 말해. 들어 보고 결정할 테니까.”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거잖아요!” “진짜 말 못 할 사정이면 불 켜게 해 주고 말해도 되는 사정이면 절대 안 되니까 무슨 사정인지 말해.” “으이그 진짜 인정머리 없게……. 알았어요! 불 끄고 자면 되잖아요!” 여운은 성질이 나서 문을 쾅 하고 소리 나게 닫으며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불을 끄기 싫었다. 아니, 끌 수가 없었다. 캄캄한 건 정말 질색이라, 질색 정도가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불을 끌 자신이 없었다. 사실 서울에서 살 때보다 여기 시골로 오고 캄캄함이 싫은 증세가 더 심해졌다. 서울에서는 가로등이나 이웃집의 조명, 간판, 자동차 헤드라이트 등 간접조명이 많았는데 시골에는 간접조명이 전혀 없었다. 가로등이 있긴 있었지만 도시나 시내만큼 촘촘하지 않아 간접조명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방 불을 끄면 마치 땅속에 묻혀 버린 듯 완전한 암흑이 돼 버렸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 칠흑 같은 시골의 캄캄함이 목줄을 죄는 듯 두려웠다. 자고 싶은데 자려면 불을 꺼야 하고, 불을 끄자니 무섭고 이도 저도 못 하고 앉은 채로 고민하던 여운은 결국 밖으로 나가 마루의 방문을 두드렸다. “왜?” 마루가 약간 귀찮은 얼굴로 물었다. “진짜 불 꺼야 해요?” “진짜 꺼.” 바늘도 안 들어가는 마루의 반응에 여운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루 씨……, 입 무거운 사람이죠?” 여운이 갑자기 정색을 하자 마루가 무슨 수작일까 하는 듯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내가 하는 말, 내가 불 끄기 싫어하는 이유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렇게 대단한 일급비밀이야?” “나한테 특급 비밀이에요. 그러니까 약속해 줘요.” “일급비밀 아니면?” “약속하라구요.” 여운이 갑자기 정색을 하다 못해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마루가 여운의 표정을 살피다가 “약속할게” 하고 대답했다. “그럼 말할게요. 그러니까 그게…… 아빠 오빠 다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됐을 때…… 집에서 혼자 살았거든요.” 곧 세찬 비바람이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드리운 듯 여운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마루의 표정도 서서히 심각해졌다. “언제? 중학생 때?” “네. 친척들이 아무도 맡아 주질 않아서 혼자 살게 됐는데 그때 전기세를 내지 못해서 밤만 되면 암흑천지가 돼 버렸었어요.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우리 집은 반지하라서 유별나게 더 캄캄했었어요.” 여운은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끼칠 만큼 캄캄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창문에 소변보는 사람도 있었고, 술에 취해서 창문을 발로 차는 사람도 있었고……, 좀도둑이 창문을 뜯으려고 한 적도 있었고…….” 여운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어두워진 얼굴 위로 송골송골 식은땀마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날……, 어떤 날…….” 머릿속 어디쯤 꼭꼭 가두어 두었던 기억을 다시 꺼내려 했으나 명치끝에서 울렁증이 치밀어 오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여운이 말을 잇지 못하자 순간 마루는 가슴에 원초적인 불길함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여운이 아직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것 같은 아주 부정적인 예감. 마루는 제발 자신이 느끼는 이 불길함이 잘못된 느낌이길 바랐다. “말 안 해도 돼. 불 켜고 자.” 마루가 경직된 말투로 말하는데 여운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바로 앞집에 세 들어 살던 아저씨가 술에 취해서…… 문을 두드리더라구요, 먹을 걸 갖고 왔다고……. 여러 번 먹을 걸 나눠 주셨거든요. 불쌍하다고, 기운 내라고 위로도 해 줬었고……. 그래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앞집 아저씨니까……, 아빠 살아계실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아저씨니까……, 친절한 아저씨니까……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는데…….” 여운은 더 이상을 말을 잇지 못하고 깊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마루는 알 수 있었다. 짧은 몇 분 사이에 여운의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는 것을. 여운의 이마에서, 얼굴에서, 목덜미에서 마치 격한 운동이라도 한 듯 진땀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마루는 보고 있었다. “말 안 해도 돼. 불 켜고 자. 앞으로 계속 켜고 자도 돼.” 마루가 다시 한 번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운은 멈추지 않았다. “앞집 아저씨는 술에 취해 있었어요. 촛불을 켜 뒀었는데…… 문을 여니까 갑자기……, 갑자기 막…….” 마루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았고, 갑자기 심장이 터져 버릴 듯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여운의 손을 꽉 틀어잡았다. “그 새끼가 어떻게 했어?” 마루가 명치끝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 새끼가…… 널 다치게 했어? 그랬어?” 마루의 격한 물음에 여운은 토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최악으로 가기 전에 도망쳤어요. 그냥, 그냥…… 진짜 무슨 악귀처럼 악을 쓰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면서 도망쳐 나와서 형택이 집으로 달려갔어요. 맨발로……. 맨발인 줄도 모르고 달려갔어요…….” “정말 도망쳤어? 정말…… 도망쳤어?” 마루는 여운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처럼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도망쳤어요. 정말 도망쳤어요. 그런데…… 형택이랑 형택이 부모님이 앞집 아저씨를 붙잡으려고 달려갔는데 앞집 아저씨는 미쳤냐고, 자긴 그런 적 없다고, 자긴 술 마시고 자기 집에서 자고 있었다고……, 나를 완전히 미친년으로 만들어 버리더라구요. 물론 형택이하고 형택이 가족은 날 믿어 줬죠. 왜냐면 나는 입고 있던 옷이 거의 다 찢어져 있었고 앞집 아저씨가 자기 바지를 우리 집에 흘리고 갔거든요.” 바지를 흘리고 갔다는 말에 마루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래서 그 새끼…… 경찰 불렀어?” 마루가 숨이 막힐 듯한 분노를 느끼고 이를 갈며 묻자 여운이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동네 소문이 나 봤자 나만 손해라고……. 그렇잖아요. 세상은…… 그런 거잖아요…….” 여운이 너무 쓴데, 너무 써서 뱉어 버리고 싶은데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독을 입에 머금은 듯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여운의 미소를 바라보는 마루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치밀어 오른 분노에 사로잡혀 여운의 손목이 부러질 듯 틀어쥐고 있었다. 어떤 놈인지 당장 잡아다 절단을 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고문 방법을 총 동원해 무시무시하게 응징해 주고 싶었다. 열다섯 살 그 어린 소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던 그놈. 짐승보다 못한 그놈. 불쌍한 소녀 기여운에게 지금까지도 씻지 못할 상처를 준 그놈을 잡아다 당장에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차마루 씨. 손목 놔줘요. 너무 아프고…… 토할 것 같아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여운의 손을 놓아주자마자 여운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마루는 분노에 휩싸인 채 말없이 화장실 앞에 서서 여운이 토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여운을 깨웠을 때 불에 덴 듯이 놀라며 다짜고짜 멱살을 틀어잡았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여운이 왜 그토록 극단의 반응을 보였던 것인지. 한참 만에 화장실에서 나온 여운의 모습은 단 몇 분 사이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지쳐 있었다. 여운은 지친 눈으로 마루를 바라보며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운 치킨이랑 맥주를…… 도로 다 토했어요. 미안해요.” “괜찮아. 또 사 줄게.” 정말 괜찮았다. 그깟 치킨 상관없었다. 오히려 미안했다. 그냥 불 켜고 자라고 했더라면 여운이 끄집어내기 싫었던 무서운 기억을 꺼낼 필요도 없었고, 토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젯밤에 그랬던 거야? 내 멱살 잡았던 거.” “미안해요……. 그날 후로……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면…… 나도 모르게 자동반사적으로 그렇게 돼요…….” 여운은 목덜미가 갑자기 가렵기 시작하자 긁으며 대답했다. “불 켜 놓고 자. 계속. 앞으로 계속.” 마루가 여전히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채 말했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나중에 알바라도 해서 전기료 한꺼번에 갚을게요.” 여운이 진심으로 말했다. “안 갚아도 돼. 국수방에서 부담하는 거야. 갚을 필요 없어.” “그래요? 은근히 다행이다 싶네요.” “그놈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누구……? 아, 그 나쁜 놈요? 알면요? 잡아다 때려 주게요? 진짜 좀 때려 줄래요? 진짜 많이, 많이 때려 줄래요?” 여운이 이번엔 팔뚝을 긁으며 물었다. “죽일게. 죽여 줄게.” 마루가 두 눈을 번득이며 말하는 순간 여운은 뜨겁고 거센 폭풍우가 가슴을 후려치는 듯한 짜릿한 감동을 느끼며 가만히 마루를 쳐다봤다. “뭐라구요?” “죽여 준다고. 그 새끼 죽일 거야.” 마루가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말하자 여운은 마치 사랑 고백을 받은 듯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말이 안 되는 느낌이었지만 꼭 그랬다. 정말 사랑 고백을 받은 것처럼 감동마저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하고 감동적인 사랑 고백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떨리고 목에 멜 정도였다. “정말…… 죽일 거예요?” 여운이 등과 옆구리를 긁으며 물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데! 왜 자꾸 가려운 것인지. 이럴 땐 없어 보이게 자꾸 여기저기 긁어 대지 말고 마루가 하는 말에 집중해서 고스란히 감동만 받았으면 좋겠는데 여운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듯 자꾸 몸을 긁어 댔다.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 한복판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는 듯 뜨거워지는데 여운은 참 빈티 나게도 자꾸 몸을 긁어 댔다. “죽일 거야. 기필코.” 마루가 두 눈 가득 독기를 뿜어내며 대답했다. “어…… 됐어요. 그거면 됐어요. 그렇게 말해 줘서……. 그거면 됐어요.” 여운은 울컥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여운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아니 목격하게 된 마루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이상하게도 깊은 안도감과 든든함과 따뜻함 그리고 아릿한 고마움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탄탄한 보호막이 둘러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고맙고 안심이 돼서. “고마워요. 잘 자요.” 여운이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한 움큼이나 매달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돌아서는데 마루가 여운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우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안아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말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안아 줄 것까지는 없었다. 안아 주지 않아도 충분히 고마웠기 때문이다. “알아, 괜찮은 거. 그냥 안아 주고 싶어.” 마루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정말 그냥 안아 주고 싶었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생각하자마자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다. 마루는 정말 오랫동안 여운을 꽉 안아 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껴안고 있으려고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해 주고 싶었고, 그렇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운은 마루의 품에 오래 안겨 있지 않았다. “저기요, 차마루 씨. 이제 그만 놔줘요.” 여운은 마루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고 마루는 그런 여운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지만 여운은 끝내 마루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나 이상해졌죠?” 마루의 품에서 빠져나간 여운이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두 손으로 연신 긁어 대며 물었다. 여운의 말대로 여운의 얼굴이, 몸이 이상했다. 정확하게는 피부가 이상했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 여기저기 수제비 띄워 놓은 크기만큼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아마도,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저렇게 큰 두드러기가 잔뜩 부풀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여운의 몸에 두드러기가 퍼져 있는 것을 본 마루가 깜짝 놀라 물어봤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이렇게 되다니. 게다가 이렇게 크고 광범위하게 부풀어 오른 두드러기는 처음이었다. “아, 또 이러네. 나 괴물 같죠?” 여운이 징그러울 것이 뻔한 얼굴을 가리려고 애쓰며 물었다. “왜 그런 거야? 식중독이야?” “식중독 아니에요. 잘못 먹은 것도 없는걸요.” “그럼 왜 그래? 나 때문에 그래? 무슨, 알레르기 있어?” “알레르기는 알레르긴데…… 생각하기 싫은 옛날 일 생각할 때 한 번씩 이래요. 징그럽죠? 아, 쪽팔려. 나 그만 들어갈게요. 잘 자요.” 여운이 부끄러움에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오는데 마루가 따라 들어왔다. “병원 가자.” “안 가도 돼요. 며칠 있으면 괜찮아져요. 징그러운 거 보지 말고 빨리 가서 자요.” 여운이 재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 징그러운 몸을 숨기며 말했다. “병원 가야 해. 어서 나와. 기도까지 부으면 큰일 나.” “괜찮아요. 기도 붓지 않아요. 가끔 이래서 알아요. 마음이 막 들쑤셔지면 몸이 감당을 못해서 그러는지 두드러기가 나더라구요. 보지 말고 빨리 가서 자요.” 여운이 빨리 가라고 재촉했지만 마루는 가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내가 알아요. 걱정 말아요. 가려운 것만 이 악물고 참으면 돼요.” “알레르기 주사 맞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주사 소용없어요. 별짓 다 해 봤는데 결국은 며칠 지나고 마음이 편해져야 괜찮아져요.”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가려운 것만 참으면 돼요.” “자주 그래? 이렇게 두드러기 나는 거 자주 있는 일이야?” “아니에요. 가끔 그래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갑자기 생각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생각하지 않는 방법…… 없을까?” 마루가 물었지만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방법만 있다면……,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감쪽같이 다 지워 주는 방법만 있다면 정말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지워 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안 되겠네요. 가진 재산이 없어서……. 알거지라서 안 되겠어요.” 여운이 이불 속에서 쿡쿡 웃었지만 마루는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 아프게 들렸다. “기여운.” “네.” “……미안해.” “뭐가요?” “나 때문이잖아. 내가 옛날 얘기 하게 해서.” “따지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차마루 씨 때문에 감동받았어요.” “무슨 감동?” “그런 거 있어요. 그리고 제발 빨리 나가요. 답답해서 이불 걷고 싶단 말이에요.” “알았어. 불 켜고 자.” “알았어요. 고마워요.” 마루는 여운이 꼬물거리며 계속 몸을 긁어 대느라 꿈틀거리는 이불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마루가 방을 나간 후 이불을 걷은 여운은 휴대전화를 찾아 카메라 기능을 켜고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몇 분 사이에 아주 난리가 나 있었다. “으, 징그러워.” 여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누워 버렸다. 몸이 가려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누운 채로 바닥에 등을 문지르던 여운은 긁으면 더 심해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등을 문지르는 것도 꾹 참았다. “진짜 가려워 뒈지겠네.” 정말 뒈지도록 가려워서 아주 박박 긁어 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사달이 날 터라 일단은 이 악물고 참아야 했다. 가려운 걸 꾹 참으며, 긁어 싶은 걸 꾹꾹 참으며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속 깊은 곳에 암처럼 응어리져 있던 고통의 덩어리가 씻겨 나간 듯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벅차고 두근거리고 설렜다. 울렁거림도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사라졌다. “휴…….” 진짜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콧잔등이 매콤해졌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꺼낸 후유증 때문이 아니었다. 암처럼 뭉쳐져서 야금야금 여운의 정신을 갉아먹던 지독하게 아픈 응어리 때문도 아니었다. 죽일 거라는 마루의 말 때문이었다. “죽여 줄게”라던 마루의 한마디로 여운의 생명을 좀먹고 있던 암 덩어리가 치유돼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치유될 순 없겠지만, 또다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틀림없이 고통스럽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하게 털어 버리고 치유가 된 것 같았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고 구사일생했지만 그때의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여운을 괴롭히고 있었다. 밤엔 불도 끄지 못하고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이 악몽으로 재현돼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놈과 비슷한 사람, 비슷한 연배의 남자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며 토악질이 치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따금씩 그때 그놈의 숨소리가 들려오며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 그 고통의 기억을 마루가 씻겨 준 것 같았다. 다들 잊어버리라고만 했었다. 신고해 봤자 너만 때를 묻힐 뿐이니 없던 일로 생각하라 했었다. 마루처럼 죽이겠다고, 죽여 주겠다고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었다. 그래서 죽어도 잊히지 않을 일을 잊으려고 애를 쓰고, 어떨 땐 진짜 잊은 척 연기를 했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더욱 심한 때가 묻을까 봐 그때 일을 알고 있는 형택과 형택의 가족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마루는 달랐다. 여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운이 그날의 기억으로 얼마나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놈, 앞집 남자가 죽어 버리길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너무 고맙고 든든했다. 여운은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그냥 저절로 쏟아져 내렸다. 이번만큼은 참으려고 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돌처럼 응어리져 있던 암 같은 아픈 기억이 눈물로 씻겨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흐득흐득 흐느낌도 새어 나왔다. 흐느낌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흐르는 대로 흐느끼고 싶은 대로 어린아이처럼 그냥 울고 싶었다.
마루는 지하 벙커에서 여운의 흐느낌을 보고 듣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할 정도로 아프고 쓰렸다. 아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가늠할 수도 없었지만 마루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당장에 그놈을 죽이고 싶을 만큼 얼마나 강렬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지. 울고 있는 여운에게 당장 달려가 다시 와락 껴안고 주고 싶었다. 여운을 안은 채 말해 주고 싶었다. 실컷 울라고. 눈치 보지 말고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라고. 그리고 약속하고 싶었다. 그놈을 꼭 응징해 주겠다고. 그동안 쌓여 있던 분노와 고통이 완전하게 사라질 만큼 끔찍하게 응징해 주겠다고. 마루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눈물을 닦아 내는 여운을 괴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 줌을 당겨 여운의 얼굴을 조금 더 확대해 살펴보자 얼굴 대부분이 두드러기로 점령당해 있었다.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마루는 그 얼굴이 전혀 징그럽지 않았다. 그저 안쓰럽고 또 안쓰럽고 깊이 안쓰럽기만 할 뿐이었다. 괜찮다 한다고 내버려 두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병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헤드폰을 벗으려던 그때, 여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와……. 차마루, 오늘은 진짜 스파이 같았어. 완전 남자였어. 미쳤어. 완전 미치도록 멋졌어. 이건 뭐…… 완전히 미친 수컷이야. 울음 섞인 여운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자 마루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남자, 완전히 미친 수컷이라는 말이 전혀 원색적이지 않고 대단한 칭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마루가 여운의 칭찬에 웃고 있을 때 여운은 저돌적인 사랑 고백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그 울룩불룩한 핏줄!” 여운은 꽉 틀어쥔 마루의 주먹 손등 위로 툭 불거져 나와 있던,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기선만큼이나 굵디굵은 핏줄을 떠올리며 가슴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너무 멋지고 섹시해서 가슴이 벌렁거렸기 때문이다. “와……. 사내의 굵은 핏줄이 이토록 섹시할 줄이야! 와……, 분노가 뿜어져 나오던 눈빛은 그냥 번득번득……. 완전, 완전 대박!” 여운은 차마루를 만나고 처음으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설렜다. 정말 설레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죽일게……. 죽여 줄게……. 어머머, 대박! 완전 남자!” 여운은 마루가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를 낸 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비틀고 꼬아 대기 시작했다. 마루에게서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강력한 수컷의 향기에 매료돼 버렸기 때문이다. “우와, 차마루……. 진짜 남자네. 어머, 웬일이야. 어떻게 저렇게 멋질 수가 있지? 어머, 어떻게 해. 반할 것 같아…….” 여운이 얼굴, 아니 온몸에 뜨끈뜨끈하게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며 감동받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마루는 지하 벙커에서 헤벌쭉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속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멋지냐고? 내가 원래 좀 그래.” 잔뜩 들떠서 거만하게 중얼거리던 마루의 얼굴이 금방 심각해졌다. “×새끼. 네놈은 내가 반드시 잡는다.”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맹세하는데 모니터에서 여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루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 올라갔다. 마루가 벙커에서 나오자 여운이 찡그린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미안한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숨 쉬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여운이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마루가 사색이 된 얼굴로 여운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마루는 곧바로 여운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마루는 여운이 수액과 함께 알레르기를 진정시키는 주사를 맞고 두드러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러니까 새벽녘까지 여운의 곁을 지켰다. 여운은 새벽녘까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늘어지게 잘 잤다. * 다음 날, 깊은 밤. 미세한 소음에 눈을 뜬 마루는 누군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검은 그림자가 조용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운이었다. 검은 그림자였지만 실루엣으로 여운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 마루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일단 모른 척했다. 도대체 이 밤중에 자다가 왜 남의 방에 도둑고양이처럼 들어왔는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는, 아니 잠들어 있다고 믿고 있는 마루의 곁으로 다가온 여운은 조심스럽게 마루를 내려다봤다. 요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고 고른 숨을 내쉬는 것으로 봐서 마루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판단한 여운이 천천히 몸을 숙여 마루의 가슴에 귀를 댔다. 마루가 깨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피부가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마루의 가슴 가까이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두군, 두두근근, 두두두근근……. 정상이던 심장 소리가 슬슬 비정상이 돼 가기 시작했다. “자고 있는데도 심장이 정상이 아니야…….” 여운은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몸을 지탱하기 위해 마루의 몸 가까이 두 손을 짚고 마루의 가슴 더욱 가까이 귀를 대 보다가 멈칫했다. 귀가 마루의 가슴에 닿았기 때문이다. 여운은 마루가 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멈춰라 상태에서 기다렸는데 다행히 마루는 깨어나지 않았다. 물론 마루가 계속 자는 척하는 거였지만 말이다. 여운은 마루가 깨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루의 심장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두두근, 두두두근, 두두근근. 두두두두두두근……. ‘헉!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비정상적인 심장 박동에 여운이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닐까 잔뜩 겁을 먹는데 갑자기 마루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짓이야?” “허억!” 마루의 목소리에 기겁을 한 여운이 도망치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데 마루가 여운의 팔목을 낚아채며 잡아당겨 버렸다. “어맛!” 여운이 높은 괴성을 지르며 마루의 몸 위로 폭 엎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여운이 마루의 몸 위에 거의 십자가 모양으로 엎어져 버린 것이다. “어이쿠! 지금 날 덮치는 거야?” “아니에요!” 여운이 헐레벌떡 몸을 일으키며 도망치려는데 마루가 몸을 일으켜 여운을 꽉 붙들었다. “덮치는 거 아니면 뭔데?” “덮치긴 무슨……. 걱정돼서 와 봤어요.” “뭐가 걱정돼?” “차마루 씨 심장요. 너무 걱정돼서 잠이 안 오더라구요. 살아 있는지 생존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살아 있어.” “그러네요. 그런데 지금도 심장소리가 안 좋아요.” “이게 다 기여운 때문이잖아!” “알아요. 안다구요. 어제 밤중에 병원 데려갔다 오고 막 귀찮게 하고, 하여튼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거 알아요. 그래서…… 생각하고 있어요.” 여운이 마루의 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뭘 생각해?” “하루라도 빨리 차마루 씨한테서 떠날 생각 하고 있다구요.” 여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루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루 씨, 부탁인데…… 내가 여기 있을 때 죽지 말아요. 차마루 씨까지 잘못되면 난 정말 사람 잡아먹는 여자가 되는 거니까…… 절대 죽지 말아요. 그리고…… 도망을 쳐서라도 내가 떠날 테니까 나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아요.” “기여운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아.” “나 때문에 심장이 안 좋은 거잖아요.”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아닌 거 알아요……. 잠 깨워서 미안해요.” “잠든 것 같던데 왜 일어났어?” “그냥 저절로 깼어요. 걱정이 돼서…….” “두드러기는 어때? 어젯밤에 병원 다녀오고 나서 오늘은 하루 종일 방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았잖아. 아직 심해?” “반쯤 가라앉았어요. 이번엔 웬일인지 병원 주사랑 약이 잘 듣네요. 그런데 아직도 징그러워요. 더 자요. 갈게요.” 여운이 돌아서려는데 마루가 여운을 붙들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여운 앞에 섰다. “기여운 때문에 심장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나 때문에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나 때문일 거예요.” 여운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절대.” 마루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자요.” 여운이 마루의 방을 나가는데 마루가 여운을 따라 나왔다. “왜 나와요?” “방에 데려다주려고.” “안 돼요! 내 방에 불 켜져 있는데 내 얼굴 볼 것 아니에요. 아직 조금 징그럽단 말이에요.” “괜찮아. 이미 완전 최고로 징그러울 때 봤기 때문에 안 놀라.” “내가 싫다구요. 그러니까 절대 나오지 말아요.” “데려다준다고.” “됐거든요? 엄청 멀지만 혼자 갈 수 있거든요?” 얼마든지 혼자 갈 수 있었다. 엄청나게 먼 다섯 걸음 앞에 있는 방이니까. 방 불을 켜 둬서 마루까지 환했기에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마루는 여운을 다섯 걸음 앞에 있는 방까지 그렇게 오지 말라는데도 부득부득 데려다줬다. “징그럽죠?” 여운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애쓰며 물었다. “징그러워.” “그러니까 데려다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운이 버럭 쏴붙인 후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루가 닫히려는 방문을 붙잡았다. “가렵지 않아?” “이젠 참을 만해요.” “약 잘 챙겨 먹고 있지?” “잘 먹고 있어요.” “잘 자.” “차마루 씨도 잘 자요.” 두 사람은 방문 앞에서 나름대로 담백하게 밤 인사를 나누었다. 여운이 문을 닫았고, 마루는 한참 동안 여운의 방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 여운이 마루와 안전가옥에서 부부로 위장 근무를 시작한 지, 아니 그냥 일단 동거를 시작한 지 열흘째. 눈을 번쩍 뜬 여운은 휴대전화를 켜서 시간부터 확인했다. 정각 오전 6시. 여운은 서둘러 이불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마루는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보이지 않는다면 산책을 가장해 마을에 산다는 간첩 용의자를 염탐하러 갔거나 지하실에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여운은 밥부터 씻어 안쳤다. 명색이 스파이지만, 여운이 이틀 동안 안전가옥에서 한 일은 밥 짓기밖에 없었다. 스파이는 무슨 얼어 죽을 스파이인가. 스파이는 애초에 물 건너갔다. 밥을 안치고 쌀 씻은 물로 된장찌개를 후다닥 끓여 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진작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참고 있었는데 더는 이 찜찜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씻지 못해 느껴지는 찜찜함보다는 잠금 기능이 고장 난 욕실 손잡이가 더 찜찜해 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흘 동안 지켜보니 이 시간에는 마루가 욕실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씻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여운은 서둘러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몸을 적시며 흘러내리자 10년 묵은 각질이 씻겨 나가는 듯 개운함이 느껴졌다. 아주 천천히, 각질을 푹 불려서 때까지 밀면 참 좋겠지만 이곳에서 때밀이 목욕은 어림도 없는 일. 여운은 빛의 속도로 비누칠을 하고 씻어 낸 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머리까지 감고 샤워를 끝냈다. 젖은 몸을 닦고 옷만 입으면 샤워는 끝. 샤워를 빨리 끝내서 다행이라고, 마루가 욕실을 쓰겠다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 내고 있는데 갑자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몸을 다 닦지 못했는데, 발가벗고 있는데 마루가 욕실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아주 화알짝! “으아아악!” 시골 안전가옥이 무너질 정도로 발악하는 듯한 비명이 높게, 높게 울려 퍼졌다.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마루가 후다닥 화장실 문을 닫고도 약 5초간 이어지던 비명 소리가 그치기 무섭게 어마무시한 쌍욕의 향연이 시작됐다. 더러운 ×, × 같은 놈, 추잡스러운 음란 마귀를 시작으로 열다섯 차례 죽이겠다는 협박이 쌍욕과 합체해 욕실 밖 마루의 귀청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욕과 합체한 죽임의 종류도 갖가지였다. 여운의 혀끝에서 마루의 손모가지 두 개가 날아가고 눈알이 날아갔다. 머리통이 날아갔다. 그뿐인가. 주둥이도 찢어지고 혀도 뽑히고 여운의 혀끝에서 차마루는 남김없이 갈기갈기 찢기고 가루가 됐다. 차례차례 해석을 하자면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손모가지를 똑 분질러 놓겠다는 말이었다. 여운의 알몸을 구경한 눈알을 파내겠다는 말이었다. 뇌의 99프로가 19금으로 꽉 차 있는 대갈빡을 아작 낸다는 말이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아무 죄 없는 주둥이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소리고, 혀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세계 1등으로 잔인한 연쇄살인마처럼 끔찍한 저주와 협박을 서슴없이 내뱉던 여운은 욕실 밖으로 나와서도 쉽게 화를 풀지 못했다. “차마루 당신은 지옥에 빠져 죽을 음란 마귀예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억울함에 마루가 하소연했지만 그 억울한 하소연이 여운의 화를 더욱 부추겼다. “웃기지 말아요! 물소리 들었잖아요!” “안 들렸단 말이야!” “나 같은 여자 절대 취향 아니라더니 왜 훔쳐봐요! 왜 훔쳐봐요!” “훔쳐본 거 아니라니까. 진짜 아무 소리도 안 들렸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단 말이야!” “아주 음란하고 진짜 저질!” “음란하다니! 저질이라니! 말조심해!” “조심하긴 뭘 조심해요!” “기여운이 뭔데 나한테 욕을 하는 거야?” “욕먹을 짓 했잖아요!” “욕먹을 짓 안 했어!” “여자가 목욕하고 있는데 문 열어젖힌 게 욕먹을 짓이 아니라고요?” “없는 줄 알았다고!” “어릴 때부터 여자 목욕탕 훔쳐보고 그랬죠?” “아니, 정말 이 여자가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긴 뭘 어떻게 봐요!” 소리치던 여운이 지하 벙커 문을 쳐다봤다. “하루 온종일 지하실에서 뭐 하는지 알 것 같네요.” “하긴 뭘 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갖고!” “뭐라고? 내가 뭘 못된 것만 배웠다는 거야?” “못된 거, 뭘 배웠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봐요.” “못된 짓 안 했다니까!” 여운에게 말려든 마루가 펄쩍 뛰며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장 화장실 문 고쳐 놔요! 다 큰 남자가 지저분하게 여자 목욕하는 거 훔쳐보지 말고.” “훔쳐보긴 뭘 훔쳐봐? 뭐 볼 게 있어야 훔쳐보지!” 여운이 마귀할멈 같은 얼굴로 마루를 노려봤다. 망언도 이런 빌어먹을 망언이 없었기 때문이다. 볼 것이 없다니. 싱싱한 처녀의 알몸을 봤으면서 볼 것이 없다니. 풍만한 가슴, 아니 좀 덜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틀림없이 잘록한 허리, 탱탱한 엉덩이, 아니 좀 덜 탱탱한 엉덩이, 쭉 뻗은 다리, 틀림없이 쭉쭉 뻗은 다리가 여운의 사지를 아름답게, 아니 조금 빈티 나게 형성하고 있는데 볼 것이 없다니. 자존심을 건드려도 적당히 건드려야지. 이 남자가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진짜 혀가 뽑히고 눈알이 뽑히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여운의 눈에서 새빨간 악마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볼 게 없다고요?” “솔직히, 볼 거 없잖아. 그나마 두드러기는 없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싶군.” “헐, 어이없어. 아까 봤으면서 볼 게 없어요? 다 봤으면서 볼 게 없다고요?” 여운이 마루에게 다가섰다. “왜 볼 게 없어요? 있을 것 다 있는데!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 빠짐없이 다 있는데 볼 게 없다니요!” 여운이 맹렬하게 몰아세우자 마루가 당황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두 개 있어야 할 가슴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허리를 건너뛰고 가슴 아래 바로 엉덩이가 붙은 것도 아니고 짝궁둥이도 아닌데 볼 게 없다니요! 이보다 얼마나 더 잘 빠지고 얼마나 더 훌륭해야 볼 게 있단 말이에요!” 여운이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듯이 격렬하게 쏘아붙였고 마루는 여운의 기세에 밀려 한 걸음 또 물러섰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당신은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요.”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분명 어디서 들어 본 말인데 여운이 어찌나 격하게 몰아세우는지 어디서 들었는지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모욕을 주려던 게 아니라…….” “분명히 말하는데!” 여운이 마루의 말을 중간에서 삭둑 잘랐다. “오늘 계 탄 줄 알아요. 복 받은 줄 알라고요!” 여운이 마루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친 후 방으로 획 들어가 버리자 마루는 억울하고 기가 막혀 돌아 버릴 듯한 얼굴로 여운의 방문을 노려봤다. 진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맹세코 훔쳐볼 생각 단 1퍼센트도 없었다. 물론 아무 소리가 안 들렸더라도, 아무도 없을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훔쳐볼 생각이 단 1퍼센트도 없었다 하더라도 노크를 했더라면 가장 좋았겠지만,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생각해도 억울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뭐? 계 탄 줄 알라고? 복 받은 줄 알라고? 대체 왜? 얼마나 대단한 알몸을 보여 줬다고? 뭐 얼마나 비싼 몸이라서?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그딴 몸 백번 보여 줘도 복 받을 일도, 계 탈 일도 없다고 소리치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운이 밖으로 나왔다. 여운은 마루를 본척만척 싱크대 앞으로 가서 미리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데우고 밥을 푼 다음 혼자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같이 먹겠냐는 말은 당연히 생략했고, 마루 역시 같이 먹자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여운이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은 여운이 그제서야 마루에게 말을 붙였다. “만 원만 빌려 줘요.” 여운이 아주 당당하게 요구했다. “뭐하게?” “나갔다 오게요.” “어딜?” “어디 가든 무슨 상관이에요?” 여운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상관있거든?” “왜요?” “몰라? 부부로 위장해서 스파이 활동 중인 거? 파트너의 동선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해.” 마루의 말에 여운이 콧방귀를 뀌었다. “파트너 동선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알몸을 완벽하게 알고 싶은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고!” 마루가 버럭 소리를 치자 여운이 어디서 성질을 내냐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뭐 낀 놈이 성질낸다더니. 앞으로 나한테 방구도 뀌지 말고 성질도 내지 말아요. 똥꼬를 확 찔러 버릴 테니까! 빨리 돈이나 빌려 줘요.” “빌리는 주제에 왜 큰 소리야?” “고작 만 원 빌리는데 불쌍하게 구걸해요? 어차피 만 원으론 서울 근처도 못 가니까 빨리 빌려 줘요. 되도록 천 원짜리 열 장으로.” 여운이 당장 내놓으라는 듯이 마루 앞에 손바닥을 척 하고 펼쳤고 마루는 진짜 빌려 주기 싫은 얼굴로 5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다섯 장을 여운의 손바닥 위에 얹어 놓았다. 여운이 절대 고맙지 않은 얼굴로 고맙다고 말한 후 마루가 준 돈 만 원을 들고 대문으로 향하는데 마루가 졸도할 얼굴로 여운을 노려보다가 쫓아와서 붙잡았다. “어디 가는지 묻잖아.” “이연우 씨 만나러 가요.” “이연우는 왜?” “전화 왔거든요. 내 이삿짐 훔쳐 간 도둑놈의 흔적을 찾은 것 같다고.” 여운의 말에 마루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여운을 노려봤다. “걱정 말아요. 국수방에 대해서 절대 말 안 할 거니까.” “자신 있어?” “무슨 자신요?” “이연우가 국수방에 대해서 눈치챘을 경우 깨끗하게 조용히 덮어 버릴 자신.”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요.” “없다니!” “없어요! 없는 걸 어쩌라구요!” 여운이 당당하게 외치고는 마루의 손을 털어 내고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뛰어내리게 놔뒀어야 해! 그냥 묻어 버렸어야 한다고!” 약이 바짝 오른 마루가 분에 겨워 소리치는데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운이 마루를 죽일 듯 노려봤다. “다 들리거든요?” 여운의 외침에 마루는 재빨리 메주에게로 다가가 메주를 어루만져 주며 딴청을 피웠다. “조심해요. 내가 차마루 씨를 묻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여운이 무시무시한 협박을 남긴 후 대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와, 진짜 저런 독한 캐릭터는 처음이다.” 마루가 학을 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마루의 집을 나와 읍내로 나가기 위해 마을길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여운은 갑자기 알은척을 하는 한 남자 때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알은척을 한 남자는 바로 이장이었다. 쉰 살은 훌쩍 넘은 것 같은데 놀랍게도 마흔두 살 된 노총각 이장. “어? 기여운 씨 아인교.” 이장이 경운기를 멈추고 여운에게 알은척을 했다. “안녕하셨어요, 이장님.” “서울 간 줄 알았는데 또 왔는교?” “아직 도둑을 못 잡아서요.” 자세한 내용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한 국수방과의 약속 때문에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안직도 몬 잡았는교. 안직도 몬 잡았으면 그거는 글렀삤데이.” 이장의 말은 완벽한 진실이었다. 도둑을 못 잡는다는 말 말이다. 여운이야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고 있지만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못 찾을 이삿짐이고, 영원히 못 잡을 도둑놈이었다. 물론 국수방 특수 요원 차마루가 여운을 간첩으로 오인하지 않았다면 이삿짐을 도둑맞을 일도 없었겠지만. “그라마 어데서 지내는데요?” “차마루 씨 집에서요.” “차마루 씨? 그 친구가 즈그 집에 있으라 하든교? 와따, 차마루 그 친구 여운 씨한테 흑심이 있는갑네.” “흑심요? 흑심이 아니라 그게…….” 여운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다가 아주 좋은 수를 생각해 냈다. “하숙하기로 했어요. 하숙!” 여운은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낸 것을 아주 기특해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솔직히 마루가 자신에게 연필심만큼도 흑심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갑자기 부부가 됐어요 하는 건 진짜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달려오던 SUV 차량이 경운기 옆에 멈춰 서더니 운전자가 이장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장님.” 목소리가 참 고운 남자였다. 곱다고 해서 버터로 코팅한 듯 느끼함이 묻어나는 게 아니라 느끼함은 빼고 고소함만 느껴지는 목소리라고 할까? 하여튼 목소리가 고소하게 고운 남자는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이장과 여운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긴 기럭지의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폼이 꽤 깔끔하고 뭐랄까, 귀티가 폴폴 풍기는 그런 남자였다. 지적인 분위기에 목소리가 고소하게 고운 이 남자가 누구든 간에 이장과의 반갑지 않은 만남을 끝낼 수 있게 해 준 것이 고맙기만 했다. “오랜만이네예, 샘요.” 이장이 이장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샘이라고 인사를 했다. ‘학교 선생님인가? 시골 선생님치고는 훤칠하시네.’ 여운은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전 이만 갈게요.” 여운이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장이 여운을 붙잡았다. “잠깐 있어 보소. 샘요, 어디 댕겨 오싰는교? 요즘 안 보이시든데예.” “서울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어이쿠, 진짜 고운 목소리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관심이 1도 없는 이장과 시골 선생님의 대화를 들어 주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이고, 그랬구나. 요즘 작품은 우째 잘 돼 가시는교?” ‘작품? 뭔 작품?’ 샘이라고 해서 학교 선생님인 줄 알았더니 뭔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인 듯했다. 글을 쓴다거나, 그림을 그린다거나 어쩌면 작곡가일지도 몰랐다. “잘 안 풀려서 바람 쐬러 갔다 왔습니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이장과 샘이라는 남자가 대화를 하는 사이 여운은 다시 한 번 슬쩍 빠지기를 시도했다. “대화 잘 나누시구요, 그럼 전 이만…….” 여운이 이장에게서 도망치려 하는데 눈치 없는 이장이 또 여운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교. 우리 샘한테 인사 좀 하소.” 별로 인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이장이 억지로 인사를 시켰다. “이쪽은 기여운 씨라고 하고, 여기 계신 샘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조각가 샘입니데이.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샘이신데, 이 정 자 민 자, 이정민 조각가 샘. 알지요?” 이장이 물었고 여운은 순간 무식하게도 선생님의 이름이 ‘이정자민자’라 착각했다. 물론 몇 초 후 재빠르게 알아들은 여운은 난감한 얼굴로 이장과 이정민이라는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를 번갈아 쳐다봤다. 절대 모르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조각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정민이라는 조각가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장이 “알지요?”라고 묻는 바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모르는데 아는 척할 수도 없고, 모른다 하자니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이정민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 같고. “어……, 내가…… 죄송한데…… 조각을 잘 몰라서요…….” 여운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이 동네엔 예술가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추상화 그리는 화가에 조각가에.’ “몰라요? 서울 사람이 이정민 샘도 모른단 말인교? 어째 이정민 샘도 모르는교.” 황당하게도 이장이 여운에게 따져 묻더니 나무라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님을 못 알아봬서요.” 여운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비꼬는 듯이 말하자 정민이 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장님께서 많이 과장하신 겁니다. 전혀 유명하지 않습니다.” “안 유명하시다잖아요!” 여운이 이장을 째려보자 이장도 여운을 째려봤다. “억수로 유명하시거든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서울 사람이 이정민 샘도 모르는 게 자랑인교!” “자랑한 적 없거든요?” 여운과 이장이 서로를 째려보며 눈싸움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정민이 재빨리 끼어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만들 하시죠.” 정민이 고운 목소리로 중재를 하려 하는데 눈치 없는 이장이 또다시 쓸데없는 말로 여운의 속을 긁어 댔다. “샘요, 지난번에 부동산 사기당한 사람 말씀드맀지요? 전 재산 홀랑 다 까묵고 이삿짐까지 도둑맞았다는 더럽게 재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이 사람입니더.” 이장의 말에 여운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이장을 노려보자 정민이 당황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 예, 그분이군요…….” “네, 저예요. 더럽게 재수 없는 사람.” 여운이 이장을 노려보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더럽게 재수가 없어서 전 재산 다 털리고 살림살이까지 도둑맞고 그래서 이판사판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 바로 나예요!” 여운이 당장 한판 붙을 기세로 바락 소리치자 이장은 그제야 흠칫 놀라더니 슬그머니 경운기에 올라타고는 갑자기 엄청나게 바쁜 척하며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이정민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선 도망쳐 버렸다. 여운이 도망치는 이장을 쫓아가서 머리끄덩이라도 잡아챌 듯이 노려보는데 정민이 소심하게 여운을 불렀다. “기여운 씨라고 하셨죠?” “네! 그런데 왜요!” 이장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던 여운이 괜스레 죄 없는 정민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전 그냥…… 이곳에 오자마자 큰일을 당하셔서 속이 많이 상하셨겠다고…… 말씀드리려구요.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될 줄은 알지만 부동산 사기꾼도 빨리 잡고 도둑도 빨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귀티 나는 외모에 멋들어진 목소리를 가진 정민이 한 마디 한 마디 장인의 정신이 깃든 위로의 멘트를 던졌다. 그러자 여운은 그제야 자신이 처음 본 사람한테, 그것도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해서 머쓱한 얼굴로 정민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이장님한테 화가 난 건데…… 조각가 선생님한테 화풀이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장님께서…… 조금 눈치가 없으셨어요.” “맞아요. 이장님이 눈치가 없긴 하죠. 하지만 어쨌든 죄송해요. 그리고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솔직히…… 여기서 만난 사람들 전부 다 인심이 엄청 사납거든요. 이장님도 그렇고 차마루 씨도 그렇고.” “차마루 씨요? 아 참, 차마루 씨는 어떻게…….” “잠깐만요!” 여운은 순간 아찔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이 뭐라고? 이정민? 이정민!’ “왜 그래요?” 정민이 귀티 나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선생님 이름이…… 이정민…… 선생님이라고 했죠?” 여운은 심장에 와락 하고 두려움이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예. 맞아요.” ‘어머나. 이정민이래.’ “그럼, 저기, 저기 사시는 분이세요?” 여운이 자신이 채 실장에게 사기를 당했던 그 집을 조심스레 가리키며 물었다. “예, 맞아요.” ‘어머나……, 어쩜 좋아. 진짜 저 집에 사는 사람이래…….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사람이 바로…… 그 간첩?’ 여운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발가락 끄트머리까지 소름이 끼쳐 온몸에 오톨도톨 닭살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정민 조각가 선생님이 사는 집이…….”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말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여운 씨가 사기당했다는 그 집이 내 집이에요.” 정민이 다소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고, 여운은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었어! 진짜 간첩 이정민이야!’ 여운은 흡 하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간첩이라니……. 내가 간첩과 대화를 하고 있다니…….’ 여운은 귀티 나게 잘생긴 간첩이 아니라 귀티 나는 귀신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에 오싹 한기를 느끼며 괜스레 정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딱 봐도 수상한 표정으로 흘낏거리기 시작했다. ‘간첩이야, 간첩! 간첩이 이렇게 생겼구나……. 말도 안 돼. 내가 간첩과 대면을 하고 있다니……. 간첩이 이렇게 귀티 나게 잘생기다니…….’ “왜 그러세요?” “네? 내가…… 뭘요?” 여운은 띨띨하게 말까지 더듬었다. “갑자기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불편한 게 아니라 무서운 거야.’ “내가요? 그럴 리가요.” 여운이 누가 봐도 불편해서 미칠 지경인 얼굴로 전혀 불편하지 않은 척 대답했다. “많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요?” ‘그래, 많이 불편해. 많이 무서워……. 무서워서 오줌 쌀 것 같아……. 흑흑흑.’ “불편하다뇨, 전혀요. 내가 왜 불편하겠어요. 아하하하하.” 여운이 어색하게 웃기까지 하면서 딱 잡아뗐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이 눈에 환하게 보였다. “내가 불편하세요?” 이쯤 되면 억수로 유명한 조각가 정민이 그냥 적당히 모른 척해 주면 좋을 텐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여운은 이럴 땐 어떻게 무사히 받아쳐야 하는지 순간 난감했다. ‘당신이 간첩인데 내가 무슨 수로 안 불편하겠어?’ “불편…… 하네요. 그러니까 그게…… 왜 불편하냐면요…….” 더는 불편하지 않은 척할 수가 없게 된 여운은 일단 불편하다고 시인을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순간에 불편해진 것인지 그럴듯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이럴 땐 자동적으로 뇌가 빠릿빠릿하게 회전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뇌마저도 간첩이 무서운지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진짜 무서워요!’ 이런 정직한 대답 말고 정민이 깜빡 속아 넘어갈 완벽하게 교활한 이유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뇌에서 뽑아내야 했다. “그러니까 그게……,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홀랑 날려먹은 집의 주인을 직접 만나니까…… 괜히 머쓱하고 쪽팔리고 갑자기 열도 받고 그러는데 안 그런 척하려니까 힘도 들고…… 그러네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이정민 선생님도 기분이 안 좋겠지만…… 그러네요.” 기발하진 않지만 꽤 그럴듯한 이유라고 생각한 여운이 정민이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정민을 흘낏거리는데 정민이 미안한 얼굴로 여운을 바라봤다.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아요. 내가 괜히 미안하네요.” 정민이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여운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조각가 선생님이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죠. 그냥 내가 사기꾼한데 멍청하게 당한 게 괜히 뻘쭘해서 그런 거죠.” “많이 속상했겠어요.” “어디 속만 상했겠어요?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이놈들을 잡아다 모가지를 확!” 여운이 순간 흥분해서 순간 진심을 내뱉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간첩 앞에서 별소리를 다 지껄인다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그런다는 건 아니고, 그랬으면 좋겠다 뭐 그런 뜻이죠. 이놈들이 어디로 토꼈는지 알 수도 없지만…….” “그럼요.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죠. 나라도 대신 잡아다가 목을 비틀어 주고 싶네요.” 정민이 진심처럼 느껴지게 말했고 여운은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차마루 씨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그게, 차마루 씨와 저와의 악연은 얘기가 좀 복잡하고 길어요.” “악연? 악연이라뇨?” “진짜 악연이에요. 뭐 이런 악연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하여튼 얘기하려면 복잡하고 길어요.” 여운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간첩 이정민과 1초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시간 많아요.” “네?” ‘이 간첩이 왜 이러실까?’